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사마 야요이의 대형 조각〈호박(Pumpkin)〉, 2022년 허쉬혼 미술관 및 조각정원 전시 모습 (Shuran Huang/For The Washington Post)
2025.11.21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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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뉴욕주 버팔로에 도착했을 때쯤 하나의 사실이 확고해졌다. 호박들이 사방에 있다.
이 모든 것은 서일본 외딴섬에서 시작됐다. 많은 이들에게 쿠사마 야요이草間彌生의 점박이 호박은 이 섬의 주요 볼거리다. 나오시마의 서쪽 항구에 도착하는 페리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도 통통한 빨간 호박 조형물이다. 나오시마는 미술관과 현대미술 설치작품을 찾아오는 '문화 후각'이 예민한 관광객들에게는 일종의 성지가 되었다. 기념품 가게에는 호박 관련 기념 소품이 가득하고, 마을버스는 쿠사마 특유의 점박이 무늬로 뒤덮여 있으며, 사랑받는 이 호박 그림들이 차량 측면을 장식하고 있다.
섬 남쪽 해안에는 잔잔한 바다를 배경으로 노란 호박이 우뚝 자리하고 있다. 하루 종일 아이폰을 든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몰려드는 명소다. 호박 조형물은 이제 나오시마 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려서, 아침 달리기 중에 대충 찍은 노란 호박 사진 한 장만 가지고 섬을 떠났을 때는 왠지 신성모독에 가까운 기분마저 들었다.
처음엔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비행기와 자동차, 두 번의 기차, 그리고 페리까지 갈아타며 도착한 곳에서 굳이 '인스타그램용' 거대 호박 조형물을 봐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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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호박들은 나를 그렇게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 뒤였다. 당시 내가 거주하던 곳이기도 한 한국에서 또 섬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도 점박이 호박이 나를 맞았다. 제주 본태박물관에서는 거대한 호박 조형물이 쿠사마 야요이의 '무한 거울 방' 입장을 기다리는 행렬 위로 우뚝 솟아 있었다.몇 주가 지나며 겨우 호박들을 기억 속에서 밀어내고 있던 순간 이번엔 호주 멜버른 빅토리아 국립미술관에 들어서자마자 사방으로 뻗은 거미 "다리" 같은 형태의 마치 춤추는 듯한 대형 호박이 로비에 자리 잡고있는 광경이 다시 나를 붙잡았다.
세 번의 여행, 그리고 네 개의 거대한 호박 네 개. 헐.
그러던 중 고향 버팔로 방문을 준비하던 나는 평소 워싱턴의 허시혼 미술관 조각정원에 설치돼 있던 쿠사마의 호박 조형물이 마침 내가 도착하기 직전 개막하는 AKG 미술관 전시를 위해 버팔로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가 호박을 쫓은 것일까, 아니면 호박이 나를 따라온 것일까?
실상은 그 어느 쪽도 아니다. 우리는 쿠사마 야요이가 가꾼 '호박밭' 안에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이 예술가의 창작물은 이미 수년 전부터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그 기세는 좀처럼 꺾일 기미가 없다. 오사카의 에스파스 루이비통이든, 스위스 바젤 인근의 바이엘러든 재단이든, 오늘날 미술계를 여행하다 보면 쿠사마의 호박(또는 10개의 호박들)과 마주치는 일은 피할 수 없다.
모든 예술가에게는 자신만의 모티프가 있다. 모네에게는 수련이, 오키프에게는 꽃이 모티프였다. 미술관 역시 언제나 '관객을 부르는' 대표 작품들을 가지고 있다. 폴록의 드립 페인팅이나 칼더의 모빌처럼 말이다. 이제는 '호박'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거대한 호박 조형물은 외딴섬이나 작은 미술관 혹은 대형 기관의 한 전시 공간을 단숨에 '지도 위에 올려놓는' 즉각적인 랜드마크 기능을 한다.제주의 본태박물관도 이를 인정한다. 이들이 소장한 소중한 호박 작품 소개 글에는 "전 세계의 유명 문화 공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있다"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다.
박물관이 자신들이 소장한 작품이 세계 곳곳에 '형제작'이 있다고 홍보하는 일은 라부부1 열풍의 시대에는 그리 특별하게 들리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예술 작품의 가치는 희소성에 기반한다는 통념과는 어긋난다. 조각이든 소셜미디어 게시물이든, 값싼 기념품이든 럭셔리 핸드백이든, 호박들이 끝없이 증식할수록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은 오히려 더 강해지는 듯하다.
1929년 일본 마쓰모토에서 태어난 쿠사마 야요이는 10대 시절부터 작품을 공개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했다. 1946년에는 첫 호박 작품인 니혼가日本画 스타일의 전통 회화를 출품하기도 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호박' 주제에서 잠시 멀어져 있었지만, 그 사이 그녀는 시그니처인 점박이 무늬와 거울방과 같은 새로운 시각적 모티프를 발전시켰고, 이들은 2010년대에 들어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무수한 점의 반복을 특징으로 하는 쿠사마의 작업은 그녀가 '자기 소멸'이라 부르는 상태를 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시선을 압도하는화려한—그리고 말도 안되게 사진발이 잘 받는—디자인과 패턴이 관람객을 끌어모으는 효과로 유명해짐에 따라 그러한 반복 작업은오늘날 전 세계 사방팔방의 미술관에서 그녀의 작품을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쿠사마는 자신이 말하듯 호박의 "관대하고 꾸밈없는 성질"에 오래 매료돼, 반복해서 호박 모티프를 다뤄 왔다. 그녀가 선보이는 기발하고 점박이 무늬로 뒤덮인 호박들은 이제 누구나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상징적이다. 1970년대 한동안 정신 건강의 위기를 겪은 뒤 국제 미술계에 복귀한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쿠사마는 이 호박에 대한 애정을 전면에 내세웠다. 끝없이 반사되는 수많은 호박들로 구성된 작품 <거울방(호박)>을 출품했고, 관람객들에게 작은 호박 오브제를 나누어 주기도 했다.
1994년 나오시마에 설치된 노란 호박은 쿠사마 야요이의 최초 대형 야외 호박 조각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이어질 수많은 '호박 작품'의 출발점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호박들의 숫자를 세려 하면 어지러울 지경이다. 여럿이 똑같이 '호박'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오시마의 노란 호박은 마침내 2006년에 완성된 빨간 호박이 합류하면서 짝을 이루게 되었다. 제주 본태박물관의 호박은 2013년에, 워싱턴 허시혼 미술관의 호박은 2016년에 '수확'되었다. 쿠사마가 지금까지 선보인 것 중 가장 높은 청동 호박은 지난해 런던 켄싱턴가든에 설치됐으며, 높이는 약 20피트(약 6미터)에 이른다. 최근의 변형작으로는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MOMA에 설치된 다섯 개 머리를 지닌 호박 조각〈호박의 사랑을 향하여, 내 마음 속의 사랑Aspiring to Pumpkin's Love, the Love in My Heart〉(2023), 그리고 필자가 멜버른 빅토리아 국립미술관에서 본 활기 넘치는〈춤추는 호박Dancing Pumpkin〉(2020)이 있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호박의 껍데기만 스친' 정도에 불과하다. 현재 댈러스 미술관은 쿠사마의 호박으로 가득 찬 거울방 작품〈호박들을 향한 나의 영원한 모든 사랑All the Eternal Love I Have for the Pumpkins〉(2016)을 전시 중이다. 그 안에 있는 호박의 수는? 무한대.
96세의 쿠사마는 1977년 이후 정신과 시설에서 머물고 있으며, 경매사인 필립스에 따르면 도로 건너편에 위치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조수들과 함께 매일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할아버지와 함께 식물 양묘장을 방문했을 때 처음 호박을 보았으며, 호박에 대해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큰 위안이 되어준 존재"라고 말해왔다.
머리를 갸웃하게 만드는 개념미술 작품들과 예술 전문 용어로 가득한 벽면 글이 흔한 공간에서 많은 관람객들은 쿠사마의 호박 작품에서 그녀가 느꼈던 바로 그 편안함을 느낀다.
"대부분의 현대미술은 사전 이해나 미술사적 배경지식이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쿠사마의 호박은 정말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국 시카고대학교의 경영학 교수이자 '아트 비즈니스 랩' 설립자인 메리 이텔슨의 말이다.
재정 환경이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에서 미술관들은 더 폭넓은 관람객을 끌어들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와우'하는 효과를 지니면서도 비교적 비정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쿠사마의 작품은 자연스럽게 미술 기관들의 '믿고 찾는 선택지'가 되고 있다.
"경제적 압박이 워낙 큽니다." 이텔슨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연령층에 보편적으로 어필하면서도 논란이 없고, 동시에 진정한 예술적 힘과 깊이를 갖춘 작가를 전시할 수 있다면, 이는 박물관과 관람객 모두에게 '윈윈'이죠."
이텔슨은 미술관들이 이러한 호박 조각을 소장하려는 이유는 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 빌바오'로 대표되는 이른바 '빌바오 효과'를 변주해 재현하려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 문화적 투자가 지역의 경제 성장으로 이어지는 현상을 일컫는 것으로, 이 경우 작품이나 건축물 자체가 곧 목적지가 된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올해 여름 호주 빅토리아 국립미술관NGV에서 열린 쿠사마 전시는 미술관 역사상 가장 많은 유료 관람객을 끌어모았다. 2017년 워싱턴 허슈혼 미술관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당시 '블록버스터'로 불린 쿠사마 전시는 관람객 기록을 갈아치웠고, 미술관 회원 수는 무려 65배 이상 증가했다.
호박 작품은 적지 않은 투자 대상이기도 하다. 쿠사마는 2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작가로 집계됐으며, 지난해 판매된 2000년 이후 제작 작품 중 최고가 25점 가운데 3점이 호박 조각이었다. 그중 하나는 크리스티 경매에서 560만 달러에 낙찰됐다. (전년도에도 호박을 모티프로 한 쿠사마 작품 세 점이 '최고가 25점' 목록에 올랐다.)
자원봉사자 메건 월라인이 2017년《쿠사마 야요이: 무한 거울(Yayoi Kusama: Infinity Mirrors)》전시 개막을 앞두고, 허쉬혼 미술관이 관람객 대응을 위해 직원과 자원봉사자들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설치작품〈무한 거울방 — 팔리스 필드〉를 체험하고 있다. (Bill O'Leary/The Washington Post)
애틀랜타에서 온 라몬트 스피어스와 테럴 마일스가 2022년 허쉬혼 미술관에서 쿠사마의〈무한 거울방〉을 관람하고 있다. (Shuran Huang/For The Washington Post)
한 관람객이 2022년 허쉬혼 미술관에서 쿠사마의 대형 조각〈호박(Pumpkin)〉을 촬영하고 있다. (Shuran Huang/For The Washington Post)
수많은 호박 작품을 바라보고 있자면, 미술관들이 마치 메뉴가 동일한 레스토랑 체인처럼 점점 획일화되어 가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기 쉽다. 그러나 쿠사마의 현재 성공은 정신 건강 문제로 예술계 무대에서 한동안 멀어졌던 시기와 뉴욕에서 활동하던 남성 동료들의그늘에 가려져 지냈던 오랜 세월 등, 수십 년에 걸친 좌절의 역정을 딛고 얻어낸 것이다. 노스이스턴대학교에서 예술, 기술, 페미니즘을 연구하는 현대미술사학자 글로리아 서튼에게 쿠사마의 현재 '전성기'는 바로 그 어려움을 극복한 뒤에 찾아온 성취이기에 더욱 의미가 크다.
"그 작품이 이렇게 도처에 퍼져 있는 것에 대해 전혀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 애초 그녀가 처음 이 작업을 선보였을 때는 의도적으로 배제되고 억압됐기 때문이다"라고 서튼은 말했다. "공간과 시각적 주목을 이렇게나 크게 차지하고, 그것을 전 세계로 어디로나 전달 가능한 언어로 해석해낸다는 발상 자체가 탁월하다."
어떤 의미에서 쿠사마의 상업적 성공은 한때 앤디 워홀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팝아트의 언어를 깊이 탐구해온 그녀에게 있어 궁극적인 성취의 표식이라 할 수 있다. 서튼은 "대중적이고 폭넓은 지지를 얻으면서도 동시에 상위 1% 컬렉터들의 소장품에 포함되는 예술가는 극히 드뭅니다. 쿠사마는 그 희귀한 사례 중 하나죠"라고 말했다.
겉으로는 발랄하고 명랑해 보이지만, 쿠사마의 예술에는 더 깊은 질문과 어두운 문제의식이 자리한다. 서튼은 호박 작품 역시 그녀의전체적인 점박이 무늬 작업에서 떼어놓고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점박이 무늬 작업은 유년 시절 환각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수단으로도 활용돼 왔다.
"지금 우리가 보는 호박의 점 하나는 과거 베트남전에 반대하며 벌거벗은 몸 위에 손으로 직접 그려졌던 점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서튼은 말했다.
"현재 그녀의 작품은 폭넓은 호응을 얻고 있지만, 그 출발은 주변부였다"고 쿠사마 전문가이자 '쿠사마 야요이: 독자성의 발명Yayoi Kusama: Inventing the Singular'의 저자인 야마무라 미도리는 말했다.
"그녀는 매우 행복한 마음으로 그 작품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변부의 세계에서 주류를 바라보는 위치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고, 다루기 어렵고 무게감 있는 호박의 특성을 언급하며 야마무라는 말했다. 야마무라는 이어, 이 호박이 일종의 자화상처럼 기능한다고 설명했다. 즉, "사회적 규범에 맞추어 살아가지 못하는 예술가의 무기력을 솔직히 드러낸 것"이라는 것이다.
그 어색함 속에는 묘한 사랑스러움, 그리고 누구나 공감할 만한 감정이 스며 있다.
야마무라는 "쿠사마의 호박 조형물이 나오시마에 설치되자, 섬 주민들이 곧바로 자신들만의 호박을 만들어 대문 앞에 두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현대미술을 거의 접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작품을 점점 좋아하게 되면서 결국에는 그들의 정체성 일부로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테마는 사회적 배경을 막론하고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접근 가능하다"는 표현은 이번 달 AKG미술관에서 쿠사마의 호박을 마주한 마이클 마라리안(버팔로 기반의 작가)의 감상을 설명하기에는 오히려 부족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 작품을 "보이는 것 이상의 느낌을 주었다"라고 묘사하며, 순식간에 동화 '잭과 콩나무'를 읽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작품이 불러일으킨 충동 또한 어린아이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정말 손으로 만지고 싶고, 표면을 쓱 문질러보고 싶어요. 심지어 꼭 안아주고 싶을 정도예요."
켈시 에이블스Kelsey Ables는 컬럼비아대에서 미술사와 심리학을 전공했으며, 2019년부터 워싱턴포스트에 들어온 후 서울지국에서 근무했다. 현재는 워싱턴을 중심으로 미국의 미술관, 미술기관, 건축을 주로 담당하는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역자 이희정은 영국 맨체스터대 미술사학 박사이며, 역서로 '중국 근현대미술: 1842년 이후부터 오늘날까지'(미진사, 2023)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