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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중문화와 정치가 서부 개척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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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로이터=뉴스1) 권진영 기자 =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 습격 사건 당시 군중이 국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벽을 타고 있다. 이들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이들로 알려졌다. 21.01.06 ⓒ 로이터=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23.04.22 13:40

The Atlan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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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200여년 전 인구 300만의 작은 공화국으로 시작해 이제는 3억 명이 넘는 거대한 공화국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고대 로마도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수많은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강력한 중앙관료제('큰 정부')로 질서를 유지하는 '제국'으로 가자는 민주당, 아직 그런 관료제의 도움 없이('작은 정부') 시민들의 자율에 의존하는 작은 '공화국'을 지향하는 공화당, 이들이 '개척 시대(frontier)'라는 19세기적 미국의 메타포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드라마 시리즈 '파고'의 제작자 노아 홀리가 개척 시대 논쟁을 흥미롭게 다룬 미국 시사문예지 아틀랜틱(The Atlantic) 2023년 1·2월호 기고문을 협약 하에 전문(全文) 번역으로 소개합니다.


'문제는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게 아냐. 선이 존재하는 게 문제지. 안그럼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 --V. M. 바르가(파고 시즌3에 나오는 악당 캐릭터)

미국 TV 채널 FX에서 방영한 '파고(Fargo)'는 코엔 형제의 동명의 아카데미 수상작을 각색한 드라마로 지금까지 4개 시즌이 나왔고 곧 시즌 5가 시작될 예정이다. 나는 이 드라마의 총제작자이자 작가, 그리고 메인 감독이다. 내가 처음에 이 드라마를 FX에 제안했을 때 나는 이렇게 피칭을 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동경하는 사람들, 고상하고 신실하며 친절한 사람들과 우리가 가장 두려워 하는 냉소적이고 폭력적인 사람들이 대결하는 내용입니다." 내가 구상했던 건 진짜 같으면서도 사실은 아닌 범죄 이야기였다. 나서길 좋아하지 않는 영웅들이 결국엔 악의 물결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


미국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런 이미지는 물론 허구,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2022년 여름 나는 가족을 데리고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와이오밍주 잭슨홀까지 자동차 여행을 했다. 뉴멕시코, 콜로라도, 유타주도 들를 예정이었다. 주 경계를 넘을 때마다 내 아내 카일은 물었다. "여기선 내 권리가 온전히 보장되는 거야?" 우리가 여행을 떠나기 일 주일 전, 미국 연방대법원은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뒤집었다. 이전까진 근본적인 권리로 인정받았던 여성의 낙태권이 이제 어느 주에 살고 있느냐에 따라 보장을 받을 수도, 받지 못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1 그래서 카일은 우리가 새로운 주에 진입할 때마다 자신이 권리를 온전히 보장받는 '시민'이 되는지 아니면 '시녀'가 되는지 궁금했다. 나는 우리가 들를 다섯 개 주 중에서 두 개 주에서는 시녀라고 말했다. 한 주에서는 15세 된 우리 딸이 성폭행을 당한 후 임신했을 경우, 무조건 아기를 낳아야만 한다.



1986년 5월 16일, 어느 부부가 와이오밍주 코크빌에 있는 초등학교를 찾았다. 반자동소총과 사제 가솔린 폭탄을 갖고 있었다. 남편 데이비드 영은 몇년간 '영(零)은 무한과 동일하다'는 철학 논문을 쓰고 있었다. 특정 부류 미국 남성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들은 니체 이야기로 시작해서는 학살로 끝맺는다.


데이비드는 초등학생 136명을 인질로 잡고 한 명당 200만 달러를 몸값으로 요구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원래부터 제정신인 사람이 아니었기에 계획은 그리 훌륭하지 않았다. 그는 인질을 한 데 모아놓고 폭탄 스위치를 아내 도리스 영에게 맡겨놓고는 화장실을 갔다. 잠시 후 폭발음이 들렸다. 아내가 실수로 스위치를 눌러 불길에 휩싸인 것이었다. 겁에 질린 학생들은 건물에서 달아났다.


데이비드는 도리스가 교실 바닥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걸 보았다. 그는 아내의 머리를 쏜 다음 총구를 자기 자신에게 돌렸다.


부부의 거창한 계획은 그렇게 끝이 났다.


우린 북쪽으로 올라가다 바로 그 사건이 있었던 코크빌을 들러 기름을 넣었다. 서쪽을 향해 달리면서 우리는 철학자라면 '실재성'이라 부를만한 걸 경험했다. 황야의 쑥덤불, 고물이 굴러다니는 야적장, 말라붙은 강바닥과 뷰트2로 그득한 물질의 세계였다. 파고사 스프링스의 유황천, 유타 동부에서 만난 길 위를 뛰어다니는 땅다람쥐. 도널드 트럼프 간판은 생각보다 적었고, 빈곤의 흔적은 생각보다 많았다. 버려진 집과 점포, 녹슨 쇳덩이들. 행정구역상 같은 주 소속이라 하더라도 같은 지역이 아님을 보았다. 뉴멕시코 남동부와 뉴멕시코 북서부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운전하면서 우리는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고 팟캐스트를 들었다. 내 전화기엔 문자, 이메일, 뉴스 알림이 떴다. 뒷좌석에선 딸이 친구들과 스냅챗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람이 두 곳에 동시에 있을 수는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랬다. 육신은 같은 차를 타고 물질 세계의 미국을 여행하는 한편, 정신은 각자 가상의 세계를 떠돌고 있었다. 수십년 전 어느 컴퓨터 실험실에서 탄생한 '인터넷 미국'이다. 이 가상의 세계는 대부분의 미국 사람들에게 교통표지판, 가축, 강도를 막기 위해 판자로 막아놓은 점포의 입구보다 더 현실적이다.


인터넷 미국에서 우리의 허구는 신념이 된다.


질문 하나. 람보의 몸에 도널드 트럼프의 머리를 붙인 판넬을 봤을 때 왜 하필 람보가 나오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내가 데이비드와 도리스 영 부부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그게 놀라운 이야기라서가 아니다. 80년대나 90년대였다면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젠 아니다. 내가 그 이야기를 꺼낸 건 극단주의적 견해와 증오에 가득한 철학으로 움직이는 난폭한 아웃사이더 캐릭터가 이젠 사방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인셀3 총기난사범과 '인종 전쟁' 선동가. 극단주의에 물들어 공격에 이용되는 젊은 백인 남성. 각각 자신만의 거창한 선언문을 가진 유나바머4의 아이들이다. 이들은 알바니나 피츠버그, 스포케인 같은 구체적인 도시에 사는 게 아니다. 이들은 인터넷 아메리카의 폐쇄회로 속에 사는데 그 속에서 이들은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의 불만을 보며 세상을 탓한다.


이들이 하는 짓이 비이성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특정 정치철학을 실생활에 적용한 것이다. 수십년에 걸쳐 미국을 다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들은 우리 대부분이 진보라고 생각하는 것을 뒤집으려 한다. 평등권, 보다 나은 학교, 사기나 환경오염에 대한 규제, 보다 안전하며 약자를 더 배려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우리 사회가 이룬 모든 것을 부정하고 약육강식의 야만적인 19세기 '개척지' 시대로 되돌리겠다는 것이다.


텍사스주 빅스프링의 어느 호텔 로비에서 우리 딸과 아들은 여자친구의 목을 조른 젊은 남성이 경찰에게 체포되는 걸 목격했다. 목을 졸린 여자친구는 들것에 실려나갔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지 36시간만이었다.


나는 종종 신화의 힘에 대해 생각한다. 매 에피소드마다 '실제 사건에 기반했다'고 하지만 파고의 각 시즌은 미국 중서부 지방에서 벌어지는 믿기 어려운 범죄 이야기, 다시 말해 현대적 허구로 구성됐다. 영상에서 허구를 창조하는 건 단지 내러티브만이 아니다. 촬영에 어떤 렌즈를 쓰는지부터 의상의 선택까지 많은 게 동원된다. 영화 '저수지의 개들'에서 봤던 검은색 정장과 슬림 넥타이를 떠올려보라. 아니면 파고 시즌3에 나오는 최종 빌런 V. M. 바르가가 입는 허름한 레인코트를 떠올려보라. 그 레인코트는 스스로를 군중 속에서 잊혀지기 쉬운 허접한 인물로 보이게 하려고 선택한 슬픈 위장이다.


'마지못해 싸우는 영웅'의 신화만큼 미국인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신화는 없다. 그는 존 웨인, 게리 쿠퍼, 클린트 이스트우드이자 존 윅, 잭 리처, 캡틴 아메리카다. 그저 평화로운 일상을 살고 싶은 사나이이지만 세상은 그를 폭력의 도가니로 밀어넣는다. 그는 드라마 '옐로우스톤'에 나오는 고매한 목장 주인 존 더튼이기도 하다. 더튼은 자신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자기 가족과 땅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누구라도 거리낌없이 죽일 인물이다. 여기서도 폭력은 그가 쓰고 싶어서 쓰는 게 아니다. 뱀의 혓바닥을 가진 진보, 모더니티, 탐욕의 힘이 그를 폭력으로 내몰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폭력을 쓸 준비가 돼 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적보다 훨씬 무자비하다는 걸 보여준다.


바로 이것이 트럼프의 머리가 람보의 몸에 달려 있는 까닭이다. 그저 평화롭게 살고 싶었던 '마지못해 싸우는 영웅'에 람보만큼 적절한 인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자신들의 규칙과 법을 내세우는 동네 경찰로 대변되는 '체제'는 그를 가만두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를 압제하는 체제를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사나이의 길이라고 신화는 말한다. 평화를 사랑하라. 그러나 전쟁을 준비하라.


콜로라도로 들어서면서 카일과 나는 성조기를 단 자동차가 많을수록 교통법규를 준수하는 차가 적어진다는 걸 발견했다. 마치 애국심을 전시하면 법은 물론이고 타인에 대한 책임에도 면죄부를 받는 듯했다. 크루즈 컨트롤을 켜고 주행하던 우리는, 성조기를 단 차들이 우리를 추월하거나 우리 차량 뒤에 바짝 붙어서 위협 운전을 하고 차선을 마구 넘나드는 걸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를 보며 나는 세바스찬 융거5의 문장을 떠올렸다. "아무런 보답도 하지 않고 사회가 주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은 말 그대로 유아적이다. 오직 유아들만 일방적으로 누릴 수 있다."


선과 악의 투쟁을 시각적으로 가장 명확하게 구현한 것은 헐리우드 서부영화의 전성기에서 볼 수 있는 흰 모자와 검은 모자다.


흰 모자와 검은 모자의 상징이 갖는 영향력은 워낙 강력해 오늘날에도 작가들이 그 영향력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모든 이야기에는 영웅과 악당이 있어야 하고 마지막에는 영웅과 악당이 필사의 총싸움을 해야 한다는 기대를 관객의 마음 속에 심어놓았다. 거의 모든 이야기는 모든 걸 일거에 결정할 '결투의 순간6'을 상정한다. 총을 든 착한 놈이 총을 든 나쁜 놈을 죽여야만 이야기가 끝난다.


실제의 삶은 이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영화 '파고'도 그렇지 않다. 영화에서 제리 런디가드가 마지막에 체포될 때 경찰서장 마지 건더슨은 현장에 없다. 런디가드가 다른 주로 도망가 서장의 관할권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관객은 영웅이 악당을 무찌르는 필사의 결투를 볼 기회를 빼앗긴다. 이러한 감독의 선택 때문에 일부 관객은 실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는 현실에서 정의가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여준다. 실제로 작동하는 체제는 개인적인 감상이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고 효율적으로 결과를 만든다.


마지못해 싸우는 영웅은 고귀하다. 협동해서 싸울 수도 있지만 그는 혼자 싸우는 걸 더 좋아한다. 그는 '사건 종결시켜'라는 상관의 명령을 불복하고 계속 사건을 파헤치는 형사다.


나 또한 그런 캐릭터를 여럿 만들었다. 드라마 파고의 시즌 1~3에서 싹싹하지만 집요한 경찰관 캐릭터들은 자신이 속한 경찰 조직과 갈등을 겪는다. 몰리 솔버슨, 몰리의 아버지 루 솔버슨, 글로리아 버글은 모두 홀로 (또는 파트너의 도움을 받아) 사건을 해결하고 어둠의 세력에게 정의의 철퇴를 내린다.


'개인 대 국가'의 구도는 매혹적이다. 프란츠 카프카부터 톰 클랜시까지 다양한 성향의 작가들이 모두 이 구도를 활용해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파고 시즌 5에서 나는 한 개인의 활약으로 이야기를 끝내는 구도를 포기하고 사법 체계의 손을 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일하는 공직자들이 힘을 합쳐 애쓴 끝에 사건을 해결하고 악당을 단죄하는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이렇게 평화가 지켜지며 이렇게 법규가 제정되고 집행된다.


파고 시즌 5의 대사 중 일부다.


게이터: "맹세컨대 그놈과 내가 남자 대 남자로 붙는다. 그놈 아주 작살을 내버릴 거야."


로이: "그래, 영화 '하이눈'처럼 말야? 그건 영화 속 이야기야 이 양반아. 현실에서는 네가 결투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놈들이 네 목을 따버린다고."


마지못해 싸우는 영웅 신화가 주는 교훈은 언제나 똑같다. '진정한 정의를 원한다면 네가 스스로 구현해야 한다.'


이런 식의 정의를 두고 '개척 시대 정의(frontier justice)'라고 부른다. 지금 시대에도 개척 시대 정의라는 관념에 대해 살펴볼 가치는 충분하다. 좋든 싫든, 우린 이미 서부 개척 시대로 끌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서부 개척 시대에 권리를 보장받은 사람은 누구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누구였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목록이 짧아서 금방 끝낼 수 있다.


'백인 남성은 권리를 보장받았다.' 이상이다.


작년 7월, 트럼프는 아메리카퍼스트정책연구소7에서 행한 연설에서 '새로운 서부 개척 시대'가 어떤 모습인지 매우 상세하게 설명했다. "세상에 이런 시대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길거리엔 마약쟁이의 주삿바늘이 널려있고 무고한 희생자의 핏자국이 가득합니다. 뉴욕부터 시카코, LA까지, 한때는 중산층이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기 위해 모여살던 위대한 미국의 도시가 이젠 전쟁터가 돼버렸습니다. 말그대로 전쟁터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누군가가 칼에 찔리고 겁탈을 당하고 살해를 당합니다. 상상할 수 있는 온갖 폭력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무자비한 범죄자 영역 다툼에 유혈이 낭자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지옥(트럼프의 표현을 빌자면 "범죄의 소굴")이 돼버렸다는 믿음은 새로운 서부 개척 시대에 만연하다. 이런 믿음을 가진 '새로운 개척 시대의 사나이'8들은 과거에는 일반적인 미국 사람들과는 어느 정도 유리되어 살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인터넷 미국'의 시민으로 스스로 인터넷으로 연구를 하며 미국에 정말로 중요한 것이 상실된 게 아니라 도난당했다고 여긴다. 그들은 누군가 미국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며 사는 계층의 권리를 빼앗고 짓밟으려 한다고 생각하며 2020년 대선은 그 중에서도 가장 대담한 음모였다고 여긴다.


'워킹데드' 같은 좀비물을 보면 늘 진짜 적은 다른 사람이지 않던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문명의 규칙이 무너지면 나의 이웃이 손을 뻗자마자 나를 죽이리라는 생각이 좀비물 세계관의 근간이다. 이것이 '새로운 개척 시대의 사나이'들이 가진 핵심 사상이다.


2016년 12월, 뉴욕타임스는 워킹데드가 미국 어느 지역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지를 살펴봤는데 농촌 지역과 켄터키, 텍사스 등 트럼프에게 표를 준 지역에서 가장 인기가 많음을 발견했다. 상당히 말이 되는 이야기다. 이 세계가 본질적으로 야만적이라고 확신한다면 그런 생각에 동의하는 이야기, 다시 말해 이웃이 이웃을 죽이는 판타지에 끌리게 된다.


만일 당신의 세계관이 이렇다면 무기를 내려놓고 남들처럼 순한 양이 되길 강요하는 문명의 법도는 미친 짓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늑대를 무서워 할 필요 없다고 말하는 양은 사실 양가죽을 쓴 늑대라고 의심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개척 시대의 사나이'는 오직 총을 든 좋은 놈만이 총을 든 나쁜 놈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생각 속에서는 자기 자신이 바로 그 좋은 놈이다.


개척 시대 정의의 다른 이름은 자경단식 정의(vigilante justice)다. 이 표현은 미국에서 오랫동안 추악한 역사를 남겼는데 희생자를 둘러싸고 린치하는 패거리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역사에만 남아 있는 단어는 아니다. 헐리우드 영화는 자경단식 정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배트맨은 자경단이고 가장 최근의 조커도 그렇다. 자경단 스토리는 어둠 속에 살면서 세상의 악으로부터 우릴 지키기 위해 싸우는 폭력적인 남성에 대한 낭만적인 상을 제시한다. 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심하거나 나약해서 하지 못하는 힘든 일을 해낸다. 이 또한 하나의 신화다.


2021년, '자경단법'이란 형용모순적인 발상이 등장했다. 텍사스주 상원법안 8호(S.B. 8)는 주의회를 통과했고 주지사의 서명도 받았다. 이 법은 낙태를 도운 사람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일반 시민에게 위임했다. 이 주법은 연방대법원의 이의제기 없이 시행되고 있다. 미국 민주주의의 246년 역사가 폭민(mob)의 의지에 맞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가 차로 여행하면서 마주친 모든 영화관에 걸려 있던 블록버스터 영화 '탑건: 매버릭'에는 누군지 적시할 수 있는 적이 나오지 않는다. 아랍 국가도 아니고 돌아온 냉전 시대의 적국도 아니다. 영화에서 진짜 적은 규칙 그 자체이며 규칙을 강요하는 관료다. 비행 고도에만 집착하는 해군 장성들과 그들의 규정 제일주의. 영화는 오직 '매버릭'9만이 외부의 위협 뿐만 아니라 체제 그 자체로부터 우릴 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탑건의 모토는 '생각하지마, 그냥 해버려'다. 이성이 아닌 본능이야말로 진정한 남자의 강점이다. 생각하면 전투에서 진다. 남자가 아는 것은 혁신이나 진보로 개선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여기서 신화와 현실이 갈라진다. 현실에서 '생각하지마, 그냥 해버려'는 통치철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을 누구를 위해 하란 말인가? 각기 다른 집단이 서로 다른 걸 원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나 그런 질문 자체를 깔아뭉개는 세계관 앞에서 이런 질문은 부질없는 것이다. '생각하지마, 그냥 해버려'는 '일단 쏴버리고 질문은 나중에 하라'는 더 오래된 미국적 모토를 떠올리게 한다.


여행을 하면서 우리는 라일 로벳(Lyle Lovett10)을 들었다. 윌리 넬슨(Willie Nelson)도 들었다. 헤이스 칼(Hayes Carll)이 신이 지상에 강림하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는 것도 들었는데 "모든 건 결국 물거품이 되고"라는 후렴구로 끝난다. 나는 내 눈에 눈물이 고이는 걸 느꼈다. 뒷좌석에는 아홉살바기 아들과 열다섯살 된 딸이 있었고, 이미 인구의 절반이 좀비물의 세계에서 살면서 생존을 위해 무장투쟁을 할 준비가 된 것처럼 보이는 나라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대비시킬 수 있을지 나는 정말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총을 겨누고 있는 '좀비'들은 실은 생생하게 살아있으며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같은 나라의 국민들이다.


신화가 오래 살아남는 건 단순하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는 중요한 문제를 흰 모자와 검은 모자같은 이분법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나는 파고를 서로 이동 궤적이 겹쳐 곧 충돌하게 될 여러 개의 물체라 생각한다. 어떤 물체가 충돌할지, 언제 충돌할지는 결코 정확히 알 수 없다. 삶의 복잡성을 포착하려 할 때면 무작위, 우연, 공시성 모두가 내게는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비극. 파고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본 것이다. 파고에서 비극은 언제나 소통 능력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때론 심지어 자기 자신과도 소통할 수 없는 경우도 나온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어려운 주제는 회피하려 든다.


인생과 마찬가지로 내가 만든 이야기의 캐릭터는 모두 자신만의 관점, 자신만의 경험을 갖고 있다. 더 이기적일수록(타인의 욕구도 중요함을 인정하려들지 않을수록) 더 나쁘게 행동한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를 남에게 강요하면서 자신이야말로 피해자라고 외친다.


큐어넌 샤먼11이 개척 시대의 괴물이 아니라면 뭐겠는가?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습격 사건 당시 식민지 시대나 독립전쟁 시대의 코스튬을 걸치고 날뛰던 이들은 또 얼마나 많았는가? 이들의 '코스프레' 폭동이 초기 미국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백인 남성이 비문명화된 민족이라고 간주한 이들과 싸우며 자신들의 길을 개척하던 시대로 회귀하는 것이다. 적의 야만성에 맞서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잔혹함과 무자비함이었던 시대다.


소통 능력의 부재에서 비롯된 비극은 오늘날 미국이 처한 곤경을 묘사하기에도 좋은 방법이다. 두 진영이 있고 둘 다 불만에 차 있다. 둘 다 자신의 고통은 진짜고 상대의 고통은 환상이라고 여긴다.


한쪽은 지난 대선이 사기라고 생각한다. 다른 한쪽은 투표권 자체가 박탈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쪽은 개혁, 더 나은 정부, 진정으로 평등한 사법체계가 답이라고 여긴다. 다른 한쪽은 정부 자체가 문제라고 여긴다. 양쪽 모두 소리만 지를 뿐 귀를 기울이진 않는다. 놀이공원의 마술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선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 같다.


소통이 멈추면 폭력이 따른다. 나의 상대방이 나의 적이 된다. 나는 흰 모자고 너는 검은 모자다.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린 잘 안다.


'옐로우스톤'을 만든 테일러 셰리던의 후속작 '1883'은 상당한 공감을 갖고 개척 시대 정신을 다룬다. 여주인공은 이런 대사를 한다. "세상은 네가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아. 네가 비명을 질러도 듣지 않을걸. 네가 땅에 피를 흘리면 땅은 피를 삼킬 거야. 네가 칼에 베였다는 데엔 관심없어."


이 세계를 이해하려 애쓰지 않는 게 낫다. 원주민에게 머릿가죽이 벗겨진 여성을 정착민 남성이 총으로 쏘는 장면이 나온 후에 드라마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한 슬픔과 수치심으로 제정신이 아닌 정착민 남성은 자제력을 잃는다. 그러나 샘 엘리엇이 분한 캐릭터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넌 결정을 내린 거야. 네가 적절하다고 생각한 일을 한 거지. 그게 적절한 거였을까? 누가 알겠어. 세상에 도대체 적절한 게 어딨나? 그 잣대는 뭔데? 네가 바로 그 잣대야. 넌 결정을 내렸다. 이제 그 결정을 지켜야지! 그게 맞든 틀리든 네가 내린 결정을 지켜야 해."


이것이 개척 시대의 도덕이다. 이 세계는 근본적으로 글러먹었다. 어떤 정부도 법률도 뭐가 옳고 그른지 말해줄 수 없다. 결국 우리 각자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 생각을 따라가보면 새로운 개척 시대 멘탈리티의 불가피한 종착점은 범죄라는 걸 깨닫게 된다. '합법'보다 '옳음'을 우위에 두면(그리고 자기 자신을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심판으로 임명하면) 결국 법치주의와 대결하게 된다.


이리 하여 개척 시대는 자기실현적 예언이 된다. 이를 신앙하는 사람은 개척 시대와 같은 상황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문명 세계에서 범죄자가 된다.


물론 좌파도 자신들만의 신화가 있다. 뭉치면 강해진다는 신화나 밀물이 들면 모든 배가 뜬다는 신화가 그렇다. 우리는 집단 행동의 성취담이나 사회의 부적응자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게 알고보면 강점임을 깨닫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히든 피겨스'에 나오는 흑인 여성들을 떠올려 보라. 그들은 개인적 편견과 제도적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우주 비행을 성공시킨다. 심지어 서부영화도 다원주의적이다. '황야의 7인'이나 '내일을 향해 쏴라'를 생각해 보라.


(서울=뉴스1) 박세연 기자 = 25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야외 88잔디마당에 설치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영희 로봇 동상이 시민들 눈길을 끌고 있다.   올림픽공원은 “오늘부터 약 3개월간 영희 로봇 동상을 전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4m 높이의 영희 동상에서는 ‘오징어게임’ OST와 함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드라마 속 음성도 나온다. 2021.10.25/뉴스1

(서울=뉴스1) 박세연 기자 = 25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야외 88잔디마당에 설치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영희 로봇 동상이 시민들 눈길을 끌고 있다. 올림픽공원은 “오늘부터 약 3개월간 영희 로봇 동상을 전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4m 높이의 영희 동상에서는 ‘오징어게임’ OST와 함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드라마 속 음성도 나온다. 2021.10.25/뉴스1


'기묘한 이야기'는 좌파적 판타지다. 용감한 아이들이 똘똘 뭉치며 결코 친구를 저버리지 않는다.


'오징어 게임'은 굳이 내가 이야기할 필요도 없겠지만 우파의 악몽이다.


'왕좌의 게임'은 우파적 '개척 시대 정의' 신화의 모습을 취한 좌파적 '뭉치면 강하다' 신화다. 강간 판타지가 난무함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인간 본성에 대한 고찰이며 도덕과 권력에 대해 경고하는 우화다. 선은 보답받는 일이 거의 없다. 집단 행동만이 세상을 구한다.


미국에서 왕좌의 게임이 인기 있는 지역을 꼽아보면 흥미롭게도 민주당 지지 지역과 대략 겹친다. 왕좌의 게임은 워킹데드의 대척점에 있는 드라마라 할 수 있다.


미국 독립기념일인 7월 4일, 우린 잭슨 시내의 공원에 모여 음악을 듣고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같은날 일리노이 주 하이랜드파크에서는 21세 청년이 옥상에서 총기를 난사해 수십 명이 다치고 일곱 명이 죽었다.


사건 소식을 듣고 카일과 나는 논의를 했다. 어떻게 인근 건물의 열린 창을 확인했는지, 만일 총기범(아니, 보다 정확한 표현인 '테러범'을 쓰자)이 총기를 난사할 경우 아이들과 어떻게 대피할 계획인지.


나중에 하이랜드파크의 총기 난사 사건에서 한 아기가 살아남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모의 시체 아래 있던 덕분에 살아남은 것이었다. 정말 우리가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통할 줄을 모르는 탓에 우리 아이들이 이런 대가를 치러야 한단 말인가?


이튿날 아들에게 총기 난사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아이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우리, 살아남은 미국인은 무엇을 해야 하나요.


총을 더 사야겠지. 나는 답했다.


1857년 창간된 미국의 대표적인 시사·문예 매거진. 진보적 성향으로 롱리드 피처, 인터뷰 기사로 유명합니다. 본래 월간지였으나 현재는 1년에 10회 발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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