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예술

가장 정치적인 예술가 다비드, 그는 가장 타락한 예술가이기도 했을까?

루브르에서 열린 멋진 자크-루이 다비드 전시는 자코뱅파의 국왕 살해 가담자였던 그를 '자유로운 정신'으로 재조명하지만, 그는 동시에 '정치 선전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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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루이 다비드, 〈쥘리에트 레카미에(결혼 전 성: 베르나르)의 초상〉, 1800년. (Grand Palais RMN/Musée du Louvre)

2025.12.19 15:10

Washington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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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부르봉 왕정이 복고된 이후, 불멸의 프랑스 혁명기 이미지들을 남긴 위대한 화가 자크-루이 다비드의 옛 제자 한 명이 당시 벨기에로 망명가있던 다비드에게 단지 청원서에 서명하기만 하면 프랑스로 돌아와 환영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다시는 내가 돌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지 말게." 다비드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네. 나는 조국을 위해 마땅히 했어야 할 일은 이미 모두 했네. 나는 찬란한 하나의 화파를 세웠고, 유럽 전역에서 찾아와 연구할 만큼의 그림들을 그렸네. 나는 내 몫의 약속은 이미 이행했으니 이제 정부가 그에 상응하는 일을 할 차례네."


루브르에서 열리고 있는 훌륭한 회고전의 주인공인 다비드는 자신의 탁월한 위상에 대해 옳게 말했다. 그에 필적할 만한 인물은 누구도 없었다.


그는 숨이 멎을 만큼 명료하면서도 머리털이 곧추 설 정도로 강렬한 이미지를 그려냈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리크토르들이 브루투스에게 아들들의 시신을 가져오다〉, 〈마라의 죽음〉이 그렇다.



하지만 오랫동안 엇갈려왔던 평가 속에서, 이토록 정치적으로 적극적이었던 화가 특유의 구체적인 광기가 어디로 귀결되었는지는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것은 고발, 체포영장(자크-루이 다비드 자신이 직접 서명한 영장을 포함해), 처형들로 이어졌다. 또한 살육을 자행한 독재자들을 옹호하는 선전으로 어어졌다.


다비드의 동시대인이자 작가인 스탕달이 이 화가의 특성으로 지칭했던 이른바 '흠결 없는 순진함'은 시선을 아주 조금만 달리하면 '용서할 수 없는 괴물성'으로 보일 수도 있다.


자크-루이 다비드, 〈자화상〉, 1794년. (Grand Palais RMN/Musée du Louvre)

자크-루이 다비드, 〈자화상〉, 1794년. (Grand Palais RMN/Musée du Louvre)


오늘날 우리의 정치가 아무리 양극화되어 있다 하더라도, 1789년부터 1815년 사이 프랑스에서 벌어진 일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밋밋해 보일 수 있다. 당시 쟁점은 다름 아닌 근대 국가의 형성 자체였다.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비드는 그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미술사학자 T. J. 클라크의 말에 따르면, 다비드는 "국가 형성의 위험성과 그 엄청난 규모를 분명히 드러낼 수 있다면, 정치 역시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자크-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년. (Trujillo Juan/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자크-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년. (Trujillo Juan/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오늘날 다비드의 예술은 거의 전적으로 차갑고 엄정한 형식성과 동일시되지만, 그의 화풍은 로코코에서 신고전주의로 진화했으며, 혁명 이후에는 공화정기, 총재정부 시기, 제정기로 이어지는 뚜렷한 단계들을 거쳤다. 다비드에 관한 필독의 저작을 남긴 아니타 브루크너는 그의 "가장 인상적인 특징"으로 "역사적 순간의 요구에 부응하는 양식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꼽았다.


그가 당대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초상화가로서 세상이 늘 그를 필요로 했다는 점 역시 분명히 도움이 되었다. 특히 여성들을 그린 그의 초상들은 일관되게 탁월한 수준을 보여준다.


자크-루이 다비드, 〈로베르틴 투르토 도르빌리에(결혼 전 성: 리예(Rilliet)의 초상〉, 1790년. (Grand Palais RMN/Musée du Louvre)

자크-루이 다비드, 〈로베르틴 투르토 도르빌리에(결혼 전 성: 리예(Rilliet)의 초상〉, 1790년. (Grand Palais RMN/Musée du Louvre)



그러나 다비드는 결코 사람을 기분좋게 하는 유형의 인물은 아니었다. 아니타 브루크너는 "절제력을 잃고 히스테릭한 인물", "왜소하고 말주변이 없으며 폭력적이면서도 취약한 존재", "극도로 동요한 상태", "자기몰입적인 성향", "상시적으로 취한 듯한 인물"로 묘사하기도 한다. (다른 대목들에서는 그에게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는 듯 보인다.)


그의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일곱 살에 기숙학교로 보내졌고, 두 해 뒤에는 아버지가 결투로 사망했다. 수련 중인 화가로서 그는 역동적인 로코코와 보다 안정적인 니콜라 푸생의 영향이라는 상충하는 두 흐름을 통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권위 있는 '프리 드 로마' 수상에 네 차례나 도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그 좌절 끝에 식음을 끊고 죽으려 하기도 했다. 마침내 1774년에 '프리 드 로마' 상을 받았고, 이탈리아로 건너가 고대 미술과 카라바조라는 상이한 영향들을 소화하려 애썼다.


이윽고 그는 극도로 엄격하고 금욕적인 경직성, 마치 디오라마처럼 정지된 상태의 양식을 만들어냈고, 그 결과 그의 그림들은 한 논평가의 표현대로 "거의 히스테릭할 정도로 평정을 유지하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듯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섬뜩한 것은 다비드가 역사와 맺었던 무서운 관계다. 그는 목격자로서 핵심적인 역사적 사건들을 직접 형상화했다. 〈테니스 코트의 서약〉, <마라의 죽음>, 그리고 〈나폴레옹의 대관식〉이 그것이다.


자크-루이 다비드, 〈테니스 코트의 서약〉, 1791년. (Grand Palais RMN (Château de Versailles)/Musée du Louvre)

자크-루이 다비드, 〈테니스 코트의 서약〉, 1791년. (Grand Palais RMN (Château de Versailles)/Musée du Louvre)


그러나 그의 작품 가운데 두세 점, 특히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회화적 예언의 지위에 도달하여, 아직 잠복해있는 사회적 흐름을 드러내고, 잠재되어 있던 것이 실제 나타나도록 격려했다.


자크-루이 다비드,〈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년. (Grand Palais RMN/Musée du Louvre )

자크-루이 다비드,〈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년. (Grand Palais RMN/Musée du Louvre )


1785년 파리의 살롱전에 전시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로마 건국 신화의 한 장면을 상상적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로마의 호라티우스 가문은 알바의 쿠리아티우스 가문과 전쟁 상태에 있었으나, 전면전 대신 양측에서 각각 세 명의 대표를 내세워 제한된 결투로 승부를 가리기로 합의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양편 모두 상대편 전사의 자매와 혼인 관계에 있는 인물이 한 명씩 있었다. 다시 말해, 누가 승리하든 슬픔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다비드는 전투에 앞서 호라티우스 삼 형제가 아버지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장면을 그려냈다. 그러나 실제로 역사 문헌 어디에도 그러한 맹세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 장면은 전적으로 다비드가 창조해낸 것이다.


아버지는 몸을 뒤로 젖힌 채 높이 치켜든 세 자루의 검을 들고 있고, 비틀린 자세의 아들들은 그 검을 향해 손을 뻗는다. 혈관이 도드라진, 몸을 지탱하는 남성들의 다리는 맹렬한 결의를 말해준다. 벌어진 손들은 의례화된 긴장이 응축된 하나의 안무처럼 맞물린다. 반면, 다가올 비극을 예감한 여성들과 아이들은 떨어진 곳에서 서로 몸을 의지한 채 쓰러질 듯 웅크리고 있다.


"이 그림을 떠받치는 가장 깊은 신념은 아마도 폭력이 문제의 해답이라는 믿음일 것이다"라고 미술사학자 마이클 레비는 썼다.


관객들은 전율에 휩싸였다. 이 그림은 무언가가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그로부터 5년 뒤, 다비드가 '테니스 코트의 서약'—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 1789년의 집회—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마치 로마를 무대로 한 그의 고도로 인위적인 구상이 파리에서 세계사적 사건들을 그의 눈 앞에서 전개되도록 촉발한 것처럼 느껴졌을 법하다.


그는 자신이 벌어진 일들에 일조했다는 자의식을 갖게 되었다.


차분한 '신고전주의'라는 꼬리표에서 다비드를 해방시키고자, 루브르의 큐레이터인 세바스티앵 알라르와 콤 파브르는 그를 "강한 신념으로 가득 찬 자유로운 정신"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과연 자유로운 정신이면서 동시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황제의 수석 선전가일 수 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신념이 끊임없이 바뀐다면, 그 신념은 과연 얼마나 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은 또한 다비드가 "아카데미즘의 적이었으며, 1792~94년 로베스피에르와의 그의 정치적 결속 때문에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고 주장한다.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와의 연계가 그에게 치명적이었음은 사실이다. 혁명적 도취가 정점에 달했을 때, 다비드는 아카데미에 맞서 격렬하게 싸웠다. 그러나 그 열기가 가라앉자, 그는 오히려 그 아카데미의 권위에 순응적인 대표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가 '정치적 연계에 대해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는 주장에 대해서라면, 그보다 훨씬 더 큰 대가를 치른 이들이 많았다는 점을 지적하는 일은 너무나 쉬워 보인다. 다비드의 자코뱅파 동지였던 장 폴 마라(암살됨)와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단두대에서 처형됨)뿐만이 아니다. 다비드가 열성적으로 사형에 찬성표를 던졌던 국왕, 그가 심문을 감독했던 일곱 살의 왕세자, 그리고 다비드가 직접 서명한 체포영장으로 구속된 시민들 역시 떠올리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들은 일단 제쳐두자. 우리는 예술을 보러 온 것 아닌가? 다비드의 주요한 미학적 성취가 기독교적 도상과 고대의 도상을 설득력 있게 현재로 옮겨온 데 있다면, 이를 이보다 극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마라의 죽음〉 말고는 없을 것이다.


그가 이 작품을 그릴 당시, 프랑스는 전쟁 중이었고 공포정치는 한창 절정에 달해 있었으며, 다비드는 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마라는 한때 의사였으며, 고발을 전문으로 하는 신문 '인민의 벗'을 창간했다. 널리 증오의 대상이었던 그는 건강 또한 좋지 않았고, 극심한 가려움증을 완화하기 위해 자주 목욕을 해야 했다. 그는 욕조에서 원고를 집필하던 중, 회색 눈에 적갈색 머리의 샤를로트 코르데가 교묘하게 집에 들어가서는 오른쪽 그의 폐를 칼로 찔렀다.


실제로 벌어졌을 법한 그 끔찍한 장면을 먼저 상상해 보라. 그런 다음 이 그림을 보라. 흠잡을 데 없이 구성되고, 극도로 정제되었으며, 의도적으로 카라바조의〈그리스도의 매장〉을 연상시키는 분위기를 띠면서도, 동시에 놀라울 만큼 구체적인 현실성을 품고 있다.


다비드는 암살 전날 마라를 방문했다. 그는 뒤집어 놓은 상자를 책상 삼아 글을 쓰고 있었고, 식초에 적신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다비드는 이러한 세부를 모두 작품에 담아, 마라가 숨을 거두는 바로 그 순간을 그려냈다. 그의 손에는 아직도 펜이 쥐어져 있다.


다비드는 과거의 (충격적인) 뉴스를 새로운 유형의 고급 예술로 전환함으로써, 마네의〈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이나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같은 작품들로 이어지는 선례를 확립했다. 이 그림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환기하며, 순교의 수사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놀랄 만큼 현대적이다. 아니타 브루크너의 표현을 빌리면, 이 작품은 사후 세계에 대한 위안의 기미를 전혀 남기지 않은 채, 죽음을 "예기치 않게, 즉흥적으로, 리허설 없이" 찾아 오는 것으로 묘사한다.


공포정치가 막을 내리자 다비드는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고, 다시 구금되는 일을 겪었다. 그는 마침내 1795년 10월에야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양심이 깨끗하다고 주장했다. "다행히도," 그는 거짓말을 하며 말했는데, "나의 잘못으로 나 자신 외에는 아무도 안 다쳤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내가 비난받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사상의 과도한 표현 정도일 뿐이다." 그리고 "내 의도는 언제나 순수했기 때문에 비난받을 만한 행위를 단 한번도 저지른 적이 없다."


다비드는 감옥 안에서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라는 그림을 구상했고, 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에는 4년이 걸렸다.


자크-루이 다비드,〈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1799년. (Grand Palais RMN/Musée du Louvre)

자크-루이 다비드,〈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1799년. (Grand Palais RMN/Musée du Louvre)



이 그림은 로마 건국 전설의 또 다른 에피소드를 다시 무대에 올린다. 이는 강간—혹은 인류학자들이 말하는 '약탈혼'—의 이야기로, 사비니족의 왕이자 헤르실리아의 아버지, 로마의 건국자이자 헤르실리아의 남편 로물루스, 이 두 전사 사이에 선 헤르실리아에 대한 것이다. 잊을 수 없는 자세로 서 있는 그녀는 두 사람에게 싸움을 멈추라고 간청한다. 그녀의 발치에 놓인 아이들과 어머니들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혼인과 혈연의 뒤섞임을 통해 서로 얽혀 있다. 싸움은 이제 무의미하다.


정치적 싸움을 끝내자는 다비드의 공개적 호소는 너무 늦었던 것일까? 그 문제는 더 이상 따질 필요가 없다. 불과 몇 년 뒤, 다비드는 자신의 예술을 제국의 전쟁광,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봉사에 바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크-루이 다비드, 〈그랑 생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보나파르트〉, 1800년. (Grand Palais RMN/Musée National des Châteaux de Malmaison et Bois-Préau, Rueil-Malmaison)

자크-루이 다비드, 〈그랑 생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보나파르트〉, 1800년. (Grand Palais RMN/Musée National des Châteaux de Malmaison et Bois-Préau, Rueil-Malmaison)


나폴레옹 시대가 막을 내릴 무렵, 오페라 극장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야유를 받던 고집 세고 심술 궂은 인물 다비드는 이미 수많은 제자들과 낭만주의 화가들에게 그 위상을 내주고 있었다.


나폴레옹 제정 붕괴 이후 망명지에서 보낸 10년 동안 그는 더욱 빛을 잃어갔다. 그러나 망명에서 돌아오라는 제안에 대한 그의 답변이 보여주듯, 그는 자신의 성취에 대해서만큼은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몫의 약속을 이미 충분히—그리고 그 이상으로—이행했다고 믿었다.



《자크-루이 다비드》전, 파리 루브르 박물관, 1월 26일까지.



세바스찬 스미(Sebastian Smee)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워싱턴포스트의 미술평론가이자 '라이벌의 예술: 모던 미술의 네 가지 우정, 배신, 돌파구The Art of Rivalry: Four Friendships, Betrayals and Breakthroughs in Modern Art'의 저자다. 보스턴글로브에서 근무했고, 런던과 시드니에서는 데일리 텔레그래프, 가디언, 스펙테이터, 시드니 모닝 헤럴드를 위해 일한 바 있다.


역자 이희정은 영국 맨체스터대 미술사학 박사이며, 역서로 '중국 근현대미술: 1842년 이후부터 오늘날까지'(미진사, 2023)가 있다.



1877년 창간돼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과 함께 미국의 대표적인 일간지로 손꼽힙니다. 닉슨 대통령의 사임으로까지 이어진 1972년 워터게이트 스캔들 보도로 유명합니다. 2013년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가 인수한 이래 디지털 전환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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