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이 칼보다 강하다: 대영박물관 사무라이 전시

이 장대한 전시는 무시무시한 전사들이 전쟁이 끝난 뒤 어떻게 살았는지 보여준다

1519년 제작된 투구와 1596년 제작된 갑옷을 포함한 사무라이 갑옷 구성 ©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대영박물관의 새로운 사무라이 전시에 들어서면, 적절히 연출된 음산한 조명 속에서 관람객은 예상할 법한 바로 그 이미지를 마주하게 된다. 눈길을 압도하듯 고독하게 놓인 한 벌의 갑옷이 매혹적이면서도 위협적인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 전시는 전투태세의 사무라이에 대한 모든 기대를 충족시키는 듯하면서도 곧바로 관람객의 선입견을 뒤집는다.


우선, 눈앞에 있는 것은 단일한 갑옷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쳐 서로 다른 시기에 만들어진 부품들을 짜 맞춰 구성한 집합체이다. 용 장식이 달린 투구는 1519년 제작품이고, 흉갑은 1696년의 것이며, 상대적으로 더 쉽게 손상되는 몸통 덮개는 비교적 후대의 것으로 전장에서의 기동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옻칠한 생가죽과 철을 엮어 만든 구조다. 그런데 또 하나의 반전이 있다. 이 갑옷은 실제로 착용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사무라이 전시 전경 ©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사무라이는 중세에 획득한 무시무시한 명성과는 달리, 상당한 기간 동안 실제 전투에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사무라이'라 불리지도 않았는데, 이 단어는 일본어로 '섬기는 사람들'에서 유래한다. 더 일반적인 명칭은 "무샤(武者)" 또는 "부시(武士)"였다.


전쟁의 시기에도 사무라이는 예술가이자 예술 후원자였다. 이후 평화기에는 행정관, 관료, 심지어 소방관이 되었다. 그들의 활동 무대는 다다미 방, 궁정 정자 그리고 다실이었다. 그들은 칼보다 붓에 더 가까운 존재였다.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족자 그림 〈귀신의 섬에 있는 미나모토노 다메토모〉, 1811년 ©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1603년부터 1868년 일본의 개항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도쿠가와 막부 시기, 즉 전제적 평화의 시대 동안 사무라이가 하지 않았던 단 한 가지는 전쟁이었다. 1871년 일본이 영국의 제도를 본떠 근대적 우편제도를 창설했을 때에도 많은 우체국의 운영은 이미 관료 계층으로 자리 잡은 전직 사무라이들에게 맡겨졌다.


이번 장대한 새로운 전시의 강점은 통념을 깨는 데서 오는 즐거움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이다. 로지나 버클랜드와 조 닉올스가 대영박물관을 위해 기획한 이 전시는 일본인과 외국인을 막론하고 여러 세대에 걸쳐 왜곡되고 활용되어 온 사무라이 이미지의 복합성을 외면하기는커녕, 관람객이 지닌 오해를 능숙하게 활용해 미묘하게 바로잡는 데에서 묘미를 찾는다. 그 기원이 안개처럼 희미한 8세기 헤이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무라이는 '사실 반 허구 반'의 이야기와 기원 신화를 만들어 왔다.


전시물은 아름답다. 치명적 은빛을 띠도록 단련되고 두드려 만든 검, 칠기 장식함, 비단 족자, 화려한 투구들(이 중 하나는 둥근 가지 모양이다), 눈부신 목판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포괄적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히 규모가 크면서도 이해를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단정하게 구성된 이번 전시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사무라이가 실제로 전쟁을 하고 있었던 시기를 다루되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방식과는 다소 다른 양상을 조명한다. 두 번째는 최고 권력자인 쇼군이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던 시기를 다루며, 이때의 사무라이는 적의 목을 베기보다는 서예 수련에 더 몰두하는 존재에 가까웠다.


<18세기 나비 문양 장식 투구>, National Museum of Japanese History.


<도마루 구소쿠 갑옷>, 1700–1800년, 일본, 개인 소장 © Courtesy of Patrick SYZ Limited. Matthew Hollow Photography


세 번째는 사무라이의 이미지가 가장 강고해졌다고도 할 수 있는 시대를 다룬다. 역설적이게도 이는 1869년 무렵 사무라이 계층이 폐지되어 칼을 버리고 일본의 근대화 추진에 동참해야 했던 이후의 시기다. 사라진 후 허깨비같은 이름만 남은 이 시대 동안 사무라이는 때로는 흠잡을 데 없는 예절을 갖춘 중세 기사로, 때로는 일본적 무사도의 상징으로, 심지어는 '스타워즈'의 원형처럼 다양하게 그려졌다.


각 시대는 음향 연출을 통해, 또는 한 경우에는 지브리 스튜디오를 연상시키는 애니메이션을 벽면 전체에 투사하는 방식으로 생동감 있게 구현된다. 안개 낀 보랏빛 화면 속에는 기마 전사들 간의 전투가 펼쳐지며, 피가 튄 채 떨어져 나간 머리를 암시하는 장면으로—노골적 묘사가 아니어서 다행이다—마무리된다. 또 다른 연출은 막부 권력의 중심지이자 훗날 도쿄가 된 에도(江戶)의 모습을 방 길이만큼 재현한 모형으로, 1720년 무렵 인구 100만 명을 거느린 세계 최대 도시였던 당시의 풍경을 보여준다.


이 전시가 바로잡는 통념 가운데 하나는 사무라이가 주된 살상 수단으로 칼을 사용했다는 생각이다. 칼은 황실 권위를 상징하는 무기로 실제 사용되기는 했지만, 그 사용 빈도는 제한적이었다. 전사들은 칼 대신 대개 말을 타고서는 활과 화살, 칼날을 단 창, 그리고 16세기 포르투갈인의 도래 이후에는 총기를 휴대했다.


화려하게 장식된 두루마리 그림에는 유명한 전투 장면들이 낭만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중에는 아름다운 젊은이를 살해한 죄를 참회하기 위해 승리한 자가 불교 승려가 되는 이야기도 포함된다. 초기의 전투는 아마도 잘 짜여진 대결의 판이라기보다 소규모 난전(亂戰)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치명적일 수 있었다. 새롭게 부상하던 사무라이 계층 가운데 일부는 농민이거나 자영농의 피고용인이었으며, 주된 전리품인 토지를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건 싸움을 벌였다.


전리품을 차지하려면 자신이 누구를 죽였는지 입증해야 했다. 중세식 전과(戰果) 정산의 섬뜩한 관행 속에서, 사무라이는 패한 적의 수급(首級)을 보여줌으로써 승리를 보고했다. 긴 칼날이 달린 창으로 안전한 거리에서 잘려 나간 수급은 씻겨지고 기록되며 표식이 붙었는데, 이러한 작업은 사무라이 여성들이 맡았다. 전시 곳곳에는 사무라이의 절반이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단서들이 제시된다.


<여성용 소방 재킷과 두건>, 1800–1850년경, John C. Weber Collection. Photo © John Bigelow Taylor


많은 사무라이 여성은 교양을 갖춘 궁정 여관(女官)이자 수준높은 예술가가 되었다. 두툼한 자수 기모노, 옻칠 화장 도구 세트, 그리고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오하구로(齒黑) 도구 등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는데 필요한 것들이 소개된다.


1603년부터 전개된 사무라이 역사의 제2기는 정체성의 위기를 보여준다. 싸울 수 없는 시대에 전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 것이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후 260년 이상 지속될 평화를 강제했다. 다이묘로 불린 봉건 영주들은 각자의 영지에서 지위를 유지했지만, 그 대가로 가족을 에도에 인질로 남겨두어야 했다.


토지를 박탈당하고 거주가 조카마치(城下町)로 제한되며 전투가 금지된 사무라이는 대거 문화 활동으로 전환했다. 다만 버클랜드가 지적하듯, 그들은 그 전에도 수세기 동안 예술의 후원자이자 실천자였다. 이제 세습 계급으로 자리 잡아가던 초기에는 세련됨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해졌다. 버클랜드의 말대로, "그들은 신흥 귀족이었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세련되어야 했다."


이 섹션은 정교한 고급 예술과 그에 대응하는 대중적 표현으로 가득하다. 한 점의 춘화(春畫) 목판화에는 사무라이가 유곽의 여인에게 삽입하는 성행위 장면이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물론 칼을 삽입한 것은 아니다.


전시 동선을 따라 모퉁이를 돌면 거의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1869년 사무라이 계층 폐지." 무엇이 벌어진 것일까. 수세기에 걸친 군사력의 약화 속에서 일본은 제국주의적 침략을 막아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853년 미국 군함이 에도만에 출현했고, 이어진 막부의 우유부단 속에서 하급 사무라이 연합 세력이 행동에 나섰다.


그들은 혁명을 주도했는데, 정통성의 상징으로 황실을 끌어들였다는 이유에서 '메이지 유신'이라는 다소 어색한 이름으로 불린다. 실제로 이는 세계에서 가장 신속하게 진행된 근대화 과정이었으며, 버클랜드의 표현대로 사무라이는 그 속에서 "스스로를 개혁해 자멸한" 계층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무라이가 가장 강력한 상징성을 띠게 된 것은 그들이 폐지된 이후의 시기였다. 한동안 서구적 이미지에 전적으로 잠식되었던 도상 체계의 공백기를 거친 뒤, 일본은 신화화된 과거 속에서 정체성을 다시 찾고자 했다. 그 중심에는 사무라이가 자리했다.


하야카와 쇼잔, 〈나마무기에서의 살해〉, 1877년 ©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한 전시 진열장에는 니토베 이나조의 1899년 고전 '무사도: 일본의 영혼'이 놓여 있다. 이는 외국인을 위해 영어로 집필된, 사무라이 규범을 절반쯤은 창작해낸 서술이었다. 이후 일본어로 번역되면서, 제국의 영광을 위해 죽음을 배워야 했던 신식 군대를 위한 선전 도구로 활용되었다. 가미카제 조종사들은 사무라이 검을 쥔 모습으로 묘사되곤 했지만, 실제로는 그 검이 너무 커서 협소한 조종석에 넣기조차 어려웠다.


일본의 파시스트 동맹국들 역시 사무라이 이미지를 차용했다. 한 점의 판화에는 고질라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존재가 바다를 가로지르며 연합군 군함을 격파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사라진 명예로운 과거의 상징으로 사무라이를 그려냈으며, 1970년에는 예법에 맞춘 '할복'을 실행하기도 했다. 1960년대 이후에는 전설적인 "샐러리맨"들 또한 사무라이식 자기희생 정신으로 출근길에 나서는 존재로 형상화되었다.


사무라이 전시 전경 ©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요컨대 사무라이 신화는 그때그때의 시대적 목적에 맞게 굴절되고 변형된 채 오늘날까지 살아 있다. 전시의 마지막에는 사무라이 가문 문장 하나가 수천 개의 움직이는 이미지로 분열되는 영상 화면이 등장한다. 이 영상처럼 사무라이는 바이럴이 되어있다.



전시는 5월 4일까지, britishmuseum.org




데이비드 필링은 전 파이낸셜타임스(FT) 도쿄 지국장이자 'Bending Adversity: Japan and the Art of Survival(역경을 굽히다: 일본과 생존의 기술)'(Allen Lane, 2014)의 저자다.


역자 이희정은 영국 맨체스터대 미술사학 박사이며, 역서로 '중국 근현대미술: 1842년 이후부터 오늘날까지'(미진사, 202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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