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공=Google DeepMind
2025.07.11 14:45
지금 이 글을 비롯해서 어떤 글이든 접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누가 이 글을 썼는가, 그래서 이 내용에 저자(author)로서 권위(authority)를 부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저자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기도 한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이 글의 진리성을 가늠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약력을 통해 내가 미국의 한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학을 가르치는 교수임을 확인하게 되면, 독자는 내가 이 글에서 다루려는 '대형언어모델(LLM)의 출현이 가져온 혼란'에 대해 논할 적절한 위치에 있고, 내가 제시하는 견해 역시 어느 정도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결국 독자는 저자의 정체를 파악했고, 그가 이 주제에 관해 일정한 권위를 가진 인물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텍스트가 챗GPT, 클로드, 딥시크와 같은 LLM에 의해 생성된 경우에는, 저자가 누구인지 안 보인다. 기술적으로는 알고리즘이 글을 작성했지만, 이를 실행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이 프롬프트를 제공해야 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저자는 누구인가? 알고리즘인가, 인간인가, 아니면 양측의 공동 작업인가? 그리고 이 질문은 왜 중요한가?
(This article was produced by and originally published in Noema Magazine.)
2022년 챗GPT 출시 이후, 인간 저자의 종말을 한탄하는 많은 논평이 쏟아졌다. LLM이 글쓰기라는 행위를 완전히 장악하거나, 인간이 고유의 창의성을 그들에게 지나치게 넘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였다. 지난해 한 저널리스트는 이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우리는 "말을 잃고, 생각을 잃고, 자아를 잃게 될 것"이라고 개탄했다. 하지만 그는 영향을 받는 것은 비단 작가만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만약 AI가 인간의 글쓰기를 정말로 대체한다면, 독자이자 작가인 우리 인간은 과연 무엇을 잃게 될 것인가? 우리가 치를 대가는 이전의 그 어떤 자동화의 물결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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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LLM이 저자라는 개념의 종말을 시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결코 우리가 애도해야 할 상실이 아니다. 오히려 LLM은 해방을 의미할 수 있다. 그것이 작가와 독자 모두를 '저자'라는 이름의 권위적 통제와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에게 '저자'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대부분 책 혹은 글을 쓰고 그 내용을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람들은 윌리엄 셰익스피어, 장 자크 루소, 버지니아 울프, 그리고 어쩌면 이 글을 쓰는 데이비드 군켈 같은 이름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에 대한 이런 이해가 태초부터 존재한 보편적 진리는 아니다. 그것은 근대에 역사적으로 형성된 관념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저자"라는 개념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서 비롯된 역사적 산물이다.
프랑스의 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는 1967년 비평문 '저자의 죽음'에서 오늘날 통용되는 저자라는 개념의 기원을 유럽의 근대, 대략 16세기 중반 이후로 거슬러 올라가 찾았다. 물론 그 이전에도 사람들이 글을 썼으나, 한 개인에게 책임과 권위를 부여하는 사고는 일반적인 관행이 아니었다. 실제로 우리가 지금도 읽는 민담, 신화, 종교 경전처럼 많은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문학 작품들이 저자를 특정(特定)하지 않고 필요로 하지도 않은 채 인류 문화 속에 전승되어 왔다.
그러나 근대 유럽은 미셸 푸코가 훗날 "사상의 역사에서 개인화가 이루어진 특권적인 순간"이라 부른 국면을 중심으로 수많은 연관된 지적, 문화적 흐름들을 잉태했다.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은 교황권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며 개인화된 신앙을 탄생시켰다. 이어 17세기에는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 위에 합리주의 철학을 구축하며 모든 지식의 기초를 자기의식적 사유(思惟)의 확실성에 두었다. 이러한 사상적 혁신과 더불어 개인의 권리로서 '사유 재산' 개념이 등장하였고, 이는 국가에 의해 보장되고 보호받는 권리로 자리 잡았다.
바르트와 푸코가 보여주듯, 저자라는 개념은 이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혁신의 흐름들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형성된다. 하지만 문장적 권위의 중심으로서 저자라는 개념은 단지 이론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점차 실질적인 법적 문제로 진화했다. 18세기 영국과 그로부터 분리된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저자는 새로운 형태의 재산법인 저작권법에서 책임있는 당사자로 등장했다. 저자가 문예 작품의 정당한 소유자라는 발상은 예술의 본질적 가치를 수호하려는 이상주의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쇄술'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일으킨 충격, 즉 문서의 자유로운 유통과 확산이라는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런던에서 처음 도입되었다.
스벤 버커츠(Sven Birkerts)가 책 <구텐베르크의 비가(悲歌)>(The Gutenberg Elegies)에서 설명하듯, "한 사람이 독창적인 작품을 창작하고 그에 대한 역사적 소유권을 갖는다는 '개인 저자성'(individual authorship) 개념은 인쇄술이 구술을 대신해 문화적 소통의 기반이 되기 전까지는 대중의 인식 속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다." 텍스트를 기계적으로 복제해 손쉽게 유통할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게 되자, 글의 저자를 밝히는 일,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저자로서 인정받는 일이 중요해졌다. 이처럼 저자의 실제 이름은 단지 텍스트의 기원과 의미, 귀속을 가늠하는 데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업적 거래와 대가 지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저자'라는 개념의 출현은 근대 문학 이론에 여러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바르트는 "저자가 발견되어야 텍스트가 '설명'된다"라고 썼다. 글의 권위(author-ity)는 물리적 재료, 이를테면 (밖으로 보이는) 단어들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쓴 개인의 (보이지 않는) 원래 생각, 의도, 인격 속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독자의 주요 과제는 글의 표면을 뚫고 들어가 그 이면에 있는 저자의 목소리를 찾아내고, 저자가 본래 의도했던 것을 파악하는 일이 되었다. 이런 관점에 따라 근대의 비평가들과 철학자들은 데카르트의 주장에 동의했다.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나간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람들(men)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여기서 성별 배타적인 "men"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시대 저자란 다른 분야의 많은 권위자들처럼 대부분 백인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글쓰기를 생각의 표현(밖으로 내보낸다는 뜻)이나 전달의 매개체로 개념화하는 사고는 깊은 지적 전통과 확고한 역사적 기반을 지니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기호와 그 의미 이론에서, 문자(written word)는 정신적 경험을 상징하는 기호(symbol)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우리가 쓴 글은 마음속에 있는 것을 나타내거나(represent) 표현한다(express). 이 개념은 20세기 중반 커뮤니케이션 과학에서 클로드 섀넌과 워런 위버에 의해 더욱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어, 오늘날 이 분야의 모든 입문 강의에서 가르치는 단(單)방향 모델로 정립되었다. 발신자(source), 송신기(transmitter), 채널(channel), 수신기(receiver), 메시지(message), 수신처(destination)로 구성되는 모델이다.
따라서 이 논지에 따르면, 가장 훌륭한 글이란 독자가 저자의 생각에 쉽게 다가갈 수 있고, 그것을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도록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글이다. 글은 사실상 투명한 매개체가 되어, 저자의 내면에서 독자의 내면으로 정보가 아무 장애 없이 흐를 수 있게 해야 한다.
문장적 권위와 책임의 핵심 주체로서 '저자'라는 것이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등장한 역사적인 것이라면, 그 역사적 역할의 수행을 중지하는 지점 또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 가능성을 롤랑 바르트는 그 유명한 글 '저자의 죽음'에서 시사했다. 바르트가 말한 저자의 죽음이란 특정 개인의 죽음이나 인간의 글쓰기 자체의 종말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글 속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 이야기되는 것에 권위를 부여하던 존재로서 '저자'의 역할이 종료되고 폐기된다는 선언이다. 바르트는 대형언어모델(LLM)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의 통찰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상황을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예견했다. LLM은 단어들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권위를 실어줄 수 있는 살아 있는 목소리 없이도 글을 생산한다. LLM이 생성한 텍스트는 말 그대로 '저작권(저자의 권리)이 없는' (unauthorized) 글이다. 최근 미국 연방항소법원도 AI에게 저작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을 확정하며 이를 명시했다.
챗GPT와 같은 도구들에 대한 비판도 대체로 같은 맥락에서 이어진다. LLM은 단지 인간의 말을 흉내 내거나 단어 패턴을 반복하는 것일 뿐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하기에 "확률적 앵무새"(stochastic parrots)라고 불린다. LLM이 저자성(authorship), 권위, 그리고 글쓰기의 방식과 의미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전반적으로 뒤흔들면서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저자'라는 개념이 형성된 역사적 과정을 되짚어보면, 이와 같은 비판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글쓰기에 권위를 부여하는 행위는 언제나 사회적으로 구성된 인위적 장치였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태초부터 존재하던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글쓰기를 이해하기 위해 고안해 낸 개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죽음' 이후에는 모든 것이 뒤바뀐다. 구체적으로 어떤 글의 의미는 그 글을 썼다고 여겨지는 사람의 진정한 인격이나 목소리에 의해 선험적으로 보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미는 읽기의 경험 속에서 그리고 읽기의 경험을 통해 발생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독자는 저자가 말하려 했다고 믿는 것을 발견—좀더 적절하게 표현하면 구성(fabricate)—한다.
문학 이론의 이 같은 전복은 의미 형성의 중심을 근본적으로 재배치함으로써, 오랫동안 통념이 된 의미 작용의 전제를 송두리째 뒤흔든다. 이전에는 의미 형성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의도"를 가진 저자에게 귀속되었지만, 이제 의미는 독자에게 귀속된다. 이를테면 '햄릿'을 읽을 때, 우리는 셰익스피어가 그것을 쓴 진정한 의도를 알 수 없기에 각자의 해석을 통해 의미를 구성한다. (그리고 다시 그 해석을 셰익스피어에게 투사한다.) 이 과정을 통해 저자에게 부여되었던 권위는 단지 의심받는 수준을 넘어 전복된다. 바르트는 이렇게 썼다. "텍스트는 다양한 문화에서 끌어온 다수의 글들로 구성되며, 이 문화들은 서로 대화, 패러디, 논쟁의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이 다양한 것들이 모이는 단 하나의 지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독자다 ... 텍스트의 통일성은 기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달점에 있다." 다시 말해, 저자의 죽음은 곧 비평적 독자의 탄생이다.
의미 형성의 중심이 근본적으로 이동했다는 점은 LLM이 생성한 콘텐츠가 어떻게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도 설명해 준다. LLM은 실제 세계에 뿌리를 둔 구체적(具體的) 대상에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에, 겉보기에 그럴듯하게 단어들을 배열하지만 "그 뒤에 있는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비판은 분명 타당하다. 그렇다고 LLM이 단지 허튼소리(bullshit)를 뱉어내는 존재라고 단정짓는 것은 성급하다.
LLM이 생성한 글은 의미를 지닐 수 있고, 실제로 의미를 지닌다. 그 의미란 독자가 그것을 읽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이는 LLM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바르트가 이미 보여주었듯 이것이야말로 모든 글쓰기의 본질적 특성이다. 지금 이 글 또한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그 의미를 판단한 주체는 바로 당신 즉 독자이다. LLM은 단지 이 사실을 보다 분명하고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낼 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놓여 있다. 대형언어모델(LLM) 기반 AI의 등장은 의미라는 개념 자체를 다시 묻게 만든다. 내가 "대형언어모델"이라는 말을 쓸 때, 우리는 그 단어들이 챗GPT 애플리케이션처럼 세상 어딘가에 실재하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고 전제한다. 단어들이 의미를 갖는 것은 '저자'와 같은 어떤 존재가, 즉 현실 세계에 육체를 지니고 접근할 수 있는 어떤 인간이 어떤 대상을 지시하거나 설명하기 위해 단어들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언어는 대상을 지시하고 대상에 머리를 숙이는 기호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과 맞닿아 있다. LLM의 큰 문제는 바로 이 '대상을 지시하고 대상에 머리를 숙이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LLM은 단어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 채 단어들을 만지작거린다.
그러나 이처럼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일견 상식적인 관점은 20세기 구조주의 언어학이 이룬 이론적 혁신들에 의해 정면으로 도전을 받았다. 구조주의 언어학은 언어와 의미 형성의 본질을 언어 내부(언어 밖이 아니라)에 존재하는 차이(difference)의 문제로 이해한다. 이러한 기호학적 원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아마도 사전일 것이다. 사전에서 단어는 다른 단어들과의 관계를 통해 의미를 획득한다. 이를테면 "나무"라는 단어를 찾으면 실제 나무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줄기나 몸통이 하나로 되어 있는 다년생 목본 식물"과 같은 다른 언어적 정의가 제시된다.
그러므로 단어들은 어떤 외부 사물에 직접 대응함으로써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단어는 다른 단어들과 관계를 가지며 의미를 형성한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의 난해하기로 악명높은 사상가 자크 데리다의 유명한 선언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의 의미(적어도 여러 의미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특히 LLM에 있어 맞는 것인데, LLM에게는 말 그대로 그들이 학습한 텍스트와 프롬프트를 받아 그들이 생성한 텍스트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LLM에게는 오직 끝없이 이어지는 단어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LLM 기술에 대한 비판, 즉 이 알고리즘들이 실제 세계에 뿌리를 둔 구체적 참조 대상과 연결되지 않은 채 그저 단어들을 이리저리 순환시킬 뿐이라는 지적은 비평가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결정적인 약점이 아닐 수도 있다. LLM은 구조주의적 머신이다. 단어가 사물에 대한 직접적 지시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단어들과 참조와 지연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구조주의 언어 이론의 실제적 구현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식 고전 기호학의 전통적인 의미 작용의 전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우리는 LLM이 제시하는 가능성과 위험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결국 LLM과 다른 형태의 생성형 AI들은 세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강력한 기술들이기 때문이다. 챗GPT는 아직 만 3년도 되지 않았지만 이미 주간 사용자 수가 5억 명에 달하며, 딥시크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플랫폼 중 하나이다. 이와 유사한 기술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등장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시스템들이 인간의 지식에 대한 접근, 해석, 전달 방식에 제기하는 도전에 대응함에 있어서, 많은 언어학자, 철학자, AI 전문가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정당성이 약화된 '저자성'(author-ship)과 '권위'(author-ity)의 개념을 다시 되풀이하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글쓰기에 대한 이런 전통적 사고방식이 LLM이라는 혁신적 기술 앞에서 작동을 멈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이 전통적 개념이 너무도 잘 작동하여, 마치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럽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여전히 우리의 사고에 영향력과 권위를 행사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LLM을 둘러싼 오해의 상당 부분은 '인공지능'이라는 용어가 이해되는 방식에 기인한다. 이 용어에 '지능'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거기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에, 우리는 AI의 산출물을 보고는 지능적 사고가 존재함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거나, 반대로 엉뚱한 결과나 환각(hallucination)이 나타날 경우엔 지능이 없구나라고 받아들이곤 한다. 글을 생성하는 능력을 지능의 징후 혹은 표현으로 간주하는 발상은 이미 앨런 튜링의 '이미테이션 게임' 시절부터 인공지능을 정의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LLM은 지능 없이도—혹은 더 불안한 가정이지만, 그 내부에 지능이 존재하는지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는 상태에서—이해가능한 텍스트를 생성한다. 바로 이 점에서 LLM은 게임의 규칙 자체를 뒤흔든다.
이 모든 것은 LLM의 기술적 중요성을 둘러싼 열풍 속에서 우리가 간과해 온 한 가지 사실을 드러낸다. LLM은 철학적으로도 중대한 의미를 지닌 존재라는 점이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것은 말하지 않고도 글을 쓰는 존재들, 저자의 권위 있는 목소리가 없고, 그에 의존하지 않고도 넘쳐나는 텍스트들, 그리고 무언가를 말하려는 사전 의도에 의해 그 진실성이 고정되거나 보장될 수 없는 진술들이다.
기존의 사고방식에 얽매인 시각에서 보면, 이러한 변화는 그저 위협이자 위기로만 보일 수 있다. 글쓰기가 무엇인지, 문학의 상태는 어떠한지, 진리란 무엇이며 진리를 어떻게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는 서구 형이상학과 그 헤게모니의 한계를 넘어서 사유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LLM은 글쓰기, 저자라는 주체, 진리의 개념 자체를 위협하지 않는다. LLM은 이러한 개념들이 의미하는 것에 대한 특정하고 제한된 이해 방식을 위협할 뿐이다. 그 이해 방식은 결코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특정한 문화와 철학적 전통 속에서 역사적으로 구성된 산물이다. 따라서 LLM을 종말의 징후나 글쓰기의 종언으로 오해할 것이 아니라, '저자'라는 함수가 도달한 궁극적 한계를 드러내고, 그 함수의 구성 원리들을 해체하는 과정에 참여하며,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고 글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을 여는 존재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나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말라. 이 글을 쓰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무엇이 나에게 이 텍스트에 대해 권위를 주장하고 행사할 권한을 부여하는가? 당신은 지금까지 읽어온 이 글이 실제로 인간 저자가 쓴 것인지, 아니면 LLM이나 인간-기계의 협업이 생성한 것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도 확실히 알 길은 없다.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 예컨대 나의 이름을 밝히거나, 약력을 제시하거나, 지금까지 읽은 내용이 "100% 인간이 생성한 진본"이라는 선언문을 덧붙이는 일조차 결국은 무력하다. 왜냐하면 LLM도 정확히 같은 것을 생성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확언이 따르더라도, 언제나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는 남는다.
바로 이것이 핵심이다. LLM이 생성한 콘텐츠에 고유한 것으로 여겨졌던 난점, 즉 단어들이 존재하지만, 누가 또는 무엇이 글들이 전하는 내용의 '원 저자'인지를 알 수 없다는 점은 사실 모든 형태의 글쓰기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물론 이 글도 예외가 아니다. LLM이라는 형태의 인공지능이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운 것은 그것이 이러한 운명에서 벗어난 일탈이나 예외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진실처럼 받아들여 온 질서 자체가 하나의 허구였음을 여실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J 군켈은 노던일리노이 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의 총장 연구·학술·예술 교수Presidential Research, Scholarship and Artistry Professor이며, 폴란드 바르샤바 소재 와자르스키 대학교의 응용윤리학 부교수이다. 최근 저서로『소통하는 AI: 거대 언어 모델에 대한 비판적 입문』(Polity, 2025)가 있다.
(To read the original essay and other similar essays in English, visit noemamag.com.)
'저자의 죽음'이라는 제목부터 눈을 끄는 6월 4일자 노에마 기사는 저자의 존재를 역사적으로 짚어봅니다. 사실 저자, 저작권이라는 것에 우리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역사적 산물이라고 합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口傳)의 시대에는 누가 '원 저자' '원 창작자'인지 관심이 없습니다. 밀양아리랑의 원 작곡자가 누구인지 아시나요? 이 기사에 따르면 인쇄술과 대량 인쇄물의 등장에 따라 누가 판매의 댓가를 받아야하는지라는 경제적, 법적 문제가 발생했고, 이에 따라 '저자가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관심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식이나 아이디어, 창작의 '개인화' '사유화'가 발생했습니다. 생각도 개인화, 사유화됩니다. 데카르트가 'cogito ergo sum' 즉 '생각한다고 고로 존재한다'고 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생각은 내가 하는 것이라는 근대적 자의식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한 나라와 한 시대의 집단적 정신(Geist)이 유령처럼 세상에 떠돌면서 전개되는데, 어떨 때는 A라는 사람의 뇌와 몸을 빌려 생각을 전개하고 다른 때는 B라는 사람의 뇌와 몸을 빌려 생각을 이어간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개인적 머리는 집단적 정신이 잠시 빌려 쓰는 숙주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근대적 '저자' 개념 집착을 이제는 버릴 때가 된 것이 아닌가 반문합니다. 이 '저자'라는 역사적 현상에 집착하다보니 AI의 LLM(대규모언어모델)에 심리적, 정서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비판입니다. LLM은 세상에 떠도는 당대의 말들을 정리해서 제시합니다. 무슨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통계적으로 가장 주류가 되는 말들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생각의 주체가 만든 말이 아니라 그냥 세상에 떠도는 말들이기 때문에 '생각없는 말들' 아니냐며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만, 사람인 '내'가 말들을 이용해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말들(ideas)이 사람인 '나'를 이용해 자신들을 전개하고 표현한다는 시각에서 본다면 주체 없는 말들이라고 해서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노에마 기사는 그런 점에서 이제 '저자는 죽었다'고 선언하면서 대신 '비평적 독자의 탄생'을 주장합니다. 세상의 공기 중에 떠도는 아이디어를 사람 저자든 AI든 누군가가 정리해주면 그것을 결국 선별하고 비평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독자이며, 독자만이 단단한 실체로서 문화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독자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생각의 주체인가요? 아니면 말(또는 idea)이 여러분의 눈과 귀로 들어왔다가는 뇌와 혀를 통해 세상으로 다시 나가 돌아다니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