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제조업'의 첫 성과, 울산이 아니면 선전에서 나온다

AI 시대 제조업 중견국이 미국에 '필요한 나라'로 남는 법

/그래픽=PADO(생성AI 사용)

AI 시대를 맞이하면서 유럽은 물론,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중견국들의 고민은 모두 비슷합니다. 미국이나 중국에 필적할 수 있는 독자적 AI 모델의 개발이 요원한 상황에서 어떻게 AI의 잠재력을 자국 경제로 편입시킬 수 있느냐 입니다. 미국의 카네기평화재단에서 AI의 지경학(地經學)을 연구하고 있는 안톤 라이히트는 10월 8일 자신의 서브스택에 쓴 글에서 미국의 AI와 동맹 중견국의 제조업 역량이 결합해 '윈-윈'을 추구하는 모델 외에는 달리 중견국에게 매력적인 대안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아직 중견국의 제조업 우위가 강력하게 작용할 때 (그나마 동맹으로서 제휴가 가능한) 미국과 'AI+제조업'의 성공적인 모델을 만들지 못하면 미국과 중국은 독자적으로 모델을 완성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필자는 이런 성과가 "슈트트가르트(독일)와 울산(한국)에서 나오지 않으면 엘세군도(미국)와 선전(중국)에서 나오게 될 것"이라고 함축적으로 경고합니다.


라이히트는 동맹국의 제조업체들이 미국의 AI 개발사들과 독점적 계약을 맺어 이들 개발사들의 안정적 수익을 보장해줘야 하고, 반대로 미국 AI 개발사들은 동맹국 제조업체들의 현장 특화 AI 모델 운영을 도와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개별 기업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확보하려 할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AI 동맹은 지정학, 지경학적 차원에서 미국과 동맹국 정부 차원에서 장기적으로 '윈-윈'하는 동맹전략으로 관리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자국우선주의와 동맹 경시 행태는 과연 이러한 동맹전략이 정부 차원에서 관리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자아냅니다. 필자는 PADO 편집부와의 대화에서 결국 이러한 동맹모델이 사업적으로도 이득이 된다는 걸 이해하는 각국 기업들이 자국 정부를 설득하는 쪽으로 가야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필자는 자신의 제안을 아직까지는 구상 단계로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지만 제조업 강국으로서 미국의 첨단 AI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 고심이 깊은 우리로서는 주의깊게 들어봐야 할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어떤 AI 전략을 가져야 할까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가 앞으로 대한민국의 흥망을 가를 것입니다.

'산업용 AI'는 세계에서 가장 따분한 AI 전략들의 단골 구호다. AI 정책에 발을 들이는 제조업 강국들은 조만간 모두 똑같은 발상에 도달하곤 한다. 자국의 기존 제조업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병목 구간을 이루고 있으며 독보적 가치가 있는 데이터를 제공한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결국 한국의 재벌이든 독일의 완성차 업체든 늘 지켜오던 기존 대기업을 보호하는 것이 최선의 AI 정책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기이할 정도로 편리한 결론이다.


하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산업 자산은 실제로 AI 전략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AI 분야에서 계속 독주하리라고 본다면 미국이 앞으로도 자국을 필요로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중견국이 보유할 수 있고 미국이 필요로 할 만한 상호보완적 자산을 찾아보면 제조업이 단연 최우선으로 꼽힌다. '데이터센터 안의 천재들로 이루어진 나라'를 현실세계의 가치로 전환하려면 미국에도 제조 역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예고되어 온 AI의 응용분야 상당수는 물리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 암 치료제, 극초음속 미사일, 휴머노이드 로봇 등이 그렇다.


제조업 역량을 제공할 수 있는 동맹국은 그 대가로 AI가 주도하는 성장의 과실을 일부 확보하고 미국 AI 산업에 대해 협상력을 얻을 수 있다. 이는 포스트 AI 시대에 전략적으로 안정된 서방 동맹을 구축하는 토대가 될 수 있다.


이처럼 바람직한 산업용 AI를 실현하려면 두 가지 실패 유형을 피해야 한다. 하나는 오만이다. 자국 산업의 역량을 대폭 끌어올려 줄 미국산 AI 모델 없이도 독자생존할 수 있다고 믿다가 뒤처져 경쟁에서 도태되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순진함이다. 미국 기업들을 불러들였으나 그들이 필요한 것만 챙겨 산업을 미국 본토로 리쇼어링하고 결국 쓸모가 없어진 동맹국을 버리는 상황이다. 이를 제대로 해내려면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연구개발(R&D) 촉진 효과를 누릴 만큼 자국 산업을 미국의 AI와 통합하되, 산업기반이 공동화되어 미국 남부 공업지대인 선벨트Sun Belt로 통째로 넘어가지 않을 만큼은 보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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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첨단 AI 모델 접근권 확보가 우선

합리적인 산업용 AI 전략이라면 무엇이든 첫걸음은 여전히 최첨단 AI에 대한 접근권 확보다. 그 방법을 찾느라 나는 지난 몇 달간 이곳저곳을 다녔고 내 뉴스레터에도 자주 글을 싣지 못했다. 그동안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고 느낀다. 이제 정치적 의사결정자들과 대화하면, 이들은 최첨단 AI 시스템에 대한 접근권을 실질적인 지정학적 우선 과제로 여긴다. 최근 발표된 두 건의 보고서에 이러한 작업의 일부가 정리되어 있다.


  • 여러 공동저자와 함께 펴낸 '유럽을 위한 전환적 AI 전략'에서 나는 연산자원 제공을 통한 접근권 교환, 반도체 공급망 지렛대 활용, 최첨단 모델 문샷 프로젝트에 관한 장들을 집필했다.


  • 샘 윈터레비와 함께 쓴 'AI 도약 역량'도 있다. 중견국은 지금 최첨단 AI를 직접 개발해서도, 완전히 포기해서도 안 되며, 훗날 최첨단 수준까지 단숨에 따라잡을 수 있는 예비 역량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최첨단 AI 접근권만 확보하자는 주장은 아무리 설득력 있게 펼쳐도 신중하기는 하되 성에 차지는 않는다. 우리가 최첨단 모델을 가동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경쟁국과 적대국 상당수도 마찬가지라면 어쩔 것인가?


비판론자들의 지적이 맞다. 외국 데이터센터를 유치하는 것은 지정학적 전략이 아니며 공적 자금으로 AI 개발사를 설립해 유지하는 것은 지속가능한 경제 모델이 아니다. 최첨단 AI 접근권 확보는 최종 단계도, 심지어 중간 단계도 아니다. 우리가 가진 강점을 본격적으로 발휘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단계일 뿐이다.


진정한 중반전은 산업용 AI다.


/그래픽=PADO(생성AI 사용)


AI가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 이 개념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는 대개 일종의 자기위안 전략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당신네 미국인들은 허황된 초지능이나 만드세요. 우리는 독점 데이터를 갖고 현실에서 가치를 내는 효율적인 시스템을 만들 테니까요.' 이런 식의 발상은 유럽을 배회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이나 일본처럼 고도로 산업화된 다른 중견국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 소규모 특화산업용 모델과 귀중한 산업 데이터 보고寶庫를 활용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재계 엘리트와 정책 입안자들은 미국의 기술 없이도 그럭저럭 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산업용 AI 구상은 '전략'이라기보다 미국의 판단이 파국적으로 틀렸다는 데 거는 '내기'에 가깝다. 이는 범용 모델의 성능, 데이터와 연산 자원의 규모가 가져다주는 수확 체증, 그리고 재귀적 자기개선(RSI)의 태동에 관해 우리가 지난 몇 년간 배운 사실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로봇공학 구현에서는 범용 모델이 좁은 영역의 특화 모델을 압도하고 있고, 밀레니엄 수학 난제들은 거대 AI 에이전트 군집 앞에 풀려 나가고 있으며, AI 개발사들은 생명과학과 칩 설계를 비롯한 여러 핵심 산업 영역에서 자사 모델이 발휘할 효용에 거액을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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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첨단 AI 분야에 있는 사람들이 '산업용 AI'라는 표현만 보면 한숨을 쉬는 이유다. 최근 마리오 드라기가 유럽이 보유 데이터를 활용해 AI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제안하자 이들이 너무 성급하게 거부감을 드러낸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고도로 산업화된 자신들의 모국이 상황 파악을 못 해 그토록 좋은 패를 허비하는 모습을 보며 그들이 머리를 감싸 쥐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첨단 AI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존의 산업용 AI 구상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새로운 증거가 매일 쌓인다.


그러나 바람직한 버전의 산업용 AI는 분명 존재한다. 그 토대는 긴밀한 상호통합, 즉 유럽 제조업과 미국의 최첨단 AI 모델이 긴밀하게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작동하는 구조다. 유럽은 미국이 AI의 처리 단위인 '토큰'을 현실의 가치로 바꾸는 데 필요한, 희소하고 구축하기 어려운 산업 역량을 제공한다. 미국은 연구와 개발, 혁신을 빠르게 개선하고 자동화하는 데 필요한 최첨단 AI를 제공해 유럽 산업이 해외 경쟁자들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한다. 미국은 토큰을 만들고, 우리는 로봇과 암 치료제를 만드는 것이다.

이해관계의 일치

이 구상은 미국과 동맹국의 현재 관계와는 거리가 멀지만 나는 낙관적이다.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는 세 가지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래픽=PADO(생성AI 사용)


첫째, 경제적 관점에서는 비교우위다. 미국의 동맹국들은 전문 노동자와 기존 자산 덕분에 제조업에 강하지만 최첨단 AI 모델 개발에는 강하지 않다. 오늘날의 최첨단 AI 모델을 개발하려면 인재와 자본을 엄청나게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는 이를 해낼 수 있고 중국은 간신히 따라잡고 있는 실정이다. 중견국 정책결정자들도 이를 알지만 더 작고 특화된 모델을 개발해 규모의 경쟁을 비켜 갈 수 있기를 바란다. 포드의 초대형 SUV 익스페디션(Expedition)이나 거대 고속도로 휴게소 체인 버키스(Buc-ee's)처럼 범용 AI 모델도 그저 미국식 과잉의 산물일 뿐이라는 통념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시각은 틀린 것으로 보인다. 거대하고 값비싼 범용 모델은 언어나 소프트웨어 공학을 넘어 다른 전문영역의 역량을 확보하는 데에도 점차 최선의 경로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의 수학적 돌파구들은 범용 모델을 기반으로 나왔으며 최고 성능을 보이는 일부 로봇공학 모델들도 마찬가지다. 앤트로픽은 이 접근법이 생명과학에도 통할 것이라는 데 베팅하고 있으며 오픈AI는 이를 반도체 설계에 적용하고 있다.


고성능 범용 모델에 고도로 특화된 학습 이후post-training 파이프라인을 결합하면 그것이 구축된 어떤 영역에서든 돌파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효율성 개선 속도도 가차 없다. 오늘 범용 모델이 이뤄 낸 돌파구는 몇 달 안에 상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고효율 시스템이 된다. 소규모 특화 모델 접근법은 비용 면에서나 품질 면에서나 비효과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특화 데이터가 무용지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특화 데이터는 최첨단 모델의 성능을 최대한 끌어내는 데 극도로 유용하다. 최첨단 AI 개발사들이 데이터셋과 강화학습 환경, 그리고 이를 만드는 스타트업에 기꺼이 거액을 지불하는 이유다. 하지만 이를 잘 활용할 수 있는 곳은 최첨단 AI 개발사들이다. 데이터를 가치로 바꿀 만큼 충분한 규모의 기초 모델을 가진 곳은 이들뿐이기 때문이다. 미국만 개발할 수 있는 모델과 동맹 전체에서도 여전히 희소한 데이터, 둘 다 필요하다.


반대로 미국은 제조업보다 AI에 훨씬 능하다. 미국의 재산업화 시도가 고전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이야기가 나왔다. 미국 자본시장은 투자 회수 주기가 빠른 소프트웨어 투자에 끌리고, 기존의 제조 기반은 위축되었으며, 차세대 자동화 제조 기술은 이를 단숨에 뛰어넘을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는 점 등이다.


나의 추측을 좀 더 보태자면, 한 부문의 호황이 다른 산업을 위축시키는 '네덜란드병'을 연상시키는 구축 효과가 미국의 산업 투자에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추가로 투입되는 벤처 투자금은 AI의 물결을 타는 스타트업으로 향한다. 추가로 확보되는 전력 1GW는 최첨단 모델을 학습시키는 데이터센터로 향한다. 재산업화에 투입할 수 있는 자원인 숙련 노동자, 건설 역량, 부지 역시 추가로 확보되는 몫은 데이터센터 건설로 향한다. AI가 미국 경제를 집어삼키고 있기에 칩과 모델, 데이터센터라는 핵심 공급망 너머의 영역에서 미국이 재산업화를 이룰 역량까지 집어삼키고 있는 것이다.


당분간 초지능 개발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동맹국들은 이 병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고 있다. 여기에 AI 제조업을 구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동맹국이 현재 가진 제조업 강점은 안정적인 비교우위의 원천으로 남을 수 있다고 본다. 미국의 추가 자금이 AI 기술의 최전선을 확장하는 데 흘러가는 한, 동맹국은 미국을 보완하는 제조업 분야에서 자유롭게 자기 자리를 개척하고 지킬 수 있다.


동맹국 전체 차원에서 산업 역량과 AI 개발이 모두 필요하다면, 미국이 AI를 만들고 나머지 국가들이 산업화를 담당하는 분업이 지극히 합리적이다.


둘째, 전략적 관점에서는 AI를 위한 '동맹의 규모' 확보다. 전 세계 제조업 생산량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간신히 15%에 그치는 반면, 중국의 비중은 계속 늘어나 32%에 달한다. 그러나 미국과 동맹국들을 합치면 43%를 차지한다. 이러한 불균형 때문에 미국의 외교안보 분석가 러시 도시와 커트 캠벨은 '동맹의 규모'라는 접근법을 제안했다. 동맹국의 제조 역량이 뒷받침되어야만 미국이 중국과의 경제 경쟁이나 장기화된 군사적 충돌에서 맞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동맹국이 반드시 자국의 제조업 생산을 미국의 태평양 전략 구상에 맞추려 하는 것은 아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동맹국의 제조업 기반, 특히 유럽의 제조업 기반은 이미 뒤처지고 있으며 중국이 자동화를 계속 추진할수록 더욱 쇠퇴할 것이다.


미국의 최첨단 AI와 동맹국 제조업을 더 깊이 통합하면 두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다. 미국 측 파트너사가 무엇을 생산할지에 대해 발언권을 갖게 되므로 동맹국에는 자국 생산을 미국의 이해관계에 맞출 유인이 생긴다. 또한 미국의 도움을 통해 독자적으로는 확보하기 어려웠을 풍부한 자본시장과 최첨단 AI 모델에 접근할 수 있게 되므로 중국 경쟁사들에 맞서 한층 높은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그래픽=PADO(생성AI 사용)


셋째, 정치적 관점에서는 기존 지지층의 이해에 부응하는 길이다. AI로의 전환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든 간에, 동맹국의 기성 경제주체들을 설득해 AI 중심으로 방향을 틀게 만드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반면 기존 산업주체들에게 당신들이 앞으로도 국가경제의 초석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하기는 비교적 쉽다. 모든 것이 변하겠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그대로 유지되리라는 메시지다. 심지어 나쁜 버전의 산업용 AI 서사조차 그토록이나 달콤하게 들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산업 통합 역시 혼란을 수반할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업무 형태가 바뀔 것이며, AI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의 생계를 앗아갈 것이다. 어느 쪽을 택하든 격변의 시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산업 중심 전략을 택하면 AI 도입 이전과 이후의 경제 사이에 훨씬 큰 연속성을 확보할 수 있다. 경제력이 비슷한 지역과 부문, 비슷한 기업들에 집중되고 권력과 자원의 분배를 둘러싼 조건도 근본적으로 유사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이는 수도에 뿌리를 둔 테크 산업을 위해 지방 경제를 전부 포기해야 하는 급진적인 전환보다 훨씬 관리하기 수월한 이행 방식이다. 영국만 봐도 지난 20년간 경제력이 런던에 집중됐고, 이는 영국의 정치경제에 큰 부담을 안겼다. 피할 수만 있다면 AI의 등장이 그와 같은 종류의 전환과 맞물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중요한 이유는, 야심 찬 AI 전환은 어떤 형태든 경제 기득권층을 설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변화가 너무 느리면 중견국들은 뒤처질 것이고, 반대로 너무 빠르면 유권자들이 방향 전환 자체를 거부할 수 있다. 많은 부분이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는 그럴듯한 보장으로 대변혁을 감쌀 수 있다면 지속가능하고 공정한 타협점을 찾기가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산업용 AI는 노동조합도 전통 산업도 싫어하지 않을 AI 서사를 들려줄 수 있게 해 주며, 이는 대단히 큰 가치를 지닌다.

과거로 회귀하지 않으면서 재산업화하기

이를 실행에 옮기는 일은 어렵다.


첫 단계는 지정학적 전제 조건으로서 최첨단 AI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하는 것이다. 최첨단 AI 접근권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널리 확산하고, 이를 가능하게 할 안보 여건을 조성하며, 연산자원 제공과 접근권을 교환하는 협정으로 접근권을 확실히 보장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이미 익숙한 이야기다. 그러나 최첨단 AI 접근권 확대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귀결이 있다. 바로 최첨단 AI가 쉽게 구매가능한 상품이 되는 것, 즉 범용 상품화commodification다.


중견국 정책결정자들은 최첨단 AI의 범용 상품화를 자주 거론한다. 비슷한 제품을 만드는 최첨단 AI 개발사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이 이들의 이윤을 크게 줄여, AI가 창출하는 잉여가치를 다른 곳에서 가져갈 수 있게 된다는 생각이다. 중견국 입장에서는 그러한 세상이 더 바람직하다. 자신들이 통제하는 기술 스택의 계층에서 더 많은 가치를 확보할 수 있고, 미국 개발사들에 집중되는 권력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는 흔히 막연한 바람에 그친다. "최첨단 AI가 범용 상품이 되면 좋지 않을까요?" 혹은 희망사항이다. "우리는 최첨단 AI가 범용 상품이 될 것이라고 믿기로 했어요."


하지만 중견국은 범용 상품화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서로 경쟁하는 최첨단 모델들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하는 것이다. 최첨단 AI 개발사가 수익을 지키는 한 가지 방법은 자사 제품을 대체하기 어렵게 만들어 가격 경쟁을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델 역량을 통한 차별화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최첨단 AI 개발사가 재귀적 자기개선을 추구하고, 그 목표에 맞춰 모델을 개발하기 때문이다.


경쟁자로부터 지킬 수 있는 영역을 확보하는 또 다른 방법은 독점 계약이다. 승인을 받은 일부 구매자에게만 모델을 제공하거나 수직통합된 사업 부문 내부에서만 모델을 사용하는 것이다. 중견국들은 노련한 협상을 통해 그러한 접근법을 깨뜨릴 수 있다. 각국 기업과 정부가 지정학적 논리에 묶여 종속되는 대신 서로 다른 최첨단 모델들에 접근하고 시장가격에 따라 모델을 갈아탈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개발사들의 마진이 줄어들고 다른 영역에서 더 많은 가치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광범위하게 최첨단 AI 접근권을 확보하면 최첨단 AI 시장 전체에서 도입·활용 단계가 가치를 가져가는 방향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산업용 AI의 매력은 훨씬 커진다.

배 만들기

그러나 경쟁에 뛰어든 뒤에도 승리라는 과제는 남아 있다. 산업용 AI가 어떤 모습일지 아직 모르므로, 지금부터 하는 말은 상당 부분 추측이다. 그 점을 전제로 내 추측을 제시한다.


성공적인 산업 통합은 중견국의 산업체와 미국 AI 개발사가 합작사업을 벌이고 독점 계약을 맺는 것이다. 산업체는 장기 구매를 보장하고 자사 데이터의 독점 사용권을 제공한다. 미국 개발사는 그 데이터를 활용해 산업 생산량을 늘리도록 미세조정한 전용 시스템을 개발하고 배치한다. 개방된 시장에서 여러 AI 개발사가 다양한 산업체들과 장기계약을 맺기 위해 경쟁하는 구조다.


기본 구조는 이렇다. 한쪽에는 실물 제품을 만드는 공장이 있다. 이 공장은 숙련 노동자와 산업용 로봇으로 운영되며, 고도로 모듈화되어 유연하게 조정이 가능하고, 생산 공정을 디지털로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도록 센서 장비를 갖추고 있다. 다른 한쪽에는 미국 최첨단 모델을 현장 학습을 거쳐 특화시킨 전용 버전을 가동하는 데이터센터가 있다. 이곳에는 현장에 파견된 AI 개발사 엔지니어들이 배치돼 모델을 공장 운영에 깊이 통합한다. 모델이 비효율적인 부분을 감지하면 엔지니어와 공장 노동자들이 협력해 이를 수정하고, 모델이 새로운 소재나 공정, 제품에 관한 가설을 세우면 공장은 공정을 조정해 이를 실험하고 테스트한다. 제조 공장이 정교할수록 이러한 피드백 루프는 더욱 빨라질 수 있다. 이를 '재귀적 자기개선 대비형 제조RSI-ready manufacturing'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전용 모델을 개선하는 데 쓸 수 있는 특화 데이터가 생성된다. 전용 모델 자체는 해당 로컬 데이터센터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으며 AI 개발사 본사의 범용 모델 학습에 투입되지도 않는다. 이 구조가 의도한 타협점은 명확하다. 공장은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모델이 필요하고, 개발사는 다른 곳에서는 쓸 수 없는 이 특정 학습 모델로부터 수익을 내기 위해 공장이 필요한 상호의존 구조다.


/그래픽=PADO(생성AI 사용)


산업용 AI 전략이 이런 구조를 만들어 내는 데 기여한다면 성공한 것이다. 반대로 이러한 구조가 현실화되지 못한다면 실패한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구체적인 정부 개입이 필요하다. 기존 산업계가 주저하는 동안 거래 성사를 장려하는 것, 그리고 거래가 착취적인 구조로 변질되지 않도록 안정화하는 것이다.


계약 체결을 장려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있는 산업정책이다. 지금까지의 논거가 맞다면 정부가 멀찌감치 물러나 있어도 양측의 상업적 이해관계에 따라 거래가 자연히 성사될 것이라 기대할 법하다. 그럼에도 나는 세 가지 이유에서 정부의 행동을 제안한다.


첫째, 불공정 경쟁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미국은 재산업화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중국이 산업 기반을 뒷받침하기 위해 불공정 무역 관행을 동원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동맹권에서 새로운 제조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려면 우리 역시 같은 기준을 적용해 경쟁해야 한다. 여기에는 바람직한 통합 체계에 대한 세제 혜택, 경쟁 제품에 대한 무역 장벽, 그리고 합작 제조업 벤처가 생산한 제품에 대해 동맹국과 미국 간에 우호적인 교역 조건을 부여하는 방안이 포함된다. 이러한 통합을 추진하는 비용은 저렴해야 하고 그 결과물인 제품은 모든 참여국에 쉽게 판매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여러 동맹국의 기존 산업계는 변화를 이해하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이다. 나는 이에 대해 셀 수 없이 많은 대화를 나누어 보았고, 기존 산업계의 요구를 고스란히 정책 지침으로 삼는 고위 당국자들은 그보다도 더 많이 만나 보았다. 이러한 대화에서 내가 받은 인상은 명확하다. 상당수의 기존 제조기업들은 이런 변화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연산자원의 장기 구매를 약정하지도 않고, 합작투자에 나서지도 않으며, 최소한 AI 주도 성장에 재무적 투자 지분을 확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과거 전기차 전환기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지금도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나서서 이들을 이끌어야 한다.


셋째, 중견국들이 난해한 데이터 규제를 통해 오히려 바람직한 산업용 AI를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산업 데이터를 둘러싼 규제와 불확실성은 국경 간 데이터 공유를 매우 어렵게 만든다. 게다가 중견국들은 자국 산업이 중국이나 미국에 팔려 나가는 것을 막겠다는 생각에 규제를 완화하기보다 오히려 강화하려는 유혹에 자주 빠진다. 그러한 본능적 대응은 실재하는 조율 문제에 잘못된 수단으로 대처하는 것이며, 보호하고자 했던 바로 그 경쟁력을 오히려 훼손할 위험이 있다.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비판을 감수하고 말하자면, 이런 일을 하는 것 자체를 불법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래픽=PADO(생성AI 사용)


이러한 협력 체계를 안정화하는 문제는 결국 데이터 거버넌스로 귀결된다. 내가 제안하는 구상에는 준비 기간이 길다는 특성에서 오는 기본적인 안정성이 있다. 동맹국이 타협점을 찾는 대신 독자적인 AI 모델 개발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언제나 훨씬 더 어렵듯, 미국 역시 동맹국의 역량을 활용하는 것보다 자국 내에 물리적 제조 역량을 단기간에 구축하는 것이 언제나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계약도 두 가지 방향에서 불안정해질 수 있다. 첫째, 미국 AI 개발사들이 모든 영업비밀을 빨아들인 뒤 결국 미국 본토에서 해당 제조 역량을 그대로 재현해 낼 수 있다. 둘째, 동맹국 산업계가 AI가 창출한 잉여를 모두 가져가면 산업 협력의 이윤이 너무 낮아져 AI 개발사들이 참여를 중단할 수 있다.


동맹국 기업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자사 데이터가 사용되는 층위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다. 최첨단 모델이든 그보다 낮은 수준의 모델이든 마음대로 연결할 수 있고, 어떤 정보도 개발사로 흘러가지 않는 독자적인 하니스(모델 운용체계)다. AI 개발사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확보할 수 있는 모든 데이터를 통합하는 것이다. 이를 범용 학습에 다시 투입하고, 협력할 때마다 기초 모델을 계속 개선하는 것이다. 하지만 두 방식 모두 지속가능하지 않다. 어느 한쪽의 손에 지나치게 많은 경제력을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균형점은 '상호배타적 통합'에 있다. 미국의 AI 개발사가 전용 후속 학습과 산업 공정 통합을 위해 데이터를 사용하되, 오직 해당 특정 배포 환경이라는 맥락 안에서만 사용하는 것이다. 데이터는 최첨단 AI 개발사가 소유한 모델의 현지 버전으로 흘러갈 뿐,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지 않는다. 동맹국 기업들은 모델 전환 비용이 커진다는 이유로 이를 싫어하고, 최첨단 AI 개발사들은 개선이 다시 개선을 낳는 선순환 효과가 느려진다는 이유로 싫어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추세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맞다면 이 방식은 여전히 막대한 수익을 안겨 주며 양측 모두에 이익이 된다. 지켜 나갈 가치가 충분한 균형점이다.

항해하면서 배를 고치기

제조업을 나보다 잘 아는 사람들은 앞서 제시한 구상이 설익었다고 말할 것이다. 어떤 모델이 산업 현장의 응용에 가장 유용한지 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명확한 사업성 입증도 없이 기업들에 합작투자에 나서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지적이 맞지만 그래도 내게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너무나 절박하여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상업적으로 유망한 첫 결실은 상당한 수준의 통합이 이루어진 뒤에야 나타날 것이다. 독일 슈투트가르트와 한국 울산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미국 엘세군도El Segundo와 중국 선전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먼저 성과가 나올 때까지 동맹국들이 기다리기만 한다면,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바람직한 산업용 AI를 추구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릴 것이다. 그때쯤이면 AI 도입에 앞선 경쟁자들에게 이미 밀려나 있을 것이고, 자산가치는 하락하고 매출은 무너져 내리고 있을 것이다. 그처럼 약해진 미래의 입지에서는 협상력을 지키는 계약을 맺을 수 없을 것이며, 결정적 자산이 될 수 있었던 것을 허비해 버린 셈이 될 것이다.


확실성이 생길 때까지 너무 오래 기다린다면 좋은 거래를 성사시킬 기회 자체를 잃을 수 있다. 중견국들이 현재 주어진 조건을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점은 잘 안다. 하지만 지금 협상 테이블에 나와 조건을 개선하든지, 아니면 조건이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기도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안톤 라이히트는 AI와 지경학의 연구자로 현재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펠로우이다. 그는 독일 뮌스터대에서 철학 학사, 런던정경대(LSE)에서 철학 및 공공정책 석사, 독일 바이로이트대에서 철학 박사를 취득한 후 주로 AI 분야에서의 중견국 전략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