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바그너 그룹을 이끄는 러시아 군벌과 그의 변호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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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AFP=뉴스1) 정윤미 기자 = 예브게니 프리고진 러시아 민간 용병기업 와그너그룹 수장 2017.7.4 ⓒ AFP=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23.04.22 22:11

Financial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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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은 2차 세계대전 이래 유럽에서 벌어진 최대 규모의 전쟁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1주년입니다. PADO는 정치, 외교, 군사, 경제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 전쟁의 이면을 들춰보는 기사를 소개합니다. 악명높은 러시아의 용병회사 바그너 그룹이 이번 시간의 주인공입니다. 일반적으로 징병(徵兵)은 가족과 이웃을 지키는 방어전쟁에서는 능력을 발휘하지만 침략전쟁에서는 무력해지기 쉬워 강대국은 용병(傭兵)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만큼 용병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만큼이나 길지만 바그너 그룹은 현대에 벌어지는 일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야만성으로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바그너 그룹의 창설자이자 푸틴의 측근인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이미 국제적인 제재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프리고진은 제재를 회피하면서 역으로 바그너 그룹의 악행을 고발하는 언론인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 배경에는 그가 고용한 세계 유수의 변호사들이 있었습니다. 바그너 그룹이 서방의 사법체계를 어떻게 악용해왔는지를 파헤친 파이낸셜타임스(Financial Times) 1월 24일자 기사를 전문(全文) 번역으로 소개합니다.



2020년 4월, 모스크바 외곽의 주코프스키 공항에서 화물기 하나가 수단의 수도 하르툼을 향해 이륙했다. 서류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소재의 RN트레이딩이란 기업이 하르툼에 보내는 진저브레드 쿠키 2만8000킬로그램이 실려 있다고 써있었다.


당시 화물기는 별다른 관심을 끌지 않았다. 사실 문제의 화물(레인지로버 12대의 무게에 맞먹는다)는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보내는 것이었다. 프리고진은 러시아 정부의 지원을 받는 케이터링 사업가이자 전세계의 독재자에게 무력을 제공하는 사설 용병부대의 창시자다.


프리고진은 오랫동안 그 존재 자체를 부인했지만 '바그너 그룹'이라 불리는 이 용병부대는 러시아 정부의 비공식 대외정책 도구로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전쟁을 수행한 바 있다. 최근에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상당한 좌절을 겪으면서 바그너 부대의 중요성이 점차 더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프리고진은 그 대가로 천연자원의 사용 승인을 얻어내곤 했다. 미국 정부에 따르면 그는 시리아, 수단,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일대의 금, 다이아몬드, 원유, 목재 등의 천연자원을 채취하는 다국적 기업을 사실상 운영하고 있다.



이런 활동으로 말미암아 프리고진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제재를 받는 인물로 손꼽히게 됐다. 서방의 각국 정부는 지난 5년간 프리고진의 기업을 폐쇄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정도 압박을 받는 이라면 누구나 좋은 변호사를 필요로 한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유출된 이메일과 문서부터 기업 기록, 수출신고필증, 인터뷰 등의 탐사를 통해 프리고진이 어떻게 세계 유수의 기업법 변호사들을 활용해 서방 정부들의 개입을 막으려 했는지를 밝혀냈다.


프리고진은 모스크바의 유명 로펌을 고용한 후, 일련의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해 아프리카와 시리아에서 수행하는 용병 작전을 유지하는 데 활용했다. 유출된 문서에는 바그너 그룹이 어떻게 사업을 영위하는지에 대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정보가 담겨 있으며, RN트레이딩을 비롯해 프리고진과 연관됐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영업을 계속해 온 페이퍼 컴퍼니의 정체를 밝히고 있다.


프리고진은 한편으로 런던과 워싱턴의 유명 변호사들을 고용해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정교한 거짓 이야기를 꾸미고 자신의 활동에 대해 보도하는 언론인들을 고소했다. 어떤 사례에서는 영국 정부가 변호인단에게 프리고진을 대변해 명예훼손 소송을 걸 수 있도록 특별 허가를 내주기도 했다.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한 이래 서방 정부들은 푸틴과 가까운 인사들에 대대적인 제재를 내렸다. 그러나 프리고진은 서방의 제재 대상 중에서도 특별한 케이스였다.


바그너 그룹의 용병이 등장한 모든 전투 현장에서 즉결처형, 고문, 강간, 언론인 살해 등 각종 인권 침해 의혹이 불거졌다. 지난 1월 20일 미국 백악관은 바그너 그룹을 "초국적 범죄조직"으로 지정하고 추가적인 제재를 내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2년 전 러시아어로 대화하는 용병 무리가 한 시리아 남성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영상이 공개된 일이 있었다. 용병 무리는 큰 해머로 남성을 때린 후 목을 잘랐고, 모종삽으로 팔을 절단한 후 불을 질렀으며 그러는 내내 웃고 있었다. 러시아의 독립 매체 노바야가제타가 바그너 그룹 소속이라고 확인한 이 용병 무리는 잘린 머리를 축구공처럼 찼다.


작년 11월에는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탈영한 병사를 큰 해머로 살해하는 영상이 바그너 그룹과 연관된 텔레그램 채널에 올라왔다. 프리고진은 나중에 이 영상을 두고 "앉은 자리에서 한번에 다 볼 수 있는 훌륭한 영화 작품"이라고 농담을 하는 성명을 냈다.


프리고진의 숨겨진 기업망은 서방 정부가 블라디미르 푸틴의 전쟁 기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의 활동을 억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유출된 문서는 또한 프리고진을 대변한 로펌들의 윤리성에 대한 문제도 제기한다. 몇몇 변호사들은 사법 체계 안에서는 모두가 변호를 받을 권리가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들이 러시아 정부를 대신해 서방의 법정을 비대칭전쟁의 도구로 삼으려 한 조직폭력배를 변호하게 됐다는 비판도 나온다.


"그가 바그너 그룹이라는 테러 조직의 수장이라는 증거는 공개된 것만 해도 넘칠 정도로 충분합니다. 그럼에도 이 변호사들은 프리고진을 대리하고 있죠." 프리고진에게 고소당한 언론인을 변호하고 있는 매튜 주리의 말이다. "윤리적인 변호사라면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은 겁니다."


프리고진은 파이낸셜타임스의 질의에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직원에게 코멘트를 요청하자 프리고진 본인이 텔레그램에서 이렇게 답했다. "내 직원이 이런 똥씹는 소리에 응답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파이낸셜타임스에게 이렇게 답해주고 싶네. 그 똥 좀 그만 뱉고 신선한 공기나 마시게."

프로젝트 셰익스피어

2018년 4월, 예브게니 부를레프라는 사내가 러시아 유수의 로펌 캐피털리걸서비스(CLS)의 파트너 변호사 파벨 카르푸닌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Mail.ru1의 개인 계정으로 발송된 이 이메일은 보안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외부 서버 셋업에 대해 문의하고 있었다. 부를레프의 이메일은 로펌의 IT부서로 전달됐다.


"저희쪽은 모두 준비됐습니다." IT부서 담당자의 회신이다. "서버는 셋업 완료됐어요." CLS(로펌)가 하고 있던 작업에는 '프로젝트 셰익스피어'라는 코드명이 붙었고 직원들은 이 프로젝트에 대해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걸 잘 알았다.


부를레프는 프리고진의 부하 직원이었고 프로젝트 셰익스피어는 매우 구체적인 기능을 했다. 비영리 투명성 운동 집단 디도시크릿2이 공개한 이메일에 따르면 이 프로젝트는 프리고진이 2022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부터 러시아 기업인을 대상으로 서방이 내린 각종 제재를 피할 수 있게끔 만든 복잡한 법적 비밀작전이었다.


CLS의 파트너 변호사 카르푸닌은 프리고진을 자신의 "일등 고객"이라 불렀다.


프리고진은 1990년대 초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길거리에서 핫도그를 팔면서 사업을 시작했다. 소련 시절 한 여성의 핸드백을 훔치기 위해 여성의 목에 칼을 겨눈 강도질에 가담해 징역을 산 적이 있었다. 2000년대가 되자 프리고진은 인기 레스토랑 여러 곳을 세웠고 새로 대통령이 된 블라디미르 푸틴의 관심을 얻었다. 푸틴은 그에게 조지 W. 부시를 비롯한 외빈의 만찬 케이터링을 맡겼다.


프리고진의 회사 콩코드케이터링은 곧 러시아 정부의 여러 이권 계약을 따내기 시작했고 프리고진은 부와 함께 '푸틴의 쉐프'란 별명을 얻었다.


그는 사업을 케이터링에서 용병업으로 확장했다. 바그너 그룹은 2014년 설립됐고 곧 세계적인 악명을 얻기 시작했다.


유엔 조사단은 바그너 용병 일당이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어떻게 고문, 실종, 즉결처형, 강간을 비롯한 인권 유린을 저질렀는지 기록했다. 2019년 6월, 바그너 용병의 훈련을 받은 수단의 민병대는 수도 하르툼에서 100명이 넘는 시위대를 살해했다.


미국 법무부는 2016년 미국 대선에 개입한 댓글부대에 재정 지원을 한 혐의로 프리고진을 2018년에 기소했다.


(로이터=뉴스1) 정윤미 기자 =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소재 민간 용병기업(PMC) 와그너그룹 건물. 와그너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만찬 행사를 도맡아 '푸틴의 요리사'로 알려진 예브고니 프리고진이 2014년 설립했다.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돈바스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비밀리에 지원해왔으며 시리아·아프리카 등지에서 활동했다. 2022.11.04  ⓒ 로이터=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로이터=뉴스1) 정윤미 기자 =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소재 민간 용병기업(PMC) 와그너그룹 건물. 와그너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만찬 행사를 도맡아 '푸틴의 요리사'로 알려진 예브고니 프리고진이 2014년 설립했다.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돈바스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비밀리에 지원해왔으며 시리아·아프리카 등지에서 활동했다. 2022.11.04 ⓒ 로이터=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서방 정부들은 프리고진과 연관돼 러시아의 군사 지원에 대한 대가로 채굴권을 받은 기업들에 초짐을 맞추기 시작했다.


2020년 4월, 미국 재무부는 시리아의 석유 채굴권을 받은 프리고진의 기업에 대한 2018년 제재에 더해 프리고진의 아프리카 기업 네트워크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수단에서 금광 사업을 하고 있던 메로에골드가 제재 대상이 됐다. 미국 정부는 메로에골드가 프리고진의 소유이자 통제를 받았으며 "수단에서 바그너 그룹 활동의 위장망으로 사용됐다"고 말했다. 미 정부는 바그너 그룹을 "러시아 국방부의 대리 전력"이라고 지명했다.


유출된 이메일과 다른 기록에 따르면, 새로운 제재 조치가 도입되던 시기에 CLS는 비밀리에 프리고진의 통제를 받고 있으면서도 아직 제재를 받지 않은 다른 새로운 법인과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2020년 2월, CLS 소속 변호사들은 RN트레이딩이란 러시아 법인과 일하기 시작했다. 주주나 이사진을 보면 프리고진과 연관이 없는 기업처럼 보이며 러시아 국외에서의 광산업과 원유추출업 등을 사업 종목으로 명기하고 있다. 그러나 CLS의 수임료 청구 내역을 보면 이 회사는 프리고진의 콩코드 그룹 일원으로 등장한다.


RN트레이딩은 이미 제재 대상인 프리고진의 다른 기업들과 연결고리를 남겼다. 러시아의 수출 기록을 보면 RN트레이딩이 2020년 4월 30일 발송한 대량의 진저브레드 쿠키는 하르툼에 있는 메로에농축산회사로 보내졌는데 이 회사는 이미 제재 대상인 프리고진의 기업 메로에골드와 비슷한 법인명에 똑같은 주소를 갖고 있다.


문제의 화물에 정말로 진저브레드 쿠키만 있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작년 CNN은 수단 정부가 하르툼에서 러시아로 향하는 화물기를 검색했는데 쿠키라는 라벨이 붙은 상자에서 금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CLS의 이메일은 콩코드 그룹의 일부로 보이는 다른 회사들에 대한 세부정보도 담고 있다. CLS는 프로핏그룹이란 회사에도 법률 자문을 제공하고 있었는데 이 회사도 수임료 청구 기록에 콩코드의 일원으로 명기돼 있었다. 또한 원유 추출과 광산업이 사업 종목으로 등록돼 있었다.


CLS는 아스트레아라는 회사에도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이 회사도 프리고진의 소유로 로펌 내부 자료에 기록돼 있었다. 이 회사는 이사회에 벨라다 유한회사와 같은 러시아인 이사를 두고 있는데 벨라다는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으로부터 원유와 천연가스 채굴권을 받은 바 있다. 영국 정부는 2022년 프리고진과 연관됐고 시리아 정부에게 이익을 제공한다는 이유로 벨라다를 제재 대상에 올렸다.


파이낸셜타임스가 발견한 위의 기업들 중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프리고진의 통제를 받는 것으로 확인됐거나 현재 서방의 제재 대상인 기업은 없다.


수출 기록을 사용해 CLS 서류에 등장하는 프리고진의 기업과 서방의 제재 대상인 천연자원 사업의 연관을 밝힐 수 있었다.


이들 기업은 수 년간 러시아에서 배편으로 카메룬의 두알라 항구를 통해 대량의 산업용 물자와 장비를 보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초기인 작년 4월에는 프리고진의 기업 하나가 두알라 항구를 통해 그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영위하고 있는 벌목 사업장으로 트랙터를 보냈다. 그 한 달 전에는 용접용 전극, 절연용 실리콘, 발전기 등을 보냈다.


미국 워싱턴 소재의 분쟁 분석 기관 C4ADS의 애널리스트 앨런 매거드는 프리고진과 바그너 그룹의 사업에 조세 피난처와 "혼란스러울 정도로 각기 다른 법인과 페이퍼 컴퍼니를 엮어 만든 다발"의 조합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제재가 내려진 상황에서도 모든 종류의 불법행위자들은 이런 조치(페이퍼 컴퍼니, 바지 사장, 조세 피난처 등)를 총동원해서 글로벌 무역, 금융, 운송 체계를 계속 이용합니다."

'당신의 가치관을 지켜라'

2022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 CLS는 프리고진의 기업에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프리고진의 평판을 지키기 위해 서방의 법원을 사용하고 있었다.


CLS는 런던과 워싱턴의 유수 변호사들을 선임해 프리고진과 바그너 그룹 용병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소송을 진행했다. CLS는 이 업무를 프로젝트 햄릿이라고 불렀다.


유명 로펌들은 CLS와 함께 프리고진을 대변하길 원했다. 국제 로펌 리드스미스의 파트너 변호사 하나는 2020년 6월 CLS의 상무이사 블라디슬라브 자브로딘에게 메일을 보냈는데 미국 법무부가 2016년 미국 대선에 개입한 혐의로 프리고진을 기소하려는 것을 함께 막아낸 걸 축하하는 내용이었다.


"콩코드 사건에 대한 귀사의 팀과 우리 팀의 협력이 좋은 결과를 내서 매우 기쁩니다." 그는 메일에 썼다. "다른 이야기지만 지금도 아드님을 윈체스터칼리지(영국의 유명 사립 기숙학교로 현 영국 총리 리시 수낵 등이 이곳 출신이다 --역주)로 보내실 생각이신지요? 어제 학교 동문들과 통화 중에 갑자기 거기 교장도 나와서 이사님 생각을 했습니다!"


수 개월이 지난 2020년 10월, 프리고진은 "민간군사기업 바그너 그룹과 재정을 비롯한 밀접한 연관"을 가졌다는 이유로 유럽연합의 제재 대상이 됐다. CLS는 런던의 로펌 필립스루이스스미스의 변호사 마틴 루이스에게 연락해 제재 조치를 뒤집으려 했다. CLS는 이를 러시아 용병 활동에 대한 "내러티브의 전환"이라고 표현했다.


2020년 11월, 카르푸닌은 루이스에게 "혐의가 잘못됐음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메일을 보냈지만 "바그너에 대한 혐의를 반박할 수 있는 실질적인 가능성"이 없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반증을 제시하는 게 가능한지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의에서 벗어나 어떻게 반증을 할 것인지에 대한 현실적인 논의를 해야 합니다."


필립루이스스미스 변호사들과 협의를 한 후, CLS는 유럽연합 일반법원에 프리고진에 대한 제재를 번복시키기 위한 신청서를 준비했다. 신청서는 이렇게 주장했다. "그(프리고진)는 바그너 그룹이라고 알려진 단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바그너 그룹이라고 알려진 단체와 어떠한 긴밀한 관계나 재무적인 관계도 없습니다… 유럽연합 이사회는 지금까지 바그너 그룹이라는 단체의 존재를 확인한 바 없습니다."


클라이언트가 받고 있는 제재를 푸는 데 성공하려면 CLS는 프리고진의 용병 활동에 대한 러시아 및 서방 언론매체의 상세한 보도가 거짓임을 보여줘야 했다.


2021년 CLS 변호사들은 유명 러시아 클라이언트를 대리하는 걸로 유명한 런던의 로저 거손을 선임해 탐사보도 매체 벨링캣의 설립자 엘리엇 히긴스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을 시작했다. 벨링캣은 프리고진에 대해 여러 건의 기사를 낸 바 있다.


제재 대상인 인물을 대리해 누군가를 고소하려면 먼저 영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거손은 영국 재무부에 특별 허가를 신청했고 승인을 받았다.


거손은 히긴스가 프리고진을 바그너 그룹의 활동과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발생한 러시아 기자 3명의 살인과 연결시켜 프리고진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소송을 제기했다. CLS는 BBC에 소송 제기에 대해서도 문의했으나 이를 추진하진 않았다.


2021년 12월 초, 영국 고등법원에 제출한 서류에서 거손의 로펌은 자신의 클라이언트가 "러시아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벌인 불법적인 비밀 군사작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히긴스의 주장으로 프리고진이 "인격과 명예에 큰 손실을 입었으며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다"며 징벌적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명예훼손 소송이 진행 중이던 2021년 말, 카르푸닌은 프리고진에게 새해 선물을 보냈다. 상자 속에는 가짜 눈이 들어있는 투명한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과 양말, 그리고 '당신의 가치관을 지켜라'라고 적힌 노트가 들어있었다.

'나는 민간군사기업의 대표다'

이런 자신만만한 분위기는 우크라이나 침략 전이었다. 그러나 푸틴의 전쟁에 대한 반발이 전세계적으로 번지자 프리고진을 대리하던 서방의 변호사들이 발을 빼기 시작했다. 히긴스를 고소했던 로펌은 작년 3월 프리고진을 대리하지 않겠다고 법원에 공식적으로 신청을 넣었다. 법원의 심리는 비공개로 열렸고 언론 취재는 허용되지 않았다. 이에 분개한 프리고진은 보도자료를 내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면서 자신이 변호사의 조력을 받지 못한 데 대해 영국의 '러시아혐오'를 탓했다.


런던의 변호사들은 갑자기 푸틴 정권과 가까운 러시아 고객들을 위해 했던 일들을 계속하기가 어려워졌다.


작년 5월, 영국 의회의 소위원회는 러시아의 올리가르히가 자신들의 부와 활동에 대한 보도를 막기 위해 영국의 명예훼손법을 악용하는 걸 막기 위해 명예훼손법을 개정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증거 제출을 몇몇 변호사들에게 요청했다.


패널 중에는 영국의 저명한 매체법 전문 법정변호사(barrister)로 히긴스에 대한 프리고진의 소송에서 프리고진을 대리했던 저스틴 러시브룩이 있었다. 그는 의원들에게 명예훼손법을 악용하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며 그 이유로 "본질적으로 그러한 행위는 원고가 거짓에 기반해 자신의 주장을 펼칠 것을 요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 경우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나 법률서에서나 극히 드뭅니다."


넉 달 후, 다부진 몸의 대머리 남성이 죄수들에게 자신의 조직에 들어올 것을 권유하는 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됐다. "나는 민간군사기업의 대표다." 남성은 검은색 유니폼을 입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죄수들에게 말한다. "바그너라고 들어봤는가?" 영상 속 남성의 신원은 예브게니 프리고진으로 확인됐다. 지난 4년동안 자신의 용병 사업을 감추기 위해 거의 모든 법적 조치를 취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영상이 유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프리고진은 또다른 충격적인 발표를 한다. 바그너 그룹을 만든 게 자신임을 인정한 것이다. "나는 직접 오래된 무기를 손질하고 방탄조끼를 정리했고 나를 도울 수 있는 전문가를 물색했다. 2014년 5월 1일 그 순간, 애국자들로 이루어진 단체가 탄생했고 나중에는 바그너 대대로 불리웠다." 그는 나중에 미국 대선에 개입하려 시도했던 것도 인정했다.


그는 사실상 자신이 영국과 미국에서 제기했던 소송들이 모두 거짓말에 기반했던 것임을 만천하에 공언한 것이다. 작년 11월에는 마지막 가식까지 저버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외벽이 유리로 장식된 바그너 그룹의 본부를 세운 것이다.


"소송이 프리고진의 복수였다는 건 틀림없었습니다." 자신이 당한 명예훼손 소송에 대한 히긴스의 말이다. "프리고진은 저를 고소할 수 있도록 제재 면제 조치도 받았죠. 저는 이 부분에 특히 화가 납니다. 모든 증거가 이 소송건이 영국 사법체계를 분명히 악용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히긴스는 소송 때문에 7만 파운드(약 1억1000만원)를 썼고 이를 회수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한다. "프리고진의 변호사들은 자기네들이 뭘 하고 있는지 알았어요. 우린 소송 비용을 감당해야 했고요."


CLS의 파트너 변호사 파벨 카르푸닌은 의뢰인과의 비밀업무에 대해서는 코멘트할 수 없다고 했으나 프리고진이 바그너 그룹을 창설했다고 시인했을 때 자신의 로펌도 크게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변호사란 고객의 입장을 프로페셔널하게 대변해야 하는 "중립적인 관계인"이라 말했다. "저희가 제공한 어떠한 법률 서비스도 제재 회피의 조장으로 간주될 수는 없습니다."


리드스미스는 코멘트를 거부했다. 로저 거손은 자신의 로펌이 "언제나 법적, 직업적 의무에 완전히 충실했다"고 말했다.


저스틴 러시브룩은 코멘트를 거부했다. 영국에서 사무변호사(solicitor)는 의뢰인을 대변할지 여부를 자유롭게 택할 수 있는 반면 법정변호사(barrister)는 사건을 수임할 수 있으면 의뢰인이 누구든지 의무적으로 사건을 수임하도록 돼 있다. 런던에서 프리고진을 변호하던 법률가들은 그가 바그너 그룹을 경영하고 있음을 시인하기 이전부터 프리고진의 변호를 중단했다.


필립스루이스스미스의 마틴 루이스는 제재 대상 인물도 법치주의 원칙에 따라 스스로를 변호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타당한 사법체계는 오직 향기롭고 위협적이지 않은 사람만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변호사가 된다는 것은 인기를 얻기 위한 길도 아니고요."


히긴스를 대리했던 주리 변호사는 매우 비판적인 입장이다. "프리고진의 조직은 언론인을 살해했고 그는 자유 언론의 입을 틀어막고 위협하는 데 영국 법정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그의 변호사들은 이를 조장했죠. 깊은 부끄러움과 우려를 가져야 합니다."


1888년 창간된 영국의 대표적인 일간 경제지. 특유의 분홍빛 종이가 트레이드마크로 웹사이트도 같은 색상을 배경으로 쓰고 있을 정도입니다. 중도 자유주의 성향으로 어느 정도의 경제적 지식을 갖고 있는 화이트 칼라 계층이 주 독자층입니다. 2015년 일본의 닛케이(일본경제신문)가 인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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