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차이의 가치: '번역'의 인식에 대하여

세계적인 문학상과 서평에서 번역서의 중요성이 점점 크게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제니퍼 린지는 번역가들은 칭송받는 반면 그들의 '번역의 기술' 자체는 대체로 여전히 높은 평가를 못 받고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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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Ksenia Chernaya

2025.06.13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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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국제 부커상을 수상했을 때 한국 문학계는 큰 자부심과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당시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의 번역에 대한 논란도 있었습니다. 한국 작가가 명망있는 국제 문학상을 받았다는 환호에 묻히긴 했지만 작가 본인이 나중에 시인했듯이 번역 이슈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한국어 작품의 번역을 출판하는데 이를 별도로 검토할 제3자가 없었다는 것도, 그런 검토 없이 상이 주어졌다는 점에서 '번역'을 대하는 문학계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볼 만한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인도네시아 문학 번역으로 유명한 제니퍼 린지는 지난 3월 '시드니 리뷰 오브 북스'에 기고한 글에서, 세계적인 문학상들이 번역가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정작 '번역'이라는 예술 행위 자체가 어떻게 평가 절하되거나 심지어 지워지고 있는지 날카롭게 파고듭니다. 필자는 특히 부커상을 중심으로, 번역 작품을 평가할 때 원문의 고유한 특성보다는 영어로 얼마나 '유려하게' 읽히는지만을 칭찬하는 세태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는 마치 번역가가 원작의 독특한 목소리를 지우고 영어라는 틀에 매끄럽게 끼워 맞추는 역할에 그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한 언어가 기존의 언어적 습관을 깨고 더욱 풍부한 문법과 표현을 얻게 되는데는 번역이 큰 역할을 합니다. 한국어도 중국어, 일본어, 영어를 한국어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새로운 문법과 표현을 얻으면서 지금의 한국어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문법적으로나 표현적으로 다채로운 현대의 영어도 고대 스칸디나비아어, 켈트어, 라틴어, 프랑스어, 그리고 제국통치의 경험에 따라 수많은 지역의 언어들로부터 새롭고 다른 것들을 흡수했습니다. 이렇듯 번역은 단지 유려한 한국어, 유려한 영어로 아무런 이질감 없이 옮기는 것만이 목적 또는 기능이 아닙니다. 어쩌면 원어가 가지고 있었던 그 이질감을 적절히 살려냄으로써 한국어와 영어를 더욱 풍부하게 확장시키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차이 또는 이질감을 어느 정도 살려내느냐, 그 밸런스가 번역의 묘미일지도 모릅니다.


이 글은 단순히 문학상에 대한 비평을 넘어, 문화와 언어의 경계를 넘나드는 문예가 어떻게 이해되고 소통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문학이 세계 독자들과 진정으로 만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하는 독자라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이야기입니다. 번역이라는 섬세하고 창조적인 노력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한층 더 깊이 있는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귀중한 통찰을 얻게 될 것입니다.


번역가는 대개 언어—모국어와 외국어—와 외국에 대한 열정이 넘친다. 자기 인생에서 1, 2년 이상을 써가며 번역 프로젝트에 몰두하는 게 세상의 주목을 받거나 큰 돈을 벌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물론 자기 자신을 인정받는 게 아니더라도 자신의 번역 기술이 인정받으면 만족할 것이다. 그들은 번역상과 서평을 통해 바로 이런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인데, 누군가는 이 점을 포착했다.


2015년, 부커상 재단이 2년마다 저자 1인의 작품 전체에 시상하는 만부커1 인터내셔널 부문을 2016년부터 국제 부커상 소설 번역상으로 개편한다고 발표했다. 번역가들은 이를 자신의 기술이 점점 인정받고 있다는 증표로 받아들였다. 단행본 한 권에 5만 파운드라는 큰 상금은 번역가와 원작자에게 분배된다. 국제 부커상은 지금까지 아홉 권의 책이 수상했으며 그 원작들은 각각 한국어, 히브리어, 폴란드어, 아랍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힌디어, 불가리아어, 독일어로 쓰였다. 해당 번역가들은 찬사를 받았고, 그 수상에 힘입어 눈에 띄지 않던 다른 번역가들도 부각되었다. 번역가들은 점차 유명해지고, 책 표지에 이름이 실리고, 출판사들이 찾아오고, 더 나은 계약 조건을 받는다. 국제 부커상은 전세계의 다른 번역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현실은 실제로 얼마나 발전했을까? 국제 부커상이 문학 번역가의 지위 상승을 예고했어도, 번역 자체에 대한 인정과 이해 또한 이에 걸맞게 심화되었을까? 번역가의 존재감이 더 커지는 사이 번역 자체의 존재감도 함께 커졌을까?




번역상에서 보상을 받고, 시상 대상이 되고, 백안시되는 요소들은 무엇일까? 국제 부커상을 계속 살펴보자. 국제 부커상은 영어로 번역된 도서만을 대상으로 한다. (비교를 위해, 비영어 번역물에 대한 번역상들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 출품작은 영국이나 아일랜드에 출판된 (또는 공동 출판된) 책이어야 하고, 작품은 출판사가 제출한다. 또한 접수 종료일 기준 1년 이내(전년도 5월 ~ 당해년 4월)에 출판된 번역서여야 한다. 상은 매년 수여된다.



2021년 공식 보도자료에 따르면 국제 부커상의 목적은 "전 세계 수준 높은 소설을 더 많이 읽도록 장려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러나 기준을 면밀히 뜯어보면 이 고귀한 목적에는 상당한 조건이 붙는다. 첫째, 국제 부커상의 목적은 영국 출판사의 더 많은 번역서 출간을 장려하는 것이다. 출판사는 번역 활성화라는 이타적인 동기에 더해 수상작이나 최종 후보작이 되면 판매고가 크게 상승한다는 상업적 동기로 작품을 출품한다. 이것도 좋다. 둘째, 원작이 영어로 쓰인 작품에 수여되는 부커상과 마찬가지로 국제 부커상도 최근 출간된 책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국제 부커상은 출품 시점에 작가와 번역가 모두 생존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원어판도 최근에 출간된 작품을 선호한다. 다시 말해 영어권 출판사는 '새로운 책'을 찾고 있다. 셋째, 명시된 규정을 찾을 수는 없는데 국제 부커상은 개역re-translation을 촉진할 의도가 없어 보인다. 분명 이 조건에서 세계의 여러 '수준 높은 소설들'이 고배를 마신다.


내가 2024년에 접속한 당시 부커상 웹사이트는 부커상과 국제 부커상이 동급이라고 강조했다.


"부커 재단은 부커상과 국제 부커상을 대등한 관계로 상정하고 전 세계의 소설을 시상합니다. 원어가 영어이든(부커상), 영어로 번역된 작품이든(국제 부커상) 영어권 독자를 위한 상을 통해 세계 최고의 소설이 주목받게 됩니다. "


국제 부커상 수상자를 발표하는 보도자료 역시 '이 대등한 관계'를 강조하는데, 이때 원작이 아닌 번역된 작품의 고유성은 감춰진다. 번역 작업 자체가 지워진다고 할 수도 있겠다. 번역가가 공동 수상자로 격상했는데도 번역 그 자체는 원작에 비해 부수적인 것에 가까워 보인다. 나는 번역에 대한 구체적인 논평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에 크게 당황했다. 강조되는 것은 '책' 자체다 — 새롭거나, 도발적이거나, 혁신적이거나, 독창적이거나, 서정적이거나, 충격적이거나 아름다운 책! 마치 그 책이 영어로 쓰인 소설과 동급으로 인정받게 만들려다가 번역을 경시하는 듯하다.


내가 과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우선 국제 부커상을 칭찬하고 싶다는 점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겠다. 국제 부커상은 실제로 다른 언어로 쓰인 흥미로운 문학 작품을 나와 같은 영어권 독자에게 소개하고 있는데, 나는 번역의 기술과 노고, 번역의 기교에 대해 더 읽고 싶다. 바로 그 아름답고, 도발적이고, 혁신적이고, 독특한 책이 원래의 언어 안에서, 그리고 원래의 언어에 의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알고 싶다. 또한 그 책이 어떻게 영어 산문으로 옮겨지는지도 자세히 알고 싶다. 나는 번역 자체에 대해 즉 언어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에 대해, 그리고 이 차이가 특정 책 안에서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는지에 대해 좀 더 많은 관심이 있기를 바란다.


1차 후보작 작가와 번역가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국제 부커상 Q&A(부커상 홈페이지에 게시)에서는 작가가 번역가에 대해, 번역가가 번역 작업에 대해 밝힌 유익한 논평을 확인할 수 있다. 2024년 스페인 소설 '강이 아니다No es un río'의 영어 번역('Not a River')으로 최종 후보에 오른 애니 맥더모트는 말한다. "저는 항상 글쓰는 게 좋았고, 이 일(번역)은 '순수한 글쓰기'였어요. 작가는 인물과 플롯에 신경 쓰지만 번역 작업은 나보코프의 말처럼 전적으로 표현 그 자체만 다루는 겁니다." 소설의 저자 셀바 알마다는 자기 견해를 밝힌다. "저는 맥더모트 씨와 작업하면 편안하고 자신감이 생깁니다. 제가 서사를 구축할 때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글쓰기의 음악성, 서정성, 구어적 측면을 포착해내려는 그의 노력이 보이거든요." 또 다른 2024년 최종 후보작 이아 옌베리의 스웨덴어 소설 '디테일Detaljerna'을 영어로 번역('The Details')한 키라 요세프손은 말한다. "번역의 재미 중 하나는 옮겨갈 언어(영어)의 기존 습관들을 밀쳐 확장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려면 번역은 우아하고, 적어도 흥미로워야 해요. 의미가 전해져야 하니까요." 짧게 밝힌 견해임에도 이들의 말이 통찰을 주는 이유는 원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과 함께 번역가가 무엇에 집중하는지를 언급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의견은 단순히 영어 산문에 대한 것이 아니다.



번역상이 주어지면 사람들은 심사위원이 이 과정에만 집중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번역된 문학 작품을 평가하겠는가? 그리고 심사위원단이 평가하는 번역 작품이 특정 외국어 (심사위원단 전체 또는 대부분이 아는 언어) 작품인지, 아니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처럼 다양한 언어(심사위원단 다수 또는 전체가 모르는 언어)로 쓰였는지에 따라 심사위원의 평가 방식 — 그리고 그 수준 — 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고 생각할 것이다.


후자의 상황에서 생기는 문제는 2016년 한국 작가 한강과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가 '채식주의자'로 개편된 첫 국제 부커상을 수상한 뒤 작가 겸 번역가인 팀 파크스Tim Parks가 뉴욕리뷰오브북스(NYRB)에 기고한 에세이 '날것과 조리한 것Raw and Cooked'에서 주목한 바 있다. 파크스는 "심사위원 중 한국어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어 보인다"고 지적하면서 평가 기준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무엇이 '글로벌한 소설'인가에 대한 평론가들의 공통된 비전이 있고, '채식주의자'는 그 비전에 비추어 찬사를 받을만한 후보작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심사위원이 원어를 모를 경우 번역서의 평가 방식과 "작가와 번역가의 성취를 나누어" 평가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그의 질문은 지금까지도 타당하다. 번역 자체에 대한 끝없는 철학적 논의와 연관지어 파크스의 질문에 접근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의 질문이 제기하는 실질적 문제에 더 주목한다. 국제 부커상처럼 권위있는 상에서 심사위원 중 누구라도 원서를 나란히 놓고 번역서를 읽어야 할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외부 전문가의 조언을 구해야 할까? 적어도 1차 후보작에 오른 작품에 대해서라도 그러한 심사가 똑같이 이루어지는가? 심사위원들이 진정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채식주의자'가 2016년 국제 부커상을 받았을 때 영국의 예술 평론가 빈센트 다우드는 이렇게 논평했다.


"데보라 스미스는 한국어를 독학했고 번역가가 한국어를 수준 높은 영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음을 영리하게 감지했다. 그 눈부신 성과가 '채식주의자'였다. 그 문체는 담담하고 자연스럽지만 강렬하다. 영어에 뿌리를 두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문단이나 표현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강조 추가]


이 마지막 문장은 자주 극찬받지만 번역의 질에 대해서는 문제시될 수 있는 평가이다. 어떤 글이 원래부터 영어로 쓰인 것처럼 읽힌다는 말은 영어에 대한 평가이지, 번역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솔직히 말해 영어 산문은 상당 부분 편집자들의 연금술에 빚지고 있다). 이런 유려함은 번역가가 가진다면 멋진 목표지만, 이 유려함을 어느 정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실현할지는 선택의 문제이다. 다우드의 논평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유려함에 더해) 더 알아야 할 것들이다. 즉 문체, 어조, 2voice, 사용역3register을 어떻게 옮길 것인가라는 문제다. 원어, 그리고 영어로 옮기는 것, 이 두개는 서로 다른 층위다. 번역가가 "수준 높은 영어로" 옮기는 일을 한다는 식으로 말하면, 작가의 원작 원어가 그다지 수준이 높지 않았던 것이 되고, 또한 영어로 얼마나 이질감없이 옮겨질 수 있을지가 유일한 품질의 척도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의 의견은 번역 자체보다는 번역에 대한 평론에 대한 것이다. 즉, 평가의 언어가 어떻게 끊임없이 우리의 시야에서, 어쩌면 평가가 가장 기대되는 토론의 장에서조차 사라지는지를 지적하려는 것이다. 문학상 수상에서 평론에 이르기까지, 번역가가 원문 텍스트를 바탕으로 어떻게 번역 텍스트를 만들어내는지를 살피는 절차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국제 부커상과 단일 언어에서 번역한 문학 작품에 수여되는 상의 비교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계에는 정부, 민간 단체, 대학이 후원하는 다양한 번역상이 있다. 영국작가협회Society of Authors는 아랍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2개 상),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스웨덴어, 일본어로부터 번역된 문학 작품에 상을 수여한다. 상마다 기준은 서로 다르지만 공통된 기준이 하나 있다. 1개를 제외한 모든 상이 원문과 번역 텍스트를 모두 제출하기를 요구한다. 이 요건은 원어와 번역서를 함께 읽을 실력을 갖춘 심사위원의 번역 평가가 모든 상의 심사에 포함된다는 이해를 전제로 한다. 한 예로 현대 아랍 문학 작품의 번역가에게 수여하는 사이프 고바쉬 바니팔 상Saif Ghobash Banipal Prize의 경우 4인 심사위원단 중 두 명은 영어 번역서만 읽고, 두 명은 아랍어 원서와 영어 번역서를 모두 읽는다.


단일 언어 번역상에서 원어 텍스트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면 심사위원단이 번역된 텍스트와 원어 작품 모두가 가지는 고유성에 지적인 통찰을 담아 평가할 수 있다. 한 예로 2023년 스콧 몽크리프상 수상작으로 가우즈GauZ'의 프랑스어 소설 'Debout-payé'의 번역서 '스탠딩 헤비Standing Heavy'를 선정한 근거를 살펴보자.


"'스탠딩 헤비'는 프랭크 윈의 훌륭한 번역으로 유머와 에너지, 실감나는 거리의 모습까지, 그 무엇도 퇴색하지 않았다. 두 언어로 쓰인 책 모두가 진정한 역작이며, 영어로 읽어도 프랑스어만큼 즐겁고 예리한 문체로 읽힌다."


리케 홀름의 스웨덴어 원작 '스트레가Strega'의 번역서를 버나드쇼상 수상작으로 선정한 근거도 들어보자.


"이 놀라운 소설을 옮긴 사스키아 보겔의 번역은 거장의 기교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영어라는 언어의 탄성을 잃지 않고 유연하고 흥미진진하게 굴절하면서 텍스트가 묘한 아름다움 속에 온전히 살아 있다."


여전히 간략한 수준이지만, 심사위원단의 이 수상 선정 근거는 영어로 쓴 것처럼 읽히는 번역서에 대한 진부한 평론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른 언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문학 작품에 수여하는 해외 번역상 중 명성과 상금, 미디어의 관심도 측면에서는 국제 부커상이 논쟁의 여지없는 최고의 상이지만, 실제 번역상의 분야는 꽤 다양한 편이다. 전반적으로 문학 번역상은 '최신 도서'에 집중하는 상(예: 국제 부커상)과 그렇지 않은(또는 최근 도서에만 중점을 두지 않는) 상으로 분류할 수 있다. 미국의 '내셔널 북 어워드' 번역 부문과 PEN 번역상 모두 미국 출판사의 최근 출판물을 대상으로 한다. (전자의 상금은 원작자와 번역가가 상금을 나누고, 후자는 번역가에게만 상금을 수여한다.) 저자와 번역가에게 상금이 수여되는 국제 더블린 문학상은 영어로 쓰이거나 번역된 최근 소설을 대상으로 하며, 전 세계 공공도서관에서 출품작을 추천받는다는 점이 독특하다. 미국문학번역가협회가 매년 시상하는 전미번역상National Translation Award도 '최근 작품'을 대상으로 하지만 국제 번역상들 중에서는 후보작의 폭이 넓다는 점이 특이하다. 전미번역상은 전 세계 출판사가 출품하고, 모든 국적의 번역가가 모든 언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책에 시상한다. 이전에 번역되지 않은 현대 작품의 번역과 예전 작품의 초역, 경우에 따라서는 중요한 개역판도 모두 수상 자격이 있다. 전미번역상은 단일 번역상을 넘어 출판물에 수여하는 국제 번역상 중 유일하게 원어 텍스트의 평가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전엔 영어로 쓰인 작품만을 대상으로 했던 일부 문학상도 정책 변경이나 번역 작품 평가에 특정된 기준을 공지하지도 않은채 현재는 번역된 작품도 대상에 포함하고 있다. '책들'은 어떤 언어로 쓰였던 출신을 묻지 않고 하나의 책으로서 똑같은 것처럼 서로 비교되고 평가받는다. 한 예로, 호주에서 매년 시상하며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마일즈 프랭클린 문학상은 공식적으론 "최고의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모든 측면에서 호주인의 삶을 묘사한 소설"에 시상한다. 하지만 2024년에 사냐 루시디의 벵골어 소설 '병원হাসপাতাল'의 영어 번역본('Hospital')이 최초로 최종 후보작에 올랐다. 그러나 번역가 아루나바 신하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고 언론 보도에도 번역에 대한 내용이 실리지 않았다.


번역가의 전체 '번역 이력' 평가에서 부커상 식의 '최근작' 모델로 평가 범위를 좁힌 번역상도 있다. 2년마다 호주 번역가에게 수여하는 '뉴사우스웨일스(NSW) 주 총리 번역상'이 그 예시다. 이 번역상은 2020년 전까지만 해도 2005년 NSW 주 정부 예술부 지침에 따라 '특정 번역 작품 대신 뛰어난 번역가의 업적을 인정한다'고 주장했다. 번역가는 호주 시민권자이거나 영주권자여야 했지만, 저자와 출판사의 국적에는 제한이 없었다. 최근 출간작과 더불어 번역 이력을 소개하기 위해 선정된 예전 출간작, 서평 사본, '문학 추천인'의 추천서를 증빙 서류로 함께 제출해야 했다. 그러나 원어 텍스트 판본 제출은 필수 요건이 아니었고, 번역 평가 방식에 대한 투명성도 보장되지 않았다.


하지만, 2020년에 대상과 기준, 출품 절차, 상금이 변경되었다. 여전히 2년에 한 번 시상하지만 이제는 직전 2년 내에 출간된 단행본을 대상으로 한다. 작품은 온라인 포털을 통해 제출하고, 책은 출판사가 직접 제공한다. 출발어 텍스트나 발췌한 샘플은 여전히 요구하지 않는다. 번역가에 대한 시민권 요건, 출판사와 저자의 소재지를 제한하지 않는 규정도 그대로 유지된다. 그런데 상금이 1만 5천 달러에서 3만 달러로 2배가 되었다. 번역가와 원작자의 공동 분배 요건도 없어서 이 상은 현재 전 세계 번역가들에게 가장 후한 번역상 중 하나가 되었다. 왜 규정을 바꾼 것일까? 이 질문은 내가 2021년 번역상 운영 방식에 대한 해명을 요청하면서 주최측에 물었던 것이다. 주최측은 이전 '번역 이력' 기준을 적용하면서 지원자 풀이 크게 줄어들었고(이전 수상자는 제외되었다), 그 결과 번역상이 전면 폐지될 위험에 처했다고 설명했다. 국제 부커상의 사례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고, 번역서의 원 저자가 살아 있어야 한다고 명시하지 않지만, 나는 국제 부커상의 기준이 번역상 개편에 영향을 미쳤다고 짐작한다.


2021년 개편된 방식을 적용한 NSW 주 총리 번역상 최종 후보작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번역이 더 많이 주목받게 할 기회였음에도 번역 자체에 대한 통찰력 있는 논평은 커녕 번역서의 원어가 무엇인지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었다. 심사위원이 번역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외부 전문가의 의견을 요청했는지 여부 또한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았다. '책'에만 주목했지 공개된 기준 어디에도 이 상의 수상기준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문제는 NSW 주 총리 번역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번역상에서조차 번역 평가를 명백하게 거론하지 않는 경우가 왜 이렇게 잦은 것일까? 어쩌면 번역 검토가 지나치게 학문적이고, 현학적이며 창작의 자유를 방해하는 탁상공론이라는 커다란 선입견이 있어서일 것이다. 2016년 국제 부커상 수상 후 논쟁에 대해 데보라 스미스가 보인 방어적인 대응도 해묵은 선입견의 존재를 시사한다. "한국인인 한강 작가와 영국인인(그녀는 영어로 번역된 한국어 책이 거의 없어서 한국어를 배웠다) 스미스 모두 번역을 문자 그대로 옮기는 대신 상상력을 발휘하는 작업으로 여겼다." [강조 추가] 물론 문자 그래도 옮길 것인가 상상력을 발휘할 것인가라는 대립구도는 무의미하다. 번역문과 원문 양쪽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번역가의 상상에 따른 '선택'이 드러난다. 태, 사용역, 리듬, 표현, 어조에서 그 선택이 드러나는 것이다. 문학 번역이라는 예술은 악보나 대본을 구체적인 음악 공연이나 연극으로 공연하는 것과 같다.




번역에 대한 무관심은 번역된 문학 작품에 수여하는 상에 국한되지 않으며 번역서 평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2023년에 업무의 일환으로 뉴욕리뷰오브북스(NYRB), 런던리뷰오브북스(LRB), 오스트레일리언북리뷰(ABR)에서 소설과 시 번역 평론을 조사한 적이 있다. 문학 번역의 평론이 얼마나 작성되는지, 작성 방식은 어떤지 확인하고 싶었다. 평론가는 어떤 점에 주목했을까?


평론의 빈도를 기준으로 하면 NYRB가 월등히 앞서는 1등이다. NYRB는 20호에 걸쳐 32건의 번역된 소설과 시의 평론을 실었다(번역된 논픽션 평론이 8편 더 있었다). 번역 문학 평론이 한 편도 없는 간행물을 찾기가 힘들었다. 24호에 걸쳐 26편의 시, 소설 서평(논픽션 평론도 7편)을 게재한 LRB도 이에 뒤지지 않았다. 22호에 걸친 간행물에 게재된 소설과 시 문학 번역 평론이 9편에 불과했던 ABR은 한참 아래였다(논픽션 평론은 7편이었다). NYRB는 평론 제목에 출발어를 넣었다는 점도 눈에 띈다. 다른 저널이 출발어를 넣지 않았다는 사실은 종종 문제가 된다. 호기심 많은 독자라면 서평에서 다룬 책이 쓰인 원어를 찾을 단서를 기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평론은 전반적으로 세 범주로 분류된다. 바로 단행본에 주목하는 평론, 원작자 1인의 작품에 주목하면서 같은 번역가나 번역가 여러 명이 번역한 책 두 권 이상을 다루는 평론, 잘 알려진 (보통 오래된) 책의 최근 개역판 평론이다.


NYRB에 게재된 평론 32편 중 19편이 번역을 논하고, 그 중 다수가 번역을 자세히 다룬다. LRB의 평론 26편 중 13편, ABR의 평론 9편 중 단 3편만이 번역을 다루는 것과 대비되는 수치다. 다른 평론들은 번역을 전혀 언급하지 않거나 근거가 부족한 논평을 하는 수준이다('~가 솜씨 있게 번역한', '~가 유려하게 번역한', '우아한', '꼼꼼한', '실력 있는', '능란한', '흠잡을 데 없는', '유동적인', '결함이 있는', '가독성 있는' 번역 등). 여기서 '근거가 부족하다'는 말은 그저 영어가 어떻고 영어가 어떻게 읽히는지 스쳐 지나가듯 평할 뿐, 서평가가 스스로 판단에 이르게 된 근거를 설명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산문이나 운문이 우아하게 읽힌다면 '우아한 번역'이다. 그러나 번역과 영어가 어떻게 읽히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누군가는 번역에 대한 생각을 밝히면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번역가가 모호한 표현을 우아하게 해결한 사례이다'. (나는 영어로 번역을 논할 때 생기는 문제의 원인이 어느 정도 '번역translation'이라는 단어 자체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단어가 과정과 결과물 모두를 애매하게 지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번역하는 인도네시아어는 번역 행위인 penerjemahan과 최종 결과인 terjemahan을 구별한다. 다른 외국어에서도 이런 구분이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제일 매력적인 서평을 읽다 보면 서평 대상인 특정 번역서가 마주한 난제와 원어와의 친밀도에 대한 서평가의 생각을 따라갈 수 있다. 이들은 번역가의 선택을 논평하고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독자인 우리는 무언가를 배운다. 국제 부커상 수상작 기탄잘리 슈리의 '모래 무덤रेट समाधि'(영어 제목: Tomb of Sand)에 대해 소설가 안줌 하산Anjum Hasan이 NYRB에 쓴 서평을 예로 들어보자. 이 소설은 힌디어로 쓰였고 데이지 록웰이 영어로 번역했다. 하산은 록웰의 번역본이 "슈리의 생동감 넘치고, 구어적이고, 때로는 제멋대로 뻗어 나가는 문체를 재창조"했다고 호평하며 예시를 보여준다. 그는 소설의 언어 유희와 번역가가 이를 다루는 방식을 짚어내고, 또 다시 예시를 보여준다. 하산은 전반적인 번역과 "한 권의 책과 번역서가 별개의 작품에서 필연적으로 다른 대상에 말을 걸게 되는" 방식을 다룬 후 이러한 작동 방식의 예를 '모래 무덤' 원서와 영어 번역서에서 찾아 보여준다. 하산의 서평은 독자에게 원서에 대해 알려주고 번역서를 읽고 싶어지게 만든다.


작가 겸 평론가 아나히드 네르세시안Anahid Nersessian은 그의 통찰력 넘치는 서평에서 일반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사이를 오간다. NYRB에 게재한 네르세시안의 에세이 '번역 공화국The Republic of Translation'은 저자 두 명이 서로 다른 두 언어(이탈리아어·사르데냐어와 프랑스어)로 쓴 시집을 영어로 옮긴 번역서 두 권을 다룬다. 그는 원문의 디테일(숙어, 리듬, 소리, 단어의 어감)에 대한 면밀한 논의에서 시선을 거두고 린지 터너가 스테판 부케의 프랑스어를 "원작도 변형작도 아니면서 감성을 매력적으로 종합한 완전히 새로운 객체"로 번역했다고 호평한다. 극찬이지만, 네르세시안의 서평은 이 견해에 도달한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비판도 놀라울 만큼 직설적으로 한다. 메레 오펜하임의 번역서 두 권—한 권은 리사 벵거, 다른 한 권은 캐슬린 헤일이 번역했다—을 다룬 서평을 LRB에 게재할 때도 그는 디테일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번역가가 주장하는 창작의 자유에 속아넘어가지 않는다. 헤일의 말처럼 "번역하는 언어로부터 자유를 쟁취하는" 번역이 있고, 있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는 번역이 있다.


스스로가 유명 번역가이기도 한 팀 파크스나 마이클 호프먼 같은 베테랑 서평가들은 언제나 소설 번역 서평에 흥미로운 논의거리를 제시한다. 이들의 서평은 (원어) 도서와 원작자, 맥락을 전반적으로 논의할 뿐 아니라 문체와 — 어조, 태, 숙어, 리듬 등 — 과 여러 특이한 지점 — 방언, 비속어, 구어적 표현, 유머의 사용 — 을 분석하고 번역가가 이 문체의 특성을 표현하는 어려움을 돌파해 나간 방식도 논평한다. 작품의 양면인 원작과 번역서 모두 고려 대상이 되고 예리하게 파고들기도 한다. 호프먼은 조너선 프랜즌과 제니 왓슨이 번역한 토마스 브루시히의 소설을 다룬 NYRB 서평에서 원서를 신랄하게 비판한 뒤 지극히 중요한 (그러나 묻는 이가 거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왜 이 책을 번역했는가?' 그는 동독 은어를 캔자스 영어로 번역한 예를 들며 말장난을 논평한다. 호프먼은 이렇게 말한다. "가끔 언어가 우리에게 말한다. '아, 이건 건드리지 말아요.' 충분히 들을 가치가 있는 말이다."


평론계에서 번역의 창조적인 선택 — 실제로 번역의 기술(또는 예술)로서 창조적 선택 — 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한 가지 영역이 개역판 평론이다. 개역판에서는 텍스트를 다른 언어로 표현하는 무수한 가능성에 대한 인정과 찬미를 확인할 수 있다. 에밀리 윌슨의 '오뒷세이아' 번역이나 셰이머스 히니의 '베오울프' 번역처럼 개역판에서는 익숙한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읽고 듣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개역판 평론은 원문(원문의 가치는 영속성이라는 바로 그 사실로 확고해졌다)과 번역된 표현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 평론이 번역 전반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는 점도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이전 번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서평가로 하여금 번역된 텍스트의 '유동성'이나 '매끄러움' 외에도 새 번역이 독자에게 맥락과 해석을 생각하도록 만드는 방식 역시 탐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2024년 출판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제1권 '스완네 집 쪽으로Du côté de chez Swann'의 브라이언 넬슨 번역본을 1982년 첫 출판된 제임스 그리브 번역본과 함께 논의한 마이클 우드의 평론이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우드는 문학 작품 해석의 변화뿐 아니라 작품이 형성된 사회 전체에 대한 해석의 변화도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우드는 그리브 번역본이 재판reprint되는 것이 "번역계의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완벽한 초대장"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최고의 번역가들조차 옛날 클래식 피아니스트처럼 몇 가지 기본적인 실수를 저지른 순간이 있었다. 이들은 자신이 할 일이 작업하는 텍스트를 번역하기보다 고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실수가 적어졌고 작품 고치기는 보통 못마땅한 일이다. 우리는 더 이상 성급하게 최선의 번역을 판단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차이의 가치를 생각해볼 수 있다."


우드는 그리브의 대화 번역이 오늘날 기준에서 다소 투박하게 느껴지는 사례를 제시하면서도 그 번역에서 "차이의 가치"를 발견한다. 번역 평가에서 천편일률적으로 유려함에 특권이 부여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중요한 점을 우드는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그리브는 프루스트를 모방하기보다 이해하려고 한다. 번역에서 가끔 어색한 부분은 실제로 현재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브의 번역에서 […] 독자는 작가가 누구인지, 아니면 작가가 몇 명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이 질문은 번역이 더 매끄러운 판본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번역을 비교하다 보면 수렴되는 부분과 차이나는 부분이 드러난다. 사소한 변화가 인식을 바꿀 수 있다.




번역 문학 평론이나 번역상 선정 근거가 다수의 개역판 서평에서 발견되는 관심과 통찰의 수준에 도달하기를 희망한다면 지나친 기대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평론가와 심사위원들은 자신이 평가하는 대상이 번역임을 의식하기를 바랄 수는 있지 않을까. 그래도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번역 평가에서 우리가 더 바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각종 문학상의 심사위원과 주최자는 평가 절차를 함구하는 것으로 악명높지만, 우선 기준과 우선순위가 더 선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번역상이 '책'에 주목한다면, 제출 기준에 이 기준을 더 명확하게 설명하면 된다. 어떤 책에 주목하는가? 원어 작품으로 이미 주목과 찬사를 받은 책인가, 아니면 원어 작품으로 유명한 작가 또는 이전 작품이 영어로 번역된 적이 있는 작가의 신작인가, 아니면 반대로 유명하지 않은 책을 찾고 있는가, 아직 수상 이력이 없는 언어로 쓴 작품이 될 수도 있는가? 번역이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주목할 만한' 새 소설에 방점을 찍는다면 심사위원들은 이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주제 면에서 (젠더나 이민 등) 동시대 이슈를 다루는 책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현지의 맥락을 생생하게, 전 세계 독자와 소통하는 방식으로 제시하는 책인가? 새로운 역사적 통찰을 제시하는가? 색다른 사고 방식으로 우리를 계몽하는가? 옥스포드-바이덴펠트 번역상(현존하는 유럽 언어의 번역서에 시상)은 흔히 다른 곳에서는 말하지 않는 것을 상세히 설명한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원작을 '중요'한 작품으로 만드는 요소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더라도 "심사위원들은 원작의 중요성과 원작을 영어로 옮기는 가치에 더해 번역 품질도 고려할 것이다."


새로움이나 시의성을 향한 욕망이 주제에 대한 고려를 넘어 문체에 대한 고려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심사위원들은 번역을 통해 영어 산문 또는 소설 형식을 확장한 작품에 특히 관심이 있는가? 예를 들어, 그들은 번역가가 이 특정 작품의 고유한 문체적 혁신과 난제를 어떻게 다뤘는지 묻고 있는가? 파크스가 2016년 에세이에서 지적한 대로, 심사위원들이 작품을 읽으면서 문체와 영어 번역 내용의 통일성과 문체, 내용, 그리고 언어 간 관계의 통일성을 모두 고려하는가, 다시 말해 영어로는 실현되지 않았을지 모를 구상을 처음부터 가능하게 한 원문의 언어와 세계에 내재된 고유성을 찾고 있는가? 2019년, 국제 부커상 심사위원장을 맡은 영국의 역사가 베터니 휴즈는 '천체: 세 자매 이야기Celestial Bodies'의 작가인 조카 알하르티와 번역가 메릴린 부스에게 상을 수여하면서 이렇게 강조했다. "보통 영어로 주어지지 않는 관념과 생각, 경험에 다가가는 느낌이었다. '천체: 세 자매 이야기'는 젠더와 인종, 사회적 차별, 노예제를 분석할 때 예상되는 모든 고정관념을 벗어난다." 휴즈의 발언은 아랍어를 터놓고 언급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언어가 만드는 차이를 제대로 다루려는 시도는 한 것이다.


더 세속적이고 실질적인 문제도 있다. 특히 최근 책에 집중하고 출간일을 제한하는 번역상에서는 시간 차이가 문제다. 출판사는 책과 그 책의 원 출판사를 찾아야 한다. 번역가가 직접 책을 발굴하면서 출판사에게 책을 던져줄 때도 많다. 번역은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평균적으로 소설 한 권을 번역하려면 (호프만의 계산에 따르면) 1년 이상이 소요된다. 이후에는 출판 절차가 있다. 원어로 파문을 일으킨 새 책을 최소 3, 4년 들여 번역했는데 더 새롭고, 시의성 있는 책으로 관심이 옮겨가 버릴 수 있다. 그 사이 원작의 저자가 세상을 떠났을 수도 있다. 번역상에서 개역판에 자격을 주지 않는 것도 문제다. '살아 있는 저자'라는 요건이 첫 번째 난관이고, '이전에 출판되지 않은'이라는 요건이 그 다음이다. 그러나 분명 개역판은 발견만큼의 가치가 있으며, '새로움'을 부여한다.


그럼에도 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번역상과 서평은 번역에 더 나은 생태계 조성에 도움이 되는가. 제한적인 문학 번역의 재원을 고려할 때, 현재의 상금은 최적의 방식으로 배분되고 있는가? 더 폭넓고 탄탄한 번역 작품 평론 문화를 위한 장려책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번역상과 평론이 서로를 상호보완하도록 장려할 방법도 있을 것이다. 문학 저널에서 번역된 소설의 서평을 더 많이 게재하고 번역을 비교한 평론 에세이를 더 많이 실으면 어떨까. 번역가가 문학 번역서 평론 에세이를 심사하는 상을 제정할 수도 있다. 또한 서평을 직접 번역해서 책이 원어 또는 책이 번역된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어떤 평가를 받는지 보여주는 것도 제안해 본다. 이 방안들은 번역가에게 부가적인 수입원을 제공하고 영어권 국가를 넘어 번역에 대한 논평의 장을 넓힐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학 번역가가 작업물에 대해 말하거나 저자가 번역가에 대해 말하는 에세이와 인터뷰를 더 많이 실을 공간은 언제나 열려 있다. Words Without Borders4 같은 저널은 다양한 형식과 접근법으로 번역을 조망하면서 대화를 촉진하고 '작가와 번역가의 성장을 돕는' 멋진 일을 하고 있다. 번역가와 출판사, 번역 옹호자들에게 오타웨이 상을 수여하고, 번역서의 발췌문과 번역가 및 번역 출판사 인터뷰를 꾸준히 수록하는 등, Words Without Borders 가 번역 생태계에 포괄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모범적인 사례이다. 비전문가 문학 저널에서 번역을 주류로 편입할 수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도 넘쳐난다.


마찬가지로 번역에 대한 전문가의 관심을 무시하거나 폄하하지 않는다면, 국제 문학상(국제 부커상 포함)에 번역된 소설을 주류에 포함하는 것은 긍정적인 추세이다. 문학상은 번역가를 외부 평가자로 채용하여 출발어 텍스트에 대한 논평을 심사위원단에게 제공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강조하고 이에 대한 보상을 지급해야 한다(원어와 비교해서 읽을 수 있도록 전문가에게 1차후보작 전체를 보내는 미국번역상처럼). 이런 과정은 심사위원과 번역가, 번역가들 사이에 더 많은 대화를 촉진할 것이다. 경우에 따라 이 상금의 일부를 심의 과정에 투입할 수 있도록 상금을 재분배해도 된다. 다른 기준을 지향하면서 기존 번역상의 구조를 실험할 여지도 충분하다. 반복적으로 수여되는 상의 시상 기준을(그리고 가능하다면 상금을) 균형 있게 변경하면 어렵지 않게 상급의 상이 될 수 있다. 이번에는 생존한 원작자로 제한하고 다음에는 그렇지 않은 저자도 포함하거나, 이번에는 개역판도 포함하고 다음에는 제외하거나, 이번에는 단일 국가의 출판사만 대상으로 하거나, 다음에는 전 세계 출판사를 대상으로 할 수 있다. 10년에 한 번 정도는 번역가의 번역 이력에 상을 수여해도 되지 않을까.


오늘날 전 세계의 번역가들이 전면에 등장하여 공동 수상할 수 있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번역의 예술을 끌어올리려는 싸움은 현재진행형이다. 상업과 문화를 지배하는 영어권 출판업계의 중심에 있는 전 세계 영어권 독자 다수가, 다른 언어권에서 더 다양한 언어를 쓰는 독자들은 당연하게 여기는 다른 언어에서 번역된 작품에 대한 관심을 각별히 장려할 필요가 있다. 잘 된다면, 번역상과 서평이 이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제니퍼 린지는 호주 출신의 저명한 번역가, 작가, 연구자로서 인도네시아 문학과 문화를 영어권 세계에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인도네시아에서 오랜 기간 거주하며 쌓은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구나완 모하마드Goenawan Mohamad의 에세이 선집, 레일라 추도리Leila S Chudori의 소설 『나디라Nadira』, 헤르스리 세티아완Hersri Setiawan의 회고록 『부루섬: 감옥의 기록Buru Island: A Prison Memoir』 등 인도네시아의 주요 문학 작품들을 영어로 번역했다.


시드니 리뷰 오브 북스Sydney Review of Books는 호주의 대표적인 온라인 문학 비평 저널이다. 2013년 웨스턴 시드니 대학교Western Sydney University의 작문 및 사회 연구 센터Writing and Society Research Centre의 지원으로 설립되었으며 주류 언론에서 점차 사라져가는 깊이 있는 문학 비평의 공백을 메우고 호주 문학계에 활발한 지적 토론의 장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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