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테크 에세이

신화와 자본: 톨킨이 실리콘밸리 자본가들에게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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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R 톨킨(오른쪽)과 그의 소설 '반지의 제왕' 표지. /사진=AP/뉴시스

2025.08.08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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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소설 애호가라면 요즘 실리콘밸리에서 '핫한' 기업들을 살펴보면서 반가움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판타지 문학 장르의 효시라는 평가를 받는 JRR 톨킨의 작품에서 따온 기업 이름들이 많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투자한 팔란티어부터 방산 업계의 다크호스로 주목받는 안두릴까지 다양합니다.


왜 실리콘밸리의 테크 자본가들이 톨킨에 열광하고 회사명에 그의 판타지 세계에 나오는 이름들을 사용하는 걸까요? 미국 메릴랜드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리 콘스탄티누는 종교·정치·문화의 접점을 다루는 평론지 아크매거진 5월 1일자 에세이에서우파 정치세력이나 테크 자본가들이 톨킨의 세계관에서 자신들이 꿈꾸는 반민주적인 세계를 찾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물론 이 에세이는 단편적이지는 않으며, 판타지가 가지는 변혁적 요소도 짧게 지적합니다. '반지의 제왕'을 중심에 놓고 문화현상, 정치경제 현상을 다면적으로 살펴본다는 점에서 매우 밀도 높은 평론이라 하겠습니다.


필자는 무엇보다 이들의 행보와 관련해 기술 권력이 민주적 통제를 벗어나는 방식에 대해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현상을 '기술 봉건주의'라고 부르며, 소수의 기술 대기업들이 데이터를 독점하고 국경을 초월한 '디지털 영지'를 다스리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는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플랫폼, 온라인에서 공유하는 개인 정보, 그리고 심지어 국가의 안보가 소수 엘리트의 손에 어떻게 집중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섬뜩한 미래상입니다.


톨킨을 둘러싼 논쟁은 단순한 문학 비평에 그치지 않습니다. 문화 콘텐츠가 어떻게 현실 정치와 경제를 움직이는 이념적 도구가 되는지, 그리고 미국의 테크 엘리트들이 꿈꾸는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입니다. 톨킨의 사례는 '문화전쟁'에 대한 가장 고차원적인 논의라 할 수 있겠습니다.



현 이탈리아 총리이자 극우 정당 '이탈리아 형제들'의 대표인 조르자 멜로니는 1993년 '캠프 호빗Camp Hobbit'을 부활시키는 행사에 참석했다. 최초의 캠프 호빗은 1977년 이탈리아 신파시스트 정당인 '이탈리아 사회운동Movimento Sociale Italiano'(MSI)의 청년 조직이 주최했다. '이탈리아 극우의 우드스톡'이라 불린 이 야외 축제들은 젊은 세대를 우파 정치로 끌어들이기 위해 JRR 톨킨의 작품 속 이미지들을 활용했다. 멜로니가 이 부활 행사에 참석했을 때 그녀는 열여섯 살이었고, MSI 산하 청년 조직 '청년 전선Fronte della Gioventù'의 활동가였다. 호빗 '93에서 이 나이 어린 투사는 급진 성향의 포크 밴드 '반지 원정대La Compagnia dell'Anello'와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톨킨의 세계는 멜로니의 인격과 정치적 정체성 형성에 기초가 되었다. 그녀는 한때 '반지의 제왕'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인 샘와이즈 갬지로 분장하기도 했다. 샘와이즈는 간달프나 아라곤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더 큰 대의에 겸허히 헌신하는 인물이다. 멜로니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그는 그저 평범한 호빗이고 정원사에 불과했지만, 그가 없었다면 프로도는 결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톨킨이 말했듯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작은 손들이다.'"


그녀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반지의 제왕'이 판타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반지의 제왕'은 정치적 성향을 막론하고 폭넓은 팬층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톨킨 연구자 로버트 T 탤리 주니어가 지적하듯이 지금 "국제적으로 백인우월주의, 인종차별, 반이민, 신나치주의와 여타 극우 이데올로기를 공공연하게 수용하는 방대한 규모의 톨킨 광신도 집단이 존재하며, 그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는 듯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반지의 제왕'을 일종의 성서처럼 숭배한다." 탤리 교수는 이들이 톨킨의 세계에서 "변화를 거부하는 질서"를 찾으려 하지만, 이는 톨킨을 심각하게 오독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많은 보수 성향의 톨킨 팬들은 현대성의 여러 측면을 과거로 되돌리기를 원한다. 하지만 여러 평론가들이 지적했듯, 실리콘밸리의 마가(MAGA) 진영과 연계된 기술반동주의techno-reactionary 기업가 집단은 더 거대한 야심을 품고 있다. 이들은 톨킨의 신화체계 '레젠다리움1legendarium'에서 영감을 얻어 기술과 정치의 관계를 새롭게 구상하며, 권력을 찬미하는 동시에 민주적 책임성을 회피하려 한다.


멜로니처럼 이들 또한 '반지의 제왕'을 단순한 판타지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동력은 단지 노스탤지어가 아니다. 실리콘밸리의 우파는 톨킨의 세계관을 단순히 차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도덕적 비전을 새로운 시대의 무기로 단련한다. 이들은 새로운 형태의 민영화된 국가 안보 체제를 구상한다. 그것은 실리콘밸리의 과두적 권력, 벤처캐피털과 사모펀드의 막대한 자본력, 그리고 미군의 막강한한 전력을 결합한 체제로, 톨킨적 색채를 지닌 군산복합체이다.




이 어둠의 원정대를 이끄는 인물은 피터 틸이다.


실리콘밸리 인근에서 성장한 틸은 과학소설과 판타지 장르, 특히 톨킨에 심취한 열성 팬이었다. 언론인 맥스 채프킨에 따르면, 틸은 '반지의 제왕' 3부작 전체를 외웠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틸은 자신이 창업한 여러 기업에 톨킨의 신화에서 따온 이름을 붙였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그가 공동창업한 소프트웨어 및 데이터 분석 기업 '팔란티어테크놀로지스Palantir Technologies'로, 이 회사명은 톨킨 세계의 '팔란티리palantíri', 즉 멀리서 일어나는 사건을 들여다보고 텔레파시로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의 수정 구슬 이름이다.


하지만 팔란티리는 오용하기 쉽고, 사용자 자신의 약점을 증폭시키는 것으로 알려진 매우 위험한 도구다. 어둠의 군주 사우론은 팔란티리를 이용해 사루만과 곤도르의 섭정 데네소르를 조종한다. 기업 팔란티어는 '샤이어를 구하라Save the Shire'라는 모토를 내걸었다. 그리고 미 이민 세관 단속국(ICE), 미 육군, 국방부, CIA 등 정부 기관과 계약을 체결했다. 팔란티어의 오만함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이제 거의 일상처럼 되었다. 한 활동가의 슬로건은 이렇게 꼬집는다. "사우론과 손잡고서 샤이어를 구할 수는 없다."


틸의 벤처투자사 '발라 벤처스Valar Ventures'의 명칭은 톨킨의 우주에서 창조적 능력을 가진 신적 존재 '발라'에서 가져왔다. '미스릴 캐피털 매니지먼트Mithril Capital Management'는 희귀하고 귀한 금속의 이름을, '리븐델 원Rivendell One LLC'은 엘론드의 보금자리 이름을, 그리고 '렘바스Lembas LLC'는 엘프의 양식인 빵의 이름을 따라 붙였다. 이러한 작명 방식은 실리콘밸리의 파괴적 혁신 기술을 앞세운 엘리트들이 스스로를 톨킨의 엘프 또는 발라와 동일시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틸은 유한한 인간의 세계와 거리를 둔 채, 막강한―그리고 배신의 위험을 내포한―기술을 창조하는 주체로 스스로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팔머 러키Palmer Luckey가 있다. 그는 이름이며 분위기가 마치 토머스 핀천 소설에 등장하는 조연급 악당을 연상시키는 기업가이다. 매거진 '태블릿'의 심층 프로필 기사에서 언론인 제러미 스턴은 러키를 "복수를 꿈꾸는 반엘리트주의 미국 문화의 아이콘"으로 묘사한다. 러키에게 보내는 일종의 찬사다. 스턴은 러키를 하와이안 셔츠와 슬리퍼 차림을 즐기는 반항적인 혁신가로 그린다. 러키는 가상현실 기기 개발사 오큘러스 VR을 창립하여, 2014년 페이스북(현 메타)에 20억 달러에 매각했다. 그러나 그는 2017년, 반힐러리 클린턴 밈을 유포하던 친트럼프 성향의 단체 '님블 아메리카'에 1만 달러를 기부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페이스북 내부의 반발 여론이 커져 해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퇴사 후 러키는 안두릴 인더스트리즈Anduril Industries라는 방위산업 회사를 창립했는데, 사명社名은 아라곤의 검 '안두릴Andúril'에서 따왔다. 본래 '나르실Narsil'로 불렸다가 부러진 이 검은 '서방의 불꽃'이라는 뜻의 보검 안두릴로 다시 벼려졌고, 이실두르의 계승자로서 아라곤의 정통성을 상징하게 된다. 벤처캐피탈 회사 안드리센호로위츠Andreessen Horowitz와 피터 틸의 파운더스펀드Founders Fund가 초기 투자자로 참여했다.


안두릴의 공식 웹사이트에 실린 글은 자사의 미션을 "민주주의의 무기고를 재건하여, 미래를 안전하고 번영하며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라고 밝힌다. 안두릴은 미 세관국경보호청, 국토안보부, 미 공군 및 여러 연방 기관들과 계약을 체결했다. 러키는 톨킨으로부터 정통성있는 권위의 상징을 끌어와, 기술기업의 CEO인 자신을 엘프 영주가 아니라 '귀환한 왕'으로 비유하고 있는 셈이다.


'바르다 스페이스 인더스트리즈Varda Space Industries'는 더욱 대담한 구상을 품고 있다. 이 회사는 지구 궤도에 공장을 세워, 미세 중력 환경을 활용해 고순도의 의약품, 정밀 광섬유 등 지상에서 제조가 어려운 상품을 생산하는 꿈을 꾼다. 바르다 엘렌타리Varda Elentári는 '실마릴리온'에 등장하는 캐릭터로, 별들의 여왕이자 별들을 창조한 존재이다. 이 회사의 공동 창업자 중 한 명인 델리안 아스파루호프Delian Asparouhov는 X에 마가(MAGA) 모자를 쓴 사진을 올리며 이렇게 썼다. "안타깝게도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이 모자를 나치 문양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지만, 미국인의 절반에게 이것은 '희망'의 상징이다."


현 미국 부통령 또한 톨킨에 물든 인물이다. 2021년 팟캐스트 그라운디드Grounded에 출연한 JD 밴스는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톨킨을 꼽았다. "저는 반지의 제왕 덕후예요. 당시엔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제 보수적 세계관은 자라면서 톨킨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밴스는 피터 틸의 후원을 받은 정치적 제자였고, 멘토 틸의 지원으로 설립한 벤처 캐피털 펀드에 '나르야 캐피털Narya Capital'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엘프들이 만든 힘의 반지 세 개 중 하나인 불의 반지 '나르야'에서 따온 이름이다. 톨킨의 세계에서 엘프의 세 반지는 드워프의 일곱 반지, 인간의 아홉 반지와는 달리 사우론의 타락에 물들지 않는다. 나르야는 결국 회색의 간달프가 지니게 되는데, 그 힘은 타인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절망을 물리치게 한다.


밴스를 이 실리콘밸리 그룹 중 다른 사람들보다 비교적 주류 보수주의에 가까운 인물로 보는 시선도 있을 수 있다. 그는 전통적 가치의 회복, 출산 장려 정책, 그리고 미국 중서부 산업지대의 재건에 관심을 쏟는 인물이 아닌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탈산업화를 사소하게 보이게 만들 만큼 거대한 전환을 초래할 자동화와 인공지능의 가속화를 지지한다. 그는 파리에서 열린 '인공지능 행동 정상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AI의 미래는 안전에 대해 노심초사하는 것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나르야는 밴스에게 있어 절대 반지에 깃든 권능을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는 톨킨이 '반지의 제왕'을 통해 권력의 유혹을 경고하려 했다는 불편한 사실은 외면하고 있다. 이들 기술 엘리트들은 그런 경고에 귀 기울일 마음이 없는 것 같다. 톨킨은 도덕적이고 고결한 권력에 대한 성장기의 판타지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 판타지는 우리 나머지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 세계에서 점차 실현되고 있다. 놀랍게도 팔머 러키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를 인정하는 말을 했다.


"가끔은 내가 여덟 살 때 프로그래밍된 대로 살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유희왕이나 파워레인저 같은 걸 좋아하면서 자란 아이가 가상 현실을 만들고 폭력의 도구를 개발해 자신의 목표를 실현하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것 말고 다른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좋은 질문이다.




톨킨의 우익 팬들이 부상하면서, 실리콘밸리의 추종자들로부터 톨킨의 유산을 구해내려는 이들도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들은 톨킨 교수가 파시즘에 명백히 반대했고 반유대주의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톨킨은 보수적 호전주의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끌어다 쓰는 것을 거부했을 것이라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중간계가 단순한 도피적 판타지를 넘어 산업적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고 있다고 본다. 이들은 톨킨이 자신의 소설을 우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반대했다는 점도 지적한다. 톨킨은 1966년 개정판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어떤 숨은 의미나 '메시지'에 관해서 말하자면, 저자의 의도 안에 그런 것은 전혀 없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가 정치적 목적으로 전용되는 것을 거부했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방어논리는 자칫 편향된 변호로 들릴 수도 있다.


옥스퍼드의 교수였던 그는 기질적으로, 그리고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정치적으로도 보수주의자였다. 판타지 작가 마이클 무어콕Michael Moorcock은 1978년 평론 '서사시 곰돌이 푸Epic Pooh'와 다른 글에서 톨킨을 "암묵적인 파시스트crypto-fascist"라고 비판하며 이상화된 과거를 숭배하는 반동적 인물로 묘사했다. 무어콕은 이렇게 지적하기도 했다. "아동 도서는 어린 시절에 대한 비현실적 태도를 유지하려는 보수적 성인들에 의해 쓰일 때가 많다." 무어콕의 평이 지나치다고 볼 수도 있지만 톨킨이 신화적 역사에 대한 낭만적 동경을 바탕으로 자신의 서사를 구성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그는 과거를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은 인식하고 있었다. 톨킨은 "자신을 유치한 사춘기 소년으로 묘사하려는" 평론가들에게 이렇게 반박했다. "내가 창조한 것은 '상상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거처, '중간계Middle-earth'에서 펼쳐진 역사적 순간의 상상이다."


1892년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난 톨킨은 아버지를 여읜 뒤, 1896년 어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버밍엄의 킹 에드워드 스쿨과 옥스퍼드 대학교 엑시터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고전을 공부하다가 영어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1960년대 중반 교회 개혁에 깊이 실망했다. 그는 자국어로 진행되는 미사에 반감을 느꼈고, 라틴어 미사가 지닌 신비와 전통에 끝까지 헌신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톨킨은 영국군 통신 장교로 복무했으며, 1916년 6월 솜Somme 전선에 투입되었다. 통신 장교로서 그는 때로는 쏟아지는 포격 아래에서 부대와 상급 지휘부 간의 연락을 유지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솜 전투는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포탄은 대지를 산산이 날려버렸고, 숲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포성이 끊이지 않았고, 공기는 시신과 고인 물, 화약 냄새로 가득했다. 장대비가 내리쳐 사람과 말이 진흙 웅덩이에 빠져 죽었고, 참호는 붕괴되고 물에 잠겼다. 병사들은 오물 속에서 살았다. 141일간 60만 명이 넘는 연합군 병력이 전사하거나 부상 당했고, 그 가운데는 톨킨의 절친 로버트 길슨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해 11월, 톨킨은 이lice로 전염되는 세균성 질환인 참호열에 걸려 영국으로 후송되었다.


요양 기간 동안 톨킨은 수년 전 구상했던 자신만의 신화 세계로 다시 돌아가, '곤돌린의 몰락The Fall of Gondolin'이라는 중간계의 기초 서사를 집필했다. 솜 전투에서 겪은 참혹한 경험이 '반지의 제왕' 속 죽은 늪지대와 모르도르의 검은 문을 형상화하는 데 깊은 영향을 미쳤다. '왕의 귀환' 마지막 장면 '샤이어의 정화'에서 호빗들의 목가적 고향은 악당들과 샤키로 변장한 사루만의 엄청난 음모에 의해 유린된다.


톨킨의 반산업주의적이며 목가적인 세계관은 국가 권력에 대한 회의와 결합하게 된다. 1943년,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내 정치적 견해는 점점 더 아나키즘 (폭탄을 든 수염난 급진주의자가 아니라, 통제의 철폐를 뜻하는 철학적 의미의 아나키즘)이나 '비헌법적' 군주제로 기울고 있다." 그는 국가 권력을 불신했고, 소규모 자치 공동체를 이상적으로 여겼다. 샤이어에서 시장은 상징적 존재일 뿐이고, 보안관도 크게 할 일이 없다. 경비원들이 경계 지역을 순찰하며, 외부 침입자와 말썽꾼들을 감시하는 정도이다.


톨킨의 오크들에 대한 묘사는 인종주의적 고정관념을 답습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한 편지에서 그는 오크들을 "왜소하고 땅딸막하며, 편평한 코와 누런 피부, 큰 입과 치켜 올라간 눈을 가진, (유럽인의 눈에) 가장 덜 매력적인 몽골계 외모의 타락하고 혐오스러운 버전"이라 묘사했다. 학자 헬렌 영Helen Young은 톨킨이 현대 판타지의 '백인성Whiteness의 습속'을 정립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탤리의 지적처럼, 중간계의 오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존재였고, 톨킨에게 있어 "오크성orcishness"은 다양한 인종과 민족에 속한 개인들의 부정적 특성에 대한 은유로 기능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톨킨의 세계 속 호빗들은 외부인에 대해 배타적인 경계심을 보인다.


톨킨이 이상적으로 그린 무국가적 사회는 "비입헌적" 형태이긴 하지만 역설적으로 왕의 권력이 등장할 여지를 품고 있다. 그는 이렇게 쓴다. "나에게 왕을 달라. 그의 최대 관심이 우표나 철도, 경마에 있어도 괜찮다. 그리고 그가 재상(혹은 뭐라 부르든 간에)의 바지 맵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칠 수 있는 권한은 지녔으면 좋겠다." 아라곤이 우표 수집가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통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라곤의 권위는 곤도르 왕좌에 대한 그의 정당한 계승권뿐만 아니라 백성의 자발적인 충성에도 근거한다. 이것이 바로 선거 없는 민주주의다. 이 세계에서는 위대한 인물이 충성을 획득하고, 충성이 곧 정통성을 부여한다. 샘와이즈가 프로도를 충직하게 섬기듯, 샤이어 역시 제4 시대의 여명에 '재통일 왕국Reunited Kingdom'의 보호를 받아들이게 된다. 엘레사르 왕으로 군림한 아라곤은 샤이어를 '자유의 땅'으로 선포하고 완전한 자율과 자치를 허용한다. 절묘한 타협이다.


이렇듯 톨킨은 한편으로는 점잖은 자유지상주의적 포퓰리스트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비입헌적 군주제'의 지지자라는 역설적 조합을 이루고 있었다. 어쩌면 일부 호빗들, 특히 소심하고 탐욕스럽고 신분 상승에 집착하는 색빌-배긴스Sackville-Baggins 가문이라면 열렬히 마가 연합에 합류했을지도 모른다.




톨킨을 옹호하는 좌파 독자들과 연구자들의 목표는 단순히 작가를 왜곡된 해석으로부터 보호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그들은 톨킨이 실제로는 내면에 진보적인 정치관을 품고 있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반지의 제왕'과 그것이 개척한 판타지 전통이 오늘날의 정치 지형에 관한 진실을 성찰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진정한 쟁점은 판타지의 정치성에 있다.


물론 우리는 어슐러 르 귄Ursula K Le Guin, 새뮤얼 딜레이니Samuel R Delany, 차이나 미에빌China Miéville, NK 제미신NK Jemisin과 같은 진보 성향의 판타지 작가들의 작품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조언처럼, 보수적인 텍스트의 결을 거슬러 읽는 것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변증법적 독서를 통해 우리는 가장 명백히 보수적인 문학에서도 현시대의 한계를 초월하는 유토피아적 희망이 암호화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제임슨은 톨킨의 문학적 가치를 일축했지만, 그의 제자 로버트 탤리는 '반지의 제왕'을 예리한 변증법적 시각으로 분석한다.


탤리는 이렇게 쓴다. "판타지는 본질적으로 타자성alterity의 문학이며, 세계를 다르게 사고할 수 있도록 상상력을 고양시키는 수단이다." 자본주의는 상상력을 제한한다. 자유시장이라는 개념은 우리의 가장 대담한 꿈들을 길들이고 훈육한다. 희소성, 기회비용, 파레토 효율, 수익 체감의 법칙과 같은 개념들은 개인적·집단적 행위능력의 한계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사회의 표어들이다. 그러나 톨킨의 세계는 변화된, 어쩌면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 준다.


결국 판타지는 정치적이며, 경직된 현실을 들여다보고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강력한 사유의 도구가 될 수 있다. 톨킨을 이처럼 변증법적으로 읽는 다른 학자들도 있다. 이샤이 란다Ishay Landa는 '반지의 제왕'에서 사유재산에 대한 긍정과 비판 사이의 긴장과 분열을 본다. 그는 '절대 반지'가 자본의 모순을 체현한다고 주장한다. 게리 캐너번Gerry Canavan은 톨킨이 '반지의 제왕'을 하나의 역사 문서를 번역한 이야기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작품을 단순한 영웅서사로 읽는 것은 작품의 자기 성찰성을 놓치는 일이다. 소설이 기록하는 사건들은 이야기 세계 안에서조차 중재되고 논쟁의 대상이 된다. 그 모든 긴 부록들이 진정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톨킨을 숭배하는 우파 독자들의 문제는 엄밀히 말해 그들이 톨킨의 텍스트를 오독하는 데에 있지 않다. 실제로 우파적 해석을 뒷받침할 수 있는 텍스트상의 근거는 풍부하다. 문제는 이들이 텍스트를 선별적으로 채굴하고, 그 안에 담긴 변증법적 긴장과 유토피아적 꿈들을 외면한다는 점이다. 소설은 그것이 말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나는 톨킨에 대한 좌파 해석자들의 견해에 대체로 동의한다.


톨킨은 자본주의 그리고 보다 넓게는 정치에 대해 우리에게 깊은 통찰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판타지의 유토피아적 상상력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 반자본주의자들만이 한계를 벗어나려는 꿈을 꾸는 것은 아니다. 기술반동주의자들 또한 자유를 꿈꾼다. 민주주의, 규제, 관료제의 족쇄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그들은 해상 도시seasteads, 특별 자치도시charter city, 그리고 뉴질랜드의 벙커를 구상한다. 톨킨의 세계는 이들의 어두운 꿈을 형상화하고, 정당화하는 데 일조한다.


신반동주의 작가 커티스 야빈은 톨킨의 상상력을 자신의 군주제 이론에 끌어들인 대표적 인물이다. 야빈은 자신의 서브스택2 뉴스레터 '그레이 미러Gray Mirror'에서 엘리트를 엘프로, 평범한 미국 시민들을 호빗으로 비유한다. 그는 자신을 지배 질서에 맞서 호빗들과 냉소적으로 연대하는 "어둠의 엘프"로 자처한다. 그리고 "톨킨에 물든" 어둠의 엘프에게는 호빗의 도움 없이 "문화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목표라고 쓴다. 그도 그럴 것이, 자부심 강한 어둠의 엘프가 "호빗 냄새를 풍기고" 싶어 하겠는가?


야빈은 피터 틸과 JD 밴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일론 머스크의 '정부효율성부'(DOGE) 구상에도 영감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정부효율성부의 목표는 표면적으로 행정 낭비를 줄이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행정부 내부에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는 새로운 권력 중심을 구축하려는 것으로 보일 때가 있다. 야빈의 비전과 같이, 반엘리트들은 냉혹한 효율성을 앞세워 미국을 통치하고자 한다. 그들은 능력과 합리성을 중시한다고 주장하지만, 자신들의 기술군주적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해 줄 호빗 평민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때때로 그들의 기분도 살펴야 한다. 마가 연합 내에서 더 강력한 세력이 어둠의 엘프들일지 아니면 호빗들일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반동주의자들은 '반지의 제왕'에서 권력의 언어를 발견했다. 틸과 그 동조자들의 손에서, 톨킨의 신화적 과거는 주권을 지닌 최고경영자(CEO)가 폐쇄적 경제 영지를 통치하는 탈자본주의 체제로 굳어진다. 최근 좌우를 막론하고 평론가들은 실리콘밸리의 주요 기업들이 자본주의를 변화시키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한 모델이자 은유로서 '봉건'라는 개념에 주목하고 있다.


프랑스 경제학자 세드릭 듀랑Cédric Durand과 그리스의 전 재무장관이자 경제학자인 야니스 바루파키스Yanis Varoufakis와 같은 사람들은 '기술봉건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이들에 따르면 알파벳, 애플,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메타와 같은 기업들은 이제 이윤이 아니라 '클라우드 지대'를 착취한다. 사용자들은 데이터를 제공함으로써 사실상 무급 노동을 수행하며, 플랫폼 기업은 그 데이터를 수익화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실리콘밸리는 자본주의를 죽이고, 시장을 클라우드 기반의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walled garden'로 대체했다. 이제 착취의 지배적 형태는 이윤이 아니라 지대다.


미국의 정치이론가 조디 딘Jodi Dean은 이러한 데이터 착취 체제가 만들어 낸 보다 광범위한 지형에 신봉건주의라는 이름을 붙인다. 딘은 데이터 수집을 여전히 핵심 문제로 보지만 그것의 정치적 귀결에 더 주목한다. 국가의 역량이 점차 민영화됨에 따라 민주적 대중은 주권을 상실하게 된다. 플랫폼 억만장자들의 핵심 집단이 경제와 정치 양 영역을 장악하고, 불평등을 가속화하며 점점 더 직접적인 형태의 통치를 행사한다.


기술봉건주의와 신봉건주의 두 해석 모두 오늘날의 과두제oligarchy가 민주적 감시가 미치지 않는 봉건 영지fiefdom로 굳어져가고 있다고 본다. 금융 자본, 첨단기술 독점, 국가 기능의 민영화가 얽힌 결합체가 국경과 시장의 경계를 넘어 활동하는 부유한 개인들에게 권력을 부여하였고, 이들은 사용자와 하청업체를 상대로 사적 지배에 가까운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정말 기술봉건주의로 이행하고 있는가? '뉴레프트리뷰'에 실린 글 '기술봉건주의 비판Critique of Techno-Feudalism'에서 에브게니 모로조프Evgeny Morozov는 이 질문에 회의적 시각을 드러낸다. 그는 기술봉건주의 담론이 "무기력한 대중을 안일함에서 깨우려는 수사적 선언의 충격 요법"에 의존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우리 시대는 암울하긴 해도 여전히 본질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기술봉건주의의 개념이 실리콘밸리의 마가 진영이 공유하는 핵심적 판타지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피터 틸의 저서 '제로 투 원Zero to One' 같은 책은 '독점가'라는 인물상을 적극 찬양한다. 틸은 "모든 성공적인 사업의 조건은 독점"이라고 말한다. 진정한 비전가는 가치있는 자산을 해자로 둘러싸고, 시장 지배력을 확립한다. 그들은 효과적으로 경쟁하지 않는다. 효과적으로 경쟁을 피한다. 경쟁은 패배자들의 몫일 뿐이다.


팔란티어 같은 기업들은 AI 기반의 국가 안보 체제를 위한 민간 디지털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들은 벤처 자본과 사모펀드의 지원을 받는 새로운 형태의 방산기술 기업자금 조달 모델을 구현한다. 처음에는 소규모 투자로 출발해, 정부 파일럿 계약을 따내 신뢰를 확보하고, 그 신뢰를 기반으로 대규모 자금을 유치한다. 수백만 달러 규모의 초기 투자는 곧 수천만 달러 규모의 국가 안보 계약으로 연결되고, 다시 수억, 수십억 달러 후속 투자로 확장된다. 결국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기업 가치 평가와 상장(IPO)을 실현하게 된다.


방산 기업, 벤처 캐피탈, 민영화된 정부가 결합된 위험한 가속 순환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톨킨이 창조한 신화에서 사우론은 공예와 발명의 수호신 발라 아울레Aulë를 섬기는 신적 존재 마이아Maia였다. 그는 질서와 체계에 지나치리만치 강한 열망을 품었고, 그 열망은 결국 그를 타락시켰다. 사우론은 권력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찬 또 다른 발라 멜코르Melkor—후에 모르고스Morgoth로 불리는 존재—에게 매혹되었는데, 멜코르의 권력욕이 그의 질서에 대한 집착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제1시대 내내 그는 모르고스를 섬겼고, 모르고스가 몰락한 후에도 회개하지 않고 사악한 사명을 이어갔다.


톨킨은 이렇게 썼다. 제2시대 초에 사우론은 "완전히 악한 존재는 아니었다. '재건'과 '개혁'을 서두르는 모든 '개혁가들'이 전적으로 악하지는 않은 것과 같다." 톨킨의 표현대로 사우론은 "과학과 기술"을 약속하며 엘프들을 유혹했다. 엘프들은 "사우론이 실제로 지니고 있던 지식"을 원했다. 그는 아름다운 형상으로 변신해 엘프들을 설득해 힘의 반지를 만들게 했다. 후에는 자신이 비밀리에 주조한 절대 반지를 통해 이들을 통제한다.


사우론은 세계를 통제하고, 자신이 원하는 질서로 재구성하며, 신적 존재로 숭배받으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완전히 악한 존재는 아니었다. 톨킨의 우주론에서 절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톨킨은 이렇게 썼다. "사우론은 완전한 악의 의지에 가장 근접한 존재일 뿐이다. 그는 모든 폭군이 걸어온 길을 따랐다. 시작은 선했다. 적어도 처음에는 나름의 지혜로 만물을 질서 있게 통제하고자 하면서도, '신민'의 이익을 고려했다."


톨킨의 "개혁가"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좌파 성향의 행동주의에 대한 질책으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의 기술반동주의자들이 품은 꿈 또한 어느 좌파의 비전 못지않게 유토피아적이며, 급진적 사회 재편에 대한 그들의 열망 또한 좌파 못지않다. 이들 부유한 남성들은 자신들이 현명하게 기술을 개발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반지의 제왕을 대충이라도 읽어보면 그런 주장에 의문을 품게 된다. 미국 사회를 새로이 재구성하려는 이들의 시도는 중간계의 자유민들보다 오히려 어둠의 군주 사우론에 가까운 정신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리 콘스탄티누는 메릴랜드대학교 영문학 교수로 소설 '팝 어포칼립스'와 문학사 연구서 '쿨 캐릭터: 아이러니와 아메리칸 픽션' 등을 썼다.


ARC매거진은 워싱턴대학교 세인트루이스 존 댄포스John C Danforth 정치종교센터에서 발행하는 미국 종교, 정치, 문화에 관한 온라인 저널이다.


역자 음해린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후 전문 번역가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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