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성가한 억만장자들의 시대

오늘날 억만장자는 과거보다 자수성가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픽=PADO(생성AI 사용)

부유층, 그 중에서도 '슈퍼리치'들은 세계 어디서나 인기 있는 과세 타깃입니다. 여기에는 슈퍼리치들이 상속이나 독점, 정치적 영향력 등, 그다지 공정하지 않은 방식으로 부를 쌓아올렸다는 통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코노미스트의 7월 23일 기사는 이러한 통념이 흔들리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습니다. 과거의 억만장자들과는 달리 최근에는 '자수성가'형 억만장자가 더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의 부유세 관련 논의는 주로 부동산 자산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한국에서도 자수성가형 부호가 증가하고 있는만큼, 그저 징벌적인 세금이 아닌 보다 공정한 부를 쌓을 수 있게 토대를 조성하기 위한 정책을 사회적으로 고민해 봐야 할 시점입니다.

억만장자가 대중의 인기를 끈 적은 원래도 없었지만 오늘날 이들은 노골적인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 의회 정치인들은 어느 때보다 자주 억만장자를 입에 올린다. 대개 그들이 부정하게 축적한 재산이나 정치에 미치는 해로운 영향력을 규탄하고, 이들의 부에 세금을 매겨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다. 스탠퍼드대의 앤드루 홀Andrew Hall에 따르면 민주당의 모금 이메일에서 억만장자가 언급되는 빈도는 2024년의 세 배이며 거의 언제나 부정적인 맥락이다. "모든 억만장자는 정책 실패의 산물이다"라는 말은 좌파 진영의 흔한 구호다. 이들은 10억 달러(1조4000억원) 이상 자산가를 불공정하게 왜곡된 경제와 사회적 쇠퇴에 연결 짓는다.


그러나 정치인들이 표심을 얻을 구호를 찾아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때,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억만장자가 타고난 혈통이나 제도적 허점의 악용이 아니라 유용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수천 명을 고용함으로써 부를 축적하고 있는 것이다. 억만장자는 여전히 정책 실패의 산물일지 모르지만 과거보다는 그 정도가 약해졌다.


물론 미심쩍은 억만장자도 많다. 역사상 처음 순자산이 10억 달러(20세기 초 물가 기준)를 넘은 인물로 추정되는 존 D 록펠러는 천재였다. 그러나 록펠러의 회사 스탠더드오일은 허술한 경쟁법을 악용했고, 자사에 유리한 판을 짜려고 뇌물도 상당히 많이 뿌렸을 가능성이 크다. 1990년대 러시아에서 등장한 올리가르히들은 폭력적인 혼란기에 국유자산을 차지했다. 수상쩍은 부는 풍자가에게 더없이 좋은 소재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의 몽고메리 번스는 비용을 줄이려고 자신이 소유한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에 돈을 아낀다.


억만장자를 향한 반감이 급증한 데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몇 년간 이어진 고물가로 생활 수준이 타격을 입자 사람들은 비난할 대상을 찾고 있다. 억만장자들이 시장 지배력을 휘두르고 정치적 영향력을 사들여 주거에서 식료품까지 모든 것에 바가지를 씌운 뒤 그 이익에는 낮은 세금만 낸다는 것이 이런 생각의 골자다. 그리하여 '생활비 위기'와 막강한 억만장자는 동전의 양면이 된다. 그리고 주로 좌파를 비롯한 정치 전략가들은 억만장자가 완벽한 공격 대상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억만장자의 재산에 세금을 매겨도 유권자가 실제로 만나본 사람 중 영향을 받을 이는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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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의심스러운 독점이나 정치적 특혜를 누린 흔적 하나 없이 부를 일군 억만장자도 많다. 현재 34억 달러(4조9000억원)의 자산을 보유한 오프라 윈프리는 수백만 명이 그의 방송을 보고 듣고 싶어 하기 때문에 부자가 됐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수억 달러에 달하는 자산은 놀라운 골을 터뜨린 데서 비롯되었다. 덜 알려졌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상적인 인물들도 있다. 판다익스프레스Panda Express 공동창업자 페기 청Peggy Cherng은 수백만 명에게 저렴한 식사를 제공하는 외식 체인을 일궈 약 65억 달러(9조3000억원)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수백억 달러(수십조 원)의 자산을 가진 야나이 다다시柳井正는 유니클로의 모회사 패스트리테일링을 키웠다. 그토록 훌륭한 티셔츠를 만들어내는 이에게 진정 반감을 품을 수 있겠는가?


이코노미스트는 바람직한 부(윈프리, 야나이)와 그렇지 않은 부(번스)로 억만장자의 부를 수치화해 분석했다. 경제전문지 포브스Forbes, 연구기관 후룬Hurun, 스웨덴 재단 갭마인더Gapminder의 자료를 토대로 지난 25년간 억만장자 약 7000명의 명단을 작성했다. 억만장자의 재산이 주로 도박·건설·방위·원자재 같은 산업에서 나왔을 때 이를 '비경쟁적' 부로 분류했다. 이들 부문은 정치권과의 연결에 기대는 경우가 많다. 가령 정부에 연줄이 없으면 광산이나 카지노를 열기 어렵다.


상속자도 '비경쟁적' 범주에 포함했다. 상속자는 대개 올리가르히가 아니다. 이들은 대체로 법을 왜곡하거나 어기지 않았고 고객을 등쳐먹지도 않았다. 그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거나 결혼을 잘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막대한 부를 누릴 자격이 없다는 점에서 이들 역시 정책 실패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자료가 시작되는 2001년부터 2014년까지 억만장자 재산에서 비경쟁적 부가 차지하는 비중은 소폭 상승했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경쟁적 분야의 자수성가형 기업가들에게서 비롯된 부의 비중은 사상 최고치로 치솟았다. 사상 처음으로 전 세계 억만장자 부의 절반이 상당히 정당한 방식으로 벌어들인 자산이 된 것이다. 그리고 2021년 이후 비경쟁적 분야에서 비롯된 총자산은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전형적인 올리가르히들은 최근 몇 년간 부진을 면치 못했다. 옛 소련권 억만장자의 재산 총액은 2008년 약 5000억 달러(715조원)로 정점을 찍었다. 엄청난 규모의 "정책 실패"였다. 현재 이들의 재산은 약 4000억 달러(572조원)다. 여전히 큰돈이지만 크게 줄었다. 전쟁은 우크라이나 최고 부호 리나트 아흐메토프Rinat Akhmetov에게 부를 안겨준 산업 기반을 초토화했다. 잉글랜드 첼시 축구클럽의 전 구단주인 러시아인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재산은 2021년보다 약 50억 달러(7조 원)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측근으로 여겨지는 인사들에 대한 서방의 제재가 타격을 줬기 때문이다.


정경유착 성격이 짙은 여러 산업들이 고전을 겪었다. 부동산 억만장자의 재산은 2018년 이후 3분의1 감소했다. 금리 상승과 중국 부동산 시장 붕괴, 코로나19 대유행 기간의 사무실 수요 급감이 타격을 줬다. 중국 부동산 개발업체 다롄완다그룹 창업자 왕젠린의 현재 자산은 44억 달러(6조3000억원)다. 2017년 310억 달러(44조원)에서 감소했다. 마카오의 도박 단속 여파로 일부 카지노 재벌도 손실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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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은 여전히 막대한 부를 얻는 주요 수단이다. 미국 최대 유통업체 월마트를 공동창업하고 1992년 사망한 샘 월턴의 일가는 약 5000억 달러(715조원)의 재산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1865년 자신의 이름을 딴 식품회사 카길Cargill을 세운 윌리엄 월리스 카길의 후손들도 여전히 부호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대대로 물려받은 부의 상대적 위상은 빠르게 약해지고 있다. 2000년대 초에는 억만장자 재산의 절반 가까이가 상속에서 나왔다. 이 비중은 이후 약 4분의1로 떨어졌다.


자수성가형 재산의 급증이 인공지능(AI) 열풍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로 엔비디아의 젠슨 황을 비롯한 일부 창업자의 재산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올여름 일론 머스크는 잠시 세계 최초의 조만장자가 됐다가 스페이스X 주가가 하락하면서 자산이 다시 1조 달러(1400조원)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나 테크 부문을 제외해도 자수성가형 억만장자의 비중은 상승하고 있다.


금융, 식품, 제조업 등 다른 산업에서도 수많은 이들이 대성공을 거두고 있기 때문이다.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를 세계적인 명품 제국으로 키운 베르나르 아르노의 재산은 지난 10년간 약 1000억 달러(140조원) 늘었다. 불과 15년 전 중국 배터리 제조업체 CATL을 창업한 쩡위췬의 자산은 600억 달러(86조원)다. 러시아 최초의 여성 자수성가형 억만장자 타티야나 킴은 2004년 러시아 최대 온라인 유통업체 와일드베리스를 창업했다. (최근 며칠 사이 우크라이나는 와일드베리스가 러시아군에 물자를 공급한다고 주장하며 이 회사의 일부 창고를 공격했다.)


자수성가형 부의 증가는 세 가지 흐름이 맞물린 결과다. 첫째는 10년 넘게 이어진 강세장이다. 이 기간 세계 주식시장의 연평균 수익률은 13퍼센트를 넘었다. 처음에는 저금리가 투자자들을 위험자산으로 몰아넣었고 금리가 오른 뒤에도 테크 낙관론은 지속됐다. 이는 재산 대부분이 주식에 묶여 있는 창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됐고 일부 헤지펀드 운용자도 부자로 만들었다.


둘째는 중국의 경제성장이다. 언뜻 보면 이는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단순히 부동산 침체로 일부 억만장자들이 왕좌에서 물러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 10년간 중국 경제의 성장 속도는 2000년대보다 느렸다. 그런데도 중국의 억만장자는 약 200명에서 약 800명으로 늘었다. 위트레흐트대학교의 쿤 튈링스Coen Teulings와 레이던대학교의 시몬 투생Simon Toussaint이 발표한 논문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억만장자의 탄생은 선형적(비례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득수준이 낮을 때는 경제가 빠르게 성장해도 대부분의 재산이 10억 달러 기준선에 훨씬 못 미칠 수 있다. 그러나 한 나라가 부유해지고 나면 훨씬 많은 사람이 이 문턱 바로 아래에 자리한다. 따라서 이후 둔화된 중국의 성장도 억만장자에 가까웠던 많은 사람을 이 문턱 너머로 밀어 올리기에는 충분했을 수 있다.


셋째 요인은 모바일 퍼스트 인터넷의 등장이다. 모바일 인터넷은 자수성가 비중이 상승하기 시작한 2010년대 중반에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모바일은 결제와 메시징을 일상화시켰으며, 기업들이 하루에도 수백 번씩 소비자에게 즉각적으로 다가갈 수 있게 만들었다. 덕분에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기업들이 놀라운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숏폼 동영상의 바이트댄스, 스트리밍의 스포티파이, 결제의 스트라이프Stripe부터 배달·차량호출 앱까지 다양하다. 그 어느 때보다 쉽고 빠르게 거부가 될 수 있는 시대다.


자수성가형 억만장자의 부상은 부유세의 논거를 강화할까, 약화할까? 일부 주장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극소수의 사람이 영향력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부자가 됐든 마찬가지다. 머스크는 자수성가했고 그 자체는 좋은 일이다. 그러나 미국 안팎의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한 영향력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더 잘 작동할 것이다.


그러나 억만장자들에게 과도한 정치적 권력이 집중되는 것이 문제라면, 해결책은 세제를 개편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기부금 관련 규정을 손질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수성가형 억만장자의 부상은 부유세를 지지하는 다른 논거를 크게 약화하기 때문이다. 많은 운동가가 여전히 주장하듯 억만장자의 재산은 "실제로 번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기가 이제는 더 어려워졌다. 아브라모비치에게 최고 수준의 세금을 매기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리오넬 메시에게도 그래야 할까? 오늘날 억만장자 가운데 고용 증가와 생산성 향상을 촉진하는 이들의 비중이 커졌기 때문에 이들을 잃을 때 치르는 경제적 비용도 높아진다. 억만장자들이 세금을 피하려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거나 일을 덜 하기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억만장자의 인기는 더 떨어졌을지 모르지만, 제시된 해법의 설득력은 어느 때보다 약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