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성공의 비결은 '교육' 아닌 '자본'이었다

/그래픽=PADO(생성AI 사용)

이 글은 혁신의 역사를 구독자 기반으로 섭스택에서 집필하고 있는 앤턴 호위스의 3월 25일자 에세이인데, 아담 스미스, 데이비드 흄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동력이 교육이 아니라 금융상의 혁신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스코틀랜드의 은행들이 잉글랜드보다 많았고 혁신적이어서 상공인들이 담보가 아니라 신용만으로 자금을 얻기 쉬웠다고 합니다. 우리가 현금인출이라고 부르는 제도도 스코틀랜드가 먼저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자본확보의 이점에서 스코틀랜드는 특히 북미 버지니아의 담배 수입에서 무역 거점이 될 수 있었고, 다른 여러 부분에서도 힘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적인 성과들이 스코틀랜드에서 이뤄졌습니다. 이 모든 것의 시발점은 금융적 혁신이었다고 합니다. 기사를 읽으면서 한국 금융의 경쟁력은 어떤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스코틀랜드는 한때 국력에 비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인구가 이웃인 잉글랜드의 4분의1에도 못 미쳤음에도, 그리고 헨리 8세가 여러 차례 정복을 시도했음에도, 승리를 거둔 쪽은 이 작은 국가였다. 이후 영국 군주들의 혈관에는 강압적인 헨리의 피가 아니라 교활하고 인내심 강한 제임스 6세의 피가 흐르게 되었다.


제임스가 두 나라를 모두 통치하게 되자—정확히 423년 전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통합된 브리튼섬과 곧 정복하게 될 제국이 제공하는 기회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훨씬 수가 적은 스코틀랜드인들이었다. 존 레이와 조지 심슨, 토머스 심슨은 마침내 북서항로를 찾아냈다. 한때 어린 시절 면직물 공장에서 일했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나일강의 발원지를 추적했고, 결국 그의 심장은 아프리카에 묻히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글래스고 출신의 존 A 맥도널드는 독립 캐나다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탐험과 행정에서의 기회 포착을 넘어, 작은 스코틀랜드가 가장 두드러졌던 점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사상의 산실로서의 독창성이었다. 해부학, 동물학, 식물학, 경제학, 전자기학, 기계공학, 의학, 통신 등 수많은 분야에서 스코틀랜드의 영향력은 유난히 컸다.


토목공학이라는 단일 분야만 보더라도 그렇다. 존 라우던 맥아담은 도로 건설 방식을 혁신했고, 토머스 텔퍼드는 주철 수로교를 이용해 강을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했다. 로버트 스티븐슨은 등대와 그 조명 장치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해안 안전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존 레니와 윌리엄 페어베언 등 수많은 인물들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왜 이토록 많은 분야의 역사에서 스코틀랜드인들이 과도할 정도로 많이 등장했을까?


1560년대 칼뱅주의의 부상과 이후 세금으로 운영되는 전국적 학교 체제의 구축 덕분에 스코틀랜드인의 문해력이 유난히 높았다는 설명이 흔히 제시된다. 더 나은 교육 덕분에 스코틀랜드인들이 더 많은 기회를 추구할 수 있었다는 논리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의 고결한 의도가 자동으로 성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고, 18세기 남성 문해율은 그러한 체계적 교육 제도가 없었던 잉글랜드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여성의 경우 훨씬 더 낮았다. 스코틀랜드의 문해율이 눈에 띄게 더 높아진 것은 이미 상당 기간 체급 이상의 성과를 내고 난 이후인 187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그때조차도 격차는 크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남성의 문해율은 90%, 잉글랜드는 80%였다.


19세기에 이르면 스코틀랜드 학생의 3분의1도 채 되지 않는 비율만이 세금으로 운영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대다수는 사립 유료 학교에 다녔다. 스코틀랜드의 성공에서 문해력 확산이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스코틀랜드인들이 이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경제적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8세기 후반에 들어 스코틀랜드인들은 점점 교육비를 지불할 여력이 생겼고, 그 결과 문해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들이 체급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새롭게 형성된 부의 증가 때문이었다.

스코틀랜드의 경제적 기적

그러한 부는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17세기의 시점에서 보면 오히려 놀라운 일이었다. 1740년대 이전의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보다 훨씬 가난했다. 경제는 압도적으로 농업 중심이었고, 풍년에는 곡물과 함께 어류, 가죽, 모직, 가축, 석탄, 켈프, 소금을 수출할 수 있었지만, 많은 주민은 생존의 경계선에서 겨우 살아갔다. 스코틀랜드는 브리튼섬에서 기근을 가장 늦게 극복한 지역이었고, 실업은 빈번했으며, 화폐 부족으로 인해 물물교환을 하거나 현물로 임금 및 지대를 지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회는 극도로 불평등해 소수의 귀족이 거의 모든 토지를 소유했고, 대다수 주민은 안정적 임대 계약도 없이 토지를 경작하며 언제든 축출되거나 임대료 인상에 직면했다.


사람들이 의존하던 상품 시장은 취약하고 규모도 작아, 그 사이를 메울 장인·상인·도시 전문직으로 구성된 중산층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1580년 한 영국 첩보원의 보고에 따르면 상인과 장인은 "수출이 미미해 가난하고 수가 적었으며", 제조업자들은 "주민이 가난하고 검소하게 살아 식생활과 의복에 다양성이 없어 상업거래가 제한적이었다". 농민들은 거의 생계 수준의 농노로, "자신들의 노동에서 나온 거의 모든 산물을 영주에게 바치고, 연말에는 겨우 생존할 만큼만 남겼다". 1707년 (잉글랜드와의) 연합 이후에도 잉글랜드와 제국으로의 자유로운 수출 기회가 생겼음에도 경제 격차는 여전히 컸고, 런던이라는 중심지가 스코틀랜드 지주의 거주와 소비를 끌어들여 자본이 국내에 재투자되지 못하고 빠져나갈 가능성도 컸다.


그러나 1740년대에 이르러 극적인 변화의 첫 징후가 나타났다. 글래스고는 오래전부터 버지니아산 담배 수입에서 일정한 몫을 차지해왔으나, 갑작스럽고 빠르게 이 무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1738년 10%에 불과했던 점유율은 20년 만에 거대한 런던을 넘어섰고, 1769년에는 다른 모든 영국 항구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동시에 담배 수입량 자체도 계속 증가했다. 당시 관측에 따르면 클라이드강의 선박 톤수는 10배 이상 증가했다. 에든버러에서는 상점들이 사치품으로 가득 찼고, 대학은 의학과 화학 분야의 중심지로 부상해 북서유럽 전역에서 학생들을 끌어들였으며, 도시 역시 뉴타운 건설을 통해 우아하게 확장되었다.


던디, 페이즐리, 퍼스 같은 다른 도시들도 아마포, 이후에는 면직물 제조로 번영을 누렸다. 1750년 이후 한 세기 동안 스코틀랜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도시화된 지역이 되었고, 곧 남성 노동력의 산업 종사 비율이 잉글랜드를 넘어섰다. 1820년대 영국 생산의 약 10%를 차지하던 스코틀랜드는 1850년대에는 20% 이상으로 증가했다.


농촌 역시 급격히 변화했다. 저지대와 국경 지역, 그리고 특히 하이랜드에서 지주들은 농장을 최대한 효율적이고 수익성 있게 재편·확장하며 기존 노동자의 대부분을 배제했다. 저지대 농장은 빠른 농업 변화를 경험해온 잉글랜드인들조차 경이롭게 여길 정도였다. 1830년대 한 영국 방문객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은 거대한 "곡물과 육류 생산 공장"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겪은 많은 이들에게 — 개선이라는 이름으로 축출된 농업 노동자들이나, 스코틀랜드산 아마포를 입고 담배를 재배한 미국 플랜테이션의 노예들처럼 — 스코틀랜드의 변화는 고통스러웠고 때로는 분명히 더 나쁜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좋든 나쁘든 이 모든 변화에는 공통된 근원이 있었다. 그것은 스코틀랜드가 농업·산업·도시 혁명을 동시에, 그리고 불과 수십 년 사이에 압축적으로 이루어내게 한 요인이었다. 이는 잉글랜드가 최소 150년에 걸쳐 이룬 변화를 단기간에 달성하게 했고, 이후 더 빠른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모든 변화에는 막대한 투자 수준이 필요했으며, 이는 연합 이후에도 스코틀랜드가 자본 조달과 운용을 유리하게 만드는 독특한 법과 제도를 유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자본의 우위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경계선 남쪽에는 공인된 은행이 단 하나, 즉 잉글랜드 은행만 존재했고, 런던 밖에는 소규모 비인가 은행 조합들이 산재해 있었다. 반면 스코틀랜드에서는 1750년경 이미 에든버러에만 세 개의 공인 은행이 서로 경쟁하고 있었고, 나머지 지역의 비인가 은행들도 광범위한 지역을 포괄하는 대규모 조직으로 성장해 일부는 곧 공인 은행을 능가하게 되었다.


잉글랜드에서는 기업이 독립된 법적 실체 즉 법인(法人)이 되기 위해 왕실 인가나 특별 의회법이 필요했고, 영국 보통법에 따른 파트너십은 구성원들의 합(合)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스코틀랜드 법은 비인가 기업도 여러 중요한 측면에서 소유주들과 구별되는 법적 지위를 가질 수 있도록 했다. 파트너가 사망하거나 파산해도 기업은 존속할 수 있었고, 지분은 쉽게 거래·이전될 수 있었으며, 이익은 배당으로 소모되지 않고 재투자를 위해 보존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스코틀랜드의 비인가 은행조차 상류층과 중산층 전반에서 수십, 심지어 수백 명의 파트너를 끌어들일 수 있었던 반면, 잉글랜드의 평균은 세 명에 불과했다.


스코틀랜드 은행들은 더 많은 자본으로 출범해 더 빠르게 성장했고, 훨씬 폭넓은 투자자 기반을 활용했으며, 충격에 대한 안정성과 회복력도 훨씬 컸다. 또한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국경 남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금융 서비스를 제공했다. 지점들을 두고, 예금에 이자를 지급했으며, 토지 담보뿐 아니라 개인 신용을 바탕으로 한 단기 대출도 적극적으로 제공했다. 두 번째 공인 은행인 스코틀랜드 왕립은행은 1728년 '현금 신용(cash credit)'이라 불리는 당좌대월(초과인출) 제도를 세계 최초로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1810년대에는 장인과 노동자의 소액 예금에도 이자를 지급하는 저축은행이 스코틀랜드에서 발전했다.


또한 스코틀랜드 은행들은 소액 권종의 지폐를 대량 발행해 통화로 유통되도록 함으로써 수십 년간 지속된 화폐 부족 문제를 해소했다. 실제로 스코틀랜드 법은 각종 채무를 집행하는 절차를 잉글랜드보다 훨씬 신속하고 용이하게 만들었다. 채권자들의 신뢰가 높아지면서 대출 의지가 커졌고, 이는 상업 활동을 촉진하는 자본 공급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자본상의 우위 덕분에 글래스고 상인들은 잉글랜드 항구의 경쟁자들보다 더 많이 차입하고 더 많이 투자할 수 있었으며, 화이트헤이븐, 리버풀, 심지어 런던까지 제치고 부상할 수 있었다. 이들은 더 큰 선박에 투자해 규모의 경제를 활용할 수 있었고, 버지니아에 자체 창고를 건설해 선박 도착 이전에 담배를 선매할 수도 있었다. 또한 유럽 상품을 매우 낮은 가격과 관대한 신용 조건으로 담배 재배자들에게 판매할 수 있었으며, 때로는 수확 이전의 담배 확보를 위해 현금 대출까지 제공했다.


미국 독립전쟁 동안 버지니아의 담배 재배자들이 일제히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지고 창고가 몰수되었을 때에도, 글래스고 상인들은 충분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손실을 대부분 감내하고 카리브해의 설탕과 면화 무역으로 곧바로 전환해 다시 지배적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이들은 경쟁자들보다 더 많은 자금을 대출함으로써 무역을 장악했고, 재배자들이 수확 이전에 토지를 개간하고 노예를 구매할 수 있도록 자본을 제공함으로써 버지니아와 카리브해 플랜테이션의 급속한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 흔히 노예제와 식민주의가 글래스고의 성장을 뒷받침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에 가까웠다. 대서양 경제의 전성기는 스코틀랜드인의 자금에 기반해 구축된 것이었다.


스코틀랜드의 자체 수출, 특히 아마포(린넨)와 이후 면직물 역시 이러한 자본 동원 능력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 18세기 초 스코틀랜드 아마 산업은 독일, 네덜란드, 아일랜드와 치열한 경쟁에 직면했으며, 자체적으로 아마를 거의 생산하지 못해 발트해에서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그러나 1740년대 영국 의회가 아마 수출 보조금을 도입하자, 에든버러 상인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1746년 브리티시 린넨 컴퍼니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설립 초기부터 막대한 규모의 자본을 조달했으며, 그 대부분은 스코틀랜드 내부에서 출자되어 곧바로 영국에서 가장 자본이 풍부한 기업 중 하나가 되었다. 여기에 당좌대월(초과인출)을 활용한 단기 자금 조달과 약속어음 발행을 통한 차입이 더해졌고, 대출자에는 교구와 병원까지 포함되었다.


비록 제조업체로 출발했지만, 브리티시 린넨 컴퍼니는 곧 마케팅과 신용 제공에서의 경쟁력이 핵심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극도로 낮은 이윤율 속에서도 런던까지의 운송 비용을 자체 부담하며 해외 시장을 개척했다. 무엇보다 이 회사는 아마 제조업자들에게 신용을 제공함으로써 산업 전체의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전성기에도 이 회사가 직접 생산한 아마는 전체의 10%를 넘지 않았지만, 신용 공급을 통해 산업 전반을 확대시켰다. 결국 1770년대에는 이러한 강점에 집중하기 위해 완전한 은행으로 전환했다.


글래스고 상인의 신용이 미국과 카리브해의 플랜테이션 확장을 가능하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브리티시 린넨 컴퍼니의 신용은 표백장 건설과 생산 전 과정의 자금 조달을 가능하게 했다. 이 신용은 제조업자들이 수입 아마를 구입해 농촌의 방적 여성들에게 전달하고, 그들이 생산한 실에 대금을 지급하며, 다시 직공들에게 직물 생산 비용을 지불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모든 과정이 실제 판매 이전에 이루어졌다.


이와 유사하게 스코틀랜드는 공장, 광산, 제철소, 농장 등 다양한 산업과 인프라 — 항구, 교량, 운하, 이후 철도, 도시 상수도, 도로 포장, 병원, 공공 건물 — 건설에 필요한 자본을 조직했다. 새로운 산업이 등장할 때마다 스코틀랜드 자본은 이를 대규모로 추진할 수 있게 했다. 전직 직공이자 표백공이었던 찰스 테넌트가 설립한 글래스고의 세인트 롤록스 화학 공장은 1830~40년대 세계 최대의 중화학 공장으로 평가되었다.


더 근본적으로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 스코틀랜드의 독특한 금융 시스템이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개인도 자신의 신용과 보증인에 기반해 자금을 차입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는 평판과 기술, 역량만으로 자본을 조달할 수 있게 했음을 의미한다. 스코틀랜드는 야망 있는 인물이나 새로운 발명을 구상한 장인에게 자본을 제공하는 데 특히 유리한 환경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850년대 새뮤얼 스마일즈에 의해 '자조(自助, self-help)'라는 문학 장르가 탄생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스코틀랜드 금융 시스템의 장점이 점차 분명해지자, 다른 지역 — 특히 잉글랜드 — 에서는 이를 부러워하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금융 시스템의 핵심 요소는 1820년대 입법을 통해 영국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1850년대에는 스코틀랜드의 채무 집행 제도까지 영국 전역에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그 입법화에는 실패했다. 그 결과 스코틀랜드는 자본 동원 능력에서의 우위를 상당 부분 잃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았다. 스코틀랜드는 지금도 여전히 다를 수 있는 역량을 유지하고 있다. 어쩌면 다시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앤턴 호이스는 경제사학자로 영국 싱크탱크 '기업가 네트워크The Entrepreneurs Network'에서 혁신 연구 책임자로, 왕립예술학회(RSA)에서 상주 역사학자로 재직 중이다. 킹스칼리지 런던에서 정치경제학 박사를 취득하고 브라운대학교 박사후 연구원, 킹스칼리지 런던 경제사 강사를 역임했으며 왕립예술학회가 영국에 미친 영향을 다룬 'Arts and Minds'(2020)를 썼다. 현재 18세기 영국에서 혁신이 가속화되어 산업혁명으로 이어진 원인을 규명하는 저서를 집필 중이다. 위 글은 저자가 서브스택에 연재하고 있는 에세이를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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