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국' 착각

선택하지 않는 것은 선택지에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26년 5월 14일(현지시간) 중국 베이징의 천단공원을 함께 걷고 있다. /사진=AP/뉴시스

최근 다이빙 주한중국대사가 국내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협력하지 않으면 중국은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중국이 가지고 있는 기술 및 경제 네트워크에 합류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물쭈물하지 말고 중국쪽에 줄서는 것이 한국에 좋을 것이라고 에둘러 말한 것입니다. 외교관의 부드러운 표현과 달리 학자의 표현은 좀 더 직설적일 수 있습니다. 포린어페어스의 5월 25일자 기고문에서 터프츠대 교수이자 보수적인 싱크탱크 미국기업연구소(AEI) 비상임 선임연구원인 마이클 베클리는 "중견국들끼리 뭘 하려하지 말고 미국쪽에 줄 서라"고 말합니다. 미중 패권 경쟁이 약할 때나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같은 어중간한 중견국 외교가 가능한 것이지 미중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시대에는 중간에서 어중간하게 있는 것은 위험한 선택이라고 비판합니다. 싸움하는 두 세력의 중간에 '자유로운 시장'이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 자칭 '중견국(middle power)'들이 있는데, 지금같은 시대에 경쟁 세력 사이에는 오직 '지뢰밭'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미국도 중국도 한국을 향해 '줄 잘 서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이 때에 우리의 선택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우리나라의 운명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의 정답은 없습니다만, 우리의 선택지 중에 가장 좋은 것, 또는 가장 덜 나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이 기고문은 우리의 고심에 한 참고가 될 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PADO와 함께 길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1월,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다보스포럼 참석자들에게,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국가들은 더 이상 각자 따로 협상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는 "우리가 식탁에 앉아 있지 않다면 ... 우리는 메뉴 위에 올라가게 된다"고 말했다. 이 표현은 시대의 분위기를 정확히 포착했다. 각국 수도와 국제회의 현장에서 중견국들은 갑작스럽게 다시 주목받고 있다. 싱크탱크 보고서와 신문 칼럼들은 인도를 핵심 '스윙 스테이트'로 묘사하고, 브라질·인도네시아·사우디아라비아·튀르키예를 성공적인 헤징 전략의 모델로 내세우며, 호주·캐나다·유럽·일본·한국에는 더 긴밀히 공조하고 미국 의존도를 낮추라고 촉구한다. 새로운 용어들도 뒤따랐다. 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 다중정렬(multialignment), 미니래터럴리즘(minilateralism), 가변적 기하(variable geometry) 같은 표현들이다.


일반적인 해석은 이러한 움직임이 다극화 세계의 도래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미국은 지배력을 잃어가고 있다, 나머지 국가들의 부상은 서방 중심 질서의 대안을 만들어냈다, 기존의 위계질서는 중간 규모 국가들이 협상하고 중재하며 강대국들을 서로 견제하게 만드는 보다 느슨한 체제로 대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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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불안을 힘으로 착각하고 있다. 중견국들이 강해졌기 때문에 눈에 띄는 것이 아니다. 취약해졌기 때문에 눈에 띄는 것이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많은 중견국들이 번영할 수 있게 했던 조건들은 지금 무너지고 있다. 오랫동안 이들 국가는 미국 패권 아래에서 보호를 받으면서, 팽창하는 글로벌경제를 활용하고, 경쟁 관계에 있는 강대국들과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은 채 교역할 수 있었다. 스스로 규모를 갖추지 않고도 규모의 이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세계는 사라지고 있다. 성장률은 둔화했고, 세계화는 '초크포인트'를 둘러싼 경쟁으로 변했으며, 강대국들은 더욱 약탈적으로 변했다. 미국은 점점 더 자신의 지배력을 이용해 양보를 강요하려 하고 있다. 중국은 보조금과 수출 과잉을 통해 다른 국가들의 산업기반을 약화시키고, 부채와 인프라로 엮어 의존성을 심화시키며, 군사적 괴롭힘과 경제 제재를 통해 선택의 폭을 좁히고 있다. 그 결과는 중견국들이 부상하는 평평한 세계가 아니라, 두 초강대국이 타국을 자신들의 의지대로 굴복시킬 수 있는 수단을 더욱 많이 갖게 된, 한층 가혹한 세계다.


중견국들은 이 새로운 현실에 전략이 아니라 상징으로 대응하려 할 위험성이 있다. 중견국들 사이의 각종 정상회의와 파트너십은 자율성을 가진 듯한 외양을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실질적 힘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리고 오늘날 실질적 힘은 점점 더 기술, 산업, 정보, 물류, 군사력이라는 거대한 체계를 자금으로 뒷받침하고 구축하며 지휘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또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단순히 미국과 중국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한쪽으로부터는 안보를, 다른 한쪽으로부터는 상품을, 양쪽 모두로부터는 시장접근을 얻는 방식으로 버틸 수도 없다. 경쟁이 더욱 첨예해질수록 헤징은 배신처럼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미국과 중국은 기술 제한, 공급망 재편, 정보 공유 중단, 투자 차단, 관세 인상, 군사적 보복 위협 등을 통해 각국에 어느 편에 설 것인지 분명히 밝히도록 압박할 것이다. 점점 더 위계화되는 세계에서 중간지대는 열린 시장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지뢰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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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국들에게도 여전히 활용할 수 있는 패는 남아 있다. 많은 국가들이 미국과 중국이 필요로 하는 자산들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원, 군사기지, 항만, 공장, 기술, 군대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틈새적 강점이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더 큰 보호 체계와 기술·금융·시장 시스템에 연결될 때에만 안보와 번영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앞으로 가야할 길은 미국과 중국을 우회하기 위해 끝없는 '이런저런 뭉치기'가 아니다. 그것은 '한 편으로 줄서기'이다. 자국이 직면한 가장 중대한 위협으로부터 가장 나은 보호를 제공하는 강대국의 조직망을 선택하고, 국가 역량을 키우며, 그 힘을 바탕으로 그 조직망 내부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완전한 '개별국가의 자율성'이라는 환상을 배제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것, 즉 더욱 위험해진 세계에서 살아남고 번영할 수 있는 능력을 지켜준다.

흐름이 뒤집혔다

기록된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중견국은 멸종위기종과도 같았다. 기원전 200년경부터 서기 1800년까지, 어느 시점을 보더라도 인류의 절반 이상은 단 3~5개의 제국 지배 아래 살고 있었다. 중간 규모의 정치체들은 존재했지만, 제국 중심부의 흥망이 반복될 때마다 끊임없이 집어삼켜졌다.


유럽은 거대한 예외였다. 5세기 서로마 제국 붕괴 이후, 다시는 어떤 통치자도 유럽 인구의 약 5분의 1 이상을 지배하지 못했다. 그러나 분열은 유럽을 중견국들에게 안전한 공간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것은 전쟁이 국가를 만들고 국가가 전쟁을 만드는 잔혹한 경쟁의 장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경쟁은 약자를 도태시키고 강자를 단련시켰으며, 결국 산업화된 포식자들을 탄생시켰다. 1500년경 존재했던 약 500개의 유럽 정치체들은 1900년이 되자 약 20개 정도로 줄어들었고, 이렇게 살아남은 강대국들은 지구 육지 면적의 약 85퍼센트를 뒤덮는 제국들을 건설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이 제국 질서를 산산조각 낸 이후에야 중견국들은 다시 번성할 수 있었다. 세계대전은 강대국들을 약화시키고 그 권위를 실추시켰으며, 동시에 과거 피지배 민족들을 주권국가로 변모시키는 데 기여했다. 산업화는 이미 철도, 전신, 교육, 대량생산, 확대되는 관료제를 통해 각 민족을 묶어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세계대전은 수백만 명, 식민지 주민들까지도 대규모 군대와 국가경제, 중앙집권적 행정체계 속으로 동원함으로써 그 과정을 가속화했다. 1945년 이후 많은 민족들은 전쟁 속에서 형성된 조직 역량과 민족주의적 의식을 제국 지배에 맞서는 데 활용했다. 그 결과는 역사적 역전이었다. 국가들이 제국에 흡수되는 대신, 제국들이 국가들로 분열되기 시작한 것이다. 주권국가의 수는 급증했고 결국 네 배로 늘어나면서 수십 개의 잠재적 중견국을 만들어냈다.


냉전은 탈식민화를 지속적인 중견국 모먼트로 바꾸어 놓았다. 글로벌 차원의 이념 경쟁을 펼치고 있던 두 초강대국 모두 신생국들을 인정하고, 약한 동맹국들을 보호하며, 그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두고 경쟁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은 북미, 서유럽, 동아시아 제1도련선에 걸쳐 안보 및 경제 우산을 제공했다. 동아시아의 이 제1도련선은 일본에서 대만, 필리핀까지 이어졌다. 미국은 해외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자국 시장을 개방했으며, 동맹국들에 자본과 기술을 공급했다. 미국 주도의 질서가 어디서나 온건했던 것은 아니다. 워싱턴은 칠레, 과테말라, 이란의 정권 전복을 지원했고, 베트남전 동안 인도차이나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그러나 호주, 캐나다, 일본, 서독 같은 동맹국들에게 미국 패권은 보호를 제공했다. 그것은 이들이 스스로 강대국이 되지 않고도 부유하고 안전하며 영향력 있는 국가로 성장할 공간이 되었다.


소련의 패권은 더 가혹했고 더 빈곤했다. 그것은 동유럽의 자율성을 억눌렀고,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 일부 지역에서 혁명적 폭력을 부추겼다. 그러나 그것 역시 중견국들의 세계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소련은 탈식민화를 지원했고, 우호 정권들에 무기와 보조금을 제공했으며, 동유럽의 산업역량 구축을 도왔다. 소련은 중간 규모 국가들을 직접 흡수하기보다는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헝가리, 폴란드의 위성 정권들, 그리고 쿠바, 베트남 같은 비유럽권의 후원 정권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소련 우방국들은 실질적 독립성이 거의 없었지만, 여전히 국경과 관료제, 군대, 산업 기반, 국제기구 내 의석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경쟁하는 두 패권 체제는 함께 중견국 시대를 떠받치는 안보적 토대를 제공했다. 1945년 이전에는 국가들이 지도에서 사라지는 일이 빈번했다. 그러나 1945년 이후 국가의 소멸은 드문 일이 되었고, 그 빈도는 약 3년에 한 나라꼴에서 약 30년에 한 나라꼴로 떨어졌다. 많은 국가들에게 피정복의 위험은 역사상 유례없이 낮은 수준으로 감소했다.

비가 내리더니 폭우로 바뀌었다

생존은 중견국 시대의 첫 번째 조건에 불과했다. 보호받는 국가들을 번영하고 영향력 있는 국가로 바꾸어놓은 것은 산업화가 본래의 서구 중심지를 넘어 훨씬 더 넓게 확산되면서 나타난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글로벌 경제성장이었다. 수천 년 동안 대부분의 사회는 에너지 공급 부족, 낮은 농업 생산성, 열악한 보건 환경, 짧은 기대수명 때문에 겨우 생존할 수 있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산업화는 화석연료, 기계, 현대적 인프라를 활용함으로써 그 한계를 돌파했다. 냉전 시기에 이르러 후발 개발국들은 더 이상 현대 경제를 처음부터 구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다른 곳에서 발명된 기술을 도입하고, 기계를 수입하며, 이미 검증된 생산 방식을 모방하고, 노동력을 농촌에서 공장으로 이동시키며, 전력화, 위생 개선, 도시화, 대량생산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신흥국들에게 이는 산업화의 에스컬레이터를 의미했다.


미국 주도의 질서는 그 에스컬레이터를 타기 더 쉽게 만들었다. 미국의 보호 아래 수십 개 국가들은 식민지를 점령하거나 대양해군을 건설하거나 자신들의 공급망을 완전히 독자적으로 방어하지 않고도 번영할 수 있었다. 미국은 해상 교역로를 개방된 상태로 유지했고, 달러 기반 금융체제를 지탱했으며, 자본, 상품, 에너지, 기술이 이례적으로 자유롭게 이동하는 세계를 떠받쳤다. 특히 컨테이너선과 디지털-인터넷 시스템 도입이 세계 생산 네트워크 확장을 가능하게 하면서 이러한 흐름은 더욱 강화됐다.


과거에는 작은 시장, 위험한 지정학적 환경, 제한된 자원 때문에 발목 잡혔을 국가들도 이제 자신이 치안유지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세계경제에 연결될 수 있었다. 멕시코, 폴란드, 한국, 튀르키예, 베트남은 제조업 거점으로 성장했다. 호주, 브라질, 칠레, 인도네시아, 걸프 국가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원자재 붐에 올라탔다. 인도와 필리핀은 서비스 제공을 통해 존재감을 키웠고, 아일랜드,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UAE)는 상업 허브로 자리 잡았다. 경로는 서로 달랐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강대국 아래 단계에 있는 국가들도 세계적 권력을 갖지 않은 채 세계적 규모의 이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세계화는 이후 성장을 전 세계로 확대시켰다. 한 국가의 도약은 다른 국가의 수출시장, 투자 기회, 혹은 원자재 붐으로 이어졌다. 중국의 부상은 이 과정을 더욱 가속화했다. 인류의 5분의 1 이상이 거주하는 중국 경제는 연간 거의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하며 중견국들이 판매할 수 있는 상품들을 대거 사들였고, 세계가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규모의 수요 충격을 일으켰다. 1990년부터 2008년까지 세계 경제 규모는 경상달러 기준으로 거의 세 배 확대됐고, 세계 교역 규모는 네 배 이상 증가했다.


이 호황은 무엇보다 중견국들을 끌어올렸다. 21세기 첫 10년 동안 개발도상국 경제는 연평균 거의 6퍼센트 성장하며 미국 성장률의 거의 세 배 속도를 기록했다. 전체 국가의 약 3분의 2는 연 4퍼센트 이상 성장했는데, 이는 미국보다 최소 두 배 빠른 속도였다. 다시 말해 세계의 상당수 국가는 단지 더 부유해진 것이 아니라, 강대국들을 따라잡고 있었다. 세계화는 오래된 중견국 문제를 해결한 듯 보였다. 국가들은 더 이상 영향력을 얻기 위해 제국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성장하는 세계경제에 통합되기만 하면 더 부유하고, 더 긴밀히 연결되며, 더 중요한 국가가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나타난 '나머지 세계의 부상(rise of the rest)'은 다극화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 듯했다. 중견국들은 단지 성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유럽연합(EU)은 동유럽으로 확대됐고 잠재적 초강대국으로 널리 거론됐다. 브릭스(BRICs)는 원래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의 고성장 경제를 가리키는 월가의 약어였지만, 이후 외교 클럽으로 발전하며 권력이 서방에서 이동하고 있다는 관념에 제도적 실체를 부여했다. 원자재 호황은 OPEC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UN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확대 요구도 힘을 얻었다. 그리고 2008년 이후에는 G20가 글로벌 위기 관리의 핵심 무대로서 G7을 대체했다. 더 이상 소수 강대국들만이 지배하지 않는 세계가 가능해 보였던 것이다.

부침(浮沈)

그러나 이제 중견국 시대를 떠받쳤던 토대는 무너지고 있다. 패권적 보호는 약화되고, 초(超)세계화는 해체되고 있으며, 고속성장은 둔화하고 있다. 이러한 패턴은 중견국을 미국과 중국 다음의 20대 경제권이라는 물질적 기준으로 정의하든, 워싱턴과 베이징 사이에서 기동하려는 국가들이라는 정치적 기준으로 정의하든 마찬가지다. 어느 쪽이든 과거의 지지대들은 무너지고 있다.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손쉬운 성장이다. 중견국들의 성장률은 이제 1990~2008년 호황기보다 약 4분의 1에서 3분의 1 정도 느려졌고, 그 결과 일반적인 경제 규모는 과거 성장세가 유지됐을 경우보다 20퍼센트 이상 작아졌다. 이들은 또한 미국을 따라잡는 데도 실패하고 있다. 많은 국가들이 2000년대 초 미국 대비 경제 규모 비중을 두 배로 늘렸지만, 이후 대부분은 경제 규모의 3분의 1가량을 다시 잃었다. 부채 부담은 2005년보다 약 4분의 1 높아졌고, 2008년 이후 이들 국가의 약 3분의 2에서는 생산성 증가율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이는 단순한 경기순환의 문제가 아니다. 중견국들을 끌어올렸던 에스컬레이터가 멈춰서는 이유는 가장 손쉬운 이익들이 이미 대부분 실현됐기 때문이다. 국가들은 고속도로를 깔고, 마을을 전기화하고, 항만을 건설하고, 노동력을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이동시키는 일을 단 한 번만 할 수 있다. 그 이후의 성장은 혁신에 더 의존하게 되는데, 혁신은 창출하기도 어렵고 확산 속도도 느리다. 인공지능을 포함한 새로운 기술들도 아직 과거 산업혁명 수준의 생산성 향상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인구 구조는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중견국들의 약 4분의 3은 이제 대체출산율 이하의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으며, 핵심 노동연령 인구는 감소하거나 정체 상태에 있고, 고령 인구는 향후 25년 안에 평균적으로 두 배 증가할 전망이다. 이러한 역풍이 겹치면서 '나머지 세계의 부상'은 역전되기 시작했다.

다시 메뉴판 위로

2008년 이후 세계경제 둔화는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들로 하여금 시장, 자원, 기술, 영토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도록 만들었다. 러시아는 자국 주변국들을 종속적인 경제권 안에 묶어두려 했다. 2010년 전후로 러시아는 옛 소련권 국가들에게 러시아 주도의 관세동맹 가입을 압박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러시아 상품에 대한 장벽은 낮추고 서방에 대한 장벽은 높이는 체제였다.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EU)과의 자유무역협정 쪽으로 움직이며 이를 거부하자, 러시아는 경제적 압박을 가했고 이후 2014년 침공에 나섰다. 중국은 성장 둔화에 대응해 부채 기반 경기부양, 산업 보조금, 수출 과잉, 가혹한 채권 회수로 이어진 해외 대출, 그리고 대만과 남중국해 주변 군비 증강에 나섰다. 한편 미국은 더욱 거래지향적으로 변하면서, 관세, 제재, 산업정책, 군사력을 이용해 동맹과 적대국 모두를 상대로 더욱 강경한 협상을 벌이고 있다. 초세계화 시대에는 중견국들이 국경, 공급망, 시장 점유율을 심각하게 방어하지 않고도 번영할 수 있었다. 이제는 아니다.


중견국들은 또한 과거처럼 손쉽게 강대국들의 호의를 끌어낼 수도 없게 됐다. 냉전 시기에는 이념적 충성이 가치를 가졌다. 약소국들은 도미노로서의 상징, 군사기지, 혹은 미·소 진영 사이 단층선의 완충지대로 중요성을 인정받았고, 이를 통해 원조, 무기, 시장 접근, 외교적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집트, 인도, 파키스탄, 유고슬라비아 등이 그런 게임을 했다. 초강대국들은 핵심 동맹 중견국들에게도 보조금을 제공했다. 미국은 일본, 한국, 대만, 서독에 자본, 기술, 시장 접근을 제공하면서, 이들 국가가 유치산업 보호를 위해 시행한 보호주의 정책을 묵인했다. 소련 역시 저렴한 에너지, 특혜 무역, 신용 공여, 무기, 원조 등을 통해 소비에트 진영을 유지했는데, 그 규모는 연간 수백억 달러에 달했다.


오늘날 미·중 경쟁은 다르게 작동한다. 미국과 중국은 철의 장막으로 분리된 경쟁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경제 안에서 패권을 놓고 싸우고 있다. 그들의 목표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충성을 사들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국가들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통제하는 데 있다. 금융, 기술, 광물, 에너지, 해운, 데이터 등이 그것이다. 얼핏 보면 이러한 전략은 병목지점을 장악한 중견국들에게 유리해 보일 수 있다. 대만은 최첨단 반도체 생산을 지배하고 있고, 네덜란드는 첨단 노광장비를 만들며,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를 선도하고 있다. 칠레는 구리와 리튬 강국이고, 싱가포르는 글로벌 해운 허브이며, 튀르키예는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해협을 통제하고 있다. 사례는 끝이 없다. 이러한 자산들은 중견국들에게 협상력을 제공한다. 그러나 협상력이 곧 독립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핵심 노드를 장악한 국가는 시스템을 교란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 시스템에 걸쳐 다수의 노드를 장악한 국가는 누가 접근권을 얻을지, 어떤 조건으로 접근할지, 그리고 어떤 가격을 치를지를 결정할 수 있다.


이것이 틈새적 협상력과 시스템 차원의 권력(structural power)의 차이다. 미국은 시스템 차원의 권력을 갖고 있다. 달러는 세계 금융을 지배하고 있다. 미국 소비시장의 규모는 그 다음 7개국 시장을 합친 것보다 크다. 미국 기업들은 전 세계 벤처캐피털의 약 절반을 공급하며, 전 세계 첨단기술 수익의 절반 이상을 창출한다. 미국은 세계 최대 석유, 가스 생산국이며, 자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대규모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이고, 약 70개국에 안보를 제공하는 나라다. 중견국이 핵심 공장, 자원, 항만, 기술 하나를 갖고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국가가 여전히 미국 달러, 미국 소비시장, 에너지, 안보, 소프트웨어, 혹은 클라우드 서비스를 필요로 한다면, 결국 미국과 거래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대중(對中) 반도체 통제는 이러한 위계를 잘 보여준다. 동맹국들은 반도체 공급망에서 필수적인 부품과 공정을 담당하고 있지만, 미국은 설계, 소프트웨어, 장비, 클라우드 플랫폼, 금융, 최종 시장, 그리고 미국 기술을 사용하는 해외 기업들까지 적용되는 수출통제 규정 등 공급망 전반에 걸쳐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이 2022년 대규모 반도체 규제를 도입한 이후, 동맹국들은 항의했고 자국 기업들에 대한 예외를 요구했다. 그러나 결국 일본과 네덜란드는 미국과 보조를 맞춘 규제를 도입했고, 한국과 대만 기업들 역시 중국 내 반도체 생산시설을 계속 가동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2025년 4월 발표된 '리버레이션 데이 관세' 역시 같은 패턴을 보여주었다. 중견국들은 미국이 거의 모든 교역 상대국, 심지어 가까운 동맹국들에게까지 관세를 부과하자 격분했다. 그러나 집단적으로 대응한 국가는 거의 없었고, 미국을 물러서게 만든 나라는 더더욱 드물었다. 대부분은 더 완화된 형태의 관세를 얻어내기 위해 양자 협상에 나섰다. 더 낮은 세율, 특정 산업에 대한 예외, 혹은 부분적 감면을 얻어내는 대신 투자 약속, 미국산 제품 구매, 정책적 양보를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그들은 미국의 압박 조건을 두고 협상할 수는 있었지만, 압박 자체를 피할 수는 없었다.


중국은 같은 위계를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낸다. 중국은 미국과 같은 금융, 안보 차원의 영향력은 갖고 있지 못하지만, 압도적인 산업 규모를 통해 다른 국가들을 중국 중심 공급망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중국의 국영은행들은 거대한 인프라, 산업 프로젝트에 자금을 댈 수 있고, 중국 공장들은 세계 제조업 생산의 약 3분의 1을 담당하고 있다. 조선, 배터리, 전기차, 드론, 태양광 패널, 희토류 가공 분야에서는 특히 압도적인 점유율을 갖고 있다. 이는 중국에 중견국들을 압박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을 제공한다. 중국은 원자재를 대량 매입할 수 있고, 값싼 수출품으로 시장을 범람시킬 수 있으며, 미완성 프로젝트에 대한 금융, 건설 지원을 중단할 수 있고, 해외 공장들이 중국산 부품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활용할 수도 있다. 인도네시아는 니켈을 보유하고 있지만, 정제 산업 상당 부분은 중국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다. 멕시코와 베트남은 공급망이 중국 밖으로 이동하면서 혜택을 얻고 있지만, 이들 공장의 상당수 역시 여전히 중국산 중간재에 의존하고 있다. 중견국들이 시스템의 가치 있는 일부 조각을 통제하고 있을 수는 있지만, 중국은 그 산업 생태계 자체를 장악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군사력 역시 마찬가지로 위계적이다. 드론, 미사일, 기뢰, 사이버 공격은 중견국들에게 더 날카로운 발톱을 제공했다. 그러나 자국 인근에서 침략군에 타격을 입히는 것과 멀리 해외로 힘을 투사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지난 1년간 미국의 군사작전은 그 차이를 보여주었다. 베네수엘라에서 미국은 수개월 동안 니콜라스 마두로의 동선을 추적했고, 이후 20개 거점에서 150대 이상의 항공기를 출격시켰다. 미국은 수도 카라카스 일부 지역의 전력을 끊고, 베네수엘라 방어망을 무력화했으며, 특수부대와 FBI 요원들을 헬리콥터로 수도에 투입해 마두로를 체포한 뒤 미국 군함으로 이송했다. 이란에 대해서는 미국과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이란 지도부의 이동 경로를 추적해 흩어지기 전에 타격했다. 사이버·우주 전력은 이란 지휘체계를 무력화했다. 이어 100대가 넘는 미국 항공기가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출격해 1000개 이상의 목표물을 타격했고, 이란 군 수뇌부 상당수를 제거했으며, 방공망, 공군, 해군, 미사일 전력을 붕괴시켰다. 이란이 반격에 나서자 미국은 함정과 걸프 지역 기지를 향해 발사된 수백 기의 미사일과 드론을 요격했다.


이것이 교란과 지배의 차이다. 일부 중견국들은 더 강한 군대에 출혈을 강요할 수 있다. 그러나 수천 개 목표물을 지속적으로 추적하고, 장거리로 병력을 이동시키며, 이동 중인 병력을 보호하고, 재급유와 재무장을 수행하며, 여러 영역의 정보를 통합하고, 해외에서 수주 혹은 수개월 동안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중견국은 없다. 심지어 성공적인 저항조차도 대개 더 큰 체계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는 뛰어난 전투를 수행했지만, 그것은 서방의 자금, 정보, 방공망, 훈련, 통신, 탄약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간은 버텨낼 수 없다

중견국들이 다시 메뉴판 위에 올라왔다면, 가장 자연스러운 대응은 서로 뭉치는 것이다. 그것이 다보스에서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가 전달한 메시지였고, 그 충동 역시 이해할 만하다. '뭉치기(연합)'는 중견국들의 목소리를 증폭시키고 특정 사안에서 협상력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중견국들을 강대국으로 만들어주거나, 영구적인 협상 테이블 자리를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첫 번째 문제는 규모다. 세계는 다극체제가 아니다. 권력의 핵심 지표들을 보면 미국은 압도적으로 앞서 있고, 중국이 대체로 2위를 차지하며, 나머지 국가들은 그 아래에 밀집해 있다. 상위 두 강대국과 나머지 국가들 사이의 격차는 중견국들 상호 간 격차보다 훨씬 크다.


이처럼 가파른 격차는 가장 광범위하게 상상 가능한 중견국 연합조차도 하나의 극을 형성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하버드 벨퍼센터가 지정한 13개 '중견국'을 보자. 브라질, 이집트, 인도, 인도네시아, 카자흐스탄, 나이지리아,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싱가포르, 남아프리카공화국, 튀르키예, 아랍에미리트, 베트남이 포함된다. 이 국가들의 경제 규모를 모두 합쳐도 미국 GDP의 절반에 못 미치고, 소비시장 규모는 미국의 약 5분의 2 수준이며, 군사비는 미국의 약 4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세계 첨단기술 수익 비중은 사실상 거의 없다. 벨퍼센터 스스로도 이들을 "응집력 있는 블록이 아니다"라고 평가한다.


심지어 환상적인 연합조차 한참 떨어진다. 명목 GDP, 소비시장 규모, 군사비, 첨단기술 수익 등 주요 권력 지표에서 3위부터 10위까지 국가들을 모두 묶어 환상적인 연합을 만들어내더라도 미국을 따라잡지 못한다. 그런 블록은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들 일부가 러시아와 손잡아야 하는 등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구성을 요구한다. 그런데도 서류상으로조차 그들의 GDP는 미국보다 작고, 소비시장은 미국보다 4분의 1 작으며, 군사비는 미국의 3분의 2 수준, 첨단기술 수익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규모는 첫 번째 문제에 불과하다. 더 깊숙이 자리 잡은 장애물은 정치다. 중견국 연합은 근본적인 딜레마에 직면한다. 규모가 커질수록 영향력은 커지지만, 동시에 연합을 유지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소규모 클럽은 빠르게 움직일 수 있지만 판을 바꿀 만큼의 무게를 갖지 못한다. 대규모 연합은 영향력을 얻는 대신 거부권 행사, 상호 경쟁, 무임승차 세력까지 함께 늘어나게 된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성공적인 연합에는 보통 '앵커(anchor)' 즉 주도국이 필요하다. 즉, 연합 내부에서 비용을 부담하고, 중립 세력을 안심시키며, 이탈 세력을 응징함으로써 공동 목표를 향해 연합을 이끌 의지와 능력을 가진 국가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영국은 나폴레옹에 맞서 그 역할을 수행했다. 영국과 이후의 소련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전까지 히틀러에 맞서 그러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그 역할을 수행하는 중견국은 없다. 그 결과 실질적인 중견국 연합도 존재하지 않는다.


중견국 연합을 구축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초강대국의 보호 아래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법은 역설을 낳는다. 패권적 보호막은 중견국들이 자원을 결집하고 내부 분열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지만, 동시에 스스로 자립할 능력은 약화시킨다. 온실처럼 연약한 정원이 자라도록 해주지만, 더 거친 환경에는 적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유럽연합(EU)은 이러한 역설을 상징한다. 부유하고 제도화 수준이 깊은 유럽연합은 세계에서 가장 유망한 중견국 연합처럼 보인다. 그러나 유럽연합은 미국 패권의 대안이 아니라 그 산물이다. 미국의 보호는 유럽의 오래된 안보 딜레마를 억누름으로써 유럽 통합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유럽의 하드파워에 대한 의지와 역량도 약화시켰다. 대신 탈냉전 시대의 유럽은 복지 초강국이 되었다. 유럽은 GDP의 2퍼센트도 안 되는 수준만 국방에 지출하는 반면, 사회복지에는 약 25퍼센트를 투입했다. 이는 세계 인구의 단 5퍼센트만을 차지하면서도 전 세계 사회복지 지출의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규모다. 그 결과 유럽은 정보, 표적획득, 공중급유, 방공, 물류, 탄약, 장거리 타격 능력 등에서 미국에 극단적으로 의존하게 됐다. 유럽은 발칸반도에서 우크라이나에 이르기까지 자기 대륙 내 위기조차 독자적으로 관리하는 데 반복적으로 어려움을 겪어왔으며, 해외로 힘을 투사하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았다.


유럽은 또한 미국이 보호하는 세계경제 안에서 필요한 것을 구매하는 데 익숙해졌을 뿐, 자국 내 산업 역량을 구축하는 데는 소홀했다. 유럽은 다른 국가들이 자국 기준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가정하며 규범 제정에 집중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스스로를 에너지 취약성과 기술 정체 상태로 규제해버렸다. 유럽은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했고, 셰일가스 프래킹을 금지했으며, 현재 에너지의 60퍼센트를 수입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 러시아는 유럽 가스와 석탄 수입의 약 절반, 석유 수입의 4분의 1 이상을 공급했다. 전쟁 발발 이후 유럽은 러시아 의존을 줄이는 대신 미국 의존을 더욱 심화시키게 됐다.


테크 분야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시가총액 기준 세계 50대 테크기업 가운데 유럽 기업은 단 4곳뿐인 반면, 미국 기업은 약 30곳에 달한다. 2013년부터 2023년 사이 유럽의 세계 테크 매출 비중은 22퍼센트에서 18퍼센트로 감소했지만, 미국 비중은 30퍼센트에서 38퍼센트로 증가했다. 유럽은 디지털 자본주의를 규제할 뿐, 그것을 생산하지는 못하고 있다. 아마존, 구글,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수준의 기업을 보유하지 못한 채, 유럽의 디지털 경제 상당 부분은 미국 플랫폼 위에서 돌아가고 있다. 클라우드 컴퓨팅, 기업용 소프트웨어, 사이버보안, 인공지능 시스템, 스마트폰 운영체제, 결제 시스템 등이 모두 그렇다.


전체적인 흐름은 상대적 쇠퇴다. 2008년 유럽연합 경제 규모는 미국보다 컸고 세계 GDP의 25퍼센트를 생산했다. 그러나 2024년이 되자 유럽연합 경제는 미국의 3분의 2 규모로 줄어들었고, 세계 GDP 비중도 17퍼센트로 하락했다.


다른 중견국 연합들은 이보다 더 취약하다.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으로 시작해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합류하며 확대된 브릭스(BRICS)는, 이후 이란을 포함한 추가 회원국과 파트너 국가들까지 받아들였다. 그러나 브릭스는 강대국 강압에 맞서는 균형추가 되기보다는 '불평불만 연합'이 되어버렸다. 많은 회원국들이 견제하려 하는 바로 그 강압적 국가들인 중국과 러시아까지 함께 포함한 채 중견국들을 묶어놓은 것이다. 회원국들은 서방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지만, 동시에 서로를 신뢰하지도 않는다. 인도는 중국을 두려워하고, 이란은 걸프 국가들과 충돌하며, 대부분의 회원국들은 블록의 규율보다 유연성을 선호한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올해 이란을 공격했을 때, 브릭스는 공동성명조차 합의하지 못했다.


이제 11개국 체제가 된 아세안(ASEAN)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회원국들은 공통의 위협도 전략도 경제 기반도 공유하지 않는다. 베트남과 필리핀은 중국을 두려워하지만,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자율성을 지키려 하고, 싱가포르는 헤징 전략을 취하며, 미얀마는 내전에 빠져 있다. 만장일치 규정은 어느 회원국이든 행동을 가로막을 수 있게 만들며, 그 결과 아세안은 종종 외교적 대기실로 전락한다.


더 작은 그룹들은 단지 하는 일이 적기 때문에 더 유망해 보일 뿐이다. OPEC은 중견국들이 특정한 필수 자원을 집중적으로 통제할 경우 실제 협상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한때 보여주었다. 그러나 OPEC은 단일 상품 카르텔일 뿐, 지정학적 블록이 아니다. 회원국들이 원하는 것은 높은 유가이지 공통의 정치 질서가 아니다. 심지어 그 제한적 합의마저 흔들리고 있다. 앙골라, 카타르, 아랍에미리트(UAE)는 이미 조직을 탈퇴했다. CPTPP는 무역협정이지 전략적 연합이 아니다. WTO 내 오타와 그룹 같은 소규모 협의체들도 유용한 기술적 포럼일 뿐, 권력을 대체할 수는 없다. 반대로 가장 효과적인 미니래터럴들은 오히려 이 법칙을 입증한다. 쿼드(Quad)는 호주, 인도, 일본, 미국을 안보 협력으로 묶고 있다. 팍스실리카(Pax Silica)는 테크 공급망 구상이다. 둘 다 미국이 중심축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작동한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다보스 연설에서 마크 카니가 제시한 선택지, 즉 '가변적 기하(variable geometry)'다. 이는 사안별로 임시 연합을 꾸리는 방식을 뜻하는 기술적 표현이다. 그러나 그것은 중견국 질서가 아니다. 그것은 강대국들이 자신들을 우회하려는 연합을 분열시키고 매수하고 위협하고 처벌하는 가운데 중견국들이 압박 속에서 허둥지둥 움직이는 평상시의 국제정치일 뿐이다. 일부 학자들은 중견국들이 안보는 여기서, 기술은 저기서, 시장 접근은 또 다른 곳에서 자유롭게 골라 구매하는 '단품 골라먹기' 질서를 상상한다. 그러나 세계는 쇼핑몰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 상태다. 유럽이 2019년 미국 제재를 우회해 이란과의 교역을 지속하기 위해 INSTEX라는 메커니즘을 구축하자, 미국은 이용자들을 달러 시스템에서 축출하겠다고 위협했다. 같은 해 튀르키예가 러시아산 방공체계를 구매하자, 미국은 튀르키예를 F-35 스텔스기 프로그램에서 배제했다. 2025년 인도가 미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산 석유 구매를 계속하자, 미국은 인도에 50퍼센트 관세를 부과하며 강하게 압박했다.


중국 역시 마찬가지로 공격적으로 자신들의 위계를 강요한다. 중국은 캄보디아를 압박해 아세안이 남중국해에서의 중국 군사력 확대를 비판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리투아니아가 대만과의 관계 강화를 추진하자 무역 제한과 글로벌 공급망 내 리투아니아산 부품 배제를 통해 보복했다. 또한 호주가 코로나19 기원 조사 요구에 나서자 보리, 와인, 소고기, 석탄, 면화, 랍스터 등에 관세와 비공식 수입금지 조치를 가했다. 중국은 스페인, UAE, 러시아, 일본 관련 기업들이 참여한 베트남 해상 가스 개발 사업도 위협과 해상민병대 선박 동원을 통해 중단시켰다. 강대국 충돌로 갈라진 세계에서 '가변적 기하'는 중견국들을 보호하지 못한다. 오히려 노출시킨다.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강한 연합은 동시에 처벌받을 만큼 충분히 눈에 띄기 때문이다.

보호해 줄 후원자를 선택하라

중견국들이 홀로 설 수도 없고, 하나의 극을 형성할 수도 없으며, 임시 연합 속에 몸을 숨길 수도 없다면, 결국 더 큰 조직망 가운데 하나에 기대야 한다. 이것이 맹목적 복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여전히 폭넓게 교역하고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다. 그러나 권력의 핵심 영역들, 즉 어느 나라 무기를 살 것인지, 어느 나라와 정보를 공유할 것인지, 어느 나라 은행 체계에 의존할 것인지, 어느 나라의 반도체와 클라우드 플랫폼 위에 산업을 구축할 것인지, 어느 에너지 네트워크에 참여할 것인지, 그리고 어느 나라의 제재를 집행할 것인지 같은 문제에서는 점점 더 한쪽을 선택해야 하게 될 것이다. 헤징은 위협이 멀리 있고 강대국들이 모호함을 용인할 때는 작동한다. 그러나 경쟁이 첨예해지고 양측이 모두 "당신은 우리 편인가, 아니면 적인가?"라고 묻기 시작하면 헤징은 흔들린다. 중견국들에게 더 이상 중요한 문제는 선택을 피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하찮은 졸(pawn)로 전락하지 않으면서 보호해줄 후원자(patron)를 선택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줄서기'는 굴종이 아니다. 그것은 틈새적 강점을 협상력으로 바꾸는 전략이다. 항만, 기지, 반도체 제조 장비, 광물 자원, 드론 산업, 조선소 같은 중견국들의 자산은 단독으로는 국가를 안전하게 지키기에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더 큰 동맹 체계 안에서는 이러한 틈새 자산들이 중견국들이 부족한 것들, 즉 보호, 정보, 기술, 자본, 시장 접근, 전략 결정에 대한 영향력을 얻기 위한 협상카드가 될 수 있다. 핵심은 의존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개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의존을 상호적인 관계로 만드는 것이다. 자신이 초강대국에 유용한 존재임을 입증한 국가에게, 초강대국은 의견을 듣고, 무장시키고, 자금을 지원하며, 방어해주는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일본은 이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이 최근 포린어페어스에서 설명했듯, 도쿄는 아시아에서 미국의 힘을 대체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려 하고 있다. 일본은 미국이 동아시아 지역내 경쟁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한다. 현지 기지, 기술, 산업 역량, 함정 수리 능력, 미사일 생산, 연합 조직 지원, 그리고 지역적 정당성이 그것이다. 일본은 미국 전략이 외부 개입처럼 보이기보다 주요 아시아 민주국가들이 함께 이끄는 연합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 대가로 일본은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에 접근할 수 있게 되고, 그 힘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대해서도 더 큰 발언권을 얻게 된다.


핀란드와 스웨덴도 유럽에서 비슷한 선택을 했다. 두 나라는 스스로를 방어하는 방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나토(NATO)에 가입한 것이 아니다. 국가적 회복력은 미국의 힘이 뒷받침될 때 더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나토는 높은 역량을 갖춘 북유럽 군대를 얻었고, 핀란드와 스웨덴은 집단방위 조항인 제5조의 보호를 얻었다. 호주, 폴란드, 필리핀, 한국 역시 같은 패턴의 변형이다. 이들 국가는 모두 국가 역량을 강화하는 동시에 미국 주도 네트워크 안에서 자신들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바로 이것이 동맹이 대부분의 국제안보기구들과 달리 실제로 작동하는 이유다. 이미 사라진 국제연맹이나 국제연합(UN) 같은 집단안보기구는 국가들에게 추상적인 규칙을 방어하라고 요구한다. 어느 침략자에 대해서든, 어느 지역에서든, 그리고 자국이 직접적 이해관계를 느끼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가변적 기하'는 이보다 더 불안정하다. 위험이 발생할 때마다 국가들이 즉흥적으로 대응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반면 동맹은 훨씬 실용적이다. 동맹은 위협이 무엇인지 특정하고, 역량을 결집하며, 역할을 배분하고, 위기가 닥치기 전에 협력의 습관을 구축한다. 동맹을 결속시키는 것은 보편적 선의가 아니다. 공통의 위험이다. 그것은 보기 흉한 동기일 수 있지만, 국가들은 무엇에 맞서 협력하는지를 분명히 알 때 훨씬 더 안정적으로 협력한다.


그러나 올바른 '줄서기'를 선택하는 일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견국들은 단지 가장 강하거나 가장 익숙한 국가에 맹목적으로 기대서는 안 된다. 대신 더 어려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어떤 강대국이 자국의 안보, 번영, 자율성을 더 크게 위협하는가 하는 점이다. 답은 국가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국가는 침공 위협에 직면해 있다. 다른 국가는 경제적 강압, 기술 의존, 정치적 간섭, 혹은 신뢰할 수 없는 후원자로부터의 방치에 직면해 있다. 인도처럼 규모가 큰 일부 중견국들은 다른 국가들보다 더 넓은 '운신의 폭'을 유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강대국 경쟁이 격화될수록, 가장 강한 중견국들조차도 어떤 위험으로부터 가장 먼저 벗어나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더 큰 체제가 자신들에게 가장 큰 피난처를 제공하는지를 결정해야만 할 것이다.


대부분의 중견국들에게 이것은 차악(次惡)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다. 그러나 그 선택은 어렵지 않아야 한다. 미국은 점점 다루기 힘든 후원자가 되고 있다. 미국은 관세, 제재, 수출통제, 영토 내 군사 접근 요구, 급격한 정책 변화 등을 통해 동맹국들까지 압박한다. 그러나 미국은 여전히 다른 어떤 국가도 제공할 수 없는 것들을 제공한다.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대규모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군사력에 의한 보호, 세계에서 가장 깊은 자본시장과 최대 소비시장, 그리고 최첨단 혁신 허브에 대한 접근권이 그것이다. 또한 부유하고 역량 있는 동맹국들의 거대한 네트워크에도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의 힘이 민주주의 제도를 통해 작동한다는 점이다. 외부 국가들조차 때로는 그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동맹국들은 의회를 상대로 로비할 수 있고, 기업들을 동원할 수 있으며, 언론 논쟁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다른 미국 동맹국들과 연합해 협상할 수도 있다. 반드시 승리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게임에는 참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중국이 제시하는 거래는 훨씬 빈약하다. 중국은 도로를 건설하고, 항만에 자금을 대며, 원자재를 구매하고, 값싼 상품과 산업 부품을 공급할 수 있다. 일부 국가들에게 이는 유용하다. 그러나 대출, 인프라, 서방에 대한 협상 카드 이상의 것을 중국은 거의 제공하지 못한다. 안보 우산도, 기축통화도, 약소국들이 협상할 수 있는 개방적 정치 채널도 없다. 중국의 권력은 '울타리치기'를 추구한다. 중국은 항만에 자금을 대고, 건설회사를 공급하며,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광물을 가공하고, 수출품으로 시장을 범람시키며, 시간이 갈수록 상대국으로부터 덜 구매하려 한다. 개발로 시작한 관계는 종속으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중견국들은 위계적 세계에 살 것인지 여부를 선택할 수 없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위계 체제가 자신들에게 더 큰 '운신의 폭'을 제공하는가 하는 점뿐이다. 위험한 것은 연출된 자율성을 실질적 권력과 혼동하는 일이다. 그들이 각종 정상회의와 포럼, 고무적인 연설들을 찬양하는 동안, 돈, 기술, 에너지, 군사력이라는 진짜 힘들은 강대국들의 손에 축적되고 있다. 안보는 홀로 서는 데서도, 즉흥적 연합들을 기워 맞추는 데서도 나오지 않는다. 더 큰 동맹체계 안에서 효과적으로 협상하는 데서 나온다. 중견국들은 평평한 세계 속 자유행위자가 아니다. 그러나 점점 더 불평등해지는 세계에서도 강대국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여전히 번영할 수는 있다.



마이클 베클리(Michael Beckley)는 미국 터프츠대학교 정치학 부교수이자, 미국기업연구소(AEI) 비상임 선임연구원이며, 필라델피아 소재 포린폴리시연구소(FPRI) 아시아 연구 책임자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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