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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기회는 대학 밖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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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Darwin Vegher/Unsplash

2024.06.21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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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논의가 국내에서도 활발했는데 이제는 그냥 속수무책으로 손을 놓아버린 듯한 모습입니다. 지금까지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논의는 주로 대학을 중심으로 한 아카데미아에 국한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대학 바깥에서, 학계 사람들이 아닌 평범하지만 의욕이 있는 일반인들을 주축으로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열의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온라인에서 관련 논의가 늘고 있기도 하고 기존의 대학과는 다른 대안적인 시민 교육 기관들이 설립되고 있기도 합니다.


PADO는 최근 미국에서 관측되고 있는 이러한 경향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번째로 소개하는 글은 미국의 저명한 문화·음악평론가 테드 지오이아가 자신의 뉴스레터(구독자 14만 명으로 음악 관련 뉴스레터 중 가장 높은 인기를 자랑합니다)에 쓴 '인문학의 진짜 위기는 대학에서 일어나지 않는다'입니다. 지오이아는 본래 스탠퍼드와 옥스포드에서 영문학과 철학 등을 전공했는데 이후 스탠퍼드에서 MBA를 취득하고는 맥킨지, BCG에서 컨설턴트로 일하다가 음악평론가로 전향한 독특한 커리어의 인물로, 비즈니스 업계에서 일한 경험과 자신의 인문학적 소양을 결합시켜 결코 사변적으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인간 창의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을 씁니다. (그의 문장은 여느 평론가들과는 달리 매우 평이하고 이해하기 쉬워 영어 초심자에게도 권할 만합니다.) 지오이아는 인문학의 위기가 대학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사회생활을 해본 일반인들이야말로 인문학에 대한 열의를 대학생들보다 더 강하게 갖고 있으며 이미 사회 각 분야에서 이러한 '인문학 혁명'이 조금씩 관측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아직까지는 미국에서 주로 관측되는 상황이지만 머지않아 한국에서도 이러한 흐름을 볼 수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우리 주변에서도 많이 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입시 준비에 급급하다 이제 막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보다 오랫동안 사회생활을 하다가 자신들의 분업에 따른 좁은 전문성을 뛰어넘고 싶어 인문학 내지 인문교양을 다시 찾으려하는 중년들이 강의실에서 더욱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PADO는 이런 흐름의 마중물이 되고자 합니다. 다음에는 PADO에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문화가 너무 따분해졌다'의 필자 윌리엄 데레저위츠가 미국의 대안적 인문학 교육기관들을 다룬 글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1.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재즈를 가르칠 때 나는 대학생이 아닌 지역사회 사람들을 위한 야간 강좌를 개설했다. 대학은 지역사회와의 교류를 원했고 나는 그 임무의 선봉에 서게 됐다.


누구나 내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SAT 시험을 치를 필요도 없었고 고등학교 졸업장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유일한 요구 조건은 300달러를 지불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스탠퍼드 학비보다는 훨씬 저렴했다.


스탠퍼드는 지역사회 교류를 결정하고 나에게 이를 맡겼다.

등록 인원은 40명으로 제한됐다. 알고 보니 수강생 모두가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우리는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에 두 차례 만났다.



나는 큰 기대를 품지 않았다.


나는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젊은 두뇌들인 (혹은 그렇다고 하는) 스탠퍼드 학생들에게 같은 커리큘럼을 가르쳐 왔다. 나의 야간반 학생들은 그저 300달러를 낼 여력이 있던 일반인들이었다. 나는 '진짜' 학생들과 야간 학생들 간의 차이가 눈에 띌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차이가 있었다—하지만 내가 예상한 것과 다른 차이였다.


최초의 화요일 저녁 수업 후 나는 충격을 받았다. 교실에서 벌어진 토론은 탁월한 수준이었다. 일반인인 야간 학생들은 똑똑하고 열정적이었다. 학생들은 주제를 매우 진지하게 다루었는데 내가 가르치던 스탠퍼드 학부생들보다 더 진지했다. 이 지역사회 교류 강좌에는 성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수수께끼였다. 왜 성적을 받지 않는데도 이렇게 집중하고 참여도가 높을까?


그러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학생들이 공부한 내용을 그들 자신의 삶에 적용하기 시작했을 때 나타났다. 그들은 나보다 훨씬 풍부한(내가 상대적으로 그들보다 어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개인적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가 교실에서 논의하는 것과 그들의 삶 또는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서로 연결해서 생각할 줄 알았다.


이런 반응은 내가 예상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목요일의 두 번째 수업에서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나는 정말 즐거웠다. 나는 열정적으로 저녁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교육은 원래 이래야 한다. 하지만 왜 내가 낮에 가르치던 젊은 천재들의 교실이 아닌 여기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여기에 놀라운 점이 있다. 다른 지역사회 대상 강좌를 담당하던 스탠퍼드 교수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들 모두가 같은 경험을 했다는 것이었다.


성인들이 대학생들보다 더 인상적이었다.


내가 미적분학이나 컴퓨터 과학 또는 공학을 가르쳤다면 상황이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술과 인문학과 관련된 모든 것은 성숙한 정신과 어느 정도의 사회 경험이 필요했고, 그런 것이 있어야 교육이 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2.

나는 사람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한탄할 때마다 내가 가르쳤던 야간학교 학생들을 생각한다.


인문학의 위기는 인기 있는 주제다.


이런 기사들은 항상 위기가 대학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대학 캠퍼스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인문학의 미래에 대해 비관론자들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조차도 동일한 가정을 공유한다. 인문학을 변호하는 이들도 늘 교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적한다.


나도 한때는 비슷한 생각을 했다. 더는 아니다.


오늘날의 상황은 사람들이 과도하게 합리주의와 알고리즘적 사고를 추구하는 데 반발했던 19세기의 위기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당시는 경제적 최적화를 위한 열망이 사람들을 공장과 '검은 악마의 공장'으로 몰아넣던 산업혁명의 시대였다.


반란은 격렬했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사회 전체에서 일어났다.


이는 이성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창의성, 예술, 음악, 시를 찬양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중히 여기는 낭만주의의 부상을 의미했다.


그 후 100년 동안 창의성은 합리성보다 더 존경받았다. 예술가는 은행가보다 더 존경받았다. 문화는 상업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는 단지 시인과 음악가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아동노동과 다른 착취적 관행을 제한하는 법률도 통과됐다. (오늘날 착취적 IT기술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고 있는 건 어린이들이지만 아직 이를 규제하는 법은 없다.) 노동운동과 다른 인문학적 프로젝트들도 힘을 얻었다.


여느 때와는 달리 사람이 먼저인 시대였다.


이성의 시대를 이끌었던 전문가와 산업가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바로 인문학 부흥의 실제 원인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라는 대로 순순히 따르리라 생각했다. 인간을 끝없이 조작하고 통제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수익이 최대화되기만 하면 얼마나 큰 고통이 가해지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은 저항했다. 그들은 반문화counterculture를 번성시켰고 결국 그 반문화는 주류가 됐다.


이 중에서 대학에서 일어난 것은 거의 없다. 위기와 해결책 모두가 사회 전반에서 일어났다.


학자들은 아마도 가장 늦게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들은 보통 그렇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비슷한 것이 필요하다.

3.

사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그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과거와 마찬가지도 이번에도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IT기술의 인간 조작과 그 과도함에 대한 반발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IT기술에 대한 좌절감은 깊이 뿌리박혀 있으며 IT 업계의 집단사고 바깥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기술만능주의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는 걸 느끼고 있다.


  • '이 기기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걱정돼요.'
  • 'IT기술은 나를 돕기 위해 있는 것 아니었어요? 이젠 내가 IT기술을 모시고 있는 것 같아요.'
  • '그들은 내게 필요한 기능을 없애고 그들에게만 이익이 되는 새로운 기능을 받아들이게 강요해요.'
  • '내 기기를 치워뒀을 때 가장 행복해요.'
  • 'AI 봇이 아닌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어요.'
  • '날 좀 내버려 둬요. 가상현실 헤드셋 안에서 살고 싶지 않다구요.'
  • '모든 디지털이 점점 별로예요.'
  • '회사에 마지막으로 도입된 IT기술은 내 일을 최악으로 만들었어요. 아마 다음에 도입될 기술은 내 일자리를 아예 없애버리겠죠."


몇 년 전만 해도 상황은 이렇지 않았다. 심지어 작년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사진=Photo by Luca Bravo/Unsplash

/사진=Photo by Luca Bravo/Unsplash


우리는 모두 새로운 IT기술로 행복한 경험을 했었다. 컴퓨터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었고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렇지 않게 됐다. 어쨌든 전반적으로는 더 나아지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결함이나 문제점을 못본 척 하기란 쉬웠다.


하지만 알고리즘과 AI 기반 시스템의 급속한 가속화—실리콘 밸리의 최신 유행—는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기술만능주의의 목표는 이제 명백하다. 그들이 뭐라 말하는지 자세히 들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현재 테크 업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단어가 가속acceleration, 파괴destruction, 와해disruption인 이유가 있다.


그들이 파괴하고 와해시키려는 게 무엇인지 아는가? 여기 힌트가 있다—거울을 보라.


파괴나 와해 같은 단어는 인문학적 전통의 용어가 아니다. 그 정반대다. 최근까지 이런 단어는 무기 제조업체에서나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스마트폰 앱 속에 숨은 철학을 설명하는 데 이런 단어가 동원된다.


우리에겐 이에 대항할 철학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이미 그런 게 있다.


바로 인문학이다.

4.

그래서 나는 인문학의 위기가 대학 교실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는 몽상가들을 보면 참을 수 없다.


인문학을 좀 더 '엔터테인먼트'로 만든다거나 현실에 좀 더 유용하게 만든다거나 하는 프로젝트들에 대해 학생들은 이미 자신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왔다. 그들은 그런 말에 속지 않는다.


인문학 관련 전공의 수가 줄어드는 추세가 인문학을 사랑하는 (나같은) 사람들에게 걱정거리라는 걸 부인하진 않는다.


그러나 나는 18살 학생에게 전공으로 영문학을 선택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인문학 성공의 기준이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는 외려 인문학 전체를 조롱하는 일이다. 젊은이들이 언젠가는 인문학이 공부할 가치가 있다고 결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인문학적 사고가 우리 사회에 스며들기 시작한 후의 일이 될 것이다.


아카데미아 바깥에서 인문학이 번창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인가? 이것이 가능할까 의심스러운가?


사실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나에게는 내부자 정보도 있다. 내 형 데이나1는 수십 년 동안 지역사회에 인문학을 전파하는 일을 해왔다. 그가 캘리포니아 계관시인이었을 때 그는 캘리포니아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캘리포니아에 있는 58개 카운티 전부의 현장 프로젝트에 참석했다.


그전까지는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나는 늘 그렇게 활동하곤 했다.


그는 내가 아는 누구보다도 대학 밖에서의 인문학에 대해 많은 걸 직접 경험했다. 도서관, 지역 극장, 커뮤니티 센터, 워크숍, 교회, 독서 그룹, 기업 및 기타 현실 세계 환경에서 사람들과 직접 대면했다.


그는 사람들이 알고리즘과 기기가 제공하지 못하는 지혜와 영양을 갈망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문학은 이를 제공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인문학의 위기이며, 이제 끓는점에 도달했다.


나는 데이나만큼 많은 곳을 돌아다니진 않지만 사람들과 온라인에서 교류하면서 똑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사람들은 IT기술이 제공할 수 없는 것을 원한다. 테크 업계가 제공하는 기기가 인간을 조종하기 위해 제 구실을 못할 정도로 엉망이 될수록 인문학적 대안에 대한 갈망은 높아질 뿐이다.


결국 대학 관리자들도 이를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이 다음 부분은 충격적이니 자리에 앉아서 읽길 권한다!—학생들(그리고 부모들)은 변화가 마침내 올 때 이를 받아들일 것이다.


100년 전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들이 자녀들에게 더 나은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아끼고 저축했던 것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리버럴아츠liberal arts'는 교육에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물론 대학에서도 기술적인 걸 배울 수 있지만 인문학적 학습이 제공하는 엄숙함과 더 넓은 관점 없이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진정으로 계발할 수 없었다(인문학의 일부로 가르쳤던 생각하기, 쓰기, 의사소통 기술도 마찬가지다).


그런 인문학적 학습에 대한 존중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인문학이 세상에서 그 저력과 가치를 입증한 후에만 돌아올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5.

알고리즘과 금융 중심적 사고가 날뛰는 세계에서 우리는 이에 맞서 싸울 무언가가 필요하다. 우리는 교실이 아닌, 세계 전체와 강력한 조직 내에서 뭔가 다른 것을 만들 수 있는 게 필요하다.


여기 인문학에서 힘과 지속성을 끌어내는 여덟 가지 필수사항이 있다.


  • 우리는 '진보progress'가 디지털 기기에서만 오는 것처럼 여기는 협소한 정의가 아닌 보다 넓은 정의가 필요하다.
  • 우리에겐 무자비한 재정적 지표와 '이달의 유행' 내러티브에 오염되지 않은 가치와 지혜가 절실하다.
  • 우리에겐 기업 봇의 가속화된 확장성보다 신체적 및 정신적 건강이 우선해야 하는 인간에 대한 존경심이 필요하다.
  • 우리는 인간 위기의 증가—정신질환과 우울증의 사례, 자살 경향 등이 무서울 정도로 늘고 있다—에 대해, 이러한 문제를 명백히 악화시키는 IT기술을 강화하는 대신 인간적 대응으로 이를 해결해야 한다.
  • 우리는 이토록 망가진 IT기술에 특히 취약한 젊은이들에게 노예처럼 포획된 IT기술 소비자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잠재력을 키워줄 가치와 실천의 토대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 우리는 지난 수천 년간 축적된 지혜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이는 오직 인문학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 우리는 모든 기획과 모든 결정을 수치의 최적화로 환원시키려는 측정법에 대항해 핵심적인 인간 가치를 보존하고 기념할 필요가 있다.
  • 우리는 모든 인간 활동이 현금흐름을 극대화하고 기술만능주의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을 지원하도록 압박하는 사모펀드식 사고방식이 아닌, 공감하는 인문학적 세계관을 전파할 필요가 있다.


오직 인문학만이 이 필수적인 것들을 가져올 수 있다. 나를 조롱해도 좋다. 하지만 이것이 생사가 걸린 문제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나는 과장법으로 하는 게 아니다.

6.

그래서 나는 지역사회 교류 강좌에서 가르쳤던 옛 학생들을 계속 생각한다.


그들은 이미 인생을 꽤 살아봤기 때문에 인문학적 사고를 잘 받아들였다. 그들은 스스로 경각심을 가졌다. 그들은 모든 것을 숫자로 환원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이 중요한지 알았다.


그런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그들의 수는 훨씬 더 많아졌다.


나는 매일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런 사람들은 인문학에서 인간적 요소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 굳이 셰익스피어를 읽을 필요가 없다. 그들은 이미 바로 자기 주변에서 인간적 요소들이 위기에 처했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인문학적 사고를 잘 받아들이는 건 바로 그 때문이지 어떤 문화나 세련미를 원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생존에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것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학습에 대한 동기부여로 생존욕구만한 게 없다. 당신의 존재가 위협받을 때 당신은 새로운 기술을 배운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수업을 찾아 들을 수도 있다. 독서 그룹에 가입할 수도 있다. 다른 전통적인 형태의 인문학 교육을 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인문학적 가치, 소프트 스킬, 그리고 소득명세서의 숫자보다 더 큰 우선순위에 기반한 광범위한 대화를 촉진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이 대화에 참여하기 위해 두꺼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읽으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인문학적 재각성reawakening이며 어느 곳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 이미 서브스택을 비롯한 대안 플랫폼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미국 전역의 커뮤니티에서도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다. 최근 들어 많은 수의 인문학 학교와 고전에 기반한 학교들이 출범하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인문학적 재각성'의 대부분은 교육계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는 바로 이 풀뿌리 운동에서 끝날 것이다. 적절한 엔딩이라 할 수 있다. 왜냐면 바로 그곳에서 인문학의 위기기 사직됐기 때문이다—사회 전체, 직장에서, 그리고 심지어 온라인에서도. 사실 나는 인문학적 반응이 웹에서 특히 열정적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예감이 있다.


조만간 아카데미아에서도 이를 알아차리고 우리의 노력에 동참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건 그들의 선택이다. 하지만 열차는 그들이 탑승하지 않더라도 출발한다.


대학은 나중에라도 따라올 수 있다. 마침내 그들이 우릴 따라올 때쯤이면, 우리가 그들에게 가르쳐 줄 것이 한두 가지쯤 있을 것이다.



테드 지오이아는 미국의 문화평론가이자 음악사가, 음악평론가, 재즈 피아니스트이며 저서로 '음악의 시대', '재즈를 듣다' 등이 있다.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옥스포드대학교에서 철학정치경제(PPE)를 전공하고 스탠퍼드대학교에서 MBA를 취득한 이후 보스턴컨설팅그룹, 맥킨지에서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기업공개(IPO) 등을 컨설팅했다. 이후 컨설팅 업계를 떠나 음악평론가가 된 이색적인 커리어를 갖고 있다. 저명한 문화·음악 관련 뉴스레터 'Honest Broker'를 발행하고 있으며 위 글은 지오이아가 뉴스레터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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