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과 마주 보는 순간: 시인이 신화에서 되묻는 인간의 인식

더글러스 키어니의 시집 'I Imagine I Been Science Fiction Always'(2025) 표지. /사진제공=Wave Books

최근에 개봉되어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영화 <오딧세이>는 수천 년 전 그리스 시대의 서사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 있게 재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영미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된 현대 한국 사회는 큰 틀에서 보아 기독교 문명이라는 서구 역사의 흐름에 주로 노출되어 왔지만, 그리스·로마 신화로 대표되는 또 하나의 문화적 전통은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새롭게 접근하게 해 준다.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 담긴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그 이야기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던지고 있는 질문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문제로 모아진다고 할 수 있다.


2026년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오른 더글러스 키어니(Douglas Kearney)의 시 <미노타우로스>는 황소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통해 인간과 짐승의 경계가 어떻게 설정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다소 난해하게 느껴지는 시어들 때문에 시를 단번에 읽고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지만, 그 어려움을 견디며 황소처럼 보이는 미노타우로스의 모습에 겹쳐진 인간의 얼굴을 상상하다 보면 우리가 평소에 당연히 여기던 전제가 마구 흔들리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과연 동물과 인간 사이에는 명확한 구분이 존재하는 것일까? 특히, 우리는 동물과 확실하게 구별되는 어떤 인간다움을 품고 있는 것일까? 시인은 신화 속으로 독자를 불러들여 이런 어려운 문제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도록 요청한다.


더글러스 키어니 - 미노타우로스 (번역: 조희정)

최고인 대목은,

우리가 그 짐승을

그 자신으로부터

갈라놓으려 하는 방식이다.


황소를 보라

(그것이 가진 머리를.

이제 상상해 보라—

내장과, 소의 목구멍,

알팔파 목초지와

클로버, 온갖 풀들을 위해

마련된 혈관의 길,

곧 되새김질될 것들; 아니면


짓밟혀 버린 정원,

'천사의 숨결'과 금잔화,

데이지, 장미, 우적우적 삼켜지고

그래도, 또한, 자라나서, 오직,

가지치기 되어 인간에게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말해 주기 위한 듯이—


그리고 거기에: 덩굴손 하나가

당신의 두개골에서 감겨 나온다,

그러자 꽃잎들이 관자놀이를

갈라서, 피어나기 시작한다. 보라,

이제 황소의 얼굴이,

충격을 받은 듯, 눈을 깜빡인다),

길을 찾아서,

새롭고 당혹스러운 욕망들

사이로 휘청거린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반인반수의 형체를 가진 괴물 미노타우로스는 영웅 테세우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존재로 기억된다. 위대한 주인공의 앞길을 가로막다가 결국 살해되어 이야기 속에서 사라지는 미노타우로스의 구체적인 모습에 크게 관심을 가지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 그저 '괴물'이랴는 딱지가 붙은 채로 한 영웅의 무용담 속에서 보조적 역할을 하던 이 혼종적 존재가 이 시에서는 아주 생생한 이미지를 띠고 그려진다. '괴물'의 모습을 되살려 보여 주는 시인의 시도는 첫 연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짐승"과 그 "자신" 사이의 구분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의문과 맞물려 있다. 짐승과 인간이 뒤섞여 '괴물'을 구성하는 것이라면, 미노타우로스의 정체성에서 "짐승"의 요소가 어떻게 구별되고 경계를 형성하는지는 결국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과 닿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소"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는 두 번째 연에서부터 이런 경계를 확정하려는 노력은 벽에 부딪히기 시작한다. "내장"과 "목구멍", "혈관"을 가진 미노타우로스는 "짐승"이면서 동시에 "인간"이기도 하다. 신체를 이루는 각각의 부분들이 나열될 때, 그 중에서 어디까지가 동물에 속하는 것이고 어디까지가 인간에 속하는 것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여러 가지 풀들의 이름이 등장하면서 이 식물들이 먹거리가 된다는 대목에 이르면, 이제 미노타우로스는 영웅이 대적하는 끔찍한 '괴물'의 모습을 벗어나 자연 속에서 먹고 성장하며 삶을 영위하는 한 존재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마치 인간이 그러하듯이, 미노타우로스 또한 생존을 향한 자연스러운 욕망을 품고 또 실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다음 대목에서 시인은 미노타우로스의 먹이가 된 것이 목초만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꽃들까지 포함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천사의 숨결"이라는 이름의 꽃과 "금잔화", "데이지" 그리고 "장미" 등 보통 인간들이 미적 대상으로 삼는 식물들이 황소의 속성을 가진 '괴물'에게는 다른 풀들과 별다르지 않게 식욕을 채워 주는 자연물로 여겨질 뿐이다. "우적우적 삼켜진" 꽃들과 "짓밟혀 버린 정원"을 상상하면 자연의 아름다움이 무참히 훼손된 듯해서 무언가 편치 않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풀과 꽃을 구분하고 나아가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으면 안 되는 것 사이에 장벽을 세우는 것 자체가 지극히 인간적인 기준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어쩌면, 미노타우로스가 꽃을 먹었다는 사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은 우리가 자연물들 사이에 아름다움과 추함, 보존해야 할 것과 없애도 되는 것이라는 위계를 이미 만들어 놓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황소의 속성을 지닌 '괴물'에게 꽃은 그저 살아가기 위해 먹는 자연물일 뿐이며, 인간이 부여한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시인은 "가지치기"라는 말로 인간다움이라는 개념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곧바로 되돌려 준다. 반인반수의 '괴물'이 꽃들을 사정없이 먹어 치운다면, 인간은 식물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라도록 가지를 잘라 내고 다듬는다. 이 "가지치기"는 한편으로 더 나은 미래의 성장을 위해 지금 눈앞에 있는 꽃들의 일부를 잘라 내는 행위이지만, 이 시에서는 동시에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잘라 낼 것인지 판단하는 인간의 태도를 떠올리게 한다. 인간은 자연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각각을 구분하고 이름 붙이며 특정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해 왔다. 또한, 이런 과정은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뿐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동물인지,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추한지를 나누면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을 '인간'이라고 규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렇게 확실한 경계를 지닌다고 믿어 왔던 '인간'의 몸에 뜻밖의 방식으로 자연을 다시 불러들인다. "당신의 두개골"에서 "덩굴손"이 감겨 나오고 "관자놀이"에서 "꽃잎들"이 피어나오는 모습은 인간이 아름답다고 인식하는 꽃들이 인간과 결합되어 있는 형태를 나타낸다. 인간이 미적 대상으로 여기는 식물이 인간의 몸과 합쳐진 이 형상은 언뜻 보아 생태적인 의미를 지닌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이 시에서 너무나 흥미로운 장면은 바로 그 다음에 펼쳐진다. 꽃과 인간이 결합된 이 모습 앞에서 '괴물'인 미노타우로스가 "충격을 받은 듯, 눈을 깜빡이는" 것이다. 황소와 인간 사이의 혼종적인 존재가 인간에게 "괴물"로 인식된다면, 인간의 몸에서 꽃이 피어나는 이 형상은 정반대로 '괴물'에게 낯설고 이상하게 여겨진다. 인간과 '괴물'이 이렇게 서로를 마주 보는 순간,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존재들 사이에 우열을 두는 인간적인 관점은 갑자기 힘을 잃게 된다. '괴물'을 괴물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과연 누구의 기준인가? '괴물'의 눈에는 오히려 미적 기준을 뚜렷이 세우고 그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이 더 기괴하게 보이는 것은 아닐까?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괴물'의 시선을 통해 스스로에 대해 자의식을 느끼게 된 인간은 "길을 찾아서 새롭고 당혹스러운 욕망들 사이로 휘청거린다". 짐승과 인간을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신념,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물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확실한 경계가 있다고 여겼던 관념, 이런 것들은 어느새 모두 힘없이 흔들거리기 시작한다. 이제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무너진 자리에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찾는 일은 한없이 당황스럽고 어지러울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한 번쯤 이렇게 변화된 시선으로 인간 스스로를,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다시 바라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어쩌면, 우리가 쉽사리 '괴물'이라고 규정하는 존재들이야말로 우리의 습관적인 인식 체계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힘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 Minotaur

The best part,

how we make to

part the beast

from its self.


Take the bull

(whose head it's got.

Now, conjure you—

the offal, bovine throat,

a veiny tract meant

for an alfalfa pasture,

clover, sundry grasses

soon to cud; or


a garden got at: trampled

angel's breath, marigold,

daisy, rose, chomped down,

also, though, grown, only,

it seems, to prune to mean

a human being

what humans are—


and there: a tendril

coils from your skull,

then petals split

the temple, come

to bloom. See, how

now the bull face,

stricken, blinks),

finding a way,

reeling, through new

bewildering appetites.




조희정은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하버마스의 근대성 이론과 낭만주의 이후 현대까지의 대화시 전통을 연결한 논문으로 미시건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간과 자연의 소통, 공동체 내에서의 소통, 독자와의 소통, 텍스트 사이의 소통 등 영미시에서 다양한 형태의 대화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양상에 관심을 가지고 다수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