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시: 래리 레비스의 『회오리와 소용돌이』

래리 레비스의『회오리와 소용돌이』표지. /사진제공=Graywolf Press

『회오리와 소용돌이』(2026)는 래리 레비스(Larry Levis)의 시를 한데 모은 시집으로, 생전에 출간된 다섯 권의 시집뿐 아니라 사후에 출간된 마지막 두 권의 시집까지 아우른다. 레비스가 이 세상에 머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시집의 방대한 규모는 더욱 인상적이다. 레비스는 50번째 생일을 불과 얼마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편집자 데이비드 세인트 존(David St. John)은—보조 편집자 제임스 시아노(James Ciano)와 L. A. 존슨(L. A. Johnson)의 도움을 받아서—레비스의 시적 유산을 좀 더 거칠고 낯선 에너지가 살아 있는 방향으로 되돌려놓는다. 특히 시들이 추구하는 사유의 급격한 방향 전환과 스스로에게 마음껏 허용하듯 이어지는 일탈을 전면에 부각한다. 이곳에서 살아 넘치는 것은 흠 없이 완결되거나 어떤 반박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풍성하고 강렬하며, 오늘날 우리가 시에 기대하는 여러 가지 취향을 충족시키는 동시에 또 그만큼이나 많은 취향에 맞서기도 한다.


나는 늘 레비스를 첫 행부터 강렬한 시를 쓰는 시인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의 첫 행들은 경구와도 같은 문장을 던져놓으며 곧장 문제의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마치 절대적인 진리를 담은, 아주 근사한 포천 쿠키처럼 말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나는 결국에는 모두 빛이라고 생각한다. 공기라고 생각한다. (「누비이불」)

어쩌면 말의 발목은 성스러운지도 모른다. (「두 세계가 있다」)

이런 날에는 좋은 기억을 갖는 것보다 / 가벼운 재킷을 입는 편이 낫다 (「편지」)

마찬가지로 레비스 시의 극적인 결말은 불길 속에서 끝나거나, 문자 그대로 담장을 향해 힘껏 방망이를 휘두르면서 끝을 맺는다. 대표작인 「새로운 불의 양식으로 쓴 나의 이야기」("My Story in a Late Style of Fire")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불타는 집의 이미지에서 시야를 바깥으로 넓혀, 마침내 한 국가 전체를 집어삼키는 은유로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교묘하지만 분명하게 감지되는 각운이 단단히 지탱해 주는 역할을 하며, 이는 레비스가 자주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각운은 이미 주어진 형식에 맞춰 시를 써 내려간다기보다, 시인이 쓰는 과정에서 형식을 발견해 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불이란 참으로 미국적이다. 우리와 너무도 닮았다. / 그 황폐함, 그리고 결국 찾아오는, 짧은 승리."


『회오리와 소용돌이』에는 이런 에너지를 이어가는 새로운 발견들이 담겨 있다. 새 판본의 편집자들이 자료 보관소에서 발굴해 낸 놀라운 시 「윌리 메이스에게 바치는 헌사」("Homage to Willie Mays")의 마지막 행들은 캔들스틱 파크1에서 경기를 펼치던 전설적인 캘리포니아 출신 올스타이자 "부드러운 품위를 지닌 스윙을 하는 선수"를 바라본다. 메이스의 홈런 덕분에 레비스는 애가를 쓰는 데 머물지 않고,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초월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 순간에 걸맞은 유일한 몸짓, 아름다운 틀을 지닌 아포리아에 자신을 내맡긴다. "그 완벽한 공기를 뚫고 부드러운 빛이 내렸고 / 영어에는 그것을 표현할 말이 없었다." 그 경외의 순간을 지나고 나면, 시인이 이 표현을 통해 혹시 다른 언어에는 실제로 그것을 표현할 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유럽 시를 폭넓게 읽었던 레비스에게 번역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으며, 번역의 정신은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타자성에 대한 관심을 추동하는 힘이 된다. 그의 시들은 한 존재의 언어를 다른 존재의 언어로 옮기는 필연적인 행위를 하나의 영적인 실천으로 전환하며, 나아가 인간들, 동물들, 또 자아의 서로 다른 부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는 은유로 바꾸어 놓는다.


생전에 여러 문학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레비스는 한 번도 시 선집에서 각광을 받는 시인이 되지는 못했다. 포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레비스는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나 역시 그곳에서 성장했지만, 2008년 버몬트에서 열린 한 작가 회의에 참석하기 전까지는 그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의 시들은 인용하고 싶을 만큼 인상적인 첫 행과 마지막 행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설명하거나 일부를 발췌하기는 어렵다—그 시들 안에서 일어나는 시적 움직임 자체가 하나의 예로 잡아내어 보여주기조차 어려운 듯하다. 그의 시들은 뉴욕에서 캘리포니아로, 한 가족에서 다른 가족으로, 친밀한 관계의 다정함에서 과시적인 현란함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레비스의 시에서 이미지들은 독자의 시선을 한곳에 집중시키지 않는다—오히려 그것들은 이리저리 우회하게 하고, 다른 곳으로 나아가도록 허용한다. 「새로운 불의 양식으로 쓴 나의 이야기」에서처럼, 이미지들은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떠돈다.


가끔 그 시절을 떠올리며,
나는 이 동네의 거리를 따라 늘어선 느릅나무와 
단풍나무 한 줄을 따뜻하고 건조한 바람이 뒤흔드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나무들이 모두 한꺼번에 움직이고, 나 역시 떨면서 조화를 맞춰,
그들과 똑같다고 느낄 때까지. 이제 이런 일들이 아무 의미도 없지만,
그해 내내 나는 한 번도 외롭다고 느끼지 않았고, 내게 슬픔이 있었다면
웃음도 있었으니, 천사와 아이들이 앓는 병과도 같아서,
놓아두면 집 한 채를 통째로 불태워버릴 수도 있다.


여기서 늘어놓는 딴소리들은 나름의 구조를 지닌다. 마치 길을 가던 순례자가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겨 잠시 길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오듯, 결국 제목에 있는 "불" 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회오리와 소용돌이』에는 앰퍼샌드(&) 앞이나 뒤에 쉼표를 붙어서 시가 이어지는 경우가 몇 차례 등장한다—엄밀히 말하면 문법적으로 잘못된 표기이지만, 이는 이상하리만큼 적절하다. 정신이 언어에서 빠져나와, 의미나 이성이 다시 독자의 시야에 들어오기 전에 어떤 순수한 형태의 흐릿한 연결 상태로 스며드는 순간을 보여주는 표지와도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이 시의 중심적인 주제나 명제는 답이 아니라 질문으로 남는다.


이 시들은 레비스의 네 번째 시집이자 아마도 그의 가장 널리 알려진 시집인 『겨울 별들』(Winter Stars)에 수록되어 있다. 『겨울 별들』은 청소년기에 관한 시로 시작하지만, 집단학살을 다룬 두 편의 시로 끝난다. 이 시집은 처음의 주제에서 방향을 틀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캘리포니아에서 오클라호마와 로마로, 재즈와 일본 영화로, 로마니족2과 중부 유럽으로 우회해 나아간다. 이렇게 특징적인 방향 전환은 수사적 표현보다 이미지가 시를 시작해야 한다는 본능에서 비롯된다. 『회오리와 소용돌이』 전체에서, 많은 일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지만, 예술가라는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 한 예술가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러한 시적 움직임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 거리낌 없이—오직 연상에 의해서만 설명될 뿐이다.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레비스가 (수많은 연애와 외로운 산책을 등장시키면서도) 단순히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낱낱이 기록하는 것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집단적인 인식, 말하자면 자신과 타인 사이의 연관성을 바탕으로 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정치적 이해를 지향한다. 그의 1997년 시 「그 안에 파도의 거대한 펼쳐짐을 품은 애가」("Elegy with the Sprawl of a Wave Inside It")의 한 부분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내가 태어난 곳에서 1마일 떨어진 곳에 노동수용소가 하나 있어서.
천 가구의 이주 노동자 가족이 살고 있었다.

닭을 기르던 축사에는, 남겨진 깃털과 배설물의 
회반죽이 아직도 있었고,

암모니아 냄새가 먼지 속으로 피어올라 빛과 공기 속으로
퍼져 나갔다.

그 냄새 때문에 숨을 들이쉬기가 힘들었다.

온 가족이 닭장 철망에 손가락을 걸고 바깥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이미지는 무슨 의미인가요? 리치먼드의 커먼웰스 클럽에서 
한번은 누군가 내게 물었다, 우리 위로 리 장군의 초상화가 

우뚝 걸려 있고, 버번과 얼음이 은쟁반에 담겨 나오는 그곳에서—

"그건 대체 무엇이었죠?" 그때가 1955년이었다.

철창 속에 갇힌 전 가족들.
"수치스러운 일이었죠." 나는 대답했다.


이 시는 미국 전역에 걸친 역사와 경험을 서로 연결하고, 지역과 수십 년의 시간적 경계를 흐릿하게 만듦으로써 미국의 치욕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레비스는 자신이 버지니아에서 낭독하는 시 속에 캘리포니아의 한 모습을 담아낸다. 그가 그려내는 미국은 랜드마크보다는 광고판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수도보다는 묘지에 더 주목한다. 지리적으로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도 주제는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동시대의 공포를 알고, 말하고, 심지어 기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현재는 자신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이 경우에, 증언한다는 것은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붙잡아서 간직해야만 하며, 단순히 복사할 수는 없다. 시적 이미지는 우리에게 그것을 간직하고 다시 마음속으로 불러들여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과제를 남긴다.


레비스는 다른 사람들이라면 감히 시도하지 않을 방식으로 장소와 장소 사이를, 그리고 생각과 생각 사이를 오간다. 나는 그가 이런 움직임에 의존하는 것이 묘사 이외에 다른 무엇을 통해 얻어지는지 잘 모르겠다. 그는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오직 인류와의 연대, 그리고 시를 쓰기로 결심했다면, 누구든 서술되지 않은 삶에 대한 호기심을 지니고 주변부에 존재하는 것을 하나의 소명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내세울 뿐이다. 인간적 가치를 주장하기 위해 우회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나 사회 체계에 대한 어떤 합리적 비판보다 시가 지닌 직관적 힘에 충성을 맹세하는 일이다. 『겨울 별들』 바로 전에 출간된 시집 『인형 만드는 자의 환영』(The Dollmaker's Ghost)에 수록된 「버려진 포도밭에서 포도를 따며」("Picking Grapes in an Abandoned Vineyard")의 다음 구절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십오 년 전,
나는 멕시코에서 올라온 열두 가족과 함께
이 줄지어 선 포도나무 사이에서 일했다.
아무도 영어를 못했고, 영어를 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중 한 여자는 양철판 한 장과
연한 푸른빛 메추리알 다섯 개로 오믈렛을 만들었는데,
그녀의 목소리에는 땅거미와 감방과
새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그녀는
스페인어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다들 그랬듯이. […]
오늘, 그들을 기리며,
나는 이 칼날의 평평한 부분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한 손으로 붉은 말라가 포도 한 송이를
받쳐든다.
그들이 내게 가르쳐 준 방식대로, 그리고 자른다—


이 주인집 아들이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시인에게 계급의 경계를 넘어설 무슨 권리가 있는가? 그것은 단지 그가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라는 역할을 위해 요구되는 내면의 삶은 이러하다: 그는 부모의 집을 떠나 들판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그 인간적인 우회, 가던 길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향하는 일이 그에게 자격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가 그들을 대신해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우리가 시인에게서 기대하는 자질, 이를테면 무언가에 붙들려 다른 길로 갈 수 있는 능력이나, 시간 낭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태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들을 처음부터 도덕적인 자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자질들은 결국 윤리적인 길이 된다. 그가 글을 쓰는 자리인 주변부가 시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나는 특히 레비스가 시를 "노동"이나 "기술"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하는 순간들에 깊이 마음이 움직인다. 그 순간들에 그는 예술을 사회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마치 자신만의 독립성과 상상력이 펼쳐지는 영토로 내려서는 듯하다. 이런 순간들은 『회오리와 소용돌이』의 후기 애가들에서 나타나지만, 그보다 앞선 연작시와 장편시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레비스가 생전에 출간한 마지막 시집인 『점점 넓어지는 잎사귀의 마법』(The Widening Spell of the Leaves)의 표제시에는 이웃이 찍어 준 어느 가족의 사진을 묘사하는 빛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 이웃은 전문 사진가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전시 강제수용소인 맨재너3(Manzanar)에 수감될 운명에 처해 있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는 멀리, 눈 속에서
카메라도 없이 이 세월을 보내야 할 거라고,
하지만 히라타 씨는 일하지 않았다. 그는 놀았다.
거기서 그의 장난감들이 빛나고 있었다. 그것만큼은 분명했다 내게는…
그날 나는 결코 일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마치 개종을 한 것 같았다. 놀이는 성스러웠다.


레비스가 예술을 놀이로 이해하는 까닭은, 예술이 노동과 무관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상상하는 시가 삶을 움직이게 하고 활성화시켜서 더욱 낯설고, 쉽게 번역할 수 없으며,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는 어떤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는 경제라는 체제가 히라타 씨의 재능도, 자신의 재능도 진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시는 기억에 남는 행이나 독특한 시적 양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살아남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기억하는 법을, 심지어 다시 생각하는 법까지 가르쳐 주기 때문에 살아남기도 한다. 나는 미국 시의 익살꾼들 중 한 사람인 래리 레비스를 정전화된(canonized) 시인이라기보다 전설적인 시인으로 생각한다. 그는 시 선집이라는 안전한 장소에 묻혀 있기보다는, 그를 사랑하는 독자들의 노래와 이야기를 통해 살아 있다. 나는 레비스에 대한 이러한 인식 역시 그의 시들과 함께 다음 세대에 전해져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시 한 편 한 편을 통해, 오직 '인간적인 차원'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우리의 존경을 얻어냈다는 그 느낌 말이다.


시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레비스가 언제나 우리가 거기에 오기만을 미리 기다리고 있는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방대해 보이는 그의 시들은 종종 "최종적인"이라는 말(시인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 어울릴 법한 문장들로 끝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해야 할 일을 남겨 놓는다. 「고삐를 손에 쥔 애가」("Elegy with a Bridle in Its Hand")의 마지막 부분은 한 생명을 구하는 장면이자,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작고 극적인 순간이다.


그리고 만약, 수천 개의 빈 좌석이 있는 그 웅장한 관중석 같은 세상을 향해, 
몰락한 왕의 목소리가 땅거미 속에서 들려와 속삭인다면,

수없이 많은 너희들 가운데 누가 이 순간을 원하는가?

상실과 연약함과 육체가 사라지는 것밖에는 무엇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
그는 빠르게 짙어지는 어둠을 올려다보며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 내가 원한다. 그것은 내 것이다.


레비스는 시인이 집단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났다가 다시 그 집단으로 돌아와야 하며, 그처럼 한 걸음 물러나는 행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제멋대로이고 알아볼 수 없는 행동들이 모두 중요하다고 믿었다. 이 시집을 읽는 동안 이상하게도 그의 개인적인 삶은 내게 별로 중요한 문제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그는 이미 이름 없는 음유시인이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주의력과 인간성의 쇠퇴에 대해 우리가 말하거나 믿는 모든 것, 그리고 현재의 조건 속에서 그것들이 얼마나 훼손된 것처럼 느껴지는가 하는 문제다. 우리 문화가 요구하는 미적 기대에 대처하는 한 가지 방법은 짧고 쉽게 읽히는 시를 쓰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도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지 않을까? 외로움을 견딜 수만 있다면, 우리가 처한 곳에 맞서도록 예술이 제공하는 어떤 보상이 있지 않을까? 현재의 순간에 대처하는 또 다른 방법은, 현재에게 지옥에나 가라고 말한 다음, 시가 우리를 어디로 이끌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