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뒤샹은 예술을 망쳤는가?

당신이 현대미술을 혐오한다면, 그 모든 불만의 원천은 결국 뒤샹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셀 뒤샹, <자전거 바퀴(Bicycle Wheel)>, 1951년(1913년 제작된 원작이 소실된 후 제작된 세 번째 버전). 채색된 나무 의자에 금속 바퀴, 129.5 × 63.5 × 41.9cm. 뉴욕 현대미술관(MoMA) 소장.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ADAGP, Paris / Association Marcel Duchamp.


마르셀 뒤샹에게는 예술에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표현, 취향, 미학적 의도—조금이라도 고상한 예술인 체하는 기색을 풍기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는 질색했다. 그는 철저히 현대적인 인물이었다. 비인격적으로 작동하는 우연의 방식을 즐겼고, 농담과 섹스, 현대 기계의 움직임을 사랑했다. 1912년, 스물다섯 살의 뒤샹은 파리에서 열린 에어쇼에서 루마니아 출신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에게 이렇게 말했다. "회화는 끝났어. 저 프로펠러보다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이듬해 뒤샹은 나무 의자에 거꾸로 세운 자전거 포크를 고정하고 그 위에 자전거 바퀴를 달았다. 그는 바퀴살이 프로펠러처럼 중심축을 따라 회전하는 모습과, 벽난로의 불빛처럼 반짝이는 빛을 반사하는 모습을 즐겼다. 그가 '레디메이드readymade'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였지만, 뒤샹은 이미 최초의 레디메이드를 탄생시킨 셈이었다. 장난기 넘치고 기계에 매료되었으며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일관성이 없었던 이 프랑스인은, 이전 세대의 모더니스트들에게 리하르트 바그너나 샤를 보들레르가 미쳤던 것에 견줄 만한 영향을 현대적인 창조성에 끼치게 될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뒤샹이 남긴 유산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누군가는 열렬히 사랑하고, 누군가는 지독히 혐오한다. 그는 '개념미술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내세운 이른바 '아이디어'라는 것들은 대부분 한가로운 착상이나 도발, 추측에 가까웠다. 그가 예술의 숨통을 끊어놓았는지, 아니면 예술을 해방시켰는지를 두고도 의견이 갈린다. 뒤샹 이후 예술의 운명을 두고 우리가 아무리 고심한다 해도, 이 기묘하고 독창적인 인물—그토록 태연하면서도, 그토록 광적인!—이 몰두했던 것은 단순히 '예술을 만드는 일'보다 훨씬 더 사적이고 절박하며 애정 어린 어떤 것이었다(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리고 있는 대규모 뒤샹 전시—50여 년 만에 북미에서 열리는 그의 첫 회고전—를 둘러보는 경험은 전통적인 전시를 감상한다기보다 하나의 아카이브를 헤매는 듯한 느낌에 가깝다(이번 전시는 MoMA의 큐레이터 앤 템킨과 미셸 쿠오, 그리고 필라델피아미술관의 매슈 애프런이 기획했다). 전시된 작품들 가운데 상당수는 작가의 승인을 받아 제작된 복제품인데, 여기에는 우리가 위대한 예술작품에서 기대하는 초연한 자기완결성이나 이른바 '아우라'가 전혀 없다. 오히려 각각의 오브제는 한때 존재했던 것, 한때 떠올랐던 생각, 한때 웃음을 자아냈던 무언가를 가리키는 각주나 색인의 항목처럼 보인다. 전시를 따라 더 깊숙이 들어갈수록 분위기는 점점 법의학적 조사 현장을 연상시키며, 마치 범죄 현장을 살펴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전시의 막바지에 이르면 이러한 의심은 확신으로 바뀐다. 그곳에는 뒤샹이 1963년 패서디나미술관에서 열린 자신의 생애 첫 회고전을 위해 직접 디자인한 포스터가 전시되어 있다. 포스터는 2000달러의 현상금이 걸린 가짜 'WANTED(수배)' 전단을 본떠 만들었고, 그 속 범인 머그샷 주인공은 다름 아닌 뒤샹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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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현대미술을 싫어한다면, 현대미술에서 당신이 혐오하는 모든 것은 그 뿌리를 뒤샹에게서 찾을 수 있다. 아무런 기술도 필요로 하지 않는 예술, 혹은 반대로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공을 차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뛰어난 기술로 만들어진 예술. 작품 자체보다 그 배경 이야기가 전부인 예술, 언어적 설명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그것이 없다면 맥없이 무너져버릴 것 같은 예술. 현학적인 학술 논문을 양산하기에 안성맞춤인 예술. 숭배의 대상이자 주변적 주석, 의도적인 난해함을 추구하는 예술, 이 모든 것의 문을 연 사람이 바로 뒤샹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작업에는 여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끊임없이 낳는 듯한, 생기 넘치고 변화무쌍한 특성이 있다. 오늘날 현대미술에서 가장 반항적이면서도 유쾌하게 스스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몇몇 충동의 이면에는 뒤샹 특유의 짓궂고 날카로운 지성이 번뜩이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는 정말이지 유머러스하다. 유치하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나는 뒤샹이 복제된 <모나리자>에 연필로 콧수염과 턱수염을 그려 넣은 작품을 볼 때면 여전히 웃음이 난다. 그는 이 작품에 <L.H.O.O.Q.>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알파벳을 프랑스어로 하나씩 발음하면 'Elle a chaud au cul'과 비슷하게 들리는데, 이는 "그녀는 엉덩이가 핫하다"라는 외설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뒤샹은 자신이 누구에게도 영향을 미친 적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사실 그의 예술적 후예들은 도처에 존재한다. 뒤샹에게 빚진 이들은 레디메이드를 사용하는 예술가들만이 아니다. 우연을 작품에 끌어들이는 작가들, 아상블라주와 설치미술을 만드는 작가들, 또 다른 자아와 크로스드레싱을 활용하는 작가들, 자신의 삶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제시하는 작가들 역시 그의 영향 아래 있다. 복제와 복제품, 공장식 제작 방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작가들, 명백히 터무니없거나 아무런 가치도 없어 보이는 것을 '예술'로 내놓음으로써 미술시장을 조롱하는 작가들도 마찬가지다. 가령 빈 공간을 판매한 이브 클랭, 자신의 배설물을 통조림에 담아 판매한 피에로 만초니, 벽에 테이프로 붙인 바나나를 판매한 마우리치오 카텔란이 그렇다. 기계와 에로티시즘, 신체 일부의 주형, 아카이브, 그래피티, 착시, 언어유희를 작품에 활용하는 작가들 역시 뒤샹에게 빚지고 있다. 어쩌면 뒤샹의 영향을 받지 않은 예술가들의 명단을 작성하는 편이 훨씬 짧을지도 모른다.


뒤샹 자신은 일곱 형제자매 중 한 명으로, 루앙 외곽의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훗날 그가 회고했듯 그의 집안에는 "예술적 기질이 매우 풍부해서", 마치 "미학적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과 같았다. 아버지는 공증 변호사였지만, 할아버지는 성공한 화가였다. 어머니 역시 젊은 시절 아마추어 화가였으며, 두 형 가스통과 레몽은 각각 법학과 의학을 포기하고 파리에서 예술가가 되었다. 여동생 중 한 명인 쉬잔 역시 예술가가 되었다.


처음부터 뒤샹이 자신의 소명을 예술에서 찾았던 것은 내면의 어떤 미학적 확신에서라기보다 가족에 대한 애정과 더 깊은 관련이 있었던 듯하다. 그는 훗날 이렇게 설명했다. "열여섯 살 때 나는 한 6개월 정도 아버지처럼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단지 내가 아버지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형들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1904년, 그는 형들과 함께하기 위해 파리로 이주했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전시 초반부 갤러리들은 작가의 초기 풍자 만화에서 시작해 빠르게 그의 작품 세계를 훑어간다. 이 만화들에 붙은 재치 있고 은근한 캡션은 훗날 그가 작품 제목에서 즐겨 사용하게 될 언어유희를 예고한다. 이어 세잔과 마티스의 영향을 받은 풍부한 색채의 회화 몇 점을 거쳐, 온통 갈색 계열로 이루어진 반추상적 입체주의 작품들로 이어진다. 뒤샹은 어린 시절부터 체스를 두었다.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논리 체계와 기계에 대한 점점 커지는 관심—커피 분쇄기와 초콜릿 분쇄기 같은 기계에서 시작된—을, 다소 뜻밖에도 평생에 걸친 에로티시즘에 대한 탐구로 연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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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다(Dada)를 탄생시킨 것과 동일한 제1차 세계대전의 허무주의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뒤샹의 작품 세계를, 총력전과 망명, 그리고 근대 사회의 획일성이 초래한 트라우마로부터 창조적인 에너지를 만들어내려는 하나의 시도로 본다. 그러나 뒤샹을 깊이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의 상상력의 세계 중심에 성애적 집착과 좌절된 낭만적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자위행위에 그토록 주목했던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적어도 한 작품에서 자신의 정액을 사용했고, 초콜릿 분쇄기를 자위행위의 은유로 활용했으며("독신자는 자신의 초콜릿을 스스로 간다"), 원과 회전에 대한 자신의 지속적인 집착을 "일종의 자위행위"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뒤샹의 삶에는 두 차례의 심각한 짝사랑이 있었다. 그 첫 번째 상대는 가브리엘 뷔페-피카비아로, 뒤샹은 스물네 살 무렵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곧 뒤샹에게 자신의 남편 프란시스 피카비아를 소개했다. 남편 피카비아는 한량 기질의 인물이자 추상미술의 선구자였다. 뷔페-피카비아는 파리와 베를린에서 아방가르드 음악을 공부했으며, 이제 피카비아와 뒤샹이 시각예술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도록 이끌었다. 뒤샹의 역설적인 성향을 간파한 그녀는 그에게서 "절대적인 논리에 대한 욕구에 사로잡힌" 불안한 완벽주의자의 모습과, 동시에 우연성을 받아들이는 반항아의 모습을 보았다. 세 사람은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농담을 즐겼고, 빠른 차를 타고 여행을 다녔으며(피카비아는 자동차에 열광했다), 다양한 예술적 실험을 함께했다. 뷔페-피카비아를 다룬 전기소설 『가브리엘(Gabriële)』에서 그녀의 증손녀인 안 베레스트와 클레르 베레스트는 가브리엘 피카비아와 뒤샹이 "파괴된 우상들에 대한 취향, 아이러니의 예술과 예술의 아이러니에 대한 취향, 어떤 상황에서든 농담을 즐기는 성향, 그리고 신은 죽었다는 생각"을 공유했다고 말한다.


마르셀 뒤샹,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o. 2)>, 1912년. 캔버스에 유채, 147 × 89.2cm. 필라델피아 미술관, 루이스와 월터 아렌스버그 컬렉션.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ADAGP, Paris / Association Marcel Duchamp.


뒤샹은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여성을 그린 자신의 작품이 1913년 뉴욕의 아모리 쇼Armory Show에 출품된 후 자신을 악명 높은 인물로 만들자 당혹스러워했다. 이 작품에서 여성의 움직임은 스톱모션 사진의 연속 장면을 겹쳐놓은 듯한 방식으로 포착되어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o. 2)Nude Descending a Staircase (No. 2)〉는 언론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한 비평가는 이를 "널빤지 공장에서 일어난 폭발"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관객들은 이전에 이와 같은 작품을 본 적이 없었고, 밀려드는 현대성을 이해하려 애쓰던 당시의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이 작품은 곧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 되었다. 이러한 반응에 고무된 뒤샹은 1915년 여름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유럽에서는 전쟁이 한창이었고, 그는 미국에 3년간 머물렀다. 한 여성 친구의 말에 따르면, 그는 "뉴욕 사교계 전체의 열렬한 환대를 받았으며, 여성들 대부분의 구애를 받았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은 뒤샹이 그 시기에 착수한 걸작 〈미혼 남성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심지어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에서 가장 친한 친구의 아내를 향한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을 우의적으로 표현했다고 본다. 그는 이후에도 8년 동안 이 작품에 매달렸지만, 끝내 완성하지 않은 채로 남겨두었다. 보다 일반적으로 〈대형 유리The Large Glass〉라고 불리는 이 작품은 금속 프레임 안에 수직으로 세운 두 장의 유리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리 위에는 납선, 납박, 유채물감, 바니시, 먼지 등을 사용하여 기계를 연상시키는 도식적인 이미지들이 새겨져 있다. 이 기계적 형상들은 위쪽의 신부와 아래쪽의 아홉 명의 독신자를 나타낸다. 작품을 운반하던 중 유리판에 금이 가자, 뒤샹은 깨진 조각들을 다시 맞추었고 우연히 생겨난 듯한 균열의 선들을 오히려 즐겼다. 이 작품은 현재 필라델피아 미술관Philadelphia Museum of Art에 상설 전시되어 있다. 뒤샹은 원래 이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담긴 난해하고 자기몰입적인 사고를 설명하는 한 권 분량의 안내서를 작품과 함께 제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린박스The Green Box'라고 불리는 제본되지 않은 노트 더미로 대신했다.


뒤샹은 <대형 유리>를 작업하는 동안 재치 있는 제목을 붙인 일련의 레디메이드를 제작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1917년에 등장했다. 뒤샹은 도자기로 만든 남성용 소변기를 뒤집어 놓고 그 위에 "R. Mutt"라고 서명했다. 그가 '샘Fountain'이라고 이름 붙인 이 작품은 하나의 도발이자 장난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현대적인 상하수도 설비가 가져온 놀라운 성취에 대한 찬사이기도 했다. 그보다 2년 전에는 이와 같은 소변기 세 점이 뉴어크 미술관Newark Museum에 전시된 적이 있었다. 이 미술관의 초대 관장 존 코튼 데이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일상생활의 물건들을 아름답게 꾸미고 완성도 높게 만드는 데 투입된 천재성과 기술 역시, 오늘날 유화에 담긴 천재성과 기술이 인정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정받아야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흥미롭게 여긴 뒤샹은 계속해서 회화를 그리는 사람들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들이 물감 냄새에 집착한다고 비난했으며, 그들의 작업을 "망막적 예술retinal art", 즉 오직 눈에만 호소하는 예술이라고 폄하했다. 그는 예술을 르네상스 시대의 모습으로 되돌리고자 했다. 당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예술을 코사 멘탈레cosa mentale, 즉 정신적·지적인 문제로 이해했다. 그러나 뒤샹이 말하는 '지적인 것'은 언제나 에로티시즘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신으로 사물을 붙잡고 싶다. 마치 음경이 질에 의해 붙잡히는 것처럼."


1920년 뒤샹은 여성으로서의 '알터 에고(또 하나의 자아)' 로즈 셀라비Rose Sélavy를 만들어내기로 했다. 40년 뒤 그는 "'남성 이름을 가진 한 명의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며, "나 자신으로부터 또 하나의 인격을 만들어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그는 이름의 철자를 Rrose Sélavy로 바꾸었는데, 이는 프랑스어 "Eros, c'est la vie", 즉 "에로스, 그것이 인생이다"라는 말처럼 들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로즈'는 익살스럽고 장난기 어린 사업적 시도들을 벌이는 데 특화된 인물이었다. 부유한 후원자들의 지원을 받았던 뒤샹은 이윤을 추구하는 태도를 조롱하기를 즐겼다. 또한 '로즈'는 착시와 성적인 이중 의미를 활용한 작업들을 선보였다.


그리고 3년 뒤, 예술이 과연 무엇일 수 있는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성공적으로 뒤집어놓은 뒤—눈삽이라니! 공기를 담은 앰풀이라니! 여장을 한 작가 자신의 초상이라니!—뒤샹은 파리로 돌아가 10년 넘게 체스에 전념했다. 그는 수준 높은 체스 대회에 출전했고, 네 차례의 체스 올림피아드에 프랑스 대표로 참가했으며, 체스 이론에 관한 책을 공동 집필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래픽 디자인 작업을 간간이 계속했으며, 거울과 비밀 칸이 달린 정교한 휴대용 상자들을 제작하면서 자신의 예술적 유산을 정리하고 보존하는 일에도 힘썼다. 이 상자들은 그의 기이하면서도 뛰어난 작품들을 세심하게 제작한 소형 복제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맨해튼에 정착했지만, 1968년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1년 뒤, 세상은 뒤샹이 <에탕 도네Étant donnés>라는 디오라마와 유사한 작품을 20년 넘게 비밀리에 제작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 필라델피아 미술관으로 전시가 옮겨가면 관람할 수 있다.) 작품은 복도 끝에 놓인 낡은 나무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에는 두 개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관람자가 이 구멍을 들여다보면 커다란 구멍이 난 벽돌담이 보인다. 그 너머에는 나뭇가지와 나뭇잎 위에 마치 시체처럼 팔다리를 벌린 채 누워 있는 벌거벗은 여성의 잘린 듯한 몸통과 한쪽 팔, 두 다리가 보인다. 여성의 음모가 제거된 성기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으며, 왼팔로는 빛나는 가스등을 들어 올리고 있다.


여성의 신체를 만들기 위해 뒤샹은 두 번째 부인인 '티니Teeny' 새틀러의 팔다리를 본뜬 주형과, 두 연인인 메리 레이놀즈와 마리아 마르틴스의 신체를 본뜬 주형을 조합했다. 뒤샹은 티니가 미술상인 남편 피에르 마티스(앙리 마티스의 아들)와 헤어진 뒤인 1954년에 그녀와 결혼했다. 아방가르드 책 제본가였던 메리 레이놀즈와는 1920년대부터 연인 관계를 이어갔으며, 초현실주의 조각가 마리아 마르틴스는 뷔페-피카비아에 이어 뒤샹의 삶에서 두 번째로 큰 좌절된 사랑의 상대였다. 뒤샹과 마르틴스는 1940년대와 1950년대 초 뉴욕에서 열렬한 연애 관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브라질 외교관이었던 마르틴스의 남편이 파리로 전근하게 되었고 마르틴스가 남편을 따라가기로 하자, 뒤샹은 큰 충격에 빠졌다. 재스퍼 존스가 "어느 미술관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기이한 예술작품"이라고 표현한 <에탕 도네(Étant donnés)>는 금기를 넘나드는 매우 불안하고 충격적인 작품으로, 지금까지도 이 작품을 해석하려는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이 작품을 사랑하는 여성에게 바치는 낭만적인 헌사, 어쩌면 미술사적 헌사로 볼 수 있다면—가장 직접적으로 떠오르는 작품은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의 <세상의 기원The Origin of the World>이다—동시에 그것은 섬뜩하고 혼란스러우며 관람자를 고립시키는 경험이기도 하다. 작품을 들여다보는 모든 관람자를 영문을 알 수 없는 성범죄의 현장을 병적으로 훔쳐보는 관음자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마르셀 뒤샹의 다중 초상(Multiple Portrait of Marcel Duchamp)>, 브로드웨이 포토 숍(Broadway Photo Shop), 뉴욕, 1917년. 젤라틴 실버 프린트, 8.7 × 14cm. 프랑스 개인 소장. © 2026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ADAGP, Paris / Estate of Marcel Duchamp.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은 극적 독백시 「블루그램 주교의 변명Bishop Blougram's Apology」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의 관심은 사물의 위험한 경계에 놓여 있다. / 정직한 도둑, 다정한 살인자, / 미신을 믿는 무신론자." 브라우닝이 뒤샹을 만났더라면 아마 이런 표현도 덧붙였을지 모른다. "수줍은 관심 추구자, 무심한 광신자, 사랑에 상처 입은 카사노바."


뒤샹은 예술의 위험한 경계, 즉 '미적인 것'이라는 허구가 사라지고 예술의 목적이 모호해지는 불확실성의 영역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1957년 휴스턴에서 행한 짧은 연설 「창조적 행위The Creative Act」에서 "창조적 행위는 예술가 혼자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관람자의 해석 또한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고 주장했다. 예술과 삶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관람자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뒤샹은 예술이 특별한 지위를 지닌다는 기존의 관념을 해체했다. 이제 갑자기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었고, 누구나 예술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작품을 바라보는 행위만으로도 관람자는 예술을 만들어내는 데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술을 둘러싼 고귀하고 귀중한 것이라는 아우라를 벗겨낸 것은 엄청난 해방감을 가져왔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의 난제를 낳았다. 예술이 삶과 구별되지 않는다면—예술이라는 것이 결국 자의적으로 붙여진 명칭에 불과하다면—왜 굳이 예술을 별도의 범주로 유지해야 하는가? 자전거 바퀴나 눈삽도 예술이 될 수 있다면, 그런 물건들을 굳이 갤러리에 전시하는 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들을 감상하고 싶다면 자전거 수리점이나 지하실에서 바라보면 되지 않는가? 애초에 왜 '예술'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해야 하는가?


뒤샹의 습관적인 회의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근본적인 원칙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유익한 효과를 가져왔다. 그에게 현대적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다윈, 프로이트, 니체,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 이후의 세계를 살아간다는 것—은 물려받은 환상들을 떨쳐내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신의 존재, 무신론, 결정론, 자유의지, 사회, 죽음 등등에 관한 이 모든 허튼소리는 '언어'라고 불리는 체스 게임의 말들에 불과하다." 뒤샹의 생각에 '예술' 역시 그저 또 하나의 단어일 뿐이었으며, 그 게임을 이루는 하나의 말에 지나지 않았다.

공동체가 공유해온 여러 '허구'들을 가차 없이 불태우는 데 몰두하는 한편, 뒤샹은 점점 더 다른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들에 빠져들었다. 그가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예술이 아닌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면, 동시에 성과 사랑의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끝없이 고민했다. 감상주의를 꺼렸던 그는 낭만적 사랑을 그다지 믿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것을 지적으로 회의한다고 해서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뒤샹이 여전히 예술가로 남아 있었듯이, 그는 또한 사랑에 빠지기 쉬운 한 남자이기도 했다. 그는 생애 말년에 익살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모순, 바로 그것이 핵심이다."





세바스찬 스미(Sebastian Smee)는 퓰리처상 수상자로, 워싱턴포스트 미술평론 담당자를 거쳐 현재는 애틀랜틱 매거진의 전속 칼럼니스트다.


역자 이희정은 영국 맨체스터대 미술사학 박사로 현재 서울대와 국민대 출강중이다. 역서로 『중국 근현대미술: 1842년 이후부터 오늘날까지』(미진사, 2023)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