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론 머스크가 2025년 3월 30일(현지시간) 미국 위스콘신주 그린베이에서 4월 1일 선거에 출마하는 보수 성향 주 대법원 후보 지지 유세를 펼치고 있다. (사진은 기사 본문 내용과 무관합니다) /사진=로이터/뉴스1
2025.11.14 16:33
- 0
우익 포퓰리즘의 부상에 우려를 표하면서도 학자적 기질을 가진 사람이 이 현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학계의 정치학 문헌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실망할 가능성이 높다. 정치학자들이 상당히 상반된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데는 많은 독서가 필요하지 않다. (이 주제에 대한 비교적 방대한 학술 문헌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는 이 리뷰 논문을 참고할 것) 포퓰리즘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합의가 있지만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정의는 피상적이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는 포퓰리즘 세력과 맞서 싸우는 데 있어 불길한 징조이다.
가장 중요하게도 학계는 포퓰리즘이 지식인들에게 비판받을수록 더욱 강력해진다는 가장 당혹스러운 측면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그 결과 우리 대부분은 메타게임1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여전히 똑같은 낡은 전략으로 똑같은 낡은 게임을 하고 있다.
학계의 논의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안타깝게도 포퓰리즘에 관해 글을 쓴 수많은 필자들이 초기에 포퓰리즘을 사회주의나 자유주의와 같은 정치 이념의 일종으로 취급하기로 한 결정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이는 즉각적인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포퓰리즘이 다른 여러 전통적인 정치 이념과 양립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좌파(예: 차베스)와 우파(예: 보우소나루) 변종으로 모두 나타난다. 따라서 포퓰리즘이 정치 이념이라면 이상한 이념이다. 전통적인 이념처럼 다른 견해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가장 확실한 대안은 포퓰리즘을 민주적 선거 제도에서 특정 이익을 얻기 위해 사용되는 전략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좀 더 유망한 접근법이지만 그 자체로 또 다른 의문을 낳는다. 포퓰리즘이 이념이 아닌 단순한 전략이라면 왜 모든 포퓰리즘 운동에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이나 중앙은행에 대한 불신과 같은) 특정 사상이 항상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까? 그리고 만약 그게 단지 선거 전략이라면 왜 포퓰리스트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통치하는가? 예를 들어 왜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데(법원과의 갈등, 사법부 독립성 제한 시도 등) 그토록 열을 올리는가?
[새로운 PADO 기사가 올라올 때마다 카톡으로 알려드립니다 (무료)]
많은 사람이 선택한 해결책은 포퓰리즘을 이념으로 취급하되 "엷은thin" 이념으로만 간주하는, 첫 번째 견해를 희석한 버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가장 흔히 인용되는 정의는 카스 무데Cas Mudde에게서 나왔다:
"나는 포퓰리즘을 사회가 궁극적으로 '순수한 인민' 대 '부패한 엘리트'라는 두 개의 동질적이고 적대적인 집단으로 분리된다고 간주하고, 정치는 인민의 '일반의지volonté générale'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념으로 정의한다."
이 정의의 주된 문제는 포퓰리즘이 좌파와 우파의 성향을 모두 수용하기 위해 매우 최소한의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비롯되며, 그 결과 포퓰리즘 운동의 많은 구체적인 특징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미흡하다. 예를 들어 왜 '인민'은 상당히 다원적인 사회의 맥락에서조차 항상 문화적으로 동질적인 집단으로 개념화되는가? (이는 '심층 프랑스2 la France profonde'나 '진짜 미국인'과 같은 추가적인 구성을 도입하게 만든다.) 게다가 이 정의를 읽어보면 좌파가 포퓰리즘에서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유럽 전역에서 포퓰리즘의 부상은 거의 한결같이 우파에게 이익을 안겨주었다.
해결의 실마리는 이 정의와 관련하여 종종 이루어지는 추가적인 명세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인민의 '일반 의지'가 아무 옛날 것이나 향하는 것이 아니라 '상식'이라고 불리는 특정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프랭크 런츠Frank Luntz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상식의 결정적인 특징은 "어떤 근사한 이론도 필요하지 않고 그 자체로 옳다"는 점이다. (이는 인민과 엘리트 사이의 주요 경계선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인민은 '상식'을 가지고 있는 반면 엘리트들은 '멋진 이론'을 신봉한다.) 이러한 구별은 결과적으로 신념 체계의 이념적 내용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성하는 데 사용되는 인지 형태에서 비롯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이 구분한 '빠른 사고'와 '느린 사고'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카너먼이 대중화한 이 견해는 심리학에서 이중 과정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대략적인 개념은 인간이 두 가지 매우 다른 인지 방식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은 의식적인 인간의 마음을 "진화가 제공한 병렬 하드웨어에 비효율적으로 구현된 직렬 가상머신"이라고 멋지게 묘사한 바 있다. 하드웨어/소프트웨어 비유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다. 우리는 진화의 산물인 100만 년 된 영장류의 뇌를 물려받았으며 여기에는 수많은 내장 모듈이 포함되어 있어 (얼굴 인식, 걷는 동안 균형 유지, 움직이는 물체의 궤적 예측, 사건의 확률 추정 등) 복잡한 계산을 빠르고 수월하게 수행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인지 과정의 결과물을 '직관'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답이 어떻게 계산되는지 실제로 알지 못한 채 단지 결과만 제시받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우리는 수학적, 논리적, 가상적, 전략적 추론과 같이 인지적으로 '분리된decoupled'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진화적으로 더 최신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잘 기능하기 위해 (언어, 문자 체계, 아라비아 숫자, 행렬, 그래프 등과 같은) 문화적 입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소프트웨어 시스템이다. 불행히도 이는 느리고, 노력이 필요하며, 주의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직관적 시스템과 다르다. (이는 선형적 추론을 지원하도록 설계되지 않은 하드웨어에 '비효율적으로'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이 '분석 시스템'의 작동은 노력이 많이 들기 때문에 세상을 대하는 우리의 표준 방식은 키스 스타노비치Keith Stanovich가 '인지적 구두쇠'라고 부르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가 가능한 한 직관에 의존하여 삶을 살아가려 하며 그것이 실패할 때, 즉 그런 문제 해결 방식의 한계가 명백해질 때만 더 힘든 분석적 처리 방식으로 전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삶의 대부분을 인지적 '오토파일럿' 상태로 보내며 어쩔 수 없을 경우에만 열심히 사고를 한다.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대표 강좌—PADO '광화문클럽' 2회가 11월 18일(화) 열립니다!]
두 시스템이 서로 동의할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들이 때때로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진화의 산물인 직관적 시스템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임시방편'(휴리스틱)을 사용하는데 이는 대체로 잘 작동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불행히도 이 시스템은 대부분의 경우 학습 능력이 없다. 그 결과 버그가 있더라도 실제로는 디버깅할 수 없다. 대신 분석 시스템이 개입하여 직관적 반응을 억제하고 올바른 답으로 대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 하드웨어의 가장 유명한 '버그' 중 하나는 탄도 궤적을 예측하는 데 사용하는 '직관적 물리' 시스템에서 발생한다. 이 시스템은 야구공을 잡는 것 등에는 훌륭하지만 특정 사례에서는 잘못된 예측을 생성한다. 가장 잘 알려진 경우는 이미 움직이고 있는 물체가 떨어지는 상황을 고려할 때다. 우리의 직관적인 시스템은 그것이 똑바로 아래로 떨어질 것이라고 예측하지만 실제로는 전진 운동량을 보존하여 호를 그리며 하강할 것이다. 이 버그는 아이들의 그림에 자주 나타난다. 내 아들이 여덟 살쯤 그렸던, 다소 시대에 맞지 않는 공성전 그림이 그 예다.
/사진제공=Joseph Heath
투석기에서 던져진 돌의 궤적은 정확히 그렸지만 비행기에서 떨어뜨리는 폭탄은 잘못 그린 것을 주목하라. 놀라운 점은 우리 모두가 머릿속에 똑같은 버그를 가지고 다닌다는 것이다. 차이점은 대부분의 성인(바라건대)은 정답에 대한 명시적인 지식도 갖고 있어서, 뇌가 잘못된 직관을 제공할 때마다 의식적으로 그 반응을 무시하고 올바른 예측으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이 인지적 기각override은 주의력과 노력을 모두 필요로 하며,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은 폭탄 궤적을 올바르게 그리라는 요청을 받으면 잠시 멈춰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게 정치의 세계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물리적 세계의 사건을 해석하고 예측하는 데 전념하는 많은 하드웨어 루틴을 가지고 있듯이, 사회적 상호작용을 관리하는 데 전념하는 엄청난 수의 루틴도 가지고 있다. 후자 역시 버그로 가득 차 있다. 설상가상으로 물리적 운동의 기본 규칙은 20만 년 전과 동일하지만 인간사회의 규칙은 급격하게 변했다. 이 때문에 소규모 사회에서는 적절했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우리의 많은 직관적 반응이 대규모 사회에서는 완전히 부적절하다. 이는 현대 세계의 삶이 우리 모두에게 극도로 부담스러운 인지적 짐을 지움을 의미한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우리의 패턴 감지 시스템에는 다른 사람의 행동 변화를 유도하는 데 있어 처벌의 효과를 과대평가하게 만드는 잘 알려진 버그가 있다. 우리는 비정상적으로 나쁜 행동은 처벌하고 비정상적으로 좋은 행동은 보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평균으로의 회귀 경향을 생각하면 처벌 뒤에는 더 나은 행동이, 보상 뒤에는 더 나쁜 행동이 따를 가능성이 더 높다. 이는 처벌이 효과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보상이 역효과를 냈다는 인상을 준다. 인센티브 부여에 대한 많은 '상식'들('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은 이러한 착각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이 때문에 기록을 유지하고, 성과를 추적하며, 보상/처벌과의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행동 변화를 실제로 연구하는 사람들은 결국 상식에 반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는 사회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동물 조련사들에게도 해당된다. 그들은 모두 보상이 적어도 처벌만큼 효과적이거나 어떤 경우에는 그 이상이라는 데 동의하는 편이다. 이는 전문가의 의견과 일반의 문화 사이에 중대한 괴리décalage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견해 차이가 어떻게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이득을 위해 이용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내는지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다. 처벌에 대한 전문가의 견해는 밖으로 스며들어 교육 엘리트(그리고 전문가의 의견을 따르는 경향이 있는 다른 이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곤 한다. 이는 관대한 양육, 학교 체벌 폐지, 범죄에 대한 덜 처벌적인 접근, 사형 반대와 같이 기본적으로 다수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는, 엘리트들이 갖는 일련의 견해와 관행을 낳는다. 이는 결국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청소년 비행이나 도시 무질서와 같은 특정 고질적인 사회 문제가 (형사 사법 시스템뿐만 아니라 학교와 부모를 포함한) 다양한 기관이 제대로 처벌을 안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들의 관점에서 해결책은 단순한 상식을 실천하는 것, 즉 범죄자에게 '엄격하게 대처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엘리트들이 이러한 명백한 진실을 반대한다는 건 그들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예: '근사한 이론'에 현혹되었거나 현실과 동떨어지게 되었다는 등) 징표이다.
불행하게도 인민이 엘리트를 불신하는 것이 옳은 경우도 많다. 분석적 추론은 때때로 직관적 인지를 제대로 대체하지 못한다. 현대 합리주의의 오만을 상술하는 방대한 문헌이 존재한다. 엘리트들은 유행하는 이론에 굴복하기 십상이다(그리고 최근 보았듯이 도덕적 공황에 취약하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대의를 위해 그런 지적인 유행에 반대하려는 다른 엘리트들을 찾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특정 영역에서는 엘리트 내부 간 합의가 매우 견고한 경우도 있다. 이는 상식이 명백히 틀린 영역에서 가장 강력하며, 따라서 증거를 연구하거나 기꺼이 분석적 추론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나 엘리트의 견해를 공유하게 된다. 이러한 영역에서 인민은 인지 엘리트3cognitive elite들로부터 동맹을 찾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이는 분노와 원한을 야기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커진다.
이렇게 쌓인 불만은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이용하는 기회를 창출한다. 민주적 정치 체제는 여론에 상당히 반응하지만 여전히 엘리트 통치 시스템이므로, 인민이 아무리 화를 내거나 속상해해도 진정으로 그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는 특정 문제들이 있다. 이는 엘리트들과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기관(예: 전통 정당)을 우회하여 이러한 불만을 자원으로 활용하고 스스로를 인민의 옹호자로 내세우려는 동기를 유발한다. 포퓰리스트에 대해 주목할 점은 그들이 인민의 모든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상식과 엘리트 의견 간의 격차가 가장 큰 특정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인민의 견해를 옹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포퓰리즘이 왜 효과적인 정치 전략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왜 SNS 시대에 훨씬 더 효과적이 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카너먼의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직관적 인지의 핵심 특징은 '빠르다'는 것이고, 분석적 추론은 '느리다'는 것이다. 이는 의사소통 속도의 가속화가 분석적 사고보다 직관적 사고에 유리함을 의미한다. 포퓰리스트들은 늘 최고의 30초짜리 TV 광고를 만들 것이다. SNS는 모든 게이트키퍼를 제거해 엘리트가 더 이상 대중 커뮤니케이션을 통제할 수 없게 만듦으로써 문제를 더욱 증폭시킨다. 이로 인해 엘리트들을 우회하고 불만을 품은 계층에 직접 호소하기가 쉬워진다. 그 결과 분석적 사고 방식에 훨씬 더 적대적인 커뮤니케이션 환경이 조성된다.
이러한 결과들을 검토해 보면, 왜 특히 선진국에서 좌파가 이러한 변화로부터 많은 동력을 얻지 못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사람들은 경제 엘리트에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 인지 엘리트에 반발하고 있다. 좁게 해석하면 이는 집행 기능4에 대한 반란이다. 보다 일반적으로는 착취, 소외, 중독, 낙인을 피하기 위해 인지적 억제와 통제를 끊임없이 행사할 것을 요구하는 현대 사회에 대한 반란이다. 엘리트들은 기본적으로 사회 전체를 조작하여, 사회생활을 성공적으로 헤쳐 나가기 위해 점점 더 엘리트가 소유한 인지 기술을 사용해야만 하도록 만들었다. (분석적 처리 과정 없이 은행 계좌를 개설하거나, 아파트를 임대하거나, 세금 환급을 받으려 해보라.) 진보를 선호하는 한 좌파는 본질적으로 개인에게 가장 큰 자기억제의 부담을 지우는 현대 세계의 특징을 강화하려는 편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사람들이 왜 '언어 순찰language policing'과 같이 사소해 보이는 문제에 그토록 흥분하는지 이해하기 쉬워진다. 발언에 있어 '정치적 올바름'(PC)을 요구하고 이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처벌하거나 배척하는 것의 문제는, 모든 대화를 스트룹 검사5로 만들어 엘리트들에게 자기통제력을 과시할 기회를 준다는 점이다. 이는 보통 사람이 말하는 동안 떠오른 친숙한 단어(예: '홈리스homeless')를 적극적으로 억누르고, 명시적 인지를 통해 현재 선호되는 새로 만들어진 단어(예: '거주불명unhoused')로 대체할 것을 요구한다. 엘리트들은 이것이 많은 사람에게 부과하는 부담에 무감각할 뿐만 아니라 아예 무시해버린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러한 인지적 작업을 매우 유연하게 수행함으로써 자신들의 우월성을 과시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염장을 지른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they/them' 대명사 요구가 일부 사람들을 더욱 화나게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복수 대명사의 도입은 동사 변화를 강제하며 이는 훨씬 더 까다로운 인지 수행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분석은 포퓰리즘이 단순한 전략임에도 불구하고 왜 특징적인 이념적 어조와 내용을 갖게 되는지 설명한다. 핵심은 그것을 특정 인지 스타일에 특권을 주는 정치 전략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직관적(시스템1) 인지의 특권화는 대부분의 포퓰리즘 운동에서 발견될 수 있는 다양한 특징들을 생성한다. 다음은 그런 특징들의 일부 사례다.
1. 특정 문제에 대한 엘리트들에 대한 불만
범죄는 계속되는 불만의 원천인데 '범죄에 엄격한' 태도를 공언하는 엘리트들조차도 처벌이 법적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 원인 중 하나다. 이는 경찰이 약식 처형을 집행하도록 권한을 부여한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나, 도시 경찰력에 의한 '거리의 정의'로의 회귀를 명시적으로 승인하고 미군을 이용해 (현재까지는 국제해역에서만) 약식 처형을 감행한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같은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에게 기회를 열어준다. 유사한 불만이 발생하는 다른 문제들도 있는데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민과 국제무역이다. 예를 들어 경제학자들은 수입 관세가 수출세와 동일하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인구의 20% 이상이 이러한 결론에 이르는 추론의 사슬을 기꺼이 따르거나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이민이 노동력의 공급과 수요를 모두 증가시키기 때문에 실업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매우 비직관적이며 때문에 엘리트들은 대중보다 이주가 노동시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훨씬 더 안일한 견해를 갖게 만든다. (그러고 나서 엘리트들은 이러한 불일치를 도덕화하여, 대중의 입장이 인종차별에 의해 동기 부여된 것이 틀림없다고 암시함으로써 상황을 악화시킨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을 더 똑똑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나머지 구성원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존재로 내세운다.)
2. 집단행동 문제
포퓰리스트들은 언제나 집단행동 문제(예: 기후 변화)를 더 악화시킨다. 나쁜 일이 생길 때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려는 충동이 생기기 마련인데 집단행동 문제에서는 당신이 겪는 나쁜 영향이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상황이 대칭적이라는 것, 즉 그들이 겪는 나쁜 영향은 당신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둘 다 멈춰야 하고, 유인에도 불구하고 무임승차를 삼가야 한다는 인지적 통찰이 필요하다. 반면에 직관은 올바른 반응이 다른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라고 제안하며 이를 수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반적으로 이탈하는 것이기 때문에, 직관적 반응은 집단행동 문제를 최악을 향한 경쟁으로 바꾼다. 이것이 문명이 야만으로 붕괴하는 이유이다.
3. 의사소통 스타일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의 매우 두드러진 특징은 대본이 없고 의식의 흐름과 같은 특성을 지닌 그들의 말하기 스타일이다(예: 우고 차베스의 TV 쇼 '알로 프레지덴테Aló Presidente'를 보라. 트럼프도 충분히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이는 주류 정치인들이 선호하는 자기 통제적이고 계산된 말하기 스타일(프랑스인들은 이를 '랑그 드 부아langue de bois'라는 완벽한 용어로 표현한다)과 정반대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것이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거짓말일 때조차도 인구의 상당 부분에게 더 '정직하다'고 인식되는 이유이다. 엘리트들은 일반적으로 발언의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이 말해지는 방식은 무시한다. 종종 이것은 그들 자신이 통제된 말하기 스타일을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하는 것에 개의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말하는 것과 그가 생각하는 것은 정확히 일치하는 게 분명하다. 실제로 그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데 필요한 언어적 자기억제력이 분명히 부족하다. 이것이 사람들이 그를 신뢰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특히 신뢰성을 판단하기 위해 분석적 평가가 아닌 직관적 단서에 의존하는 경우 더욱 그렇다. (상스러운 말을 사용하는 것은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언어적 억제가 부족함을 보여주기 위한 또 다른 일반적인 전술이다. 전통적인 정치인들은 때때로 이것을 모방하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하는데 중요한 의사소통 효과를 달성하는 것이 상스러움 그 자체가 아니라 '탈억제'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4. 비자유주의
포퓰리스트들은 법치주의를 존중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 그들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내놓는 설명을 들어보면 그들의 사고에 구체성에 대한 편향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규칙의 목적이 나쁜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막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신들은 좋은 일을 하려는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왜 규칙에 제약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정당을 동등하게 대하는 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는다. (미국인들은 현재 이러한 모습을 끊임없이 목격하고 있다.) 불행히도 자유주의 정치 철학을 가르치는 우리들이 알다시피, 모든 자유주의 원칙의 기초에는 본질적으로 추상화하려는 노력이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이를 '박해자의 논리'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옳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박해할 수 있지만... 그들은 그르기 때문에 우리를 박해해서는 안 된다." 다른 많은 자유주의적 보호 장치에도 동일한 추상화의 노력이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포퓰리스트들은 변호사들이 '범죄자를 변호한다'고 종종 불평한다. 변호사는 범죄로 기소된 사람들을 변호하며, 이들 중 다수가 실제로 범죄자라 할지라도 법적 대리를 요구하는 절차를 통해 그러한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그들을 그렇게 기술할 수 없음을 알기 위해서는 인지적으로 분리된 표상representation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포퓰리스트들은 이해상충 규칙을 따르는 것을 매우 어려워하는데 이러한 규칙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판단이 부적절하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 처하는 것을 피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설적 구성은 직관에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실제로 나쁘지만 않다면 그 행동을 허용하려는 강한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5. 음모론
많은 사람이 왜 포퓰리스트들이 음모론이나 '음모론적' 사고에 그토록 끌리는지 궁금해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직관적 사고에 특권을 부여하면서 생기는 당연한 결과이다. 인간 심리의 자연스러운 편향은 아포페니아6, 과잉행위자 감지, 확증편향의 조합을 통해 음모론을 믿는 쪽으로 향한다. 합리적 의심은 위양성false positive을 제거하기 위해 고안된 명시적인 테스트 절차를 후속으로 부과함으로써 달성된다. 즉, 음모론적 사고를 적극적으로 억제해야 한다. 포퓰리스트들이 그러한 기각override과 관련된 인지 스타일을 거부하는 한, 그들은 다양한 비합리적인 사고 패턴에 스스로를 노출하는 것이다. 엘리트들에게 비판을 받을 때 많은 이들이 음모론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그들에게 강요되는 인지 스타일이 바로 그들이 엘리트에 대해 가장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간략한 목록일 뿐이며, 더 많은 것을 추가할 수 있다. 필자는 특히 좌파 포퓰리즘에 대해, 즉 그것이 효과가 있었던 일부 사례에서 왜 효과가 있었는지, 그러나 오늘날 부유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왜 효과가 없을 것인지에 대해 여기서 많이 언급하지 않았다. 더 궁금한 사람들이 있다면, 필자는 약 10년 전에 이것에 관한 책7을 썼다. 거기서 필자는 특히 포퓰리즘이 아닌 '상식적 보수주의'의 부상을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불행히도 이 책은 트럼프가 당선되기 전에 출판되어 상당히 빨리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었다. 개정판을 낼까 고심했지만 과도한 작업이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러나 이 책에는 포퓰리즘의 강점과 약점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분석의 틀로 이중 과정 심리학을 사용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위에서 제기된 모든 주장에 대한 상당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
조지프 히스는 토론토대학 교수로 철학과와 공공정책·거버넌스 학부에서 강의하고 있다. 노스웨스턴대학에서 토머스 매카시와 위르겐 하버마스의 지도 아래 박사학위를 받았다. 행위 이론, 기업 윤리, 비판 이론, 정치철학 등의 분야를 주로 연구하며, 저서로 '혁명을 팝니다',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계몽주의 2.0' 등이 있다.







'포퓰리즘'은 요즘 정치를 다룰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개념이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늘 항상 논쟁의 대상입니다. 포퓰리즘을 특정한 정치 사상으로 규정을 하려다 보면 꼭 모순에 부딪힙니다. 요즘에는 우파에서 극우를 아우르는 특정한 흐름을 포퓰리즘이라고 묘사하곤 하지만 과거에는 좌파 포퓰리스트(특히 남미에서)도 적지 않았죠.
캐나다의 철학자 조지프 히스 토론토대학 교수는 포퓰리즘을 사상이 아닌, 특정한 사고방식을 앞세우는 정치 전략으로 규정합니다. 대니얼 카너먼이 널리 알린 '빠른 사고'와 '느린 사고'의 구별(이중 과정 이론)을 바탕으로, 현대 사회에서 포퓰리즘이 득세하는 원인이 현대 미디어와 정치 환경의 변화에 있다고 분석합니다. 우리의 뇌는 빠르고 감정적인 직관('시스템1')과 느리고 신중한 이성('시스템2')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하는데, 현대의 미디어와 정치 환경은 끊임없이 빠르고 충동적인 시스템1을 자극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히스 교수가 자신의 서브스택에 올린 후 화제가 됐던 글을 필자와의 협의 하에 PADO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히스 교수는 아들의 그림도 사용하는 걸 허락했습니다.) 읽어보시면 요즘 한국 정치의 많은 부분도 이러한 포퓰리즘적 사고 방식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포퓰리즘의 득세에 대해 '신중한 이성의 정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히스 교수는 10여 년 전에 출간했던 '계몽주의 2.0'에서 이에 대해 몇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이성을 방해하는 외부 환경 앞에서, 개인이 아무리 노력하여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해도 쉽게 압도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히스 교수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더 열심히 생각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개인의 의지력을 탓하기보다 이성을 방해하는 시스템 자체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히스 교수가 제시하는 해법은 '느린 정치'라는 이름 아래, 이성이 자연스럽게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집단적으로 구축하는 것입니다. 이 프로그램의 핵심은 개개인을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제도와 사회 시스템을 신중한 사고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재설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기 어렵게 만들고, 느리고 숙고하는 과정(시스템2)이 정치적 결정에 반영되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매체의 변화가 가져온 정치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이에 대해 많은 숙고를 해봐야 할 것입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에서 포퓰리즘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무기는 '느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