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거꾸로 흐르고 있다

반동주의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까닭

/그래픽=PADO(생성AI 사용)

인간은 본성에 따라 이성적이고 자유를 추구한다는 것은 근대 계몽주의의 믿음입니다. 하지만, 이성과 자유는 자신감이 강하고 어른스러운 강건한 기상을 가진 사람들만이 추구할 수 있을 뿐 많은 사람들은 유약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보다는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회의해가면서 진리를 추구하기 보다는 주어진 교리 속에서, 같은 교리를 믿는 공동체 속에서 몸과 마음의 평안을 얻고 싶어 합니다. 좋은 정치공동체, 즉 '레스 푸블리카'를 만들려면 자유를 추구하는 강건한 기상의 시민들이 많아야 합니다. 하지만, 인류 중에는 체질적으로, 경험과 환경에 따라 몸과 마음이 약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평안을 추구합니다. 계몽주의는 그들에게 부담스럽습니다. 그들은 가족, 친족 같은 사적 공동체에 몸과 마음을 의탁합니다. 거기서 어버이, 친족 어른의 보살핌을 받고싶어 합니다. 그들의 지혜를 믿고 따르고 싶어합니다. 역사가 이성의 방향으로 진보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인간의 이러한 약함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 큰 어른들이 어린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며 살고 싶어할 수도 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이성과 전통주의가 승리할 때마다 고개를 흔들며 좌절감을 느낍니다. 유명 평론가인 데이비드 브룩스가 애틀랜틱 매거진에 기고한 4월 16일자 에세이는 인간의 두 측면을 모두 살필 것을 권합니다. 인간의 약함과 강함, 비이성과 이성, 퇴보와 진보, 이 두 측면을 다 볼 것을 권합니다. 인간은 고향의 평온에 머물고 싶어하면서도 저멀리 수평선 너머로 모험을 하기도 합니다. 브룩스는 반동과 진보가 계속 교차할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고향의 평온에 너무 오래 있다보면 도시가 주는 모험이 그리워질 수 있듯 지금 강해지고 있는 전통으로의 회귀, 반계몽, 반이성주의 역시 과도해지다보면 또다시 진보와 진취, 이성과 계몽에의 갈구가 다시 목소리를 내게 될 것이라고 넌지시 이야기합니다. 일단 이성과 계몽이 주춤하고 있습니다. 이젠 이성과 계몽이 가져온 외로움의 피로를 돌아봐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물론 이성과 계몽의 피로가 서구만큼 강하지 않은 우리 이야기는 꼭 아닙니다만, 우리 사회 역시 전통의 평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브룩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봐야 할 것입니다.

아마 이슬람 혁명 직전인 1970년대 테헤란의 사진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출근하는 젊은 여성들, 나팔바지를 입고 공원에서 애정 행각을 벌이는 연인들, 수영장에서 비키니를 입은 사람들의 사진 말이다. 마치 파리나 밀라노, 로스앤젤레스처럼 보인다. 하지만 1979년에 혁명이 일어났고 이제 테헤란은 마치 이전 세기처럼 보인다.


때때로 나는 세상 전체가 그렇게 됐다는 생각을 한다. 시간을 거슬러 간 것처럼. 오늘날 세속화된 시대에 번성하는 종교 운동은 현대 문화의 상당 부분에 반대하는 전통주의traditionalist 운동들이다. 혁명 이후 이란의 시아파 이슬람뿐만 아니라 정통 유대교와 보수적 가톨릭도 마찬가지다. 젊은 미국인들은 동방정교회로 몰려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세계가 현대화되면서 더 민주화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난 25년간 우리는 권위주의 독재로의 회귀를 목격해 왔다. 도널드 트럼프는 마치 16세기 유럽의 군주처럼 행동하며 대통령직을 자신의 개인적인 영지로 만들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계몽주의를 거부하는 동방정교회 소속의 반자유주의 철학자 알렉산드르 두긴과 같은 반동적 사상가들의 아이디어를 차용하여 우크라이나에 대한 제국주의적 정복을 정당화한다.


소셜미디어에 접속하면 남편과 다섯 아이를 위해 쿠키를 굽는 '전통주의 아내tradwives'들의 사진을 볼 수 있다. 보건복지부 장관과 그의 추종자들은 백신이라는 현대의 신종 발명품을 신뢰하지 않는다. 1999년에는 세계 정세가 유럽연합(EU)이나 세계무역기구(WTO)와 같은 다자간 기구에 의해 주도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중국과 미국, 러시아와 유럽 간의 19세기식 강대국 경쟁 시대로 회귀했다. 트럼프의 새로운 국가안보전략은 심지어 먼로 독트린을 부활시켰다.


우리는 한때 현대성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더 큰 자율성과 평등, 세속주의, 더 강한 개인의 권리, 문화적 개방성,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향해서 말이다. 진보는 모든 영역에서 개인의 선택권을 확장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과학과 이성이 번성하고 미신과 음모론은 사라질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어제의 미래상이었다. 전 세계 수십억의 사람들이 역사가 향하는 방향을 보고 소리쳤다. "멈춰!" 그들은 그 미래가 너무나 영적으로 공허하고, 너무 외롭고, 너무 기술적이며, 너무 오염되었고, 너무 혼란스럽고, 너무 일관성이 없다고 본다. 구체적인 불만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은 상실감과 더 단순하고, 더 행복하며, 더 지속가능한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에 이끌리고 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구호의 탁월한 점 하나는 바로 그 향수와 상실감을 자극한다는 데 있다.


거대한 혼란의 시기는 필연적으로 과거 황금기에 대한 갈망을 낳으며 우리 시대도 예외는 아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종류의 반동주의자인지는 그들에게 어느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지 물어보면 알 수 있다. 일부 MAGA 지지자들에게 그것은 로마 제국이다. 남자가 남자다웠던 시대. 일부 신정주의자들에게는 그것은 중세 시대다. 남자가 수도사였던 시대. 미국에서는 우파의 많은 이들이 1950년대의 사회 풍습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남성은 직장에 여성은 집에, 백인이 상위에 있고 교회 출석률이 엄청나게 높으며, '오클라호마!'나 '비버에게 맡겨라'가 같은 건전한 작품들을 무대와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었다. 한편 좌파의 많은 이들은 그 10년간의 노동조합 및 제조업 주도 경제나 19세기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우리의 정치는 향수에 흠뻑 젖어 있다.


진보와 계몽주의의 가치를 믿는 사람들은 이러한 반동적 충동에 대해 거만한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반동주의자들이 세련되지 못하고, 비타협적이며, 편협하고, 현대성이 가져다주는 자유를 두려워한다고 가정한다. 시계를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하지만 문명은 늘 시계를 되돌린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로 돌아가려는 공동의 예술적, 지적 노력으로 볼 수 있다. 프레더릭 스타Frederick Starr는 '잃어버린 계몽의 시대'에서 중세 시대에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경제적으로 발전된 지역이었던 중앙아시아가 어떻게 유럽에 뒤처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명나라 시대에 중국은 탐험을 중단하고 과학적 진보를 경시했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의 이성 숭배는 반작용으로 19세기 낭만주의의 열정 숭배를 낳았다. 19세기 산업화의 폭발은 존 러스킨과 같은 인물들이 주도한 신고딕 양식의 반동을 낳았는데 그는 기계 이전의 삶을 찬양했다.


20세기 대부분 동안 진보에 대한 믿음은 모더니티를 이끌어 온 이념이었다. 세계의 모든 박람회와 테마파크, 투모로우랜드의 경이로움에 대한 현기증을 생각해 보라. 진보에 대한 그 믿음은 단지 기술적인 것(날아다니는 자동차!)뿐만 아니라 영적이고 도덕적인 것이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믿음에서 의미를 찾았다.


그러나 오늘날 수십억의 사람들은 의미의 원천으로서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잃고 그 반대편으로 몰려들고 있다. 21세기에 전통주의는 촉매적인 사상으로 부상했다. 반동주의자들은 추세를 만들어 문화와 역사를 자신들의 방향으로 바꾸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이해하려면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고 그들의 신념이 어디에서 오는지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전통주의자들이 우리 정치와 문화에 미치는 영향에 성공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세계관 일부 요소가 옳음을 인식해야 한다. 하지만 어느 부분이 옳고, 어느 부분이 완전히 궤도를 벗어났는가?




좀 더 지적인 부류의 전통주의 속으로 동굴 탐험을 해보면 보통 깊은 곳 어딘가에서 오스발트 슈펭글러를 발견하게 된다.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제1권은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던 1918년에 출판되었다. 그는 각 문화가 그 습관, 관습, 신화로 구성된 고유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살아있는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각 문화는 성장하고, 성숙하며, 늙고, 죽는다. 젊은 시절에는 위대한 창의성, 예술의 개화, 강한 개성의 발산을 보여준다. 성숙기를 거쳐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도시화되고 관료화되며, 엘리트들은 도덕적 권위를 잃고 창의성은 시들어간다.


슈펭글러는 서구 문화가 10세기 말경에 등장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것을 "파우스트적"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개인주의적이고, 팽창적이며, 탐욕스럽고, 그 노력에 있어 만족할 줄 몰랐다. 일단 문화가 쇠퇴기에 접어들면 제국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이 되며 기술자들이 일을 주도한다. 정치 체제는 슈펭글러가 "카이사리즘Caesarism"이라고 불렀던 전제정으로 빠져든다. 도시화와 산업 성장은 선동에 취약한 원자화된 대중을 만들어낸다. 금융 권력은 비인격적인 기관에 집중되어 옛 엘리트들을 약화시킨다. 대규모 관료제는 권력의 중앙집중화로 이어진다. 위기가 닥치면 사람들은 결정적인 권위를 원한다. 만약 우리 사회가 쇠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슈펭글러의 포괄적인 이론이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일을 묘사하고 설명한다.


슈펭글러가 전간기戰間期 반동운동의 문화결정론적 분파에 속했다면 르네 게농René Guénon은 신비주의적 분파에 속했다. 두 사람 모두 서구가 쇠퇴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그 이유는 달랐다. 역사학자 마크 세지윅Mark Sedgwick이 그의 뛰어난 저서 '전통주의'의 저술을 위해 연구할 때, 두긴은 그에게 칼 마르크스가 공산주의에 있어 차지하는 위치를 게농이 전통주의에서 차지한다고 말했다. 게농은 1886년 프랑스 중부에서 태어났다. 평생에 걸쳐 그는 영지주의gnosticism, 이슬람, 도교, 힌두교 등 다양한 형태의 영적 지식을 연구했다. 그는 정치적 작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종교들이 동일한 근원적인 우주적 진리로 이어지는 살아있는 연결고리라고 믿었던 형이상학적 작가였다. 그는 또한 서구 문명이 이 영적 진리로부터 등을 돌렸으며 힌두교 사상가들이 부패와 도덕적 쇠퇴의 시대를 일컬은 '칼리 유가Kali Yuga'를 살고 있다고 여겼다.


전통주의 작가들을 읽다 보면 각자가 현대 문명과 연관 짓는 영적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슈펭글러는 '문화 쇠퇴Kulturverfall'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게농에게 그 단어는 '수량quantity'이었다. 1945년 저서 '수량의 지배와 시대의 징표The Reign of Quantity and the Signs of the Times'에서 그는 이 "진보적인 '물질화'" 단계에서는 셀 수 있는 것만이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주장했다.


현대 시대는 과학이 지배한다고 게농은 말을 이었다. 현대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현실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본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과학적 유물론과 측정이 허용하는 수준에 갇혀 있어 한심할 정도로 나이브하다. 게농의 관점에서 현대 과학자는 영적 현실—전통주의자에게는 제1의 현실인—을 인지하지 못하며 그래서 형이상학적 영역의 존재를 부정하는 세계관을 채택한다. 현대 과학자는 음악을 들을 능력이나 음악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인식도 없이 오케스트라의 작동 원리를 조사하는 사람과 같다. 그가 묘사할 수 있는 것은 활이 현을 긁는 소리와 관악기를 통해 공기가 흐르는 것뿐이다. 현대 과학자의 이론들은 그가 관찰하고 있는 것을 엉망으로 만들고 독자들을 단절된 사실들로 가득한 평평하고 영혼 없는 영역에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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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자신의 영적 생활이 있어야 할 자리에 공허함을 느낀다. 그는 끊임없는 동요, 끝없는 변화, 그리고 계속해서 증가하는 속도로 영혼의 구멍을 덮는다. "오늘날 지배적인 인상은 불안정이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는 인상이다." 게농은 80여 년 전에 썼다. 전통주의적 영성에 대한 그의 헌신은 결국 그를 이슬람의 신비주의적 분파인 수피즘으로 이끌었다. 그는 개종하고 카이로로 이주하여 이집트 여성과 결혼했으며 1951년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게농은 이탈리아의 작가 율리우스 에볼라Julius Evola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에볼라는 2017년 트럼프 고문 스티브 배넌이 바티칸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에볼라를 언급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미국 언론에서 잠시 유명세를 탔다. 백인 민족주의자 리처드 스펜서는 에볼라를 "20세기의 가장 매혹적인 인물 중 하나"이라고 불렀다. 에볼라는 로마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포병 장교로 복무했으며 그 후 다다이즘 운동의 예술가가 되었다. 그는 우리가 영적 진리에 등을 돌린 부패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게농의 견해에 동의했다. 1934년에 그는 '현대 세계에 대한 반란Revolt Against the Modern World'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에볼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를 받아들이고 이탈리아 극우파의 핵심 이데올로그가 되면서 게농과 결별했다. 그의 견해는 반평등주의, 반자유주의, 반민주주의적이었다. 그는 군주제와 계급제에 찬성했으며 인종적 카스트 제도를 지지했다. 그는 탈자유주의가 유행하기 전에 이미 탈자유주의자였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그의 열렬한 팬이었지만 에볼라는 파시즘이 현대 세계를 너무 많이 받아들였다고 비판했다. 필요한 것은 "심연으로부터의 반란"을 이끌 "주인된 인종race of masters"이라고 에볼라는 주장했다.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과 함께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은 얕고 쾌락적인 가치를 좇으며 고귀한 사회는 오직 영적 탁월함을 향해 삶이 맞춰진 사람들에 의해서만 건설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볼라는 게농과 달리 너무 정치적이었고, 게농과 달리 노골적으로 인종주의자였다. 헝가리의 저명한 극우 정치인인 가보르 보나Gábor Vona는 2012년에 출간된 에볼라의 선집 '우익 청년을 위한 핸드북'의 서문에서 에볼라를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하나"라고 불렀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유럽의 극우 정당에서 독일군 돌격대원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그 정당들은 스스로를 영혼의 가장 높은 차원을 보존하려는 영적 선봉대로 본다.




현대 전통주의를 이해하려면 이 선구자들의 사상에 담긴 지적 기반을 이해해야 한다. 모든 전통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안정된 가정과 생활 방식에 뿌리를 내렸던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역사적 단절이 그 시대를 파괴하고 영혼 없는 현대 시대를 열었다고 한다. 그들은 현대 시대를 파우스트적 문명(슈펭글러), 수량의 시대(게농), 칼리 유가(게농과 에볼라) 등으로 부른다.


오늘날의 전통주의자들은 역사가 언제 잘못된 방향으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의견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어떤 종류의 쇠퇴를 이야기한다. "기본적으로 우리 일상생활의 모든 것이 수년에 걸쳐 악화되었다는 것은 경험적 사실이다." 우파 팟캐스터 맷 월시는 썼다. "식품, 의류, 오락, 항공 여행, 도로, 교통, 기반 시설, 주택 등 모든 것의 질이 눈에 띄게 저하되었다."


RR 리노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톨릭 전통주의 잡지로 손꼽히는 '퍼스트 씽즈'의 편집장이다. 리노의 쇠퇴 이야기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는 실제로 시작되지 않는다. 20세기 전반기 동안 서구인들은 전쟁, 혁명, 대량 학살이라는 피의 강 속에서 살았다고 그는 주장한다. 나치가 패배한 후, 서구 전역의 많은 사람들은 그 야만성이 국가, 이데올로기, 조국, 인종에 대한 강한 애착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결론지었다. 미래의 세계 대전을 막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은 광신과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강한 신념과 충성심을 막는 문화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대표적인 예는 과학적 방법론의 옹호자인 철학자 칼 포퍼로, 그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썼다. 이 책은 핵심 진리를 중심으로 닫혀 있지 않고 대신 새로운 가능성에 영원히 열려 있는 정신과 국가를 찬양한다. 거대 철학을 약화시키기 위해 비판적 사고의 형태가 격상되었다. 도덕적 상대주의, 즉 각자가 자신의 가치와 진리를 찾는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아이들은 더 큰 다원주의를 육성하기 위해 자유로운 환경에서 양육되었다. 리노가 '강한 신들의 귀환Return of the Strong Gods'에서 말했듯이, 전후 사상가들은 근본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강한 사랑과 강한 진리 등 강한 것은 무엇이든 억압으로 이어지는 반면, 자유와 번영은 약한 사랑과 약한 진리의 지배를 필요로 한다."


리노가 볼 때 이 '개방성의 숭배'는 정파를 가리지 않는다. 진보주의자들은 생활 방식의 자유를 믿었고 보수주의자들은 경제적 자유를 믿었지만 양쪽 다 개인 선택의 우위를 믿었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그러나 이 모든 개방성이 자유로운 개인들의 해탈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전통주의자들은 그것이 사회적 유대가 약화된 사회로 이어졌다고 본다. 사람들이 위대한 목적을 찾을 수 없는 허무주의적 사회로, 사람들이 영적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쇼핑에 몰두하는 소비주의 사회로 이어졌다. 리노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해체, 붕괴, 그리고 비통합"으로 이어졌다. "우리의 공유된 사랑을 식별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공공선, 즉 공화국res publica의 공공물res을 식별할 수 없다." 리노는 썼다. 시민생활은 붕괴한다.


오늘날 전통주의는 주로 우파에 존재하지만 때로는 극좌파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영국 작가 폴 킹스노스Paul Kingsnorth는 기독교 정교회 전통주의자가 되기 전에는 급진 좌파 환경운동가였다. 두 입장은 그리 다르지 않다. 둘 다 기술관료적 현대성을 거부한다. 킹스노스는 현대 생활의 영적 죽음에 대해 자신만의 용어를 가지고 있다. 바로 "기계"인데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모든 자본주의적, 기술관료적 사회를 포함한다. 그의 저서 '기계에 맞서Against the Machine'에서 그는 식료품점 방문을 묘사한다. "나는 이 음식을 얻는 방식의 순전한 부자연스러움과, 숲 바닥에서 버섯을 채취하는 대신 이 거대한 금속 상자 안에서 직선으로 된, 스트립 조명이 켜진 플라스틱 통로를 헤매는 우리의 부자연스러움을 보았다." 킹스노스의 글에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류의 강한 히피 감성이 있지만 그는 이를 넘어선다. "'선진' 사회에서 우리가 견디는 통제와 감시의 정도는 수십 년 동안 가속화되어 2020년대에 워프 속도에 도달했으며, 우리 모두가 갇혀 있는 일종의 디지털 수용소를 만들고 있다." 그는 '기계'의 이데올로기를 "개인적 욕망의 해방"으로 보는데 이것이 우리의 공동체적 문명적 유대를 지우고 우리의 세계를 "자연과 문화의 오랜 한계가 씻겨나갈 때 새롭게 쓰여질 백지 상태로 바꾼다. 이것이 우리의 신념이다. 경계를 허무는 것이 행복으로 이어진다."


'기계'는 우리 외부에 있는 시스템일 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에 있는 마음의 상태이기도 하다. 이는 합리주의, 경제학, 과학만능주의, 최적화, 효율성을 중심으로 구축된 것이다. 그 충동은 순수이성을 사용하여 권력, 통제, 지배를 달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치가 이성 바깥에서 활동한 광신도였다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킹스노스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나치는 사회과학을 사용하여 자신들이 최적의 사회라고 생각하는 것을 설계함으로써 합리주의 프로젝트의 완벽한 구현체였다.


합리주의적 기계는 당신의 마음을 당신을 온전한 인간보다 못한 존재로 만들고 있는 AI 봇과 병합하려고 한다. 킹스노스는 웬델 베리Wendell Berry의 유명한 말을 인용한다. "다가올 세상의 대분열은 생물로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기계로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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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의자들은 현대 문화의 대체물로 무엇을 제공하는가?


첫째, 그들은 뿌리를 제공한다. 현대성의 대표적 트렌드는 자유다. 당신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멀리 대학에 갈 수도 있고, 도시에서 도시로 이사할 수도 있으며, 다른 문화와 생활방식 옵션을 탐색할 수도 있다.


전통주의자들은 이것이 목적 없고 덧없는 삶으로 이어진다고 비난한다. "현대인은 모든 곳에 속해 있으면서도 아무 곳에도 속해 있지 않다." 오클라호마침례대학교의 문학 교수 앨런 노블Alan Noble은 '당신은 당신 자신의 것이 아니다: 비인간적인 세상에서 신에게 속하기You Are Not Your Own: Belonging to God in an Inhuman World'에서 썼다. 그런 사람은 끊임없이 경험을 맛보지만 뿌리내리지 못한다. 소위 풍요 진보주의자1들이 미국이 '주택' 공급 위기에 처해 있다고 주장할 때, 전통주의자들은 미국이 정말로 겪고 있는 것은 '가정' 위기라고 반박한다. 문화적 변화와 대규모 이민은 사람들이 자국에서조차 편안함을 느끼지 못함을 의미한다.


대조적으로 전통주의자들은 안정적인 애착을 제공한다. 전통주의자에게 현대 사회 생활의 기본 단위는 주권적이고 자유롭게 선택하는 개인이 아니라, 사람들을 연결하는 사회적 계약이다. 우리는 공허 속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특정한 가족, 특정한 이웃, 특정한 부족, 특정한 신앙 속에서 태어난다. 당신의 삶은 당신이 존경하는 조상과 당신이 섬기는 미래 세대와 거대한 유대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전통주의적 상상 속에서 사람들은 조상의 뼈가 묻힌 땅, 친밀하게 알려지고 깊이 사랑받을 수 있는 곳, 장로들에 의해 이야기와 기술이 전수되는 곳, 그리고 언덕과 나무를 너무 잘 알아서 그 윤곽이 마음에 새겨지는 곳에 심어져 있다. 계약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도덕적 삶의 본질을 구성한다. 전통주의자들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강력한 애착의 지역 네트워크 내에서 살 수 있게 해준다면 자신들의 자유에 대한 제한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둘째, 전통주의자들은 매혹enchantment을 제공한다. 그들은 현대인들이 막스 베버가 말한 합리주의와 관료주의의 "철창" 안에 살고 있으며 그 안에서는 모든 매혹이 박탈당했다고 본다. 과학과 자본주의의 목표는 실용적이고, 물질주의적이며, 도구적이다. 매혹이 사라진 세계에서는 종교가 시든다. 인문학, 시적인 것,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다. RR 리노의 말을 빌리자면, 연구, 상관관계, 표준편차로 무장한 행동 경제학자로부터 결혼에 대해 배울 수 있는데 왜 '미들마치2Middlemarch'를 읽는가?


전통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감각을 통해 경험하는 세계 위와 이전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영적인 영역을 믿는다. 이 초월적 현실은 당신과 무관하다. 그것은 신에 의해 정해지고, 자연의 신비 속에 담겨 있으며, 분석적 사고보다는 신화와 노래를 통해 표현된다. "모든 문화는 알든 모르든 신성한 질서를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다." 킹스노스는 썼다. "물론 이것이 기독교 질서일 필요는 없다. 이슬람교, 힌두교 또는 도교일 수도 있다. 조상 숭배나 오딘 숭배에 기반을 둘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문화의 중심에는 왕좌가 있고, 그 위에 앉는 사람이 누구든 당신은 그로부터 지시를 받게 될 것이다." 선과 악은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자연법은 신에 의해 우주의 구조 속에 짜여 있다. 전통주의자들은 더 이상 여성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는 문화에 처했을 때 흥분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젠더와 같은 범주가 자연법에 기본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전통주의자들이 제공하는 네 번째 것은 현대성의 문화적 약탈로부터의 보호다. 현대 진보주의자들은 식민주의의 악을 비난한다. 그러나 전통주의자가 볼 때는 진보주의자야말로 식민주의자다. 진보 교육자들은 당신 아이의 뇌에 어떤 이데올로기가 주입될지 결정하고, 잔보 심리학자들은 당신이 가족을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 재정의하며, 진보 사상 경찰은 당신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 수 있는지 결정한다. 전통주의자에게 사회복지사, 대학 행정가, 치료사,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담당관, 언론 등 전문 전문가들은 엘리트 지배의 돌격대원이다. 이 모든 것에 대응하여, 전통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되찾도록 돕고자 한다.


이 에세이에서 내가 인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식인 계층이지만 그들의 충성심은 노동자 계급과 함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같은 신념을 공유하기 (혹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하위 중산층 문화는 가족, 교회, 이웃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래시는 '참되고 유일한 천국The True and Only Heaven'에서 썼다. "그것은 개인의 발전보다 공동체의 연속성을, 사회적 이동성보다 연대를 더 높이 평가한다." 노동자 계급은 전통주의를 가르치기 위한 세미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개념을 직관적으로 파악한다.


현대주의자와 전통주의자 사이의 문화전쟁은 국가 내 계급 간의 전쟁일 뿐만 아니라 문명 간의 전쟁이기도 하다. 몇 년마다 세계 가치관 조사World Values Survey는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연구한다. 개신교 유럽과 미국을 포함한 영어권 세계는 개인의 자율성, 자기표현, 세속적 사회 가치에 대한 엄청난 강조로 두드러진다. 세계의 나머지 대부분은 전통적인 가족 구조, 종교의 중요성, 권위에 대한 존중에 더 높은 가치를 둔다. 우리 현대인들은 미래가 우리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통주의자들은 그들의 승산을 믿는다. 이것이 세계적인 문화전쟁이라면 우리가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전쟁이다.




내가 전통주의의 교리와 특징에 대해 이렇게 길게 설명한 이유는 내 설명이 전통주의자들이 그 안에서 자신을 볼 수 있을 만큼 정확하고, 진보적이고 계몽주의를 사랑하는 현대인들조차 전통주의 사상의 매력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상세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일부 전통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일말의 공감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심리학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통찰 중 하나는 성공적이고 잘 적응된 삶은 안전한 기반에서 출발하는 대담한 탐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전통주의자들이 오늘날 미국과 서구의 중심 문제 중 하나가 많은 사람들이 안정된 가정과 공동체, 견고한 정서적 연결, 재정적 안정, 일관된 문화, 그리고 우리 삶이 공유된 도덕적 질서 안에 담겨 있다는 이해와 같은 안전한 기반을 잃었다는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옳다.


내가 전통주의에 대해 갖고 있는 문제는 번영하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통주의자들은 '경험에 대한 개방성'이라는 성격 특성에서 극히 낮은 점수를 받을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들은 압도적으로 안전한 기반에 집중하고 대담한 모험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들은 정적인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괜찮다. 사람마다 취향은 다르니까. 그러나 전통주의자들은 역사를 왜곡한다. 마치 모든 사람들이 항상 정적인 삶을 원했고 사회로서 우리의 목표는 정적인 삶을 규범으로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고 쓴다.


슈펭글러에서 킹스노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전통주의자들은 조상 문화를 파괴하고 뿌리 없고 영혼 없는 현대 시대를 낳은 역사적 단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그런 역사적 단절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인간이 마을의 안전 안에 영원히 만족하며 머물렀던 순간도 없었다. 역사는 항상 안전에 대한 욕구와 학습, 탐험, 이동, 성장에 대한 욕구 사이의 긴장 속에서 살아왔다. 호모 에렉투스 종의 초기 인류는 190만 년 전 그들의 작은 아프리카 공동체를 사랑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여전히 중국과 인도네시아만큼 먼 곳으로 나아갔다. 초기 폴리네시아인들은 고향 섬을 사랑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여전히 수백만 제곱미터에 걸친 대양의 넓은 지역에 있는 작은 섬들을 탐험하고 정착하려는 충동을 느꼈다. (그들은 현대적인 항해 장치가 없던 시대에 이런 모험을 했다. 조금의 실수로도 거대하고 텅 빈 태평양에서 길을 잃을 수 있었다.)


인간은 안전와 탐험, 소속감과 자율성, 안정과 혁신 모두에 대한 필요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삶은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이러한 모순들로 나아간다.


전통주의자들은 일원론적 꿈을 실현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모든 조각이 깔끔하게 들어맞는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꿈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소중히 여기는 많고 다양한 가치들은 결코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을 것이다. 모든 문화에서 집단들은 현재 상황에서 어떤 가치가 우선순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논쟁한다. 평온한 휴식처는 결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일부 전통주의자들은 마치 초기 또는 중세 기독교 세계가 그들이 갈망하는 정적인 유토피아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옛날 옛적에 사람들은 흙 가까이에서 살았고 신앙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민주주의, 자본주의, 과학, 기술이라는 비인간적인 힘이 모든 것을 망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는 민주주의, 자본주의, 과학, 그리고 나머지 현대성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사실 유대교와 기독교는 계몽주의 이후 현대성의 기초가 되는 많은 규칙과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모든 인간은 도덕적으로 평등하다. 개인의 양심을 존중하라. 역사는 선형적인 방향으로 움직인다. 모든 사람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소명을 가지고 있다. 예수는 정체 상태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의 모든 권력 구조를 뒤집어 놓은 유대인 급진주의자였다.


나 자신의 역사적 서사를 제시하고 그것이 전통주의적 서사와 어디서 겹치고 어디서 갈라지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긴 비틀거림의 행렬이다. 어떤 시대는 더 공동체적이고 어떤 시대는 더 개인주의적이며, 어떤 시대는 더 종교적이고 어떤 시대는 더 세속적이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이러한 문화적 변화가 대부분 그 순간의 필요에 부응하여 인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비틀거리는 과정은 추악할 수 있다. 전쟁, 잔학행위, 공산주의 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는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하버드대학교의 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는 약 10년간 계몽주의 이후의 삶이 더 평화롭고, 더 풍요롭고, 더 편안하고, 더 행복하고, 더 학식 있어졌으며, 수명 또한 더 길어졌음을 보여주는 에베레스트산만큼의 데이터를 수집했다. 그리고 우리의 진보는 단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이다. 우리 사회가 한때 용납했던 것들—고문, 노예제, 잔혹행위—은 법과 관습 모두에 의해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정치학자 고(故) 제임스 Q 윌슨은 '도덕감각The Moral Sense'에서 이렇게 썼다. "인류의 도덕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모든 사람이—단지 자신의 동족뿐만 아니라—공정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견해의 부상, 그리고 때로는 그러한 견해를 적용한 것이었다."


지난 70년—전통주의자들이 도덕의 부패로 가득했다는—을 돌아보면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도덕적 관심의 범위가 넓어졌음을 본다. 인종차별과 인종주의가 감소했다. 수십억의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권력과 전문적인 성공을 얻을 더 큰 기회를 갖게 되었다. 식민주의는 거부되었다. 우리는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세계적 빈곤 감소를 목격했다. 미국은 백인, 개신교 남성을 넘어 기회를 확대했다. 우리는 심지어 동물에 대한 잔혹행위를 줄이기 위한 법률도 통과시켰다.


그러나 내가 이야기하는 역사 속에서도, 위대한 문화적 또는 사회적 발전의 모든 순간에는 대가가 있었다. 지난 70년간의 진보 동안, 우리 문화는 자율성, 개인주의, 선택의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것은 창의성과 자유를 낳았지만, 사람들과 선택에 앞서는 기본적인 헌신—가족, 이웃, 신앙, 국가에 대한 유대를 약화시켰다. 이러한 개인주의를 향한 일반적인 경향의 일환으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가치를 생각해내라고 말하며 도덕을 사유화했다.


자유는 훌륭하지만 당신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모른다면 그렇지 않다. 우리의 현대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문화는 개인이 자신의 도덕성을 고안할 수 있다는 믿음에 빠졌다. 이 믿음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증거는 없다.


우리가 과학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발전하면서 우리는 전통주의자들이 이해하는 것을 잊었다. 사람들은 전통 안에서 그들의 도덕적 가치, 목적의식, 생활 방식을 흡수한다는 것이다. 서구 도덕 전통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는 성경이다. 셰익스피어, 제퍼슨, 링컨과 같이 위대하거나 전통적인 신자가 아니었던 인물들도 성경을 알았다. 도덕적 지혜의 두 번째로 중요한 전통은 우리가 인문학이라고 부르는 작품들이다. 즉, 전 세계의 사상가와 예술가들이 쓴 위대한 소설, 그림, 시, 희곡, 역사, 철학 텍스트들이다.


자율성을 향해 서두르다가 우리는 이러한 도덕적 지혜의 원천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수하는 데 실패했다. 개인주의의 정신은 우리를 우리 자신의 전통으로부터 단절시켰다. 우리는 개인적인 자아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각 자아가 헤엄치는 수천 년에 걸친 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이러한 전통의 거부는 부분적으로 이데올로기에 의해 주도되었다. 1987년, 스탠퍼드대학교의 진보적인 학생 그룹은 "헤이, 헤이, 호, 호, 서구 문화는 사라져야 해!"라고 외쳤다. 그들은 서구 문명이 식민주의를 낳았기 때문에 서구 전통의 모든 집단적 지혜를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러 세대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나는 더 큰 원인이 단순한 근시안적 사고였다고 생각한다. 여러 세대의 부모, 교육자, 학생들은 공부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목이 돈을 버는 데 도움이 되는 과목이라고 결정했다. 그들은 인문학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초래된 문명적, 도덕적 지식의 상실은 실질적인 결과를 낳았다. 증거를 평가하고, 결론에 도달하며, 자신의 추론의 결함을 인식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의 엉성한 사고, 놀라운 문해력 저하, 외로움, 많은 삶을 특징짓는 목적의식 상실, 자신이나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말이다. 문명이 자신의 지혜와 의미의 원천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병든 상태란 말인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인문학적 전통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우리의 과학적, 기술적, 경제적 진보와 우리의 사회적, 정서적, 영적 쇠퇴 사이에 점점 더 큰 격차가 벌어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수도원이나 수녀원으로 돌아가 살 필요는 없다. 또한 예를 들어 1930년대 서양 문명 정전이나 1950년대 고급 문화의 정의에 스스로를 국한시킬 필요도 없다.


나는 전통이 중요하다는 전통주의자들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전통을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는 전통을 각 세대가 앞으로 밀고 나가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는 인문학 르네상스가 필요하다. 학교, 대학, 그리고 문화 전반에서 우리는 삶의 큰 질문들에 더 명시적으로 집중해야 한다. 내 목적은 무엇인가? 다음 세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움은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우정을 쌓는가? 나는 배우자, 공동체, 국가에 무엇을 빚지고 있는가? 우리는 지구의 모든 위대한 문명들이 생각하고 말한 것 중 최고를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비틀거리며 나아가려는 동안 특히 우리 자신의 특별한 집이자 우리의 핵심 자원인 서구 문명의 것을 사용해야 한다.


크리스토퍼 래시는 자신을 정치적 좌파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뿌리내림, 공동체, 전통 가족에 대한 그의 찬양과 능력주의 엘리트에 대한 그의 비판 때문에 때때로 전통주의자들에게도 받아들여진다. "포퓰리즘 전통은 현대 세계를 괴롭히는 모든 병폐에 대한 만병통치약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는 썼다. "그것은 올바른 질문을 하지만 준비된 답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전통주의자들도 만병통치약은 없지만 그들 또한 올바른 질문을 한다. 그들은 우리 자신과 우리 아이들을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위대한 인문학적 대화 속에 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상기시킨다. 우리가 전통주의자들로부터 얻어야 할 것은 우리 사회의 인문주의적 유산 및 오랜 의미의 원천과의 연결을 복원하는 것이 실제로 진보의 약속을 더 잘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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