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방의 많은 사람들에게 중국의 부상은 더 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평론가들은 과거 마오쩌둥 시대 중국을 찬양하던 정치 순례자들을 떠올리게 하는 어조로 중국의 성공을 예찬한다. 투자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스티븐 래트너(Steven Rattner)는 올해 2월 중국 방문을 마친 뒤 중국의 "국가 주도 자본주의 모델"이 "세계 제조업을 지배하는 거대한 강자를 만들어냈고, 오랫동안 미국이 선도해온 첨단 기술 분야에서도 놀라운 진전을 이뤄냈다"고 평가했다. 경제사학자 애덤 투즈(Adam Tooze)는 지난해 중국이 "모더니티를 이해하는 마스터키"라고 단언했다. 반면 다른 이들은 보다 협소하고 전문관료적인 질문만 던지는 듯하다. 중국군은 내년 대만을 침공할 준비를 마칠 것인가, 아니면 몇 년 뒤가 될 것인가? 권위주의 정치체제는 시진핑 국가주석 사후에도 안정적인 권력 승계를 보장할 수 있을까? 제재를 극복하고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은 모두 중화인민공화국의 존속을 이미 기정사실로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에서 종종 간과되는 사실은 중국 지도부 스스로가 자기들의 '나라' 개념 자체에 암묵적인 의문을 품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 관리들과 많은 일반 국민은 중국 국경의 신성함을 격렬하게 주장하지만, 정작 국경 지역 상당수는 사실상 계엄에 가까운 통치 아래 놓여 있다. 동시에 공식 서사는 중국이 어떻게 이러한 영토를 획득했는지에 대한 일관된 설명을 허용하지 않는다. 더욱 광범위한 지적 쇠퇴의 결과로, 중국의 가장 뛰어난 지식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자기검열과 내적 망명 상태에 머물거나 아예 해외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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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원래 정체성의 위기를 겪을 이유가 거의 없는 나라다. 오랜 문명과 세계 어디서나 알아볼 수 있는 독특한 문화를 자랑한다. 무술, 의학, 철학, 종교로 이어지는 풍부한 지적 유산은 세계 대중문화와 순수예술에서 널리 존경받고 모방되고 있다. 그러나 중국 지도자들은 마치 아무런 역사도 없는 신생 국가를 운영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외국인들에게 자기네 국가를 반드시 "중화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를 것을 요구하고, 신성하며 결코 변하지 않는 국경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중국"만이 유일한 중국이라고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쉬궈치(徐國琦)는 신간 <중국이라는 관념: 하나의 논쟁사(The Idea of China: A Contested History)>에서 오늘날의 중국은 "확실하고 신뢰할 만한 정체성이 없는 여러 개 머리를 가진 괴물"이라고 썼다. "만약 분명하고 확고한 정체성이 존재했다면 오늘날 지도자들이 그것을 강요하는 데 그토록 집착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2012년 집권한 이후 거의 15년 동안 시진핑은 공산주의의 영광, 즉 희생, 의무, 인내를 전통문화의 일부 요소, 특히 효와 복종의 가치와 결합해 중국을 정의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사회정의에 대한 강조나 불복종할 권리처럼 두 이념체계(공산주의와 전통문화)가 지닌 전복적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중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오늘날 시진핑식 중국이 청 제국의 옛 영토를 유지하고 중국공산당의 권력을 보존하는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니는지, 또는 공산당의 국가 프로젝트가 중국의 역사적 혼종성(混種性)을 포용할 만큼 그 품이 충분히 넓은지가 여전히 불분명하다.
쉬궈치는 중국공산당이 내놓은 해답, 즉 중국의 다채로운 역사 위에 '카드로 쌓은 집(하우스 오브 카드)'을 세우겠다는 시도가 오히려 당의 몰락을 부를 수 있다고 본다. 소련 역시 제국의 토대 위에 근대적인 국민국가를 건설하려 했지만, 지도부가 그 프로젝트에 내재한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면서 결국 붕괴했다. <중국이라는 관념>은 중국공산당 역시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비슷한 운명을 맞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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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난 40여 년간의 정치적·경제적 성공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소련처럼 붕괴하는 일을 막아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쉬궈치의 책은 오늘날 존재하는 중국이 먼 미래에도 같은 모습으로 존속할 것이라는 가정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는 독자들에게 중국이 선택할 수도 있었던 여러 갈래의 길과, 그러한 길을 택하지 않은 결과를 상기시킨다. 가장 강력했던 시기의 '중국'이라는 개념은 문명적 개념이었다. 그것은 극단적인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도 다민족 제국과 광대한 영토를 하나로 묶어냈다. 그러나 중국이 힘에 의존했을 때는 오히려 취약하고 불안정한 국가가 되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중국은 물질적 결핍을 극복하며 세계적인 경제·과학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국가 정체성은 최초의 국민국가로서의 중국이 수립됐던 시절만큼이나 여전히 불안정하다. 이는 세계에 우려스러운 질문을 던진다. 스스로의 정체성에 이처럼 불편함을 느끼는 나라가 많은 이들의 기대처럼 국제 질서의 안정축이 될 수 있을지, 아니면 오히려 자신의 불안과 강박을 세계에 투사하며 국제 불안정의 원천이 될 가능성이 더 큰지에 대한 질문이다. 중국 정부는 전자를 지향한다고 주장하지만, 국내는 물론 점차 해외에서까지 나타나는 행동은 후자를 향하고 있음을 보인다.
이름에 담긴 것들
중국의 정체성을 둘러싼 혼란은 '중국'이 정치적 개념이 아니라 문화적 개념으로 출발했다는 역사에서 비롯된다. 중국은 중국어로 '中國' 즉 '가운데 나라'다. '中國'은 매우 오래된 용어지만, 19세기 이전까지는 외국인들이 China, Cina, Cathay, Kitay라고 불렀던 특정 국가를 가리키는 말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대신 중국의 관리와 문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통치 왕조의 이름으로 불렀다. 예를 들어 대청(大淸), 대명(大明)과 같은 식이다. 반면 자신들의 고대 문명을 가리킬 때는 화하(華夏) 또는 중화(中華)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들 명칭은 수세기에 걸쳐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영토의 이름은 누가 통치하느냐에 따라 달라졌다. 땅을 지배한 것은 왕조였고, 따라서 그 영토를 원하는 이름으로 부를 권한도 통치 가문에 있었기 때문이다.
근세 유럽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16세기 포르투갈의 군인이자 상인이었던 갈레오테 페레이라는 "우리는 이 나라를 차이나(China), 그 백성을 친스(Chins)라고 부르지만, 현지인들은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다고 말한다"고 기록했다. 이 문제는 19세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근대 국민국가의 등장으로 청 왕조는 다른 나라들을 더 이상 오랑캐나 조공국이 아니라 동등한 국가로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외국은 청의 영토를 '차이나' 또는 그와 비슷한 이름으로 불렀지만, 청 제국의 관리들은 이 명칭을 거부했다. 그들의 눈에 '차이나'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대청(大淸)뿐이었다. 일부 외교관들은 외국인들에게도 그렇게 불러 달라고 요구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세기 초 중국의 가장 유명한 개혁사상가였던 양계초(梁啓超)에게 이러한 혼란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1901년 발표한 글에서 중국인은 오랜 역사를 지녔음에도 "오늘날까지도 자기 나라를 부를 이름조차 없다"고 한탄했다. 그는 '차이나(China)'라는 명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름이 중국 최초의 왕조인 진(秦)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China'라는 단어는 진나라에서 비롯된 산스크리트어를 페르시아어가 받아들였고, 이를 포르투갈어가 차용하면서 16세기 유럽 언어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2천 년 전 어느 한 왕조가 자기 영토에 붙였던 이름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사용하는 셈이었다. 당(唐), 송(宋), 명(明), 청(淸)과 같은 왕조명을 나라 이름으로 쓰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것들은 모두 통치자가 남긴 이름일 뿐이었다. 량치차오는 현실적으로는 '차이나'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10년 뒤 청나라가 무너질 때까지도 정부 관리들은 그 명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같은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은 20세기 중반 공산주의들이 붙인 이름에 불과하며, 중국이 공산주의 국가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반대로 나라를 단순히 '중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공산당이 아닌 다른 세력이 그 나라를 통치할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내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국경 통제
중국 정부는 다문화 국가라는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인다. 많은 나라가 공공 홍보에서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내세우듯 중국도 비슷한 방식을 취한다. 중국은 유네스코에 특정 문화 관행을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할 때마다 몽골의 목노래(호미), 티베트 오페라, 위구르의 무캄 음악 모음곡처럼 소수민족의 문화 전통을 반드시 포함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으로도 이들 문화가 대부분 중국 역사에서 오랫동안 중국의 일부가 아니었던 변경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감출 수는 없다. 실제로 중국의 역대 왕조는 오늘날 '만주'로 통칭되는 동북 3성(랴오닝·지린·헤이룽장)을 구성하는 지역을 한 번도 지속적으로 지배한 적이 없었다. 몽골 대부분을 통치한 경우도 드물었고, 티베트나 오늘날 신장(新疆)으로 불리는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간헐적으로 원정대를 파견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들 지역에 대한 지배는 예외였을 뿐,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오히려 중국의 일반적인 영토 범위는 청나라 직전 왕조인 명(1368~1644)의 국경에 가까웠다. 명나라는 북쪽으로는 오늘날의 베이징 부근에서 남쪽으로는 홍콩 일대까지, 동쪽으로는 해안 지역에서 서쪽으로는 쓰촨 분지까지를 포괄했다. 서양인들은 오래된 중국 지도에서 이 지역을 '중국 본토(China Proper)'라고 불렀다. 거의 모든 한족(漢族)이 이곳에 거주했고, 중국의 전쟁과 우화, 신화, 역사 이야기가 대부분 이 지역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현재 중국 영토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중국의 국경은 청나라 시기에 급격히 팽창했다. 청은 17세기 명나라를 정복한 만주족이 세운 왕조였다. 만주족은 변경 지역에 대한 지식과 중원의 경제력, 그리고 근대 화기의 새로운 기술을 결합해 막강한 군사력을 구축했다. 청나라는 명나라 영토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지역을 차지하며 몽골과 티베트, 그리고 자신들이 '신장(新疆)', 즉 '새로운 변경'이라고 부른 광대한 중앙아시아 지역을 제국에 편입했다.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한반도와 인접한 만주 지역을 비롯해 청 제국의 나머지 영토도 모두 중화민국에 편입됐고, 그 통치권은 한족이 장악하게 됐다. 이후 1949년 중화민국 정부는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대만으로 철수했고, 중국공산당은 외몽골을 제외한 중화민국의 영토를 그대로 승계했다. 외몽골은 중화 제국으로부터 이탈해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고, 오늘날 독립국 몽골로 남아 있다. 과거 청 제국의 소수민족 지역 가운데 옛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유일한 사례였다.
공산당 지도자들은 집권하기 전에는 청나라가 정복한 지역들이 스스로 진로를 선택해야 하며, 독립도 허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마오쩌둥은 몽골인과 다른 소수민족뿐 아니라 자신의 고향인 후난성(湖南省)의 독립까지 지지했다. 당시 마오는 1921년 중국공산당의 탄생을 이끈 사상적 토대였던 신문화운동과 5·4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이 두 운동은 합리주의와 해방, 민족자결을 주장한 중국 근대의 대표적인 지적 각성 운동이었다. 중국공산당의 공동 창립자이자 두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던 천두슈(陳獨秀)는 중국의 현대화에는 기술 발전만큼이나 민주주의도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1912~1949)에서도 부분적으로만 수용됐고, 이후 중국공산당 집권 아래에서는 대부분 폐기됐다. 집권한 공산당은 중화민국의 국경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변경 지역에는 형식적인 수준의 자치와 문화적 인정만 허용했다. 소수민족 출신 인사가 해당 지역의 명목상 최고 책임자를 맡을 수는 있었지만,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공산당 서기는 대개 한족이었다.
중앙정부와 주변 지역의 관계를 둘러싼 이러한 굴곡은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았다. 다만 중국공산당 체제 아래에서 다른 형태로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국가 정체성에 남은 곪은 상처는 대만의 독립 움직임과 홍콩의 자치 요구, 그리고 계몽주의적 뿌리를 사실상 버린 정부가 이를 강경하게 탄압하는 현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을 제공한다.
폭력으로 점철된 과거
언어와 영토를 둘러싼 불안정은 정치적 불안정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국가 정체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법은 국가의 정치적 원칙을 담은 선언, 즉 헌법을 마련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쉬궈치는 중국이 그동안 수많은 헌법을 만들어 왔지만, 실제로는 "규제 법률이나 임시 문서, 일련의 지침, 혹은 통치자가 체제 유지에 맞게 수시로 수정하고 고쳐 쓴 형식적인 선언"에 불과했다고 지적한다.
불안정한 정치 구조는 다시 정치적 폭력을 낳았다. 쉬궈치는 "정치문화가 지속 가능한 제도 체계로 안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장제스에서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을 거쳐 오늘날 시진핑에 이르기까지 중국 지도자들은 "정치 문제를 해결하고 반대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하는 방식에 의존해 왔다"고 썼다. 장제스는 반대 세력, 특히 공산당을 진압하고 국가를 통일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작전을 벌였다. 4년간의 내전 끝에 1949년 집권한 공산당은 지주 계급을 제거하는 과정에서만도 약 200만~300만 명을 살해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어 1950~70년대 각종 정치운동으로도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마오의 후계자인 덩샤오핑은 1989년 학생 시위를 군대를 동원해 유혈 진압했고, 수만 명의 사회적 약자를 희생시킨 '엄타(嚴打)' 즉 '범죄와의 전쟁'도 주도했다. 시진핑 역시 특히 소수민족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 시민사회를 강압적으로 억압하고 있으며, 군 내부 숙청도 계속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러한 역사 대부분을 기록에서 지워버리려 한다. 마치 중국공산당이 1949년 이후 줄곧 중국을 자애롭게 통치했고, 한족과 소수민족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것처럼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 것이다. 이 서사의 핵심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 안에서 살아온 사람은 과거나 현재나 모두 '중국인'이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논리는 현재 내몽골에 묘소가 있는 정복자 칭기즈칸에게까지 적용된다. 가장 황당한 사례로, 중국 당국은 그를 "중화민족의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성공이 낳은 역설
<중국이라는 관념>은 매우 읽기 쉬운 책이면서도 중국의 제1차 세계대전 역할에서 국가의 스포츠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룬다. 다양한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쉬궈치의 필치는 예일대 역사학자 조너선 스펜스를 떠올리게 한다. 스펜스는 중국의 거시적 역사를 그리면서도, 황제들이 통치하던 시대 평범한 여성 한 명의 죽음 같은 작지만 의미 있는 이야기를 통해 시대를 조명하는 독특한 연구로 유명했다. <중국이라는 관념> 역시 큰 그림을 그리려는 시도지만, 스펜스의 대작 <현대 중국을 찾아서(The Search for Modern China)>처럼 종합적인 중국사가 아니라 오늘날 중국을 둘러싼 논쟁에 개입하려는 문제의식이 훨씬 강한 책이다.
쉬궈치는 오늘날 중국의 모습에 분명한 실망감을 드러낸다. 그는 마오쩌둥 시대 안후이성 농촌에서 성장했고, 중국이 개혁개방에 나서던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다. 이후 하버드대에서 공부하고 미국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지난 20년 가까이는 홍콩에서 생활하며 강의해 왔다. (책에서는 자유로운 사상과 사법 독립의 중심지였던 홍콩이 몰락해 가는 과정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는 중국이라는 개념 자체가 세계 여러 지역에서 훼손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그 원인으로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중국의 엘리트들이 포용적인 정치체제 대신 국가의 부와 번영만을 추구해 온 점을 지목한다. 경제성장과 반대 세력 탄압을 동시에 추구하는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우선순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래트너와 투즈 같은 서구 인사들이 중국을 찾아 샤오미 자동차 공장의 생산라인과 수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고속철도를 보며 감탄하는 동안, 다큐멘터리 감독 아이샤오밍(艾曉明) 같은 중국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출국조차 금지된 상태다. 그러나 장제스 정부의 외교관으로 1945년 미국과 유럽에 파견돼 세계인권선언 초안 작성에 참여했던 장펑춘(張彭春)을 다룬 생생한 장을 읽다 보면, 중국 문화가 보다 개방적인 정치체제와 양립 가능할 뿐 아니라 그러한 체제의 씨앗까지 품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장펑춘은 맹자의 사상을 인용하며 인권의 보편성을 설파한 인물이었다.
결국 <중국이라는 관념>은 놓쳐버린 기회들에 관한 책이다. 청나라가 무너진 뒤 중국 지도자들이 신문화운동과 5·4운동이 제시했던 통찰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중국공산당은 국가 번영을 이루는 데 성공함으로써 이러한 선택의 대가를 당분간은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결과 중국은 전통 제국에서 국민국가로 전환한 이후 줄곧 안고 살아온 문제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두었다. 바로 이질적인 구성원들을 통제하기 위해 결국 폭력에 의존하는 정치체제다.
번영은 어떤 정치체제든 어려운 선택을 미루게 만든다.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마오쩌둥 시대의 극단적인 폭력이 지난 반세기의 보다 합리적인 정책 결정과 경제적 풍요로 대체되면서 이 문제는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 성장세가 둔화되고 미래에 대한 신뢰마저 약해지는 상황에서, 시진핑 정부가 내놓은 해법은 전통문화를 형식적으로 끌어들여 체제의 정당성을 보강하려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는 세계 권위주의 지도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낡은 처방을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더 현명한 정치적 지도력이 있었다면, 방대하고 풍부하며 다문화적인 역사를 지닌 '중국'이라는 개념은 불안의 원천이 아니라 국가의 강점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좁은 틀을 훨씬 뛰어넘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중국'이라는 관념은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이다.
쉬궈치(Xu Guoqi), <중국이라는 관념: 하나의 논쟁사(The Idea of China: A Contested History)> (하버드대학교 출판부, 2026년), 320쪽
이언 존슨은 '중국 비공식 아카이브'(China Unofficial Archives)의 설립자이자 Sparks: China's Underground Historians and Their Battle for the Future의 저자다. 그는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등 여러 매체의 베이징 특파원으로 20년간 활동했으며, 중국 관련 보도로 2001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영국의 유명 철학자 버트런드 럿셀은 1920년부터 1년간 중국 베이징대에서 초빙교수로 머물며 강의도하고 중국 학자들과 교류도 했습니다. 이후 1922년에 <중국의 문제(The Problems of China)>를 출간했는데,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품이 넓었던 '보편제국'이었던 중국이 혹시나 유럽이나 일본 제국주의자들과의 싸움하는 와중에 그들처럼 옹색한 '국민국가' 또는 '민족국가'가 되어버리면 어떡하나라는 걱정을 담은 책입니다. 이번에 하버드대학교 출판부에서 중국인 학자 쉬궈치가 출간한 <중국이라는 관념>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진(秦)나라에서 이름이 연유한 '차이나'와 달리 세상의 중심이라는 의식이 담겨 있는 '중국(中國)'은 혈통/영토 개념이라기 보다는 문화/문명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문화/문명 기반의 '중국' 개념을 중화민국 초기에는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고 중국 공산당도 집권 이전에는 가지고 있었는데, 집권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보편제국적' 의식은 희미해졌고 시진핑 정권 이후에는 아주 약해졌다고 합니다. 마오쩌둥은 집권 전 각 지역의 자발성, 자율성을 중시한 나머지 자신의 고향인 후난성의 독립까지 지지했다고 합니다. 독립한 각 지역이 자발적으로 연방 '중국'을 만들자는 뜻입니다. 이제 이러한 '보편제국적' 중국은 한족 중심의 중국(차이나)에 자리를 양보해주었고, 이에 따라 현재의 중국이 이민족과 변방까지 넉넉히 품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 이 책의 요지입니다. 한 나라를 이끄는 것은 구체적인 정책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이념입니다. 수백개의 나라들도 나뉘어져 있던 봉건 일본은 미국과 러시아의 존재, 즉 '밖'을 인식하는 순간 하나의 '일본'으로 재탄생했고, 이 새 관념을 현실속에 구현한 것이 메이지유신입니다. 공산주의도 자유민주주의도 근본적인 이념은 단순합니다. 포린어페어스 7/8월호에 실린 <중국이라는 관념> 서평은 바로 이런 근본적 질문을 중국과 세계에 제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