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세상을 떠난 시인이자 신비주의자들의 수호자인 패니 하우(Fanny Howe)가 했던 이 말을 자주 떠올린다. "신호를 보낸다고 해서 반드시 자신이 발견되거나 규정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이 '찾아낼 수 없고'(Unlocatable) '숨겨진'(Hidden)것으로 알려지기를 바람일 수도 있다." 이 구절은 1998년에 강연으로 처음 발표된 그녀의 에세이이자 선언문인 「당혹」(Bewilderment)에서 나온 것인데, 나는 이 문장이 포착하고 있는 역설에 늘 특별한 매력을 느껴 왔다. 의도적으로 "찾아낼 수 없고 숨겨진" 신호를 보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대중을 향해 열려 있는 장르인 시에서 그러한 신호는 어떤 형태를 띨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몸짓은 과연 누구를 향해 주어지는 것일까?
모순과 은폐는 패니 하우의 글쓰기에서 핵심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그녀는 1940년 10월 반영 월식1(penumbral lunar eclipse) 아래에서 태어났는데, 그때는 그해 유난히 활발했던 일식과 월식의 계절이 막 끝나갈 무렵이었다. 자신이 탄생했을 때 달이 어떤 상태였는지는 그녀가 작품 곳곳에서 자주 언급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적절하게도, 빛이 가능성을 품고 불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들만큼이나 어둠에 깊이 천착해 온, 50권이 넘는 그녀의 길게 그림자 진 작품 세계와도 맞닿아 있다. 하우는 지난해 7월, 짧은 투병 끝에 매사추세츠주 링컨에서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고 있던 최후의 작업인 『이 초라한 책』(This Poor Book)은 지난 30여 년 동안 발표한 여러 시집의 작품들을 다시 불러와 하나의 길고 연속적인 서사시로 새롭게 엮어 낸다. 『이 초라한 책』은 놀라운 백조의 노래인 동시에, 여러 세계들 사이를 오가는 여행기이며, 한 시인이 자신의 유산을 갈무리하는 방식이자, 앞으로 오게 될 탐구자들에게 남길 미래의 유산을 향한 어느 신비주의자의 몸짓이다.
문학사에서 가장 저명한 집안 가운데 하나에서 태어났지만, 하우는 줄곧 문단의 이방인으로 남아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보스턴에서 시인극장(Poets' Theatre)을 공동 설립한 아일랜드 출신의 귀족 극작가 메리 매닝(Mary Manning)이었으며, 아버지 마크 드 울프 하우(Mark De Wolfe Howe)는 보스턴의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인 하버드대학교 교수였다. 언니는 시인 수전 하우(Susan Howe)이다. 패니 하우는 1960년대에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대중 로맨스 소설을 발표하며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의 작품은 통속적인 면과 시적인 면을 거의 같은 비중으로 간직한 채,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 계시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이 초라한 책』에서 그녀는 이렇게 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 몇십 년을 평화롭게 살아갈 특권을 누렸으니까." 그러나 곧이어 시는 초월의 차원으로 나아간다. "바람에 앞서는 소리. / 약강 운율2(iambic)을 뒤따르는 노래. / 나는 당신을 느낀다, 당신이 오는 것을 느낀다." 평생에 걸친 영적 탐구의 흔적은 그녀의 작품 곳곳에서 반짝인다. 하우는 독서를 통해 수 세기에 걸친 신비주의와 지성사의 전통을 폭넓게 섭렵했고, 그녀의 시와 소설, 에세이는 부정의 길(Via Negativa)을 따르는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신성한 어둠', 『우파니샤드』, 수피 신비주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와 시몬 베유(Simone Weil)의 저작, 그리고 (하우가 20년 넘게 꾸준히 찾았던 영적 안식처인) 아일랜드 글렌스털 수도원(Glenstal Abbey) 베네딕토회 수도사들의 사상을 더듬어 가면서 이 방대한 독서의 흔적을 드러낸다. 하지만 하우는 『이 초라한 책』에서 불의한 세계에서는 영성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도움을 외치는 사람들에게 신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라고 그녀는 묻는다. "그들은 미친 걸까? 왜 자기들의 노동이 사장의 주머니로 들어간 돈 말고는 /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는 걸 알지 못하는 것일까?" 그리고 조금 뒤에는 다시 이렇게 적는다. "돈은 언제나 / 거대했고 눈에 보이지 않았다, 마치 신처럼."
인종 간 결혼이 합법화된 지 불과 1년 만인 1968년에 흑인 인권운동가 칼 세나(Carl Senna)와 결혼하며 귀족적인 가문과 결별한 하우는, 언제나 신비주의적 지혜와 해방의 정치 사이를 걸어왔으며, 『이 초라한 책』 역시 예외는 아니다. 가장 인상적인 구절 가운데 하나에서 그녀는 "빛을 잃은 별들이 다른 별들을 떠받치고 있다"고 말하면서, 저항의 방식들이 태어나고 이어지는 연대의 보이지 않는 그물망을 눈부시게 형상화한다. 하우의 딸이 회고록에서 "보스턴 역사상 가장 추악한 이혼"이라고 묘사했을 만큼 그녀의 결혼 생활은 엄청난 파국으로 끝났고, 하우는 세 아이를 홀로 키우는 어머니가 되었다. 그러나 정의를 향한 그녀의 헌신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2020년 『화이트 리뷰』(The White Review)와의 인터뷰에서 질문자는 얼마 전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 현장에서 하우를 목격했다고 언급한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여든이었다.) "어떤 투쟁도 / 개인의 생존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하우는 이렇게 쓰며, 그녀의 시는 끈질긴 연대가 만들어 내는 작지만 경이로운 기적들을 거듭 보여 준다. "이 작은 아일랜드 마을에서 / 팔레스타인 국기가 펄럭인다."
하우의 이미지는 문자 그대로 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녀의 작품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핵심 은유 중 하나는 밟혀도 다시 솟아오르는 풀이다. 『이 초라한 책』에서 그녀는 이렇게 쓴다. "갈색 풀과 팬지와 장미와 흰 클레마티스3와 헬레보어4. / 아래에서 살아가고 자비를 베풀며 아무런 권력도 갖지 않는 것을 기뻐한다. // 그들은 탑 위로 기어오르기보다는 차라리 뒤로 기어간다." 이것은 수평성(horizontality)의 시학이자 정치학이다. 인간과 비인간은 이곳에서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며, 위계에 맞서는 강력한 저항의 형식을 만들어 낸다. "신이 약해지고 미묘해졌을 때," 하우는 이렇게 쓴다. "새들의 노래가 나의 마지막 성찬이었다." 나는 하우를 반항의 전통에 속한 시인으로 본다. 다시 말해, 시몬 베유와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처럼, 정치적 감수성을 지닌 가톨릭 작가들의 계보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펑크적인 기질을 간직한 작가 말이다.
하우에게 가장 오래도록 영향을 끼친 사상가 중 한 사람이었던 시몬 베유 역시 신성한 어둠이라는 신비로운 저항의 공간에 머물렀으며, 그녀는 이를 "탈창조"(decreation)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신성한 어둠은 단순히 모호함을 위한 모호함이 아니라, 풍요로운 생성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하우는 "장미는 그 멍청한 흙 속에서 이미 분홍빛일까?"라고 물으며, 그녀의 작품 전반에서 이 어두운 흙은 거부, 그리고 공동체적 보호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된다. 의미심장하게도, 『이 초라한 책』에서 "모든 것 속의 일관성"을 찾으려 드는 존재는 오직 "경찰" 뿐이다. 신비로운 계시의 체험이 그러하듯, 급진적 정치는 흔히, 하우의 표현을 빌리면 "밤안개의 / 장막 아래에서" 나타난다. 『이 초라한 책』은 밤이라는 보호막을 통해 전해지는 한 편의 시이며, "별과 배 사이에 / 있는 한 아이"의 이미지로 시작된다. 하우가 이 책에서 직접 언급하는 윌리엄 블레이크처럼, 그녀 역시 자신의 작품에서 언제나 아이를 소중히 여겨 왔고, 확신보다 호기심을, 냉소보다 천진함을 택하는 아이의 시선을 존중해 왔다. 하우는 한때 자신의 시에 등장하는 "나"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낯선 사람", 곧 "존재라는 기이한 본성을 탐험하고, 사물의 표면을 만지고 느끼며, 아이가 그러듯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아무 힘도 없이 떠돌도록 소설 속 인물처럼 '세상으로 내보내진' 누군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초라한 책』에서 하우는 아이의 형상으로부터 원형적인 노파, 혹은 그녀가 사랑했던 아일랜드 신화 속 카일레흐5(cailleach)에 가까운 어떤 존재를 향해 시선을 옮긴다. 카일레흐는 세월의 풍파를 온몸에 새긴 지혜로운 노파이다. 이런 점에서 『이 초라한 책』은 마치 다음 세대에게 횃불을 넘겨주는 것과 같은 일이 되며,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과 손주들에게 건네는 하나의 선물이 된다. 시의 첫머리에서 화자는 아이에게 카일레흐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자, 그럼 차양을 내리자. / 이 초라한 책을 펼쳐 읽으렴."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서, 화자는 "차마 아래로 가져갈 수 없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커튼을 친다. 아래라니,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하우는 1982년 가톨릭으로 개종했는데, 공교롭게도 그해는 그녀가 담배를 끊은 해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라면, 적어도 신앙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아래로 내려가지는 않는다. 천국은 언제나 위쪽에 있는 곳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시인 피터 기지(Peter Gizzi)는 하우의 반항적인 천주교 신앙을 "참되면서도 이단적"(true and heterodox)이라 규정했고, 다른 글에서, 아일랜드 철학자 리처드 커니(Richard Kearney)는 하우를 "희극적인 신비주의자"(comic mystic), 혹은 "신비주의적인 희극인"(mystic comic)이라고 묘사했다. 유머는 하우의 시에 보기 드문 경쾌함을 부여한다. 『이 초라한 책』은 "상처는 모두에게 똑같지만 / 어떤 사람에게는 분노로 / 또 다른 사람에게는 킥킥거림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하우의 불경스럽고도 장난기 어린 웃음은 가장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 터져 나온다. 때로는 아이처럼 천진하고, 때로는 신랄하며, "도시에 속하기 위해 / 나는 나 자신을 모욕해 왔다"와 같이 많은 이들이 공감할 만한 씁쓸한 농담을 남긴다.
『이 초라한 책』의 신비로운 하강은 하우보다 불과 몇 주 먼저 세상을 떠난 동시대 시인 앨리스 노틀리(Alice Notley)를 떠올리게도 한다. 노틀리는 자신의 1992년 시집 『알레트의 하강』(The Descent of Alette)에 대해 "'여성적인' 서사시"를 쓰려는 시도였다고 말한 바 있다. 노틀리에 따르면, 여성적인 서사시는 필연적으로 두려움 없는 카타바시스6(katabasis), 곧 지하 세계로의 하강과 일상적인 삶을 함께 품어야 한다. 그것은 영웅적인 남성적 서사에 대응하는 부정의 공간이자, 달의 음(陰)과 같은 저승의 세계이다. 여러 저승 세계들을 가로지르는 긴 여정의 시인 『이 초라한 책』 역시 이러한 여성적 서사시의 계보에 놓인 작품으로 읽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버나뎃 메이어(Bernadette Mayer)의 1982년 장시 『한겨울날』(Midwinter Day)이나 아리아나 레인스(Ariana Reines)의 2019년 『모래의 책』(A Sand Book)까지도 포함하는 거대한 연결망 속에서 말이다.) 하우는 이동하는 도중에 자주 시를 쓰곤 했던 시인이었다. 그녀의 시에 등장하는 "나"는 기차나 자동차 안에 있거나 길을 걷는 경우가 많으며, 기차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는 이미지들을 기록한다. 한 번 눈을 깜빡이면 놓쳐 버릴 만큼 덧없는 장면들 말이다. 하우는 "무의식의 장소"는 "비어 있는 창가 자리"라고 쓰는데, 이렇게 스쳐 지나가는 꿈 같은 움직임은 대부분 짧고, 단편적이며, 이미지 중심으로 이루어진 그녀의 시행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물보라는
날씨 소식에
갈피를 잃은 마도요가 된다.
하늘은 얼음에 묻힌 물고기.
낮게 걸린 해가 있고
수평선 위로는
꼿꼿한 은빛 지팡이들이 서 있다.
그리고 아버지와 유령이 지나갈 때
키(rudder)는 신음 소리를 낸다.
하우는 때때로 난해한 시인으로 평가받아 왔으며, 앤서니 도메스티코(Anthony Domestico)가 『커먼윌』(Commonweal)에서 표현했듯이, "실험적 작가들의 실험적 작가"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분명 그녀의 작품을 온전히 평가하는 말이 아니다. 결국, 그녀의 시가 지닌 신비로움은 "찾아낼 수 없고 숨겨진" 신호를 보여 주는 증거이고, 그 신호는 역설적이게도 시 속에서 장난스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하우가 사랑했던 부정신학의 신비주의자들처럼, 그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의 핵심을 향해 그 주변을 나선형으로 맴돌며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간다. 그것이 그녀가 말하는 "밤의 철학"(night philosophy)이다. 물론, 밤은 시간의 단위이기도 하며, 하우는 시간에 대해 이렇게 쓴다. "시간은 길고 끝없는 평원, / 어느 쪽으로 몸을 돌리든 그 위를 가로질러 갈 수 있다. /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다시 연못 둘레를 걸을 수 있다." 하우를 읽는 가장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이와 같이 소용돌이치는 당혹감에 있으며, 그 당혹감은 동시에 하나의 자유이기도 하다. 『이 초라한 책』에서, 하우는 기차 안에서 다시 한번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을 불러낸다.
리머릭 정션(Limerick Junction)을 떠나
휴스턴 역(Heuston Station)으로, 그곳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감정을 발견하려 애썼다.
그는 지평선에 닿았다.
"철학은 오직 시로만 쓰여야 한다."
나에게는, 이것이야말로 비트겐슈타인의 사상 가운데 오래도록 강렬하게 다가오는 지점이고, 사람들이 더 자주 인용하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해야 한다는 그의 명제와 더불어 언제나 깊은 울림을 주곤 했다. 모든 뛰어난 시인이 그러하듯, 하우는 자신의 시-철학 속에 침묵을 스며들게 하는 데 능숙한 시인이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불러내어, 이미 표현된 것을 통해 울리게 만드는 그녀만의 방식이다. 언어의 틈 역시 하나의 창이 될 수 있고, 하나의 가능성이 될 수 있다. 시행의 행갈이는 그 틈으로 산소를 들여보낸다. 하우의 마지막 시는 길고도 끈질긴 덩굴손을 닮았다. 숨 쉬고, 나선을 그리며, 푸르게 자라나는 덩굴손 말이다. 가장 인상적인 연 가운데 하나에서 그녀는 이렇게 쓴다. "내게도 나만의 정원이 있었다 / 스물한 해 동안. / 일곱 그루의 나무, 세 번에 걸쳐 / 첫 아이들을 위해 심은. // 아, 그 땅은 초원이었다." 여기에서 하우는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유명한 선언을 새롭게 다시 쓰는 듯하다. 자기만의 방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원이라고 말이다. 정원은 완전히 야생적이지도 완전히 길들여지지도 않은, 그 중간 어디 쯤에 있는 그런 공간들 중 하나이다. 그곳에서는 "날씨가 / 돈과 전쟁보다 더 강력한 / 신이다." 정원은 마치 꿈과 같고, 특히 초원은 하나의 공유지(commons)이며, 시가 그러하듯이,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공의 야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