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이슈

이방카 트럼프부터 하비 와인스틴까지, 위기의 순간에 모두가 찾는 여자

리사 헬러는 언론의 뭇매에서 살아남으려는 유명인사들이 가장 먼저 찾는 위기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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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DALL-E 3

2024.03.29 15:36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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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11월로 다가온 대선 시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제 공화, 민주 양당은 정책, 홍보 등 양당이 동원할 수 있는 인재들을 총동원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리사 헬러가 그런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를 통해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를 위해 활약했던 언론대응 전문가입니다. 그는 척 슈머 상원의원(현재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의 언론 비서로도 일한 바 있습니다. 정치적 성향을 넘어 언론대응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돕는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뉴욕매거진의 2023년 2월 14일자 기사가 리사 헬러의 활약상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척 슈머, 이방카, 쿠슈너 등 이 기사에 등장하는 많은 이름들이 금년 미국 대선에서도 등장하게 될 것이고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리사 헬러 같은 언론대응, 커뮤니케이션의 귀재들을 위한 공간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대선이라는 긴 레이스에서 수많은 이슈가 변곡점을 만들어낼 것이며 각 캠프의 대응능력이 여실히 발휘될 것입니다. 이 기사는 미국의 공공부문에서 위기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뉴욕매거진 특유의 가벼운 문체로 흥미롭게 그리고 있으므로 시간이 좀 흐른 기사지만 '정치는 사실의 문제가 아닌 인식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일독을 권합니다.



2022년 1월의 마지막주 월요일, 제프 주커Jeff Zucker는 자기가 만든 세상이 무너져 내릴 것을 직감했다. 알만한 사람은 알고 있던 부사장 앨리슨 골러스트Allison Gollust와의 연애 관계가 대중에 폭로되기 직전이었다. 그는 CNN 사장직에서 사임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었고 그가 이끌던 3억 달러 규모의 CNN+ 스트리밍 서비스 사업은 고아 신세가 될 처지였다. 그리고 옛 친구였던 쿠오모Cuomo 형제는 살기등등했다.1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과거 루퍼트 머독의 고문이었으며 자신과 오래 알고 지낸 미디어 경영자 게리 긴즈버그Gary Ginsberg와 자신의 아파트에서 대책을 논의했다. 긴즈버그는 리사 헬러Risa Heller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브루클린 하이츠에 사는 43세 여성이자 세 자녀의 어머니인 헬러는 뉴욕에서 풍전등화 신세에 놓인 엘리트들의 선택을 받은 위기 커뮤니케이션 전사가 되었다.


"저는 리사 헬러를 몰랐어요." 주커는 내게 말했다. "제가 CNN을 떠난다는 발표가 있기 전날 그가 찾아와서 처음으로 만났죠. 72시간 가까이 주방에 앉아있다 갔지요."


"리사는 독특한 사람이에요. 들어오자마자 커피를 내리고 분위기를 주도하죠. 말하는 억양이 블룸필드힐스인지 롱아일랜드인지 브루클린인지, 어디 출신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더군요." 그런 다음 리사는 어떻게 하다가 자신에게까지 연락하게 되었는지 모든 사실을 털어놓으라고 요구한다. 그 다음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할지를 설명해준다.



헬러가 없었으면 주커의 상황은 얼마나 더 나빠졌을까? "그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군요. 하지만 그의 도움으로 제 인생 최악의 몇 주를 조금이나마 수월하게 넘긴 건 확실합니다." 그가 답했다.


리사 헬러의 이름을 지금 처음 들어본 사람이라도 이미 그의 영향을 받은 보도를 접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똥통에 빠진 사람 중에 그를 불러서 도와달라고 부탁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텍사스트리뷴Texas Tribune의 공동 창업자 에반 스미스는 자신이 딱히 무슨 '똥통'에 빠진 건 아니었지만 헬러의 조언을 구했다고 말했다. 헬러의 수임료는 결코 저렴하지 않다. 하지만 그를 수임하지 않음으로써 생길 리스크를 감당할 이유는 없다.


헬러는 과거 2011년에 앤서니 위너2Anthony Weiner가 첫 번째 '성기 사진' 스캔들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또한 재러드 쿠슈너가 운영하던 쿠슈너 컴퍼니Kushner Companies에서 일하기도 했다. 세서미스트리트 캐릭터가 나오는 책 표지에 인종차별적 단어를 사용한 밈meme을 인스타그램에 올린 후 인생이 나락까지 떨어졌던 에스티로더 임원의 대변인 역할을 한 적도 있다. 세서미스트리트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더 말하자면, 엘모Elmo 역을 맡은 성우가 10대와 성관계를 했다는 혐의를 받은 후 헬러를 고용했다(해당 사건은 기각되었다). 복수의 여성을 성추행하여 고소당한 셰프 마리오 바탈리Mario Batali와 여러 어린 팬들에게 성적인 압박을 가한 사실이 음악 웹진 피치포크Pitchfork에 폭로된 아케이드 파이어Arcade Fire의 보컬 윈 버틀러Win Butler도 헬러를 찾았했다. 햄턴에서 강간 혐의로 체포되었던 골드만삭스의 한 은행가도 헬러를 찾았다(이후 무죄로 밝혀졌다). 뉴요커의 기고가 제프리 투빈Jeffrey Toobin은 업무용 줌 회의 도중 자위행위를 하다가 발각된 뒤 헬러의 조언을 구했다. 뉴욕타임스의 발행인이었던 아서 설즈버거 주니어Arthur Sulzberger Jr는 이혼을 앞둔 부인으로부터 혼전 계약 위반으로 고소 당했다는 소식이 온라인 연예매체 '페이지 식스Page Six'를 통해 폭로되자 헬러를 불렀다. LA의 유명 식당 스퀄Sqirl에서 찍힌 곰팡이 핀 잼 사진이 퍼진 후 엄청나게 비난을 받은 사건을 기억하는가? 이 식당 역시 헬러를 고용했다. 현재 헬러는 샘 뱅크먼프리드3 사건 때문에 평판이 손상된 그의 법학교수 부모를 대리하고 있다.


이들은 헬러의 의뢰인 중 일부에 불과하며 어쩌면 대부분일 수 있는 다수의 의뢰인이 익명을 유지하고 있다. 갑작스럽게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에 처한 권력자를 구원하려면 신중해야 한다. "매일 언론을 상대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조차도 자신이 언론의 취재 대상이 되었을 때 도움을 받는 게 좋다는 것을 깨닫기란 어려운 일이죠." 주커의 말이다.




주커가 몰락한지 딱 1년이 되어가던 1월의 어느 금요일 아침, 나는 울워스 빌딩에 있는 헬러의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곳에서는 시청, 브루클린 다리가 보였고, 1세기 전에는 뉴스페이퍼로우4Newspaper Row로 불렸던 도심지가 끝없이 뻗어 있었다. (지금 이곳에는 고급 아파트가 늘어서 있다.) 카펫은 레드, 벽과 노출된 천장은 화이트, 소파와 의자는 밝은 블루였고, 키가 30cm 정도인 황금색 요정이 반짝이는 흰색 사이드 테이블 위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고 있었다. 시티앤스테이트City & State와 커머셜 옵저버Commercial Observer, 리얼딜The Real Deal, 헐리우드리포터The Hollywood Reporter, 월스트리트저널, 뉴욕타임스, 그리고 뉴욕매거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벽 한 쪽에 놓인 누런 뉴욕포스트 박스에는 오래된 타블로이드 신문이 들어 있었다. '왜 일하러 가는 거야?'라고 새겨진 목판 옆에는 당시 드 블라지오 뉴욕 시장이 파크 슬로프Park Slope의 체육관에서 찍힌 어색한 사진이 놓여 있었다.


올블랙 정장을 입은 헬러는 책상에서 당일자 뉴욕타임스를 집어들었고 붉게 칠한 손톱으로 앞 페이지를 두드리며 말했다. "뉴스에 나왔는데 내가 관여하지 않은 소식을 읽으면 '왜 내가 여기 없는 건가?' 싶어서 조금 속상해요. 이야기가 이리저리 꼬여 있으면 언제든 해결하고 싶거든요." 그의 책상 뒤에 놓인 책장 위 벽에는 원더우먼 옷을 입은 여성이 쓰레기를 내다버리는 그림 액자가 걸쳐져 있었다. "이 그림은 제게 특별하 거예요."


사무실에 있는 물건 중 어느 하나 메시지가 담기지 않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사이트Lucite 상자에 담긴 미니어처 신문 가판대가 내 눈에 들어왔다. 상자 속 아주 작은 데일리뉴스Daily News라는 조그마한 타블로이드지에는 '지하철 변태의 폐해'라고 외치는 듯한 작은 헤드라인이 달려 있었다. 나는 미디어 부두교 같은 것을 믿고 행하는지 물었지만 그는 웃기만 했다.


헬러는 자기 일이 그저 이야기에 '맥락을 더하는' 것이라고 했다. 기자와 편집자—그리고 어쩌면 인터넷도—가 요약 평결을 낼 준비가 된 것 같을 때 합리적 의심을 끌어낼 수 있는 사실과 우연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는 자극적이고 주의를 돌리는 정보를 흔들어 보이고, 논쟁도 벌이며, 더 관대한 이들에게 호소한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에 엮인 사람 중 때 묻지 않은 이는 없으니 혼자 고고한 척하지 말라는 말로 사람들을 자극한다. 그는 사람들을 회색지대로 이끈다.


나를 포함한 미국 언론의 대부분이 주커를 취재하고 있던 1년 전, 나는 트라이베카에서 헬러와 커피를 마시기로 하고 그를 처음으로 만났다. 그는 나를 쳐다보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앞으로 이렇게 될 겁니다.' '궁금한 거 다 말해보세요.' '적어둘테니까 다시 이야기합시다.' 같은 말을 섞어서 이야기했다. 그는 공격적으로 반응하거나 적어도 당황할 것이란 나의 예상과 달리 오히려 내가 직설적이라고 생각했던 질문을 적어내려가면서 혼자서 옅은 미소를 지으며 상대를 살짝 업신여기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면서도 즐거워하는 듯했다.


그의 성격과 전술은 이 시대에 잘 맞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누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한 문화가 변화함에 따라 권력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헬러는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는 CEO가 실수를 하거나 곤경에 처하거나 조사를 받는 등 문제가 생기면 호사가들은 그들을 향해 '멍청한 놈,'이라거나 '저 여자 최악이야,' 또는 '재수 없는 자식'이라고 욕했어요. 요즘은 캔슬컬처5니 뭐니 하면서 사람들을 쓰레기처럼 내다버리는데 나는 동의할 수 없어요. 나는 만회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굳게 믿어요."


헬러가 가지고 있는, 또는 가지고자 하는 태도가 딱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뉴욕에는 언제나 해결사와 강력한 PR 에이전트가 존재했다. 하워드 루빈스틴Howard Rubenstein은 정치인과 미디어 재벌, 개발자들의 배후에서 영향을 미치는 전설적 인물이었다. 초기에는 그 역시 울워스 빌딩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다. 헬러가 따르는 전술 교본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루벤스타인이다.


헬러의 옛 상사이자 루빈스틴을 잘 알았던 척 슈머Chuck Schumer 상원의원은 말했다. "리사가 하워드보다 훨씬 쾌활하기는 하지만, 정치와 실체를 동일하게 이해하고 두 가지를 멋지게 엮어내는 능력이 있지요."


지금은 아들 스티븐이 운영하는 루빈스틴의 회사 및 벌린로젠BerlinRosen을 비롯한 다른 뉴욕 커뮤니케이션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헬러는 수많은 부동산 개발업자들을 고객으로 두고 있다. "부동산은 뉴욕에서 정치와 가장 가까운 것이랍니다." 헬러는 말했다. 경쟁사들에 따르면 그의 회사와 비슷한 곳들은 보통 리테이너 계약6—월 1만 달러 가량—을 한다. 단기 위기대응 업무는 아마도 훨씬 더 비쌀 것이다. 하지만 헬러는 누구에게 얼마나 비용을 청구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인은 커녕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늘날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위기대응 업무였다. 긴즈버그는 말한다. "엄청난 문제를 안고 있는 유명인사 의뢰인을 맡으면 영향력이 생기고, 헬러는 그 영향력을 이용하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죠. 약속을 어기면 정말 사납게 나올 수 있거든요. 당신의 편집장이 누구인지 알고 있고, 다음번엔 기삿거리를 주지 않을 겁니다."


저널리즘의 핵심은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지만,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에 풍성하고 설득력 있는 디테일을 더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처럼 돌아가기도 한다. 헬러는 기자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아는 사람이다. 에반 스미스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악마를 묘사할 때 하는 말처럼, 리사가 사용한 최고의 속임수는 그가 우리와 같은 부류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었어요."



리사 헬러. /사진제공=Risa Heller Communications

리사 헬러. /사진제공=Risa Heller Communications


그의 아우라는 하드보일드 영화 '성공의 달콤한 향기Sweet Smell of Success'가 연상되는 뉴욕의 분위기를 풍기지만 사실 헬러는 외지 출신이다. 그는 미시건 주 디트로이트 외곽과 접한 웨스트블룸필드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변호사였고 어머니는 특수교육 교사였다. 헬러는 고등학교 시절을 이렇게 말한다. "확실히 나는 반에서 가십거리였어요."


그는 미시건대학에서 심리학과 히브리유대문화학을 복수전공했지만, 2001년 졸업 후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그 당시 우연히 비행기에서 반명예훼손연맹Anti-Defamation League (ADL)의 워싱턴DC 지부장 옆자리에 앉았던 헬러의 룸메이트가 그의 희박한 취업 전망을 언급했다. 그 덕에 헬러는 ADL 인턴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얼마 후 그는 당시 캘리포니아 민주당 하원의원이었던 제인 하먼Jane Harman 밑에서 일했고, 이어서 척 슈머 상원의원의 뉴욕 공보 담당 비서로 일하게 되었다. "척 의원이 아니었으면 나는 보잘것없고, 하찮은 사람이었을 것이고, 어디도 가지 못했을 거예요. 그가 항상 제일 똑똑한 사람을 쓴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과 달라요. 그는 자신이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뽑아요."


PR 담당자는 자신이 홍보하는 사람의 성격을 닮는 경향이 있다. 쿠오모의 홍보전문가는 기자들을 얕봤고, 드 블라지오 측은 짜증을 냈다. 블룸버그 측은 전문가의 언어로 말했고 기사를 어떻게 쓰는지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슈머의 PR 담당자는 어떤 기사였는지, 그 기사가 어떻게 쓰였고 어디로 흘러 갔는지, 핵심을 꿰뚫었다. "슈머와 그의 사람들은 육감을 가지고 정글을 누비는 종류의 사람들이에요. 햇살 좋은 나무 꼭대기에 눌러 앉지 않고 정글 바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 알고 있지요. 척은 이런 사람들을 찾아내서 같이 정글 여행을 시작하지요. 리사는 누구보다도 이 생태계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척 슈머의 현 수석 대변인 안젤로 로파로Angelo Roefaro는 말한다.


헬러가 슈머 밑에서 일하기 시작한 후 얼마 되지 않아 그의 가족에 관한 기사가 터졌고 — 헬러의 말에 따르면 "더러운 헛소리"였다 — 그는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한바탕 싸웠다. "아침 일곱 시에 사무실에서 '이 기사 좀 보세요, 내가 기자에게 전화를 해서 소리를 질러 줬어요. 걱정마세요.' 척은 나를 보더니 '그래, 기자에게 다시 전화해서 사과해'라고 했지만, 나는 말했죠. '아니요, 그렇게 안 할 겁니다. 우리를 엿먹였다고요.' 그러자 척은 말하더군요. '전화하도록 해. 지금 당장. 자네한테 기자가 필요할 일이 더 많아.'" 그는 슈머의 지시대로 했다.


과거 뉴욕타임스 미디어 칼럼니스트였다가 세마포Semafor를 공동 창립한 벤 스미스는 2005년 경 NY1 스튜디오에서 우연히 슈머를 만났던 일을 떠올린다. 스미스는 "당시 논쟁의 대상이었던 동성결혼 문제에 대해 입장을 밝히지 않은 슈머를 맹공격"했다고 말했다. 그는 슈머 일행이 스튜디오를 나설 때를 이렇게 기술했다. "[젊은 헬러가] 나를 멈춰 세우더니 갑자기 나타나 질문을 퍼부었다고 화를 내더니, 고함을 다 지르고 나서는 주변을 둘러보며 '빌어먹을 차는 어디에 있는 거야?'라고 묻길래 내가 대답했어요. '의원님 가신 거 같은데요.' 헬러는 전화기를 꺼내 아까와 같은 어조로 소리치기 시작했어요. '나를 인도에 두고 도대체 어디로 간 거예요? 당신 뭐하는 짓이야?' 제가 '운전기사한테 그런 식으로 말해요?'라고 말하니까 헬러가 그러더군요. '무슨 소리예요? 척한테 전화한 건데." (슈머는 돌아와서 헬러를 데려갔다.)


내가 이 일화를 다시 언급하자 슈머는 말했다. "헬러는 솔직하게 말한 겁니다. 그래서 유능한 거죠. 바로 당신에게 달려들테니까요." 헬러는 "척과 일해서 좋은 점" 한 가지는 "소리치면서 사실대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젊을 때부터 이 일을 했지만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 그들이 틀렸다고 말하면 안된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헬러는 27세에 슈머의 사무실을 떠나 엘리엇 스피처Eliot Spitzer를 자문한 기업 커뮤니케이션 회사 글로벌스트래터지그룹Global Strategy Group으로 자리를 옮겼다. 6개월 후 스피처가 성매매 혐의로 체포되는 바람에 당시 부지사였던 데이빗 패터슨David Paterson이 졸지에 원한 적이 없었던 주지사 직을 맡게 되었고, 헬러는 패터슨의 공보 담당 수석 비서관이 되었다. 헬러에 따르면 "온갖 일이 다 터졌죠." 대침체의 서막이 열리고, 힐러리 클린턴이 남기고 떠난 상원 의석의 후임자 지명이 있었고, 심지어 패터슨이 유난히 의지했던 수석 보좌관이 30만 달러 가까운 세금을 체납한 사실이 드러나 사임하기도 했다. 헬러는 이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우리에게는 매우 탄탄하고 유능한 기자단이 있었어요. 요즘과는 다르지요. 각 주의 모든 지방 방송국이 주 의회 의사당에 적어도 한 명씩 기자를 파견해서 주지사를 취재했어요. 매일 아침마다 뉴욕포스트 1면을 보면 헉 소리가 났어요."


헬러는 1년을 일하다가 잠시 일을 쉬었고 몇몇 기업에 일자리를 알아봤지만 "하나같이 시시해 보였다". 그는 서른 살을 앞두고 있었고, 닭 요리를 배우고 싶었다고 한다. 헬러는 본인이 슈머를 위해 일하던 시절 스피처 밑에서 일하던 라이언 투히Ryan Toohey를 알게 되었고, 훗날 글로벌스트래터지그룹에서 동료로 다시 만나 결혼했다. 2010년에는 리사헬러커뮤니케이션Risa Heller Communications를 설립했다.


이듬해에는 새 회사에서의 첫 위기 관리 프로젝트로 앤서니 위너 건을 맡는다. 당시 하원의원이었던 위너가 성기 사진을 보낸 것이 적발된 것이다. 헬러는 이렇게 말한다. "그 건이 내 경력을 망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위너는 나에게 오랜 친구였기에 곤경에 빠진 그를 저버릴 수는 없었어요."


그는 이때부터 현재 자신의 특기가 된 능력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긴스버그는 헬러를 "유태인 어머니와 화이티 벌거7를 섞어놓은 사람"으로 비유한다.


"헬러는 냉정함을 잃지 않아요. 자신만만하지만 건방지지 않고, 강하지만 재수없는 사람은 아니지요." 주커는 말한다. 헬러는 공격 당하는 거물에게 자백할지, 사과할지, 숨어 있을지, 아니면 역공해야 할지 알려준다. 어떤 이들은 만약을 대비해 잠재된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그를 고용하기도 한다.


"저는 미디어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헬러는 말한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게 되고, 해당 정보를 누군가 입수한 경로는 이렇고,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들이 알려주지 않는 이유는 이래요. 가짜뉴스라고 해도 안 먹혀요.' 의뢰인들은 기자들이 통상적으로 빈 노트를 들고 문제에 접근하며 그 노트를 채울 방법을 고민한다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요."


그는 의뢰인들과 함께 기대치를 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헬러가 기사를 완전히 막아줄 거라고 기대하면 안 된다. 헬러는 이렇게 말한다.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사람들한테 '기사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어요'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합니다. 가령 사실이 아니거나 기본적으로 틀린 내용에 기반한 기사라면 가능하겠지만, 기사 자체를 완전히 차단하는 건 너무나도 어려워요. 그건 마치 유니콘과 같아요. 거의 볼 수가 없거든요." 그럼에도 헬러의 의뢰인 중 일부는 그가 어떻게 불미스러운(또는 그들이 보기에는 '부당한') 디테일들을 지워버렸는지 나에게 자랑하기도 했다.


헬러는 특정 기자에게 솔깃한 "논점을 찾아내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기 사무실에 있는 컵 하나를 가리켰다. "만일 당신이 나에게 와서 '이 컵은 파란색이다'라고 말하면 나는 '아니요, 숀, 투명한 컵이에요'라고 말하고, 우리는 무엇이 파란색이고 무엇이 투명인지 논쟁을 벌이게 될 겁니다. 난 논쟁이라면 언제든 할 수 있어요. 가끔은 싸움이 되기도 하지만 도움이 될 때도 있지요." 컵은 투명했다.




지난 10월, 헬러는 과거 산업용 빌딩이었으며 이스트리버가 내다보이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뉴욕타임스의 스타 기자 매기 하버만Maggie Haberman을 위한 출판 기념 파티를 열었다. (부동산 기업 질로우Zillow가 추산하는 이 아파트의 가치는 500만 달러(67억 원)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다.) 조디 캔터Jodi Kantor, 마이클 바바로Michael Barbaro, 제레미 피터스Jeremy Peters, 캐롤린 라이언Carolyn Ryan, 엘리자베스 버밀러Elisabeth Bumiller, 레베카 블루먼스타인Rebecca Blumenstein(현 NBC 뉴스 사장)을 비롯한 등 하버만의 동료 언론인들이 주커, 긴스버그, 그리고 옛 동료인 벤 스미스와 함께 했다. 하버만의 에디터는 화장실 옆 복도에서 노트북 너머로 몸을 웅크린 채 파티가 열릴 시간대에 발행될 하버만의 다음 기사를 편집하고 있었다.


하버만과 헬러는 하버만이 뉴욕포스트에 지역 정치 관련 기사를 올리던 시기에 처음 만났고, 이내 친구가 되었다. 이날 파티에서 헬러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18년 간 많은 것이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우리가 함께 식사할 때마다 그의 컴퓨터는 테이블 위에 음식과 나란히 놓여있었지요. 아마 자기 차는 한 번도 세차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어떤 소재로 논쟁을 하든 나는 극히 작은 지점에서조차 그를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답니다." 헬러는 그를 역대 최고라고 칭찬하고는 덧붙였다. "이 자리에 계시는 다른 모든 기자님들께는 죄송해요."


헬러는 기자들과 친해지는 일을 즐겼다. 헬러의 친구이자 라이벌 커뮤니케이션 기업인 벌린로젠의 공동 창립자 조나단 로젠Jonathan Rosen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기자와 정면으로 맞서고, 기자들을 골탕먹이기도 하고, 편집장들에게 고함을 지릅니다. 그러다가도 기자가 아이를 낳으면 대모가 되어달라는 부탁도 받을 겁니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 그래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할 때가 많아요." 한 뉴욕타임스 기자가 나중에 내게 말해준 바에 따르면, 헬러와 너무 친밀해진 탓에 웨딩드레스 예약금을 걸면서도 그와 먼저 상의하지 않은 게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고 한다. 헬러에게 연락해 커리어 관련 조언을 듣거나, 기사 아이디어를 얻거나, 같이 요가를 하거나, 가끔씩 자기네 회사의 뉴스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내려고 한 사람들도 있다. 어느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뉴욕타임스에서 소규모 인사이동이 예정되어 있어서 그에게 전화하면 '아, 물론 알고 있지'라고 말할 걸요." 하지만 홍보전문가를 칭찬하는 기록을 남기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권력을 향해 설명을 요구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 권력자들이 책임을 회피하려고 고용한 사람을 칭찬하면 권력과 타협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버만은 헬러에 대해 언급하기를 거절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헬러의 실용적 관계 형성 방식과 언론의 이해가 충돌하게 된다. 작년 가을 뉴요커의 기고가 클레어 멀론Clare Malone이 존 켈리Jon Kelly(그도 출판 기념 파티 참석자였다)와 그가 설립한 뉴스 플랫폼 퍽Puck의 프로필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켈리는 헬러에게 연락해서 이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헬러가 주커나 샘 뱅크먼프리드의 가족처럼 켈리의 언론사가 자주 취재하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동시에 어떻게 켈리를 대변할 수 있는지 물었고, 켈리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친구이기도 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프로페셔널한 사람들이거든요. 리사는 자기가 대변하는 의뢰인이 있고, 나는 운영하는 사업체가 있지요. 우리는 항상 합법적인 일만 해요. 그 존중도 우정의 일부분입니다. 당연한 일이에요." (1월 18일에 게재된 샘 뱅크먼프리드 관련 기사에서, 퍽은 헬러가 자신의 의뢰인인 샘 뱅크먼프리드의 부모를 변호한 사실을 인용하면서 같은 단락에서 "헬러는 퍽을 대변한 바 있다"고 인정했다.)


공개로든 비공개로든 내가 헬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기자들은 그가 자신들에게 절대 대놓고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 점에서 헬러가 동종업계의 다른 현역들과 차별화되는 것이다. 주커는 이렇게 말했다. "그에게는 한 가지 규칙이 있어요. 아무리 나쁜 일이어도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말해주기를 원해요. 그리고 그는 언론에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는 곧 그가 의뢰인이 하는 말을 되풀이한다는 뜻이다. 간혹 헬러가 자신의 하는 말의 근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위너를 대변하던 시절, 그는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책임회피용 문구를 추가했다. "위너 하원의원의 말에 따르면 …" 즉, 헬러가 하는 말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나는 헬러에게 어떤 기자가 가장 무서운지 물었다. 그는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뉴욕데일리뉴스에서 일하던 기자가 있어요. 지금은 더시티The City에서 일하지요. 이름은 그렉 스미스랍니다. 매주 금요일 오후 세 시만 되면 나한테 전화를 했는데, 전화가 오면 이런 소리가 절로 나와요. 이런, 망할. 골치 아프게 됐네. 그리고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지만, 내 주장을 이해시키기에 정말 까다로운 기자들도 있어요. 그 사람들 전화는 정말 받기 싫어요."


일부 기자들은 헬러의 언론대응을 즐긴다고 고백한다. 그는 '그 치가 잘난척하는 재수탱이인 건 나도 알지만 실상은 이래' 또는 '미친 여자처럼 굴고 있기는 한데, 지금 정말 심각한 상황을 겪고 있거든' 같은 말과 절대 인용할 수 없는 솔직한 표현들을 전략적으로 사용한다. 최근 헬러의 의뢰인 중 한 명을 취재해서 기사를 쓴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친한 척 트릭을 쓴다는 걸 뻔히 알아도 그게 좋을 수밖에 없어요. 어차피 서로 게임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뉴욕타임스 기자에서 드라마 제작자로 변신한 에이미 초직Amy Chozick은 한번은 자신이 트위터에서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을 보고 헬러에게 전화하여 위로를 구했다. 초직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구멍이라도 기어들어가 숨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는 웃기는 수염을 우리집에 가져다주고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어른스럽게 굴어. 너희 남성 동료들은 트위터 폭도들이 쫓아오면 어떻게 할 것 같아? 그걸 이용해서 망할 책들을 써서 신나게 팔아댈 거야.'"


하버만의 출판 기념 파티 후 몇 개월이 지나고, 나는 헬러가 말 그대로 미디어에 먹잇감을 주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해마다 크리스마스 즈음에 사무실 쿠키 굽기 대회를 열고 그의 직원들(총 18명)이 저마다 색다른 쿠키를 굽는다. 헬러가 직접 선정한 외부 심사위원단이 쿠키를 시식하고 우승자를 정한다. 지난 12월에는 이 심사위원단에 벤 스미스와 존 켈리를 비롯하여 당시 뉴욕시장 비서실장이었던 프랭크 캐론Frank Carone, 전직 시 감사관 스콧 스트링어Scott Stringer가 참여했다.




위기 커뮤니케이션은 비도덕적인 일이 될 수 있다. 나는 헬러에게 의뢰 수락 여부를 어떻게 결정하는지 물었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전할 권리는 있다고 믿어요." 모든 이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지만, 스핀 닥터의 치료를 받을 권리까지 주어져야 할까? "사람들은 최악의 순간에 나를 찾아와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해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도와줄 방도가 있는지 알 수 있어요. 방법이 있고 전달할 이야기가 있다는 생각이 들면 의뢰를 수락합니다. 딱히 전할 이야기가 없다고 판단되면 거절해요. 나는 직감을 따르거든요."


2015년, 하비 와인스틴이 이탈리아 모델 암브라 바틸라나Ambra Battilana의 고소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헬러를 고용했다. 헬러는 당시 의뢰인을 대신하여 뉴욕타임스에 "이 에피소드가 지나갔다는 사실이 기쁘다"고 말했다.


그는 와인스틴을 위해 일했던 것을 후회할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2015년에 3주 동안 일했어요. 지금과 상황이 완전히 달랐지요. 이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이 세 명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 알았다면 그 사람을 위해 일했을까요? 안 하죠." 나는 그 경험 때문에 자신의 직감에 의문을 품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는 맥락을 더하려고 했다. "나는 직감을 믿어요. 틀린 적이 있을까요? 물론 틀릴 때도 있지요. 그래도 대체로 맞을까요? 맞아요." 와인스틴을 위해 일하는 건 어떤 경험이었나요? "직접 만난 건 딱 한 번뿐이에요. 비공개용으로 말해도 될까요?" 그건 곤란해요. "딱 한번 만났어요." 남성을 돕기 위해 여성을 비방한 적 있나요? "없어요."


이어서 나는 헬러가 재러드 쿠슈너와 이방카 트럼프에게 고용된 이야기를 꺼냈다. 슈머는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헬러에게 허락할 수 없다고 말했어요." 헬러가 쿠슈너컴퍼니를 맡게 된 시점은 2016년 대선 레이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었다. 쿠슈너와 트럼프 부부가 행정부로 들어가기로 결정하면서 헬러는 쿠슈너의 가족 사업 매각 문제로 언론을 상대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삽시간에 정쟁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배니티페어Vanity Fair의 에밀리 제인 폭스Emily Jane Fox는 2016년 12월에 쿠슈너가 뉴욕옵저버의 경영에 간섭했다는 기사를 게재한 뒤 헬러를 처음 만난 일을 기억한다. 헬러는 금요일 밤에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있는 배니티 페어 사무실에서 폭스와 만나자고 요청했다. 폭스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아주 조용하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직설적인 질문을 하는 전략을 택하더군요. 그게 소리 지르는 것보다 훨씬 괴로웠어요. 나는 젊은 혈기에 헬러의 의뢰인들에 대해 공격적인 글을 썼고, 그는 나를 평가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초짜 기자 시절에는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라는 식의 분위기만큼 겁나는 것도 없습니다. 최고의 홍보전문가들은 언제나 기자들을 심리적으로 프로파일링해요."


쿠슈너와 트럼프 부부는 워싱턴에 입성하자마자 대규모 홍보 기구를 꾸렸다. 헬러는 이들을 따라 백악관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발을 빼지는 못했다. 한 번은 사진에 찍혀서 이들과의 관계가 포착되기도 했다. 게일 킹Gayle King이 이방카 트럼프에게 영애로서 '공모한'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진 이방카의 자택 인터뷰 도중 파파라치가 그곳에 있던 헬러의 사진을 찍은 것이다. 뉴욕에 사는 헬러의 리버럴 성향 친구들은 그의 공모 여부를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금껏 알고 있던 민주당의 슈머는 어떻게 된 걸까? 헬러가 여태껏 돈만 주면 아무나 도와주는 용병 노릇을 한 걸까?


내가 그의 사무실에서 쿠슈너 부부에 대해 묻자 헬러는 몹시 당황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내 정치 성향은 절대 그쪽이 아니에요. 항상 확실히 그렇지 않았어요. 정말 힘들었다니까요. 나는 내 의뢰인에 대한 자세히 얘기해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아요. 그건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여전히 이 부부는 엄청난 기삿거리였고, 헬러는 쿠슈너컴퍼니에 고용되면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인 언론 플레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중국이 이 회사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는 1면 대형 기사와 기자 세 명이 투입된 탐사보도 기사를 상대했다. 이 건은 너무 재미있어서 그가 거부할 수 없었으리라고 나는 말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이런 최고조의 즐거움이 나에게 너무 과한 건 아닌지 일리 있는 질문을 하시네요."


"헬러는 난해한 질문에 주눅들지 않아요. 스포츠 경기를 뛰는 운동선수 같은 사람이죠." 슈머의 친구이자 옛 동료인 알렉스 레비Alex Levy의 말이다.




헬러의 한 친구는 자신이 쓴 책의 언론 홍보가 필요해서 헬러에게 전화로 조언을 구하던 상황을 말해주었다. "우리 아이를 유아차에 태우고 인터뷰에 데려가 동정을 사라고 하더군요."


헬러가 나를 가족 저녁 식사에 초대했을 때 이 친구가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가 닭고기 요리를 하는 동안 그의 네 살짜리 막내는 '디즈니 온 아이스Disney on Ice' 이야기를 하고, 여덟 살 둘째는 레고를 가지고 놀고, 열한 살 첫째는 해리 왕자에 대해 질문했다. "이리 와서 안아주렴!" 어느 순간 헬러가 외쳤다.


그의 남편 투히(47세)는 이제 덴톤스글로벌어드바이저Dentons Global Advisors에서 파트너로 일한다. 내가 메모장을 꺼내는 동안 투히는 나에게 펫낫pét-nat 와인을 한 잔 따라주었다. "라이언, 와인 얼마나 마셨어?" 헬러가 끼어들었다. "이런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겠어요?"


나는 투히에게 헬러가 그를 호도하려 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없어요."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래도 두 홍보전문가가 한 집에 살고 있으니 영화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Mr and Mrs Smith'와 같은 상황 아닐까? "아니요, 언론대응식의 호도는 전혀 안 해요."라며 헬러가 언론대응에 나선다. "참치멜트 샌드위치 만드는 방법을 놓고 싸운 적은 있지요." 투히가 말했다. 그 싸움의 승자는 누구일까? 헬러가 자신을 가리켰다. 투히는 자기 부인이 낙인 찍힌 사람들을 아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인생을 전반적으로 봤을 때 아내는 공감능력이 무척 뛰어난 사람인 것 같아요." 그는 약간 긴장한 듯했지만 자신의 견해를 담아 대답했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미디어 업계의 정상까지 오르기는 쉽지 않았다. 위너 사건을 맡았을 당시 헬러는 임신 39주차였다. 그는 위너 의원이 당시 하원의장이었던 존 베이너John Boehner에게 사퇴서를 제출한 뒤에 "모든 기자들에게 해당 내용을 전달하고 나서야 병원으로 가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헬러의 임신은 '페이지 식스'에서 기사화되었다.) 한 기자는 헬러의 둘째 아이 출산 며칠 후 시청 밖에서 헬러의 고객사 중 하나인 에어비앤비를 겨냥한 집회에서 우연히 헬러와 마주치고 충격을 받은 일을 회상했다.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랩코트 차림으로 서 있기만 했는데, 마치 '뭐야? 지루해.'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헬러는 말한다. "의뢰인에게 '제가 임신 중이라 3개월 뒤에 뵙겠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에요. 한 시간 동안 전화 통화를 해야 한다면, 한 시간 동안 통화를 하든 뭐든 해야지요. 그냥 하는 겁니다. 그게 제 삶의 일부분이에요. 꺼버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는 LA에서 더 많은 의뢰인을 맡고 그곳에 사무실을 열고 싶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의 일상은 분명히 자기 가족을 중심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헬러는 밤에 거의 외출을 하지 않고 일찍 일어나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 삶은 혼돈 그 자체입니다. 저는 출근하는 것도 좋고 집으로 퇴근하는 것도 좋아요. 아이들은 불가능한 것만 같던 크나큰 기쁨과 즐거움을 안겨줘요. 첫째 딸은 심지어 타블로이드지를 읽는다니까요!"


주커 관련 일을 맡고 나서 헬러의 어머니가 예기치 않은 다발성 경화증 합병증을 겪다가 결국 사망했다. 주커는 이렇게 말했다. "결국 모친의 병실에서 나오는 헬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개인적으로 정말 불행한 시기였지만, 그와 연락이 닿지 않는 순간은 한 번도 없었다고 봅니다."


헬러에게 이것은 프로페셔널한 행동일 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정말이지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싶지 않아요."


1968년 창간된 미국의 격주간지로 뉴요커와 함께 뉴욕을 대표하는 매거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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