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의 쇠퇴는 인류를 다시 구술 문화로 되돌릴까

/그래픽=PADO (생성 AI 사용)

최근 대학가에 '구술(口述) 문화'가 귀환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물의 신뢰도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직접 작성하기보다 인공지능(AI)을 활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탓입니다. 이에 따라 앞으로 대학의 평가 방식은 학생이 직접 말로 설명하는 구술시험이 다시 주류로 자리 잡을 전망입니다.


최근 미국 시사 매체 '애틀랜틱'은 디지털 혁명으로 문자 문화가 쇠퇴하고 인류가 다시 구술 시대로 회귀할 가능성을 심도 있게 조명했습니다. 기사는 구술과 문자의 차이를 탁월하게 분석한 사상가 월터 옹과 마셜 매클루언의 이론을 차용해 이 현상을 설명합니다.


흥미로운 대목은 구술이 문자보다 정보의 보존 측면에서 불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억을 돕고자 대상에 강렬한 별명을 붙이거나 운율을 맞추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정치적 성공 역시 이러한 구술문화적 특성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가 종종 과격하고 직설적인 표현을 구사하거나, 조 바이든 대통령을 '졸린 조(Sleepy Joe)'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아울러 구술은 청중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의식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글쓰기가 불특정 다수의 추상적 독자를 향한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라면, 말하기는 눈앞에 있는 청자의 표정과 호흡을 살피는 공동체적 행위일 수밖에 없습니다.


애틀랜틱의 이러한 통찰은 기로에 선 전 세계 미디어 및 출판 업계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집니다. '쇼츠(shorts)'로 대변되는 구술의 세계와, 인스타그램으로 대변되는 문자의 세계가 공존하는 미래에서 언론은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할까요. 월터 옹의 명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를 다시금 펼쳐보며 그 해답을 깊이 고민해 볼 시점입니다.

세상은 한 가지로 모든 걸 설명하는 이론으로 가득하다. 스마트폰 만물 설명론은 우리의 전화기가 정치적 양극화, 불안, 우울증, 음모론의 부상 뿐 아니라 주의력 지속 시간, 지능, 행복, 전반적인 예의의 쇠퇴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주택 만물 설명론은 불평등, 기후 변화, 비만, 출산율 감소를 서구에 충분한 수의 주택을 건설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물 이론을 문자 그대로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이론으로 취급한다면 그것들 모두에 허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실망할 것이다. 나는 그보다는 단일 현상이 크고 예측 불가능한 2차 효과를 가질 수 있음을 고찰하는 훈련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내가 새로 가장 좋아하게 된 만물 이론은 구술성의 만물 설명론이다. 이 이론은 20세기 중반 미디어 이론가들, 특히 월터 옹Walter Ong과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의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알파벳의 발명과 문자 해독 능력의 부상이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문자의 등장은 모든 정보가 말로 전달되고 모든 학습이 사회적이었던 구술 시대를, 글쓰기가 단어를 제자리에 고정시켜 사람들이 혼자 쓰고, 혼자 읽고, 암기하기 불가능했을 더욱 복잡한 아이디어를 개발할 수 있게 해준 문자 시대로 전환시켰다. 구술 시대는 사회적 스토리텔링과 유연한 문화적 기억의 시대였다. 문자 시대는 모든 현대 기술의 기초를 형성하는 미적분학, 물리학, 고급 생물학, 양자역학 같은 일련의 추상적 사고 체계를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옹과 동료들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했다. 문자 해독 능력은 말 그대로 우리의 의식을 재구성했다. 문자 문화의 종말—독서의 쇠퇴와 소셜미디어의 부상—은 생각하는 인간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바꾸고 있다.


내가 아는 한, 구술성의 만물 설명론의 가장 열정적인 현대 지지자는 '오드랏츠Odd Lots' 팟캐스트의 공동 진행자인 블룸버그의 조 와이젠탈Joe Weisenthal이다. 우리는 구술성, 문자성, 그리고 그것이 정치, 스토리텔링, 전문성, 사회적 관계 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논의했다. 다음 대화록은 명료성과 간결성을 위해, 그리고 두 화자가 조금 더 똑똑하게 들리도록 하기 위해 편집되었다.




데릭 톰슨: 구술성이 돌아오고 있다고 하죠. 왜 그것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조 와이젠탈: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그게 모든 것의 99%만 설명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인간의 소통이 더욱 구술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봅니다. 단지 사람들이 입으로 더 많이 이야기한다는 뜻만이 아니에요. 물론 저는 그것도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만요. 그보다는 구어 형태이든 디지털 형태이든, 전반적인 소통이 '대화'의 특성을 가진다는 점에 더 가깝죠. 이는 진정으로 문자 이전, 혹은 확실히 대중적인 문자 해독 능력 이전의 시대로 회귀하는 것이에요.


2016년 대통령 선거 기간에 저는 월터 옹의 저작을 읽기 시작했어요. 그는 예수회 신부였어요. 마셜 매클루언과 함께 공부했죠. 그는 세인트루이스대학교에 있었는데 '구술성과 문자성Orality and Literacy'이라는 정말 놀라운 책을 썼어요. 요점은 인간은 아무것도 적을 수 없고,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는 구술 문화의 세상에 있을 때 근본적으로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에요. 인류 역사의 대부분 동안, 무언가를 찾아볼 방법이 전혀 없었죠. 참고자료 같은 게 전혀 없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시대의 조건에 맞춰 소통을 최적화해야 했어요.


호메로스와 다른 고대 서사시에 대한 많은 연구를 통해 사람들은 특정한 소통 패턴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사람들은 리듬과 운율, 그리고 음악성을 가지고 말했는데 이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암기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에요. 특정 구절들은 계속해서 반복돼요. 반복, 소통, 그리고 정보는 기억 가능성을 위해 패킷 형태로, 그리고 우리가 '바이럴'이라고 부르는 방식으로 최적화되었어요.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저는 이거 정말 설명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어요. 호메로스 시대를 특징짓는 것들, 즉 사회가 정보를 우선시하고 포장하는 방식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저의 큰 논지는 소통이 점점 더 이런 상호작용의 형태를 띠게 되면서, 우리가 소통하는 방식과 생각하는 방식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톰슨: 문자 시대로의 전환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 제도를 구축하는 방식에 왜 그렇게 중요했는지 더 깊이 파고들기 위해 여기서 두 위대한 학자를 인용하고 싶군요. 첫 번째는 뉴햄프셔대학교의 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인 조슈아 메이로위츠Joshua Meyrowitz예요. 그는 '장소감의 상실: 전자 미디어가 사회적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서 이렇게 썼어요.


"구술 소통에 대한 완전한 의존에서의 탈피는 사람들을 더 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개인주의적이 되도록 만든다. 추상적 사고가 발달한다. 둥근 오두막과 둥근 마을이 있는 원형의 소리 세계에서, 사람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선형적, 인과적 사고, 격자형 도시, 그리고 글쓰기와 활자의 선형적 라인을 모방하는, 한 번에 하나씩, 차례차례 처리하는 세계로 이동한다."


두 번째는 또 다른 위대한 학자 조 와이젠탈이 쓴 것입니다.


"현대 제도의 기반이 되는 많은 것들—계몽주의 사상, 형식 논리, 이성, 능력주의, 증거 검토—은 문자를 멀리서 고찰할 수 있는 능력의 파생물이다."


인용구에 대해 좀 더 부연해주시겠어요?


와이젠탈: 사람들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대화에 참여할 때, 무엇을 하고 있나요? 종종 누군가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죠. 누군가를 이기려고 할 수도 있어요. 여러 사람이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멋있어 보이려고 누군가를 깎아내리려 할 수도 있죠. 이 모든 것들은 혼자 있을 때는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에요. 언어와의 단독 상호작용은 사실상 문자를 통해서만 가능해요. 알파벳과 좌에서 우로의 사고, 그리고 선형적 사고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논리적 주장을 제쳐두고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호작용하는 환경이 다른 우선순위를 만든다는 걸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편지를 쓸 때나 책을 쓸 때는, 그 순간에 반드시 독자를 염두에 두지는 않아요. 사실 글을 쓰는 사람은 이 순간 독자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 사치를 누리죠. 이 모든 것은 대화와는 분리된 문해literacy—문자—의 맥락에서 발생하는 사치예요. 그래서 문자는 이러한 것들을 깊이 생각하고, 시간을 갖고, 즉시 반응하지 않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새로운 기회를 창출합니다.


톰슨: 과거에 생각은 사회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었어요. '오디세이'를 혼자 배우는 것은 불가능했죠. 그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달되었어요. 다른 사람과 함께 그것을 암송했을 것이고요. 정보의 전달 방식은 필연적으로 사회적이었어요. 책은 쓰는 사람도 혼자 쓰고, 보통 읽는 사람도 혼자 읽죠. 그래서 이 문자 시대는 제가 정말,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고독과 내면성이라는 특권을 낳았어요.


우리 모두의 영웅인 월터 옹이 이 점을 정확히 짚어주는 멋진 말을 했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군요.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구술 문화가 주된 사회에서의 인간들은... '학습'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를 들어 숙련된 사냥꾼과 함께 사냥하는 것과 같은 도제살이 방식으로 듣기, 들은 것을 반복하기, 속담과 그것들을 조합하고 재조합하는 방법을 숙달함으로써 배우지, 엄밀한 의미의 학습으로 배우지는 않는다."


저는 제가 '반사회적 세기antisocial century'라고 부르는 현상에 매우 관심이 있는데 다양한 이유로 우리가 혼자 보내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아지고 있다는 생각이에요. 그리고 그것은 여러 2차, 3차 효과를 낳고 있어요.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더 깊이 파고들면서, 우리가 배우면서 혼자 있을 수 있게 해주고, 특정 종류의 내면성을 소중히 여기게 한 것이 여러모로 문자 시대였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정말 흥미롭습니다.


와이젠탈: 마셜 매클루언은 이런 말을 했어요. 글자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가장 탈부족적인 기술이라고요. 이는 문자 이전에는 모든 지식이 본질적으로 공동체의 것이었다는 생각과 통하는 말이죠. 집단 안에 있어야만 했어요. 만약 당신 앞에 여러 텍스트가 있다면 가장 논리적으로 느껴지는 것을 신뢰할 거예요. 하지만 모든 지식이 공동체의 것일 때는 그런 사치를 누릴 수 없어요. 뭔가를 배우려면 군중의 일부가 되어야 했죠.


귀와 눈은 매우 다른 기관이에요. 눈은 감을 수 있지만 귀는 그럴 수 없죠. 눈으로는 관점을 얻고 관점을 확립할 수 있지만 귀로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방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도록 방구석으로 물러서는 것 같은 거죠. 귀는 매우 달라요. 우리는 끊임없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죠. 닫을 수가 없어요. 귀는 우리가 자는 동안에도 계속 작동해요. 우리가 잠잘 때도 여전히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는 진화적인 목적이 있어요. 침입자나 야생동물 같은 것이 있으면 우리를 깨워서 도망칠 수 있게 하니까요.


그래서 매클루언은 귀가 본질적으로 공포의 원천이라고 했어요. 매우 디지털적으로 느껴져요. 우리가 인터넷을 보기는 하지만 결코 그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떼어낼 수 없다는 느낌이 있어요. 인터넷을 읽고 있더라도 마치 듣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현대 디지털 담론에는 보는 것보다 듣는 것에 훨씬 더 가까운 몰입감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가 이 영역으로 일종의 회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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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슨: 우리에게는 귀의 시대였던 구술 시대가 있었어요. 그 다음에는 눈의 시대의 정점, 문자 시대의 정점이 있었고요. 그리고 지금 우리는 혼란스러운 세 번째 단계에 있어요. TV와 라디오, 소셜미디어, 틱톡이 있기 때문에 마치 눈과 귀가 뒤섞인 어떤 인간의 얼굴 기관이 있는 것 같죠. 그리고 이 기술들의 흥미로운 점은 모두 구술적이라는 것이에요. 라디오가 구술이 아니면 무엇이겠어요? 텔레비전이 구술이 아니면 무엇이겠어요? 틱톡이 말로 하고 라이브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어요?


하지만 트윗에는 영구적인 기록이 남아요. 틱톡에도 영구적인 기록이 남아 공유가 가능하죠. 그리고 이러한 미디어 조각들이 기록될 수 있다는 사실은 여러 면에서 그것들이 문자 시대, 즉 문자로 기록된 인공물과 맥을 같이함을 의미해요. 우리가 처한 이 새롭고 이상한 합성 단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와이젠탈: 옹의 아이디어를 업데이트하는 최고의 글들을 쓴 안드레이 미르Andrey Mir는 그것을 디지털 구술성digital orality이라고 불러요.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미래에는 우리가 그런 기록들을 실제로 갖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우선, 사물은 사라지곤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사진을 정말로 신뢰하지 않아요. 이런 것들을 저장하는 아카이브는 다소 빈약해요. 많은 디지털 아카이브를 가지고 그것들을 신뢰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 기간은 짧을 거 같아요. 디지털 아카이브는 사라지고 있고,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나타나게 될 거예요. 그런데 이건 옹이 이야기하는 바이기도 해요.


그래서 그는 많은 구술 문화에서 역사가 가변적이었다고 이야기해요. 그는 성경의 족보에 대해 이야기해요. 아무개가 아무개를 낳고, 아무개가 아무개를 낳고, 영원히 계속되죠. 구술 문화에는 어떤 것이 더 이상 편리하지 않을 때, 예를 들어 어떤 왕의 혈통이 있는데 그 왕이 불명예에 빠지면 그걸 바꾸어 버린 많은 예가 있어요. 그냥 새로운 시를 지어내는 거죠. 그래서 고정된 역사라는 개념이 없어요. 저는 비슷한 일이 오늘날 벌어지리라 생각해요. 책은 앞으로 아주 오랫동안 존재하겠지만 역사는 그 순간의 현대적 가치관에 따라 만들어질 거예요.


톰슨: 어떤 사람들은 지금 시기를 탈문해post-literate 시대라고 부르죠. 독서는 쇠퇴하고 있어요. 표준화 시험 점수도 하락하고 있고요. 제가 과거에 쓴 것처럼 때로는 모든 것이 텔레비전이 되려고 하는 것처럼 보여요. 소셜미디어는 TV가 되고 있고 팟캐스트도 TV가 되고 있어요. 사람들은 영화를 보러 덜 가죠. 모든 것이 숏폼 비디오로 진화하고 있어요. 탈문해 시대에는 모든 것이 숏폼 비디오로 진화하고 있다는 일반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와이젠탈: 이 탈문해성이라는 개념에는 비유적인 의미와 문자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탈문해성이라는 단어를 듣거나 사용했을 때, 그게 반드시 사람들이 읽을 줄 모른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아요. 저는 여전히 그것이 고독한 문자 소통과는 매우 다른 종류의 정보의 조건, 소통의 조건을 설명하는 용어로서 주로 유용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많은 것이 대화이고, 많은 것이 상호작용이며, 많은 정보가 바이럴하고, 기억에 남고, 반복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는 사실이 제가 탈문해성에 대해 주로 생각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저는 사람들이 읽는 법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제 자신을 보면, 저는 인구의 99%보다 훨씬 더 많은 책을 읽는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두 페이지를 읽고 나서 트위터 멘션을 확인하고, 또 두 페이지를 읽고 나서 트위터 멘션을 확인해요. 모두 그렇지 않나요? 이제 세 페이지라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어쩌면 저만 그런 거고 제 주의력이 완전히 망가졌을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저는 하루 종일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으니까요. 완전히 인정해요.


톰슨: 저도 책을 읽을 때 특히 휴대폰이 손이 닿거나 보이는 곳에 있으면, 항상 책에서 저를 멀어지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와이젠탈: 1960~70년대의 글에서 제가 주목한 것 중 하나는 사람들이 성관계 중인 사람들을 방해하는 전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겁니다. 당시엔 흔한 이야기예요. 커플이 성관계를 갖기 전에 전화 코드를 뽑거나 뭐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하죠. 그리고 제 생각에 현재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 중 제가 매료되는 것 하나는 큰 출산율 하락이고 사람들이 그 원인을 알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출산율 하락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발생하고 있는 현상이에요. 중국처럼 세계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며 많은 현대적 병리 현상을 피해온 나라도 마찬가지에요. 거기서조차 출산율 하락이 일어나고 있죠.


모두가 전화를 갖기 시작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현상을 알아차렸는지 되돌아보면, 마치 전화가 커플의 사생활을 방해하는 제3자인 것 같았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깨어 있는 매 순간 전화기를 들고 다니기 시작하자, 그 이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 많은 설명 효과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매우 강력한 관찰이죠.


톰슨: 선생님의 이론을 현대 생활의 몇몇 영역, 정치부터 적용해보고 싶군요. 저는 도널드 트럼프가 남들에게 붙인 별명들을 찾아봤어요. 선생님이 트럼프의 욕설에 가까운 별명을 붙이는 성향에 매우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거의 호메로스적이죠. 다행히도 우리 목적에 맞게 위키피디아가 트럼프가 만든 모든 별명을 기록하고 있어서, 제가 그걸 암기할 필요는 없었어요. 기억의 아웃소싱이랄까요. 몇 가지를 가져와 봤어요. 스티브 배넌은 '지저분한 스티브Sloppy Steve', 조 바이든은 '졸린 조Sleepy Joe', 마이크 블룸버그는 '미니 마이크', 젭 부시는 물론 '기력 없는 젭Low-Energy Jeb'이었어요.


이는 구술성의 고전적인 전통과 관련이 있어요. "포도주처럼 어두운 바다wine-dark seas", "발 빠른 아킬레우스swift-footed Achilles"처럼요. 그리고 월터 옹이 이것에 대해 쓴 훌륭한 구절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어요.


"많은 저기술 개발도상국의 정치적 비난에서 나타나는 상투적인 표현들—'인민의 적', '자본주의 전쟁광'—은 고도의 문해력자들에게는 생각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구술적 사고 과정의 정형적 필수요소가 남아있는 것이다."


옹이 이러한 별명들이 널리 퍼진 곳이 저기술 개발도상국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매우 흥미로워요. 하지만 오늘날 눈을 떠 보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별명 짓는 재주로 매우 유명한, 이제 두 번이나 대통령을 지낸 인물에 의해 통치되고 있어요. 여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시나요? 트럼프 같은 인물이 이러한 구식의 구술 전통을 활용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요?


와이젠탈: 흥미로운 건 '트럼프의 말하는 방식에는 일종의 호메로스적 특성이 있다' 같은 말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갖는다는 거예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라고 반응하죠. '이건 호메로스와 전혀 달라요' 라고요. 증명할 수는 없지만 제 이론은, '호메로스'를 지은 원래의 음유시인들이 아마 트럼프 같은 인물들이었을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트럼프가 호메로스적 인물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모여서 이 고대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던 사람들이 아마도 그 시대의 트럼프 같은 인물들이었으리라고 말할 수 있죠. 화려하고, 매우 개성 강한 인물들, 목소리가 크고, 정말로 주목을 받을 수 있으며, 말할 때 사람들을 사로잡는 사람들 말이죠. 옹이 '구술성과 문자성'에서 보여준 의견 중 하나는 구술 사회의 무거운 캐릭터와 가벼운 캐릭터에 관한 것입니다. 무거운 캐릭터는 머리가 세 개인 개 케르베로스, 메두사, 제우스처럼 실제보다 과장되고, 종종 기괴하며, 시각적으로 기괴한 캐릭터들이에요.


현대 세계는 옹이 무거운 캐릭터라고 불렀을 법한 많은 인물들을 부상시켰어요. 저는 분명 트럼프가 그의 화장, 머리, 그리고 그의 전체적인 시각적 표현으로 볼 때 무거운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일론 머스크도 무거운 캐릭터이라고 생각하고요. 우리는 무거운 캐릭터의 시대에 살고 있어요.


이전 시대의 아이콘들을 보면 존 F 케네디는 무거운 캐릭터가 아니었어요. 그는 가벼운 캐릭터, 어떤 침착함을 가진 인물이었죠. 버락 오바마도 가벼운 캐릭터였어요. 그에게는 특정한 침착함이 있었죠. 사람들이 많이 논쟁하는 것 중 하나는 '만약 오바마가 다시 출마할 수 있다면 그가 모든 걸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에요. 만약 민주당이 오바마를 세 번째로 다시 데려올 수 있다면 민주당의 모든 선거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까요? 2016년에는 제가 아마 그렇게 믿었을 거예요. 그리고 어쩌면 2020년에도 그렇게 믿었을 거고요.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자신이 줄었어요. 저는 오바마가 더 쿨했던 다른 시대의 인물처럼 느껴져요. 여러 면에서 틱톡 이전 시대의 인물이죠.


톰슨: 여기서 반박 좀 해볼게요. 저는 2004년 첫 민주당 전당대회 연설 때의 오바마는 무거운 캐릭터였다고 생각해요. 대통령직이 그를 가볍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요. 2015년의 트럼프는 무거운 캐릭터였고 지금은 과도한 노출을 겪으면서 더 가벼운 인물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선생님이 공화당에서 보는 균열은 한때 무거운 인물이었던 트럼프가 이 연합을 유지하는 데 필요했던 무게감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가 뭐랄까 감을 잃었다고 보고 있고요. 정치에서 이런 이론 같은 게 있나 모르겠군요. 많은 사람들이 무거운 캐릭터로 정계에 데뷔했다가 경험과 시간, 그리고 실패가 그들을 가볍게 만든다는 거죠. 아마도 이것이 어떤 대통령도 1년 이상의 긍정적인 지지율을 유지하지 못하는 데 일조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모든 사람을 미워하는 법을 배웠죠.


와이젠탈: 선생님이 이 현상, 그러니까 어떤 대통령도 높은 지지율을 유지할 수 없다는 현상(기본적으로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처럼 보이죠)을 언급했으니 화제를 전환해도 될까요? 여기에 메이로위츠를 끌어들여도 될까요?


메이로위츠는 1985년에 아무도 전자 미디어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기 전에 전자 미디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그의 주장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이 무대 위onstage와 대기실backstage의 모습을 각기 가지고 있다는 것이에요. 우리는 이 팟캐스트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이야기하죠. 하지만 그건 우리가 집에서 가족과 이야기하는 방식과는 다릅니다. 선생님과 제가 이 팟캐스트를 마치고 작별 인사를 하거나 할 때는 다르게 이야기할 수도 있어요. 이것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에요. 다른 환경에서는 다르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메이로위츠가 '장소감의 상실'에서 예견한 것은 전자 미디어가 한 환경과 다른 환경에서 다르게 말하는 사람들을 의심하게 만드리라는 것이에요. 만약 누군가가 코드 스위칭1을 하거나 사생활에서와는 다르게 선거 유세에서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이 사람은 가짜야'라고 생각하게 될 거예요. 트럼프에 관한 흥미로운 점은 그가 한 환경에서 다른 환경과 다르게 말한 예가 거의 없다는 것이에요. 사람들은 그가 공개적으로나 사적으로 한 말에 완전히 반감을 가질 수 있어요. 하지만 그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의 위선자는 아니에요. 그는 거의 모든 환경에서 똑같아요. 이것이 바로 메이로위츠가 예견했을 법한 일이에요. 우리가 무대와 대기실에서 똑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끌리고, 그 성격의 일관성을 가치로 여기게 될 것이라는 점 말이죠.


톰슨: 메이로위츠 책의 제목은 '장소감의 상실'이에요. 그 제목에 대해 잠시 생각하고 싶은데 왜냐하면 그것은 말장난이기 때문입니다. '장소감의 상실'이라는 말로 메이로위츠는 전자 미디어가 우리의 의식을 외부로 확장시켜서 우리가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만든다고 말하고 있어요. 저는 버지니아주 알링턴에서 트위터를 읽고 있으면서도 가자지구나 우크라이나 또는 미니애폴리스에 대해 감정적이 될 수 있는데 이는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이전 시대에는 불가능했던 방식이에요. 새로운 통신 미디어 시대는 우리를 우리가 있는 곳에서 벗어나게 하고,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사람들의 얼굴 바로 앞에 우리를 갖다 놓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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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또한 계층적 의미에서 장소감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해요. 그는 전자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이 계층 내 자신의 위치 밖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하죠. 가난한 사람들이 억만장자들에게 소리칠 수 있게 될 거라는 거죠. 그는 이것이 더 많은 사회적 불안을 야기할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도 전자 미디어가 포퓰리즘 같은 것을 더 많이 만들어내리라는 데 동의할 겁니다. 그리고 전자 미디어가 우리를 지리적으로 있는 곳에서 벗어나게 할 뿐만 아니라 계층을 파괴한다는 이 정말 흥미로운 생각은, 41년 전에 쓰여졌다는 것을 고려할 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통찰력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는 정말 놀라운 방식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데 선생님께서 이 부분에 대해 논평해주셨으면 해요. 지난 수십 년 동안 전문성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얘기했잖아요. 그는 미래에 우리가 전문성에 대해 갖게 되는 태도에 대해 이렇게 말해요. "우리의 점점 더 복잡해지는 기술 및 사회 세계는 우리가 '전문가 정보'에 점점 더 많이 의존하게 만들었지만 '전문가'들이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대중에게 노출되면서 그들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믿음이 약화되었다. 지도자와 전문가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 변화는 우리에게"—이 부분이 바로 선생님의 요점이죠—"권력에 대한 불신뿐만 아니라 우리가 거의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무기력한 의존성을 남긴다."


와이젠탈: 정말 놀랍죠. 2025년의 '애틀랜틱'에 실릴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어요. 시대를 너무 앞서갔어요. 가난한 사람들이 억만장자들에게 소리칠 수 있다고 언급하셨죠.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술은 가난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억만장자들이 끌어내려지고 괴롭힘을 당할 수 있는 환경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할 거라 생각해요. 매일 온라인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그것이 매우 긍정적인 발전이라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평등주의적인 발전이죠. 하지만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다지 편안하게 여기지 않는 다른 것들도 있어요. 저는 이 모든 연구 분야가 현재 누구에게나 또는 누구의 정치적 프로젝트에도 전적으로 만족스럽지 않은 특정 역사관을 제공한다고 생각해요.


톰슨: 어떤 정치적 프로젝트에도 특별히 편하지 않은 주제에 대해서라면, AI에 대해 그리고 AI가 구술성과 문자성 중 어디에 들어맞는지에 대한 질문도 있습니다. 저는 흥미로운 앵글에서 접근하고 싶어요. 옹의 '구술성과 문자성'에서 인용한 구절이에요.


"쓰여진 텍스트는 기본적으로 반응이 없다. 만약 사람에게 그의 진술을 설명해달라고 요청하면 설명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텍스트에 물어보면 애초에 당신의 질문을 유발했던 바로 그, 종종 어리석은 단어들 외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최근에 비행기에서 그 부분을 다시 읽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어요. 바로 AI가 그 부분을 바꿨거든요. 텍스트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죠. 이는 문자 그대로도 사실이에요. 예를 들어 책의 PDF를 다운로드해서 클로드에게 주고 '클로드,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더 높은 추상적 수준에서도 우리는 텍스트로 사전 훈련된 기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AI는 문해성에 대해 사전 훈련되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 훈련용 말뭉치와 구술적, 그러니까 대화적인 관계를 맺고 있죠. 이상하죠.


와이젠탈: AI가 여기에 어떻게 들어맞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어요. 클로드에 일부 텍스트를 업로드하고 질문을 할 수 있고, 그럼 상호작용적인 것이 되죠. 구술적이고, 대화죠.


하지만 AI와의 그런 대화들은 온라인에 존재하는 다른 대화들처럼 느껴지지 않아요. AI는 당신을 모욕하지 않을 거예요. AI는 당신에게 밈으로 말하지 않을 거고요. AI는 욕설을 사용하지 않을 거예요. 저 역시 AI를 말로 이기려고 하지 않고요. 옹은 '투쟁적agonistic'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어요. 구술 문화는 경쟁적이죠. 우리가 온라인에서 이야기할 때 항상 서로 경쟁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AI 챗봇 커뮤니케이션은 투쟁적인 어조를 띠지 않아요. 정반대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AI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그것이 너무 아첨하고 충분히 대립적이지 않다는 것이에요. 제가 챗봇에게 바보 같은 말을 하면 챗봇은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 더 살펴보죠'라고 말할 거예요. 이것이 사실 AI의 큰 문제 중 하나인데 바로 의견이 불충분하다는 것이에요. 챗봇은 우릴 교정하지 않아요. AI는 대화형이지만 다른 디지털 대화들이 가지고 있는 대화의 다른 많은 측면들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톰슨: 어쩌면 소셜미디어 시대가 정말로 구술성의 복수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AI의 시대는 문해성의 복수와 훨씬 더 비슷할 거예요.


옹과 메이로위츠는 둘 다 문해성이 우리를 우리 자신 속으로 끌어당겼다는 관념을 지적해요. 독서는 내면적이죠. 그리고 나서 소설은 독서의 내면성에 반응하여 더욱 내면적이 되었어요. 19세기 소설들은 이 순간에 생각하고 살아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게 다루고 있어요. 그것은 줄거리, 줄거리, 줄거리가 아니에요. 족보도 아니고요. 그것은 등장인물들의 현상학적 경험 속에 완전히 들어가 있어요.


제게 AI는 훨씬 더 속으로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마치 제 자신과 대화하는 것 같아요. 제 자신은 아니지만요. 저는 이 기계와 이야기하고 있지만 자기 자신과 공상하는 것에 더 가깝게 느껴져요.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낯선 사람들의 얼굴에 내던져지는 트위터에서의 적대적인 경험과는 다르죠.


와이젠탈: 매우 그럴듯하네요. 이전 문자 시대와 똑같아 보이지는 않겠지만 원래 똑같은 건 없죠. 이런 것들은 나타났다가 사라지죠. 현재의 구술 시대는 분명히 원래의 구술 시대와는 달라요. 고독으로의 회귀죠. 만약 당신이 챗봇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컴퓨터를 끄면 '저기서 나 없이도 여전히 논쟁하고 있네' 같은 느낌을 받지 않아요. '온라인에서 내 얘기를 하고 있는데 나는 거기에 없어서 나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네' 하는 느낌 말이에요. 그게 무엇이든 간에요. AI에서 그런 똑같은 끌림을 느끼진 않아요. 저는 이 모든 것들이 공존할 것이고 우리가 그 메아리를 듣는 과거의 그림자들이 있을 것이며, 서로 다르면서도 또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단지 스스로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이러한 패턴을 인식하고 관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무엇이 우리를 다양한 방향으로 끌어당기고 있는지 감을 잡기 위해서요.


톰슨: 선생님의 명언 "내가 뭘 놓쳤지?"로 마무리하자면 이 분야에서 우리가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거나 제가 충분히 묻지 못한 중요한 사항이 뭐가 있을까요?


와이젠탈: 저는 대체로 현대적인 병리 현상이 많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디지털 미디어, 전화기 등을 그 원인으로 지목하죠.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모든 것이 존재하기 전에 쓰여진, 이 질문들에 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많은 글들이 있다는 것이에요. 더 많은 사람들이 조슈아 메이로위츠, 월터 옹, 에릭 해블록Eric Havelock, 마셜 매클루언 등과 친숙해지면 좋겠어요. 사람들과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데릭 톰슨은 작가·저널리스트로 애틀랜틱에서 에디터로 일했다. 베스트셀러 '히트 메이커' 등을 썼으며 기술, 경제, 그리고 업무 문화의 변화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주로 다룬다.


조 와이젠탈은 블룸버그의 디지털 편집국장으로 현대 경제와 금융 시장을 가장 역동적으로 전달하는 언론인으로 손꼽힌다. 블룸버그의 간판 팟캐스트 '오드랏츠Odd Lots'를 진행하며 비트코인, 공급망 이슈, 거시 경제 등 시장의 핵심 주제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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