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 업계 종사자들의 우울

/그래픽=PADO(생성AI 사용)

노에마 매거진의 8월 6일자 에세이는 AI 등장과 함께 심해지고 있는 테크 업계 사람들의 '우울'을 담담하게 스케치합니다. 이 글에서 가장 주목하는 것은 일터에서 지식노동자들이 서로 교류하는 모습이 AI의 등장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체적인 것을 만지고 만들어내기 보다는 추상을 다루고 추상을 생산해내는 지식노동은 안 그래도 우울해질 가능성이 높은 직종인데 AI의 등장으로 사람과 사람의 교류가 더욱 차단되고 AI만 상대해가며 추상을 빠르게 대량으로 생산해낼 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업무 외로 뜨개질을 하는 등 취미활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에세이를 보면 이는 단지 AI 등장의 결과일수도 있지만, 좀 더 넓게는 공사를 막론하고 확대되고 있는 현대사회의 '관료제 확대'의 경향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큰 그림 전체를 볼 수도 없이 주어진 작은 일들을 하나의 부품처럼 해나가는 관료적 삶이 AI로 더욱 증폭되었다고 보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어느날 아침 출근길에 나는 열차에서 테이블을 공유하는 어색한 4인승 좌석에 앉았다. 맞은편에는 전형적인 직장인이 앉아 있었다. 30대 초반, 면바지에 드레스 셔츠, 때 묻은 하얀 스니커즈, 조금 헝클어진 머리에 귀에는 에어팟을 꽂고 맥북 화면의 불빛에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30분이 넘도록 나는 그 젊은 남자의 전화 통화를 들었다. 그는 듣기 괴로울 만큼 단조로운 말투로 EBITDA, 마진 확대 가능성, 비용 구조, ARR 따위를 시시콜콜 설명했다. 열차의 브레이크가 끼익 소리를 내며 종착역 도착을 알릴 때까지 그는 끝없이 말을 이어갔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내리려고 부산스레 움직이기 시작할 때, 남자는 황급히 옆에 둔 가죽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흥미롭군! 대체 뭘 꺼내려는 걸까. <아주 작은 습관의 힘>? 게리 비(Gary V)의 사진 액자? 오픈클로(OpenClaw)가 구동되는 맥 미니?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그가 꺼낸 것은 기다란 뜨개바늘 두 개였다. 바늘 사이에는 소복한 분홍털실 더미가 달려 있었다. 조카에게 줄 겨울 모자를 뜨고 있다고 그가 설명했다. 그날 아침 처음으로, 그의 눈빛에 뿌듯함과 생기가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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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모자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뭔가를 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요즘 주변의 지식노동자 동료들에게서 이런 말을 점점 더 자주 듣는다. 도예나 그림, 코바늘뜨기 같은, 옛날식 아날로그 취미를 시작하고 싶다는 사람들이다. 카페에서, 불빛이 희미한 바(bar)의 구석에서, 전문직 종사자들이 모여 앉아 "사라져 버리고 싶다", "어디 시골 농장에 가서 살고 싶다", "세상과의 연결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서로 털어놓는다. 그저 허황된 공상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려는 탈출의 비전이며, 그것을 나누는 목소리에는 깊숙이 깔린 실존적 불안, 즉 일과 출세 지향적 삶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배어난다. 이 회의는 갈수록 많은 이들이 겪는 것으로 보이는 한 가지 경험에서 기인한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자신이 실존의 벼랑 끝에 서 있고, 그와 함께 불현듯 지식 노동이 무의미하다는 생각, 아니 어쩌면 그것은 애초부터 줄곧 무의미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엄습하는 경험이다.


당신도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을지 모른다.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우울감의 물결이 차오르며 이케아 사무용 의자에 앉은 당신을 집어삼킬 듯 서서히 위협하는 느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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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각성, 환멸은 전염성이 있다. 한 사람이 말을 꺼내면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한다. 자신들도 느껴봤다는 것이다. 의욕이 떨어지고, 일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 같고, 자주 잠을 설치며, 미래가 불안하다는 것. 대화는 어김없이 커리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흘러간다. 우리는 대체 뭘 하고 있는가? 이 모든 일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우리가 격변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기는 과거의 격변기들과 불안의 성격 자체가 다르다. 물론, AI가 일자리를 위협하고 산업을 뒤흔들고 있다. 하지만 이전에도 지식 노동자들은 경기 침체와 아웃소싱, 신기술, 그리고 여러 유형의 자동화를 겪어왔다. 대학을 갓 졸업한 사람들은 언제나 취업 시장 진입을 걱정했고, 밀레니얼 세대의 전문직 종사자들은 직장 경력 내내 경제적 불확실성을 헤쳐 왔다. 지금이 과거와 다른 점은 이 질문들이 비단 경제적인 것을 넘어 실존적인 데 이르렀다는 점, 고소득 테크 전문 인력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내던지고 워싱턴주에서 염소 농장을 시작하거나 코스타리카에서 서핑 강사가 되는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그런 질문들이라는 점이다.


내게 의미있게 다가오는 것은, 평소라면 경제적 혼란 속에서도 가장 안전하게 보호받고, AI의 단기적 충격 정도는 무난히 넘길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 즉 고액 연봉의 경영진과 수십 년간 조직 내 경륜을 쌓아온 시니어 전문가들조차, 거의 모든 산업이 겪고 있는 이 급격한 변화 속에서 자기 커리어의 미래를 확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잘됐네, 쌤통이다'라며 고소하게 여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2010년대 지식 노동자들은 빈백(bean bag) 의자에 걸터앉아 콤부차를 홀짝이며 엑스박스 게임을 즐기면서 모두들 코딩이나 배우라고 말했었다. 그러다가, 팬데믹 시기에 최전선의 노동자들이 건강을 헤쳐가며 아마존과 우버이츠 배달을 하는 동안 그들은 집안에 앉아 재택 근무를 했다. 이제, 바로 그 지식 노동자들이 산업 전반에서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극소수의 사람만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거머쥐게 할 인공지능을 만들고 있다. 그 녀석들이 지금 와서 동정을 바란다고?


이해할 만한 반응이다. 하지만 이처럼 광범위한 지식 노동자들의 흔들림은 흥미로운 (어쩌면 두렵거나 슬프다고 할) 일련의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을 괴롭히는 이 불안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한 노동자 계층 전체가 어느 날 갑자기 커리어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된다면, 사회와 그 산업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워크이즘: 일이여, 찬미받으소서

/그래픽=PADO(생성AI 사용)

2019년 데릭 톰슨은 애틀랜틱 매거진에 '아메리칸 워크이즘'(American Workism)에 관한 글을 썼다. 그는 특히 미국의 지식 노동자들에게서, 이전 세대가 종교에서 얻었던 충족감과 공동체 의식, 삶의 의미를 점점 더 일에서 추구하는 경향이 보인다고 기술했다. 톰슨의 표현을 빌리면, 워크이즘은 "정서적인 것이며, 심지어 영적인 것이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최고 학력, 최고 소득의 미국인들이 직업을 택하는 이유는 독실한 기독교인이 일요일마다 교회를 찾는 이유와 같다. 그곳에서야말로 그들이 가장 자기 자신답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직업에서 깊은 의미를 찾았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그런 일을 천직(vocation)이라 불렀다. 그것은 하나의 소명(calling)이자 삶의 방식이었다. 단순한 일자리(job)를 넘어서, 삶의 목적이었다.


천직에서 중요한 것은 능력과 가치관, 그리고 세상에 무언가 보탬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다. 전통적으로 천직이라 불려온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사회에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치며, 흔히 돈으로는 얻을 수 없는 보람을 안겨주는 직업이었다. 교사와 간호사, 소방관, 사회복지사, 응급구조사가 그런 사람들이다. 정비공이나 배관공, 전기기사처럼 자신이 몸담은 지역사회와 고객을 직접 대하며 필요한 일을 해주는 사람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힘든 날에도, 이들 대부분은 마음 깊은 곳에서 자신의 일이 중요하며, 돈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보람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그런 일에 평생을 바치려 하지 않는다. 졸업생들 가운데 압도적 다수가 금융, 컨설팅, 테크 업계에서 직업을 구한다. 물론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하고, 들어가서도 극복해야 할 어려움이 많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복잡하고 높은 수준의 요구를 감당해야 하며, 겹겹이 얽힌 사내 정치와 관료주의를 헤쳐 나가며 온갖 아첨도 해야 한다. 장시간 노동과 과중한 인지적 부담, 고도의 전문 기술이 요구되는 데다,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끊임없는 위협이 주는 정서적 부담까지 많은 것을 견뎌야 한다. 그토록 많은 것을 요구하는 일임에도, 그 일에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는 보람을 찾기는 어렵다.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는 <불쉿 잡(Bullshit Jobs)>에서 자신의 일이 어떤 의미 있는 기능도 하지 않는다고 인정한 사람들의 사례를 수집했다. 결코 시작되지 않을 프로젝트를 위해 만드는 프레젠테이션 자료들. 아무도 요구한 적 없는 소프트웨어 기능의 사소한 세부 사항을 두고 벌이는 치열한 논쟁. 돈이 한 부자에게서 다른 부자에게 옮겨가도록 돕는 행정 절차를 놓고 고민하고 씨름하는 일.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서비스를 위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광고의 문구를 공들여 다듬는 일. 레스팅 앤 베스팅(resting and vesting) 즉, 엔지니어나 그 밖의 고액 연봉자들이 그저 주식 보상에 대한 권리가 확정될 때를 퇴사하지 않고 기다리는 일, 또 개발자들이 승진 심사를 앞두고 실제로 좋은 것 대신 좋아 보이는 것을 택하는 승진용 개발.


이런 커리어에서 이타적 가치를 찾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일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버틸 수 있을까?


바로 여기에 워크이즘의 미(美)가 있다. 그것은 소명이 채워주었을 영혼의 구멍으로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도록 만들어진 장치다. 비즈니스 캐주얼 차림으로 출퇴근하는 지식 노동자들의 아편이다. 그리고 그것은 효과가 있다. 그것은 유능한 사람들을 날마다 사무실에 나와, 보고서와 전략 문서와 리브랜딩을 두고 마치 소아 심장 수술만큼이나 심각하게 논쟁하게 만든다.


하지만 워크이즘은 약점이 있다. 그것은 종교처럼 논리에 대한 신념의 승리에 의존한다. 그렇다면 신념을 뒤흔드는 무언가가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워크이즘의 마법을 깨뜨리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난다면? 일종의 계몽이 일어나 지식 노동자들이 그들의 조직과 자기 자신을 향해 불편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지식 노동자들이 워크이즘의 마법에서 깨어났지만, 생계를 유지할 현실적인 대안이 없다면, 그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어쩌면, AI 덕분에 그 답을 찾는 즐거움을 누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워크이즘의 거품을 터뜨리다

지식 노동은 본질적으로 늘 추상적이었다. 이런 직무들은 상당수가, 특히 규모가 큰 조직일수록, 열면 안에서 계속 더 작은 인형이 나오는 러시아 전통 인형 같은 구조를 하고 있다. 한 역할이 다른 역할을 지원하기 위해 존재하고, 그 역할은 또 다른 역할을 지원한다. 그렇게 겹겹이 쌓이다 보면, 정작 일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분명치 않게 된다. 그러니 배관공이나 목수, 일선 식당 조리사의 눈에는 이런 성격의 일이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표현대로 "개똥(bullshit)"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최근까지 지식 노동에 한 가지 구원의 여지가 있었다면 그것은 여전히 인간이 그 일을 수행한다는 사실이었다. 아직은 우리가 필요했다. 어려운 과제를 붙들고 앉아 해결책을 찾아가고,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고, 고객에게 보낼 답변을 작성하고, 전략을 세운 것은 피와 살을 가진 인간들이었다. 설령 그 일 자체가 삶에 의미를 주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 안에는 인간의 사유와 협업, 창의성이 부어졌고, 그것이 일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제는 AI 에이전트가 점차 지식 노동자들이 하던 업무를 상당 부분 대신 수행한다. 나를 포함해 이런 도구를 조직에 통합하는 일을 책임지는 사람들은 흔히 미래의 업무 형태를 모든 인간이 사실상 AI 에이전트 군단을 관리하는 관리자가 되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얼핏 들으면 꽤 근사하다. 소프트웨어에게 보고서를 취합하고, 데이터를 찾아내고, 프레젠테이션 자료의 서식을 정리하고, 문서화 초안을 작성하며, 예전 같으면 조용히 오후 시간을 잡아먹던 수십 가지의 사소하고 반복적인 작업들을 처리하도록 맡기면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일을 해내라는 상사의 압박 속에서, 직원들이 AI 에이전트에게 단순한 잡무를 훨씬 넘어서는 일까지 맡기는 경우가 많다. 사업 전략을 통째로 구상하고, 마케팅 캠페인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내며, 웹사이트 전체를 구축하고, 조직의 한 사업부를 아우르는 전략의 초안까지 작성하게 한다.


이제 이메일 한 통에서 기업 전체의 전략에 이르기까지, 개인과 팀, 조직의 결과물이 점점 더 AI에 의해 순식간에 생성되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혹시 이런 힘, 즉 한 단계 더 높아진 추상화는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을 자기 일로부터 너무 멀어지게 만드는 것일까? 설령 최종 결과물이 애초에 큰 의미를 주지 못했다 하더라도, 거의 모든 일을 다른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게 대신 수행하게 하는 것은…뭔가 좀...문제가 있는 것일까?

드보르의 스펙터클: 더 이상 이렇게 하고 싶지 않다.

/그래픽=PADO(생성AI 사용)


"현대적 생산 조건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모든 삶은 스펙타클의 거대한 축적물로 나타난다. 매개 없이 직접 경험했던 모든 것이 표상 속으로 멀어진다"


기 드보르(Guy Debord)의 <스펙터클의 사회> (The Society of the Spectacle) 첫 문단이다. 이 책을 제대로 요약해 낼 자신은 없다. 흥미진진하면서 동시에 난해한 책이다. 하지만 드보르의 논지의 핵심은 이것이다. 스펙터클은 후기 자본주의의 한 속성으로, 삶이 직접 살아지는 대신 끊임없이 무언가에 의해 매개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우리가 경험해야 할 대상과 우리 사이에는 언제나 무언가가 끼어 있다. 나는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대신 문자를 보낸다. 나는 여행하지 않는다. 대신 유튜브에서 다른 사람들이 여행하는 모습을 본다. 나는 섹스를 하지 않는다. 대신 포르노를 본다. 후기 자본주의에서는 매체가 경험을 대체한다.


워크이즘은 더 거대한 스펙터클의 축소판이다. 바쁘고, 중요하고, 남다른 지식을 갖춘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 그러한 것만큼 가치 있는 세계, 일이 실제로 영향력을 발휘하기 보다는 영향력 있어 보이기만 하면 되는 세계이다. 드보르는 '테제 12'에서 이렇게 쓴다. "스펙터클은 결코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거대하고 접근 불가능한 현실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이 전하는 유일한 메시지는 이것이다. '보이는 것은 좋은 것이며, 좋은 것은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워크이즘의 가장 설득력 있는 논거다. 이 일은 분명 중요하다. 왜냐하면, 뭐, 우리 모두 여기 있지 않은가? 출근 체크하고. 야근하고. 매주 어김없이 말이다.


이 스펙터클에 AI가 더해질 때 실존적 두려움이 느껴지는 이유는 AI가 우리가 하는 일과 일의 가치로부터 우리를 한층 더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고객 확보를 위한 제안서를 직접 만들지 않는다. AI에게 제안서를 쓰라는 지시문을 쓰고, 나중에 결과물을 확인할 뿐이다. 업계 뉴스레터를 위해 자료를 모으고 글을 쓰지 않는다. 내 AI 에이전트가 한다. 전에는 마음 깊은 곳에서 그런 일이 하찮고 만족스럽지 않게 느껴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조직들이 AI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면서, 워크이즘이라는 체계 전체가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바로 여기서 이야기가 특히 흥미로워진다. 드보르도 지각변동에 가까운 패러다임 전환을 일으킬 무언가가 등장해 인간을 이토록 일에서 멀어지게 하여, 노동계급을 뒤흔들고, 특히 지식 노동자의 경우 워크이즘과 같은 스펙터클에 균열을 내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AI가 등장하고 보니, 지난 30년 동안 우리는 삶과 일을 직접 경험하는 데서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멀어져 온 것 같다. 이제 AI는 우리를 실제 삶과 일에서 더욱 멀리 밀어내, 워크이즘의 환상을 완전히 알아볼 수 있는 지점까지 이르게 할지도 모른다.


기업들은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들은 AI를 조직 운영에 통합하고 싶어 하고, 주주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할 것이다. 단기적으로 보았을 때 잠재적 효율성 이점이 너무 커 놓치기 아깝다. 제대로만 된다면 기업과 직원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경영진이 AI에서 가장 크게 기대하는 점, 즉 공동작업을 줄이고 인력도 줄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정작 자신들이 이끄는 조직을 지탱해 온 구조를 허물어뜨릴 위험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워크이즘이라는 믿음에서 깨어나는 각성을 가져다주는 것이, 바로 워크이즘이 낳은 가장 혁명적인 산물이라면 어떨까? 그렇다면 직장생활 내내 워크이즘이라는 제단 앞에서 기도해 온 사람들에게, 그 각성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위태로워진 것: 어수선한 중간 과정의 가치

AI가 왜 유독 워크이즘의 존립을 위협하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워크이즘에 대한 믿음을 지금껏 지탱해 온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톰슨은 자신의 글에서 사람들이 지식노동에서 바라는 한 가지가 바로 공동체라고 말한다.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마음 맞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다른 이들과 협력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인간관계는 인간적인 일터를 떠받지는 토대이자, 지식노동을 구원해주는 가치다. 우리 중 누구도 지식노동이 약속하는 천국의 문에 이르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이 허구의 여정만큼은 함께 걸어갈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경영진들 사이에서 점점 더 커지는 꿈은, 직원들이 수많은 AI 에이전트와 강력한 LLM으로 무장하여, 더 이상 정보를 수집하고 아이디어를 내고 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위해 서로 협업할 필요가 없는 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그들이 그리는 미래에서 일은 배우고 탐색하는 다소 어수선한 경험에서 벗어나, 조립라인 식 생산에 가까운 무언가로 바뀐다. 드보르가 이미 1967년에 썼듯이, "농민층이 사실상 소멸하고, '서비스' 부문과 지적 전문직이 점점 더 공장식 노동조건에 편입되면서, 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객관적으로 더욱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때로 다소 어수선한 비효율은 결함이 아니라 유용한 특성일 수 있다. 최근 빌 시먼스의 팟캐스트에 출연한 작가 척 클로스터먼은 스포츠에서 기술이 하는 역할, 특히 심판 판정과 관련해 빌과 논쟁을 벌였다. 테니스를 생각해 보자. 존 매켄로가 잘못된 라인 판정 때문에 격분해 심판에게 불같이 화를 내던 시절은 끝났다. 호크아이(Hawk-Eye) 기술을 이용하면 라인 판정은 사실상 언제나 정확하다. NBA에서는 챌린지 제도가 도입되어 오심 때문에 경기의 향방이 달라지지 않도록 돕고 있다. MLB도 자동 투구 판정 기술을 도입했다. 이런 기술들은 저마다 거둔 성과에는 차이가 있지만, 지향하는 목표는 같다. 판정을 더 자주, 어쩌면 항상, 정확하게 하는 것. 누가 불평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효율적인데!


클로스터먼은 오심도 경기에서 재미를 더해주는 자연스러운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오심 때문에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스포츠사의 명장면들이 탄생하기도 했다. 스포츠는 인간이 만든 구성물이며, 선수든 심판이든 인간이 저지르는 실수가 빚어내는 어수선함은 그 구성물의 일부다. 모든 판정을 100퍼센트 정확하게 내리는 것이 객관적으로는 더 나을지 모르지만, 주관적인 경험의 측면에서는 덜 흥미롭고 덜 재미있을 수 있다. 그리고 스포츠의 목적은 무엇보다 재미다.


지식노동도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 물론 몇 시간씩 걸렸을 프로젝트를 단 몇 분 만에 원하는대로 정확히 뽑아내는 AI는 분명 멋지다. 하지만 인재를 한 직장에 붙잡아 두는 것은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드는 속도가 아니다. 직원들이 지금의 일터에 남을지 떠날지를 결정하는 압도적인 이유는 함께 일하는 동료와 상사이며, 또한 일터가 제공하는 어수선한 중간 과정이 얼마나 좋은 경험이 되는가이다. 바로 그런 요소들이 일을 즐겁고,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든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지식 노동자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결과 제일주의' 노동자들이다. 이들이 중시하는 것은 비즈니스의 성과, 경쟁에서 이기는 것, 그리고 효율성이다. 이들에게 인간의 필요와 결점, 감정은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다.


두 번째 부류는 '경험 제일주의' 관점을 가진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그 어수선하고 인간적인 중간 과정을 좋아한다. 이들은 여정을 소중히 여긴다. 조직이 좋은 성과를 내기를 바라되, 그것이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사람들과 협업하고, 토론하고,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이기를 바란다. '경험 제일주의' 사람들 중에는 직장 밖에서 예술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사진작가, 감독, 시나리오 작가, 조각가, 화가, 시인, 작가들이다. 적극적으로 자원봉사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본업으로 삼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진정 열정을 느끼는 일들을 뒤로하고 회사로 향하게 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가 주어져야 한다. 그것은 자유롭게 탐색하고 창의성을 발휘하며 문제를 해결하고, 멋진 동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직장생활의 경험이다.


연구에 따르면, 이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최고의 역량을 발휘하려면 바로 그런 환경이 필요하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테레사 아마빌 교수는 사람들이 어떤 조건에서 진정으로 창의적이고 수준 높은 성과를 내는지를 수십 년에 걸쳐 연구했다. 그녀가 제시한 '내재적 동기 원리'에 따르면, 사람들은 결과나 평가 지표 때문이 아니라 일 자체에서 오는 흥미와 도전, 즐거움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을 때 가장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일을 해낸다. 사내 정치가 팽배하고, 위험을 꺼리며, 끊임없이 성과에만 집착하는 환경은 창의성을 죽인다. 협력적이고,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움직이며, 자유로운 환경이 창의성을 북돋운다. 다시 말해, '어수선한 중간 과정'은 비효율이 아니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이 만들어지는 조건이다.


주목할 점은 이 두 부류의 업무 경험에서 어수선한 중간 과정을 제거했을 때 나타나는 영향이 비대칭적이라는 것이다. 결과를 우선시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승리다. 반면 경험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일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대기업들에서는 해고의 광풍이 일고 있다. 곳곳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있다. 경영진은 이러한 인력 감축이 AI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하곤 한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현재 AI 자동화로 인한 효율성 향상은 수십만 개의 일자리 손실을 정당화할 만한 수준에는 결코 이르지 못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채용과 해고의 물결을 겪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언제나 영입될 준비가 된 새로운 인력 집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재들이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간 AI 전환이 최고의 인재들, 특히 타고나게 경험을 우선시하는 이들로 하여금 워크이즘에 대한 믿음을 대거 잃게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기업들이 다시 인력을 충원하려 할 때, 워크이즘 스펙터클에서 벗어난 인재들이 이미 전혀 다른 삶을 선택해 버렸다면 어떻게 될까? 그들의 부업이나 개인 프로젝트가 갑자기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면? 인재들 가운데는 집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자녀를 가질 계획이 없는 사람도 많다. 그런 만큼 회사 생활에서는 얻을 수 없는 진정한 만족을 찾아 경력을 전환하기가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 쉬워졌다.


드보르라면 뭐라고 했을까? 글쎄, 그는 스펙터클을 벗어날 가능성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포스트-워크이즘: 벗어날 수 없는 것에서 벗어나기

/그래픽=PADO(생성AI 사용)


드보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렇다. "현상 유지에 안주하는 태도와 순전히 스펙터클적인 반항은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 풍요의 경제가 불만이라는 재료를 가공할 능력을 갖추는 순간, 불만 자체가 하나의 상품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느 순간이 되면 스펙터클은 우리에게 경제적 압력을 가하고, 우리는 그 압력에 부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오늘날이라면 예컨대 테크 업계의 커리어를 버리고 말 구조 농장을 시작한 이야기를 유튜브 채널과 서브스택에 올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을 상품으로 만들어 더 거대한 사회적 스펙터클에 양분을 공급하는 셈이다. 혹은 직접 회사를 창업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어느새 잠재적인 직원들을 끌어들일 만한 또 하나의 스펙터클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한 형태의 스펙터클에서 벗어나는 순간 또 다른 스펙터클에 흡수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것이 스펙터클의 논리다. 스펙터클은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들마저 다시 흡수한다.


드보르는 스펙터클에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이 이끌던 운동이 제도화되는 모습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그것을 스스로 해체하는 길을 택했고, 이후 시골에서 술에 빠져 지내다가 죽음에 이르렀다.


분명 지식노동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워크이즘의 환상에서 가장 철저하게 깨어난 사람들, 예술적 재능이나 열망이 가장 강한 사람들,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가장 절실하게 실존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그리고 경제적으로 떠날 여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선택해서든 필요에 의해서든, 지식노동의 일터에 남아 일에서 인간적인 요소가 점점 사라져가는 노동 경험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남기를 선택한 사람들, 혹은 그저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커리어 내내 실존적 고뇌에 시달릴 수 밖에 없을까?


드보르는 의도적인 실천을 통해 스펙터클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스펙터클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탈취하여 오히려 스페터클 자체를 겨누도록 뒤집는 것, 스펙터클의 지리적 질서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도시 공간을 표류하는 것, 스펙터클이 소화해 낼 수 없는 매개되지 않은 진짜 경험의 순간들을 구축하는 것이다.


일터에서라면, 문제의 답을 AI 에이전트에게 묻는 대신 동료와 통화하며 함께 고민해 보는 것일 수 있다. 혹은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좀 더 진정으로 인간적인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면서, 예전 방식대로 이리저리 헤매고 탐색하며 일을 해보는 것이다. 아니면 어떤 일만큼은 전적으로 인간의 손에 맡기는 편이 낫다고 결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애초에 일을 할 만한 가치가 있게 해주었던 요소들을 지켜내는 일이라면 어떤 행동도 좋다.


그러나 어쩌면 무엇보다 강력한 행동은 그저 워크이즘이 하나의 스펙터클이라는 사실을 계속 의식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것을 일깨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우리가 하는 일이, 큰 틀에서 보자면,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서로에게 상기시켜 줄 의무가 있다. 그것은 환영일뿐이다. 스프레드시트 하나 때문에 죽은 사람은 없다. 세상은 숨죽인 채 제품 출시를 기다리지 않는다. 마케팅 캠페인 하나가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우리가 해온 그 많은 일을 기억해 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함께 일한 이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누군가의 기억에 남을 수 있다.


우리의 본업으로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믿음이 주는 그릇된 만족감에서 벗어나고 나면, 우리는 그 빈자리를 진짜 무언가로 채우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워크이즘이 만들어 낸 인위적인 대체물이 아니라 진정한 이타심으로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에서, 실제 사람들의 삶에 실제적인 변화를 이루어내면서.


설령 그것이 한 번에 털모자 하나를 뜨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애런 호워스는 크리에이티브 테크 기업의 인공지능(AI) 운영 책임자로, 사람과 기업 모두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AI를 도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