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바이 혐오가 유행이다. 페르시아만에 위치한 신흥 도시 두바이는 그곳에 가보지 않았거나, 부르즈 할리파 초고층 빌딩, 해변의 술과 함께하는 브런치, 끝없이 이어지는 쇼핑몰 같은 관광명소만 잠시 둘러본 사람들 사이에서 특히 혐오를 받는다.
그래서 지난 며칠간 두바이와 아랍에미리트(UAE)의 다른 지역들이 약 1400기의 이란 미사일과 드론의 공격 대상이 되었을 때, 해외의 반응은 종종 고소해하거나 비꼬는 것이었다.
소셜미디어는 도망치는 인플루언서, 세금 회피자, 암호화폐 투자자들에 대한 농담과 밈으로 가득 찼다.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공항으로 손꼽히던 두바이 공항이 이란의 공격으로 폐쇄되자, 일부 고립된 외국인 거주자들이 위험을 피해 탈출하기 위해 1인당 25만 달러(3억5000만 원) 이상을 지출했다는 소식이 관심을 모았다.
이 흔치 않은 도시에서 삶을 꾸리기로 선택한 각계각층의 400만 명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은? 거의 없었다. 자리를 지키고 다음 날 출근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헤드라인을 장식하지 못했다.
두바이가 일시적인 신기루이며, 위기가 닥치면 허물어질 모래 위에 지어진 할리우드 세트장 같은 곳이라는 생각은 이란에서도 틀림없이 갖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는 이란이 자신들을 공격한 이스라엘보다 공격하지 않은 UAE에 더 많은 미사일과 드론을 발사하기로 결정한 핵심적인 이유였을 수 있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두바이와 UAE 모델의 종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죠. 이란은 아마도 바로 그런 공황을 조성하려고 했을 거예요." UAE 학자인 압둘칼레크 압둘라가 말했다. "하지만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죠. 두바이는 거품이 아닌, 회복력이 있고 실력 있는 장소임을 입증했어요. 이보다 더 실력을 보여줄 수는 없죠."
나는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몇 년을 보낸 후, 2015년 월스트리트저널의 두바이 지국장이 되어 이주했다. 처음에 두바이는 세계적인 항공 허브라는 지위 덕분에 출장 사이에 머무는 편리한 장소에 불과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정과 인간관계라는 사회적 구조가 성장하고, 관광지에서 벗어난 나만의 장소들이 생기면서 집이 되었다.
습관이 생겨났다. 초고층 빌딩 뒤편의 놀랍도록 시골 같은 지역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공작새와 가프 나무들 사이로 해질녘 달리기를 하는 것. 최고의 달콤한 카락 차이1를 파는 주유소. 개조된 공업 지대의 갤러리들 사이에 자리한 시네마 아킬에서의 예술영화의 밤.
2022년 내가 태어난 도시 키이우에 러시아가 침공했던 날처럼, 2월 28일 이란의 미사일이 두바이에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개인적인 모욕감을 느꼈다. 내가 토마토와 고추를 키우는 발코니에 서서, 푸른 하늘에 요격 미사일날아오르는 가운데 연기 기둥이 수평선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키이우를 겨냥한 것과 동일한 이란산 샤헤드 드론 수십 기가 방공망을 뚫고 들어와 여러 데이터센터와 두바이의 고급 호텔 및 미국 영사관과 같은 상징적인 목표물들을 타격했다. 그러나 정교한 방공 시스템에 의한 이례적으로 높은 요격률 덕분에 최소한 지금까지는 재앙적인 피해를 피할 수 있었다. 두바이는 전쟁이라는 첫 시험대에 올랐고, 위엄 있게 대응했다. 대규모 사재기도, 약탈이나 범죄 급증도, 주민들의 탈출도 없었다.
"폭탄이 떨어지든 전쟁이 터지든 뭐 어쩌라고요?" 두바이 시티 워크 지역의 한 일식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우간다 출신 호스티스 아이샤 카투샤베가 허세를 부리며 말했다. "우린 두바이에서 살거나 두바이에서 죽어요."
전쟁 5일째, 두바이는 비교적 평정을 되찾았다. 주요 도로에는 교통 체증이 돌아왔고 사무실, 쇼핑몰, 레스토랑은 다시 사람들로 가득 찼다. 발전소와 담수화 시설과 같은 필수 인프라는 온전하게 유지되었고, 공항조차 상업 항공편 운항을 부분적으로 재개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이란의 공격으로 UAE에서 총 3명이 사망했고(모두 2월 28일에 발생했다) 100명 이상이 부상 당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분명히 충격을 받았어요." 이란 출신을 포함한 다수의 중동 지역 예술가들을 집중 조명하는 더 서드 라인 현대 미술 갤러리의 공동 창립자인 써니 라흐바르가 말했다.
라흐바르는 이슬람혁명 직후인 1980년, 3살 나이로 이란인 부모님을 따라 두바이에 왔다.
"두바이는 항상 안전한 곳이었죠. 뿌리를 내리고, 일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장소였어요." 라흐바르가 말했다. "저는 제가 이런 광경, UAE가 공격받는 걸 목격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어요."
두바이는 결코 평범한 도시가 아니다. 과거 진주 채취를 중심으로 경제가 돌아가던 걸프만의 작은 무역항이었던 이곳은 최근 수십 년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대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수로 옆의 오래된 요새와 바람탑이 있는 상인들의 집이 대부분이었던 도시는 그보다 훨씬 더 크게 확장됐다. 해안과 사막을 따라 새로운 도시 지역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2015년 200만 명을 돌파한 이후 거주 인구는 두 배로 증가했다.
두바이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 UAE 시민은 약 5%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말 그대로 전 세계 각지에서 왔다. 파키스탄인들은 인도인들과,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은 레바논인 및 팔레스타인인들과 나란히 살고, 공부하고, 일한다. 많은 이들이 두바이에서 태어나거나 자랐으며, 여권을 제외하고는 원래 국적 국가와의 연결고리는 제한적으로만 유지하고 있다. 영어는 공용어이다.
"이곳은 서로 다르지만 함께 살 수 있는 도시죠. 해변에서 아바야2와 비키니를 나란히 볼 수 있는 곳,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될 수 있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며, 제 아이를 키우기에 안전한 곳이에요." 6년 전 두바이로 이주한 우크라이나 출신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올하 단첸코바가 말했다.
전쟁 지역이 낯설지 않은 단첸코바는 2022년 러시아의 전면 침공 이후 매년 여름 우크라이나를 방문해왔다. 두바이가 가장 격렬하게 이란의 공격을 받았던 2월 28일 밤, 그녀와 남편, 딸은 창문에서 떨어진 복도에서 잠을 잤다. 이후 어른들은 침실로 돌아갔지만 아이는 아직 복도에서 밤을 보낸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저도 무서웠음을 부정하지 않겠어요. 결국 우리도 인간이니까요."
몇몇 가족들, 특히 자녀가 있는 가족들은 일시적으로 고층 건물에서 나와 친구 집에서 머물거나 UAE 시골의 산장에서 며칠을 보내기도 했다. 일단 국경을 넘어 인근 오만으로 가거나 비행기로 떠난 이들도 있다.
단첸코바는 위기의 순간에 느낀 공동체 의식에 감명받았다고 말했다. 전쟁 첫날, 딸의 학교 소속의 심리상담가는 아이들의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건넸다. 왓츠앱 메시지 그룹에서는 다른 조언들이 오고 갔다.
단첸코바와 같은 많은 이들에게 이것은 첫 전쟁이 아니다. 두바이에는 레바논인, 시리아인, 이라크인, 우크라이나인, 보스니아인, 수단인 수십만 명이 살고 있다.
"폭풍은 우리를 흔들지 못한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상기시켜줄 뿐이다." 3월 5일 시티 워크의 한 전자 광고판은 두바이 국왕의 말을 인용해 선언했다.
부유한 서방 국가들이 대규모 이민을 사회악의 근원으로 보는 시대에 두바이와 다른 걸프 도시들은 해외 인재들에게 이례적인 등대로 서 있다. 만약 당신이 개발도상국의 야심만만한 전문가—시리아 의사, 이집트 변호사, 필리핀 엔지니어, 인도 회계사—라면 서방에서 전문직으로 일하기 위한 비자와 허가를 신속하게 확보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두바이에서는 가능하다. 유럽 수준을 능가하는 급여를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두바이는 서구에서는 갖기 어려운 기회와 가능성 등 저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제공한 도시에요." 갤러리 공동 창립자인 라흐바르가 말했다.
사회경제적 피라미드의 더 낮은 단계에도 기회는 존재한다. 물론 인도, 파키스탄, 나이지리아와 같은 나라에서 온 건설 노동자, 택시 운전사, 웨이터들의 삶은 쉽지 않다. 그들은 종종 검소한 환경에서 살며 변변찮은 임금을 받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두바이로 몰려든다. 이곳에서 몇 년간 일하면 고향의 가족을 부양하고 심지어 부동산을 구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저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는 두바이를 사랑해요. 두렵지 않아요." 방글라데시 출신의 배달 스쿠터 기사 압둘 할림이 휴대폰에서 미사일 접근 경보가 울린 직후 말했다. 그는 가족을 UAE로 데려올 수 있도록 매니저로 승진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바이에서는 아무것도 쉽지 않아요." 여기에서 번 돈을 우간다에 있는 자녀와 부모를 부양하기 위해 쓰는 호스티스 카투샤베가 말했다. "하지만 모든 걸 걸면 여기서 당신의 삶을 바꿀 수 있죠."

UAE는 최근 몇 년간 새로운 주민과 사업체를 유치하기 위해 법을 대대적으로 변경했다. 노동착취를 근절하는 걸 목표로 하는 노동법을 통과시켰고 대부분의 외국인 거주자들을 고용주에게 얽매이게 했던 비자 규정을 자유화했다. 또한 전문직—또는 아파트를 구매하는 모든 사람—이 특정 직업에 얽매이지 않는 갱신 가능한 10년 거주 허가인 '골든 비자'를 취득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UAE에는 개인 소득세가 없는데 이는 이곳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종종 본국에서 원망을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UAE에는 외국인을 위한 사회안전망 또한 없다. 만약 일하지 않으면 스스로 해결해야 하며, 골든 비자가 없는 한 머무를 수 없다.
외국인은 또한 점점 더 많은 산업과 분야에서 소유권 100%를 가진 회사를 설립할 수 있으며 인공지능에서 금융 컨설팅, 인테리어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기업가 계층을 창출하고 있다.
"UAE는 이 사람들이 뿌리를 내리고 국가의 성공에 이해관계를 갖도록 만드는 데 매우 영리했어요. 만약 2010년이나 2015년이었다면 자신의 사업체나 집, 아파트를 소유하지 않은 일부 사람들에게서는 매우 다른 반응이 나왔을 거예요." UAE 작가이자 지식인인 술탄 수드 알카세미가 말했다. "이젠 제가 아는 거의 모든 사람이 나라를 떠날 생각이 없어요. 그들은 이곳이 장기적으로 자신의 집이라고 느껴요. 그리고 우리에게 최고의 애정 표현은—가능하다면—이 사람들이 이곳에 계속 머무는 것이죠."
물론 UAE는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이곳은 7개 에미리트 연합국으로, 가장 강력하고 석유가 풍부한 아부다비의 세습 통치자가 대통령을, 가장 인구가 많은 두바이의 통치자가 총리를 맡는다. 새로 온 사람들에게 시민권은 거의 부여되지 않으며 선거도 없다. UAE의 몇몇 외교적 문제, 특히 수단 내전과의 연루는 해외에서 광범위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또한 이곳은 일이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처리되며 중동의 많은 지역과 달리 뇌물을 줄 필요가 없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두바이는 이미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회복력을 보여주었다. 이곳에서는 식량과 필수품 부족이 전혀 없었고 봉쇄는 짧았으며 주민들은 세계 다른 지역보다 더 빨리 백신을 접종받았다. 두바이의 경제—그리고 부동산 가격—는 이후 빠르게 회복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란의 공격 위협이 영구화되지 않는다면 이번에도 두바이는 회복할 것으로 기대한다.
"안전이라는 우산이 위태롭게 느껴질 때마다 긴장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정상적이고 지극히 이해할 만한 일이에요. 하지만 코로나 때와 마찬가지로, UAE 사람들은 정부가 그들의 안전과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리라는 걸 매우 잘 알고 있어요." 전쟁 발발 직후 UAE로 복귀한 유세프 알 오타이바 국무장관 겸 주미 대사가 말했다. "코로나 때처럼, 우리는 이 위기를 극복하고 더욱 강해질 겁니다."
야로슬라프 트로피모프는 월스트리트저널의 수석 외교 전문기자다. 2024년 내셔널 프레스 클럽 정치 분석 부문 상을 수상했으며, 2023년에는 우크라이나 전쟁 보도로, 2022년에는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장악 보도로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파이낸셜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자난 가네시는 지적으로 흥미로운 사람들을 빠르게 발견하는 자신만의 방법 중 하나로 '두바이 테스트'를 소개합니다. 두바이에 대한 생각을 물었을 때 그곳을 단순히 평가절하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걸러도 된다는 겁니다. 많은 이들이 '천박한 자본주의 도시'로 무시하는 두바이에 무엇이 있길래 이런 '두바이 테스트'까지 있는 걸까요? 월스트리트저널의 3월 6일자 기사가 그 단초를 제공합니다.
정치를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라 정의한다면, 인류 역사상 그 체제는 무척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군주제, 귀족정, 혹은 다수결에 의한 민주주의 등이 그 예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영·프 근대 시민혁명 이후 민주주의 체제가 정치·경제 등 모든 분야를 주도하고 있으나, 긴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군주제가 주류였던 시기가 훨씬 길었습니다.
7개 토후국이 연합한 아랍에미리트(UAE), 특히 최대 도시 두바이의 부상과 그들이 지닌 세계적 영향력 역시 이러한 체제의 다양성 측면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두바이는 거주민의 절대다수가 장기 체류 비자나 영주권을 지닌 외국인이며, 순수 국민(citizen)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보편적인 민주국가의 시각에서는 다소 낯선 정치·사회 시스템이지만,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역사적 구조에 비추어 보면 그 작동 원리를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고대 아테네는 사회 계급을 시민, 외국인, 노예로 엄격히 구분했습니다. 소수의 특권층인 '시민'은 참정권을 누리는 대신 국방의 의무를 전담하며 국가 운영에만 매진했습니다. 반면 상공업을 통해 부를 창출하는 역할은 외국인들의 몫이었습니다. 이들은 병역을 면제받는 대신 막대한 세금을 납부하여 아테네의 재정과 외교, 전쟁의 물적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밑바탕에는 가사와 육체노동을 담당하는 노예 계층이 존재했습니다.
작금의 두바이와 UAE의 국가 운영 방식도 이와 유사합니다. 소수의 자국민은 국가를 위한 권리와 의무를 배타적으로 행사하며, 전 세계의 자본과 인재들은 경제적 이익을 좇아 두바이로 몰려듭니다. UAE는 이처럼 독특한 시스템을 바탕으로 자국 인구 규모를 훌쩍 뛰어넘는 막강한 국제적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군사력은 물론, 축적된 국부펀드를 무기로 중동 각국의 지정학적 질서에 깊숙이 개입합니다. 일례로 리비아가 동서로 분열되어 장기 내전을 치르는 배경에도 UAE와 카타르 간의 치열한 지역 패권 경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두바이의 생존 및 발전 모델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획일화된 체제를 넘어 우리의 정치·행정적 상상력을 확장하는 훌륭한 연구 대상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