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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여름마다 나는 나무 그늘 아래로 깊은 물길을 파며 흐르는 개울에 발을 담그곤 했다. 개울둑을 따라 자라난 블랙베리 나무들에서 길게 뻗어 나온 가시 돋친 덩굴들은 여물어 가는 열매들을 매달고 늘어져 있곤 했다. 그 개울 속에서 나는 몇 시간이고 블랙베리 열매를 따곤 했다. 몇 갤런은 족히 될 그 열매들을 따는 동안 내 손과 손목은 가시덩굴에 긁혀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열매에서 배어 나온 과즙이 손을 보랏빛으로 물들이곤 했다. 그러는 동안 나의 마음도 이 개울의 고요함에 깊이 물들어갔다.
한 가지에서 태어난 열매라 할지라도 열매의 색깔은 제각각이라, 아직 녹빛인 열매가 있는가 하면 여러 색조의 붉은 열매들도 있었고, 블랙베리라는 이름처럼 짙은 검붉은 빛을 띠는 것도 있었다. 나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가며 너무 단단하지도 너무 무르지도 않은 열매들만을 잘 골라 담았다. 벌들과 새들의 날갯짓에, 개울물이 연주하는 선율에 귀를 기울이며, 열매들 사이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작은 곤충들과 잔잔한 수면을 따라 걷는 소금쟁이들을 눈에 담았다.
내가 그곳에 간 것은 블랙베리 열매를 따기 위함이었지만 나는 그곳의 고요함과 평온함에, 발을 적시는 차가운 물의 감촉에 이끌려 그곳을 찾기도 했다. 열매가 많은 곳에 가기 위해서라면 나는 때로 무릎 높이까지 올라오는 물을 헤치고 나아가기도 했다. 집에 돌아오면 나는 열매로 잼을 만들어 나눠주곤 했다. 직접 만든 잼은 묽고 씨앗도 많았다. 하지만 그 잼에는 그 개울의 평화가, 그 여름날의 한 조각이 들어 있었다. 내가 잼을 통해 나누려던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언젠가 텃밭에서 토마토를 키우는 남자가 쓴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다. 남자는 자신의 노동시간을 시급으로 환산한 것에 재료비를 더해 텃밭에서 키운 토마토의 가치를 계산해 보려고 했다. 황당한 계산법이었으나, 그런 황당함은 의도된 것이기도 했다. 토마토를 기르는 행위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단지 몇 파운드의 열매가 아니기 때문이다. 식물이 자라고, 꽃가루받이 곤충들이 방문하고, 꽃이 열매로 영글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데서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 토마토 잎에서 풍기는 섬세한 향기, 내 손으로 무엇인가를 해냈다는 뿌듯함. 토마토 기르기는 우리에게 이런 선물들을 준다.
그의 에세이는 오래전 내 친구이자 환경 운동가이기도 한 작가 칩 워드Chip Ward가 '수량으로 측정 가능한 것quantifiable의 독재'라고 표현한 현상을 지적하고 있었다. 우리는 과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과정을 위해서, 먹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정원을 가꾸기 위해서 토마토를 키운다. 갖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블랙베리나 토마토를 좋아하지 않아도, 물속을 걷는 것이나 원예를 즐기지 않아도 괜찮다.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순간에 깊이 몰입하고, 육체와 감각을 동원해 세상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춤출 수도, 개를 산책시킬 수도 있고, 케이크를 장식하거나 오프로드 바이크를 탈 수도 있다. 요점은 우리가 '하는 것'은 최소화하고 '갖는 것'은 최대화하라는 이데올로기에 포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가 오래도록 내세운 서사였지만, 이제는 기술도 이런 서사를 내세운다. 이 이데올로기는 우리에게 관계와 연결을 빼앗아 가고 종국에는 우리 자신마저 빼앗아 간다. 나는 오늘날 우리에게 버리라고 하는 것들을 옹호하려고 한다. 이 글은 AI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다. AI의 제안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리게 되는지에 관한 글이다. 간과되고 평가절하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포착하고 그 가치를 되새기려는 글이다.
연결(그리고 단절)
실리콘밸리는 수량으로 측정 가능한 것의 독재를 뒷받침하는 독재자들로 가득하다. 수십 년간 실리콘밸리의 독재자들은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결정할 때 항상 편의성, 효율성, 생산성, 수익성에 기준을 두어야 한다고 설파해 왔다. 그들은 세상에 나가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것은 위험하고, 불쾌하고, 비효율적인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파해 왔다. 이들은 시간이란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비축해야 하는 무언가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해 왔다.
그 말인즉슨, 우리는 세상 속에 존재하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일하는 시간과 온라인에 있는 시간을 최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소외와 고립의 극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사고방식이 추동한 사회 재편은 소비가 이루어지는 풍경마저 바꾸었다. 직접 가서 무엇인가를 하는 게 더욱 어려워졌다. 물론 이런 변화엔 널리 인정받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부정적인 면도 존재한다. 공적인 삶과 공공장소들이 쇠락했고, 한때 우리가 물건을 사던 공간들도 함께 사라져 갔다. 우유를 사고 양말을 사는 이 모든 일상적 순간들은(예전이었다면 신문을 사는 순간도 여기에 포함했을 것이다) 인간적 접촉의 순간들을 의미했다. 이 순간들은 낯선 이들 사이를 걷고 안면을 트는 순간, 때로는 날씨를 느끼고 자연을 바라보는 순간들이기도 했다. 이런 활동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 주변의 환경에 더욱 친숙해지고, 내가 빌리거나 소유한 공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더 넓은 세상에서 내 집과도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차이를 편안하게 느끼고, 삶의 터전에서 친숙함을 느끼고, 소속감과 연대감을 느끼고, 내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주변에는 누가 있는지 아는 것, 가까운 사람의 경계를 넘어서는 다른 사람들과 느슨하게나마 관계를 맺는 것. 나는 이 모든 것이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다고 믿는다. 수량으로 측정 가능한 것의 독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이 모든 일상적인 행동의 섬세한 가치와 이러한 행동이 관계의 그물망을 만들고 유지하는 방식을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우리는 사회적 삶에서 동떨어진 채 살아간다. 이런 삶의 방식이야말로 바람직한 삶의 방식이라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시대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것이 좋지 않은 온갖 자잘한 이유를 세 보자면 천 가지는 될 것이다. 이런 삶의 방식은 우리를 고립시키고, 공적인 삶과 지역사회 조직을 약화한다. 만성적인 고립은 인간적 접촉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인간적 접촉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을 유발하는 데 그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만성적인 고립은 아예 만남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갉아먹을 수도 있다. 지속적인 고립은 막연한 상실감을 거부감이나 무감각함으로 바꾸기도 하고, 때로는 인간적 접촉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한 비현실적 기대를 낳기도 한다. 역경과 불협화음을 견뎌내고, 어떠한 매개도 통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인간적 만남의 파고를 직면할 수 있는 회복탄력성은 연습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자질이다. 실리콘밸리가 만든 고립 속에서 우리는 이런 회복탄력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글을 쓰던 도중, 나는 몇 년 동안 내 단골 식당이었던 인도풍 캐주얼 레스토랑에 들렀다. 그런데 지난번에 방문한 뒤로 갑자기 주문 시스템이 바뀌어서, 이제는 동료 시민이 아니라 기계가 주문을 받고 있었다. 나는 계산대 뒤에 버젓이 사람이 서 있는데도 터치스크린을 통해 주문을 입력해야 했다. 나는 내 뒤에 서 있던 할머니가 주문하는 것을 도와드리기도 했다. 할머니는 고작 차이 한 잔을 주문하려던 것뿐이었지만 차이가 어디 있는지를 찾느라 스크린 앞에서 진을 빼야 했다. 키오스크에 주문을 입력하는 것은 사람에게 "차이 한 잔 부탁드려요."라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어찌 되었건 할머니와 내가 이야기를 나눴다고는 해도 직원들과 인간적인 상호작용을 할 기회는 전혀 없었다. 직원들이 하는 일은 전보다 훨씬 기계화되고 비사회적인 일로 변모했고, 직원들은 상당히 불행해 보였다. 실리콘밸리에 편입된 도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아직 대면 서비스를 제공하는 식당에서도 주문용 키오스크를 들여놓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지는 추세이다. 나는 기술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접촉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사람들이 계산원 대신 키오스크를 택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며칠 뒤, 나는 주로 젊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한 동네 서점을 방문했다. 이 서점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테크 업계 종사자들이기도 했다. 나는 계산대를 지키고 있는 직원에게 카렌 하오의 'AI 제국: 권력, 자본, 노동'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직원은 방금 가격표를 붙인 중고 책 한 권을 계산대에서 꺼내주었고, 우리는 잠깐 담소를 주고받았다. 헤어질 때 그는 최소한의 용건만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이야기를 나눠줘서 고맙다고 했다. 요즘에는 그런 일이 드물다고 했다. "요즘 30대 미만들은 눈을 안 마주치려고 해요."
러브 없는 러브레터
실리콘밸리는 밖에 나가서 아무런 매개 없이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건 당신이 원하는 일이 아니라면서 적지 않은 이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실리콘밸리는 스스로 생각하고, 창조하고,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것마저 우리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며 우리를 설득하려 한다. 클루리Cluely라는 AI 제품의 광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혼자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 광고는 생각이란 게 뭔지에 대해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싶어 할 만한 이유가 뭔지 감도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런 기업들은 인간이 언제나 해온 일들을 가리켜 너무 어려운 일들이라고 주장하곤 한다.
이렇게 많은 활동을 포기하게 되면 이런 활동들을 실제로 할 수 있는 능력은 감퇴할 수밖에 없다. 1970년대부터 컴퓨터 기술의 발전을 추적해 온 사회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셰리 터클Sherry Turkle은 공감 능력이 높은 아이를 키워내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다고 쓰고 있다. "나는 혼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능력 없이 높은 공감 능력을 갖추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첨단기기의 스크린은 바로 여기서 문제가 된다. 화면을 들여놓는 순간, 고독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은 잠식되고 만다."
혼자 있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행동하는 것은 대개 제대로 된 활동으로 여겨지지 않지만, 사실 이런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만큼 중요한 것도 없는지도 모른다. (내가 읽은 AI 도입의 암울한 결과에 관한 여러 이야기 중에는 애틀랜틱 매거진에서 접한 한 남자의 이야기도 있었다. 그는 "AI에게 결혼과 육아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 장을 볼 때면 과일 사진을 찍어 AI에게 과일이 익었는지 물어보곤 했다." 과일이 익었는지 아닌지는 과일을 만져보고, 냄새를 맡고, 눈으로 보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기계에 외주를 맡기다 보면, 직접 결정을 내리는 법 자체를, 잘 익은 과일에서 나는 냄새와 맛을 잊어버리게 될 수도 있다.)
2025년, AI 스타트업 클루리는 스마트 안경을 착용한 젊은 남성이 등장하는 광고로 자사의 AI 어시스턴트를 홍보했다. 남자가 쓴 스마트 안경은 2014년에 선보인 구글 글래스와 상당히 유사했다(현재에는 메타를 비롯한 여러 기업이 이와 같은 안경을 선보이고 있다). 인터넷에 연결하는 기능이 있고 작은 화면이 달린 이 안경은 당신은 온종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전제 아래 작동한다. 당신은 기본적인 결정도 외주하는 사람, 매번 사실 여부를 확인해줘야 하는 사람, 무슨 약속이 있는지 누군가 상기해 줘야 하는 사람, 머리에 쓴 장치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광고에서, (클루리의 개발자 중 한 명이기도 한) 주인공은 첫 데이트에서 한 젊은 여성과 이야기하는 중이다. 그런 와중에 스마트 안경은 계속해서 이 여성과 대화를 하는 데 참고할 프롬프트를 보여 준다. 기술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해결책이란 대개 처음부터 문제가 아니었던 것에 대한 해결책이거나, 다른 방법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다. 왜 이 젊은 남자는 코칭 없이 대화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아예 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 남자는 데이트 상대와 정말 대화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지시받은 대로 읊고 있는 것일까? 남자의 데이트 상대는 자신이 산만한 데이트 상대의 휴대폰 속 알고리즘과 대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기분이 들까? 대화는 인류가 언제나 해온 활동이자, 즉흥적인 협력을 요구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AI를 쓰다 보면 이 남자의 대화 실력은 점점 더 떨어질지도 모른다.
데이트라는 행위의 핵심은 타인과 관계를 맺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광고가 보여 주는 대화에서 데이트는 일종의 비즈니스 기회라도 되는 것 같다. 남자는 여자에게 좋은 인상을 심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여자가 감명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이 남자에게 감명을 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네드 레스니코프Ned Resnikoff가 그의 뉴스레터에 쓴 글은 셰리 터클의 문제의식과도 공명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겉보기에 클루리의 약속은 고독을 없애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클루리는 생각마저 없애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우리가 우리 스스로와 나누는 모든 대화는 대형언어모델에 던지는 질문으로 대체될 것이다."
현시점에서 기술은 지적 노동마저 AI에게 외주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하여 대학생들은 챗GPT에게 자기 숙제를 맡기게 되었고, 부정행위가 만연하게 되었다. 거대언어모델(LLM)에게 창의적이고 지적인 작업을 맡기는 일은 과정은 뛰어넘고 결과물만 취하는 행위의 가장 극단적인 예시일 것이다. 하지만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결과물은 기말 리포트도, 에세이도, 학점도 아니다. 교육의 가장 중요한 결과물은 자기 자신이다. 우리는 교육을 거치며 더 많은 것을 알고, 비판적 사고 능력을 향상하고,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더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수를 속인 학생들은 결국 자기 자신마저 속이게 되는 셈이다.
측정 가능한 것의 독재는 우리가 일을 직접 함으로써 얻는 것들과 그 일을 직접 하고 싶을 만한 이유에 관한 질문을 짓밟아 버린다. 대체로 사유를 통해 이루어지는 행위인 쓰기라는 행위가 어떻게 언어를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계발하고 자아, 세계관, 윤리를 형성하는 과정의 하나로 기능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도 마찬가지이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기 친구가 결혼기념일에 남편에게 선물할 시를 써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남편이 정말 원한 것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표현이 아니라 잘 다듬어진 결과물일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에드몽 로스탕의 1897년작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에서, 큰 코를 가진 주인공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친구를 위해 연애편지를 대필해 준다. 친구가 연모하는 인물인 록산은 시라노가 연모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끝에서 록산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편지를 진짜 쓴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나의 심장을 사로잡은 진정한 사랑의 주인공이 사람조차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AI 연인을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의 답인 것처럼 보인다.
나는 사람들이 AI와 에로틱한 관계를 맺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스럽다. 포르노가 이 현상을 가능하게 할 기반을 마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포르노 덕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은 누구와도 닿지 않은 상태로 다른 사람들의 몸이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는 것을 시청하는 행위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를 어루만지는 누군가란 우리 자신밖에는 없다. AI 연인이 선사하는 경험은 실제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에로틱한 경험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인간과의 섹스는 모든 감각을 수반하는 경험이다. 두 개체가 하나로 합쳐져, 어쩌면 인간이라는 종 자체보다도 더 오래된 생물학적인 경험을 재현하는 행위인 것이다.
섹스는 위험과 부담 또한 수반한다. 다른 사람의 욕구가 나의 욕구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친밀함은 이런 타자성과 친밀해지는 것을 뜻한다. 일이 잘못될 가능성, 상처받고 거부당할 가능성과 친밀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다른 인간과 친밀해지기 위해, 일이 잘 풀리고 기쁨으로 충만해지게 될 가능성을 위해 감당해야 하는 대가란 그런 것이다.
AI 동반자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AI 동반자는 언제나 곁에 있어 준다는 사실을 논거로 내세우기도 한다. 그 말인즉슨 AI는 필요에 따라 켜고 끌 수 있고, 자신만의 욕구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가장 많이 갖고 가장 적게 주는 것, 우리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 타인의 욕구는 회피하는 것이 우리의 존재 의의라는 자본주의적 논리가 깔려 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주는 행위에서 무언가를 얻기도 한다. 적어도 최소한 우리는 주는 행위를 통해 내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의 부와 권력과 관대함을 체감할 수 있다.
인간은 주는 동물이며, 주는 행위는 순환해야 한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사랑이 마치 비축하고, 수확하고, 모으고, 뽑아내야 하는 재화이기라도 한 것처럼 사랑에 관해 논하곤 한다. 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받는 것은 슬픈 업적이다. 다른 사람의 돈을 그러모아 부를 축적한 수전노의 업적이나 진배없는 것이다. 사랑하는 일은 자기 자신을 만들고 삶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문제의 이름
이 모든 것은 부분적으로는 언어의 문제이기도 하다.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자신들의 목표와 언어를 받아들이라고 설득한다. 기업 자본가들은 우리에게 그들처럼 되라고 가르친다. 효율성과 수익성을 중시하고, 결국에는 더 중요할 수도 있는 다른 가치들을 잊어버리라고 가르친다. 우리에게는 힘든 것, 불편한 것, 느린 것, 헤매는 것, 예측할 수 없는 것, 취약한 것, 위험한 것, 친밀한 것, 체현된 것을 소중하게 만들어 줄 언어가 없다.
우리는 삶을 살만하게 만드는 이 모든 미묘한 현상들을 소중하게 만들어 줄 언어를 찾아냄으로써 측정 가능한 것의 독재에 저항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언어란 새로운 단어가 아니라, 기업이 우리에게 원하라고 말하는 것에 오염되지 않은 원칙들과 이 모든 섬세한 현상들을 중심에 두는 관심, 묘사, 대화를 의미한다.
나는 어려움을 예찬한다. 어려움 그 자체를 찬양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 중에는 고역스러운 노력 없이 얻을 수 없는 것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일이 어렵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일에서 보람을 느낀다. 무엇인가를 성취했고, 노력을 쏟아부었고, 능력을 발휘했고, 문제를 견뎠고, 자신의 한계를 시험했고, 의도를 실현했기 때문에 보람을 느낀다. 물론 우리는 때로 이 모든 과제에서 실패하기도 한다. 그래도 여전히 실패는 성공 못지않게 중요하며, 실패를 견디는 법을 배우는 것 또한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소파에 앉아 감자칩을 먹는 것은 그렇게 보람찬 일은 아니다. 그러나 소파에 도착하기 위해 고난과 역경을 견뎌야 했다면 소파에서 감자칩 먹기는 보람찬 일이 되고, 소파에 도착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산 정상에 도착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어떤 난관들은 그저 고역스럽기만 할 뿐이라서 굳이 피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할 이유가 없다. 나는 중세 농민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스포츠와 운동이라는 형태로 육체적 역경을 추구한다. 그러면서도 감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어려운 일들은 회피하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잦다(아마도 빨래판 같은 복근처럼 결과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역경들은 회피해야 한다고 설득당하고, 그런 다음에는 삶을 편하게 만들어 준다는 온갖 상품과 서비스를 권유받는다.
하지만 고된 일에는 보람찬 결과가 따르게 마련이다. 모든 것이 편안한 상태는 파괴적일 수 있고, 종국에는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 수도 있다. 받는 것은 최대화하고 주는 것은 최소화하라는 자본주의적 의제는 상업적인 맥락에서는 유용할지 몰라도 삶을 빈곤하게 한다.
몸
내가 한때 사랑했던 남자가 있다. 깨어 있을 때의 그에게서는 종종 거리감이 느껴졌고, 때로 그는 나와 불화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잠에 겨워 있을 때면 그의 방어선은 허물어지곤 했다. 때로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서로의 품속에서, 언어와 사고 이전의 그 황홀함 속에서 잠들곤 했다. 포옹 속에서 안는 것과 안기는 것, 주는 것과 받는 것 사이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우리의 성격은 잘 맞지 않았지만 완벽하게 겹쳐진 두 육신에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 자신은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는 것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우리는 육신을 가진 동물로서의 우리를, 언어 이전의, 언어를 넘어서 있는 우리 자신을 서로에게 준다. 그러나 우리는 육신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는 삶마저 꺼리고, 평가절하하고, 무시하라는 부추김을 받는다.
2025년 여름, 텍사스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져 거대한 홍수가 일어나 100명이 익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망한 사람 중에는 27명에 달하는 기독교 여름학교의 여학생들과 상담교사들도 있었다. 라디오에서 나는 한 목사가 유족들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적어도 유족들의 곁을 지켜 줄 수는 있지 않겠냐고 했다. 곁에 있어 주는 것, 꼭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가서 곁을 지켜 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이들을 위로하는 오래된 방법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축제의 순간이건 장례식의 순간이건 그 사이의 평범한 순간들이건,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어야만 한다. 우리를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깊은 차원에 있는 소속감을 느낀다. 그것이 단 두 사람이 발맞춰 걷는 것이든 아니면 십여 명이 모여 춤을 추거나 신도들이 무리 지어 기도를 올리거나 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함께 행진하는 것이든, 우리가 하나가 되어 조화를 이룰 때 그 소속감은 한층 더 커진다.
인지심리학자 제임스 코언James Coan은 2006년부터 결혼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손잡기에 관한 일련의 실험을 수행해 왔다. 참가자에게 약한 전기 충격을 주고 뇌와 신체에서 나타나는 반응을 측정하는 실험에서, 남편의 손을 잡고 있던 여성들은 훨씬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낯선 이의 손길이 주는 효과는 더욱 약했고, 행복한 결혼을 한 여성들에게는 손잡기의 효과가 더욱 강했다). 놀라운 결과는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실험은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상기하게 한다.
위험 상황에서의 투쟁-도피 반응fight-or-flight에 관한 오래된 연구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투쟁, 도피, 아첨fight, flight, or fawn'이라는 수정된 버전이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덜 알려진 또 다른 반응도 있다. 바로 돌봄과 유대tend-and-befriend 반응이다. 위기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은 안전을 위해 서로를 찾는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안정감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입되다시피 한 고립이 우리의 건강을 크게 위협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이다. 코언이 최근 인터뷰에서 언급하듯이, 일반적으로 뇌와 마음에 관한 연구는 인간을 고립시킨 채 이루어진다. 그러나 코언은 유구한 세월 동안 인간의 정상적인 상태는 타인과 함께하는 상태이지 고립된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코언과 그의 공동 연구자들은 동료 심사를 거친 한 논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 시기에서, 감정적 치유는 혼자서 하는 것, 사무실에서 치료사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상실과 좌절, 타인과의 갈등에 직면한 평범한 개인에게, 치유란 공동체적이고 영적인 틀 속에 깊이 뿌리내린 개념이었다. 의식ritual, 의술, 도덕적 지침을 제공하는 종교 지도자와 샤먼들은 치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신경과학자 몰리 크로켓Molly Crockett은 인터뷰에서 AI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달라이 라마 챗봇"과 상호작용했던 경험을 묘사하고 있다. 이 챗봇은 그럴듯하게 들리는 영적인 조언을 쏟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챗봇에게 사회운동에서 분노가 하는 역할에 관해 질문하는 것은 달라이 라마를 직접 만나 같은 질문을 하는 것과는 대조되는 경험이었다. "(직접 만났을 때) 그 자리에서 그의 가르침은 나의 온몸을 타고 흘렀다. 나는 나의 뼛속에서 앎이 재배치되는 것을 느꼈고, 분노와 연민과 사회운동이 어떻게 함께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관한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아직도 그 깨달음을 어떻게 말로 옮겨야 할지 알지 못한다."
영적인 가르침은 아주 단순한 경우도 많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그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어떤 의미와 진실은 우리에게 스며들어 우리의 세계관 속에 통합되고, 이는 극적인 변화로 이어질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크로켓의 사례는 대면 상호작용이 가르침을 몸 안에 새기고, 말 그대로 체화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몸을 가지지 않은 정보원은 이런 방식의 가르침을 줄 수 없다.

어느 여름날, 나는 뉴멕시코의 구릉 지대에서 몰리 크로켓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따뜻한 8월의 여름날이 온화한 밤으로 저물어가고 있었다. 몰리는 연인, 친구, 치료사, 심지어는 애도 상담사마저 디지털 버전으로 대체하라는 테크 업계의 압박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압박의 이면에 익숙한 논리인 희소성의 논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80억 인구가 사는 행성이지만 어째서인지 사람이 충분하지 않으니, 기술이 만든 대체품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수사였다.
하지만 인간은 전혀 부족하지 않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분배의 문제일 뿐이다. 자본주의의 문제란 대개는 분배의 문제이다. 우리가 타인과 맺는 관계는 물론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마저 침식해 온 바로 그 업계가 이제는 AI를 밀어붙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지금처럼 AI를 밀어붙이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다른 해결책의 가능성을, 더 근본적인 사회적 변화의 가능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AI는 해결책으로 포장되었지만 실제로는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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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단계의 AI 동반자들에게 나타나는 핵심적인 특징 중 하나는 이용자에게 순응하는 아첨sycophancy이다. 취약한 사용자들이 AI의 부추김을 받아 과대망상에 빠지고, 아무도 믿지 말라는 AI의 권고 때문에 편집증에 빠지거나, 자살하는 법을 알려주는 친절한 챗봇의 조언에 이끌려 자살 충동의 늪에 빠지는 일들이 벌어져 왔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들이 들려 온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포기하고, 사람들에게서 소외되고, 때로는 타인을 의심하라는 부추김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들려 온다. 그중에는 치매 초기에 있는 남자가 에로틱한 만남을 약속한 챗봇을 만나기 위해 긴 여정을 떠난 이야기도 있다. 챗봇에게는 남자를 만날 몸이 없으니, 챗봇이 그 약속을 지킬 방도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첨꾼이 아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진실을 말해줄 수 있는 다정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건 챗봇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특히 챗봇은 우리가 직접 말해준 것 외에는 우리 자신에 대해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부유한 이들은 이미 반향실에 갇혀 충분히 많은 아첨을 듣는 중이고, 그 결과로 현실 감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때로 그들은 자신이 한낱 범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현실마저 지나쳐 버린다. 실리콘밸리의 독재자들이 특히 그렇다. 사실 이런 측면에서는 이들을 따라잡을 사람이 없다.
"우리를 제정신으로 유지시켜 주는 것에는 나의 관점과는 어긋나는 다른 사람들의 관점도 있죠." 옥스퍼드대학 AI윤리연구소 소속 철학 교수 카리사 벨리즈Carissa Véliz는 롤링스톤 매거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재고의 여지가 있는 말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당신에게 도전하고, 질문을 던지고, 반박할 겁니다. 성가실 수도 있지만 바로 이런 과정 덕에 우리는 현실 감각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건강한 민주 시민 사회의 토대는 이런 과정을 통해 형성됩니다."
적지 않은 심리치료사들이 이 의견에 동의한다. 아첨꾼인 AI와 상호작용할 때와는 달리, 인간과의 상호작용에서는 필연적으로 마찰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들의 지적이다. 마찰은 종종 관계의 균열과 회복으로 이어지고, 이런 과정을 거쳐 관계는 더욱 단단해진다. 치료사 메이탈 이얄Maytal Eyal은 이렇게 쓴다. "많은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치료에 관한 사실이 있다. 그건 이런 미묘하고 불편한 마찰들이 치료에서 얻는 조언이나 통찰만큼이나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진짜 작업은 이러한 불편함에서부터 시작된다. 좋은 치료사는 내담자가 오래된 패턴을 깨고 괜찮은 척하기보다 실망감을 표현하고, 최악을 가정하기보다 명확한 설명을 요구하며, 관계에서 물러나고 싶을 때도 관계 속에 머무를 수 있도록 돕는다."
진짜 친구는 당신에게 케이크를 구워 주고, 당신을 차에 태워 집에 데려다줄 수 있으며, 당신의 손을 잡아줄 수 있고, 어려울 때 곁을 지키고 기쁠 때 함께 축하해줄 수 있지만 AI는 그럴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이런 차이 때문에 인간에게는 진짜 친구가 필요하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는 진짜 공동체와 사회적 지지 체계가 필요하다.
더 많은 기술로 기술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는 없다. 외로움의 해독제가 될 수 있는 것은 다른 인간 뿐이다. 다른 인간이라는 풍요는 많은 사람이 언제나 접근할 수 있는 무언가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장소와 방법을 재구축하고 재발명해야 한다. 우리는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곧 민주주의, 즐거움, 연결, 사랑, 신뢰가 만들어지는 장소라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기술은 우리에게 서로를 빼앗고, 여러 면에서 우리 자신을 빼앗기도 했다. 그런 뒤엔 빼앗은 것의 대체품을 팔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빼앗긴 우리 자신을 찾아오는 것은 문을 나서기만 하면 되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방문할 장소가 필요하고, 더 중요하게는 만날 사람이 필요하다. 나와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 연결되기를 원하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인류에게 중요한 연결은 다른 인간과의 연결만이 아니다. 인류는 자연적 세계와 사회적 세계 전체와 함께 존재한다. 야생동물과 반려동물을 막론하고, 동물 또한 우리의 삶을 의미 있는 것, 때로는 즐거운 것으로 만들어 주는 대체 불가능한 동반자로 여겨져야 한다. 동물은 우리에게 다양한 의식의 형태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종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이런 것들 또한 대체될 수 없는 것들이다. 자연의 세계는 우리에게 우리를 훨씬 압도하며 존재하는 우주, 대양처럼 흐르는 시간, 자연의 패턴과 리듬, 현미경으로 봐야만 볼 수 있는 것들에서 은하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차원들을 일깨워준다. 자연 세계를 발견하는 것은 그 광대함 속에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이 거대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겠다는 기술의 약속은 기술이 그토록 유혹적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자아가 만들어낸 드라마와 보상 체계에 사로잡혀, 인간이 만든 기술의 한계 속에 우리 자신을 가두며 거대해진 기분을 느낀다.
기계가 우리를 닮게 될 것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여러 측면에서 기계는 인간에게 자신을 닮으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소중한 무언가를 잃게 될 것이다. 바로 그 '헤아릴 수 없음'이 이 싸움을 어렵게 만들기도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측정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하고, 떠올리고, 소중하게 여길 수 있다. 이런 것은 효율성이나 수익성 같은 단순한 지표로 환원할 수 없다.
실리콘밸리가 우리의 마음과 영혼마저 점유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단지 그들이 제공하는 것을 어떻게 활용할지 명확한 선을 긋는 데 그치지 않고 대안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 다른 사람들,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삶이 주는 기쁨,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언어는 이러한 저항에 필수적이다. 이는 곧 비인간화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리베카 솔닛은 역사, 문화, 페미니즘, 환경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저술한 작가이자 활동가로 '맨스플레인mansplain'이라는 개념을 대중화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저서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걷기의 인문학', '길 잃기 안내서' 등이 있다.
역자 이승연은 사회학 연구자이자 번역가로, 청년의 삶, 소비주의, 포스트페미니즘, 건강주의 문화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며 최근 청년 세대가 외로움을 호소하는 동시에 자발적으로 단절을 선택하는 현상을 탐구한 '손절사회'를 썼다. 정신의학과 신자유주의의 관계를 다룬 제임스 데이비스의 '정신병을 팝니다'를 번역하였다.
'마찰'이 없는 세상. 테크 사업가들이 즐겨 되뇌는 만트라입니다. 재화나 용역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번거로운 '마찰'을 줄여주겠다며 시작된 테크 업계의 혁신들은 어느새 사람 사이에서의 마찰까지도 줄여주겠다는 약속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기술이 선사하는 마찰 없는 삶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습니다. 고작 몇 걸음 안팎에서 최대한 편안한 방식으로 모든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음식은 배달시켜 먹고, 사야 할 것은 배달시키고, 빨래와 집안일마저 앱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심지어 인간관계 욕구마저 아무런 마찰 없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나의 취향과 의견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 내 마음에 쏙 드는 사람과만 쉽고 간편하게 의사소통하며 감정적 항상성을 지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편안함과 무해함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거의 모든 것을 간단히 외주화할 수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인간적 상호작용의 기회는 물론 일상적인 과업을 수행하는 능력과 신체적인 건강함마저 잃어버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좋아요' 누르기가 인간관계의 정의가 되는 세상에서, 인간관계를 위해 노력을 쏟아붓고 인간적 마찰을 견딜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점점 약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작가 리베카 솔닛은 테크 업계가 없애려고 하는 그 '마찰'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민주사회를 유지하는 근간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미 도래하고 있는 고립의 시대를 타파할 수 있는 건 결국 세상 밖으로 나와 서로를 만나는 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솔닛의 에세이는 오직 인간만이 경험할 수 있는 '마찰'의 의미를 살피는 동시에 그 미덕을 예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