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Yuting Gao
2025.05.30 14:47
지난해, 나는 문명의 종말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음악사학자 테드 지오이아Ted Gioia를 찾아갔다.
그는 텍사스 교외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나를 맞이했고 햇볕이 잘 드는 서재로 안내했다. 방 중앙에는 작업대 위에 41권의 책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가 말하길, 이것들이 내가 읽어야 할 책들이란다.
진열된 책에는 에드워드 기번의 18세기 대작 '로마 제국 쇠망사' 7권 전권,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오스왈드 슈펭글러의 저작 '서구의 몰락' 2권 전권, 그리고 투키디데스의 2500년 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지오이아는 투키디데스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자신의 문화인 그리스를 보고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그 이야기를 당신에게 들려줄게요'라고 말한 최초의 역사학자였죠."
지오이아는 이러한 종말론적 계보에 기여하면서 일종의 인터넷 유명인사가 됐다. 경력 대부분 동안 그는 재즈에 관한 글로 가장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서브스택 뉴스레터 '어니스트 브로커The Honest Broker'를 통해 현대 문화를 다루면서—그리고 그것이 끔찍하다고 주장하면서—많고 열렬한 독자층을 끌어모았다. 그는 나에게 미국의 '창조적 에너지'가 고갈됐다고 말했다. 그 결과 예술과 엔터테인먼트의 질이 저하되고 이는 국가의 행복, 심지어 정치적 안정에도 연쇄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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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문화적 암흑기에 접어들었다고 우려하는 이는 그뿐만이 아니다. 최근 유고브YouGov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2020년대를 음악, 영화, 패션, TV, 스포츠 분야에서 지난 100년 중 최악의 10년으로 평가한다. 2023년 뉴욕타임스 매거진의 한 기사는 우리가 "인쇄술 발명 이후 문화적으로 가장 혁신적이지 않고, 가장 변혁적이지 않으며, 가장 선구적이지 않은 세기"에 살고 있다고 단언했다. 영국 가디언The Guardian의 한 미술 평론가는 최근 "아방가르드는 죽었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불안감의 선언들이 그토록 충격적인 이유는 논리적으로는 현재 우리가 르네상스 시대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은 예술가들이 전례 없을 정도로 편리하게 자신들의 비전을 실행하고 배포할 수 있게 함으로써 창의적 표현의 캄브리아기 대폭발1을 일으켰다. 매년 500편 이상의 대본 있는 TV 쇼가 제작되고, 스트리밍 서비스에는 매일 약 10만 곡의 노래가 추가된다고 한다. 모든 틈새 취미 시장에 부응하는 팟캐스트와 소설처럼 정교한 비디오 게임도 있다. 테크 기업들은 자신들이 예술을 민주화하여 예상치 못한 재능들로부터 흥미로운 아이디어의 충돌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해 아무도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어느 정도는 그러한 부정적 태도가 그저 쇠퇴할지 몰라 초조해 하는 인간의 타고난 경향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역사상 가장 해방적인 발전 몇몇은 처음에 사회를 우둔하게 만들지 모른다는두려움을 유발했다. 인쇄기의 출현은 15세기 사상가들이 대중적 주의 산만에 대해 불평하게 만들었다. 1964년 애틀랜틱은 록앤롤이 젊은 미국인들에게 순응주의와 소비주의만을 조장할 것이라고 나름 설득력 있게 예측하는 에세이를 실었다.
내가 애틀랜틱에서 비평가로 일하는 동안, 나는 쇠퇴론을 주장하고픈 충동에 맞서려고 노력해왔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한 2011년은 일종의 전환점이었다. 그해 7월 스포티파이가 미국에서 출시되었고, 넷플릭스는 곧 첫 오리지널 시리즈를 선보였다. 내가 성장하며 사랑했던 지적인 록 밴드들—라디오헤드, 윌코—은 중요성이 희미해지기 시작했지만 팝, 힙합, 전자 음악은 매혹적인 방식으로 상호 교류하고 있었다. 변화를 이해하고, 각 시대마다 인간의 창의성이 어떻게 새롭게 꽃피우는지 감상하는 것이 늘 이 일의 핵심인 듯했다.
그러나 2020년대는 나의 낙관론을 시험대에 올렸다. 틱톡의 혼란, 팬데믹의 파괴, AI의 위협은 예술의 진보를 논하는 어떠한 일관된 이야기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그 자리에 지오이아와 같은 비평가들이 전파하는 쇠퇴의 서사가 자리 잡았다. 그들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들을 언급하고 있다. 할리우드의 기존 지적재산(IP) 재탕, 진짜 문화를 하이재킹하는 당파적 문화전쟁, 예술가들에게 지속불가능한 경제 상황, 현대 기술의 중독적이고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효과 등이다.
나는 가장 명료한 비관론자들 중 일부를 만나 그들의 아이디어의 타당성을 시험하고, 쇠퇴 이외의 이야기를 말하는 게 여전히 가능한지 알아보고 싶었다. 과거에 변화의 시기들은 위대한 예술적 돌파구를 낳았다. 산업화는 낭만주의를 낳았고, 제1차 세계대전은 모더니스트들을 일깨웠다. 지금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가 아직 그것을 못 보고 있거나, 아니면 우리가 마침내 황무지로 미끄러져 들어간 것이리라.
침체
서기 312년, 로마 원로원은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라는 화려한 기념물의 건설을 명령했다. 수 세기에 걸친 쇠퇴를 시작한 로마 제국이 더 영광스러웠던 시절에 지어진 오래된 기념물들의 조각들을 통합한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지오이아가 현대 문화를 설명하는 데 가장 좋아하는 은유 중 하나다. TV 및 영화 산업은 리부트, 스핀오프, 정형화된 장르물에 열광한다. 브로드웨이 극장들은 구작舊作들의 깜짝 캐스팅 공연으로 연명하고, 출판사들은 과도하게 재고 도서 판매에 의존한다.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은 사람들이 이미 좋아하는 것을 더 많이 제공하는 게 돈이 된다는 걸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추천 알고리즘은 그 논리를 새로운 극단으로 몰고 가 우리로 하여금 좋아하는 것들의 소소한 변주들을 찾아 끝없이 화면을 넘기게 만든다. 사회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침체를 강요하려는 강력한 힘에 직면해 있다"고 지오이아는 나에게 말했다.
“만약 바흐가 오늘날 살아있다면, "그는 LA 음악계에 진출하려고 몇 주를 보내다가 '아, 차라리 헤지펀드 매니저가 되련다'라고 말할 겁니다."”
이 문제는 특히 음악에서 심각하다. 2024년, 신규 발매 앨범의 판매량은 미국에서 소비된 앨범의 4분의1을 약간 넘는 수준에 불과했다. 매년 온라인으로 스트리밍되는 앨범 중 '카탈로그 음악', 즉 발매된 지 최소 18개월이 지난 음악의 비율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고전으로 다시 수익 창출을 기대하며 음반사들과 사모펀드 회사들은 아티스트들의 판권을 인수하는 데 수십억 달러를 지출했다. 2022년 케이트 부시의 'Running Up That Hill'이 발매 37년 만에 빌보드 핫 100에 재등장한 것은 이것이 괜찮은 투자임을 시사하는 듯했다. 인기 TV 드라마(넷플릭스의 '기묘한 이야기'인데 이 드라마는 그 자체로 1980년대 영화 클리셰의 모방이다)에 잠깐 삽입된 옛 히트곡이 세상 대부분의 신곡들을 능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음악은 판권 관리 사업으로 변하고 있어요." 지오이아가 말했다. "지금은 새로운 음악이 번성하는 것을 원치 않는 기득권 세력이 존재해요. 사모펀드들은 당신이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듣기만을 원하죠. 왜냐하면 그들이 그 노래들을 소유하고 있으니까요." 그가 볼 때 이는 궁극적으로는 진정하고 대담한 예술성을 저해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만약 바흐가 오늘날 살아있다면, "그는 LA 음악계에 진출하려고 몇 주를 보내다가 '아, 차라리 헤지펀드 매니저가 되련다'라고 말할 겁니다."

음악사학자 테드 지오이아. /사진=Ariana Gomez
67세의 지오이아는 좌절된 위대함에 대해 잘 안다. 그는 보스턴 컨설팅 그룹과 맥킨지에서 컨설턴트로 경력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재즈 피아니스트로 부업을 하며 두 장의 앨범을 내고 전 세계를 무대로 공연했다. 대화 중 한순간, 그는 30대에 심각한 관절염을 앓기 전인 1986년에 녹음한 자신의 피아노 연주를 틀었다. "이 아르페지오, 이젠 못 해요." 그가 말했다. "항상 그런 생각을 했죠. 만약 제게 9개월, 12개월, 아니면 18개월만 더 주어진다면, 세상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요."
미학가이자 계량분석가(퀀트)로서의 지오이아의 배경은 그의 비평에 독특한 날카로움을 부여한다. 그는 종종 부드러운 추상적 개념으로 논의되는 예술 형식에 대해 명확하고 냉철한 분석을 제공할 수 있다. 나는 종종 그가 가진 확신의 힘에 압도되곤 했다. 그럼에도 나는 예술이 호박 속에 갇힌 것처럼 정체되어 있다는 그의 주장에 약간의 의구심을 품었다.
2022년 자신의 서브스택에 올린 후 널리 공유됐던 '옛날 음악이 새 음악을 죽이고 있는가?'라는 게시물(후에 애틀랜틱에 재게재됨)에서 지오이아는 폴리스The Police의 'Message in a Bottle'을 따라 부르는 한 '젊은이'를 마주쳤을 때와 같이 일상생활에서의 침체 징후들을 묘사했다. 그 예는 다소 따끔했다. 더 폴리스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해체했지만 나는 평생 그들의 노래를 흥얼거려왔다. 물론 내가 90년대에 부모님이 갖고 있던 음반을 들었을 때는 아무도 옛 음악의 재생 횟수를 측정하지 않았다. 반면 오늘날에는 모든 스포티파이 재생이 모니터링되고 수익화된다.
그렇다면 지오이아가 오랫동안 존재해 온 청취 습관을 보여주는 데이터를 과대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제 세대에서는요," 그가 말했다. "제가 아는 누구도 부모님 세대의 음악을 듣지 않았어요."
지오이아의 세대는 베이비부머 세대로, 그 이후 어떤 세대보다도 스스로를 혁명적이라고 생각했다. 로큰롤 운동은 베이비부머들에게 기성세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신선한 그들만의 사운드를 선사했고, 나이가 들면서 그들은 펑크, 힙합, 전자음악과 같은 다른 음악적 혁신들을 목격했다. 지오이아는 나에게 그 역동성을 21세기에 일어난 일—혹은 일어나지 않은 일—과 비교해 보라고 했다. "오늘날의 음악은 2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지오이아가 말했다.
나는 그 주장을 머릿속으로 되새겨 보았다. 라디오에서 사브리나 카펜터의 디스코풍 노래 'Espresso'나 벤슨 분의 클래식 록 분위기의 찬가 'Beautiful Things'처럼 오래된 느낌을 주는 신곡이 나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에 확고히 뿌리내린 듯한 음악가들의 노래도 나온다. 빌리 아일리시의 재즈와 전자음악의 혼합은 이전의 어떤 팝 스타의 작품과도 다르다. 샤부지Shaboozey는 아마도 역사상 처음으로 장난처럼 느껴지지 않는 방식으로 컨트리 음악과 랩을 결합한다. 레게톤, 아프로비츠, 케이팝은 이제 주요 레이블, 출퇴근 시간대 라디오 DJ, '롤링스톤'과 같은 전통적인 게이트키퍼들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수준으로 영어권 청중에게 다가가고 있다. 이러한 발전은 로큰롤만큼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여전히 활발하게 진화하고 있는 문화를 시사한다.
지오이아는 오늘날의 문화에 몇 가지 밝은 점이 있음을 인정했다. 그는 현상에 대해 전적으로 숙명론적이지는 않다. 그는 문화가 예측 가능한 주기로 움직인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권태와 평범함이 극에 달하면 혁명이 일어나 기존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질서를 세울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정신을 확장하고 세계관을 넓히는 문화적 경험을 원해요." 그가 말했다. "만약 우리 문화를 통제하는 기업들이 그것을 제공하기를 거부한다면, 사람들은 방법을 찾아낼 것이고 재탄생이 발생할 거예요. 우리는 새로운 카운터컬쳐를 갖게 될 겁니다." 그는 "새로운 낭만주의"(기술보다 인간성을 강조)와 "새로운 맥시멀리즘"(억눌러지지 않은 야망으로 만들어진 예술)의 물결을 예상했다.
지오이아 자신도 작게나마 혁명을 일으키는 데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매일 그는 알고리즘이 무시한 보석 같은 음악을 찾아 몇 시간씩 새로운 음악을 듣는다.
그는 자신의 서브스택 독자들에게 9개의 새 앨범을 추천하는 게시물 초안을 내게 보여주었다. 게시물 서두에 등장하는 이미지는 보닛 모자를 쓰고 스타킹을 신은 젊은 여성이 봉제인형이 흩뿌려진 침대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영어와 일본어로 몽환적인 보사노바 노래를 부르는 메이 세모네스Mei Semones였다. 지오이아는 그녀의 앨범이 발매된 지 3주 후에 유튜브 조회수가 8700회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가끔 조회수가 100회 미만인 앨범을 추천하기도 해요." 그가 말했다.
지오이아에게 낮은 청취율은 음반 산업이 새로운 재능을 억누르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가 흥미로운 발견들을 연이어 찾아내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이상하게도 사회의 창조적 에너지에 대해 안도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거대 기업들은 강력하고 매우 비겁할 때도 많지만 그들은 'Sgt. Pepper's2'나 'London Calling3' 앨범보다도 더 불안정하게 만드는 힘, 즉 기술을 사용하여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집착을 쫓는 분열된 글로벌 청중과 씨름하고 있다.
지오이아는 유튜브로 가서 호주 밴드 글래스빔스Glass Beams의 다른 영상을 틀었다. 멤버들은 얼굴에 보석 박힌 가면을 쓰고 복잡한 서프록 그루브를 연주했다. "훌륭한 밴드인데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가 말했다. "조회수가 얼마나 되죠?"
그는 스크롤을 내려 답을 확인했다. 거의 100만 회였다.
지오이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제가 말했던 것만큼 큰 비밀은 아니었네요." 그가 말했다.
몇 달 후, 나는 같은 영상을 다시 찾았고 조회수가 600만 회를 넘어선 것을 보았다.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댓글은 이랬다. "이걸 보여준 알고리즘 만세!"
냉소주의
전시의 제목은 '초월'이었다. 맨해튼의 명망 높은 페이스 갤러리 2층에는 흰색 바탕에 흰색으로 그려진 추상화들과 바위의 선묘화線描畵로 보이는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벽면의 설명문은 이것이 79세의 예술가 흐엉 도딘Huong Dodinh의 미국 최초 개인전이라고 설명했다. 한 그림은 1953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인해 가족이 베트남에서 프랑스로 이주한 후, 어린 시절 그가 처음 목격한 첫눈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헐렁한 분홍색 폴로 셔츠와 짧은 운동용 반바지를 입은 미술 평론가 딘 키식Dean Kissick은 작품을 거의 쳐다보지도 않고 방을 빠르게 지나갔다. "못 하겠어요." 그가 웃음을 참으며 내게 속삭였다.
42세의 키식은 예술계의 현 상태에 대한 불만으로 주로 알려진 작가이다. 그는 우리가 "긴 2017년"에 갇혀 있다고 믿는다. 즉, 도널드 트럼프, 브렉시트와 관련된 불안감이 도덕주의, 자기 성찰, 순응주의로 문화를 질식시킨 시기라는 것이다. 아름다움, 독창성, 스킬을 통해 달성되는 초월이 주된 목표여야 하는데 오늘날 예술은 "메시지 전달, 인식 제고, 또는 세상을 치유하는 어떤 분위기 조성에 훨씬 더 치중하게 됐죠." 그는 내게 말했다. 다시 말해, 지오이아가 혁명을 기다리는 반면, 키식은 우리가 최근 혁명을 겪었고 그것이 모든 걸 더 음울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키식은 나를 만나 첼시의 갤러리 현장 투어에 데려갔다. 도딘의 전시는 요즘 아트 딜러들의 전형적인 전략을 보여준다고 그는 설명했다. 소외된 집단에 속한 비교적 무명인 인물을 찾아내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정체성을 기반으로 그의 작품을 판매하려는 것이다. 예술이 단조로울수록, 품위 있게 절제된 집을 꾸미려는 부유층에게 더 좋다. "이건 그냥, 뭐랄까, 소파 같아요." 그가 도딘의 부드럽고 평온한 캔버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커튼 같은 거죠."
우리가 엘리베이터에 들어섰을 때, 나는 그에게 도딘 같은 사람이 세계 최고급 갤러리 중 한 곳에 전시된 것을 보고 적어도 정의감을 느끼는지 물었다. "나이 든 아시아 여성들이 잘 되는 것을 보면 항상 좋아요. 제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거든요." 어머니가 영국으로 이주한 일본인인 키식이 말했다. "하지만 아니요—정의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작년에 키식은 하퍼스Harper's에 정치가 현대 미술을 거의 파괴했다는 주장을 담은 커버스토리를 썼다. 박물관과 갤러리들은 "모든 형태의 억압"을 "하나의 보편적인 슬픔"으로 섞고 있다고 그는 썼다. "우리는 정체성들이 무의미해질 때까지 정체성으로 폭격을 받는다. 모두가 소외라는 큰 샐러드 그릇에 함께 던져지면 타자성은 진부하고 추상적인 것이 된다."
그 에세이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2024년 5월, 키식의 어머니는 런던의 바비칸 아트 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시를 보러 가던 중 버스에 치여 두 다리를 절단하는 사고를 당했다. 키식은 뉴욕에서 런던으로 날아가 병원에 있는 어머니를 문병했다. 나중에 어머니가 회복 중일 때, 그는 어머니가 보러 가던 길이었던 전시에 대해 살펴봤다. '언래블Unravel'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는 주로 역사적으로 소외된 공동체 출신 예술가들의 섬유 예술을 선보였다. 키식이 지적했듯이, 큐레이터들은 더 나아가 "직물 자체가 여성적인 것으로 성별화되고 '순수 미술'보다는 '공예'로 간주되어 소외되어 왔다고 제안했다. 전시회 소개글은 '바늘, 베틀 또는 의복을 저항의 도구로 상상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물었다."
키식의 평가는 가차없었다. "바비칸 갤러리에서 본 전시 중 가장 우울한 전시였다. 다리를 잃는 걸 감당하기는 커녕 관람조차 할 가치가 없었다. '언래블'은 정치적으로 급진적, 심지어 혁명적인 척했지만 전형적인 리버럴 정치성과 좋은 분위기 수준의 다양성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것은 저항의 환상을 제공했지만 진정하고 실질적인 사회 변화나 예술적 실험이라는 측면에서는 제공할 것이 거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진보적인 신념을 비판하는 것은 그저 보수적으로 들릴 수 있다. 실제로 키식의 불만은 현재 연방 정부를 휩쓴 반反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 물결에 반영되어 있으며 미국 기업, 문화, 학술 기관 전반으로 파급되고 있다. 그러나 키식은 자신이 이념적인 동기를 갖고 있는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저는 사람들이 '워우크woke'든 '안티 워우크anti-woke'든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그는 내게 말했다. "그에 대한 대화 자체가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게 문제죠."
그러한 대화는 고급 문화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중문화에서도 피할 수가 없었다. "대표representative가 중요하다"—즉, 더 포용적인 미디어가 더 포용적인 사회를 만들 것이라는—이론의 지지자들은 '인어공주'와 같은 영화의 다양성 캐스팅 리메이크, 리조Lizzo와 같은 아티스트들이 부르는 몸 긍정body-positivity의 노래, 문학계의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에 대한 반성 등에 환호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이에 맞서 스트리밍과 다운로드 수를 늘려 이념적 점수를 얻으려는 반발을 조직했다. 제이슨 알딘Jason Aldean의 2023년 곡 'Try That in a Small Town'이 암묵적으로 린치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일부 좌파로부터 비판을 받자, 이 곡을 지지하는 우익 캠페인이 이어졌고 그 결과 알딘은 빌보드 핫 100에서 1위를 차지했다. 반DEI 모큐멘터리mockumentary '내가 인종차별주의자인가?'와 같은 영화들도 유사한 캠페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블록버스터, 팝 콘서트, 어린이 TV와 같은 가장 현실 도피적인 형태의 엔터테인먼트조차 이제 정치적 전쟁터처럼 취급되지만, 그런 접전에서 누군가의 의견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거의 듣지 못한다.
순수미술의 세계에서 키식은 이상주의로 위장한 냉소주의에 압도당한다고 한다. 그는 2021년 제프 베이조스의 로켓 중 하나의 앞부분 원뿔(노즈콘)을 장식하기 위해 고용된 인기 있는 가나 화가 아모아코 보아포Amoako Boafo의 예를 언급했다. 당시 베이조스의 우주 비행 회사인 블루오리진은 성명서에서 이렇게 발표했다. "그의 놀라운 초상화는 흑인의 기쁨과 우리가 우주에서 모두를 위해 만들고자 하는 공유된 미래, 즉 활기차고 아름다우며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미래를 포착합니다." 그러나 그 의뢰의 동기가 흑인의 기쁨보다는 논란 많은 억만장자의 허영심 프로젝트를 둘러싼 PR 차원의 우려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트럼프 재선 이후 베이조스의 행동으로 판단하건대, 미래의 노즈콘들도 과연 비슷하게 장식될지 궁금해하더라도 과한 건 아니리라.) 실제로 평범한 예술이 정치적인 이유로 과대평가되기도 한다. 현업에 있는 비평가라면 누구나 관객들이 얼마나 파벌적이고 반사적으로 변했는지 안다. 여성 작가를 비판하면 많은 독자들이 당신을 성차별주의자라고 부를 것이다. 여성 작가를 옹호하면 '찌질이beta cuck'로 치부될 위험이 있다. 이러한 반응은 단지 편견의 존재를 보여주는 게 아니다. 본래 결속력을 주는 힘이어야 할 '문화'가 점점 더 격렬한 스포츠 라이벌 관계처럼 분열적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직 비평가라면 또한 누구나 시의성과 정체성이 이전 시대(니나 시몬Nina Simone을 들어보라)와 최근(미투 이후의 걸작인, 부적절한 행위로 고발된 레즈비언 오케스트라 지휘자에 관한 영화 '타르Tár'를 보라)에도 놀라운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고 말할 것이다. 키식조차 이를 인정한다. 그는 예술가 아서 자파Arthur Jafa의 2021년 비디오 설치 작품 'AGHDRA'에 대해 내게 열변을 토했다. 그 작품의 불길하고 물결치는 바다 풍경 묘사는, 작가가 아트뉴스ARTnews에 말했듯이 "노예선에 사슬로 묶여 있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키식은 심지어 살만 투르Salman Toor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말을 했다. 파키스탄 출신의 뉴욕 작가로 술집이나 아파트에서 어울리는 퀴어 남성들을 녹회색의 인상주의적 얼룩으로 표현하면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투르는 키식이 가장 싫어하는 조합 중 하나—구식 기법에 21세기적 정체성 관련 변주를 더한 것—를 전형적으로 보여주지만 적어도 키식은 "그는 제대로 그림을 그릴 줄 알죠"라고 했다.

미술가 아서 자파. /사진=AP/뉴시스
우리가 갤러리를 여기저기 바쁘게 오가며 단 몇 분만 들렀다가 떠나기를 반복하면서, 나는 키식의 예술계에 대한 원한이 정치적인 문제보다 더 깊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모터크로스 라이더들을 그린 다채로운 그림을 "쓰레기"라고 평했다. 마치 초보적인 CGI로 렌더링된 것처럼 흐릿한 특징을 가진 반나체의 여성의 거대하고 강렬한 조각상은 단지 "멋지네요"라는 중얼거림만을 받았다.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의 지루함을 인정했다.
"아마 아실 거예요—저는 살면서 하얀 정육면체 공간의 그림 전시회를 너무 많이 봤어요." 그가 말했다. "예술이 너무 많아요."
이 문제는—문제라고 할 수 있다면—키식이 2010년에 미대를 졸업할 무렵부터 심화되었다. 그때 그는 시각예술이 주류 문화 현상으로 넘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제이지Jay-Z는 바스키아 작품 수집에 대해 랩을 했고, 루이비통은 일본 시각예술가 무라카미 다카시와 핸드백을 만들었다. 인터넷은 갤러리와 박물관의 벽 너머의 관객들이 예술에 관심을 갖도록 장려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기술의 도움으로 창의성이 더 번창하리라는 희망은 과포화와 무감각으로 바뀌었다. 소위 좀비 형식주의—인스타그램 공유에 최적화된 재탕된 추상 표현주의—가 유행이 되었다. 온라인 생활의 혼란에 대한 해독제로 여겨지는 미니멀리즘은 예술, 패션, 소비재 디자인의 기본 미학이 되었다. "예술에 아이디어가 고갈되고 있다는 것은 한동안 분명했다." 키식은 2021년 스펙테이터 칼럼에서 선언했다. 진부하고 사회운동 냄새가 나는 예술의 과대평가는 이 모든 번아웃 상황의 증상이다. 만약 양식적 혁신이 더 이상 소음을 뚫고 나올 수 없다면 우리는 주제에 대해서만 논쟁할 수밖에 없다.
더 나은 방향은 무엇일까? 키식은 이 질문에 대해 말을 아끼지만 몇 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예술은 그 시대를 포착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지만 문화전쟁만이 2020년대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예술이 인터넷의 말로 표현하기 더 어려운 영향들, 즉 우리의 사고 과정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자아감을 뒤흔드는 문제들을 다루기를 원한다. 그는 예술가들이 오랜 전통 기법을 활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하며, 동시에 AI를 포함한 새로운 도구들을 실험하는 데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세기에 살아있다는 경험은 극적으로 변했죠." 그는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시대와 관계를 맺어야 하고, 그러면 아마 모든 것에 대해 절망을 덜 느낄 겁니다."
그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은 패러다임 전환, 즉 영적 재각성과 결합된 어떤 종류의 형식적 도약인 것 같다. "우리가 가진 문화는 우리 자신, 사람들의 정체성과 개성에 너무 집착해요." 그는 말했다. "우리가 어떻게든 그것을 초월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이 너무나 개인주의적이고 너무나 자기집착적인 모멘트를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그게 어떻게 일어날지는 모르겠어요."
고립
오리건주 해안 마을 아스토리아의 공영 라디오 방송국 KMUN-FM 91.9는 부르고뉴색 처마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있는 133년 된 빅토리아풍의 작은 주택에서 방송한다. 지난 봄 비 오는 어느 날, 나는 그곳에서 '선견지명이 실명을 막는다foresight prevents blindness'라는 슬로건이 새겨진 티셔츠 위에 트위드 재킷을 걸친 41세의 음악가이자 작가인 제이미 브룩스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LP판 더미, CD 스핀들, 낡은 악기들과 믹싱 보드들로 어수선한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다양하고 친절한 방송국 자원봉사자들을 내게 소개해 주었다. 한쪽 벽에는 방송국의 방송 구역을 손으로 그린 지도가 걸려 있었다.
한때 인터넷의 미래주의적 잠재력의 상징이었던 예술가를 만나기에는 놀랍도록 아날로그적인 환경이었다. 엘리트짐내스틱스Elite Gymnastics와 디폴트젠더스Default Genders라는 예명으로 가장 잘 알려진 브룩스는 오랫동안 '베드룸 뮤지션', 즉 집 컴퓨터를 사용하여 고품질 녹음을 하던 사람이었다. 2010년대 초 미니애폴리스의 힙스터 파티 씬scene에 몰입했던 20대 시절, 브룩스는 친구와 함께 우아한 댄스곡을 몇 곡 발표했고 이는 음악 블로거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는 곧 비슷한 주목을 받던 아티스트 그라임스와 교제하며 로스앤젤레스에 살면서 현대 팝 생태계를 가까이서 살펴보게 되었다.
하지만 요즘 그의 마이크와 기타는 상자 속에 들어가 먼지가 쌓여가고 있다. 널리 공유됐던 트윗과 에세이에서 분명히 밝힌 그의 신념, 즉 음악 산업은 파멸했다는 걸 고려할 때 새로운 노래 작업에 시간을 보내는 게 의미 있다고 느끼질 않는다. 지오이아처럼 브룩스도 기술과 사업적 이해관계가 예술의 목을 조르고 있다고 본다. 키식처럼 그는 오늘날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새로운 작품이 그저 별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브룩스의 견해는 그들 누구보다도 어둡고, 더 명백히 개인적이다. 그는 내게 음악의 미래를 한 단어, '파멸wreckage'로 묘사했다.
많은 음악가들은 스포티파이의 사업 모델이 약탈적이라고 믿으며, 노래가 재생될 때마다 아티스트가 10원도 안되는 돈을 버는 시스템에 참여하도록 강요한다고 생각한다. 브룩스도 동의하지만, 그의 우려는 돈 자체보다 더 깊다. 그는 사회에서 음악의 역할이 타락했다고 주장한다. 스트리밍은 아티스트들이 기운을 빼는 '규모의 게임'을 하도록 조장한다. 더 많은 노래를 발표할수록 바이럴이 되어 푼돈을 실제 수입으로 바꿀 기회가 더 많아진다. 따라서 아티스트들은 가능한 한 빠르고 저렴하게 녹음하려는 동기를 받는다. 브룩수가 보기에 이 모든 것이 명백히 나쁜 음악—이전 시대의 최소한의 기준보다 덜 독특하고, 덜 영혼이 담겨 있으며, 덜 능숙하게 만들어진—의 과잉 공급으로 이어졌다. "아무도 자신의 기예를 개발할 자원을 얻을 수 없어요." 그는 말했다.
이러한 질적 저하는 브룩스가 우려하는 다음 단계, 즉 예술형식 및 경제적 사업으로서의 음악의 가치를 더욱 떨어뜨리는 AI 생성 음악의 홍수를 위한 조건을 만들었다. 이미 스트리밍 플랫폼들은 잠들기 위한 백색소음이나 공부를 위한 "편안한 비트"와 같은 "효용성" 음악에 대한 거대한 수요를 심어주었다. 저렴한 AI 도구는 이제 그러한 음악의 신뢰할 만한 버전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스타일을 모방하는 데 더욱 능숙해질 것이다. 청취자들의 기준이 너무 낮아져서 그 차이를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브룩스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동안 이 재앙의 초기 단계가 펼쳐지는 걸 보았다. 우리가 대화하는 동안, 그는 레이디가가의 비디오 촬영 현장에 있었던 것과 뱀파이어위켄드의 에즈라 코에닉이 자택 뒷마당에서 노래하는 것을 본 걸 대수롭지 않게 언급했다. 그러나 그가 묘사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의 LA 시절은 대부분 환멸스러웠다. "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성공을 별로 못 봤어요." 그는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방에 혼자 앉아서 거지 같은 우버이츠나 주문하는 거 같았죠."
그의 말은, 한때 아웃사이더들이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해준 인디 현상이었던 베드룸 뮤지션의 정신이 빠르게 음반 산업의 기본값이 되었다는 것이다. 프로듀서들은 스튜디오를 건너뛰고 집에서 자신의 장비로 작업하며, 다른 시간대에 사는 연주자들과 비트메이커들에게 작업을 의뢰할 수 있다. 음악은 이제 그것이 소비되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게, 혼자 헤드폰에 갇힌 사람들에 의해 널리 만들어진다.
이러한 상황은 브룩스가 생각하기에 음악의 목적에 반하는 것이다. 한때 노래를 듣는다는 것은 특정한 공동체적 상황—가스펠을 R&B로 진화시킨 교회, 힙합이 발원한 동네 파티, 록 밴드들이 즉흥 연주를 하던 클럽—을 들여다보는 창을 얻는 걸 의미했다. 이제 대부분의 음악은 가짜 장소이자 형태가 없는 씬, 즉 인터넷에 의해 형성되고 맞춰진다. 그것은 이제 명백히 사람들의 행복감을 저하시키고 있는 문화적 분열과 개인적 고독이라는 더 광범위한 추세를 부추길 뿐이다.
나는 스트리밍의 일상성이 음악을 예전보다 더 작고 덜 중요하게 느끼게 만들었다는 데 공감하지만 여전히 음악이라는 예술형식이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많은 징후를 본다. 2020년대 음반 산업에서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는 장소감과 공유된 정체성에 뿌리를 둔 스타일인 컨트리 음악의 붐이었다. 잭 브라이언이나 레이니 윌슨과 같은 새로운 스타들은 스트리밍으로 자신들의 노래를 히트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공연 투어도 매진이 됐고 사람들은 주차장에서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테일게이트 파티4를 하기도 한다. 새로운 홍키통크 술집5들이 전국적으로, 심지어 민주당 우세 주(블루 스테이트)에서도 생겨나고 있다.

테일러 스위프트. /사진=AP/뉴시스
"그곳에서는 여전히 인간적인 문화가 나오고 있죠." 우리가 컨트리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을 때 브룩스가 말했다. 그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성공이 그가 내슈빌에서 성장하며 노련한 작곡가들과 함께 기타로 곡을 쓰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희귀하게 느껴지는 스킬을 갖게 된 덕분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브룩스는 컨트리 음악의 르네상스는 그저 그 장르가 늦게 최신 기술을 채택하면서 나타난 부수적인 효과이지 컨트리 음악이 기술에 저항해서는 아니라고 본다. "스트리밍이 그것을 잠식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리고 있을 뿐이에요." 그가 말했다. "하지만 결국 스트리밍은 컨트리 음악을 파괴할 겁니다."
그가 보기에 음악과 더 넓은 예술 분야의 좋은 점 대부분은 결국 파괴를 맞을 운명이다. 지오이아의 순환론적 트렌드 예측, 키식의 창의적 재창조에 대한 갈망 모두 브룩스의 분석에서는 나이브하게 들린다. "사람들은 '에이, 모든 것은 순환해요. 태고적부터 이런 식이었다구요'라고 하는데 아뇨, 그렇지 않아요." 그는 말했다. "예를 들어, 조 바이든의 생애 동안 악보 산업은 음반 산업으로 완전히 대체됐습니다. 그리고 이미 우리 생애에서 음반의 사본을 구매하는 관행은 그것들에 대한 접근권을 대여하는 개념으로 대체됐죠."
다시 말해 위대한 것들은 단지 변하기만 하는 게 아니다. 위대한 것들은 죽기도 하고 그것을 대체해서 등장하는 것들은 이전 것보다 훨씬 더 나쁠 수 있으며 아예 대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가 2023년 서브스택에 썼듯이, "음반 사업의 역사는 자연스러운 죽음과 예정된 부활의 순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낡고 구식이 된 테크 기업들이 줄어드는 수익을 쫓는 이야기다.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은 원형이 아니라 나선형이며, 끝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작고 좁아지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듣는 것은 나를 특히 슬프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브룩스 자신의 음악은 항상 현대적 소외에 저항하는 사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2018년—그라임스가 일론 머스크와 교제하기 시작할 무렵—로스앤젤레스를 떠나 기술, 탐욕, 그리고 그의 노랫말을 인용하자면 "암호화폐 똥멍청이들"에 의해 차가워진 세상에서 연결을 찾는 것에 대한 훌륭한 앨범 세 장을 녹음했다. 그 음악은 전자음악이었지만 수공예적인 느낌이 있었고, 떨리는 보컬 필터를 통해 노래하는 브룩스는 기계로 변하는 것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처럼 들렸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브룩스는 자신의 음악 경력을 중단했다. 혼자 컴퓨터 화면에서 음표를 옮기는 과정이 "자위행위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새 앨범이 성공하면 "애플, 스포티파이, 그리고 지분을 가져가는 다른 어떤 회사들에게든 많은 가치를 창출할 거예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요." 이제 그는 KMUN에서 시간을 보내며 겉보기에 구식인 지상파 라디오 기술에 대해 배우고 있다. 그는 인터넷이 AI 쓰레기로 넘쳐나게 되면 라디오 기술이 인류에게 일종의 "종말 이후의" 유용성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룩스는 만들고 싶은 새로운 음악에 대한 꿈을 멈출 수 없다. 그는 최근 머릿속을 맴도는 한 곡의 아이디어를 설명했다. "호른 솔로가 있고, 코러스에는 앤드류스시스터즈 같은 백보컬이 들어가요." 나는 그에게 그 비전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새로운 음반 계약을 맺으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음, 아니에요." 브룩스가 대답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협력자들—공유된 경험으로 뭉친, 실제 악기와 그것을 다룰 기술을 가진 실제 밴드 동료들—이다. "사람이 필요해요. 진심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해요."
가속화
내가 대화를 나눈 각 쇠퇴론자들은 거대하고 거스를 수 없는 힘이 문화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나는 한편으로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지도 모르는 흩어진 반례들에 매달리게 됐다. 나는 죽음의 징조들을 보았다. 이제 생명의 징후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리하여 나는 어느 여름밤 브루클린의 환기가 잘 안 되는 실내 스케이트 공원에서 땀을 흘리게 되었다. 나는 이곳에서 열리는 '노 벨스No Bells'라는 힙합 전문 블로그가 주최한 콘서트를 보러 갔다. 이 블로그는 스스로를 "더 넓은 인터넷 언더그라운드의 허브"라고 칭한다. 젊은이들이 하프파이프 양쪽에 앉아 있었는데 매우 다양한 사람들을 섞어놓은 판정단의 구성원들처럼 보였다. 청반바지와 크롭톱을 입거나, 끈이 많고 SM의 영향을 받은 복장을 하거나, 만화가 그려진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그들은 전화기, 라이터, 닌텐도DS, 그리고 한 경우에는 외발자전거를 만지작거렸다. 하프파이프 바닥에서는 작은 무대 주위로 모쉬핏이 소용돌이쳤다. 두 명의 래퍼가 끊임없는 합성 박수 소리와 우쿨렐레로 연주된 'Somewhere Over the Rainbow' 샘플이 결합된 비트를 놓고 소리치고 있었다.
무대 옆 혼란 속에는 25세의 저널리스트 키어런 프레스-레이놀즈가 있었다. 그는 쇠퇴론자여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의 아버지인 음악 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는 2011년 저서 '레트로마니아: 대중문화의 과거 중독Retromania: Pop Culture's Addiction to Its Own Past'을 썼는데 이 책은 2000년대의 리믹스, 리메이크, 리바이벌의 풍요에 대해 의아해하며 현재 지오이아 등이 지지하는 침체론의 초기 버전을 제시했다. 프레스-레이놀즈 자신은 위기에 처한 사회의 증상처럼 보이는 인터넷 서브컬쳐를 기록하면서 경력을 키워왔다. 우리가 만날 때쯤, 그는 온라인 인플루언서들을 풍자하기 위해 플레이어들이 콘텐츠를 위해 끔찍한 일을 경험하게 만드는 비디오 게임에 대한 기사를 뉴욕타임스에 썼다. GQ에 쓴 기사에서는 '룩스맥싱looksmaxxing' 커뮤니티를 깊이 파고들었다. 신체적 매력을 최적화하기 위한 여러 기법 중에서도 하루 몇 시간씩 턱을 악물어 얼굴형을 바꾸려고 시도하는 젊은 남성들에 대한 이야기로, 그의 표현에 따르면 "불안감의 구덩이"인 인터넷 포럼의 부추김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스-레이놀즈는 현재의 문화로부터 에너지를 얻고 있다. "지금 당장은 놀라운 거시적 트렌드가 없을지도 몰라요." 그가 내게 말했다. "하지만 주류의 표면을 긁어보면 뭔가 제대로 하는 사람들이 보이죠." 비평가로서 그는 좋은 소식을 전파해야 할 의무감을 느낀다. "모든 젊은이에겐 옹호할 만한 무언가가 있어야 해요." 그가 말했다. "정말로 열광적으로 흥분할 만한 것 말이죠."
프레스-레이놀즈는 갈색 머리를 길고 듬성듬성하게 길렀고 목소리는 거칠고 들떠 있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집착을 "튀겨진fried" 그리고 "무정부적인anarchic"과 같은 용어로 묘사했다. 음악, 틱톡, 심지어 웹 디자인 트렌드에서도 그는 자신이 "최대 자극max stimuli"이라고 부르는 미학으로의 전환을 본다. 속도, 불협화음, 어리석음의 한계를 밀어붙이면서 오래된 문화의 조각들을 새로운 것으로 재결합하는 미학이다. "마치 지금 우리 뇌가 느끼는 방식 같아요. 너무 많은 것들로 들끓고 혼잡한 느낌이죠." 그가 말했다.
그는 특히 힙합 언더그라운드에 매료되어 있다. "레이지 랩"(이 분야의 컬트적 영웅 플레이보이카티Playboi Carti의 이해하기 어려운 가사와 글리치한 비트를 따른다)과 "플러그앤비pluggnb"(트랩6의 몽롱하고 멜로디컬한 버전)와 같은 하위 장르들이 가득하다. 온라인에서 비트와 소프트웨어 플러그인을 교환하는 프로듀서들의 글로벌 커뮤니티는 힙합의 관행을 비틀어 프레스-레이놀즈가 생각하기에 "10년 전에는 정말 나올 수 없었을" 사운드의 조각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는 워크업스wokeups라는 아티스트의 'fragged aht'라는 최근 사운드클라우드 "마이크로 히트곡"을 언급했다. 그 노래는 "인간이 아코디언처럼 팽창하고 수축하는 것을 떠올리게 만들어요." 프레스-레이놀즈가 말했다. 우리가 대화한 후 그 트랙을 찾아보았다. 심하게 필터링된 목소리가 디지털 사운드의 파도 위에서 2분 동안 돈과 총에 대해 울부짖었다. 그 효과는 이상하게 아름다웠다. 소름이 돋았다.
다른 장르들도 혼란스럽고 장난스러운 방식으로 뒤섞이고 있다. 나는 하이퍼팝hyperpop에 매료되어 왔는데, 이는 베드룸 일렉트로닉 뮤지션들이 버블검 클리셰에 가하는 펑크적이고 노이즈적인 변형을 일컫는 느슨한 용어다. 2024년, 하이퍼팝은 찰리 XCX의 앨범 'Brat'으로 상업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 광란적인 리듬은 카멀라 해리스의 대통령 선거 캠페인 공식 밈에 채택될 만큼 인기를 얻었다.

찰리 XCX. /사진=로이터/뉴스1
브룩스는 내게 인터넷 기반 음악계에 큰 기대를 걸지 말라고 경고했었다. 그는 대부분의 하이퍼팝을 "클럽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사람들이 만들고 소비하는 "되새김질된 비디오 게임 사운드트랙"이라고 일축했다. 내겐 가혹한 평가로 여겨졌지만 프레스-레이놀즈와 대화하면서 그것이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십대 시절 유튜브에서 애니메이션 몽타주에 맞춰진 힙합을 들으며 마인크래프트를 하면서 음악적 각성을 하게 되었다 한다. 그의 문화비평가 부모님(어머니는 작가 조이 프레스)은 집에서 다프트펑크의 세련된 비트를 틀었지만 그는 XXX텐타시온과 같은 불안에 찬 래퍼들의 과장된 디스토션에 끌렸다. 팬데믹 봉쇄가 시작되자 그는 디지털의 정글 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프레스-레이놀즈는 그렇게 온라인에 빠져 지내는 것이 자신의 "뇌를 썩게 만들었다"고 농담했다. 그는 앨범 전체를 듣는 걸 "거의 못 견디는" 음악평론가라는 데 대해 변명하지 않는다. 때때로 그는 단지 "그 질감을 느끼기 위해" 노래를 30초만 튼다. 이 고백은 나를 약간 괴롭게 했다. 나 자신도 최근 몇 년간 주의력이 감퇴하는 것을 느꼈지만 여전히 초월적인 예술—그리고 예술을 통한 초월적인 경험—에는 지속적인 집중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구애를 받는다. 여러 면에서 지오이아, 키식, 브룩스가 상세히 설명한 문제들은 질 좋은 것보다 쓰레기(재활용된 IP, 정치적 미끼, 배경음악)를 선호하는, 극도로 산만해진 관객들의 문제였다. '뇌 썩음' 현상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스케이트 공원 콘서트에서 예술 자체가 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드라이너는 래퍼 폴로 퍼크스Polo Perks와 아유리AyooLii, 그리고 래퍼 겸 프로듀서 피어도리안FearDorian으로 구성된 3인조였는데, 그들은 각각 뉴욕, 밀워키, 애틀랜타 출신이지만 온라인으로 연결된 후 직접 만나며 우정을 쌓았다. 그들의 노래는 이모 록emo rock, M.I.A., 게임 음악 등의 샘플을 마치 여러 브라우저 탭에서 무작위으로 재생된 오디오가 함께 조화를 이루는 듯한 우아한 현기증과 함께 사용했다. 8분 음표마다 울리는 강한 타격음, 최근 부상하는 밀워키 랩계의 특징적인 비트는 마치 에너자이저 토끼 같은 추진력을 만들어냈다. 하프파이프 바닥에서 땀을 흘리며 군중에게 밀착된 채, 나는 음악이 나의 산만함을 만나 그것을 대체하는 걸 느꼈다. 이 아티스트들은 인터넷에서 뛰쳐나와 우정, 파티, 그리고 노력에 대한 감정—시대에 맞는 사운드로 전달되는 고전적인 힙합의 열기를 전달했다.
그 후, 나는 1981년 다큐멘터리 '서구 문명의 몰락The Decline of Western Civilization'에 나오는 콘서트들을 생각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블랙플래그Black Flag와 같은 하드코어 펑크 밴드를 중심으로 형성된 지저분하고 반체제적인 음악 씬을 취재했다.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오스왈드 슈펭글러를 연상시켰고, 어른들이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문화를 경멸하는 방식을 놀리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62세의 사이먼 레이놀즈는 때때로 그런 당황한 어른들 중 한 명처럼 느낀다. 그는 아들이 옹호하는 음악 대부분이 자신의 귀에는 "너무 거칠다"고 내게 말했다. 그럼에도 프레스-레이놀즈가 음악에서 "최신의 복잡함, 최신의 돌연변이"를 쫓는 걸 지켜보는 건 스릴 있었다. 그에게도 익숙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탐험 전성기는 90년대였는데 당시 테크노, 드럼 앤 베이스, 그리고 물론 다프트펑크와 같은 일렉트로니카의 부상은 젊은 레이놀즈에게 록앤롤이 베이비부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보였다. 그러다 그가 나이가 들고 2000년대가 되자, 그의 세대 레이버들은 기세를 잃기 시작했다. 그들의 자리를 대신할 만한 새로운 씬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문화가 너무 과거 지향적이 되었다는 느낌으로 '레트로마니아'를 썼다. (곧이어 그의 친구 중 한 명인 고故 마크 피셔는 비슷한 주제의 에세이 '미래의 느린 취소'를 썼는데 이는 21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적 비관론 저작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레이놀즈의 가장 암울한 이론 중 일부는 출판되자마자 "약간 허물어지기 시작했다"고 그는 내게 말했다. 스트리밍과 SNS 같은 기술들이 문화를 뒤엎기 시작했고 프레스-레이놀즈는 온라인에서 계속해서 흥미로운 별난 것들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이 예술적 진화를 너무 좁게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혁신은 일어나고 있었다. 단지 그가 찾던 종류가 아니었을 뿐이다. "저는 그 책에서 소리에 매우, 매우 집착했었죠." 그는 내게 말했다. 그는 이제 음악이 소리 이상의 것이라고 믿는다. 음악—그리고 문화 전반—은 이미지, 아이디어, 전달 방식 등 훨씬 많은 것들의 "혼란스러운 혼합체"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2020년대의 문화는 충분히 역동적이다. 20세기의 위대한 매체들—아트팝 앨범, 장편 영화, 갤러리 쇼, 문학 소설—은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즉각성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형태들—짧은 형식의 비디오, 수다스러운 팟캐스트, 비디오 게임, 밈과의 경쟁 때문이다. 오래된 매체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형태들도 수많은 범작을 양산한다.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탁월한 작품도 불러일으킨다. 디테일과 감정으로 반짝이는 핑크팬서레스PinkPantheress의 1분 짜리 노래들처럼. 인터넷 속어로 선정적인 단편 소설을 엮어내는 아너 레비Honor Levy의 글처럼. "에세이 문화라기보다는 아포리즘 문화에 가깝지 않나요?" 레이놀즈가 말했다. "단 몇 문장으로도 꽤 영리하고 심오한 것들을 말할 수 있어요."
그러한 감수성은 인터넷의 개미굴 속에서 등장했지만 주류로 스며들고 있으며, 최상의 경우에는 그것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프레스-레이놀즈가 내게 "최대 자극"라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명했을 때, 나는 지오이아가 사용했던 용어인 "새로운 맥시멀리즘"을 떠올렸다. 지오이아의 분석에 따르면, 그의 생애의 위대한 인물들—브라이언 윌슨, 스티븐 손드하임, 조니 미첼—은 거대한 야망을 팝 교향곡, 무대 장관, 또는 감정적으로 밀도 높은 이야기 노래로 번역한 맥시멀리스트들이었다. 2020년대의 문화적 승리들은 그 모델에 부합한다. 관객들은 여전히 곱씹을 수 있는 스토리텔링을 원한다. 단지 우리가 현재 정보를 소비하는 가속화된 방식에 맞춰진 형태로 그걸 원할 뿐이다. 예술가들은 현대의 주의 지속 시간attention span을 길들이고, 현명한 사회적 논평을 제공하며, 고립의 시대에 연결감을 조성하기 위해 템포, 강도, 규모를 가지고 놀고 있다.
2023년 여름을 생각해보라. 그때 '바비'와 '오펜하이머'는 팬데믹이 불가능하게 만든 것처럼 보였던 일, 즉 슈퍼히어로 속편이 아닌 영화로 극장을 매진시키는 것을 모두 달성했다. 이것들은 할리우드의 지적 파산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미화된 장난감 광고와 또 다른 오스카를 노리는 전기 영화를 대표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시각적 리듬, 감정적 리듬, 서사적 리듬이라는 대담한 리듬 사용 덕분에 크게 성공했다. 하이퍼팝 같은 환희와 함께, '바비'는 뮤지컬, 슬랩스틱 코미디, 멜로드라마 사이를 오갔다. 끊임없는 자극 추구는 관객들을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영화는 젠더, 소비주의, 심지어 삶의 의미에 대한 무거운 아이디어들을 경쾌하게 전달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에 관한 '오펜하이머'는 더 조용히 급진적이었다.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틱톡 길이의 비네트 같은 장면들을 많이 몽타주하여 복잡한 이야기를 전달했다. 여기 벌새의 맥박처럼 빠르면서도 세련되고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진지하고 위풍당당한 작품상 수상작이 있었다.
문화 전반에 걸쳐 정체성—키식의 골칫거리—은 여전히 중심적이지만, 그 역할은 변하고 있을지 모른다. 미래 지향적이고 맥시멀리스트적인 2020년대 예술은 사람들을 부족tribe으로 분류하기보다는 이제 익숙한 이름표들을 해체하는 데 더 중점을 둔다. 차원을 넘나드는 중국계 미국인 가족에 관한 즐겁고 혼란스러운 2022년 액션 코미디 히트작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공상 과학 개념을 사용하여 "이민자"라는 범주를 복잡하게 만들고, 우리 중 누구라도 백만 가지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음을 시청자들에게 상기시켰다. 한편 비욘세는 흑인 음악에 대한 대중적인 아이디어를 확장하려는 시도를 통해 자신의 경력 중 가장 대담한 음악을 만들고 있다—이는 대단한 일이다. 먼저 힙합, 아프로비츠, 하우스 음악을 연결하는 비트 콜라주인 2022년 앨범 'Renaissance'를, 그리고 2024년에는 컨트리와 록으로의 변화무쌍한 여정인 'Cowboy Carter'를 발표했다. 관객들이 도덕주의적 메시지에 무감각해졌다면, 그들은 형식적 실험을 사용하여 혼란스러운 진실을 포착하는 작품들에 열광하는 듯 보인다.

비욘세. /사진=AP/뉴시스
브룩스가 우려하는 기술로 인한 고립은 또한 인본주의에 기반한 반대 운동을 이끌고 있다. 고백적인 송라이팅은 채플 론, 올리비아 로드리고, SZA와 같은 예술가들의 물결 덕분에 번성하고 있는데 이들의 솔직한 가사는 청취자와 예술가 사이에 강렬한 친밀감을 조성한다. 이 아티스트들은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팝'이라는 아이디어를 구성한다. 그것은 재치 있고, 구체적이며, 취약하다.
이 부류의 선두 주자는 물론 테일러 스위프트로, 그는 미래 지향적인 스토리텔링 형식을 개척해왔다. 모든 구절과 모든 공개 발언은 복잡한 "설정lore"의 거미줄로 연결되어 팬들을 수수께끼 해결과 재해석을 위해 모이게 한다. 전형적인 스위프트 팬과는 거리가 먼 지오이아는 기록을 경신한 그의 에라스 투어에 관한 콘서트 영화를 세 번이나 봤다고 내게 말했다. "지난해 가장 큰 음악적 행사가 테일러 스위프트가 투어에 나서서 실제 사람들을 위해 콘서트에서 실제 노래를 연주한 것이라는 사실에 어느 정도 위안을 받아요." 지오이아가 말했다. AI는 스위프트의 목소리를 모방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처럼 사회적 유대를 형성할 수는 없다.
맥시멀리스트 물결은 자연스럽게 자원이 풍부한 쪽을 선호하며, 스트리밍 경제가 개혁되거나 전복되기 전까지는 실제 르네상스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디 아티스트들은 여전히 그 세계가 뮤직 비디오, 틱톡 및 기타 온라인 채널로 흘러나오는 환상적인 콘셉트 앨범을 발표하고 있으며(막달레나 베이Magdalena Bay나 언더스코어스underscores를 확인해보라), 인디 영화 제작자들은 타협하지 않는 비전에 대한 관객을 찾고 있다('더 브루탈리스트'와 '아노라' 사이의 최근 오스카 경쟁을 보라). 겉보기에 뇌가 썩은 것 같은 콘텐츠조차도 창의적인 수단을 통해 큰 아이디어를 유지할 수 있다. 사이코닉Psyiconic과 같은 인터넷 코미디언들은 의상과 시각 필터를 사용하여 SNS 피드에 나타나는 기괴한 캐릭터들을 만들어내고, 짧고 소비하기 쉬운 순간들로부터 장편 풍자를 창조한다.
2020년대 문화의 이러한 하이라이트에 몰입하여 즐길 때, 나는 감사함을 느낀다. 이 작품들 대부분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없었거나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쇠퇴론자들을 괴롭히는 공포로부터 면역되어 있다는 건 아니다. 그들은 실제로 문화보다 더 깊은 힘, 즉 기술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해답을 요구하는 기술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영화, TV, 음악의 상태에 대해 매우 불만족스러워한다는 것을 발견한 동일한 유고브 설문조사는 또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지금이 최악의 경제, 가장 비도덕적인 사회, 가장 덜 긴밀한 공동체, 그리고 가장 심한 정치적 분열을 겪고 있는 10년이라고 느낀다는 것을 발견했다.
문화는 단지 우리 사회를 규정하는 구조와 세력의 지도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러한 것들 위에서, 사이에서, 그것에 반대하거나 협력하여 만드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더 호기심 있게 듣고, 더 자세히 보고, 과거의 황금시대를 바라볼 때 베푸는 것과 같은 관대함으로 현재를 대할 힘을 가지고 있다.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도 여전히 고동치는 창의성에 귀를 기울일 때, 가장 이야기되어야 할 이야기가 들린다. '계속 나아가라.'
스펜서 콘하버는 애틀랜틱 기자로 대중문화와 음악을 다루고 있다. 2011년 애틀랜틱에 합류하기 전에는 OC위클리, 패치의 편집자로 일했으며 스핀과 A.V.클럽에 프리랜서로 기고했다. 2019년에는 NLGJA(전미 LGBTQ 언론인 협회)로부터 칼럼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온 디바스: 페르소나, 쾌락, 권력On Divas: Persona, Pleasure, Power'가 있다.
미국 문화예술의 '황금기'는 정말 끝났을까요? 최근 미국에서는 자국의 문화가 쇠퇴하고 있다는 우려가 팽배합니다. 음악, 영화, TV, 예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창의성이 고갈되고 있다는 비관론이 확산되고 있죠. 실제로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2020년대를 지난 100년 중 문화적으로 가장 빈곤한 시대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런 비관론 중 하나인 윌리엄 데레저위츠의 '문화가 너무 따분해졌다'와 '예술은 어떻게 길을 잃었나'를 PADO가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애틀랜틱은 2025년 6월호에서 이러한 문화 '쇠퇴론'에 대해 깊이 파고듭니다. PADO에서 소개한 바 있는 테드 지오이아 같은 음악 평론가부터 미술 평론가, 음악가 등등을 만나 그들이 현대 미국 문화에 좌절하는 까닭을 살펴봅니다. 다른 비관론과는 달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방'과 '언더그라운드'의 지류에서 포착되는 창조성과 활력을 놓치지 않으려는 시선이 이 기사의 미덕입니다. 필자는 틱톡의 혼란스러운 에너지, 팬데믹이 가져온 파괴, AI의 위협 속에서도 인간의 창의성은 각 시대의 조건에 맞춰 새로운 방식으로 꽃피어 왔음을 상기시킵니다. 인터넷 하위문화(서브컬쳐)에서 탄생한 예측 불가능한 음악들, 기존의 경계를 허무는 영화적 시도들은 어쩌면 우리가 아직 인지하지 못하는 새로운 문화적 진화의 징후일지도 모릅니다.
미국 대중문화의 현 주소를 진단하는 이 기사는 한국 독자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문화 강국으로 부상한 한국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데 있어, 미국의 경험은 반면교사이자 동시에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술 발전과 전통적 예술성 사이에서, 대중성과 실험성 사이에서, 그리고 글로벌과 로컬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것 -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 문화 창작자들이 직면한 공통의 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