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10.17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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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1월, 햇살이 쏟아지는 댈러스의 어느 날,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차량 행렬이 엘름가로 접어들 무렵, 환호하는 인파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한 인물이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검은 우산을 펼쳐 들고 서 있던 남자였다. 몇 초 뒤 총성이 울렸고, 세상은 영원히 바뀌었다.
그 충격적인 사건 이후, 미국이 설명할 수 없는 폭력의 현실과 씨름하는 동안 "우산 남자"의 이미지는 작가 존 업다이크가 훗날 표현했듯 역사의 목에 매달린 페티쉬(fetish)가 되었다. 그는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인물, 튀는 존재였다. 아귀가 딱 맞는 인과관계를 갈망하는 세계에서 그의 존재는 해로워 보였다. 그 우산은 비밀 신호 장치였을까? 아니면 첫 번째,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목구멍 부상을 입힌 플레셰트(미세 침) 발사용 위장 총이었을까? 수년 동안 수사관들과 음모론자들은 그를 거대한 음모의 열쇠, 은밀한 계획의 부분으로 여겼다.
하지만, 결국 진실이 드러났을 때, 그것은 거의 터무니없을 만큼 평범했다. 1978년 미 하원 위원회 청문회에서 한 댈러스 창고 직원 루이 스티븐 윗이 자신이 바로 그 '우산 남자'였다고 증언했다. 그의 목적은 암살이 아니라, 야유였다. 우산은 케네디 가문에 대한 상징적 항의의 표시였다. 그것은 네빌 체임벌린 전 영국 총리—그의 상징이 바로 우산이었다—의 유화정책과 당시 주영 대사였던 조지프 P 케네디(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의 관계를 비판하려는 의도였다. 수사관 조시아 톰프슨은 이를 두고 "정말로 터무니없지만, 그래서 오히려 사실일 법한 설명"이라 평했다.
이 '우산 남자'의 이야기는 우리가 얼마나 절실히 세상의 복잡함을 깔끔하고 빈틈없는 설명으로 간단히 정리하려 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특히 비극 앞에서 확실성을 갈망하며, 흩어진 사실들을 하나의 일관된—그리고 종종 음모론적인—이야기로 엮어내려 한다. 맑은 날 우산을 든 남자를 보면 우리는 뭔가 음모가 있을거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세상이 우연과 기이함, 의미 없는 사건이 있는 무대라는 생각을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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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고방식은 국가적 비극의 순간에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기본 설정에 가깝다. 현대 문화는 확실성을 보장해주는 사고방식을 선호한다. 경제학의 간결한 모형들, 정치학의 야심찬 예측들,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데이터 기반의 확실성 말이다. 우리는 단순한 원인, 일반화 가능한 법칙, 그리고 명확하고 예측가능한 결과를 추구하도록 훈련되어 있다.
그러나 국정운영, 전략, 사회적 의사결정의 영역에서 이런 확실성에 대한 갈망은 위험한 약점이 된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세계는 실험실이 아니다. 그것은 모호함과 우연성, 상충하는 시각이 뒤얽힌 소용돌이이며, 동기는 불분명하고 증거는 모순되며 사건의 의미는 시간이 흐르며 바뀐다. 어떤 경제모델이나 회귀분석도 '우산 남자'를 완전히 설명하지 못하며,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복잡한 도전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명확성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우리가 잃어버렸고, 반드시 되찾아야 할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인식 능력, 즉 '역사적 감수성'이다. 이는 단순히 연도나 사실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학자 고든 S 우드가 말했듯, 그것은 "다른 종류의 의식", 곧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사고의 틀이다. 그것은 불확실성에 익숙하고, 맥락에 민감하며, 과거의 강력하고 예측 불가능한 리듬을 인식하는 태도다. 이런 감수성을 기른다는 것은 겸손, 호기심, 공감이라는 지적 덕목을 익히는 일이며, 단선적 사고의 오만에 대한 해독제가 된다.

프랜시스 개빈의 신간 '역사적으로 생각하기: 국정과 전략 가이드'의 표지. /사진제공=Yale University Press
역사가의 대담한 행위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역사가의 이미지는 먼지 쌓인 자료를 수집하고 그것을 엮어 이야기로 만드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묘사는 이 학문의 중심에 있는 대담한 지적 행위를 간과한다.
인류 역사상 일어난 거의 모든 일과 살아온 거의 모든 사람은 잊혔다.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하는 과거는 무한한 사건의 흐름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역사가가 처음이자 가장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순간은, 이 망각의 강물 속에서 무엇을 건져 올릴지 선택할 때다. 그리고 그들은 그 과거를 명명하고 분류할 수 있는 특별한 권력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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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고대 말기' '산업혁명' 같은 시대 명칭은 자연 속에서 발견된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가들이 혼란스러운 세계를 질서 있게 만들기 위해 제안한 지적 구성물이며, 세상이 그 이름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고유한 현실성을 얻게 된다.
이는 우리의 존재를 이루는 무수하고 혼란스러운 사실과 원인들 속에 공유된 질서를 부여하려는 야심차고 대담하기 짝이 없는 시도다. 역사 서술은 인과와 주체성에 대한 주장, 즉 누가, 무엇이 중요하며,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고 왜 그런가에 대한 논증이다. 변화는 위대한 지도자들에게서 비롯되는가, 아니면 집단적 제도 혹은 비인격적 구조적 힘에서 나오는가? 역사학자의 서사는 단순한 이야기 그 이상이다. 그것은 곧 변화에 대한 하나의 이론이다.
이 과정은 많은 다른 학문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회과학이 일반화 가능하고 예측적이며 간결한 이론—즉 가능한 한 단순한 원리로 최대한 많은 현상을 설명하려는—을 추구한다면, 역사학은 복잡함 속에서 기쁨을 느낀다. 역사적 감수성은 거대한 단일 이념이나 역사의 원동력이라는 개념에 회의적이다. 서로 다른 일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일어나며,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모호할 수 있고, 세계는 의도치 않은 결과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역사학은 미래를 예측하려 애쓰지 않는다. 대신 과거가 어떻게 현재로 이어졌는지를 깊이 이해하려 한다. 그리고 영국의 역사가 르웰린 우드워드가 말했듯 "우리의 무지는 매우 깊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역사적 감수성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개념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자본주의'나 '인권' 같은 말을 마치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보편 개념처럼 사용하지만, 사실 그것들은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등장해 발전한 산물이며, 종종 역사가들에 의해 명명되고 정의된 것이다. 역사적 의식은 우리가 이미 이해했다고 믿는 사물들의 기원을 탐색하고, 과거를 그 자체의 맥락 속에서 공감하려는 태도를 요구한다. 이는 과거의 사람들 입장에 서서 그들의 세계가 가진 딜레마를 함께 고민해보는 상상력이다. 그것은 도덕적 판단을 유보하자는 뜻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시대를 초월한 통찰을 독점하고 있다는 자만심을 내려놓으라는 요청이다.
과거의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것들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다면, 우리는 왜 우리의 믿음이 미래 세대의 비판과 검증에서 자유로울 것이라고 확신하는가?
역사를 잘못 이해하는 이유
역사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사고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 가지 방식으로 '역사'를 접하지만, 그 어떤 방식도 깊은 역사 의식을 길러주지는 못한다.
첫째는 학교 교육이다. 여기서 역사는 흔히 우리 삶과 거의 연결되지 않은 채, 연도와 사건을 외워야 하는 건조한 연표로 제시된다.
둘째는 박물관, 기념비, 유적지 같은 공공 역사다. 이런 공간은 호기심을 자극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만들어진 시대의 편견과 맹점을 반영하는 역사적 산물이기도 하다. (예컨대 식민지 시대를 재현한 윌리엄즈버그 유적지는, 실제 18세기의 삶이라기보다는 1930년대 록펠러 재단이 자금을 댄 복원 정신을 더 잘 보여준다.)
셋째는 베스트셀러 역사서나 다큐멘터리다. 생생하고 흥미로운 서사를 제공하지만, 종종 인물 찬양적이거나 일화 중심적이며, 단순한 교훈이나 국가적, 민족적 신화를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 셋 중 어느 것도 진정한 역사적 감수성을 기르는 것과는 무관하다. 그것들은 과거와 연결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달래주는 '힐링 푸드' '컴포트 푸드'에 가깝다. 최악의 경우, 역사적 사고가 의문을 제기해야 할 바로 그 인지적 습관들—확실성을 향한 욕망, 단순한 서사, 명확한 '영웅 대 악당' 구도—을 오히려 강화한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아카데미 역사학은 이러한 공적 책무를 상당 부분 저버렸다. 국가 운영이나 전략 같은 중대한 주제를 학문적 가치가 없다며 외면했고, 주요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진 명단에서 전쟁, 평화, 외교를 다루는 학자들이 급감했다. 설령 이 주제들을 다룬다 해도, 전문 용어에 파묻힌 난해한 문체로 인해 정책결정자나 일반 대중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실질적인 도움을 받기도 힘들다.
이러한 쇠퇴는 비극이다. 복잡한 세계적 도전에 직면한 지도자들이 절실히 통찰을 필요로 하는 시기에, 역사학은 정작 권력과 의사결정의 세계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원래 서로 대화해야 할 역사학자와 정책결정자들이 거의 교류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 결과, 행동 지침을 제시할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다른 학문들이 그 공백을 메우고 있으며, 이들이 내놓는 조언은 대체로 위험하리 만큼 단순화되어 있다.
역사적 감수성이 실제로 작동한 사례
이런 단절이 초래하는 문제는 단순히 학문적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잘못된 역사 인식, 혹은 역사에 대한 무지성은 치명적인 정책 결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가령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9/11 테러 이후,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이 초래한 재앙적 결과의 역사를 진지하게 검토했다면 어땠을까? 깊은 역사적 분석은 외세가 지원하는 정권을 세우고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결연한 현지 주민을 상대로 한 대반란 작전의 무력함, 그리고 국제적 공감대 없이 행동할 때 발생하는 위험을 명확히 보여줬을 것이다.
역사적 감수성은 단순히 "침공하지 말라"는 식의 명쾌한 답을 제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강경한 매파조차 잠시 멈춰 생각하게 만들 만한, 본질적이고 어려운 질문들을 제기했을 것이다.
반대로, 역사적 감수성이 빛을 발한 순간도 있다. 2008년, 전 세계 금융시스템이 붕괴 직전까지 몰렸을 때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의 의장은 벤 버냉키였다. 그는 대공황의 원인과 결과를 연구해온 경제사학자였다. 그의 학문적 연구는 1930년대 초 중앙은행들이 과감히 개입하지 못하고 유동성을 공급하지 못한 탓에 단순한 경기침체가 세계적 재앙으로 번졌다는 사실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버냉키는 전례 없는 규모의 유동성 공급과 전 세계 중앙은행들과의 협력을 통해 과감하고 혁신적인 정책들을 시행했다. 그는 과거의 사례를 단순히 모방한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당시 지배적이던 경제학적 교조주의에서 벗어나 대담하게 실험할 수 있는 지적 자유를 얻었다.
세계가 또 한 번의 대공황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많지만, 그중에서도 버냉키의 '역사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역사적 사고의 실천
역사적 감수성이 '태도'라면, 역사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그 감수성을 실제로 '실행'하는 행위다. 즉, 그것은 세상을 평가하고 더 나은 판단을 내리기 위한 도구로서 감수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이는 독자적인 인식 방식으로, 인과와 행위 주체를 평가하고, 상충하는 서사를 비교하며, 의사결정의 딜레마를 "분석에 의한 마비"(paralysis by analysis)에 빠지지 않고 헤쳐 나가게 하는 강력한 방법론이다. 역사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미래를 예측하는 수정구슬을 갖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들여다보는 한층 정교한 렌즈—역사가의 현미경—를 갖는 일이다.
역사적 사고는 '시간'을 세로축과 가로축에서 모두 다시 묻는 것에서 시작한다. 세로축은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라는 질문이다. 이는 단순한 연표의 나열이 아니라 인과관계의 지도를 그리는 일이다. 그 연표가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1917년 러시아 혁명,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혹은 1979년 중국의 부상—에 따라 이야기의 구조와 의미는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그 출발점의 선택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말하지 않은 전제를 드러낸다.
가로축은 "그와 동시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었는가?"를 묻는다. 역사는 하나의 단선적 이야기가 아니라, 수많은 실이 엮인 두꺼운 직조물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 정부가 베트남전의 확대를 결정한 맥락은, 같은 정부가 핵 비확산을 두고 소련과 협력하려 했던 노력—겉보기에 상반된 또 다른 흐름—을 함께 살펴보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서로 다른 흐름을 통합하는 행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사고방식이 우리 자신의 편견—특히 '결과 편향'—과 마주하게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미 이야기가 어떻게 끝났는지를 알고 있기에, 냉전이 어떻게 종식됐는지, 2008년 금융위기가 어떻게 해결됐는지를 알기에, 모든 일이 필연적으로 그리 흘렀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이런 유혹을 거부하는 일이다. 그것은 과거의 행위자들이 그랬듯, 백미러가 아닌 뿌연 앞유리창 통해, 불확실한 미래를 응시하려는 시도다. 이를 통해 역사는 다시 '우연성'을 회복한다. 선택은 의미가 있었으며, 세상은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도 있었음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결국 역사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더 나은 질문,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그것은 개인의 행위, 구조적 힘, 그리고 순수한 우연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이해하려는 훈련된 호기심이며, 손쉬운 해답 대신 어려운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지적 장비를 제공한다. 이는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헤쳐 나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다.
우리는 '우산을 든 남자'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그는 인간이 확실성을 갈망하는 잘못된 본능의 상징이었다. 우리는 잔디 언덕 위의 그를 보며 곧바로 음모론, 명쾌한 인과의 사슬로 생각이 흘러간다. 그러나 역사적 감수성은 그 미스터리 속에 조금 더 머무르라고 권한다. 한두 줄기 실로 설명하는 쉬운 답을 거부하고, 기이하고, 우연적이며,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과거라는 두꺼운 직조물을 이해하라고 한다. 역사는 적용해야 할 교훈의 목록이 아니라, 탐구해야 할 방대한 인간 경험의 저장소다. 그 탐구 속에서 우리는 원하는 확실성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신 훨씬 더 값진 무언가—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
프랜시스 개빈은 미국 존스홉킨스대 고등국제관계대학원(SAIS)의 석좌교수이자 동 대학원 부속 '헨리 A 키신저 연구소'의 초대 소장이다. 이 에세이는 필자의 신간 '역사적으로 생각하기: 국정과 전략 가이드'(예일대학교 출판부)를 각색한 것이다.
노에마 매거진의 이 멋진 에세이(9월 11일자)는 우리들로 하여금 손쉽게 세상을 설명해버리려는 경향을 반성하게 합니다. 현대의 이른바 '사회과학'은 몇 가지 요인들로 세상을 설명해버리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면서 '합리적 선택'에서 연역하거나 통계자료에서 귀납해 설명 모델을 만들고 미래를 예측합니다. 이 글의 필자인 존스홉킨스대 석좌교수 프랜시스 개빈은 이러한 단선적 사고를 우리의 오만함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은 몇 가지 실낱만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수많은 사건, 변수, 행위자들이 엉켜 만들어온 두꺼운 직조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사고하는' 인류의 오랜 지혜를 되찾을 것을 권합니다. 현재 우리는 '역사'를 잘못 배우고 있다고 개빈은 주장합니다. 우리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단편적인 사건들의 연표를 외우거나 갖가지 영웅담, 사건을 배웁니다. 더욱 나쁜 것은, 기존에 믿고 있던 것들을 확인해주면서 편견을 강화하는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 신화들을 잔뜩 배웁니다. 개빈이 말하는 '역사적으로 사고하기'는 이런 것과 정반대의 것으로, 복잡한 세상 앞에서 마치 '신 앞에 선 듯한 겸허함'(piety)을 갖고 조심스럽게 '암중모색'(暗中摸索)하는 태도를 갖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명확하게 보인다는 오만함을 버리고 그 모호성을 받아들이는 겸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역사라는 직조물이 지금까지 어떻게 만들어져왔는지를 알아야 그 위에서 새로운 직조물을 짜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수많은 사건, 변수, 행위자들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 응시해야 할지는 우리의 대담한 선택입니다. 그 선택이 맞으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선택해야 하고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호한 미래를 향해 걸어가야 합니다. 오만한 모델링이 아닌 겸손한 역사적 사고를 복원해야 우리의 실천이 좀 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프랜시스 개빈의 조언이 손쉬운 음모론, 명쾌한 모델링의 난무로 부박(浮薄)해진 오늘날의 지적 환경에서 더욱 귀하게 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