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형상

19세기 이래 선형적 시간 개념은 서구인들이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그래픽=PADO (생성 AI 사용)

시간만큼 우리에게 친숙하면서도, 막상 정의하려 들면 난해한 개념도 드물 것입니다. 누구나 시간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이내 말문이 막히고 맙니다.


호주의 온라인 매체 이온aeon은 지난 1월 16일 자 에세이를 통해 시간이 직선처럼 흐른다는 '선형적 시간관'이 19세기 무렵 정착되었다고 소개했습니다. 영국 더럼대학교의 철학사가인 필자는 이러한 시간관이 자리 잡게 된 배경을 여러 역사적 현상과 결부해 설명합니다. 하지만 현상 이면에 존재했을 철학적 지각 변동을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한 점은 다소 아쉽습니다. 역사적 사건들이 선형적 시간관을 낳았다기보다는, 오히려 선형적 시간관이 역사의 흐름을 그러한 방향으로 추동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간의 속성이 선형적인지 순환적인지, 혹은 그 화살이 미래를 향하는지 과거로 흐르는지에 대한 논쟁은 인류 지성사의 오랜 화두였습니다. 앙리 베르그송이나 버트런드 러셀이 탐구했던 시간의 실재성, 즉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도 실재한다는 개념 또한 곱씹어 볼 만한 대목입니다. 분명한 것은 "세상은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진보한다"라는 믿음이 보편적 진리는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인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믿지만, 고전적 세계관 속의 이상향은 언제나 과거에 존재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은 타락하며, 옛 성현의 지혜를 따라야만 비로소 이상향으로 회귀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시간을 공간의 한 차원으로 해석한 찰스 힌턴의 '4차원' 개념도 흥미롭습니다. 이는 어쩌면 강한 기독교적 세계관의 또 다른 발로일지 모릅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인간의 인식 속에서만 흐를 뿐, 실제로는 하나의 공간 안에 이미 공존하고 있다는 관점은 모든 것이 신의 구상 속에 있다는 섭리와 맥을 같이 합니다. 모든 것이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생각과도 일맥상통하며, 선형적 시간관만큼이나 인류를 지배해 온 강력한 사유였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시간의 흐름은 과연 절대적인 것일까요. 시간이란 무엇인지, 독자 여러분께 다시 한번 묵직한 화두를 던져 봅니다.

"시간은 선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스탠퍼드 철학백과사전은 말한다. 우리는 과거가 우리의 뒤로 한 줄로 늘어서 있고 미래는 보이지 않는 선으로 앞에 펼쳐져 있다고 상상한다. 우리는 현재라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화살을 타고 간다. 하지만 시간에 대한 이러한 그림은 자연스러운 게 아니다. 그 본격적 뿌리는 겨우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 개념은 이제 서양 사상에 너무나 깊이 자리 잡아서 시간을 다른 어떤 것으로 상상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에 대한 이 새로운 표현 방식은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서부터 시간 여행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들에 영향을 미쳤다.


고대 그리스로 여행을 떠나보자. 파피루스 두루마리와 자줏빛 무화과 속에서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창조 신화인 '티마이오스'는 시간을 천체의 움직임과 연결했다. 신은 "시간의 탄생"을 위해 태양, 달, 그리고 다른 별들을 "창조"했다. 그것들은 하늘에 원을 그리며 일, 월, 년을 만들어낸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수많은" 다른 천체들의 "유랑" 또한 시간을 만든다. 그들의 모든 방랑이 "함께 완료될" 때, 그들은 "완전한 한 해perfect year" 안에서 "완결"을 이룬다. 이 "대년Great Year"의 끝에 모든 천체는 그들의 순환을 마치고 처음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는 수천 년에 걸쳐 우주의 한 주기를 완성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이러한 시간관 또한 퍼져나갔다. 예를 들어 그리스와 로마의 스토아학파는 시간을 그들의 '영원 회귀' 교리와 연결했다. 우주는 무한한 순환을 겪으며 불 속에서 끝나고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시간관은 순환적이다. 시간은 사건이 발생하고, 지나가고, 다시 발생하는 반복적인 주기로 구성된다. 이는 자연의 과정을 반영한다. 낮과 밤. 여름에서 겨울까지. 역사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1987)에서 설명하듯이 서양에서 순환적 개념은 고대 사상을 지배했다. 이는 성경에서도 암시된다. 예를 들어, 전도서는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라고 선포한다. 그러나 굴드는 성경이 선형적 시간 개념 또한 포함하고 있다고 쓴다. 시간이 반복 불가능한 사건들의 단방향 순서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성경 역사를 예로 들어보자. "신은 한 번 지구를 창조하고, 노아에게 단 하나의 방주를 타고 유일무이한 홍수를 견뎌내라고 지시한다." 굴드는 이러한 역사에 대한 선형적 이해를 유대 사상의 "중요하고 독특한" 기여로 묘사한다. 성경 역사는 선형적 시간 개념에 힘을 실어주었다.


순환적 시간 개념과 선형적 시간 개념은 수 세기 동안 나란히 번성했으며 때로는 서로 모호하게 섞이기도 했다. 어찌됐든 우리는 자연적이고 순환적인 계절과 함께 출생, 초혼, 죽음과 같은 반복 불가능한 사건들을 겪으며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중세와 근대 초기 사람들은 순환적 시간을 말 그대로 원으로 보지 않았고, 선형적 시간을 선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프록코트, 페티코트, 수이트푸딩suet pudding의 19세기 세계에서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시간의 선형 모델이 점차 우세해졌고 사상가들은 말 그대로 시간을 선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해 나는 네 가지 핵심적인 발전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는 역사적 사건을 표현하는 기술인 연대기chronography이다. 역사학자들은 항상 페이지에 사건을 가장 잘 표시하는 방법을 두고 고심해왔으며 고대부터 널리 쓰인 해결책은 날짜를 표시하는 격자인 '연표'에 있었다.


결정적인 혁신은 '타임라인'의 발명에 있었다. 다니엘 로젠버그와 앤서니 그래프턴이 그들의 아름다운 커피 테이블 북 '시간 지도의 탄생Cartographies of Time'(2010)에서 상술하듯이, "단일 축과 규칙적이고 측정된 날짜 분포를 가진" 타임라인의 "현대적 형태"는 18세기 중반에 등장했다. 1765년, 산소의 공동 발견으로 가장 잘 알려진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세계 최초의 현대적 타임라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발명했다.


그의 '생애 도표'(1765)에서 시간은 기원전 1200년부터 (당시의) 현재까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른다. 2000개가 넘는 작은 선들이 키케로,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아이작 뉴턴과 같은 인물들의 생애 기간을 꼼꼼하게 나타낸다. 선을 사용하여 시간을 표현하는 그의 방법이 너무나 새로웠기 때문에 프리스틀리는 그것을 정당화할 필요를 느꼈다.


"시간은… 측정 가능한 공간, 특히 선이라는 개념으로 우리 마음속에 자연스럽고 쉽게 표현될 수 있으며 선은 시간처럼 너비나 두께에 대한 개념 없이 길이로만 확장될 수 있다." "따라서 더 길거나 짧은 시간은 더 길거나 짧은 선으로 가장 편리하고 유리하게 표현될 수 있다."


로젠버그와 그래프턴은 '생애 도표'를 "획기적"이고 "분수령"이 되는 작품으로 묘사한다. "아주 짧은 기간 사이에 프리스틀리 도표의 변형들이 거의 모든 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세기 동안 역사를 타임라인 형태로 구상하는 것은 제2의 천성이 되었다." 로젠버그와 그래프턴은 설명한다. 예를 들어 선 그래프와 막대 차트의 발명가인 윌리엄 플레이페어는 프리스틀리의 타임라인을 자신의 작업의 선구자로 꼽았다. 로젠버그와 그래프턴은 다음 50년에 걸쳐, 한 축은 시간을, 다른 축은 수출과 같은 경제적 척도를 사용한 플레이페어의 선 그래프가 "가장 인지하기 쉬운 연대기 형태 중 하나"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찰스 디킨스의 시대에 이르러 타임라인은 책, 포스터, 신문 전반에 걸쳐 흔해졌다.


두 번째 핵심 발전은 진화와 관련이 있다. 19세기 초반, 과학자들은 진화 과정의 선형 및 순환 모델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은 종의 진화가 지구 상에서 반복 가능한 패턴을 따를 수 있다고 가정했다. 이는 "기후의 순환"에 따라 "익룡이 다시 공중을 날아다닐지도 모른다"는 인상적인 주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찰스 다윈의 연구와 함께 순환 모델은 자취를 감췄다. 다윈의 저서 '종의 기원'(1859)은 진화를 선형적인 관점에서 구상한다. 책에는 말 그대로 펼쳐지고 갈라지는 선들을 사용하여 시간의 흐름에 따른 종의 진화를 묘사하는 도표들이 있다. 이 도표들은 시간의 선형 모델을 가정한다. 시간은 페이지 하단의 과거에서 상단의 현재로 선형적이고 수직적인 방식으로 흐른다. 굴드는 다윈의 진화를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선형적인 "화살", 다시 말해 "복잡하고, 독특하며, 반복 불가능한 사건들의 기이한 연속"으로 묘사한다.


세 번째 핵심 발전은 1870년대에 등장한 연속 사진술chronophotography이다. 이 새로운 예술 형식은 연속적인 이미지를 통해 움직임을 포착했다. 연속 사진술은 말의 질주와 같은 시간적 과정을 페이지 전체에 펼쳐 보여줌으로써 시간을 공간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작가 에티엔쥘 마레는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움직임'(1894)의 서두를 프리스틀리에게서 직접 가져온 듯한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시간은… 다양한 길이의 직선으로 그래픽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


마지막 발전은 수학에서 비롯되었다. 바로 4차원 이론이다. 인간은 길이, 너비, 깊이라는 세 가지 공간 차원을 인식한다. 그러나 수학자들은 오랫동안 더 많은 차원이 있다는 이론을 제시해왔다. 1880년대에 수학자 찰스 힌턴1은 이러한 아이디어를 대중화했고 거기서 더 나아갔다. 힌턴은 공간에 4차원이 있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을 그 차원과 동일시했다. 힌턴은 인간 의식의 한계 때문에 우리가 4차원 물체를 변화하는 3차원 물체로 인식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은 실제로는 변하지 않는 4차원 공간이란 것이다. 우리가 '시간'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잘못 인식된 '공간'이다. 힌턴에 따르면 세상은 "이제까지 존재했거나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이 공존하는 거대한 전체"이다. 힌턴은 시간을 선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을 공간의 차원으로 묘사하는 것은 만약 시간 자체만 놓고 본다면 그것이 선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 힌턴의 연구는 19세기의 분위기 속으로 빠르게 흡수되었고 곧 1880년대의 다른 사상가들도 공간의 4차원을 시간과 동일시하게 됐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시간을 선으로 표현하는 것은 단지 유행을 넘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오늘날 그러한 것처럼 그때도 사람들은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다르게 표현할 수 있었을지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역사학에서 시간을 선으로 이해하는 것은 인류가 진보하고 있다는 개념을 부채질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우리의 타임라인 발명가인 조지프 프리스틀리가 부분적으로 이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는 밀가루 제분소, 리넨, 시계, 창유리 등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든 발명품들을 나열한 적이 있다. 그의 '생애 도표'는 인류 진보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인 견해를 증명했다. 도표는 인물들을 '예술가 및 시인', '수학자 및 의사', '신학자 및 형이상학자' 같은 그룹으로 분류한다. 그의 도표를 다시 살펴보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인물들이 점점 더 많이 나타나는 걸 볼 수 있다. 이는 인류가 개선되고 있다는 프리스틀리의 믿음을 확증했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에게 진보에 대한 믿음은 급속한 과학 및 기술 발전에 힘입어 커져만 갔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철도 시스템, 전구, 전신, 타자기, 냉장고, 전화기의 발명을 목격했다. 역사학자 토머스 머콜리는 이렇게 주장했다. "잉글랜드의 역사는 단연코 진보의 역사다." 그러한 서사는 다윈의 진화론적 사상을 통해 더욱 지지를 받았다.


다윈의 진화 도표는 갈라지는 가지가 있는 나무를 닮았다. 과학사학자 피터 볼러Peter Bowler가 설명하듯이 이것은 "진화에는 주된 흐름이 없으며 따라서 특별한 목표도 없다"는 것을 적절하게 암시한다. "인류는 동물 진화의 필연적인 최종 산물이 아니라 그 조상들이 처한 독특한 상황의 조합에 의해 형성된 이례적인 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윈은 '종의 기원'이 진보주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도록 확실히 해두었다. 예를 들어 책은 생명체가 노골적으로 "완벽함을 향해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고 기술한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여 진화를 그들의 더 넓은 진보 이야기에 쾌활하게 통합했다. 다윈의 진화는 가지가 많은 나무가 아니라 화살로 묘사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종들은 덜 완벽한 것에서 더 완벽한 것으로 일직선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철학에서 시간을 선으로 인식하는 것은 과거와 미래의 실재성에 대해 논쟁하게 만들었다. 선을 상상해 보라. 그 모든 부분을 구성하는 잉크의 파편들이 존재한다. 시간을 선으로 상상하면 이는 우리로 하여금 시간의 모든 부분 또한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1870년대에 독일 철학자 헤르만 로체Hermann Lotze는 이에 대해 불안해했다. "우리는 시간을 선이라고 말하지만 선의 개념은 모든 요소에 동등하게 속하는 실재성의 개념을 포함한다. 하지만 시간은 그렇지 않다." 로체는 썼다. 로체에게 시간이 선이라면 그것은 오직 "하나의 실재하는 지점", 즉 "현재"만을 보유할 것이다.


20세기 초 철학계에서는 과거와 미래의 실재성에 대한 대대적인 논쟁이 벌어졌다. 내 생각에 이러한 논쟁은 시간이 선이라는 새로운 생각에 의해 촉발되었다. 이 논쟁의 한쪽에는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 로체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앙리 베르그송 또한 미래의 비실재성을 주장하며 시간의 선형적 개념을 공격했다. 그의 첫 저서인 '시간과 자유의지'(1889)는 격렬하게 "시간은 선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재미있게도 이 책의 영어 번역본에서 '선line'에 대한 색인 항목은 '시간은 ~가 아님time not a'이란 참조문구를 달고 있다. 이후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1907)는 시간의 진정한 본질을 포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연속 사진술과 영화 촬영술이라는 새로운 예술을 공격한다. "말의 질주에서 우리 눈은 주로 특징적이고, 본질적인… 형태를 인지한다." 대조적으로 "순간 사진술"은 말의 질주를 공간적으로 "펼쳐놓으며" 단지 "양적 변화"만을 묘사한다. 사람의 눈은 사진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말의 질주 형태를 포착한다.


이 논쟁의 다른 한편에는 영국의 철학자 빅토리아 웰비Victoria Welby 같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는 연속 사진술과 4차원을 이용하여 시간이 말 그대로 공간이라고 주장했다. 과거는 우리가 방금 지나온 땅 한 조각처럼 실재하고 미래는 "주어진 지평선 아래"에서 기다리는 나라처럼 실재한다. 버트런드 러셀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만큼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새로운 예술 형식을 상기시키며 러셀은 자신의 견해를 자랑스럽게 "영화적인" 것이라고 묘사한다. 그의 동료인 새뮤얼 알렉산더 또한 과거, 현재, 미래의 실재성을 주장했으며 비슷하게 영화적인 이론을 제시한다. 만약 우리가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과거 사건들은 "사라지지" 않음을 보게 되리라고 알렉산더는 주장한다. 그것들은 단지 "필름에서 뒤로 이동했을" 뿐이다. 우리의 현재는 현실이라는 필름 뭉치 위에서 단지 더 앞쪽으로 나아갔을 뿐이다.


시간을 선으로 생각함으로써 생겨난 최고의 발전은 물론 시간 여행이었다. 사람들은 수 세기 동안 꿈이나 환상을 통해 이런저런 방식으로 과거나 미래를 방문하는 걸 상상해왔지만 HG 웰스는 여기에 완전히 새로운 과학적 해석을 부여했다. 그의 소설 '타임머신'(1895)은 우리가 어떻게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 힌턴의 '4차원'을 직접적으로 이용했다. 소설 속 시간 여행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실제로는 네 개의 차원이 있는데 셋은 우리가 공간의 3차원이라 부르는 것이고, 네 번째는 시간이에요. 하지만 앞의 세 차원과 뒤의 차원 사이에 비현실적인 구분을 두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우리의 의식이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후자를 따라 한 방향으로 간헐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죠…


이것이 4차원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입니다… 단지 시간을 보는 또 다른 방법일 뿐이에요."


수십 년 후, 웰스는 소설의 핵심을 "시간이 4차원이며 보통의 현재는 4차원 우주의 3차원 단면이라는 생각"이라고 묘사했다. 이는 힌턴의 사상과 다름없다.


'타임머신'은 또한 기꺼이 시간을 선으로 생각한다.


"과학적인 사람들은… 시간이 단지 공간의 한 종류일 뿐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아요. 여기 대중적인 과학 도표인 기상 기록이 있어요. 제가 손가락으로 긋는 이 선은 기압계의 움직임을 보여주죠. 어제는 이렇게 높았고 어젯밤에는 떨어졌어요… 분명 수은이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공간의 어떤 차원에서도 이 선을 그리지는 않았겠죠? 하지만 확실히 그것은 그런 선을 그렸고 따라서 그 선은 시간-차원을 따라 그려졌다고 결론 내려야 해요."


기압계의 선은 시간을 통해 그려졌고 그것을 공간의 또 다른 차원으로 만들었다. 물론, 웰스의 이야기에서 시간을 공간의 4차원으로 생각하는 것은 시간 여행을 가능케 한다. 등장인물 하나는 이렇게 주장한다. "시간이 공간적 차원임을 인정하면… 시간 속을 여행하는 것이 가능해져요." 웰스 이후, 시간 여행 이야기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한 비평가는 웰스를 "시간 여행의 문학적 선구자"라고 칭했다.


오늘날에도 시간을 선으로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만연해 있다. 타임라인은 진화의 역사, 비디오 게임의 역사, 초콜릿의 역사 등 어디에나 있다. 심지어 타임라인의 타임라인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의 영향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한다. 철학자들은 계속해서 과거와 미래의 실재성에 대해 논쟁한다. '오직 현재의 것만이 존재한다는 견해'인 '현재주의'에 대한 방대한 백과사전 항목을 확인해 보라. 시간 여행 이야기는 넘쳐난다. '백 투 더 퓨처'. '사랑의 블랙홀'. '시간 여행자의 아내'. 역사학자들은 인류의 진보에 대한 빅토리아 시대의 믿음을 대부분 버렸지만 특정 분야에 대한 진보 서사는 여전히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이 타임라인을 보라. 그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기술적 진보를 명료하게 묘사한다. 이 모든 생각은 시간이 선이라는 개념에 의해 힘을 얻는다. 만약 우리가 시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재구성한다면 아마도 이러한 다른 생각들 또한 새로운 형태로 변모한 걸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에밀리 토머스는 영국 더럼대학교의 철학과 교수이다. 주요 학술서로 '절대 시간: 근대 초기 영국 형이상학의 균열Absolute Time: Rifts in Early Modern British Metaphysics'(2018), 빅토리아 웰비Victoria Welby'(2023), 그리고 출간 예정인 '리얼 타임: 영국 형이상학의 재발명Real Time: A Reinvention in British Metaphysics 1883-1928'이 있다. 또한 대중 교양서 '여행의 의미: 해외로 떠난 철학자들The Meaning of Travel: Philosophers Abroad'(2020)을 집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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