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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의 시대가 온다. 살아남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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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된 고래 뼈대. /사진=Eleanore Stohner

2025.05.02 15:45

New York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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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NYT)에 오랫동안 칼럼을 써온 로스 다우댓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NYT 필진과는 정치적, 사상적 포지션이 매우 다른 인물입니다. 보수적 성향을 갖고 있다는 점에는 동료 NYT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와 비슷하지만 세속주의 성향의 브룩스와는 달리 깊은 가톨릭 신앙에 근거한 종교적 성향을 자신의 글에서도 자주 표출합니다. 서구에서 리버럴리즘의 영향력이 저물면서 그간 리버럴리즘이 방치(혹은 배척)했던 '영성', 보다 구체적으로는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의 문제가 정치의 핵심 문제로 부상하고 있는 상황에서, 종교적 보수주의자이면서도 미국 주류 보수의 물질주의적 관점과 우익 포퓰리즘을 비판하는 다우댓의 목소리는 미국 지성계에서 앞으로 더욱 중요한 위상을 갖게 될 것입니다.


특히 여기 소개하는 다우댓의 NYT 4월 19일자 칼럼은 그를 새로운 인본주의의 대표적 사상가의 반열에 올려놓을 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미국 내에서도 많은 화제가 됐던 이 칼럼은 '멸종'의 위기를 경고합니다. 다우댓이 말하는 '멸종'은 단순한 생물학적 종의 소멸이 아닙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그리고 인공지능(AI)으로 대표되는 거대한 기술적 변화가 우리가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삶의 방식, 문화, 공동체, 심지어 인간관계와 가족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제도까지 위협하며 소멸시키는 '문화적 병목 현상'을 의미합니다.


다우댓이 지적하는 디지털 전환의 영향력을 가장 빠르고 강렬하게 체감하는 나라인 한국의 독자들은 그의 분석을 읽으면서 큰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온라인 소통이 실제 만남을 대체하고, 알고리즘이 이끄는 콘텐츠 소비가 깊이 있는 문화 예술 향유를 밀어내며, 공동체적 유대감 약화와 개인의 파편화가 심화되는 현상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풍경입니다. 다우댓이 묘사하는 '가상의 대체물'이 현실을 잠식하고, '주의력 분산'이 일상적인 삶의 유지마저 어렵게 만드는 과정은 한국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의 근원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무엇보다 이 글이 한국 독자들에게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인구 소멸'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위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우댓은 사람들이 관계 맺고 가정을 이루는 것을 포기하면서 국가 전체가 쇠퇴하는 현상을 '문자 그대로의 멸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병목 현상으로 지목합니다. 세계 최저 출산율과 급격한 고령화로 인해 국가의 지속 가능성마저 위협받는 한국의 상황에서, 그의 경고는 단순한 분석을 넘어 절박한 현실 진단으로 읽힙니다.


다우댓은 암울한 미래 예측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을 지켜내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과 '적극적인 선택'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기술의 편리함에 안주하기보다, 그 이면에 숨겨진 위험을 직시하고 인간적인 삶과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강력한 촉구입니다. 다우댓의 날카로운 통찰을 통해, 디지털 시대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국 사회와 우리 개개인이 무엇을 잃고 있으며, 무엇을 지켜나가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위대한 기술적 변화에는 파괴적인 그림자가 따른다. 그 깊은 그림자는 새로운 질서가 쓸모없게 만든 삶의 방식들을 삼켜버린다. 그러나 디지털 혁명의 시대—인터넷과 스마트폰, 그리고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인공지능(AI) 시대는 특히 광범위한 도태를 초래한다. 이는 인류를 진화생물학자들이 '병목 현상bottleneck'이라 부르는, 문화, 관습, 사람들을 절멸시키는 급격한 압박의 시기로 몰아넣고 있다.


대학생들이 휴대폰 화면 크기의 문단보다 긴 글을 읽는 데 어려움을 겪고, 할리우드가 유튜브와 틱톡과의 경쟁에서 고전할 때, 그것은 바로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전통적인 예술 형식을 압박하는 병목 현상이다.


일간지, 주류 개신교 교파들, 엘크스로지1가 무관심 속에 사라지고, 일반 식당과 쇼핑몰, 대학들이 유사한 하락세를 그리기 시작할 때, 그것은 교외 중산층의 오래된 존재 형태를 옥죄는 병목 현상이다.


온건파와 중도주의자들이 주변을 둘러보며 세상이 왜 자신들의 방향으로 가지 않는지, 왜 미래가 루이지 맨지오니2 추종자들과 제2차 세계대전 수정주의자들과 같은 이상한 맞춤형 급진주의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는지 의아해할 때, 그것은 합의에 기반한 정치와 정치 논쟁에 대한 절제된 공감을 무너뜨리는 병목 현상이다.



젊은이들이 데이트도 결혼도 하지 않고 가정도 이루지 않을 때,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 제도 전체를 향한 병목 현상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짝을 이루고 번식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들이 노화되고 쇠퇴하고 소멸할 때, 인구 감소가 동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유럽을 휩쓸 때—그것이 바로 마지막 압박이자 가장 강력한 병목 현상, 문자 그대로의 '멸종'이다.


인터넷이 사신死神의 낫을 휘두른다는 개념은 익숙하다. 비디오 대여점, 공중전화, 그리고 디지털 전환으로 초기에 희생된 많은 업종들을 생각해보라. 그러나 잠재적 멸종의 규모는 여전히 충분한 파악이 안 되고 있다.


이것은 여행사가 폐업하거나 넷플릭스가 비디오 테이프를 대체하는 것 같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모든 것이 병목 현상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21세기의 핵심 과제는 당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모든 것이—국가부터 세계관, 좋아하는 예술 형태, 가족까지—병목을 지난 후에도 여전히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다.


많은 멸종이 자발적으로 보이리라는 사실 때문에 문제의 해결은 보다 난해해진다. 일반적인 진화적 병목 현상에서 목표는 전염병이나 기근, 지진, 홍수, 운석 충돌과 같은 즉각적인 물리적 위협에서 생존하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병목 현상은 다르다. 새로운 시대는 우리를 서서히 죽이고 있다. 사람들을 현실에서 가상으로 끌어내고, 일상적인 삶을 유지하는 활동으로부터 우리의 주의를 분산시키며, 결국 인간 규모의 존재를 구시대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러한 환경에서 생존은 의도성과 집중성에 달려 있다. 사람들이 의식적인 숙고 없이 자동으로 전달된다고 가정하는 인류 문화는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언어는 사라지고, 교회는 소멸하고, 정치 사상은 증발하고, 예술 형태는 사라지고, 읽고 쓰고 수학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은 쇠퇴하고, 종의 번식은 실패할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이 계속 이어지도록 하는 의도와 자의식을 갖고 있으며 약간은 광적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단순한 특이함이 생존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파괴적인 것으로 드러날 저항과 급진주의적 형태가 있을 것이고 그저 막다른 길에 불과한 것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평범함과 자기만족은 치명적일 것이다.


나의 설명이 비관론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인식하고 그것에 저항하며, 인간적인 것들과 인간이 살아남고 번성하는 미래를 위해 싸우라는 요청이자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이는 표류를 거스르는 의도성, 수동성에 대항하는 목적성, 그리고 궁극적으로 멸종에 대항하는 생명 자체를 위한 호소다.

치명적인 진행

그러나 먼저 우리는 우리가 겪고 있는 게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이는 대체물로 시작된다. 디지털 시대는 실체가 있는 것들을 가져가고 가상의 대체물을 제공하며, 인간 상호작용과 참여의 전체 영역을 물리적 시장에서 컴퓨터 화면으로 옮긴다. 로맨스에서는 데이팅 앱이 술집과 직장, 교회를 대체한다. 우정에서는 문자 메시지와 DM이 실제로 만나 어울리는 것을 대체한다. 오락에서는 작은 화면이 극장과 라이브 공연을 대체한다. 쇼핑과 판매에서는 온라인 스토어가 쇼핑몰을 대체한다. 읽기와 쓰기에서는 짧은 문단과 빠른 답장이 책, 에세이, 편지를 대체한다.


이러한 대체물 중 일부는 의미 있는 장점이 있다. 인터넷이 물리적 거리를 무력화하기 전에는 불가능했던 지적, 과학적 작업이 가능해졌다. 원격근무는 다른 형태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제한하더라도 가정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긴 팟캐스트의 인기는 문자 문화에서 구술 문화로의 후퇴를 암시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짧게, 더 짧게, 가장 짧게'라는 일반적인 추세에 대한 반례이기는 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가상 대체물은 그것이 대체하는 것보다 명백히 열등하다. 스트리밍 알고리즘은 과거의 영화나 20년 전 텔레비전 황금기의 드라마 시리즈에 비해 예술적 평범함을 낳는 경향이 있다. 인스타그램이나 틱톡의 숏폼 책 소개와 문학의 관계는 온리팬스3OnlyFans와 위대한 로맨틱 사랑의 관계와 같다. 온라인 지역 뉴스는 일반적으로 과거 종이 지역 신문 생태계에 비해 형편없다. 온라인 친구관계는 실제 세계의 친구관계보다 얕고, 온라인 데이팅은 이전 시대의 데이팅 시장보다 성공적으로 짝을 이루는 사람이 더 적다. 온라인 포르노에 대해서는 뭐, 굳이 말할 것도 없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대체품은 주의를 분산시키는 힘 때문에 성공하고 심화된다. 새로운 형태가 오래된 형태보다 열등하더라도, 그것들은 중독성이 더 강하고 더 즉물적이며 접근하기 더 쉽다. 그리고 리스크도 더 적게 느껴진다. 스크린을 넘기며 상대를 찾는 온라인 데이팅에서 배우자를 찾을 가능성은 적지만, 여전히 실제 현실에서 상대방에게 구애하거나 자신을 내보이는 것보다 훨씬 쉽게 느껴진다. 비디오 게임은 현실의 스포츠와 경기 같은 종류의 신체적 경험을 제공하지 않을 수 있지만 아드레날린 상승은 늘 제공되며 얼마나 늦게, 얼마나 오래 플레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제한은 적다. SNS의 무한 스크롤은 좋은 영화보다 나쁘지만 눈을 뗄 수 없으며, 소설은 틱톡이나 인스타그램과 비교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렵다. 포르노그래피는 섹스보다 나쁘지만 상대방의 욕구와 협상할 필요 없이 원하는 것의 모조품을 언제든지 제공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가상 대체물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적더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가상 대체물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고 결국 그것에 의존하게 된다. 그리하여 디지털 환경 속에서 사회생활은 약화되고 로맨스는 줄어든다. 사회 제도와 기관들은 지지를 잃고 순수예술은 퇴색하고 대중예술은 질이 저하된다. 우리 문명이 당연시했던 기본 기술과 습관—긴 대화를 나누는 방법, 로맨틱한 관심을 갖고 여성이나 남성에게 접근하는 방법, 영화나 책에 집중하여 앉아 있는 방법—은 다음 세대에게 오직 미약하게 전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현실에서 구현된 체험이 가상의 대체물보다 덜 중요해지면서 '대체'와 '분산'의 힘은 현실 세계의 삶이 근본적으로 한물 갔다는 감각을 키운다.


온라인 라이프는 현실의 삶이 한물 갔다는 감각이 문제가 덜 되는 모든 종류의 강렬한 하위문화subculture와 니치niche를 허용한다. 그러나 평균적인 네티즌, 가상 공간을 부유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디지털 라이프는 주변부보다 중심을, 지방보다 대도시를, 일상보다 유명인의 드라마를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중앙정치는 엄청나게 중요하고 지역정치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됐다. 영어만이 유일하게 익힐 가치가 있는 언어처럼 보이고 미국 대통령 선거가 세계 대통령을 위한 선거처럼 느껴진다. 작은 국가들과 지역 문화의 삶은 기껏해야 시대착오적으로 보인다. 지구 반대편의 유명 인플루언서가 예전에 친구들과 이웃들이 차지했던 당신의 정신적 공간을 차지한다.


때문에 현실이 사실 가상세계보다 더 실제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디지털 세계에 푹 잠겨 있다가 일상으로 돌아오면 실망할 수 있다. 어쩌면 미래의 애인이 될 수 있는 이 사람은 인스타그램에서 보는 모델들보다 덜 아름답고, 우리 동네 지역 선거는 도널드 트럼프가 지금 하고 있는 일보다 덜 중요하게 느껴진다.


그 실망감은 평범한 사람, 일반 시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평등주의 사상에 의존하는 자유민주주의에 특별한 정치적 문제를 만든다. 이는 반反인간주의를 조장하고 자살을 정당화하고 안락사를 확대하는 충동을 자극한다. 또한 개인적, 문화적 무력감을 조장하는데 이는 가장 빠르게 노화되고 인구가 감소하는 곳을 방문해보면 특히 두드러진다. 그런 곳에서는 한때는 여기서 역사가 이루어졌지만 이제는 미국과 당신의 전화기 안에서만 일어나고 있다는 뚜렷한 느낌이 있다. 그렇다면 뭣하러 사람들이 이탈리아 지방이나 일본 시골, 또는 리조트 밖의 카리브해 섬, 발칸이나 발트 지역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구축하는 데 노력하겠는가?


이 모든 것은 인공지능이 등장하기 전의 우리의 궤적을 그린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모든 힘은 AI가 우리의 삶을 더 많이 재구성할수록 더욱 강렬해질 가능성이 높다. 당신은 훨씬 더 많은 대체물을 가질 수 있다. 피와 뼈로 이루어진 동료를 대신하는 디지털 노동자, 원서 대신하는 챗GPT 요약, AI 여자친구와 남자친구, 동반자들. 당신은 훨씬 더 많은 주의 분산을 가질 수 있다. 결코 지치지 않는 "크리에이터"로부터 나오는 생성 AI 콘텐츠와 엔터테인먼트, 중독성 있는 저질 콘텐츠slop의 끝없는 흐름. 그리고 AI가 현재의 발전 노선을 따라 조금만 더 나아가도 인간은 경제적, 사회적, 예술적, 지적으로 쓸모가 없어졌다거나 잉여에 불과하다는 감각은 훨씬 더 강렬해질 것이다. 마치 디지털 시대의 모든 추세가 그 논리의 완성을 위해 구축되어 온 것 같다.

얼마나 살아남을까?

내가 묘사한 것 중 어떤 것도 보편적이진 않다. 진정한 AI 종말론자들의 말이 옳지 않는 한, 2100년에도 여전히 국가, 가족, 종교, 아이들, 결혼, 위대한 책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 얼마나 생존하는지는 우리 자신의 의도적인 선택에 달려 있다. 데이트를 하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겠다는 선택, 특정 국가와 전통, 예술 형태, 세계관을 위해 싸우겠다는 선택, 가상에 대한 우리의 노출을 제한하겠다는—새로운 기술을 반드시 거부하겠다는 게 아니라 매일, 모든 환경에서 우리 자신을 그 기술의 주인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겠다는—선택.


이러한 선택 중 몇몇은 리버럴에게 특히 어려울 것이다. 종종 배타주의chauvinism와 광신주의, 반동의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가족의 계보가 살아남는 것은 자신의 친척과 가족에 대한 명확한 선호 때문지 인류에 대한 일반적인 애정 때문이 아닐 것이다. 중요한 예술 형태가 살아남는 건 솔직한 엘리트주의, 구별짓기distinction의 추구, 평범함에 대한 경멸 때문일 것이다. 종교는 다양한 형태의 신전통주의neotraditionalism를 의식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만 살아남을 것이다. 작은 국가들은 그들의 21세기 주민들이 현재 그들이 용해되고 있는 '역사의 종말' 세계주의가 아니라 19세기의 건국자들,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과 청년 튀르크당, 오리지널 시오니스트들4을 돌아볼 때만 살아남을 것이다.


따라서 리버럴리즘 자체가 지속되고 번성할 수 있으려면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약화된 이러한 강렬한 충동 일부를 좋은 사회에 대한 비전, 인간의 필요와 의무에 대한 이해 속으로 다시 엮을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반면, 리버럴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급진주의와 파괴를 받아들이려는 유혹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맺을지와는 무관하게 그저 그 자체로 급진주의와 파괴를 끌어안는 것,오늘날 우리를 지배하는 포퓰리즘의 분명한 경향이다.


또는 기술이 만든 위기에 대해 신속한 기술적 해결책을 상상하려 할 것이다. 그 해결책이 비인간화와 권위주의를 결합할지라도. (인공 자궁을 가진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을 상상해보라.)


또는 그저 평범한 사람의 도태, 일상의 사라짐, 지방과 벽오지의 공동화를 받아들이려 할 것이다. 어차피 인간과 AI가 결합한 새로운 지배 종족이 이어받으리라는 이론에 기반하여.


그러나 아마도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강한 유혹은 당신이 어떤 급진적인 프로젝트, 새로운 의도를 갖고 살아가는 방식에 참여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실상 당신은 가상적, 피상적, 근본적으로 비현실적인 것으로 다시 끌려가는 것이다.


이는 직업적 삶이 대부분 디지털 존재인 내게 매우 익숙한 유혹이다. 온라인에서 나의 우려를 공유하는 다른 이들과 함께 끊임없이 말하고, 말하고, 말하고 있을 때... 정말로 필요한 것은 현실로 나가서 행동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아라. 종교를 실천하라. 학교를 세워라. 유튜브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더라도 지역의 극장, 박물관, 오페라나 콘서트홀을 지원하라. 붓을 들고, 공을 들고, 악기를 들어라. 번역기 앱이 있더라도 언어를 배워라. 곧 웨이모나 테슬라가 당신 대신 운전할 것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운전을 배워라. 망자를 그저 화장하지만 말고 비석을 세워라. 아이와 함께 앉아, 책을 펴고, 읽어라.


병목 현상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모든 생존은 다시 한번 고대의 경고에 귀기울이는 데 달릴 것이다. "나는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


1825년 창간된 미국의 진보 성향 일간지로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많은 퓰리처상을 수상(130회 이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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