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안트로부스의 시집 '주어진 모든 이름들' 표지. /사진제공=Tin House
2025.11.28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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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이게도, 늘 곁에 있어 너무 익숙해진 것들의 의미는 그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또렷해지곤 한다. 방을 환하게 비추던 전등이 갑자기 꺼져버리면 일상의 가장 단순한 동작조차 서툴러지고, 스마트폰을 잃어버리는 일은 일시적으로 삶 전체를 뒤흔들어 놓는다. 이런 상실들은 놀라움과 불편을 가져오지만, 대부분은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복원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는 되돌릴 수 없는 상실 또한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거실 한켠을 차지하던 화분이 어느 날 완전히 시들 때, 몇 년을 함께 했던 버스 노선이 예고 없이 사라질 때, 혹은 마음을 터놓던 친구가 홀연히 머나먼 곳으로 떠날 때, 우리는 돌이킴이 불가능한 빈자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 중에서도 아마 가장 근본적이고 아픈 상실은 가까운 가족을 잃을 때 찾아올 것이다. 특히, 서로의 존재를 너무 당연하게 여겨 때로는 불화하며 살아온 관계일수록, 죽음 이후 남겨진 자가 그 부재를 인정하는 과정은 더 길고 복잡해진다. 레이먼드 안트로부스(Raymond Antrobus)의 「받아들임」("The Acceptance")은 바로 이 무겁고 내밀한 과정을 다루며, 시인은 시를 통해 힘겹게 부재를 인정하고, 애도를 거쳐, 마침내 화해에 이르는 여정을 지나게 된다. 2022년 시집 『주어진 모든 이름들』(All the Names Given)에 수록된 이 시에서 시인은 죽은 아버지를 꿈속에서 다시 만나며, 그 만남을 통해 살아 있을 때는 온전히 마주하지 못했던 여러 겹의 의미를 뒤늦게 받아들인다. 생전에는 풀지 못했던 감정의 매듭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느슨해지는 이 따스한 순간을, 시인은 조용하지만 강렬한 이미지들로 그려낸다.
레이먼드 안트로부스 - 받아들임 (번역: 조희정)
아버지의 집이 다시 서 있다, 철거된 지
4년 만에. 나는 안으로 들어간다.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 담배 마는 종이를 핥고,
내가 "어디에 계셨던 거예요? 우리는 아버지
장례를 치렀는데요"라고 묻자, 아버지는 말한다. "알아,
알고 있어." 나는 아버지의 연기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말한다.
"저는 자메이카에 돌아갔어요. 아버지 형제들을 만났어요,
아버지를 잃고 나니 그분들이 필요했어요." 아버지는 내가
듣지 못하는 무언가를 말한다. "뭐라구요?" 입술은 움직이고,
소리는 없다. 나는 고개를 흔든다. 아버지는 찡그린다.
사라진다. 나는 호텔 방에서 깨어나고,
심장은 북 치듯 뛴다. 천천히 일어나니, 바닥이
젖어 있다. 나는 욕실로 걸어 들어가고,
아버지는 세면대 옆에 서 있다. 수도꼭지가 모두
열려 있다. 아버지는 웃으며 내 손을
잡아서, 꽉 쥔다.
반지가 내 살을 파고든다. 나는 눈을 뜬다.
내가 강가에 있다, 초록 대리석의
반짝이는 장막. 붉은 개미들이 오크 나무의
껍질이 벗겨지는 몸통을 기어오른다. 내 손은
차가운 진흙이다. 나는 강둑 옆
키 큰 풀과 노래를 따라간다. 나의 오리샤1,
금팔찌와 귀걸이를 한 오슌2이 강물에서
노란 드레스를 빨고 있다. 나는 손짓한다, "이봐요!"
그녀는 계속 노래한다. 그 드레스는 강물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거기서 아버지가 강 위에 떠오른다.
아버지는 흰빛과 초록빛의 북을 들고 있다. 나는 아버지를 본다,
강물에서 빠져나와 물을 흘리며 오슌에게 가는 것을.
그들은 껴안는다. 아버지는 그의 북을 친다.
빛나는 손으로, 그녀는 수화를 한다. "환영해."
아버지는 그의 북을 친다.
시인은 꿈에서 이미 4년 전에 철거된 아버지의 집이 다시 서 있는 광경을 목격한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장례까지 마쳤지만, 시인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마음 한가운데 비어 있는 공간으로 오랫동안 남아 있었던 듯하다. 꿈에서나마 아버지 생전의 집을 다시 보고 그 안으로 들어가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시의 첫 장면은, 시인이 되돌릴 수 없는 크나큰 상실을 아직도 완전히 수습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특히, 시인은 아버지에게 자신이 자메이카에 돌아가 아버지의 형제들을 만났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 한다. 아버지가 떠난 뒤, 그는 아버지의 개인적인 역사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게 되고, 이 욕구는 결국 시인을 아버지의 고향인 자메이카로 이끈다.
하지만, 꿈속에서 자메이카 방문 경험을 이야기하는 순간, 아버지는 시인이 "듣지 못하는 무언가"를 말할 뿐이다. 안트로부스는 청각 장애가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목소리는 꿈에서도 여전히 그에게 와 닿지 않는다. 그에 더해, 아버지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 역시 아버지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실패한다. 입술의 모양을 읽어 소리를 추측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할 수도 있겠건만, 이렇게 되풀이되는 소통의 좌절은 아버지 생전에 시인이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을 환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수화를 사용하는 대신 시인이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는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입술조차 읽을 수 없는 시인. 이 두 사람은 "고개를 흔들고" 또 "찡그리기만" 할 뿐 서로에게 끝끝내 말을 걸지 못한다. 이 장면은 아버지와의 단절이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그리고 시인이 그 단절을 꿈속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시인이 잠에서 "깨어나는" 다음 장면은 아버지와의 사이에 놓여 있던 심리적 장벽이 점차 극복되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비록 공간적 배경은 "호텔 방"과 "욕실" 같은 현실 세계이지만, "수도꼭지가 모두 열려 있고" 바닥이 물로 가득 찬 상황은 이 장면이 여전히 시인의 상상 혹은 감정의 심연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세면대" 옆에 서 있는 아버지는 "반지가 살을 파고들" 정도로 힘을 주어 시인의 손을 움켜쥐며, 이 과도할 만큼 강력한 감각적 접촉은 그동안 단절되어 있던 부자 간의 정서적 교류를 마침내 실현시키는 매개가 된다. 손을 맞잡는 순간, 시인은 아버지의 손을 통로 삼아 그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는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이 여정은 결국 더 머나먼 곳인 아프리카 영성의 세계를 향해 이어진다. 시의 후반부에서 시인은 아프리카의 신적 존재인 오리샤, 그중에서도 사랑과 치유, 물을 관장하는 여신 오슌(Oshun)과 마주하게 된다. 오슌이 금빛 팔찌를 찬 채 강물에서 노래하며 옷을 씻는 장면은 현실의 논리를 벗어난 차원으로 시인을 이끌어 가는 초월의 순간이다. 그리고, 이 비현실적 풍경 속에서 시인은 "아버지가 강 위로 떠오르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한다. 곧이어 아버지가 오슌에게 다가가자 두 존재는 서로를 품에 안게 되고, 사랑과 응축된 생명의 힘을 지닌 신성과 인간 아버지가 포옹하는 모습은 시인의 내면에서 진행되는 깊은 화해의 상징처럼 읽힌다. 이제, 아버지는 더 이상 이승의 아버지가 아니라, 오리샤들의 세계 속에서 다시 태어난 영적인 존재가 된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아버지가 손에 든 "흰빛과 초록빛의 북"이다. 시인은 "아버지는 그의 북을 친다"라는 문장을 시의 마지막에서 두 번 반복하는데, 이때 "북" 앞에 "그의"라는 말이 붙어 있는 것은 아버지가 아프리카의 자연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되찾았음을 의미한다. 또한, 아버지가 북을 치는 장면으로 끝나는 시의 마무리는 아버지에 대한 꿈을 꾼 뒤 시인의 심장이 "북 치듯 뛰던" 순간과 겹쳐지면서, 두 존재를 잇는 내재적인 리듬을 형성하게 된다. 아버지가 북을 두드릴 때마다 시인의 가슴에 남아 있던 억눌렸던 것들은 하나의 박자로 정리되어 가는 듯하고, 살아생전에는 도무지 맞춰지지 않던 두 사람의 호흡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같은 리듬을 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모든 장면을 통과하고 나면, 시의 제목인 "받아들임"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가 조금씩 드러난다. "받아들임"은 단순히 상실을 견뎌내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보다 훨씬 높은 차원으로 확장되어 간다. 이 시가 궁극적으로 말하는 "받아들임"은 잃음 속에서 오히려 다시 만나는 일이며, 이전에는 선명하게 보지 못했던 진실이 상실 이후에야 비로소 형태를 드러내는 경험이다. 시인은 아버지를 잃고서야 아버지의 나라를 방문하고, 아버지의 형제들을 만나며, 아프리카의 영적 세계와 접속하여, 마침내 아버지가 그 속에서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시인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버지의 죽음 그 자체에 그치지 않는다. 시인은 아버지의 삶이 품고 있던 다층적인 역사와 스스로의 정체성에 연결된 뿌리에 대해 더 깊은 의미의 "받아들임"이 공존하는 심리적 경험을 하게 된다.
결국, 이 시는 내가 생각했던 세계의 중심이 흔들릴 때 비로소 다른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보여 준다. 죽음이라는 가장 큰 상실을 마주한 뒤, 시인은 아버지를 잃음으로써 아버지를 되찾으며, 동시에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길로 들어선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여신 오슌의 환영 메시지가 말이 아니라 시인이 명확히 인지할 수 있는 "수화"로 전달되는 장면은 오슌과 아버지 사이의 영적 화합이 시인에게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알려 준다. 그러하기에, 이 시가 그리는 애도는 사무치는 고통의 과정이면서도 동시에 가슴 벅찬 화해와 재탄생의 서사이기도 하다. 잃고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고, 떠나고서야 비로소 함께 할 수 있는 세계가 열리기도 하는 것이다.
원문: The Acceptance
Dad's house stands again, four years
after being demolished. I walk in.
He lies in bed, licks his rolling paper,
and when I ask Where have you been?
We buried you, he says I know,
I know. I lean into his smoke, tell him
I went back to Jamaica. I met your brothers,
losing you made me need them. He says
something I don't hear. What? Moving lips,
no sound. I shake my head. He frowns.
Disappears. I wake in the hotel room,
heart drumming. I get up slowly, the floor
is wet. I wade into the bathroom,
my father stands by the sink, all the taps
running. He laughs and takes
my hand, squeezes.
His ring digs into my flesh. I open my eyes.
I'm by a river, a shimmering sheet
of green marble. Red ants crawl up
an oak tree's flaking bark. My hands
are cold mud. I follow the tall grass
by the riverbank, the song. My Orisha,
Oshun in gold bracelets and earrings, scrubs
her yellow dress in the river. I wave, Hey!
She keeps singing. The dress turns the river
gold and there's my father surfacing.
He holds a white and green drum. I watch him
climb out of the water, drip toward Oshun.
They embrace. My father beats his drum.
With shining hands, she signs: Welcome.
My father beats his drum.
조희정은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하버마스의 근대성 이론과 낭만주의 이후 현대까지의 대화시 전통을 연결한 논문으로 미시건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간과 자연의 소통, 공동체 내에서의 소통, 독자와의 소통, 텍스트 사이의 소통 등 영미시에서 다양한 형태의 대화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양상에 관심을 가지고 다수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