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기와 나누기: 노년에 대처하는 시인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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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안 로의 시집 <지상에서의 삶> 표지. /사진제공=W.W. Norton

2025.05.30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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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던 미지의 시간으로 향해 가는 과정이 젊은 시절에 설렘과 두려움을 함께 불러온다면, 중년 이후 시간의 흐름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보통 좀 더 복잡해진다. 신체 기능이 조금씩 쇠락해 가고 거울에 비친 모습도 달라지면서 어쩔 수 없이 노화를 인지하게 될 때면, 아쉬움이나 서글픔, 그리고 불안감 등의 반갑지 않은 감정들이 자꾸 찾아와 마음을 아프게 두드린다. 얼마 전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에 나왔던 대사처럼 몸이 늙는다고 마음도 따라 늙는 것은 아니기에, 노년을 향해 간다는 사실을 수긍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쩔 수 없는 일이면서도 선뜻 내키지 않는 일이다. 요즘 우리 사회를 둘러보면 젊은 외모에 대한 집착이 과도할 정도로 퍼져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렇게 외양으로나마 젊은 이미지를 최대한 오래 유지하고 싶은 욕망은 늙어가면서 맞이할 새로운 삶의 국면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과 맞물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도리안 로(Dorianne Laux)의 '어디 한번 해 봐'(I Dare You)라는 시는 우리 모두의 앞에 놓인 노년이라는 시간, 그 불편하면서도 피할 수 없는 과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보게 해 준다. 2024년 전미도서상 후보에 올랐던 시집 <지상에서의 삶>(Life on Earth)의 표지에는 어린 아기의 모습이 담겨 있고,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그렇게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이들이 그 후로 경험하는 삶의 다양한 측면을 공감 어린 시선으로 솔직하게 표현한다. 이 시집의 시들 중 특히 여러 매체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던 '어디 한번 해 봐'는 1951년생인 시인이 70대가 되어 맞이한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늙어가는 과정이 실제로 어떤 것일 수 있는지, 또 그 과정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맞이해야 할 것인지를 보여 준다.

도리안 로 - 어디 한번 해 봐 (번역: 조희정)

가을이고, 우리는 책을 처분하는

중이다, 은퇴할 준비를 하면서,

더 작고 더 관리하기 쉬운 곳으로 이사하려

하면서. 우리는 거꾸로 살고 있다,

새로운 집을 노년에 맞게 만들면서, 바닥에

걸려 넘어질 것이 없도록, 우리 몸의

느려진 구조에 장애가 되는 게 없도록 하고,

작은 2인 식탁을 둔다. 우리의 세상은

줄어들고 있다, 우리 옷장은 거의 비었고,

딱 붙는 치마와 춤출 때 신던 신발,

여분의 물건들은 사라진다. 이제,

누군가가 놀러 와서 우리의

셰익스피어 전집을, 펼쳐진 사전에 꽂혀 있는

매의 깃털을, 책장 위 쇠로 만들어진 천사를

감탄하며 바라볼 때, 우리는 가져가라고

말한다. 처분하는 시절, 이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간이다,

우리가 뒤에 남기는 것이 마치

당신이 지나간 후

점점 더 강하게 느껴지는

꽃핀 나무의 향기 같다는 것을 알기에.

그 나무들을 날숨으로 뱉기 전 잠시

들이쉬는 것이기에. 어느 평범한

화요일에 당신들 중 하나가 말한다

어디 한번 해봐,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그저 웃는다.



때는 가을이고, 한 해가 저물어 가듯이 시인의 삶도 천천히 끝을 향해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시인은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생활을 정리하고 캘리포니아에 있는 작은 집으로 이사를 준비하는 중이다. 한국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도 재산 가치를 생각해서 집을 정리하지 않으려고 하는 데 비해, 미국에서는 은퇴할 때가 되면 그동안 살았던 주택을 처분하고 작은 아파트나 타운하우스로 옮기는 선택이 꽤 흔한 편이다. 시인 역시 이렇게 '줄여 가는'(downsizing) 이사를 위해 살림살이의 많은 부분을 버리는 결단을 내린다. 강단에 서는 동안 삶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상징적 소유물인 "책"을 처분하고, 젊은 시절 즐겨 있던 옷들 역시 최소한으로만 남겨서 "옷장"을 거의 비어 있는 상태로 만들어 놓는다. 일할 때 입던 "딱 붙는 치마"도 "춤출 때 신던 신발"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새로운 삶의 단계로 시인은 이제 막 진입하려 하고 있다.


"우리는 거꾸로 살고 있다"라는 구절은 이렇게 늙어가는 과정을 준비하는 것이 마치 인생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과 유사하다는 의미를 함축적으로 전달해 준다. 아기가 태어나면 집 전체를 최대한 안전하게 바꾸는 것처럼, 노인이 되어 살아갈 공간도 "바닥에 걸려 넘어질 것"이나 "몸의 느려진 구조에 장애가 되는" 것이 없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아이가 자라나고 성인이 되면서 점점 더 많은 물건이 필요했다면, 이제 노년을 맞는 시인은 그 많은 물건을 처분하여 꼭 필요한 것들만 남기고 살림살이를 단출하게 만들어 간다. 시인의 "세상"은 자연스럽게 다시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올 때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듯이, 세상을 떠날 때도 가져갈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을 테니까.


그러하기에,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 와중에 가까운 이들 중 누군가가 유난히 원하는 듯한 물건들은 기꺼이 나눔의 대상이 된다. 실제로, 도리안 로는 이 시가 이사를 앞두고 자신이 가르치던 대학원생들과 함께 '집을 떠나기 위한' 파티를 했던 경험에서 출발하여 쓰여졌다고 밝힌 바 있다.1 화장지나 야채 통조림부터 붉은색 드레스나 식탁에 이르기까지, 집에 있던 많은 물건은 하나하나 타향으로 이주하는 은사의 기억을 듬뿍 담은 채 대학원생들의 차지가 된다. 시에서는 "셰익스피어 전집"이나 "매의 깃털"로 만들어진 책갈피, 그리고 "책장" 위에 있던 "쇠로 만들어진 천사" 등 시인의 서재를 구성하던 사물들이 주로 언급되며, 이런 사물들이 타인의 손으로 이전되는 모습은 읽고 쓰고 가르치던 시인의 역할이 새로운 세대에게 조용히 옮겨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렇게 버리고 나누면서 "처분하는 시절"의 중요성을 시인은 너무나 명확하게 마음에 새기고 있다. 결국, 늙어감이 죽음으로 향해 가서 마침내 언젠가는 자신의 몸이 처분되어야 하는 순간을 맞게 되리라 생각하면서, 시인은 "뒤에 남기는 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를 가만히 곱씹어 본다. "당신이 지나간 후 점점 강하게 느껴지는 꽃핀 나무의 향기"에 비유되는 것은 죽음 이후에 강렬해지기 마련인 고인에 대한 추억과 회상이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동안 주변 사람들은 망자를 다른 어떤 때보다 더 많이 생각하고 더 진하게 그리워한다. 하지만, 이 집중적인 추모의 기간은 마치 "날숨으로 뱉기 전 잠시 들이쉬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간의 흐름은 떠나간 사람을 서서히 잊혀지게 하며, 그가 지녔던 물건들이 처분되었던 것처럼 그의 존재 역시 궁극적으로는 타인들의 기억으로부터 휘발해 가기 마련이다.


이런 깊은 깨달음을 안고 노년을 보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에 대한 답은 시의 제목이면서 마지막 구절에 다시 반복되는 "어디 한번 해 봐"라는 어구에 녹아 있다. 이 어구는 우리나라의 진실 게임 비슷한 미국의 놀이문화와 관련된 것으로, 게임을 하는 중 '진실이냐 도전이냐'(Truth or Dare)라는 질문을 받은 사람은 '진실'을 선택하여 대답하기 곤란한 예민한 질문에 답하거나 아니면 '도전'을 선택하여 다른 사람들이 지정하는 엉뚱하고 불편한 벌칙을 받게 된다. 이렇게 "어디 한번 해 봐"라는 말에 화답하여 타인들의 눈앞에서 생소한 과업을 수행해야 했던 젊은 시절은 이제 지나갔고, 이 시의 마지막은 한 사람이 불쑥 꺼낸 "어디 한번 해 봐"라는 장난스러운 말이 다른 한 사람에게 그저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장면은 이제부터 맞게 될 세월을 사는 동안 젊을 때처럼 많은 도전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조금은 무료한 반복적 일상을 함께 웃으며 꾸려나가는 노년의 삶에서 역동적인 도전의 요소들은 조용히 사라져 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인생에서 이 낯선 단계에 도달하여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내는 과업은 이제까지 겪어 왔던 수많은 도전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도전들보다도 더 어려운 일은 아닐까? 노욕에 빠져 놓아야 할 것을 제때 놓지 못하거나 젊음을 향한 지나친 욕망으로 삶의 균형을 잃어버린 모습 대신 노년의 삶을 그 시절에 맞게 잘 꾸려나가는 것이야말로 또 하나의 진정한 도전이라는 사실을, 이 시는 따스하게, 그러나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원문: I Dare You

It's autumn, and we're getting rid

of books, getting ready to retire,

to move some place smaller, more

manageable. We're living in reverse,

age-proofing the new house, nothing

on the floors to trip over, no hindrances

to the slowed mechanisms of our bodies,

a small table for two. Our world is

shrinking, our closets mostly empty,

gone the tight skirts and dancing shoes,

the bells and whistles. Now, when

someone comes to visit and admires

our complete works of Shakespeare,

the hawk feather in the open dictionary,

the iron angel on a shelf, we say

take them. This is the most important

time of all, the age of divestment,

knowing what we leave behind is

like the fragrance of blossoming trees

that grows stronger after

you've passed them, breathing

them in for a moment before

breathing them out. An ordinary

Tuesday when one of you says

I dare you, and the other one

just laughs.



조희정은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하버마스의 근대성 이론과 낭만주의 이후 현대까지의 대화시 전통을 연결한 논문으로 미시건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간과 자연의 소통, 공동체 내에서의 소통, 독자와의 소통, 텍스트 사이의 소통 등 영미시에서 다양한 형태의 대화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양상에 관심을 가지고 다수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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