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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침공에 반발해 크렘린을 떠난 러시아 외교관의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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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6일(현지시간) 모스크바 크렘린 궁에서 레오니드 파시크니크 루한스크 인민 공화국 수장과 만나고 있다. ⓒ AFP=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23.04.16 14:27

Foreign Affai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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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작년 5월 사직서를 제출한 러시아 외교관 보리스 본다레프가 세계적인 외교·안보 전문 매거진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 2022년 11·12월호에 기고한 글을 포린 어페어스와의 협약 하에 전문(全文) 번역으로 소개합니다.



3년 간 나의 일과는 늘 같은 방식으로 시작됐다. 오전 7시반에 일어나 뉴스를 확인하고 제네바에 있는 주유엔 러시아 대표부 사무실로 차를 끌고 간다. 일과는 쉽고 예측 가능했다. 러시아 외교관으로 산다는 것이 가진 특징이었다.


2월 24일은 달랐다. 전화기로 뉴스를 살피는데 놀랍고도 당혹스러운 소식과 맞닥뜨렸다. 러시아 공군이 우크라이나에 폭격을 가하고 있었다. 하르키우, 키이우, 오데사가 공격을 받고 있었다. 러시아군이 크림 반도에서 우크라이나 남부의 도시 헤르손으로 밀려 들고 있었다. 러시아 미사일이 건물을 돌무더기로 만들었고 주민을 떠돌이로 만들었다. 나는 영상에서 공습 경보 사이렌과 겹쳐진 폭발을 보았고 겁에 질려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보았다.


서방의 뉴스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소련 시대에 태어난 나는 도무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 걸 상상할 수가 없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긴밀한 친구로 여겨졌고, 같은 나라로서 독일과 맞서 싸웠던 역사를 비롯한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2차 세계대전 시절의 유명한 노래 가사를 떠올렸다. 소련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거의 다 아는 노래였다. "6월 22일 오전 4시 정각. 키이우가 폭격을 받았네. 우린 전쟁이 발발했다고 들었네."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러시아의 이웃으로부터 '나치를 내쫓기 위한 특수 군사작전'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 나치의 역할을 하고 있던 건 바로 러시아였다.


"종말의 시작이로군."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우린 이제 내가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때라는 데 동의했다.



사임이란 러시아 외교관으로서의 20년 커리어를, 그리고 많은 친구들을 버려야 함을 의미했다. 하지만 하루 아침에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내가 외무부에 들어갔던 2002년은 러시아가 그나마 개방적이었던 시기였고 우리는 다른 나라의 외교관들과 원만하게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러시아 외무부는 이미 심각한 결함을 갖고 있었다. 그때도 외무부는 비판적 사고를 억압하고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적대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나는 계속 외무부에 머물렀다. 내가 가진 권한으로 내 나라가 국제 무대에서 하는 행위를 완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내가 겪는 인지 부조화를 달랬다. 그러나 어떤 사건들은 이전에는 용인할 수 없었던 것들도 받아들이게 만든다.


우크라이나 침공은 러시아가 얼마나 잔혹하고 억압적인 국가가 됐는지를 부정하는 걸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웃을 예속시키고 그 민족적 정체성을 지워버리기 위해 고안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행위였다. 러시아 정부는 침공으로 어떤 반대파든 처단할 수 있는 핑계를 얻었다. 이제 정부는 우크라이나인들을 죽이기 위해 수천, 수만의 징집병들을 계속 보내고 있다. 이 전쟁은 러시아가 더는 단순히 독재적이고 공격적인 국가가 아닌, 파시스트 국가가 됐음을 보여준다.


(르비우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1일(현지시간) 르비우에서 러시아와 전쟁의 전사자 추모비를 찾아 헌화 후 참배하고 있다.   ⓒ AFP=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르비우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1일(현지시간) 르비우에서 러시아와 전쟁의 전사자 추모비를 찾아 헌화 후 참배하고 있다. ⓒ AFP=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그러나 내게 있어 이번 침공이 보여준 것은 내가 지난 20년간 지켜본 것과 관련이 있다. 바로 정부가 자기 자신의 프로파간다에 휘말려 천천히 뒤틀리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는가이다. 여러해 동안 러시아 외교관들은 미국 정부를 적대하고, 거짓말과 억측으로 자국이 외국에서 저지르는 일을 방어해왔다. 우리는 과장된 수사를 받아들이고 크렘린이 우리에게 하는 말을 다른 나라에게 무비판적으로 반복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이런 프로파간다의 최종 목표물은 외국 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우리 러시아의 지도부였다. 우린 외교 전문과 성명을 통해 크렘린에게 온 세상이 러시아의 위대함을 인정하고 서방의 주장을 물리쳤다고 보고해야 했다. 푸틴의 위험한 계획에 대해 어떠한 비판도 가하면 안됐다. 이러한 행위는 심지어 러시아 외무부의 최상부에서도 벌어졌다. 크렘린에 있는 내 동료들은 푸틴이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을 좋아하는 까닭은 언제나 대통령에게 '예스'만을 외치고 그가 듣고 싶어하는 말들만 해줘서 같이 일하기 "편하기" 때문이라고 내게 연거푸 말하곤 했다. 그렇다면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함락하는 데 별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한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예스맨들에게 둘러싸여내린 결정이 어떻게 파탄나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정복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러시아 정부가 솔직한 평가를 지도자에게 보고할 수 있게 돼 있었다면 푸틴도 우크라이나 정복이 불가능하리라는 걸 알았으리라. 군사 부문에서 일하고 있던 러시아 외교관들에게는 러시아군이 실제로는 서방이 두려워 하는 것만큼 강력하지 않다는 게 당연한 사실이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2014년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강제 병합한 후 서방이 러시아에 가한 경제 제재가 정치가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크렘린의 침공은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를 약화시키긴 커녕 되려 강화시켰고, 러시아의 경제를 위축시키기에 충분한 제재로 이어졌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파시스트 정권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지 경제적 이득을 주민들에게 주는 것으로 그리하지 않는다. 푸틴은 너무나 공격적이고 현실과 유리돼 있어 경기침체가 그의 행보를 막을 성싶진 않다. 푸틴은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이 약속한 위대한 승리를 원하며 자신이 그런 승리를 성취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가 휴전에 동의한다 할지라도 그저 러시아군에게 잠시간의 휴식을 줄 뿐이다.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승리하면 그는 몰도바 같은 과거 소련의 일부였던 또다른 국가를 공격할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이미 몰도바의 분리주의 지역을 지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독재자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만 남는다. 그것은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이 지난 4월 말한 것처럼 러시아를 "우크라이나 침공 같은 행위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화시키는" 것이다. 무리한 목표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러시아군은 이미 상당히 약화된 데다 최정예 병사의 상당수를 잃었다. 나토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으면 우크라이나는 북부에서 그렇게 했듯 동부와 남부에서도 러시아를 격퇴시킬 수 있다.


전쟁에서 패배할 경우 푸틴은 국내에서 위태로운 상황에 처할 것이다. 자국의 엘리트와 대중에게 왜 그들의 기대를 저버렸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죽은 군인들의 가족에게 왜 그들이 무의미한 죽음을 당했는지 말해야 한다. 그리고 푸틴은 계속되는 경제 제재 때문에 지금보다 더 악화된 상황 아래서 이 모든 것을 해야 한다. 푸틴이 이에 실패하여 대대적인 반발에 직면하고 권좌에서 물러날 수도 있다. 또는 다른 희생양을 찾다가 숙청의 대상이었던 보좌진들에 의해 타도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푸틴이 물러나게 되면 러시아는 과거의 영광에 홀리기를 멈추고 진정으로 재건을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소련에서 러시아로

나는 1980년 소비에트 지식층의 중산층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러시아 통상부 소속의 경제학자였고, 어머니는 모스크바 국립국제관계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소총 사단을 지휘했고 나중에는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부여받은 장군의 딸이었다.


우린 2차 대전 후 국가가 할아버지에게 준 모스크바의 커다란 아파트에서 살았고 대부분의 소련 사람들이 갖지 못했던 기회들을 누렸다. 아버지가 소련-스위스 합작기업에 자리를 얻은 덕에 우리 가족은 1984년과 1985년 스위스에서 살 수 있었다. 부모님에게 그때의 경험은 큰 변화를 가져왔다. 부유한 나라에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소련에서는 볼 수 없었던 높은 수준의 치과 진료나 수퍼마켓의 카트 같은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계기였다.


경제학자로서 아버지는 이미 소련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유럽에서 살아보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소련 체제에 대해 더 깊은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시작했을 때 부모님은 기뻐했다. 대부분의 소련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의 상점에서 살 수 있는 물품들이 (신고 있으면 발이 아픈 신발 같이) 그 종류도 적고 품질이 낮다는 걸 깨닫는 데 반드시 서유럽에서 살아볼 필요는 없었다. 소련 주민들은 정부가 전 세계의 '진보적 인류'를 선도하고 있다고 주장했을 때 정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많은 소련 시민들은 소련이 시장경제로 전환하게 되면 서방이 자국을 도우리라 여겼다. 그러나 그런 희망은 순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서방은 많은 소련 주민들이 (그리고 몇몇 저명한 미국 경제학자들이) 거대한 경제적 난관을 돌파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한 규모의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서방은 크렘린이 가격 통제를 포기하고 급속도로 국가 자원을 민영화하도록 부추겼다. 소수의 인물이 공공 영역의 자산을 나꿔채면서 극도로 부유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소위 말하는 '충격 요법'으로 빈곤을 겪었다. 물가는 미친듯 상승했고 평균 기대수명은 하락했다. 민주화 과정을 겪은 건 사실이지만 대부분은 새로운 자유를 극도의 빈곤과 동일시했다. 그 결과 러시아 내에서 서방에 대한 인식은 급격히 저하됐다.


(올렉산드리우카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28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가 탈환한 헤르손 인근의 올렉산드리우카의 파괴된 학교의 벽에 구 소련 시기의 모자이크가 보인다.  ⓒ AFP=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렉산드리우카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28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가 탈환한 헤르손 인근의 올렉산드리우카의 파괴된 학교의 벽에 구 소련 시기의 모자이크가 보인다. ⓒ AFP=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1999년 세르비아에 대한 나토의 공습은 그 인식을 또다시 저하시켰다. 러시아의 입장에서 그 공습은 세르비아 내부의 알바니아계 소수 민족을 보호하기 위한 작전이라기보단 서구 열강이 소국을 부당하게 공격하는 것으로 비쳤다. 성난 군중이 모스크바의 미국 대사관을 공격한 다음날 그곳을 지나면서 벽에 흩뿌려진 페인트 자국을 본 게 아직도 눈에 선하다.


중산층 부모의 자식으로서(아버지는 1991년 공직을 떠나 작은 사업을 시작해 성공적으로 영위하고 있었다) 나는 이 혼돈의 10년을 대체로 간접적으로 경험했다. 나의 십대 시절은 안정적이었고 나의 미래는 꽤나 예측 가능해보였다. 나는 어머니가 교편을 잡았던 대학교에 입학했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국제 부문에서 일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러시아 내의 담론이 개방적이었던 시기에 학업을 시작했던 것은 내게 큰 도움이 됐다. 교수들은 과거에는 금지돼 있던 것을 포함한 다양한 문헌을 읽도록 권했다. 수업에서 우린 토론도 했다. 2000년 여름, 나는 인턴 자리에 뽑혀 외무부 청사로 신나게 걸어들어갔다. 내게 세상에 대해 알려줄 커리어를 시작할 준비가 돼 있었다.


외무부에서의 경험은 나를 낙담시켰다. 소련 영화에서 늘상 보던 멋진 정장을 입은 유능한 엘리트가 아닌, 고위급을 위한 발언 요지 메모 따위 같은 멋대가리 없는 업무를 게으르게 수행하던 피로에 찌든 중년의 상사들과 일했다. 사실 그들은 대체로 거의 일을 하지 않는 듯했다. 모여앉아 담배를 피우며 신문을 읽거나 주말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내가 외무부 인턴으로서 한 일은 그들에게 신문을 가져다주거나 간식을 사오는 게 대부분이었다.


어쨌든 나는 외무부에 들어가기로 했다. 내 힘으로 돈을 벌고 싶었고 또한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여행하면서 다른 세상에 대해 익히고 싶었다. 2002년, 캄보디아 주재 러시아 대사관의 초급 서기관으로 뽑혔을 때 나는 기뻤다. 동남아시아에 대해 공부했던 것과 크메르어 실력을 활용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었다.


캄보디아가 러시아의 핵심 이익에 관계된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외국에서 산다는 것은 모스크바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러시아 바깥에 배속되는 외교관은 국내에 배속되는 외교관보다 돈을 훨씬 더 많이 받았다. 대사관 내 서열 2위였던 비아체슬라프 루키아노프는 자유로운 토론을 좋아했으며 내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길 권장했다. 당시 서방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대체로 온화했다. 러시아 외무부는 언제나 반미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지만(소련 시절에 물려받은 것이다) 편견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동료들과 나는 나토에 대해 많이 생각하진 않았지만 나토에 대해서도 보통 하나의 파트너 정도로 생각하곤 했다. 어느날 저녁에는 같은 대사관 직원과 함께 맥주를 마시러 지하의 술집에 갔는데 그곳에서 미국 정부 관계자와 마주쳤다. 그는 함께 술을 마시자고 권했다. 지금이라면 긴장이 넘치는 상황이었겠지만 당시에는 새로운 우정을 다질 기회였다.


하지만 루키아노프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에도 러시아 정부에 독립적인 사고를 억제하는 문화가 자리잡고 있었음은 확연했다. 하루는 대사관 서열 3위의 호출을 받았다. 그는 소련 시절 외무부에 들어온 말수 적은 중년의 외교관이었다. 그는 내게 모스크바에서 온 전문을 주고 캄보디아 정부에 보낼 문서에 그 내용을 포함시키라고 지시했다. 전문에서 오자를 발견한 나는 이를 교정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마!" 그는 바로 쏘아붙였다. "모스크바에서 바로 받은 걸세. 그들이 더 잘 알겠지. 오류가 있다손치더라도 중앙에서 온 것을 교정하는 게 우리 일은 아닐세." 외무부 내에 점차 커져가는 추세, 바로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바흐무트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15일(현지시간) 러시아의 침공 속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바흐무트 숲에서 병사들이 휴식을 하고 있다.  ⓒ AFP=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바흐무트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15일(현지시간) 러시아의 침공 속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바흐무트 숲에서 병사들이 휴식을 하고 있다. ⓒ AFP=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의 장막

러시아에게 21세기의 첫 10년은 희망적이었다. 국가의 평균 소득 수준이 증대되고 있었고 생활 수준도 그랬다. 새천년이 시작되던 때 대통령직에 오른 푸틴은 1990년대의 혼돈을 종식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럼에도 많은 러시아인들이 2000년대에 푸틴에게 피로감을 느꼈다. 많은 지식인이 그의 독재자 이미지를 달갑지 않은 구시대의 유물로 여겼고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 부패 의혹이 줄을 이었다. 푸틴은 자기 정부에 대한 언론의 탐사에 대해 언론 탄압으로 대응했다. 푸틴이 첫 임기를 끝마칠때쯤, 그는 러시아의 3대 텔레비전 방송사 모두를 사실상 장악했다.


하지만 외무부에서 푸틴의 초기 행보는 그리 큰 우려를 낳지 않았다. 그가 2004년 라브로프를 외무장관으로 임명했을 때 우리는 모두 환호했다. 라브로프는 매우 지적이고 외교 경험이 풍부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고 외국 관계자들과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푸틴과 라브로프 모두 점차 나토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지만 그 행동의 변화는 미묘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외교관들이 이를 거의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정부가 푸틴의 제국주의적 계획, 특히 우크라이나에 대한 계획의 초석을 놓고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우크라이나에서 부정이 의심되는 선거로 당선된 친 러시아 성향 후보의 대통령 취임을 수십만의 시위대가 저지했던 2004년 오렌지 혁명 이후 크렘린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집착하기 시작했다. 크렘린의 집착은 러시아 주요 방송사들의 취재에도 반영돼, 우크라이나 당국이 러시아 혐오 성향을 갖고 있다는 보도를 황금시간대에 방영하기 시작했다. 이후 16년간,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까지 러시아인들은 뉴스에서 우크라이나가 미국의 조종을 받는 사악한 국가이며 자국 내의 러시아어 사용 주민들을 탄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왔다. (푸틴은 국가들이 서로 협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게 불가능했던 것 같다. 그는 나토 회원국을 비롯하여 미국 정부와 밀접한 국가들 대부분이 실은 미국의 꼭두각시라고 여긴다.)


한편으로 푸틴은 국내에서 자신의 권력을 다지고 있었다. 러시아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2회로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푸틴은 2008년 자신의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한 책략을 꾸몄다. 정치적 동맹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자신을 국무총리로 지명해줄 것을 약속하면 메드베데프를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약속대로 움직였고, 메드베데프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몇주간은 둘 중 누구에게 보고를 보내야 할지 외무부에서도 고민이었다. 대통령으로서 메드베데프는 헌법상 외교 전권을 행사할 권한을 갖는다. 하지만 다들 진정한 권력자는 푸틴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모스크바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가 15일(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내각 총사퇴 결정을 발표하기 앞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 AFP=뉴스1

(모스크바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가 15일(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내각 총사퇴 결정을 발표하기 앞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 AFP=뉴스1


우린 결국 메드베데프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이 결정을 비롯한 다른 사건들을 겪고 나서 나는 메드베데프가 단순한 직무대행 이상의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메드베데프는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고, 미국의 재계 인사들을 만나고 심지어는 러시아의 국익에 반하는 것으로 보일 때에도 서방과 협력했다. 예를 들어, 리비아에서 반군이 무아마르 카다피의 정권을 전복시키려 했을 때 러시아군과 러시아 외무부는 리비아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려는 나토의 노력에 반발했다. 카다피는 역사적으로 러시아 정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러시아는 리비아의 석유 산업에 투자를 많이 한 상태라 외무부는 반군이 승리하길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 레바논, 영국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리비아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는 결의안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했을 때, 메드베데프는 우리에게 거부권을 행사하는 대신 표결에서 기권하도록 했다. (푸틴이 이러한 결정에 반대했을 수 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2011년, 푸틴은 다시 대선에 나올 계획을 발표했다. 메드베데프는 (내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연임을 포기하고 국무총리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진보 성향의 시민들은 격분해 선거를 보이콧하거나 일부러 무효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러시아 국민의 극소수에 불과했으므로 이들의 반발이 푸틴의 계획에 심각한 위협이 되진 못했다. 그러나 미미한 형태로든 반발이 눈에 띄자 정부는 초조해진 듯했다. 그리하여 푸틴은 2011년 의회 선거의 투표율을 높여 그 결과를 보다 정당하게 보이게끔 만들고자 노력했는데 이는 자신의 통치와 국민들 사이의 정치적 공간을 좁히려는 초기 시도 중 하나였다. 이러한 노력은 외무부에도 영향을 미쳤다. 크렘린은 내가 있던 대사관을 비롯한 다른 모든 대사관에게 국외에 있는 러시아 시민들의 투표를 독려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때 나는 몽골에서 일하고 있었다. 선거날이 됐을 때 나는 내가 아예 투표를 하지 않으면 푸틴의 통합러시아당에 투표한 것으로 집계될까 우려돼 야당에 투표했다. 그러나 대사관에서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던 내 아내는 선거를 보이콧했다. 그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단 세 명의 대사관 직원 중 하나였다.


며칠이 지나고 대사관 지도부가 선거날에 투표한 직원들의 명단을 확인했다. 호출을 받은 다른 두 명의 기권자들은 투표를 해야만 하는지 몰랐으며 다음번 대통령 선거에는 꼭 투표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내 아내는 투표를 하고 싶지 않았으며 투표에 참가하지 않는 것 또한 헌법상의 자신의 권리라고 말했다. 그러자 대사관 서열 2위는 내 아내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는 아내에게 소리를 지르고 아내가 규율을 어겼다고 비난했으며, 아내가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꼬리표가 붙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 아내가 저명한 야당 인사 알렉세이 나발니와 '한통속'이라고 표현했다. 내 아내가 대통령 선거에도 투표하지 않자 대사는 일 주일동안 내 아내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부대사는 한 달 넘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균열

내 다음 자리는 외무부의 비확산·군비통제과였다. 대량살상무기 관련 사안과 더불어 수출통제 업무도 맡았다. 수출통제란 민간 부문의 목적과 군사 부문의 목적 양쪽으로 사용 가능한 물품과 기술의 국제적 이동을 통제하는 규제를 말한다. 러시아의 군사력에 대해 보다 명확한 시야를 제공해줄 직무였다.


2014년 3월, 러시아는 크림 반도를 병합하고 돈바스 지역에 반란을 사주하기 시작했다. 크림 반도 병합 소식이 발표됐을 때 나는 두바이에서 열린 국제수출통제 컨퍼런스에 있었다. 점심 시간이 됐을 때, 과거 소련 소속 국가들의 외교관들이 나를 찾아왔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저도 여러분들이 아는만큼 밖에 모릅니다." 러시아 정부는 이후에도 자국 외교관에겐 알리지도 않고 중대한 외교 정책 결정을 내리곤 했다.


크림 반도 병합에 대한 동료 외교관들의 반응은 긍정적인 것부터 양가적인 것까지 다양했다. 우크라이나는 점차 서방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크림 반도는 푸틴의 기괴한 역사관이 어느 정도 근거를 갖는 몇 안되는 지역이었다. 크림 반도는 소련 시절이던 1954년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 이관된 지역이며 문화적으로도 키이우보단 모스크바에 가까웠다. (크림 주민의 75% 이상이 러시아어를 제1언어로 사용한다.) 신속한 무혈 입성은 우리 내부에서도 별다른 반발을 일으키지 않았고 국내에서는 매우 높은 인기를 얻었다. 라브로프는 이를 쇼를 위한 절호의 찬스로 여기고 러시아의 크림 반도 병합이 우크라이나의 "극단적 민족주의 세력"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연설에서 주장했다. 나를 비롯한 많은 러시아 외교관들은 푸틴이 크림을 독립국가로 만드는 게 전략적으로 더 올바른 선택이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보다 덜 공격적인 행동으로 선전할 수 있었을테니까. 그러나 푸틴의 사전에 미묘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독립된 크림 반도는 푸틴에게 "전통적인" 러시아 영토를 수복한다는 영광을 주지 못했으리라.


우크라이나 동부의 돈바스 지역에 분리주의 운동을 일으키고 이후 돈바스 지역을 점령한 것은 더 이해하기 어려웠다. 주로 2014년 초반에 벌어진 이러한 행위는 크림 반도 병합 때만큼의 지지를 국내에서 얻어내지 못했을 뿐더러 또다른 국제적 비난을 초래했다. 많은 외교부 직원들이 러시아의 군사 작전 때문에 초조해했지만 누구도 이러한 불편함을 크렘린에 전달할 엄두를 내진 못했다. 동료들과 나는 푸틴이 우크라이나의 주의를 분산시켜 러시아에 심각한 군사적 위협을 만들지 못하게 하고 나토와의 협력을 중단시키기 위해 돈바스를 점령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누구도 푸틴에게 그가 분리주의를 사주함으로써 실상은 우크라이나 정부를 푸틴의 숙적인 나토에 보다 가까워지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꺼낼 엄두를 내진 못했다.


(바흐무트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22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바흐무트 전선에서 병사들이 러시아 군을 향해 BMP 보병 전투 차량을 이동하고 있다.  ⓒ AFP=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바흐무트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22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바흐무트 전선에서 병사들이 러시아 군을 향해 BMP 보병 전투 차량을 이동하고 있다. ⓒ AFP=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크림 반도 병합과 돈바스 작전 이후에도 나는 서방의 대표단들과 외교 업무를 계속했다. 때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여전히 미국과 유럽의 외교관들과 군비통제 사안에 대해 협력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경제 제재를 받았지만 러시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제재는 초조함의 징후입니다." 라브로프는 2014년 인터뷰에서 말했다. "진지한 정책을 위한 도구는 못 됩니다."


하지만 수출통제 담당관으로서 나는 서방의 경제 제재가 러시아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는 걸 볼 수 있었다. 러시아의 방위산업은 서방에서 생산한 부품과 제품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드론의 엔진과 모터를 정비하는 데 미국산, 유럽산 장비를 사용했다. 러시아가 정보 수집, 통신, 정밀 타격을 실시하는 데 사용하는 인공위성에는 방사능을 견딜 수 있는 전자 장비가 필수였는데 러시아는 이러한 장비 생산을 서방에서 들여온 도구에 의존하고 있었다. 러시아 방산업체들은 비행기에 필요한 센서를 프랑스 기업의 도움을 받아 만들고 있었다. 심지어 기상관측용 열기구에 사용하는 직물도 서방에서 수입하는 것이었다. 경제 제재로 이런 제품들에 대한 접근권이 일순 상실됐고 러시아군은 서방이 아는 것보다 훨씬 취약해졌다. 우리 팀은 이러한 손실이 러시아의 국력을 얼마나 쇠퇴시켰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외무부의 프로파간다 덕분에 크렘린은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이러한 무지가 어떠한 결과로 이어졌는지는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이 잘 보여주고 있다. 경제 제재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많은 문제를 겪고 있는 원인 중 하나다.


위축되는 군사력도 외무부가 점차 호전적으로 변하는 걸 막진 못했다. 정상회담이나 다른 나라 외교관들과의 만남에서 러시아 외교관들은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미국과 그 동맹을 공격하는 데 사용했다. 한 예로 내가 속했던 수출통제 팀은 일본과 수출통제 협력 관련으로 많은 양자 회담을 가졌는데 우리 팀원 대부분은 그때마다 일본에게 "너희 나라에 핵폭탄을 떨어뜨린 게 누군지 잊지 마라"는 말을 해댔다.


나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애썼다. 상관들이 호전적인 표현이나 보고서를 쓰면 나는 어조를 보다 누그러뜨리도록 설득했고 전투적인 표현이나 나치에게 승리했던 과거를 줄창 강조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우리 발표문의 어조는 (대내적, 대외적을 가리지 않고) 보다 적대적으로 변했다. 소련 시절의 프로파간다가 러시아 외교에 완전히 돌아온 것이다.

스스로에 취해버린 프로파간다

2018년 3월 4일, 전직 러시아 이중 첩자였던 세르게이 스크리팔이 영국에 있는 자택에서 딸 율리아와 함께 독극물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을 뻔했다. 영국의 당국이 러시아를 용의자로 지목하는 데 열흘 밖에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 나는 당국의 발표를 믿지 않았다. 러시아의 스파이였던 스크리팔은 영국 정부에 국가 기밀을 누설한 죄로 수년간 징역을 살았고 이후 스파이 맞교환을 통해 석방됐다. 그런 상황에서 왜 러시아가 스크리팔에 관심을 갖겠는가. 만약 정부가 스크리팔을 죽이고 싶었다면 그가 러시아에서 수감되던 동안에 충분히 죽이고도 남았다.


나의 의혹은 유용하게 쓰일 수 있었다. 화학 무기 관련 사안은 우리 부서의 소관이었기 때문에 우린 러시아가 독극물 공격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데(나도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었다) 많은 시간을 들였다. 우린 독극물 공격이 러시아를 혐오해 러시아의 드높은 국제적 위상에 흠집을 내려는 영국 당국이 저지른 일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영국이 스크리팔을 죽이고 싶어할 이유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의 주장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기보단 세간의 주의를 러시아가 아닌 서방으로 돌리려는(크렘린 프로파간다의 주된 목적이다) 조악한 시도처럼 보였다. 결국 나는 독극물 공격이 러시아 당국이 저지른 범죄라는 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많은 러시아인들은 여전히 그 사건이 러시아 정부가 저질렀음을 부인한다. 복수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범죄자들이 자기 나라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러시아의 거짓말은 다른 나라들을 설득시키지 못했다. 러시아는 화학무기금지기구(OPCW)가 공식 조사에 들어가기 전에 자국의 결의안을 채택시키려고 했지만 많은 나라들의 반대로 부결됐다. 러시아의 편을 들어준 건 오직 알제리, 아제르바이잔, 중국, 이란, 수단 뿐이었다. 물론 OPCW의 조사는 스크리팔 부녀는 러시아제 신경작용제 노비초크에 중독됐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러시아 대표단은 상부에 솔직하게 패배를 보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정반대를 저질렀다. 모스크바에서 나는 러시아의 OPCW 대표단이 보낸 긴 전문을 읽었다. 대표단이 어떻게 서방 국가들의 "반 러시아적"이며 "엉터리"이고 "근거 없는" 시도를 격파했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러시아가 제시한 결의안이 부결됐다는 사실은 단 한 문장으로만 언급됐다.


처음에 이런 전문 보고들을 읽었을 때는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곧 외무부의 고위급들이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런 소설을 쓰는 외교관들은 상사에게 박수를 받고 관운이 틔게 된다. 정부는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닌 자신들이 사실이라고 믿고 싶은 것을 듣길 원했다. 모든 지역의 대사들이 이를 깨닫자 가장 과장된 내용의 전문을 보내기 위해 경쟁하기 시작했다.


=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15일(현지시간) 전 러시아 스파이 세르게이 스크리팔 부녀에 대한 암살시도 사건이 발생한 솔즈베리를 방문해 윌트셔 경찰청장과 함께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 AFP=뉴스1

=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15일(현지시간) 전 러시아 스파이 세르게이 스크리팔 부녀에 대한 암살시도 사건이 발생한 솔즈베리를 방문해 윌트셔 경찰청장과 함께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 AFP=뉴스1


2020년 8월 나발니가 노비초크에 중독된 사건이 발생하자 프로파간다는 한층 더 기괴해졌다. 난 외교 전문들의 내용에 경악했다. 한 전문은 서방의 외교관들을 두고 "쫓기고 있는 육식동물"이라고 표현했다. 다른 전문은 "우리 주장의 무게감과 반박불가능성"에 대해 예찬했고, 또다른 전문은 서방의 "문제를 제기하려는 한심한 시도"를 러시아 외교관들이 어떻게 "손쉽게 미연에 방지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이런 행위는 프로답지 못함과 동시에 위험한 일이다. 건전한 외교 부처라면 세계에 대해 솔직한 시각을 제공해서 지도자가 적절한 정보에 근거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러시아 외교관들은 상사들의 지적을 피하기 위해 보고서에 불편한 진실을 담기는 한다. 그러나 한 움큼의 진실은 거대한 프로파간다의 산에 파묻히곤 한다. 2021년의 전문 중 하나를 예로 들어보면, 우크라이나 군대가 2014년에 보다 더 강력하다는 내용이 한 줄 담겨 있기는 하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군사력을 인정하는 이 대목은 강대한 러시아군에 대한 찬양이 길게 이어진 후에 비로소 등장한다.


러시아 외무부의 인식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2022년 1월이 되자 더욱 악화됐다. 당시 나토 재정비를 위해 러시아 정부가 제안한 협정을 논의하기 위해 미국과 러시아의 외교관들이 제네바의 주유엔 미국 대표부에서 만났다. 러시아 외무부는 러시아가 주장하는 나토의 위험성에 대해 점점 더 매몰되고 있었고, 우크라이나 국경에는 러시아군이 집결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 회담에서 러시아 대표단과 제네바의 주유엔 러시아 대표부 사이를 연결하는 연락관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러시아측 제안서 사본을 받았다. 그 내용은 당혹스러웠다. 1997년 이후 나토에 가입한 불가리아, 체코, 폴란드, 발트 3국 등의 국가에서 나토의 모든 병력과 무기를 철수한다는 등, 서방에서 받아들일 수 없을 게 분명한 요구로 가득했다. 나는 제안서를 작성한 자가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명분 쌓기를 하고 있거나 혹은 미국이나 유럽연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전혀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쉬는 시간에 우리 대표단과 대화를 해봤는데 그들 또한 당혹한 모습이었다. 내 상사에게도 러시아측 제안서에 대해 물어봤는데 그 또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나토가 앞으로 새로운 회원국을 절대 받아들이면 안된다는 등의 내용이 든 문서를 가지고 미국과 어떻게 협상을 해야할지 아무도 몰랐다. 마침내 우리는 해당 문서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게 됐다. 크렘린에서 바로 보내온 문서였다. 때문에 아무도 토를 달 수 없었다.


나는 동료 외교관들이 그저 혼란스러워하지만말고 은밀하게라도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우려를 표하지 않을까 희망했다. 그러나 많은 동료들이 크렘린의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고 했다. 몇몇에게는 그것이 러시아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을 테니까. 그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보다 더 난감했던 것은 많은 동료들이 점차 호전적으로 변하고 있는 러시아의 행위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었다. 동료들에게 그들의 행동이 너무 거칠어 러시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경고했을 때, 그들은 종종 러시아의 핵 전력을 가리켰다. "우린 강대국이야." 한 동료가 내게 한 말이다. 그는 다른 나라들이 "우리가 하라는대로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카시라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23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전쟁 1년을 앞두고 러시아 모스크바 인근 카시라의 아파트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 AFP=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카시라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23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전쟁 1년을 앞두고 러시아 모스크바 인근 카시라의 아파트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 AFP=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헤어질 결심

지난 1월의 정상회담 이후에도 나는 푸틴이 전면전을 벌이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2022년의 우크라이나는 2014년 때보다 확실히 보다 단합돼 있었고 더 서구 지향적이었다. 누구도 러시아를 환영하지 않을 것이었다. 서방은 러시아의 침공 가능성에 대해 매우 전투적인 내용의 성명을 냈는데 이는 미국과 유럽이 강력하게 대응할 것임을 분명히 보여줬다. 무기 및 수출통제 분야에서 일하면서 나는 러시아군이 인접 유럽 국가 중 가장 큰 우크라이나를 제압할 능력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벨라루스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나라도 의미있는 지원을 해줄 리 없었다. 비록 푸틴이 진실을 가로막는 예스맨들의 인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더라도 그도 이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외교관을 그만둬야겠다는 나의 결심에 윤리적 문제를 말끔히 지워버렸다. 그러나 이를 실제로 실행하기란 여전히 어려웠다.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아내는 마침 모스크바에 있던 산업협회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나와 함께 제네바에 있었다. 공개적으로 외교관을 그만둔다는 것은 나나 내 아내나 둘 다 러시아에서 무사하지 못할 것임을 의미했다. 그래서 아내는 내가 사직서를 내기 전에 모스크바로 돌아가 우리가 키우는 고양이를 데려오기로 했다. 하지만 고양이를 데려오는 데는 석 달이나 걸렸다. 어린 길고양이었던 녀석을 스위스로 데려오려면 중성화 수술과 백신 접종을 마쳐야 했다. 그리고 유럽연합은 전쟁이 발발하자 서둘러 러시아발 비행기의 착륙을 금지시켰다. 모스크바에서 제네바로 돌아오기 위해 아내는 항공기 세 편을 갈아타고 두 번 택시를 탄 후 리투아니아 국경을 걸어서 두 차례나 건너야 했다.


그동안 나는 동료들이 푸틴의 목표에 굴종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전쟁 초기에는 대부분 어떤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드디어! 이제 미국놈들에게 누가 진짜 보스인지 보여줄 수 있겠군!" 한 동료의 반응이었다. 몇주가 지나고 키이우를 향한 전격전이 실패했다는 게 분명해지자 동료들의 어조는 점차 어두워졌다. 하지만 호전성은 여전했다. 탄도미사일에 대한 전문가로 존경받는 한 외교관은 내게 러시아가 "워싱턴 교외에 핵탄두를 떨궈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놈들은 바지에 똥을 지리면서 우리에게 살려달라고 빌 걸세." 어느 정도는 농담으로 하는 말처럼 보였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은 미국인들이 무언가에 목숨을 걸기에는 너무나 제멋대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핵공격을 하면 미국이 처절하게 보복할 것이라고 지적하자 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냐, 안 그럴 거야."


수십명 가량의 외교관들이 조용히 외무부를 떠났다. (아직까지 공개적으로 그만둔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 하지만 이성적이고 명석하다고 생각했던 동료들의 대부분은 그대로 외무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한 동료는 반문했다.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그냥 일개 공무원인데." 그는 합리화하기를 포기했다. "모스크바에 있는 사람들이 더 잘 알겠지." 다른 동료들은 사석에서 얼마나 무모한 상황인지를 인정했지만 그들의 업무에는 그런 인식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 우크라이나의 불법 행위에 대한 거짓말을 쏟아냈다.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우크라이나의 생물학 무기에 대한 일일 보고를 봤다. 대표부 청사 안을 걷다 보면 (외교관들의 개별 사무실 때문에 상당히 긴 복도가 있다) 유능한 동료들도 하루 종일 텔레비전에 러시아 프로파간다를 틀어놓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마치 스스로를 세뇌시키려는 것 같았다.


러시아 외교관 업무의 성격도 변화를 피할 수 없었다. 서방 외교관들과의 관계가 무너졌다. 서방 외교관들과 거의 모든 것에 대해 논의를 중단했다. 몇몇 유럽 외교관들은 유엔의 제네바 본부에서 우리를 마주칠 때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우리는 중국과의 관계에 집중했다. 중국은 러시아의 안보 우려에 대한 "이해"를 표했지만 전쟁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또한 우리의 상사들이 러시아판 나토라고 부르곤 하는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회원국인 아르메니아,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과 더 오랜 시간 어울렸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우리 팀은 이들 국가와 생물학 무기와 핵 무기에 대한 논의를 여러 차례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한 중앙아시아 외교관과 우크라이나에 있다는 생물학 무기 실험실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나도 동의했다.


몇 주 후, 나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마침내 이웃국가를 복속할 수 있는 신적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체제의 하수인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삭체아 로이터=뉴스1) 우동명 기자 = 9일(현지시간) 루마니아 이삭체아 국경 검문소에서 러시아의 침공을 피해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이 페리선으로 도착을 하고 있다.  ? 로이터=뉴스1

(이삭체아 로이터=뉴스1) 우동명 기자 = 9일(현지시간) 루마니아 이삭체아 국경 검문소에서 러시아의 침공을 피해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이 페리선으로 도착을 하고 있다. ? 로이터=뉴스1

충격과 공포

우크라이나 전쟁을 겪으면서 서방의 지도자들은 러시아군의 약점을 분명히 인식하게 됐다. 하지만 러시아의 외교도 마찬가지로 망가져 있다는 건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여러 유럽 국가 관계자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해결하기 위해 협상이 필요하며 만일 자기네 나라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면서 발생하는 에너지 및 경제적 비용에 지치게 될 경우 우크라이나가 휴전에 동의하도록 압박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만일 푸틴이 핵 무기를 사용하겠다고 공격적으로 협박할 경우, 서방은 우크라이나의 등을 떠밀어 휴전을 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푸틴이 권력을 쥐고 있는 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정부의 그 누구와도 진정한 의미의 협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러시아 외무부는 신뢰할 수 있는 대화 상대가 아니며 다른 어떤 러시아 정부 기관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푸틴과 그의 제국주의적 계획의 연장일 뿐이다. 그 어떠한 휴전도 러시아가 침공을 재개하기 전, 전열을 가다듬을 기회만 줄 뿐이다.


진정으로 푸틴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뿐이다. 바로 완전한 패퇴다. 크렘린은 자국민에게 어떠한 거짓말이든 할 수 있고 러시아 외교관에게 어떤 거짓말이든 시킬 수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군인은 러시아 국영 방송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9월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크라이나가 하르키우 지역의 대부분을 수복하면서 러시아의 패배가 언제까지나 러시아 국민들에게 감춰질 수 없다는 게 분명해졌다. 그러자 러시아의 TV 출연자들은 러시아의 손실을 두고 한탄했다. 온라인에서는 그 반응이 더했다. 강경파들은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수십억 루블 짜리 파티를 벌이고 있다니 당신은 대체 제 정신인가?" 러시아군이 퇴각하는 동안 모스크바에서 유럽 최대 규모의 대관람차 공개 행사에 참석한 푸틴을 비난한 글은 온라인에서 널리 유포됐다.


전쟁의 손실(그리고 국내의 비판)에 푸틴은 엄청난 인원에 대한 동원령을 내림으로써 대응했다. (정부는 30만 명을 동원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 인원은 그보다 많을 수 있다.) 그러나 동원령이 장기적으로 푸틴의 문제를 해결하진 못할 것이다. 러시아군은 낮은 사기와 허우대만 멀쩡한 장비로 고생하고 있는데 둘 다 동원령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다. 서방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으면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에게 더 큰 패배를 안기고 다른 지역으로 퇴각하도록 만들 수 있다. 2014년부터 양측이 전투를 벌이고 있던 돈바스 지역에서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격파하는 것도 가능하다.


(모스크바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6일 (현지시간) 모스크바의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에서 열린 정교회 부활절 예배에 참석해 촛불을 들고 있다.   ⓒ AFP=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모스크바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6일 (현지시간) 모스크바의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에서 열린 정교회 부활절 예배에 참석해 촛불을 들고 있다. ⓒ AFP=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만일 러시아군이 돈바스에서 쫓겨나면 푸틴은 궁지에 몰리게 된다. 러시아군의 패배에 핵공격으로 대응할 수도 있다. 그러나 푸틴은 자신이 누리는 호화로운 삶을 좋아하며 핵무기를 사용하게 되면 자기 자신조차 죽을 수 있는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만일 푸틴이 그걸 모른다면 그의 수하들이라도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 핵공격 명령에 불응하길 바라야 할 것이다.) 푸틴은 전면적인 동원령을 내려 러시아의 모든 젊은 남성들을 징집할 수도 있지만 이는 단기적인 처방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더 많은 러시아 청년들이 전장에서 죽을수록 푸틴이 직면해야 하는 국내의 불만도 커진다. 푸틴이 결국 군대를 철수시키고 (하르키우의 패배 후에 그랬듯) 자신의 수하 몇몇을 희생양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푸틴의 측근들에 대한 숙청으로 이어질 수 있고 그의 측근들이 푸틴을 계속 지지하는 것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 그 결과 1964년 니키타 흐루쇼프가 실각한 이래 모스크바에서 최초의 궁중 쿠데타가 발생할 수도 있다.


푸틴이 실각하게 되면 러시아의 미래는 매우 불투명해진다. 푸틴의 후임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속하려 드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니다. 특히 푸틴의 이너 서클 상당수가 정보기관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강력한 제2인자가 없는 상황에서 푸틴의 공백은 정치적 불안 상황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심지어 혼돈 수준으로 악화될 수도 있다.


외부의 전문가는 러시아가 대대적인 내부 위기에 휩쓸리는 걸 즐거이 관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러시아의 내부 붕괴를 바라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단지 러시아의 거대한 핵 전력이 누구의 손에 떨어질지 모른다는 점 때문은 아니다.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상당히 복잡한 정서적 환경에 놓여 있다. 빈곤한 경제적 상황과 더불어 혐오, 공포를 일으키는 프로파간다 때문에 우월감과 무력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러시아가 붕괴되거나 경제적, 정치적 파국을 맞게 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될 수 있다. 러시아인들이 푸틴보다 더 호전적인 지도자 아래 단결하고 내전을 일으키거나 타국을 침공하게 될 수도 (혹은 둘 다 일으킬 수도) 있다.


만일 우크라이나가 승리하고 푸틴이 실각하게 되면 서방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굴욕감을 주는 대신 오히려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에게 지원을 제공한다는 게 이상하거나 불쾌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물론 어떤 지원이든 러시아의 정치 개혁과 맞물려 제공돼야 할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패전 후 재정적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며 미국과 유럽은 상당한 재정 지원을 통해 푸틴 이후의 권력 투쟁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 내에서 존경받는 경제 관료가 임시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돕고 국내의 민주주의 세력이 성장하도록 도울 수 있다. 1990년대 당시 러시아인들은 개방 이후 적절한 원조를 받지 못해 미국에게 속았다고 여겼다. 푸틴 실각 이후의 경제원조는 그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할 것이며 러시아 국민들로 하여금 과거의 제국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진정으로 프로다운 외교관들이 이끄는 새로운 외교 정책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프로 외교관들은 지금 세대의 러시아 외교관들이 하지 못했던, 러시아를 책임있고 정직한 글로벌 파트너로 만드는 과업을 완수할 것이다.



보리스 본다레프(Борис Бондарев)는 2002년부터 2022년까지 러시아 외무부에서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최근까지 제네바(유엔 유럽본부) 주재 러시아 대표부의 참사관이었다.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반대하며 지난 5월 사임했다.


1922년 창간된 격월간 국제정치 전문지. 미국의 국제정치 싱크탱크인 외교협회(CFR)에서 발행하는데 국제정치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매거진으로 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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