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이를 위한 게임들'(Games for Children)이라는 키이스 윌슨(Keith S. Wilson)의 시집 제목은 무언가 가볍고—어쩌면 무해하기까지 한—분위기를 예고하지만, 이 책 자체는 단호할 정도로 감상주의와 거리를 둔다. 이 시들이 다루는 것은 놀이로서의 유년기, 곧 발명과 발견의 시간으로서의 어린 시절이 아니라, 오히려 몸이 규칙을 익히거나 (그러지 못하거나), 그 규칙을 어겼을 때의 결과를 익히거나 (그러지 못하는) 시간이다. 동의나 이해가 가능해지기 훨씬 이전부터 위험의 불균등한 측면은 이미 중요해진다. 윌슨이 그려내는 놀이는 노출에 대한 훈련, 반복에 대한 훈련, 그리고 폭력이 어떻게 습관의 형태로 몸속에 스며드는지를 배우는 훈련이다. 이것은 결코 아이들 장난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소박하게 붙여진 제목의 그늘 속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여기서 "게임들"은 은유가 아니며, 아이러니한 위장도 아니다. 그것들은 절차다. 즉, 그 대가는 불균등하게 배분되고, 그 결과는 어떤 참여자들에게 미리 알려져 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은, 규칙에 묶인 행위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이들은 순수함이 아니라 취약함의 표상이다. 초반부에서, 윌슨은 이후의 시들에 대한 조용한 지침처럼 읽히는 한 구절을 쓴다. "흔히, 잔혹함이란 외면한다는 의미이다." 비판을 하는 대신, 윌슨은 해악이 어떻게 아무 극적인 장면도 없이 지속되는가에 대한 진단을 제시한다.
형식적으로, '어린이를 위한 게임들'은 전통적으로 익숙한 서정성을 거부한다. 이 책은 시, 도표, 연표, 절차 안내, 시각적 악보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런 요소들은 선형적 전개 대신 반복과 압박, 그리고 놀라울 만큼 풍요로운 시각적 상상력을 지향한다. 특정 제목들-가장 두드러지게는 "신격화"(Apotheosis)-가 되풀이해서 등장하고, 역사적 인물들과 장면들 역시 반복된다. 에밋 틸1(Emmett Till), 트레이번 마틴2(Trayvon Martin), 콜린 캐퍼닉3(Colin Kaepernick), 그리고 이름 없는 소년들이 등장하며, 그들의 몸은 관찰과 규율, 사후적인 해명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미학적인 과시를 위해 사용된 파편화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를 수행하는 구조이다. 이 시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아직 소화되지 못한 것을 뒤에 남겨둘 수는 없다고 주장하면서 되돌아온다.
이 서로 다른 요소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은 논증이 아니라 연상이다. 윌슨의 시는 인접해 있는 것들을 통해 사유하며, 소리와 이미지, 다양한 언어의 차이가 해소되지 않은 채 서로 충돌하도록 내버려둔다. 이질적인 요소들이 어쩔 수 없이 같은 공간에 있게 될 때, 의미가 서서히 축적되는 것이다.
'어린이를 위한 게임들'이 연대기적 서술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연대기적 서술이 거짓되게도 거리감과 순차성, 진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지배하는 직관은 역사적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적 폭력은 몸들이 계속해서 통과해 가는 공간을 다시 구성한다. 여기서 역사는 들려주어야 할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하나의 "기하학"이다. 이러한 논리는 「사건의 각도들」("Angles of Incidence")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이 작품은 서사적 전개를 공간적 왜곡으로 대체하며 독자에게 인과성이 아니라 곡률의 관점에서 사유하라고 요청한다.
보라
몸은 출몰하는 장소이며 비유클리드적이고
평행한 길들은 만난다
저 아래 블록마다 자라는 나무인가
너에게 그것은 달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조깅하는 사람
어떤 깨달음
여기서 의미는 설명이 아니라 인접성을 통해 나타난다. 언어는 마치 하나의 도식처럼 작동한다. 인과관계가 명시되지 않을 때조차도, 파편들은 불가피하게 충돌하는 것처럼 배열된다. 비유클리드 공간에서는 평행선이 끝내 평행하게 남지 않는다. 그것들은 휘어지고, 수렴하며, 서로 교차한다. 윌슨의 시는 미국의 역사가 마찬가지로 뒤틀린 물리학에 따라 움직인다고 주장한다. 분리되어 있어야 할 사건들—과거와 현재, 순수와 죄의 상태, 이동의 행위와 처벌의 행위—가 아무런 경고 없이 서로 겹치면서 붕괴한다. 우연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곡률임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적 논리는 단지 주제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이 책이 움직이는 구조가 된다. '어린이를 위한 게임들' 전반에 걸쳐 윌슨의 시각적 형식들은 서정성의 동력 역할을 하며, 사유 그 자체를 비선형적 운동으로 다룬다. 문장들은 벡터가 되고, 역사들은 교차하며, 도덕적 힘들은 둥근 활 모양이나 각진 형태로 나타난다. 도표는 서사적인 결말로부터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과정으로 관심을 옮겨 놓는다. 그 결과 드러나는 것은 권력과 감정이 어떻게 순환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기록이다.
중요한 것은, 이 시들이 내면성을 억누른다는 점이다. 해석해야 할 동기도 없고, 풀어야 할 오해도 없다. 몸들은 접촉이 일어나는 표면으로 등장할 뿐이며—이미 측정과 추론, 사후적인 판단의 대상이 되어 있다. 폭력에는 종종 아무 의도도 필요하지 않다. 폭력은 충돌 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체계만을 요구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의도했는가가 아니라, 어디에 서 있었는가, 어떻게 움직였는가, 그리고 그 움직임이 어떻게 읽혔는가이다.
유리는 이 책에서 시사적인 물질로 등장한다. "나는 새와 유리의 관계를 안다. / 목구멍에 피가 걸려 붙는다." 유리는 투명함을 약속하면서도 분리를 강제하며, 몸들이 서로 마주치지 않은 채 보이도록 만든다. 「소네트(갈색)」("Sonnet(Brown)")에서 윌슨은 전적으로 이 경계 위에서 전개되는 인종화된 자기 감시의 장면을 연출한다.
나는 열세 살. 젖은 모래의 색을 한
유색인이다. 무하마드라고, 그들이 놀린다. 나는
쉿 하면서 부르는 다른 이름들이다. 집에서는, 페드로고,
아버지가 나를 (주니어라서) 준 버그*라 부르면 나는
대답한다. 내 옷들은 밧줄처럼 축 늘어져 걸려 있다.
*준 버그: '6월의 벌레'라는 의미를 지닌 초록색 칵테일로 멜론, 파인애플, 레몬의 맛이 어우러진 음료.
이 시의 첫머리에 나오는 진술들은 단순한 은유적 수사가 아니라 모두 몸으로 체득된 지식이다. 새들이 유리에 부딪히는 것은 유리가 열린 공간을 흉내 내기 때문이다. 위험은 바로 유리가 통과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이어지는 것은 신체적 적응 방식의 목록이다. 보지 않은 채 면도하기, 말을 삼키기, 호흡을 조절하기. 유창함조차 의심의 대상이 된다. 화자는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 말 자체가 통제되고, 최소화되며, 안으로 감추어져야 한다. 몸은 선제적으로 자신을 감시하는 법을 배운다.
마찬가지로 두드러지는 것은 노골적인 위협의 부재이다. 단 하나의 폭력 행위도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이 시는 몸이 감시를 내면화하고, 자신이 어떻게 읽힐지를 미리 예상하는 방법을 어떻게 배워 나가는지 기록한다. 유리는 직접 상처를 입히기보다는 회피를 가르친다. '어린이를 위한 게임들' 전반에서 훈육은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조용하게, 반복적으로, 어떤 극적 장면도 없이 말이다. 무릎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배운다. 숨은 언제 계속 쉬어도 되는지를 배운다. 손은 무엇을 만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접촉이 나중에 어떻게 해석될지를 배운다. 이 장치는 자신을 폭력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일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몸이 일찍부터 훈육되는 것은, 몸이 시민으로서의 삶을 위해—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준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윌슨이 "게임들"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향수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며 반어적이지도 않다. 게임은 규칙을 배우고, 경계를 시험하며, 상실을 정상화하는 과정이다. 게임은 실제 삶을 위한 리허설이다. 그 결과는 본래 상징적인 차원에 머물러야 한다. 윌슨의 핵심 통찰 중 하나는, 얼마나 자주 그 결과가 거기에 머물지 않는가에 있다.
되풀이되는 한 구절에서, 유년기의 놀이들은 국가적 의례와 제도화된 폭력으로 아무런 경계 없이 스며든다.
애국의 노래들—"성조기여 영원하라", "NFL 테마곡"—은
국가적인 동요다.
폭죽을 가리키는 다른 말은 "경례"(salute)인데, 이 말은
터지도록 만들어진 어떤 폭발 장치든 가리킬 수 있다. […]
핫 포테이토 놀이*는 감자, 폭탄,
콩주머니를 모두 같은 무게인 것처럼 다룬다.
어떤 겁쟁이라도 라이터는 들 수 있다. 하지만 M-80을 쥐어 본 적이 있는가? 준비,
그가 말한다, 출발, 그가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달려 나간다.
*핫 포테이토 놀이: 게임 참가자들이 손을 잡고 음악이 계속되는 동안 어떤 물체("핫 포테이토")를 전달하다가 음악이 끝날 때 그 물체를 쥐고 있는 사람이 게임에서 제외되기를 반복하여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이 승리하는 게임.
'어린이를 위한 게임들'은 순수함과 위험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러한 게임들을 만들어내는 문화 자체가 그런 구분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애국심, 오락, 그리고 폭력은 동일한 문법—반복, 리듬, 주고받기—로 학습된다. "핫 포테이토"는 장난감과 무기 사이의 거리를 무너뜨리고, "경례(salute)"는 축하와 폭발을 동시에 가리킨다. 아이들은 놀이와 재앙의 차이가 단지 타이밍의 문제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배운다.
여기에는 세뇌에 기반한 시민성의 이론이 제시되어 있다. 참여한다는 것은 규칙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지만 그 규칙이 아무런 보호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일이다. 달리기, 무릎 꿇기, 무언가를 쥐기와 같은 동일한 행위들은 누가 그것을 수행하는지, 그리고 누가 그것을 지켜보는지에 따라 장려되기도, 찬사를 받기도, 아니면 처벌되기도 한다. 관람은 게임에 부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결과를 결정하는 핵심이다. 의미를 사후적으로 부여하는 것은 중립성의 모습을 띨 뿐 실천하지는 않는 제도들이다.
형식적으로 이처럼 어려운 '어린이를 위한 게임들' 같은 책은 일부러 난해하게 쓴 작품으로 읽힐 위험이 있으며, 난해한 반복은 의도된 것이 아니라 과잉된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윌슨은 독자가 이제 능숙해졌다면서 안도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어느 시가 표현하듯, "우리가 말하는 이야기는 / 끝나야 할 때보다 더 일찍 끝난다." 이 시들은 그러한 성급한 종결을 끈질기게 거부한다. '어린이를 위한 게임들'은 카타르시스도 도덕적인 고양도 제공하지 않는다. 절제된 어조조차 해악을 미학적으로 만들거나 노출과 구원을 동일시하는 데 대한 저항이다. 서정적 강도가 고조되는 순간들 역시 자기 절제로 누그러지며, 구경거리가 되어 버릴 지점에서 물러선다.
당신이 일어나고 있다고 여겼던
그 어떤 경이로움도, 당신이 보았듯이, 실은 당신의 심장,
혹은 상상, 혹은 그 둘 사이의 작은 차이에 불과했다.
이 시들은 그 용기나 엄격함에 대해 찬사를 받고자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시들은 견뎌냄을 요구한다. 윌슨은 내면적인 삶을 일정한 거리에다 붙잡아 둔다. 몸들은 행위의 대상이 되고, 배치되며, 훈육되고, 또 읽히지만, 내부로부터 열리는 경우는 드물다. 이러한 엄격함은 때때로 정서가 느껴지는 폭을 좁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책의 윤리적 결단을 보여 준다. 내면을 너무 쉽게 열어 보이는 것은, 절차가 지속시키는 것을 이해하기만 하면 해결될 수 있다는 잘못된 암시로 이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윌슨은 목격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묘사하는 조건들이 변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며, 폭력에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폭력이 줄어들 것이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이 시들은 이해를 지향하기보다는, 해결하고자 하는 욕망을 인식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린이를 위한 게임들'을 읽는 일은 우리가 이미 살아가고 있는 삶을 위한 하나의 시각적 리허설이다—종결 없이 관심을 지속하는 훈련이다. 윌슨의 시들은 해독되거나, 숙달되거나, 아니면 구원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들은 우리를 불러내서 이미 규칙이 작동하고 있는 자리에 머물도록, 그리고 누군가 "게임 시작"을 외치기 이전에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것이 학습되는지를 알아차리도록 해 준다.
제프리 레바인은 투펄로 프레스Tupelo Press의 설립자·예술 감독·발행인으로 서던 휴머니티즈 리뷰Southern Humanities Review, 노스 아메리칸 리뷰North American Review, 투펄로 쿼터리Tupelo Quarterly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정기적으로 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