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파괴' 사이: 시인이 듣는 '소리'를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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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하우의 2024년 시집 표지. /사진제공=WW Norton

2025.06.27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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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살다가 보고 싶지 않은 것에서는 눈을 돌리면 그만일 수도 있지만, 들려오는 소리를 피하기는 만만치 않다. 층간 소음 때문에 분쟁이 격화되는 일이 잦은 것도 청각적 자극이 가지는 이런 특수성과 관련된다. 원치 않는 소리를 그저 간단히 차단해 버릴 수 없기에 고통은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삶을 채우는 소리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 소리나 물 소리 같은 자연의 음향, 아니면 아름답고 감미로운 음악 소리를 들으며 하루하루를 채워 나갈 듯하다. 기쁨과 평화로움을 주는 이런 소리들은 듣는 사람의 일상을 조금은 더 청량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때로는 선택의 여지 없이 원치 않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상황이 닥치곤 한다. 윗집에서 인테리어 공사를 할 수도 있고 직장 바로 근처에 새로운 건물이 지어질 수도 있다. 그 뿐 아니라, 매일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면서 생업에 종사해야 하는 노동자들도 많다.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나 용접 소리처럼 오랜 시간 참기 힘든 청각적 자극을 삶의 당연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도 이런 상황들을 참고 견디는 이유는 매우 명확하다. 그 소리들을 통해 무엇인가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믿음이 청각을 통해 전해지는 고통을 어쩔 수 없다고 여기게 하는 것이다.


올해 퓰리처상 시 부문 수상자인 마리 하우(Marie Howe)의 '기계톱'은 이런 믿음에 정면으로 의문을 던진다. 참기 어려운 이 소리들은 과연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소리들을 견디면 정말 의미 있는 무언가가 창출되고 세상은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변화하는 것일까? 아니면, 혹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 시끄러운 소리들은 요란하지만 무용한 잡음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우리의 세상 여기저기를 채우고 있는 소리들에 대해서 반추해 보게 하는 이 시는 궁극적으로 지금의 세계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에 대한 무거운 질문을 담고 있다.


마리 하우 - 기계톱 (번역: 조희정)

항상 어딘가에 기계톱이 있지,

높게 찡얼대는 드릴 소리, 누군가가 뭘 만들거나 아니면

허물고 있지, 쇠에 쇠를 붙이면서.


거의 어디에서나 인간의 의지가 내는 소리,

엔진의 엄포, 칼날의 갈아댐, 바퀴,

망치질, 고치는 일.


누군가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누군가는 줄에 메여, 채찍을 맞지.

누군가가 교수대에 매달리네. 들어 봐. 밧줄이 끽끽거리는 소리.

계속되는 망치질.


그가 가진 총으로 그를 죽여요, 한 여자가 소리쳤지, 그가 가진 총으로 그를 죽여요.


우리는 무엇을 만들었을까? 우리는 무엇을 만들고 있을까?

그리고 누가 아니면 무엇이 우리가 만들고 만들었던 그런 것들을 만들게 했을까?


우리는 점점 작아지지—우리는 사물들을 부수고는,

서로를 돌아보며 인간이 줄 수 없는 것을 달라고 애원하지.



이 시의 첫머리부터 시인은 "기계톱"의 소리가 "항상 어딘가에" 있다고 말한다. 당장 내 주변에서 그 높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이 세상 어느 곳에선가 "기계톱"은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다. 이 "기계톱"은 생산과 건설을 위해 인간 문명에서 사용되는 모든 도구들을 상징하며, 이 도구들이 굉음을 내면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결과로 우리는 의식주를 해결하고 편의를 누리며 삶을 영위한다. 시인이 말하듯이 "기계톱"은 무엇을 만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허물기도 한다. 노후주택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신축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처럼, 또 아름드리 나무가 잘려 나가서 책상이 되고 침대가 되는 것처럼, "전기톱"의 움직임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파괴'해 나가게 된다.


이렇게 "기계톱"의 소리가 '창조'와 '파괴'를 거듭하는 과정은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문명의 발전에 가속 페달을 밟아온 역사는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끝없이 욕망하는 인간들이 만든 역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계톱"의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는 현장은 "인간의 의지"에 의해 시작되었을지 몰라도 반드시 "인간의 의지"대로 흘러가는 것만은 아니다. 시인은 "엔진의 엄포"와 "칼날의 갈아댐" 같은 표현을 통해, 인간이 사용하던 도구들이 통제를 벗어나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도 있다는 불안한 가능성을 암시하기 시작한다. 문명의 발전은 인간을 종속된 존재로 만들어 자유를 박탈한다거나 환경을 파괴하여 삶의 여건을 황폐화시키는 등의 부작용으로 얼마든지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문명이 건설되는 과정은 갈등과 희생을 동반하기도 한다. 누군가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채찍"을 맞는다는 표현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죽음을 연상시킴으로써, 어딘가에서 덧없이 스러져 가는 존재들의 고통을 강조해 준다. 이 대목에서 사용된 "들어 봐"라는 어구는 이런 희생이 모두에게 명확하게 인지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문명의 발전 이면에 자리한 어두운 지점을 향해 독자의 관심을 촉구한다. "밧줄"이 끽끽거리며 인간을 묶는 소리는 "들어 보려는" 의식적 노력 없이는 쉽게 들리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계속되는 망치질" 소리가 더 크고 분명하게 이어지는 세상에서는 건설되고 생산되는 것들의 새로운 모습만이 주목받기 십상이다.

이 과정에서 희생되는 존재들이 겪는 비극은 어떤 면에서는 인간들의 의지가 창출해 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는 예수의 죽음 앞에서 안타까워하는 여성들이 등장하지만, 이 시의 중반부에 등장하는 여성은 "그가 가진 총으로 그를 죽이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할 뿐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겨누는지도 모르는 채 "총"을 만들고 사용하며, 문명은 한편으로 축복을 가져다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파멸을 동반한다. 전쟁이나 환경 오염처럼 인간이 만들어 낸 대규모의 비극적 현장은 죄 없는 존재들의 희생이 과연 누구의 책임인지를 엄중하게 묻는다. 개개인이 의도적으로 이런 비극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인간의 집합적 의지가 만들어 낸 절망적 상황에는 결국 모두가 연루된 것이 아닐까?


이쯤 되면 "우리는 무엇을 만들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만들고 있을까"를 따져 묻는 시인의 절박한 물음이 아프게 와 닿기 시작한다. 너무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흐름에 이끌려 가다 보니, 어떤 이유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문명의 거대한 수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는지조차 이제 아무도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듯하다. 그런데도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기계톱"의 날카로운 소리는 이 세계를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일까?


시인이 마지막 연에서 비관적으로 말하듯이, 우리는 어쩌면 더 많이 가지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하려다가 오히려 "점점 작아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창조"라고 여겼던 생산과 건설의 과정이 실은 "사물들을 부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희망을, 그리고 구원을 갈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뒤늦은 "애원"의 눈빛이 무엇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인가? "기계톱"의 요란한 소음이 만들어 내는 세상에서 잘 들리지 않는 고통과 파멸의 소리를 듣는 시인의 예민한 청각에 기대어, 더 늦기 전에 우리가 들어야 할 모든 소리들에 제대로 귀 기울여야 할 마지막 시점이 바로 지금일지도 모를 일이다.


원문: Chainsaw

There's always a chainsaw somewhere,

the high whine of a drill, somebody building something or

tearing it down, fastening metal to metal.


Almost everywhere the sound of the human will,

the bluster of an engine, the grind of a blade, the wheel,

hammering, repair.


Someone nailed to a cross, someone leashed, lashed.

Someone hung from a scaffold: listen: the squeak of the rope:

more hammering.


Kill him with his own gun, one woman shouted, Kill him with his own gun.


What have we made? What are we making?

And who or what made us that we should make such things as we do and did?


We grow smaller—we break things,

then turn to each other and beg for what no human can give.



조희정은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하버마스의 근대성 이론과 낭만주의 이후 현대까지의 대화시 전통을 연결한 논문으로 미시건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간과 자연의 소통, 공동체 내에서의 소통, 독자와의 소통, 텍스트 사이의 소통 등 영미시에서 다양한 형태의 대화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양상에 관심을 가지고 다수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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