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테크

AI, 그리고 인간 작가의 종말

컴퓨터가 인간처럼 글을 쓸 수 있다면 인간 창의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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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Google DeepMind

2024.06.14 14:16

The New Re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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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와 DALL-E 같은 도구의 출현과 함께, 얼핏 보면 인간의 작품과 분간이 안 되는 AI 작업물이 범람하면서 인간 '창의성'에 대한 논의가 다시 열기를 띠고 있습니다. 보통 이런 논의는 작품을 감상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많고 '작가'의 입장에 대한 논의는 있더라도 직업상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는 편입니다. 그런데 기자이자 작가인 사만드 수브라마니안은 2024년 4월 22일 뉴리퍼블릭에 기고한 글에서 그간의 논의들을 정리하면서 색다른 시사점도 제공합니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조명하는 것이죠. 독자분들께서도 일기를 쓰면서 그제서야 그동안 갖고 있던 복잡한 생각과 감정이 정리되는 경험이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AI 시대에도 글쓰기를 게을리해서는 안될 이유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글은 인간 지능이 선험적 출발점이라고 보는 플라톤적 관점과 경험적 결과물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을 소개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옳다면 AI의 인공지능도 지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지만, 플라톤이 옳다면 인간의 지능은 인공지능 너머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두 철학자의 논쟁도 염두에 두면서 이 글을 읽으보시면 AI와 인간지능, 창의성에 대해 배우는 바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글쓰기에서 지독하게 싫으면서도 중독적인 요소는 불확실성이다. '이 글을 누가 읽을까?' 또는 '이 글을 써서 월세는 마련할 수 있을까?'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불확실성이란 바로 글을 쓰는 행위 자체에 있는 불확실성이다. 에세이를 쓰는 직업을 생각해보자. 만 개의 가능성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 보이지도 개념화되지도 않은 만 개의 가능성 중에서 처음 포착된 걸 놓치면 안 된다는 경험에서 나오는 감각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을까?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모른 채 어떤 실을 잡아당기고, 어떤 실을 그대로 두어야 할까? 이러한 과정에서 무슨 아이디어를 골라내 다듬고 주물러서, 이름도 모르는 독자 앞에 내놓아야 할까? 하나의 문장 다음에는 어떤 문장이 오는 것이 가장 나은 것인지, 심지어 어떤 단어가 가장 적합한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예리한 관찰자라면 내가 글쓰기의 본질에 대해 불평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작가의 오랜 특권이다. 작가는 작가의 고유성이라는 안전망 속에서 이런 불평을 토로해왔다. 글쓰기에 대해 불평하는 작가가 아니라면, 누가 글을 쓰려고 했겠는가?


오늘날에는 챗GPT 또는 바드Bard처럼 그 이름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캐주얼하거나 신화적인 언어 엔진이 등장했다. 이 언어 엔진은 작가들이 겪는 불확실성으로 인한 고통을 추호도 겪지 않는다. 요청만 하면 몇 초 만에 사용설명서와 단편 소설, 대학교 에세이, 소네트(유럽에서 형성된 정형시의 한 종류로 관련된 형식적 규율들은 시대에 따라 진화하였으나, 당시에는 14행의 시 형식이 유행했다), 시나리오, 선전물, 논평 등을 쏟아낸다. 가히 '구토 행위'라 할 만하다. 나오미 S 배런Naomi S Baron이 '누가 이 글을 썼을까?Who Wrote This?'라는 저서에 썼듯, 한 장 분량의 글이 문법을 고뇌하는 인간의 작품인지 아니면 기계의 마찰 없는 내면에서 온 것인지를 독자가 항상 분별해 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작품은 인간이 만든 것 같지만,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은 그렇지 않다.) 글 읽기의 운명을 주제로 수십 년째 글을 써온 언어학자 배런은 바로 이런 점이 불안했다. 사람들이 여전히 인공적으로 쓰인 글을 정확하게 식별했다는 일부 실험 결과도 그다지 위안은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AI는 새 버전이 나올수록 더욱 개선된 기능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는 AI가 블레이크식 운율Blakean scansion과 다른 형식을 완전히 통달해, 우리가 만든 것과 구별되지 않는 결과물(여기에서는 기계적인 용어가 적절하다)을 내놓을 것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당연히 이는 당혹스러운 상황이다. 컴퓨터가 사람처럼 글을 쓸 수 있다면, 인간 창의성의 본질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만약 존재한다면) 우리와 기계를 구분해 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실제로 AI가 인간의 글쓰기를 대체한다면, 독자는 물론 작가는 무엇을 잃게 될까? 여기에는 과거에 나왔던 그 어떤 자동화의 물결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엄청난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우리는 문자로 무엇인가를 표현하면서 하나의 문명이 될 수 있었다. 문자 발명으로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구분할 정도로 우리도 이를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글쓰기의 침식은 역시 문자 발명 못지 않게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벡터 공간과 트랜스포머 아키텍처1에 대한 언급은 모두 생략하고 매우 단순하게 현대의 대형언어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LLM은 거리에서 신호등을 보고 멈추는 자동차를 실제로 본 적이 없다. 때문에 "BMW가 신호등 앞에서 정지했다"라는 문장을 만들어 낸다고 해도, 그 안에는 어떤 경험적 진실이 들어있지 않다. 하지만 LLM은 투입된 방대한 양의 텍스트를 이용해 패턴을 파악하는 훈련을 한다. 챗GPT 3.5만 봐도, 훈련에 학습하는 텍스트가 3000억 단어에 달한다. 그리고 기초 자료가 되는 문장에서 다음 단어를 예측하고 텍스트가 이어지면서 초기 예측을 수정하거나 강화하는 소리 없는 수학 게임을 하도록, 프로그램이 만들어져 있다. 이렇게 LLM은 3000억 개가 넘는 단어를 활용해 게임을 충분히 하고 나면, 스스로 판단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모방해낸다. BMW는 자동차의 일종이고, "신호등"은 "교통신호"의 동의어이며, 현실에서는 "BMW가 신호등에서 춤을 췄다"보다는 정지했다는 문장이 더 정확하다는 것을 충분히 판별해내는 것이다. LLM은 동일한 예측 알고리즘을 사용해 스스로 그럴듯한 문장을 뱉어낸다. 말뭉치에서 단어나 구문 또는 아이디어가 서로 얼마나 자주 함께 쓰이는지를 학습해, 표현을 조합해내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은 패턴 매칭이다. 모든 것이, 심지어 시조차도 수학이다.



비록 LLM이 사용하는 방식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인간이 언어를 이해하는 방식을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다. 내가 아는 그 어떤 아기도 '엄마'라고 말하기 전에 3000억 개의 단어를 소비하지 않는다. 하지만 컬럼비아대학교 영문학과 부교수인 데니스 이 테넨Dennis Yi Tenen은 그의 신간 '로봇을 위한 문학 이론Literary Theory for Robots'에서 우리가 언어로 작품을 창작하는 방식과 기계가 글을 쓰는 방식에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사고와 글쓰기는 군중과의 대화 속에서 시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테넨의 주장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서로를 모방하고 베껴서 새로운 예술을 창조해 냅니다." 작가는 무의식적으로든 그렇지 않든 다른 이들의 저술과 대화에서 영감을 얻고, 단어 사전과 유의어사전, 스타일 가이드의 도움을 받는다. "우리는 육체와 도구, 텍스트, 환경, 다른 사람들을 이용해서 사고를 합니다." 작가는 AI의 계산 행위만큼 자신이 참고한 책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지만, 책이 그를 작가로 만들어주는 것은 마찬가지다. 테넨은 "지능을 개인의 탁월한 업적에서 나오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 즉 외로운 작업실에서 작가가 단어와 아이디어를 새로이 만들어낸다는 우화를 신봉하는 것은 항상 잘못된 일이라고 썼다.


분산 지능distributed intelligence이라는 개념에는 민주적이면서도 불안정한, 즉 교묘하지만 평등주의적인 방식으로 작가를 죽이려는 무언가가 숨어 있다. 하지만 테넨은 지능의 출처를 너무 고민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 우리의 사고가 낭만주의자들이 소중히 여기는 신이 내려준 독창성이 아니라 LLM의 종합에 더 가깝다고 해도 누가 신경 쓰겠는가? 분명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테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델에서는 사고의 목표가 지능"이라고 썼다. (굵은 글씨 강조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테넨이 강조한 것이다.) 지능이 내면의 어떤 부분, 즉 때로 깨달음으로 이끌어주는 사적이면서 모호한 어떤 것에 있다고 본 사람은 플라톤이다.2 누구의 말이 더 맞는 것 같은가?


문학 창작이 절정이던 시대에도 소설을 쓰는 작가들은 재조합의 필연성에 굴복했다. 작가들이 다른 글을 참고한 역사는 테넨의 책에서 가장 상세하게 다뤄진 분야다. 그는 이 이야기를 극작가들이 새로운 희곡을 쓰는 걸 돕고자 1895년 '36개의 극적 상황The Thirty-Six Dramatic Situations'이라는 책을 낸 진취적인 프랑스인 조르주 폴티Georges Polti로부터 시작한다. 폴티는 인간의 조건을 이루는 상황을 간청와 구원, 복수, 추구, 재난, 반란 등 36가지로 정리했다. (폴티는 각 상황에 대한 구체적 설명도 했다: 예를 들어 "추구" 상황의 하위 유형 중에는 "사랑의 결함을 좇는 것"과 "지식을 내세워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는 이들에 맞서는 반미치광이" 등이 있다). "사람들은 내가 상상력을 말살한다고 비난할 것이다." 폴티의 글이다. 하지만 사실 그의 근원적 바람은 극작가들이 그저 참신함만 추구하지 않고, 진실과 아름다움에 전념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마크 트웨인은 작가들이 훗날 창작에 영감을 얻을 수 있게 메모와 신문 스크랩, 이미지 등을 붙여 넣을 수 있는 스크랩북을 만들었다. (그의 비서는 한 무명 정육점 주인이 영국 귀족 작위를 주장한 런던의 티치본 재판Tichborne trial 자료로 스크랩북 여섯 권을 채웠다. 트웨인은 이 이야기가 너무 거칠어서 "소설가"에게는 쓸모가 없다고 했지만, 이 이야기는 제이디 스미스Zadie Smith의 최신 소설인 '속임수The Fraud'의 기초가 됐다.) 기업에선 작가들이 나중에 배경, 캐릭터 또는 줄거리 씨앗을 뽑아낼 수 있도록 참고 자료를 채우는 셔터쿼 문학 파일Chautauqua Literary File과 필립스 자동 플롯 파일 수집기Phillips Automatic Plot File Collector 같은 도구를 만들어 팔았다. 테넨이 말하는 남의 생각을 가져오는 것, 즉 콜라주가 글쓰기 방식modus operandi이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원칙을 활용하는 LLM 때문에 불안해 하는 것일까?




테넨의 책(로봇을 위한 문학 이론)에서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인간을 위한 소리 없는 탄원을 쏟아냈다. 소설을 예술적으로 만드는 기술은 세부 사항과 줄거리를 조합하는 데 있지 않다. 작가가 자신의 의식, 즉 자신이 깊게 생각한 것과 삶의 총체, 생각의 소음 등을 걸러내 완전히 다르면서도 더 심오한 무언가를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에 있는 것이다. 이것만이 어떤 글이 독자에게 의미를 갖게 할 수 있다. 어쩌면 미래의 AI는 다른 창의성 기준을 충족시킬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기계가 소네트를 쓸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소네트를 썼다는 것을 인식하면 두뇌와 동등해지는 것이다'라는 신경외과 의사 제프리 제퍼슨Geoffrey Jefferson의 격언에서 말하는, 스스로를 창작자로 인식하는 것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기계의 사고는 인간만큼이나 흐릿하고 불가해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미 우리는 AI가 만들어내는 일부 가상 결과물이 얼마나 정확한지 설명하기 힘든 상태에 놓여 있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을 상대방으로 두고 기계는 결코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같은 경험을 못할 것이라고 항변했다. 기계는 자살로 친구를 잃거나 발목이 삔 고통을 느끼거나, 카프카스 산맥을 처음 보고 기뻐하거나, 직장에서 좌절하거나, 네덜란드 예술에 호기심을 가질 수 없다. (이는 모두 2023년에 내가 경험한 것들이다.) 기계가 제공하는 모든 텍스트는 본질적으로 공허할 것이다. 중력 없는 행성처럼 우리를 붙잡아 두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주장했다.


하지만 배런의 책(누가 이 글을 썼을까?)을 읽고 얼마 후, 나는 내가 방어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과 언어는 인간의 것이고 불변하는 정신의 일부라고 생각해서, 글쓰기는 다른 것들과 다른 운명을 맞을 것이라 주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배런은 꼼꼼한 분석가의 건조한 눈으로 글쓰기를 탈신화화했다. 그는 창의성을 분류했다. 추수감사절용 복숭아 과자의 레시피를 약간 수정해서 개인적인 만족감을 얻는 '미니 C(창의성)', 그 레시피로 박람회에서 상을 받는 '리틀 C', 해리포터 시리즈같은 전문적인 창작물을 써내는 고품질의 '프로 C', 세익스피어와 스티브 잡스의 '빅 C' 등이다.


/사진제공=Google Deep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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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런은 이 구분을 제시한 이유중 일부는 인간의 창의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는 AI가 '빅 C'를 위태롭게 할지에 특히 관심이 있다. 그는 문학적 글쓰기에서 나온 뛰어난 예술 작품들은 인류가 행한 모든 글쓰기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를 제외한 대부분 글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매일 쓰는 글"이다. 식료품 목록, 조류 관찰 일지, 이메일, 소셜 미디어 상태 업데이트, 사무실 메모 등이 그렇다. 또 다른 하위 집합(배런은 자신의 분류를 마음에 들어했다)으로는 직업적 글쓰기 또는 돈을 벌기 위한 글쓰기도 있다. 여기에는 광고 문구와 화학물질 설명서, 백서, 수익 보고서, 비즈니스 사례 연구 등이 포함된다. 이들도 깊은 의미나 빅 C 수준의 창의성, 개인적인 연관을 찾기 어려운 글들이다. AI는 이러한 글쓰기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독자는 이런 글의 출처를 알게 되더라도 심각한 상실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테넨은 요즘도 이런 유형의 글은 과거의 글을 상당 부분 재가공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다른 사람의 글에 의존하는 AI를 원망하는 것은 소설가가 맞춤법 검사기를 써서 "누가Who"와 "누구를Whom"을 잘못 쓴 부분이 없는지 확인한다고 비난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일이다.


테넨과 배런은 모두 신중하게 AI를 지지한다. "덜 중요한" 형태의 글쓰기에서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는 AI의 잠재력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보다 문학적인 글쓰기, 즉 빅 C 글쓰기는 기계가 쉽게 침범하지 못할 것이라 전망한다. "제게는 아무리 효과적이거나 강력하더라도 인공물을 위해 인공물이 아닌 것처럼 가장한 인공물이 그렇게 지적으로 보이거나 흥미롭지 않습니다." 테넨의 말이다. 그는 AI가 진정한 인간의 글쓰기를 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더 폭넓게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AI가 판단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게 단어뿐이라면 그건 불가능합니다." 기계는 (아직은) 영화를 보고 리뷰를 작성할 수 없으며, 기사를 쓰기 위해 정치인들을 인터뷰(이 역시 아직은 사람이 직접 취재해야 한다)할 수도 없다. AI가 이런 분야 기사를 쓸 때는, 이미 작성된 리뷰 및 인터뷰를 바탕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테넨은 이 같은 독창성의 결여 때문에 진정한 창의성은 AI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았다. 혹자는 텍스트에서 의미를 창조해내는 것은 언제나 독자라는 주장, 즉 책은 독자의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전까지는 그저 단어의 나열에 불과하며 읽는 행위가 책을 존재로 소환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런 주장은 반세기 전의 독자 반응 이론reader-response theory과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에세이 '저자의 죽음The Death of the Author'에만 나오는 게 아니다. 천 년 전 인도의 철학자 바타 나야카Bhatta Nayaka는 '마음의 거울Mirror of the Heart'이라는 문학 논문에서 '라사rasa'(미적 취향의 산스크리트어 개념)는 연극 속 등장인물이 아니라, 독자 또는 관객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산스크리트어 학자 쉘든 폴락Sheldon Pollock은 '라사의 독자A Rasa Reader'에서 이렇게 썼다. "따라서 라사는 전적으로 반응의 문제가 됐다. 남아있는 유일한 질문은 '그 반응이 정확히 무엇으로 구성되는가'뿐이었다."


AI와 우리의 관계를 논할 때 바타 나야카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할 수 있다. 블라인드 취향 테스트에서 어떤 독자들이 챗GPT가 쓴 시나 단편 소설에 감동을 받았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그들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의 반응을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게 될까? 이는 언젠가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며, 컴퓨터는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을 지각할 필요도 없다. 앨런 튜링Alan Turing은 알고 있었다. 1950년 논문에서 그는 "기계도 생각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후엔 질문의 방향을 기계가 모방 게임을 할 수 있는지, 즉 단순히 기계가 생각하고 있다고 인간을 속일 수 있는지로 빠르게 전환했다. 어떤 실용적 차원이든, 그 결과는 동일하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과 속이는 것의 차이는 우리가 믿고 싶은 것만큼 크지 않다.




독자의 측면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작가 측면에서는 어떨까? 20세기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자동화로 일자리를 잃었다. 한때는 사람의 손으로 소시지를 만들고, 리벳으로 자동차를 이어붙이고, 전화 교환기로 통화를 연결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글쓰기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 주장하고 싶은 유혹이 고개를 든다. "정신과 언어는 우리에게 특별하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과 언어가 노동과 다른 역사를 쓸 것이라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테넨의 주장이다. 하지만 "지성은 인공물이 필요하고, 따라서 노동이 있어야 합니다." 상업적 영역에서 보면, 많은 글쓰기들이 소시지 제조와 별로 다르지 않다. 이미 기계가 그 자리를 잠식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부동산 업자들은 챗GPT로 주택 목록을 만든다. AP통신은 AI 모델로 기업 실적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 렉시스넥시스LexisNexis의 AI 도구 콘텍스트Context는 판결문을 읽은 다음 변호사에게 "판사가 가장 자주 인용하는 언어와 의견을 그대로 사용해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을 제공한다. 오늘날 판결문 중에는 AI가 작성한 것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법조계는 이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인간과 기계가 논쟁하는 단계에 도달한 듯하다.


속물적으로 이런 류의 글쓰기가 원래 보상도 별로 없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얻는 보상에 감사할 줄 아는 이들이 이미 이런 일을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일자리의 약 13%는 글쓰기가 많이 필요하고, 사람들은 이 일을 통해 연간 6750억 달러가 넘는 수입을 올린다. 이런 일자리 중 상당수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면, 자동화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해방'이라는 흔한 어휘를 사용한다. "학식의 속박에서 해방된 오늘날의 문인과 학자들은 더 창의적인 작업에 도전할 수 있다." 테넨의 글이다. 만약 그가 이 문장을 말로 했다면 희망에 찬 미소로 끝을 맺었을까? 왜냐하면 현대 경제에는 AI로 인해 '해방'되기 직전의 수천 명은 말할 것도 없고, 이미 그 안에 살고 있는 창의적인 작가들을 지원하려는 의지가 거의 안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가와 시인 역시 AI로 인한 자유를 얻는다고 알려져 있다. 배런의 시나리오 중 하나에서, AI는 신이 내린 불꽃을 제공한다. "자동차 배터리를 점프한다고 생각해보세요." 하지만 자동차는 매번 같은 방식으로 시동을 걸고 목적지에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작가에겐 출발점과 여정이 중요하다. 배런이 말한 제니퍼 렙Jennifer Lepp의 우화에서, 작가(렙)는 자신의 글쓰기를 냉정하게 평가한다. 랩은 집에서 홀로 글을 써 9주마다 초자연적 미스터리 신작을 발표하는 작가로, 수도라이트Sudowrite라는 AI 모델을 조수로 활용한다. AI조수는 처음에는 간단한 묘사를 도왔지만, 점점 더 많은 작업을 맡았다. "(그러자) 렙은 더 이상 캐릭터와 플롯에 몰입하지 못하게 됐다. 더 이상 그것에 몰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게 되었다." 배런은 이렇게 썼다. 그리고 렙은 더 버지The Verge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더 이상 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어요. 제가 쓴 글을 돌아보면서, 그 글이 단어나 생각과 제대로 맞닿아 있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어 매우 불편했습니다."


이게 바로 소름 끼치는 핵심이다. AI는 우리가 독서에서 얻는 혜택이 아니라, 글쓰기에서 얻는 혜택을 위협한다. 그 규모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모든 사람이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만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언어는 표현한다. 그리고 상당수는 그 표현을 글쓰기를 통해 하고 있다. 자필 글쓰기와 문자 메시지, 메모, 엽서 등 우리가 하는 가장 기본적인 글쓰기조차도 우리를 발전시킨다. 많은 연구 결과에 따르면, 단어의 정확한 철자를 배우면 읽기도 향상된다. 손으로 글을 쓰면 새로운 정보가 뇌에 각인되고 더 많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연구 결과(여러 연구들이 이를 말한다)도 있다. 그리고 분필로 바위에 쓰든, 한 뼘 길이의 연필로 쓰든, 노트북으로 쓰든 글쓰기를 지속하면 사색을 하게 된다. 배런의 책도 호레이스 월폴Horace Walpole의 "나는 그것을 글로 쓰기 전에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부터 조앤 디디온Joan Didion의 "나는 온전히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찾고 보고 그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글을 쓴다"에 이르기까지 이 하나의 정서를 다양하게 표현한 문장들을 전하는 데 한 페이지 반을 할애했다.


글쓰기는 다른 것의 문을 열어주기도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달하기 위해, 영혼의 소란과 다툼을 전달하기 위해서도 글을 쓴다.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더 잘 이해하고 우리를 통해 그들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글쓰기의 어려움, 즉 저주스럽고 신경이 끊어질 듯하며 손톱이 빠질 것 같은 불확실성이야말로 작가나 독자가 의미 있는 어떤 것을 발견하게 만들어주 주는 힘이다. 이 모든 것을 AI에 빼앗긴다면 우리는 말도 생각도 자아도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파쇄된 신경과 뽑힌 손톱의 산물을 언제든 환영할 것이다.



사만드 수브라마니안은 쿼츠Quartz의 선임 기자로 'JBS 홀데인의 급진적 과학과 불안한 정치A Dominant Character: The Radical Science and Restless Politics of J.B.S. Haldane'를 썼다.




1914년 창간된 미국의 진보 성향 매거진으로 본래 주간지였으나 현재는 월간지 형태로 발행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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