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7 13:53
"세잔이 옳다면, 나 또한 옳다." 마티스는 자신의 예술적 방향에 대해 신념이 흔들릴 때 이렇게 마음을 다잡곤 했다. 르누아르를 돌아보기도 했다. "르누아르는 지금껏 누구보다 누드화를 아름답게 그렸다. 우리는 르누아르 덕분에 생명력이 결핍된 메마른 추상으로부터 구원받았다."
마티스가 혼란의 시간에 보인 반응은 세잔과 르누아르가 20세기 초 미술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1904년 파리의 살롱도톤 Salon d'Automne 전시 역시 세잔과 르누아르를 동등하게 모더니티를 이끄는 선구자로 선언했다.
하지만 오늘날 두 작가를 보는 시각은 상반된다. 세잔은 혁신적이고 르누아르는 반동적이라는 평가다. 르누아르는 대중의 선호에서 멀어졌고, 그의 대규모 회고전은 1985년 그랑팔레와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 전시 이후 열리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7월 12일부터 스위스 마르티니의 피에르 지아나다 재단 Fondation Pierre Gianadda에서 《세잔-르누아르》가 개최되는 것이 무척 반갑다. 이번 전시는 오랑주리 미술관 Musee de l'Orangerie 순회전의 일환이며, 아시아로 이어질 예정이다.
전시는 폴 기욤 화상(畫商) 부부가 수집한 오랑주리 미술관의 주요 소장품들과 함께 오르세 미술관에서 대여한 주요 작품들로 구성되며, 모든 시기와 장르를 아우르는 다양한 회화작품들을 선보인다. 초록 잎이 우거진 강둑과 흔들리는 반사광을 담은 르누아르의 초기 인상주의 실험 작 <센강의 바지선>, 율동적인 몸짓 표현과 조화로운 색채 연출에서 거장의 경지를 보여주는 <피아노 치는 소녀들>(1892), 사과의 대담한 금색과 양식화된 형태가 눈길을 사로잡는 세잔의 <사과와 비스킷이 있는 정물화>(1880)가 있다. 풍경화 <샤토 누아르의 정원>과 <붉은 바위>는 바위 절벽의 강하고 압축된 힘을 전하며, 자연이 장엄하고 영원하다고 선언한다. 작품들은 대조되면서도 수렴되고, 차이 속에서도 유사성을 드러내며 극적인 이야기를 구축한다. 개별 작품의 궤적이 전시의 맥락 속에서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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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는 생동감이 돈다. 세잔의 질서와 엄격함이 르누아르의 부드럽게 애무하는 터치와 뚜렷이 구별되면서 생기는 긴장 탓이다. 르누아르는 눈부신 우윳빛 피부의 육감적인 누드화 <누워있는 누드 (가브리엘르)>(1903)로 아이들의 유모를 향한 애정을 화폭에 담았다. <세잔 부인의 초상>(1880)에서 세잔의 아내는 약동하는 청록빛 배경이 후광처럼 머리를 감싼 채 성직자와 같은 분위기로 앉아 있다. 세잔 부인의 무게 있는 존재감을 절제되고 균형있게 표현한 작품이다.
르누아르의 <복숭아>(1881)는 반짝이는 자기에 담긴 복숭아의 솜털처럼 부드럽고 섬세한 촉감을 그대로 전해준다. 르누아르는 십 대에 도기 공방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자기 채색 특유의 맑은 색상을 다루는 경험을 쌓았다. 그 덕분에 광채를 표현하는 평생의 기술을 터득했고, 어른거리는 빛을 능숙하게 묘사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 배나무>(1873)를 보자. 산들바람에 바스락거리며 일렁이는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는 태양 빛을 거의 투명한 붓질로 표현했다. 1873년 창작된 이 작품은 반짝거리는 봄의 풍경을 포착하면서 인상주의가 태동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르누아르는 겨울도 빛나게 한다. <눈 내린 풍경>(1875)을 보면 하늘에 어린 푸르스름한 그림자, 밝은 흰색 땅, 나무둥치의 녹슨 듯한 색에 차가운 겨울빛이 서려 있다.
세잔은 한층 더 냉철하고 계획적이다. <푸른색 화병>(1887)은 세잔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매혹적인 작품이다. 병을 수직으로 배치하고, 색조의 농담을 정제되게 조율하면서 과일과 접시, 물병을 엄밀하게 의도된 위치에 배열하여 형태를 정렬하였다. 꽃다발의 기운은치밀하게 계산된 이 건축학적 구조에 서정적 향취로 도전한다.
풍경화에서 세잔은 빛 속에서 장면을 해체하기보다 구축한다. 흐린 날 덧문이 내려진 집들 사이에 난 작은 길을 그린 <오베르 근처의시골길>(1872-73년)은 세잔이 피사로와 함께 실험적으로 야외 사생을 시도할 무렵 작업한 그림이다. 세잔은 빠른 속도로 배웠다. 1875년 고향 프로방스에서 그린 <붉은 지붕이 있는 풍경>(1875-76)을 보면 변화가 보인다. 세잔은 점을 두텁게 눌러찍어 건물을 생략해서 표현하고, 쉼표 모양의 활기찬 붓 터치로 나뭇잎을, 쓱쓱 칠한 직사각 면으로 들판을 단순화하여, 남프랑스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펼쳐진 풍광을 재구성했다.
인상주의는 수시로 변하는 빛과 날씨 탓에 시각적 변화를 많이 경험한 북프랑스 작가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한결같은 지중해의 태양에 익숙한 남프랑스 태생 세잔으로서는 수용하기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세잔은 인상주의의 즉흥성과 신선함을 높이 평가했지만, 인상주의가 미술관에 걸린 작품처럼 더 견고한 예술 작품이 되기를 바랐다.
세잔은 고전 회화처럼 야외 풍경을 배경으로 누드화를 시도했으나, <목욕하는 세 여인>(1879-82)처럼 초기의 시도들은 조소를 받았다. 그림 속 피라미드 구도를 이루고 있는 여인들은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형상이었기 때문이다. 여체의 미를 시각적으로 향유할 줄 알았던 사교적인 르누아르와 달리, 내성적인 세잔은 여성 모델을 불편하게 여겨, 육체를 그릴 때 상상에 의존하거나 고대의 작품을 참고했기에 어려움을 겪었을 수 있다. 그러나 1885년 세잔은 <자 드 부팡 인근의 나무와 집들>(1885-86)에서 열기와 빛, 대기를 집약해 표현하면서, 여기에 고전 건축의 부조frieze 조각같은 구도와 질서, 도식적인 형태로 건축학적 장관을 결합시키는 능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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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에 세잔의 그림들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은 르누아르 외에 거의 없었다. 당시 두 사람은 막역한 사이였고, 둘의 우정을 통해 세잔은 현실적인 도움을 받았다. 르누아르의 노력으로 세잔은 56세의 나이에 마침내 1895년 생애 첫 전시회를 열었다. 반면르누아르는 세잔으로부터 예술적인 영감을 얻었다.
1880년대 초반 인상주의는 막다른 골목에 봉착했다. 인상주의의 경쾌한 재기는 점차 형식적인 반복으로 퇴색되었다. 르누아르는 "나는 인상주의의 한계에 이르렀다. 도대체 어떻게 그림을 그릴지, 어떻게 드로잉을 할지 모르겠다는 결론을 내렸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사용하던 색채를 더욱 밝고 강렬하게 끌어올렸다. <알제리의 풍경>(1881)을 그렸고, <건지 섬의 바다>(1883)에서 얼룩진 터키석 청록색으로 소용돌이치는 바다를 연출했다. 루브르에서 앵그르를, 로마에서 라파엘을 탐구했으며, 에스타크에서는 세잔의 집에 머물렀다. 1882년 에스타크에서 쓴 편지에서 르누아르는 "나는 프랑스 남부의 태양에 몸을 덥히면서, 열심히 관찰을 하고 있네. 언젠가는 고전 화가들이 이룬 단순함과 웅장함을 나도 이룰 것이네"라고 썼다.
1883년 작 <풍경 속의 누드>는 르누아르의 작품 세계가 고전주의를 도입하면서 방향을 전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견고한 윤곽선은 신고전주의 화가 앵그르의 선형성을 드러내고, 배경은 인상주의 고유의 활기차고 파편화된 붓 터치로 채워졌다. 눈부신 금발이 배경 식물의 움직임을 따라서 흘러내리는 <긴 머리의 목욕하는 여인>(1895), 화면이 풍성하고 윤곽선은 흐려진 <다리를 닦는 여인> (1914)은 르누아르 후기 작품들의 전형을 보여준다. 1907년 르누아르는 프랑스 남부 카뉴 쉬르 메르 Cagnes–sur-Mer로이주했다.
르누아르 후기 누드화들은 육체가 터질 듯 풍만하고, 가슴과 엉덩이가 두드러져 오늘날의 시선으로는 여성 혐오주의나 감상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당시 동료 작가들도 그의 누드화에 대해 의견이 나뉘었다. 모네는 <목욕하는 소녀>(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를 사들여 침대 위에 걸었다. 메리 카사는 "두상은 작고 머리카락이 붉은 거대한 여인들이라니...정말 최악이다"라고 혹평했다.
카사는 르누아르가 재현을 목표로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르누아르 여인상들을,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처럼, 신화적이고 상징적이며 양식화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전시작 중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1899-1900)을 보자. 보는 각도에 따라 색이 변할 것 같은, 이 세상 너머의 환영 같은 풍경이다. 인물들은 풍경 속에 스며들어 그림의 구도를 형성한다.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세잔에게 있어서 인물들은 "그림의 표면과 부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목가적 이상향을 향한 노스탤지아의 표현이기도 하다.
르누아르와 세잔의 작품들 중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생트 빅투아르 산> 혹은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과 같은 대표작들이 오지는 못했지만, 이번 전시는 르누아르와 세잔이 예술적 풍요를 성취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지 면면이 펼쳐 보여준다.
세잔이 그린 <화가의 아들>과 르누아르의 <광대 복장을 한 클로드 르누아르>(1909)을 비교해 보자. 세잔의 그림에서 이마, 목, 어깨, 안락의자로 이어지는 곡선은 단순하고 아름다운 패턴이 되어 심각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는 여덟 살 아이의 형상을 유희하듯이 흐른다. 르누아르 그림 속의 아이 클로드도 여덟 살이다. 클로드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와토의 그림 속 광대처럼 대리석 기둥을 배경으로 서있다. 광택이 흐르는 붉은 의상은 흰색 옷깃과 스타킹으로 균형을 잡았다. 훗날 클로드는 이 복장이 불편해서 참기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피카소의 1906년 자화상은 세잔으로부터 현대적이고 평면적이며 절단된 구도와 푸른 색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후에 피카소는 르누아르처럼 아들에게 광대 옷을 입혀 초상화를 그렸다.
피카소의 두 작품이 전시의 피날레를 장식한다. <대형 정물>(1917)은 세잔 정물화의 기울어진 균형에 보내는 입체주의의 경배다. <천을 두른 대형 누드>(1923)에서 인물의 자세와 무거운 형태는 르누아르 후기 누드화를 연상시킨다.
마티스는 존경의 마음으로 르누아르에게 앙드레 외실링 Andrée Heuschling을 소개했는데, 그녀는 데데 Dédée라는 애칭으로 르누아르 생애 마지막 모델이 되었다. 전시작 <장미를 든 금발 소녀>의 주인공 데데에 대해, 늙어서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게 되고 죽음이 가까워진 르누아르는 말했다. "그녀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의 노쇠한 눈은 그녀의 젊은 피부를 탐닉하느라 다 헐어버렸다." 마티스는 "육체가 스러져가면서 르누아르의 영혼은 더욱 빛을 발하며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 《세잔-르누아르》는 Fondation Gianadda 전시(7월 13일 ~ 11월 19일) 이후 홍콩, 도쿄, 서울로 순회할 예정이다.
재키 불슐래거는 파이낸셜타임스(FT)의 수석 예술평론가로 활동중이다. 그는 '한스 크리스챤 안데르센: 이야기꾼의 삶'과 '샤갈: 삶과 망명'으로 스피어(Spear) '금년의 전기' 상을 두 차례 수상했다.
역자 음해린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후 시각예술 전문 번역가로 활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