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학 캠퍼스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대학에서 많은 것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픽=PADO(생성AI 사용)

미국 동부 지식인들이 즐겨 읽는 애틀랜틱 매거진의 5월 17일자 기고문에서 데이비드 브룩스는 미국 대학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보인다고 기뻐합니다. 물론 아직은 고질적인 병폐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미국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대학이 취직을 위한 예비기관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역사를 통해 모든 학교들의 고민거리였을 것 같습니다. 먹고 살기 위한 공부냐 진선미(眞善美)를 추구하고 인격도야를 위한 공부냐라는 '빅 퀘스천'은 어차피 해결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무엇이 옳냐가 아니라 비중의 문제일 것 같습니다. 물론 두 가지가 함께 추구될 수 있다면 최선이겠죠. 이 기사에서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컬럼비아대학교 등이 만들어두고 있는 '코어 커리큘럼'입니다. 한국의 대학들이 도입하면 좋을 제도입니다. 어느 사회에서 공론(公論)이 발달하려면 함께 읽는 텍스트가 있어야 합니다. 공론이 이뤄지려면 같은 것을 보되 서로 다른 관점이어야 합니다.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있으면 대화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같은 관점이면 대화가 흥미를 잃습니다. 그런 점에서 대학들이 여러번 읽어도 좋을 양서를 고전(영어 classic의 어원은 class입니다)으로 지정해 학생들에게 읽혀야 합니다. 한국의 대학들이 동서양 고전들을 50권 정도만이라도 지정해 1, 2학년 과정에서 읽고 토론하게 한다면 한국의 공론장을 풍요롭게 만들 것 같습니다. 한국의 대졸자들이 사마천의 <사기>, 플라톤의 <국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 유성룡의 <징비록>, 마키아벨리의 <로마사논고>, 벤자민 프랭클린의 <자서전>,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한번이라도 읽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풍부한 지적 생활, 공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데이비드 브룩스에 따르면 다행히도 미국 대학에는 이런 인문주의적 움직임 내지 반성이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회의(scepticism)가 없이 주류 학계가 정답처럼 적어주는 진보적 이데올로기 내지 말(jargon)들을 외워 시험 답안지로 제출하거나 입사 인터뷰에서 써먹는 관행들이 최근들어 비판을 받기도 하고 자체 반성을 통해 수정되고 있다고도 합니다. 공론의 세번째 요소는 회의(懷疑)입니다. 즉, 회의(懷疑) 없인 회의(會議)가 불가능합니다. 확신에 찬 사람들이 모여 회의해봤자 그건 생산적이지 않은 논쟁일뿐입니다. 공론은 서로 무지하고 부족한 사람들끼리 모여 머리를 맞대는 작업입니다. 고전을 함께 읽고 함께 생각하고 회의하는 훈련과정을 한국의 대학들도 도입해야 할 것입니다. 대학이 직업학원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그 본래의 가치인 인문주의적 요소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미국 주요 대학들의 '코어 커리큘럼'은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루스벨트 몬타스는 도미니카공화국의 작은 산골 마을에서 자랐다. 12번째 생일을 이틀 앞두고 그의 어머니는 그를 뉴욕으로 데려왔고, 그곳의 한 의류 공장에서 최저임금을 받는 일자리를 구했다. 몇 년 후 그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 아파트 건물에 사는 이웃 몇몇이 책 한 무더기를 버렸다. 그중 하나는 소크라테스 대화록의 양장본이었다. 몬타스는 그 책을 집어 들었고 소크라테스는 그의 삶을 바꿔놓았다.


고등학교 시절의 은사 한 분 덕분에 몬타스는 컬럼비아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으며, 이곳 학생들은 학교의 '코어 교육과정Core Curriculum'을 통해 서구 문명의 훌륭한 고전들을 접하게 된다. 그곳에서 몬타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을 접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탐구하면서 내 자신의 내면에 접근할 수 있는 언어를 주었다. 의심과 혼란으로 가득 찬 감정의 광야였던, 미국에서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어가던 내 자신의 성장기를 탐험할 수 있는 모델과 일련의 질문들을 주었다." 몬타스는 회고록에 썼다.


역설적으로 몬타스는 아우구스티누스로 인해 기독교 신앙을 잃었지만 철학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되었다. 몬타스는 이후 컬럼비아대학교의 코어 교육 과정 센터를 이끌었고, 현재는 바드칼리지에서 시민권과 시민사상에 관한 센터를 시작하고 있다.


나는 매년 대학 캠퍼스 약 24곳을 방문하는데 각 캠퍼스에서 몬타스 같은 교원을 적어도 몇 명은 만난다. 나는 순수한 열병,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날것의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대개 이들은 인생 초기에 배움과 사랑에 빠진 경험을 가지고 있다. 사랑은 곧 지배적인 열정이 되었고 이제 이들은 교실에서 학생들과 그 열정을 열렬히 나누고자 한다. 아이비리그 대학과 커뮤니티칼리지, 대규모 주립 대학과 소규모 리버럴아츠 칼리지에서 이런 교원들을 찾을 수 있다. 이들은 미국 고등교육에서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부분의 일부이며 (나를 포함한) 비평가들이 충분히 다루지 않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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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원들은 자신들의 소명을 숭고한 용어로 이야기한다. 이들은 단지 학생들의 뇌에 정보를 주입하거나 맥킨지 같은 직장으로 이끌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진정한 인문학적 연구가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가장 거대한 질문들을 통해 학생들과 함께 걸어가고자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 내가 처한 이 세계는 어떤 곳인가? 스스로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자신의 본성에 맞는 일을 하는 대신 관습적인 길을 따르고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사소한 일에 인생을 낭비할 위험이 있다고 이 교원들은 말한다. 사람들이 진리를 구하고 시민으로서의 역량을 기르는 법을 배우는 이러한 깊이 있는 인문학적 교육을 사회가 제공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무너지기 시작한다고. "제가 학생들에게 주는 것은 자유로운 삶을 위한 도구들이에요." 몬타스는 말한다.


이 위대한 교사들은 인문주의 전통의 최신 계승자들이다. 인문주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정확한 개념—인간이 깊이 망가져 있으면서도 놀랍게 창조되었다는—에 바탕한 세계관이다. 최악의 경우, 인간은 다른 어떤 포유류도 따를 수 없는 잔인함, 파시즘, 그리고 야만성을 저지를 수 있다. 반면에 우리 내면 깊은 곳에는 아름다움, 정의, 사랑, 진리에 대한 근본적인 갈망이 존재하며 이를 잘 가꾸면 그 범위가 숨 막힐 정도로 놀라운 영적 가치와 업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


삶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가장 고귀한 열망과 타고난 이기심 사이의 싸움이다. 인문 교육은 사람들을 이 투쟁에 대비시킨다. 물론 학교 교육에는 학생들이 생계를 유지하고 경제에 기여하도록 돕는 실용적인 목적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실용적인 훈련은 온전히 기능하는 성인—지식, 판단력, 인격의 힘, 그리고 우리 문명의 영적 유산에 대한 철저한 친숙함으로 무장한 사람을 형성하는 더 큰 과정 속에 얽혀 있을 때 가장 효과적이다. 취업 준비 교육은 사람을 오직 경제적 동물로만 취급하지만 인문주의 교육은 사람을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동물로도 취급한다.


인문 교사들은 학생들을 위대한 대화—수백 년에 걸쳐 현명한 사람들이 생각하고 표현한 것 중 최상의 것을 구성하는 토론으로 안내함으로써 이를 수행한다. 이 교사들은 학생들이 죽음과 마주한 소크라테스, 손자(孫子)의 분쟁 관리 방법, 사랑에 빠진 단테, 다양한 정체성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제이디 스미스 등 삶의 중요한 과제에 직면한 실제 인간들을 만날 수 있도록 돕는다. 위대한 대화는 자율성과 소속감, 자유와 질서, 친밀함과 고독, 다양성과 응집력, 성취와 평등 등 삶의 변증법과 긴장을 탐색하려는 각 세대의 시도를 대변한다. 위대한 대화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이러한 긴장에 대한 최종적인 답은 없으며 특정 상황에서 특정 개인이나 문화에 작용하는 일시적인 균형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학은 스토아학파, 가톨릭 사회 교리, 보수주의, 비판적 인종 이론(CRT)과 같은 경쟁적인 사상 전통을 학생들에게 소개함으로써, 성인기의 근본적인 질문인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답하는 데 도움이 될 신념, 세계관, 철학을 함양하도록 돕는다. 역사와 문학을 소개함으로써 대학은 학생들에게 매우 유용한 지식인 인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지혜를 제공한다. 대학은 학생들에게 삶의 선택지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그 선택지들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능력도 제공한다. "인간의 모든 심각한 문제는 난제(難題)죠."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앤드루 델반코 교수는 내게 말했다. "인문학 교사의 근본적인 의무는 학생들이 이데올로기와 확실성에 대한 거부감을 기르도록 돕는 것이에요.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죠."


그러나 인문 교육은 단순한 지적 활동이 아니다. 그 주요 목적은 박식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교사가 자신의 역할을 다할 때, 그들은 학생들에게 배움에 대한 열정뿐만 아니라 관대함과 목적이 있는 삶을 영위하려는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마음에 대한 올바른 비유는 채워야 할 그릇이 아니라 불을 붙여야 할 나무이며 그러면 독창성을 향한 동기가 부여되고 진리에 대한 열망이 주입된다." 수백 년 전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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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은 탁월함을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으로 만듦으로써 이를 수행한다—훌륭한 삶, 훌륭한 생각, 훌륭한 예술, 상업, 과학 작품, 그리고 무엇보다도 훌륭한 이상 말이다. 이러한 이상에 매료된 학생들은 자신이 발전시킬 대의명분, 해결해야 할 사회 문제, 시작해야 할 사업을 찾게 된다. 영감을 주는 이상에 직면했을 때 많은 학생들은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나는 이것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내 삶의 방향을 이것에 맞추고 싶다. 학생들의 마음뿐만 아니라 그들의 욕망과 야망 또한 정련된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마리탱은 진정한 인문 교육에서 "의지의 형성이 지성의 형성보다 인간에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썼다.


취업 준비 교육은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이다. 그런 학생들은 '어떻게 동료들을 이기고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수 있을까?'라고 묻는 법을 배운다. 반면에 인문주의 프로그램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진리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함께 추론하며, 함께 삶을 탐구하고, 욕망을 모아 공동선을 추구한다.


나는 학생들이 긴박감을 발산하는 인문학 교사들에게 몰려드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대학은 단순한 사교 클럽 파티나 인턴십이 아니며, 잠재적으로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4년이다. 여러분은 무감각하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사람이이 될 수도 있고, 완전히 호기심 많고 헌신적이며 완전히 살아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이런 종류의 교육이 이런 효과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내가 수십 년 전 시카고대학교에서 받은 교육이 그랬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만난 교수들만큼 학식이 깊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거대한 주제와 고전들에 대한 그들의 열정은 내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나는 세상을 최대한 잘 이해하고 평생의 성장 여정에 오르기를 온 영혼을 다해 열망했다. 나의 수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 교실에서 그 책들과 그 선생님들과 함께 불붙었던 그 갈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곳은 내가 합격한 유일한 대학이었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인문주의 교육에 우연히 발을 들였지만 단언컨대 그것은 나에게 완전히 효과가 있었다.




오늘날 내가 이야기하는 교사들은 학계 내에서 반체제 인사처럼, 마치 반문화적인 일을 하는 것처럼 느끼는 경향이 있다. 이는 대부분의 학교에서 인문 교육이 학문 생활의 외딴 구석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어느 날 아침 일어나 인문주의적 이상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다. 단지 다른 목표들이 불쑥 나타난 것이다. 그런 목표들을 위해 모금하는 것이 더 쉬웠고, 등록금을 내는 학부모들에게 그것들을 홍보하는 것이 더 쉬웠다. 학생들을 최고의 자신으로 성장시킨다는 생각은 어느 정도 뒤처지게 되었다.


메건 설리번은 플로리다의 노동자 계층 가정에서 자랐으며, 설리번의 부모는 일련의 직업을 전전했고 중간중간 실업 기간을 겪었다. 설리번은 초등학교 시절 교사들을 존경했기 때문에 교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토론팀에 가입한 후, 설리번은 자신이 변호사가 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설리번에게는 아버지가 철학과 교수인 친구가 있었다. 설리번은 철학 교수가 얼마나 바보 같은 직업인지에 충격을 받았다. "철학 교수가 되는 게 변호사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세상은 없어요." 설리번은 인터뷰어인 톰 버넷에게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설리번은 법학 예비과정을 전공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한 학기에 설리번은 원하는 수업을 듣지 못했고 지도교수는 설리번에게 철학 수업을 들으라고 제안했다. 설리번은 못마땅했지만 수강 신청을 했다. 설리번의 첫 번째 과제는 자살이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 고찰하는 것이었다. "제가 이런 것에, 그러니까, 대답해도 되나요?" 설리번은 조교에게 가서 물었다. "그... 우리가 이런 것에 대해 이야기해도 되는 건가요?" 조교는 설리번에게 그렇게 해도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수업의 필수 요건이라고 말했다. "정말 완전히 짜릿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설리번은 회고했다. 현재 설리번은 노터데임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마크 에드먼드슨 또한 매사추세츠주 메드퍼드의 노동자 계층 가정에서 자랐다. 에드먼드슨은 가족 중 아무도 해내지 못한 대학 진학에 성공했고, 변호사가 되면 잘 살 수 있으니 법학 예비과정을 공부할지도 모른다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했던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다고 에드먼드슨은 나중에 회고했다. 대학은 한 번만 가는 것이니 진정으로 흥미 있는 것을 공부하는 게 낫다고 그의 아버지는 소리쳤다. 부잣집 아이들은 원하는 것을 공부하는데 너도 그 부잣집 아이들만큼이나 훌륭하다고.


에드먼드슨은 곧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랠프 월도 에머슨을 접했다. "그들은 내가 스스로 표현할 수 없었던 생각과 감정에 언어를 부여했다." 에드먼드슨은 자신의 저서 <왜 가르치는가?Why Teach?>에 썼다. "그들은 세상에 빛을 비췄고, 그들이 본 것을 나도 갑자기 보게 되었다." 에드먼드슨은 현재 버지니아대학교에서 시와 문학을 가르친다.


"교육을 받으려면 여러분이 속한 교육기관이 아무리 명성 높다 하더라도 그 기관과 싸워야 할지 모릅니다." 에드먼드슨은 예전에 학생 청중에게 말했다. "사실 학교의 명성이 높을수록 더 많이 밀어붙여야 할 겁니다."


인문학적 학습을 방해하는 힘들은 다음과 같다.


전문화.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것 외에도 대학에는 지식의 발전이라는 또 다른 완벽하게 고귀한 사명이 있다. 이 목표는 학자들이 단일한 좁은 학문 분야에 전문화되도록 훈련받을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종종 그 좁은 학문 분야에 대한 기여 때문에 일자리를 얻고 '테뉴어'를 받는다.


그 결과, 가르치는 것보다 연구하는 것을 중시하는 시스템이 나타난다. "대학원에서 압도적으로 받는 메시지는 당신이 좁은 분야의 연구 전문가가 되어야 하고, 당신 분야의 권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야 한다는 것이에요." 설리번은 대학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가르치는 것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는 일일 뿐이죠." 그리고 예일대의 앤서니 크론먼이 주장했듯이, 학자들이 전문화되면 삶의 큰 일반적인 질문을 하는 것조차 완전히 비전문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고귀한 목적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전문화는 비인간화하는 힘이며, 대학이 젊은이들의 인격 형성에 등을 돌리게 만드는 힘이다.


취업주의. 매년 UCLA는 신입생들에게 대학에서 무엇을 얻고 싶은지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다. 1960년대에는 80% 이상이 '의미 있는 삶의 철학을 개발'하기를 희망한다고 답했는데 이것이 가장 높은 응답이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그 우선순위는 급락했다. 현재 신입생의 80% 이상이 대학의 목적은 "경제적으로 매우 부유해지는" 것을 돕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학 진학은 소비 경험이 되었다. 엄청난 등록금을 지불하고 그 대가로 즐거운 시간, 직업 준비, 인맥, 그리고 몇 가지 화려한 자격증으로 보상받는다. 역사와 인문학과 같은 과목에 대한 관심은 급락했다. 취업주의가 학생들의 사고방식에 미친 영향은 더 미묘하다. 학생들이 지름길을 찾는 법을 배우면서 냉소적이며 계산적이 됐다. 많은 이들이 성과 배지를 얻기 위한 광란 속에서 시간 관리를 최적화하며 그럭저럭 넘어갈 만큼만 독서를 한다. 세상과 유리된 아는 체하는 태도가 열정적인 탐구의 정신을 밀어낸다. 인문주의 교육은 '당신은 당신의 욕망을 고양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교육을 소비라고 보는 사람들은 ''뭘 원하는지 말해보세요. 그걸 드릴게요.'라고 말한다.


정치화. 일부 학과에서는 인문주의적 이상이 활동가적 이상으로 대체되었다. 교수의 목적은 학생들이 억압 구조에 저항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활동가들은 자연스럽게 개인의 마음이나 개별 영혼의 주관적인 내적 경험보다는 권력과 사회 시스템에 더 초점을 맞춘다. 진리, 선, 문화, 또는 아름다움의 추구보다는 정치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원인이 된다.


정치적 급진주의는 한때 흥미로워 보였지만 이제는 학계 문화를 음울하게 만들 뿐이다. 나는 시카고대학교의 '세미너리 코업'서점이나 케임브리지의 '하버드 코업'서점에 가는 것을 좋아했는데 모두 최신 학술 서적을 선보이는 곳이다. 이제 그 판매대에는 내가 사고 싶은 것이 훨씬 적어졌다. 억압자/피억압자, 위반, 해체, 교차성 등 다양한 주제 영역에 적용되는 동일한 이데올로기적 이야기, 동일한 전문 용어들로 가득하다. 푸코에서 영감을 받은, 이젠 낡아가는 단일문화뿐이다. 학생들은 이 야바위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는 법을 배웠다.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가꿀 필요는 없다. 그저 골드만삭스에 입사하기 위해 학계에서 인정받은 진보적 태도를 앵무새처럼 따라 하기만 하면 된다. 미시간대학교와 노스웨스턴대학교 학생의 약 88%가 더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과제물에서 거짓말을 하고 실제보다 더 진보적인 척한다고 인정한다.


인문주의적 자신감의 붕괴. 인문학 분야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책이나 강의가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 또는 고전이 우리가 겸허히 굴복해야 할 위대한 지혜의 보고라는 믿음을 잃었다. 오래된 인문주의적 이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고풍스럽고 구식이며 반동적으로 보인다. 따라서 학생들을 변화시키려는 열정적인 시도는 일부 노쇠한 인종, 계급, 젠더 이데올로기 이론을 냉담하게 적용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학문의 목적이 정말 그렇게 사소하다면 사람들은 왜 예컨대 영문학이라는 것을 전공하겠는가?


국가적 목적의 상실. 빌 리딩스는 1996년 저서 <폐허 속의 대학>에서 대학이 한때 자신들을 국가 문화의 수호자, 창조자, 전달자로 보았다고 썼다. 대학은 중세의 대성당과 같은 기능을 수행했는데 그것은 외부로 영향을 발산하고 더 넓은 사회를 고양시키는 문화적, 지적 용광로였다. 찰스 윌리엄 엘리엇, 배너버 부시, 로버트 메이너드 허친스와 같은 초기 세대의 대학 지도자들은 자신들을 국가적 역할을 맡은 공인으로 여겼다. 그러나 리딩스는 대학이 나라의 문화에 봉사한다는 개념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남들보다 뛰어나기'의 추구로 대체했다고 주장했다. 여느 기업과 마찬가지로 대학은 랭킹 시스템에서 위로 올라가기 위해 소비자들에게 훌륭한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노력한다.


/그래픽=PADO(생성AI 사용)




우리는 19세기나 1950년대에 존재했던 인문주의적 이상으로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돌아가서도 안 되겠지만). 그러나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버전을 생각해내지 못한 것은 대학에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다. 대학은 정체성의 핵심 조각을 잃었다. 퓨 리서치 센터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70%가 대학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한다. 대학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너무 급격히 떨어져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대학을 해체하려 시도하자 환호를 받을 정도이다.


이는 학생들에게도 치명적이었다. 하버드 설문조사에서 대학생의 58%가 설문조사를 받기 전 한 달 동안 삶에서 "목적이나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상은 마음의 건강에 필수적인 심리적 목표다." 문학 평론가 알프레드 카진Alfred Kazin은 예전에 이렇게 썼다. 이상을 중심으로 교육받지 못하는 오늘날의 학생들은 건강한 정신 상태에 있지 않다.


그리고 이는 미국의 지도층에게도 치명적이었다. 대학은 국가의 지도자들이 엘리트 특권층으로서의 책임에 부응할 수 있도록 미덕을 훈련시켜 위대하고 선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덜 부유한 사람들을 섬기거나 심지어 이해하도록 훈련받지 못한 오늘날의 지도층은 대중의 신뢰를 상실했다. 대학이 문화적 공백을 남겼기 때문에 국가 전체가 인문주의적 핵심, 공유된 도덕성, 공유된 인간성을 잃었다. 기술 발전과 인문학적 쇠퇴가 동시에 일어나면서 우리는 객관적으로는 더 잘살게 되었지만 주관적으로는 더 나빠지게 되었다. 신념의 상실은 허무주의로 이어진다. 힘이 정의가 된다. 잔혹함이 지배한다. 이것이 2026년의 미국 정치다.


좋은 소식은 상황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등교육의 역사에는 흥미로운 패턴이 있다. 대학은 야만과의 대결 후에 개혁한다. 컬럼비아대학교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상 직후 '코어' 교과 과정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문학 평론가 자크 바전Jacques Barzun의 말처럼 그것은 "트라우마에서 태어난" 교육과정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도중과 그 이후에 마리탱, 허친스, TS 엘리엇, CS 루이스, 한나 아렌트, 카를 야스퍼스 같은 많은 작가들이 교육 개혁 방법에 관한 책을 출판했다. 사람들은 전쟁이 촉발한 문명을 위협하는 잔혹함을 보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더 나은 인간을 길러내야만 한다! 1942년, 독일의 반체제 인사 디트리히 본회퍼는 파시즘이 자신의 조국을 집어삼키는 방식을 보고 책임감 있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전쟁 중에 얼마나 명예롭게 행동해야 하는가만이 아니라 "다음 세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시대의 잔인함은 비슷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광범위한 계층의 미국인들이 갑자기 인격과 인격 형성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공공 규범이 무너지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시민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공공 문화가 더욱 야만적으로 변함에 따라 사람들은 국가가 인문주의적 '코어(핵심)'를 버렸을 때 어떤 재앙이 초래되는지 볼 수 있다. 게다가 트럼프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대학, 특히 연구 기금에 대한 트럼프의 공격은 끔찍했지만 대학이 지나치게 이념적이고 지나치게 취업 준비에 치중하며 지나치게 배타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고등교육에 있어서 이는 최악의 시기였지만 역설적으로 최고의 시기이기도 했다.


나는 지난 한 해 동안 수십 명의 대학 총장들을 만났는데 거의 모든 총장이 어떤 종류의 새로운 프로그램이나 개혁을 시작하고 있다. 시민과 학자 연구소Institute for Citizens & Scholars의 라지브 비나코타가 내게 말했듯이, 그들은 대학이 학생과 교수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공공의 이익을 관리하는 자로서의 역할을 소홀히 했음을 이해한다. 우리는 일생에서 가장 위대한 대학 혁신의 시기를 살고 있다.


나는 이러한 변화를 세 가지 범주로 묶어 보려 한다.


인격 도야. 사관학교, 기독교 대학, 그리고 역사적 흑인 대학(HBCU)을 포함한 일부 대학들은 인격 도야의 임무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많은 학교들이 학생들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이러한 프로그램 중 일부는 내가 시카고대학교에서 받았던 고전 독서 교육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 몇 년 전 역사학자 멜린다 주크Melinda Zook는 퍼듀 대학교 학생들 중 극소수만이 문학이나 역사 과목을 수강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코너스톤Cornerstone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학생들에게 "삶을 변화시키는 텍스트"를 공부할 기회를 제공했다. 2017년에는 약 100명의 학생이 등록했다. 현재 퍼듀 대학생 거의 5500명이 삶을 변화시키는 텍스트를 읽고 있다.


오스틴 커뮤니티칼리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테드 하지앤티치 주니어는 거대한 사상들이 부유한 학생들만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위대한 질문The Great Questions'이라는 세미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이후 위대한 질문 재단Great Questions Foundation을 설립했으며, 이 재단은 전국 커뮤니티칼리지의 140명 이상의 교수진에게 위대한 아이디어 세미나를 이끄는 기술을 훈련시켰다.


웨이크포레스트대학교는 약 10년 전 인격 형성을 사명의 중심에 두기로 결정했다. 2020년 이후, 다양한 학과의 교수 140명에게 인성 교육 방법을 훈련시켰고 160명의 교직원에게 자신의 도덕적 성장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을 훈련시켰다. 또한 웨이크포레스트대학교는 인성 교육 이니셔티브Educating Character Initiative를 조직하여 지금까지 3500만 달러(500억 원) 이상을 배분함으로써 자체 프로그램을 개발 중인 146개 기관에 영향을 미쳤다.


요즘 내가 방문하는 거의 모든 학교에는 학생들이 직면하게 될 중대한 도덕적 도전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강의가 적어도 하나씩은 개설되어 있다. 웨슬리언대학교에는 학생들이 다양한 도덕 철학을 시도해 보고 '도인道人처럼 살기 주간'과 같은 경험에 참여하는 '훌륭한 삶 살기Living a Good Life'라는 강의가 있다. 하버드대학교에서는 리처드 와이스버드가 '좋은 사람 되기와 좋은 삶 이끌기'라는 과목을 이끈다. 그는 도덕적인 아이를 키우는 방법, 문화적, 인종적, 경제적 차이를 넘어 사람들을 돌보는 방법, 낭만적인 관계를 가꾸는 방법, 그리고 자신의 목적을 찾는 방법과 같은 주제를 다룬다. 그는 셸 실버스타인의 책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특히 여학생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자기중심적인 소년에게 모든 것을 주고 또 주다가 그루터기가 되어 더 이상 줄 것이 없게 된 나무에 관한 이야기다. 일부 여학생들은 자신들의 연애 관계가 그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이 프로그램들에는 엄청난 다양성이 있다. 일부는 도덕적 모범을 제시함으로써 인격 형성을 가르치고, 일부는 도덕 철학의 탐구를 통해, 일부는 훌륭한 졸업 연설을 논의함으로써 가르친다. 발파라이소대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위대한 아이디어들을 토론한 후 그 아이디어들에 대한 뮤지컬을 쓰고, 제작하고, 공연해야 하는데 이는 협력과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활동이다.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미술사학자 그웬돌린 듀보아 쇼는 워싱턴DC에서 예술을 통해 인격을 탐구하는 "기념물, 모델, 그리고 리더십의 초상"이라는 과목을 가르쳤다. 하비머드칼리지의 프랜시스 수는 자신의 접근법을 <인간 번영을 위한 수학Mathematics for Human Flourishing>이라는 책으로 만들었다.


시민 사상. 민주주의가 무질서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시민들은 책임감 있게 자유를 행사하고, 함께 숙의하며, 자신들 앞에 놓인 선택지에 대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는 훈련이 필요하며 최근 이를 제공하기 위한 시민 교육 프로그램이 다수 등장하고 있다.


내가 일하는 예일대에서는 동료 브라이언 가스텐이 최근 시민사상센터Center for Civic Thought를 출범시켰는데 정치 이론, 헌법 원칙, 그리고 잘 토론하는 방법에 대한 대화를 주최한다. 나는 최근 가스텐의 '공동선' 강의를 청강했다. 강의는 우리가 타인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빚지고 있는지, 그리고 정치 권력은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는지와 같은 질문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생들은 자신만의 정부 체제를 갖춘 자신만의 사회를 설계하게 된다. 이는 학생들이 권력과 공정성에 대해 성찰하도록 유도하고, 자신의 가치관을 이해하도록 도전의식을 북돋는 활동이다.


한 수업에서 가스텐은 두 개의 짧은 비디오를 보여주었는데 하나는 트럼프 보좌관 스티븐 밀러가 국제 관계는 순수한 힘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 민주당 대선 후보 피트 부티지지가 국제 관계는 규칙기반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학생들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나오는 멜로스인과의 대화를 읽는데 여기서 아테네인들은 국제문제는 정의나 권리와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강자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약자는 당해야 하는 일을 당한다는 밀러와 같은 주장을 한다. 가스텐은 학생들에게 이에 동의하는지 물었다.


나는 지난 수십 년간 교단에 서면서 학생들이 공개적으로 논쟁하도록 만드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학생들은 동급생들의 평가를 받거나 그에 뒤따를 수 있는 가혹한 사회적 불이익을 두려워한다. 점차적으로 잘 토론하는 데 필요한 기술들이 위축되었다. 새로운 대학 시민 교육 프로그램은 학생과 교수진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도록 설계되었다. 예를 들어 비나코타는 70명 이상의 대학 총장들로 구성된 연합을 조직했는데 이들은 학생들을 민주주의를 위해 교육하고, 잘 토론하도록 준비시키며, 언론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있다. 나는 최근 미시간 대학교를 방문했는데 그곳에는 이를 위해 설계된 5000만 달러(700억 원) 규모의 새로운 사업이 마련되어 있었다. UC버클리의 그레이터 굿 과학 센터는 차이를 메우는 기술에 대한 최신 과학을 논의하는 8개월 온라인 과정을 제공한다.


이 프로그램들은 특히 공화당 우세 주red state에서 활발한데 이들 주의 의회는 캠퍼스의 지적 다양성을 넓히기 위한 일련의 계획에 자금을 지원했다. 예를 들어 테네시대학교는 이제 미국시민학연구소Institute of American Civics를 가지고 있으며, 오하이오주립대학교는 체이스센터Chase Center를 자랑한다. 이 프로그램들은 소속 학자들의 강단 퇴출을 원하는 타 학과의 좌파 학자들과 프로그램에 자금을 지원한 우파 주 의원들(예를 들어 소크라테스가 동성애자였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가르치면 안 된다고 요구하는 등 다소 상식 밖의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들) 양측으로부터 거센 압력을 받고 있다.


플로리다대학교는 현재 해밀턴 고전 및 시민 교육 학교Hamilton School for Classical and Civic Education를 운영하고 있다. 학교는 '자본주의와 그 비판가들', '국정 운영이란 무엇인가?', '공동선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과목들을 제공한다. 운영 첫 2년 동안 3000명 이상의 학생들이 해밀턴 수업에 등록했다.


나는 텍사스대학교 오스틴에서 운영하는 동일한 성격의 프로그램인 시민리더십스쿨School of Civic Leadership을 방문했다. 이 학교는 '인격의 탁월함: 미덕', '현실주의와 지정학의 위대한 사상가들', '진실과 설득'과 같은 과목들을 제공한다. 나는 애초에 자신들이 교직에 입문하도록 영감을 주었던 종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다른 대학을 떠나온 교수진을 만났다. 나는 이 프로그램이 보수주의자들의 고립된 집단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교수진이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내가 만난 학생들은 정치적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했다. 그들은 캠퍼스에서 마음껏 논쟁할 수 있는 공간을 찾고 싶었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그들 중 일부는 11살 때부터 아리스토텔레스를 두고 토론해 온 전통적인 기독교 학교 출신이었고 다른 학생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일반 공립 고등학교 출신이었지만 이제 그들은 함께 어우러져 토론하고 있었다. 한 신입생이 내게 "이번 주에만 교수님 두 분이 저를 신플라톤주의자라고 비난했어요"라고 말했다. 교수들이 정확히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학생이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인생을 사는 법. 세 번째의 거대한 변화 영역은 학생들이 단지 성공적인 삶만이 아니라 번영하는 삶을 이끌어갈 수 있는 방법, 즉 기본적인 삶의 기술과 관련이 있다. 몇 년 전, 로리 산토스의 행복 강좌 '심리학과 좋은 삶'이 예일대 캠퍼스를 휩쓸며 한때 전교생 4분의1을 끌어모았다. 스탠퍼드대학교에서는 공학과 디자인 사고에 기반한 과정인 '삶과 학습을 위한 디자인' 또한 놀라울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미로슬라브 볼프와 다른 사람들은 예일대에서 '살 가치가 있는 삶' 과정을 설계하여, 부처에서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는 고전 신학적 지혜를 사용하여 우리가 누구에게 답해야 하는지, 무엇을 희망해야 하는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을 다루었다. 그 과정에서 파생된 책에서 볼프와 그의 공동 저자 매튜 크로스먼, 라이언 맥애널리-린츠는 이렇게 썼다. "인생은 영웅적인 도덕적 행위를 요구하는 위기의 연속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작고, 겉보기에 사소해 보이는 결정과 비결정의 연속이다."


메건 설리번의 '신과 좋은 삶'은 아마도 노터데임대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과목일 것이다. 설리번은 돈을 관대하게 쓰는 방법, 지역사회에서 책임을 다하는 방법,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 등 삶의 굵직한 주제들을 학생들과 함께 살펴본다. 한 학기 동안 학생들은 '변론apology'을 작성하는데 이는 소크라테스 전통에 따라 자신의 신념과 그것이 현재 진행 중인 자신의 삶의 이야기에 어떻게 부합하는지에 대한 진술서이다. 완성된 변론은 가족 및 친구들과 공유되곤 한다.


/그래픽=PADO(생성AI 사용)


이러한 강의들은 모든 탐구가 비인격화되고, 냉정하며, 데이터 중심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지나치게 지성화된 학문적 문화의 맹점을 날카롭게 짚어낸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논리적인 말장난 게임이나 건조한 논문보다는 삶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 올바른 감정, 인식, 의도를 갖는 것에 더 가깝다. "아퀴나스에게 있어 신앙은 사랑의 미덕과 밀접하게 관련된 다른 종류의 지식이다." 설리번과 공저자 폴 블래시코는 자신들의 강의 교재인 책에 이렇게 썼다. "사랑은 관심과 이해를 요구하는 대단히 지적인 미덕이다." 2025년 봄까지 35개 교육기관의 142개 수업에서 살 가치가 있는 삶에 대한 강의를 시도했으며 1만4000명 넘는 학생들이 이 수업 중 하나를 수강했다.


애나 B 모어랜드는 빌라노바대학교에서 셰이핑이니셔티브Shaping Initiative를 이끌고 있다. 신입생들은 대학 생활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강의를 수강하고, 4학년 학생들은 성인의 삶을 설계하는 방법에 대한 세미나를 수강할 수 있다. 모어랜드는 학생들이 종종 자신들이 직면하게 될 정체성 문제에 대처할 준비가 부족한 상태로 대학에 온다고 말한다. 그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을 돕기 위한 일종의 실험으로 세미나를 시작했다. "학생들의 반응은 거의 본능적이었어요. 마치 제가 그들의 삶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것 같았죠."


예를 들어 학생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구별한 여러 종류의 친구들—유용성을 위한 친구, 즐거움을 위한 친구, 미덕을 위한 친구—의 차이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 가장 높은 형태의 우정에서는, 각 사람이 상대방을 단지 즐거운 시간을 보내거나 실용적인 이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근본적인 존재 자체—그 인격—때문에 소중히 여긴다.


2025년 가을, 빌라노바의 몇몇 교실을 방문한 후 나는 더 큰 강당에서 강연을 했다. 내가 끝마쳤을 때 아이패드를 든 한 젊은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그는 약간 여드름이 있었고 대학 생활을 시작한 지 겨우 두 달 된 신입생이었다. 그는 내 주요 요점들이 화면 전체에 구조화된, 마치 전기 배선도처럼 보이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그것들 사이에 정교한 연결을 그려 넣었다. 그런 다음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책에서 인용한 구절이 내 주장에 관련이 있다고 말하며 그것을 내게 읽어주었다. 내게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던 요점을 짚어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으면서도 훌륭한 인용문이었다. 나는 이 아이의 어깨를 잡고 "대체 넌 누구니?!"라고 묻고 싶었다.


모든 캠퍼스에는 자신들이 오직 해체하고, 비판하고, 분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직 전달받지 못한 학생들이 있다. 이 학생들은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자 하는 갈망을 기꺼이 존중한다. 이들은 기꺼이 변화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역사를 통틀어 전 세계의 문명에서 사람들은 세대에서 세대로 자신들의 최선의 삶의 방식을 물려주고, 주변 사람들을 훌륭한 삶으로 이끌고, 미덕을 심어주며, 서로를 어떤 궁극적인 목적지로 이끌기 위해 노력해 왔다. 우리 문화가 이 모든 과정에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저 이상할 따름이다. 이제 나는 인문주의 전통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계속해서 만난다. 때로는 교수들에게 학생들이 의미를 찾도록 어떻게 돕는지 물으면 그들은 솔직하게 인정한다. 자신은 그런 훈련을 받지 않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갈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사회적 필요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흐름이 바뀌고 있다. 만약 당신이 대학이 단지 혁명을 꾸미는 공산주의자들로 가득 찬 온실이라고 생각하는 폭스뉴스 시청자라면, 당신의 견해는—항상 과장되었었지만—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대학 지도자들은 적응하고 있다. 교수들은 자신들의 사명감을 재발견하고 있다. 요즘 캠퍼스에서는 보려고만 한다면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유명 평론가로서 시카고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후 언론인이 되었으며, 이후 작가와 평론가로 필명을 떨쳤다. 그는 월스트리트저널, 뉴욕타임스, PBS의 논설위원을 역임했고, 현재는 애틀랜틱 매거진에 주로 글을 쓰고 있다. 저작으로 <보보스>, <사람을 안다는 것>, <인간의 품격>, <소셜 애니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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