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PADO (생성형 AI 사용)
2026.01.23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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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에 대해 고민이 깊어질 때면 내 뇌의 생존 기제는 머리를 비우고 몸을 움직이라고 말한다. 내가 오랫동안 선호한 '체화된 경험1'은 텍사스 소도시의 대형 쇼핑몰에 있는, 드래그퀸이 가라오케를 진행하는 바이커 바에서 밤을 보내는 것이었다.
밖에서 보면 그 바는 평범했다. 그 안은 온갖 종류의 사람들로 북적였다. 대학생과 여피, 노인과 빈 둥지 증후군을 겪는 중년, 바이커와 카우보이,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 현지인과 여행객 등 사회경제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것이 내가 '크로스로드'에서 가장 좋았던 점이다. 그곳은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그곳은 훌륭한 남부의 허름한 술집이 갖춰야 할 모든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녹색과 파란색으로 빛나는 네온사인, 저렴한 국산 맥주병이 진열된 선반, 언제나 끈적이는 바닥, 더위를 식히기 위해 벽에 달린 회전 선풍기까지. 구석에 바닥에서 60cm 정도 올라온 무대가 있고 뒷벽에는 바가 있는 작은 단칸방 점포였다. 2인용 테이블이 몇 개 흩어져 있었지만 대부분은 사람들이 춤추고 즐길 수 있도록 가장자리로 치워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곳에 간 지 10년이 흘렀다.
가라오케 기계를 담당했던 드래그 퀸 비욘카 들레온은 그곳에서의 첫날 밤을 아직도 기억한다. "관중을 내다보며 '세상에 오늘 뭔 사건 하나 터지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바이커, 레드넥, 트윙크 게이들까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현재 스스로를 트랜스 여성으로 정체화한 들레온이 회상했다. 하지만 곧 들레온은 자신의 두려움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곳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방문하는 술집이었어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죠." 들레온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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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야기해 본, '크로스로드'에서 시간을 보낸 모든 사람들은 그곳을 똑같이 기억한다. 목청껏 노래하는 인간애의 축제, 미국의 용광로melting pot 실험이 실제로 성공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장소였다고.
불행히도 크로스로드는 코로나19 팬데믹을 이겨내지 못하고 2021년에 문을 닫았다. 하지만 교훈을 유산으로 남겼다. 계급, 인종, 정치, 알고리즘에 의해 점점 더 고립되는 오늘날, 크로스로드 같은 장소는 신성한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 공동의 안녕에 필수적인 것, 바로 사회적 마찰을 받아들이게끔 만든다.
우리 인간은 배경, 세계관,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이 상호작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긴장감인 사회적 마찰에 대한 내성이 낮을 수 있다. 어색하고, 불편하며, 불안감을 조성할 수 있다. 이러한 집단 간 불안감은 때때로 편견, 거절이나 비판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에서 비롯된다. 무의식적이든 아니든 우리는 바깥집단을 피하고 우리에게 익숙하고 안전하게 느껴지는 사람과 경험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방해물과 마주치지 않을 수 있다면 먼 길을 돌아간다.
그래서 다양한 이유로 우리는 스스로를 분열시킨다. 2020년 미국 생활 설문센터Survey Center on American Life의 연구에 따르면 대다수의 백인 미국인은 자신의 핵심 사회 관계망이 다른 백인들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한다. 마찬가지로 이 연구는 대부분의 흑인 미국인의 핵심 사회 관계망이 다른 흑인들로만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같은 패턴이 공화당원과 민주당원에게도 해당된다. 이러한 종류의 동질적인 사회관계망은 고정관념에 대한 당파적 신념과 가설을 팩트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다.
소셜미디어는 정체성의 단편적인 부분을 갖고 스스로를 정의하려는 인간의 충동을 이용한다. 온라인 세상에서 우리는 손가락 하나로 거의 무한한 범위의 사람들과 생각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우리의 기존 신념, 편견, 이상을 강화하는 '필터 버블'과 반향실echo chamber로 이끌린다. 이제 우리는 손 안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리고 누구든)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완벽한 저녁 식사, 최고의 제품, 이상적인 연인까지. 우리의 명시적인 선호도에 맞지 않거나 우리의 안락한 영역을 벗어나는 모든 것을 피하기 쉬워졌다.
이러한 최적화에는 대가가 따른다. 우리가 누구와 교류할지 클릭 한 번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되면, 우리는 우리를 분열시키는 불만에 의해 이용당하는 약소 부족tribe들로 더 나눠진다. 용서와 회복, 책임과 정의의 진흙탕을 헤쳐나갈 능력을 잃게 된다. 사회적 마찰을 헤쳐나가지 못하면 우리는 사회와 민주주의로서 기능할 능력을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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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프라인 세계에서도 고립되어 있다. 수십 년 동안 계층에 따른 주거 분리가 심화돼 왔다. 1970~2009년 사이에 저소득층 또는 부유층 지역에 거주하는 미국 가정의 비율이 두 배 이상 증가했으며, 소외된 지역사회의 가정은 불균형적인 주거 고립을 경험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내슈빌에서는 흑인과 히스패닉 가정이 중위가격대 주택의 99%를 재정적으로 감당할 수 없다.)
점점 더 부유한 지역사회는 부유하게 유지되고 가난한 지역사회는 가난하게 유지된다. 연구자들은 '기회 격차'로 인해 이러한 계층화가 지속된다고 한다. '상향 이동upward mobility'이라는 미국의 약속은 계급 간 분리에 의해 가난한 채로 남겨지는 지역사회에게는 대체로 신화가 되었다.
이러한 계급 간 상호작용의 부재는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집단 간의 제한된 접촉은 불신을 낳고 이미 격렬하게 분열된 시기에 양극화에 기여할 수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유권자의 거의 절반이 상대 정당의 구성원을 '악'이라고 생각하며, 점점 더 많은 미국인들이 미국적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정치적 폭력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사람들은 종종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작업이 사람들을 한 방에 몰아넣고 의미 있고 비판적인 대화를 나누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리이매지닝 더 시빅 커먼스Reimagining the Civic Commons의 이사인 브리짓 마퀴스Bridget Marquis에 따르면 이것은 오해다.
"공원, 산책로, 도서관, 커뮤니티 센터, 동네 중심가 등과 같은 시민 인프라는 우리 지역사회에서 고독과 사회경제적 분리에 맞서기 위한 문자 그대로의 공통 기반 역할을 하는 독특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퀴스가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시민 생활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 공원, 도서관, 박물관, 커뮤니티 센터와 같은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공간에 더 많이 접근할 수 있는 지역사회는 지역사회에 더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고, 의지할 수 있는 친한 친구가 더 많으며, 지역 회의, 사교 행사, 자원봉사 형태의 시민 참여에 더 많이 참여한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모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사회경제적 계층이 가장 많이 섞이는 장소는 올리브가든 같은 캐주얼 레스토랑 체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당 안에서 손님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과만 상호작용한다. 마퀴스가 발견한 것은 지역사회 공간 내에서 노래와 춤과 같은 공유 활동이 다양한 사회경제적 집단 간의 유대감과 신뢰 구축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이는 집단 간 접촉 이론에 뿌리를 둔 아이디어로, 적절한 조건이 충족되는 한 이질적인 집단 간의 접촉이 그들 사이의 편견의 영향을 줄이는 역할을 함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적절한 상황에서는 사회적 마찰에 치유력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이 크로스로드의 마법이었다. 그곳은 특정한 정체성이 없었고 어느 한 그룹에도 속하지 않았다. 가죽 옷을 차려입은 바이커들이 크롭탑과 스판덱스를 입은 게이들과 어울렸다. 누군가 좋은 비트의 컨트리 노래를 부르면 카우보이들은 대학생들과 투스텝을 추곤 했다. 내 친구 허치는 매일 밤 솔트앤페파2의 '슙Shoop'을 불러 좌중을 열광시켰다. 우리는 그가 "얘들아, 내 약점이 뭐지?"라는 대목을 부르기를 고대했다.
가게의 전 주인 리처드 언더우드는 크로스로드를 특별하게 만든 것은 바로 가라오케였다고 주장한다. "모두가 항상 저에게 크로스로드가 게이바냐고 물었어요." 언더우드가 말했다. "저는 항상 가라오케 바라고 답했죠. 네, 저는 게이지만 여긴 가라오케 바예요." 언더우드는 현재 더스티스라는 다른 바를 운영하고 있으며 그곳은 가라오케 음악을 중심으로 한 또 다른 정체성의 용광로가 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하는 방식으로 어울려요." 그가 말했다. "최근에 바이커와 카우보이, 레즈비언 테이블, 그냥 맥주 마시는 사람들 테이블이 있는 쇼를 했는데 모두가 잘 어울리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크로스로드는 '허브 공간hub space'이었다. 지역사회 공간은 안식처haven, 아지트hangout, 허브hub라는 세 가지 H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경향이 있다고 마퀴스는 말한다. 안식처는 소속감을 주는 보호된 공간으로, 정체성이 중요하며 그 보호의 배타성이 내부 집단에게 안전을 제공한다. 아지트는 사람들이 그냥 그곳에 있을 수는 있지만 상호작용하지 않을 수도 있는 중립적인 공간이다. 허브는 인종, 계급, 이념적 경계를 넘어 정체성의 상호 교류와 사회경제적 혼합을 장려하는 공간이다.
건강한 지역사회는 세 가지 유형의 공간 모두의 균형이 필요하다고 마퀴스는 말한다. 그러나 알고리즘적 분류와 다른 형태의 분리는 우리를 사실상 상자 속에 밀어 넣어, 우리가 동일시하는 모든 공간을 사회적 마찰이 없는 안식처처럼 느끼게 하고 그 경험 밖의 모든 공간을 위협으로 느끼게 할 수 있다.
제3의 공간, 즉 허브 공간은 대화 거리(말 그대로 팔꿈치가 스치는 거리)를 위해 물리적으로 설계되어야 하며 즉흥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소통과 연결의 기회를 의도적으로 창출하는 프로그램을 통합해야 한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사회적 분열을 해소하는 필요한 작업은 정책 개입뿐만 아니라 동네 가라오케 바, 볼링장, 도서관, 대중교통 또는 교회 안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내가 어린 시절 다녔던 교회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종교가 아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찬송가, 음정이 맞지 않는 수십 명의 농부들의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무조의 웅얼거림, 중요한 음을 놓치지만 대부분은 맞추는 오르간 연주자, 어른들이 성찬을 받기 위해 줄을 서기 전의 주기도문 합창, 제단에 무릎을 꿇었을 때 정장 바지 아래로 삐져나온 남자들의 진흙 묻은 장화 모양, 그리고 목사가 모두가 함께 쓰는 잔에서 그들의 입술에 포도주를 기울여주는 모습이다.
우리는 텍사스 중부의 한가운데, 집들이 흩어져 있고 탁 트인 땅이 있는 목장 지역사회의 단칸짜리 목조 교회에 다니는 작은 신도회 소속이었다. 교회는 1900년대에 기찻길이 놓이면서 지어졌고 원래의 신도회(우리 가족 포함)의 같은 후손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니고 있다. 그 교회로 돌아가면 나는 역사, 세대의 기억, 그리고 전통에 둘러싸인다.
나는 어린 시절 교회에 찬송가, 성찬 의식, 소풍과 바비큐, 기도가 없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울타리 자기 편에 조용히 머물며 철조망 건너편 이웃을 의심하는 사람들. 가라오케가 없는 크로스로드를 상상하면 이질적인 공동체들 사이에 같은 정도의 사랑을 느끼기 어렵다. 사람들이 무리지어 고립되고, 초조하게 방을 훑어보고 자신이 이곳에 속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테이블에 지폐를 던지고 떠나는 모습을 상상한다. 두 곳 모두 더 조용하고, 더 슬프고, 더 무섭고, 불확실한 장소가 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조각이 빠져 있는 것이다.
기술은 마찰 없는 존재를 자랑하지만 마찰은 삶을 살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 중 하나다. 우리가 실수투성이의 마찰로 가득 찬 세상을 더 매끄럽고, 더 편리하고, 더 예측 가능한 경험으로 교환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영혼을 가지고 있음을 잊는다. 우리가 기술과 상호작용하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지를 고려하면 이해할 만하다. 우리의 화면에는 영혼이 없다. 챗GPT가 우리의 좌절을 얼마나 이해한다고 말하든 그것에는 영혼이 없다. 우리는 마치 휴대폰이 우리의 친구, 중재자, 멘토, 상담사인양 부여잡고 복음의 흔적, 웃을 거리, 우리가 주목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무언가를 찾아 스크롤한다. 우리는 슬롯머신 손잡이를 당기듯 엄지손가락으로 피드를 아래로 당겨 새로 고친다. 어쩌면 이번에는 잭팟이 터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번에는 나를 온전하게 느끼게 해주는 무언가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혼이란 무엇인가? 영혼은 양심과 어떻게 다른가? 나에게 영혼과 양심은 완전히 다른 두 존재이다. 양심은 타인에 대한 의무를 상기시키는 잔소리 같은 내면의 목소리이고, 영혼은 자신에 대한 의무를 상기시키는 잔소리 같은 내면의 목소리이다. 그러나 영혼은 타인을 돌볼 것을 요구한다. 타인을 돌보는 것이 우리 자신을 치유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은 불편하다. 우리는 개인적인 일정에 맞춰 재앙을 계획할 수 없다. 우리는 슬픔에 데드라인을 정할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적절한 때에 적절한 말을 할 것이라고 100% 확신할 수 없다. 우리는 불확실성의 마찰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행동해야 한다.
"우리 삶과 신앙에는 수평적, 수직적 관계가 있습니다." 나의 옛 교회 목사인 네이트 목사가 말한다. 그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젊은이다. 그는 10년 전 20대 후반에 우리 교회에 왔다. 나는 그가 이 노인들—특히 길고 고집 센 성미를 가진 혈기왕성한 텍사스 카우보이인 내 아버지를 다루는 데 애를 먹으리라고 생각했던 걸 기억한다.
하지만 네이트 목사는 적응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신념이나 정체성에 관계없이 모두가 환영받는다고 느끼게 하는 능력 덕분이었다. 마치 크로스로드와 더스티스에서 길 잃은 영혼들을 비공식적으로 모으는 언더우드처럼.
"수직적 관계는 신을 향해 살아가는 우리 삶의 부분들이고, 수평적 관계는 이웃을 향해 살아가는 우리 삶의 부분들이지요." 네이트 목사가 말한다. "수평적인 관계에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수직적인 관계가 필요해요."
우리가 인정하든 안 하든, 인간은 육체적, 감정적, 영적 영역에서 산다. 우리 존재의 육체적, 감정적 건강에는 기꺼이 주의를 기울인다. 하지만 우리 영혼의 건강에 관해서는 어떨까? 우리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더 큰 의미와 어떤 식으로든 교감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우리는 방황하고, 고립되고, 길을 잃게 될 것이다.
나는 오래전에 교회에 다니는 것을 그만두었다. 교회 자체를 그리워한 적은 없지만 교회의 느낌은 그리웠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체화된 경험으로서의 교감을 느끼는 것이다. 다른 인간들과 물리적 공간에 함께 있는 것. 이 모든 인간들을 알거나, 그들과 동일시하거나, 심지어 그들에게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에게 환영받는다고 느껴야 한다. 그들은 기꺼이 나와 함께 노래해야 한다.
요즘 나는 프랜스Fran's라는 허름한 술집에서 그 느낌을 찾는다. 한때 크로스로드가 그랬던 것처럼 프랜스는 모두가 자유롭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가라오케 나이트'가 있는 소박하고 편안한 분위기의 술집이다. 음악이 시작되면 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친구들과 나는 일찍 도착한다. 괜찮다. 왜냐하면 이 술집의 목적은 대화가 아니라 잡다한 흥청거리는 사람들과 함께 스트레스를 풀고, 소리 지르고,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랜스는 예전에 이스트 내슈빌의 안쪽에 위치했지만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디커슨 파이크 외곽으로 밀려났다. 반쯤 지어진 고급 콘도가 모텔들 위로 우뚝 솟아 있는, 여전히 변화 중인 내슈빌의 한 지역이다. 내부에는 어두컴컴한 당구대 두 개, 카드 테이블과 금속 의자가 뒤섞여 있고, 한 여성(프랜은 아니다)이 음료를 만드는 긴 바가 있다. 병과 캔만 팔고 현금만 받는다. 미안해요.
주머니에서 2달러50센트어치 동전을 꺼낸다. 2달러50센트면 팹스트블루리본(PBR) 한 병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아직도 10달러면 기분 좋게 취할 수 있다. 단골들은 구석에 앉아 바텐더를 괴롭히고 바텐더도 맞받아친다. 그들은 백인, 흑인, 노인들의 모임으로 모두 이 술집이 자기 집인양 여기고, 함께 있는 것을 행복해하는 것 같다.
가라오케가 공식적으로 시작된다. 술집 분위기를 살핀 후 나는 리앤 라임스의 '블루'를 선택한다. 어쨌든 우리는 내슈빌에 있고 이곳은 여전히 컨트리 바지만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게이들이 도착해서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채플 론을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당구대가 가득 차고 몇몇 나이 든 밀레니얼 아빠들이 술을 마시는 사이에 '틴에이지 더트백'을 부르러 달려온다. 내 친구 유리나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매니악'을 부르며 극적으로 머리를 동그랗게 휘두르고 러닝맨 춤을 춰 큰 갈채를 받는다. 나는 다시 올라가 내 컨트리 근본을 고수하며 '네온 문'을 부르고 단골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축배를 든다.
그들 중 한 명이 마이크를 잡자 좌중이 열광한다. 그는 50대 중반이지만 힘든 삶 때문에 10년은 더 늙어 보인다. 그는 낡은 티셔츠 아래로 뼈가 튀어나온 마른 체형에 더러운 청바지를 벨트로 지탱하고 있다. 그는 토비 키스의 '아이 러브 디스 바'를 마치 대화하듯이 노래한다. 화면의 가사를 볼 필요도 없다. 눈을 감고, 행복한 미소를 띠고, 가슴에 손을 얹은 모습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노래하는 남자의 전형이다. 우리 모두 그것을 느끼고, 우리 모두 그를 응원한다.
이 이상한 조합의 사람들이 이 술집 밖에서 서로를 만나 우리가 여기서 느끼는 것과 같은 종류의 사랑을 느끼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오늘 밤 이후에 우리가 거리에서 마주친다면 미소를 짓고 어쩌면 허그까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가라오케에서 곧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함께 노래할 때 훨씬 더 멋지다.
리사 부버트는 테네시 주 내슈빌에 거주하는 작가이자 사서이다. 롱리즈, 텍사스하이웨이즈, 웨스트브랜치 등에 글을 기고했다.






노에마 매거진에 실린 이 아름다운 2025년 10월 28일자 에세이는, 학문적 계보로 따지자면 '공동체주의'에 닿아 있습니다. 이 글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마찰friction'입니다. 사전적으로는 자칫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문맥을 살피면 우리네 일상어인 '부대낌'과 더 가까워 보입니다.
필자는 그 부대낌의 원형을 동네 '가라오케'에서 찾습니다. 밀폐된 방room으로 철저히 격리된 한국의 노래방과 달리 미국의 가라오케는 타인에게 열린 개방형 홀에 가깝습니다. 모르는 이들이 섞여 노래하고, 박수 치고, 취기에 소소한 시비가 오가기도 하는 그 소란스러움. 필자는 그것이 바로 공동체를 만드는 '부대낌'이라고 말합니다. 영국으로 치면 동네마다 있는 '펍pub'이 그런 공간일 것입니다. '퍼블릭 하우스public house'의 줄임말답게, 사람들은 그곳에서 맥주 잔을 부딪치며 축구를 보고 퀴즈를 풉니다. 단순한 술집이 아니라 동네 사랑방이자 지역 공동체의 산실인 셈입니다.
일본 정치학계의 거목 마루야마 마사오는 공동체의 본질을 '육체적 접촉'에서 찾았습니다. 가족이 살을 맞대며 정을 쌓듯, 지역 공동체 또한 악수하고, 어깨동무하고, 함께 땀 흘려 봉사하는 구체적인 신체적 접촉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이 에세이를 읽는 내내 무거운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과연 지금 한국 사회에 이런 '부대낌의 공간'이 남아 있는가? 타인과의 접촉이 거세된 사회에서 우리의 민주주의는 건강할 수 있는가? '마찰' 없는 사회가 과연 '안전'하기만 한 것일까? 독자 여러분도 삭막해진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염두에 두고, 이 글이 전하는 묵직한 울림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