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로이터/뉴스1
2025.05.02 15:44
2023년 6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앞 핀란드만에 정박한 요트에 올라 국영 에너지 기업 가스프롬의 멋진 해안가 신사옥에서 열린 깃발 게양 기념식에 참석했다. 가스프롬은 푸틴의 '제국 프로젝트'를 상징하는 근간이다.
"아름답네." 푸틴은 자신을 안내한 옐레나 일류히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류히나는 고층 빌딩 건설을 총괄한 인물로,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러시아 에너지 부문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인사다. 그녀는 가스프롬 산하의 성공적인 석유 계열사에서 고위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러시아 국가가 연주되고 세 개의 주요 깃발—러시아 삼색기, 소련의 낫과 망치 깃발, 표트르 대제의 제국 깃발—이 게양되는 가운데서도, 일류히나는 푸틴과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이 깃발들은 푸틴이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과정에서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호출한 역사적 유산들을 상징한다.
푸틴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 일류히나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녀는 곧바로 말 대신 입술로 가사를 따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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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듬해 3월, 일류히나는 모회사인 가스프롬의 부대표로 승진했다. 러시아 최대 기업인 가스프롬이 최근 수년 간 겪은 최대 위기에 대응해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이끄는 자리다.
러시아산 파이프라인 가스 수출을 사실상 독점해 온 가스프롬은, 푸틴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이후 기존 사업모델이 붕괴되며 사상 최대 규모의 손실을 입고 회복에 애를 먹고 있다.
가스프롬 그룹에 입사한 지 15년을 넘긴 일류히나에게는 이례적인 고속 승진이다. 그녀는 가스프롬 대표이사 알렉세이 밀러의 측근이자 밀러의 오랜 연인인 마리나 엔탈체바의 절친한 친구로도 알려져 있다.
"일류히나는 에너지가 넘치고 기업 내 정치에 능하다. 마치 '왕좌의 게임'의 거침없고 야심찬 서세이 라니스터 같다. 하지만 이 늪같은 조직을 뒤흔들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과거 그녀와 함께 일했던 인사는 이렇게 전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러한 대규모 개편은 상상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개혁 없이 가스프롬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올해 가스프롬의 유럽 및 튀르키예 가스 공급량은 2019년 대비 5분의 1 이하로 급감할 것으로 보인다. 2024년 공급량은 470억 입방미터로 추정되며, 2034년에는 340억 입방미터 수준까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작년 작성된 42쪽 분량의 내부 문서(제목: '가스프롬의 전환')는 현금 흐름이 계속해서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으로 보고 있으며, 2034년까지 누적 적자는 15조 루블(약 210조 원)에 이를 것으로 분석했다. 이 문서는 파이낸셜타임스(FT)가 입수했다. 문서는 공급망 붕괴, 계약 약화, 유럽 시장 접근 제한 등 가스프롬이 직면한 핵심 과제를 지적하고 있다. 한때 유럽 가스 시장을 장악했던 가스프롬은 사실상 독점 지위를 이용해 지난 반세기 최악의 에너지 위기를 유럽에 초래한 바 있다.
일류히나는 가스프롬 그룹내 분산된 조직을 하나의 '수직통합 기업'으로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기에는 그녀가 10년 넘게 몸담았던,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그룹내에서 가장 수익성 높은 계열사인 가스프롬네프트(Gazprom Neft)에 대한 통제권 강화도 포함된다. 가스프롬과 가스프롬네프트 측은 언론의 논평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가스프롬 내부 문건은 출장, 사무실 임대, 대정부 업무 등 전반적인 비용 절감은 물론, 메탄 연료 충전소 네트워크의 전부 또는 일부를 포함한 비핵심 자산 매각을 제안하고 있다. 2024년 2월, 가스프롬은 여러 건물을 공개 매물로 내놓았다.
가스프롬이 변화가 필요하다고 인정한 것은 러시아 경제의 한 축이 얼마나 무너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가스프롬의 사업 구조 전체는 지속적인 성장을 전제로 설계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든 환경이 달라졌습니다." 가스프롬에 정통한 인사는 말했다.
이 개혁안의 일환으로 일류히나는 본사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인력 감축을 제안했다. 그녀는 밀러에게 보낸 서한에서, 20여 년간 확대되어 온 본사의 인력 중 약 1600명, 즉 거의 40%가 감축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2025년 초 일류히나는 상세 감축안―이 문건도 파이낸셜타임스가 입수―을 제시했다. 문건은 최소 세 개 부서의 폐지를 제안했고, 이 중 하나는 2022년에 설립되어 서방 기술을 러시아산 기술로 대체할 방안을 연구하던 부서였다.
또한 대외경제, 자본적 수선 등 여덟 개 부서가 통합 대상이며, 법무, 세무, 재무 기능은 중앙 조직으로 집약될 계획이다.
"이건 불가피했어요. 사실 한참 전에 했어야 할 일이죠." 컬럼비아대학교 글로벌 에너지 정책 센터의 타티아나 미트로바 연구원은 말했다. "이건 가스프롬입니다. 관료적이고 위계적인 거대 조직이죠. 러시아 국영기업 중에서도 개혁을 가장 늦게 받아들이는 게 당연합니다."
푸틴은 2000년대 초 정권을 잡은 직후, 에너지 가격 급등 속에서 가스프롬 장악에 나섰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으로 일했을 때 부하로 데리고 있었던 알렉세이 밀러를 가스프롬 최고경영자로 앉혔다.
가스프롬은 막대한 이익을 바탕으로 에너지 부문을 넘어선 제국을 구축했다. NTV라는 방송사, 러시아 3대 은행 중 하나, 그리고 러시아 스포츠 산업 상당 부분이 여기에 포함된다. 현재 가스프롬의 직원 수는 약 50만 명에 달한다.
이 기업은 러시아 국내에서 푸틴 체제를 뒷받침한 동시에, 장악하고 있는 TV네트워크를 통해 유럽(가스 최대 수출시장)과 우크라이나(주요 수송 경로)에 대한 압박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됐다.
2019년 파리에서 열린 푸틴과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간의 유일한 정상회담을 계기로 우크라이나 대표단은 가스프롬 대표단과 복잡한 기술적 협상을 위해 별도 회의를 가졌다. 하지만 협상 테이블에 앉은 건 다름 아닌 푸틴 자신이었고, 이는 가스프롬이 러시아의 전략적 목표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측과 가스 수송 요금과 중재 분쟁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던 동안 가스프롬 대표 알렉세이 밀러는 옆에서 말없이 서류 뭉치를 들여다보곤 했다고, 당시 우크라이나 국영 에너지기업 나프토가즈의 임원이었던 유리 비트렌코는 회상했다.
"러시아와 가스 협상을 한다는 건, 결국 지독한 지정학 싸움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비트렌코는 말했다.
푸틴 권력의 핵심요소인 가스프롬에게는 일반적인 기업 운영 원칙이 뒷전이었다. 이 회사는 러시아 국영 에너지 기업 중에서도 유독 불투명하고 비효율적이라는 악명이 따랐으며, 지속적으로 부패 의혹에 시달려왔다.
러시아의 한 투자자는 2010년대 중반 열린 가스프롬의 지배구조 관련 간담회를 떠올렸다. 당시 가스프롬 이사회 멤버였던 경제학자 블라디미르 마우가 중국과 체결한 공급 계약서를 보여달라고 요청했지만, 당시 총리였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포함한 정부 인사들은 이 요청을 웃어넘겼다고 한다.
비효율과 불투명성에도 불구하고, 가스프롬은 생산성을 요구하는 개혁 세력과 수출 경로 통제에 집중하는 크렘린 강경파 양측의 해체 시도에서 버텨냈다.
그 생존 비결은 가스프롬의 본질에 있다. 이 회사의 독점 모델은 단순하다. 값싼 천연가스를 유럽에 비싸게 팔고, 이익은 크렘린의 국내 정치와 지정학 전략에 투입하는 구조다.
"가스프롬은 국가를 위해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중요한 일들을 해냅니다." 한 전직 고위 당국자는 말한다. "대통령은 회사의 지도부를 잘 알고 있고, 신뢰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권위를 가집니다."
가스프롬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는 2018년에 있었다. 국영 스베르방크는 자사 수석 리서치 책임자이자 석유·가스 애널리스트를 해고했는데, 그가 가스프롬이 주주나 수익성보다 협력업체들을 우선시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한 직후였다. 이들 협력업체들은 푸틴의 측근들이 운영한다.
"가스프롬은 수익성 챔피언이 아닙니다." 크렘린의 한 고위 관계자는 말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역할은 매우 효과적으로 해냅니다."
2005년, 가스프롬은 당시 '시브네프트'로 불리던 석유회사를 전 첼시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로부터 인수했고, 이를 가스프롬네프트로 명칭 변경했다. 아브라모비치가 1990년대에 매입한 금액보다 훨씬 높은 가격이었다. 이 거래는 아브라모비치의 충성에 대한 보상으로 널리 해석됐다.
정치적으로 보면, 푸틴이 에너지 부문을 국가 통제로 되돌리는 과정에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시장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이 기업은 가스프롬 그룹 내부에서 어색한 존재가 되었다.
"푸틴은 소련 붕괴 이후의 혼란 속에서 러시아의 천연자원에 대한 국가 통제를 회복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석유회사를 흡수한 건 처음부터 썩 자연스러운 조합은 아니었죠." 한때 가스프롬의 런던 소재 석유 트레이딩 부문을 운영했던 서리클린에너지의 아디 임시로비치의 말이다.
가스프롬네프트 인수 1년 뒤인 2006년, 알렉산드르 듀코프가 가스프롬네프트의 사장이 되었고, 2년 후인 2008년에는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다. 밀러와 마찬가지로, 듀코프 역시 푸틴이 소련 붕괴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 시절부터 알고 지낸 인물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기업 운영 방식에서 정반대의 노선을 택했다.
"이렇게까지 다른 러시아 기업 두 곳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마치 서로 다른 행성에서 온 것 같습니다." 컬럼비아대의 미트로바는 말했다.
현직 및 전직 러시아 에너지 고위 관계자들에 따르면, 듀코프 체제의 가스프롬네프트는 서구식 경영방식을 채택한 현대적인 시장중심 기업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가스프롬네프트 내에서는 공급망의 상류(탐사·채굴)와 하류(정제·판매)를 담당하는 부서들이 각각 자체적인 재무 및 법무팀을 갖추고, 투자 프로젝트 선정 등 주요 의사결정을 독립적으로 수행했다.
또 다른 러시아 전직 에너지 고위 관계자는, 가스프롬 전체 구조를 둘러싼 부패 의혹과 비교했을 때, 가스프롬네프트를 둘러싼 의혹은 "극히 적은 수준"이라고 전했다.
가스프롬네프트가 모회사로부터 일부 사업 프로젝트를 이관받은 후, 기존 협력업체들은 회사가 다른 부문에서 지불하던 가격에 비해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요구했다. 이유를 묻자, 협력없체들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석유회사용 방식'이 따로 있고, '가스프롬 방식'이 따로 있다." 가스프롬네프트에 정통한 인사의 증언이다.
이들이 운영하는 기업만큼이나, 밀러와 듀코프 두 사람의 성향 역시 극명하게 다르다. 다른 러시아 고위 기술관료나 기업인들과 마찬가지로, 듀코프는 전면전 발발에 충격을 받았고, 서방과의 단절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물론 그는 조용히 자신의 일을 이어왔다.
반면, 밀러는 침공을 열렬히 지지했다. 그는 임원들에게 러시아 탱크에 칠해진 것과 동일한 'Z' 마크가 새겨진 배지를 착용하도록 강요했다. 가스프롬은 자체 보안요원 가운데 일부를 선발해 최소 두 개의 부대를 우크라이나에 파견했으며, 이들에게는 복지 혜택과 성과급, 장비 등이 제공됐다.
"듀코프는 BP나 쉘 같은 서구 기업에서도 충분히 어울릴 사람입니다. 하지만 밀러는 전혀 그렇지 않죠. 그의 강점은 푸틴이 높이 사는 사진같은 암기력과 충성심뿐입니다." 두 사람을 모두 잘 아는 인사의 말이다.
일류히나는 이런 두 조직 사이를 잇는 가교 역할을 종종 맡았다. 복수의 관계자에 따르면, 듀코프는 민감한 사안을 밀러에게 전달할 일이 생기면 일류히나에게 부탁하곤 했다.
초기에는, 가스프롬네프트 측 인사들도 그녀의 영향력이 마리나 엔탈체바(가스프롬 대표 밀러의 오랜 연인)와의 친분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겼다. 엔탈체바는 푸틴이 1990년대에 보좌관으로 두었던 인물로, 이후 대통령 의전실장을 지낸 인물이다.
"애초에 그녀는 '밀러의 사람'으로서 가스프롬네프트에 파견된 겁니다. 감시를 위해서였죠." 회사에 정통한 한 인사의 설명이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일류히나를 매우 독특한 인물로 묘사한다. "가스프롬의 많은 사람들과 달리, 그녀는 정형화된 틀이나 직무기술서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공식적인 역할을 넘어서는 방법을 알고 있어요"라고 한 인사는 전했다.
가스프롬네프트에서 그녀의 팀은 상당수가 여성으로 구성돼 있었다. 남성중심적인 러시아 에너지업계에서는 드문 일이다. 팀 분위기는 종종 쇼비니즘을 보였다. 가스프롬 측 한 인사는 그녀의 사무실을 "꽃집, 향수가게, 인형가게가 뒤섞인 듯한 분위기"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녀는 재직 중 수많은 대형 프로젝트를 맡았다. 여기에는 17억 달러가 투입된 462미터 높이의 라흐타 센터(Lakhta Centre)도 포함된다. 이는 푸틴이 일류히나와 함께 요트에서 바라본 바로 그 고층 빌딩이다. 2010년대 초에는 '알타이 리조트' 건설도 지휘했는데, 명목상으로는 가스프롬 임직원 전용 휴양지지만, 실상은 푸틴의 별장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모든 건설 비용은 가스프롬네프트에서 충당했으며, "경영진은 해당 자금이 다른 용도로 쓰이기를 바랐다"고 회사 관계자는 전했다.
그녀의 전임자가 부패 의혹으로 경질된 후, 일류히나는 부동산 관리 및 대외협력 부문 부대표 자리에 올랐다. 이에 대해 가스프롬네프트 측 인사는 "밀러에 대한 충성심과 이력 면에서, 그녀는 최적의 인물이었다"고 평했다.
가스프롬은 한동안 이 석유 계열사(가스프롬네프트)의 자율성을 방치해두고 있었다. 하지만 자체 현금 흐름이 말라붙자 사정은 달라졌다.
2022년 침공을 앞두고, 가스프롬은 유럽으로의 가스 공급량을 서서히 줄이기 시작했고,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가스 가격 덕에 막대한 수익을 챙겼다.
침공이 시작된 이후에도, 가스프롬은 장비 수리 지연을 이유로 공급량을 계속해서 감축했다.
그러나 유럽연합(EU) 국가들이 러시아산 가스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기에, 가스프롬은 초기에는 큰 제재들을 피할 수 있었다. 그동안 크렘린은 가스를 외교적 지렛대로 활용했다.
2022년 9월, 발트해 해저를 지나 유럽으로 향하는 러시아의 핵심 가스 수송로 노르드스트림이 폭파되면서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 사건은 유럽의 '탈(脫) 러시아 가스' 노력을 가속화시켰고, 러시아산 파이프라인 가스가 유럽 전체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전쟁 전 40%에서 2024년 11.2%까지 급감했다. 가스프롬의 사업모델은 사실상 붕괴됐다.
한편, 가스프롬네프트는 G7의 원유 가격 상한제에 발맞추어 신속히 적응했고, 고유가의 수혜를 입었다. 2023년 이 계열사는 6410억 루블의 순이익을 기록한 반면, 가스프롬 본사는 같은 해 6290억 루블의 적자를 냈다. 이는 가스프롬 역사상 최악의 실적이다. 가스프롬네프트는 그룹 전체 이자·세금·감가상각 전 영업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두 배로 뛰어 75%에 달했다.
이 같은 변화는 침공 이후 러시아 에너지 업계에서 벌어진 첫 번째 본격적인 내부 권력투쟁을 촉발했다고, 현직 및 전직 고위 관계자들은 전한다.
가스프롬은 듀코프를 약화시키고 현금 흐름을 장악하기 위해 가스프롬네프트의 수십 년간 유지돼 온 운영자율권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구조조정에 나섰다. 2024년, 가스프롬네프트는 배당금을 순이익의 50%에서 75%로 상향해, 90% 지분을 보유한 모회사 가스프롬에 더 많은 자금을 송금했다.
예산, 재무, 인사 부서를 포함한 일부 부서는 모회사 가스프롬의 직속 통제하에 놓였고, 몇몇 부서는 폐지됐다.
이러한 조직 변화로 듀코프의 핵심 측근들이 대거 이탈했다. 여기에는 상류(上流) 부문 책임자로서 회사의 원유 생산량을 두 배로 늘렸던 바딤 야코블레프도 포함된다. 그는 가스프롬의 최대 액화천연가스(LNG) 경쟁사인 민간 기업 노바텍으로 이직했다.
야코블레프의 이탈은 듀코프에게 타격이었다. 그는 이미 실무에서 한 발 물러나 있었던 상황이었다고, 전직 에너지 고위 인사는 말했다. "듀코프는 전설적인 실적을 가진 훌륭한 사람이지만, 수년 동안 운영을 직접 챙기진 않았습니다. 그는 필요한 경우 이사회나 크렘린에 가는 수준이었고, 실무는 야코블레프가 맡았었죠."
"가스프롬네프트는 전통적으로 상류 부문에 투자 우선순위를 두어 왔지만, 지금은 가스프롬이 전 부문 투자를 통제하려고 합니다." 가스프롬 측에 정통한 인사의 말이다.
현재 핵심 인물들이 듀코프 주변에서 제거됨에 따라 갈등은 일단락된 듯 보인다. 그러나 가스프롬네프트가 모회사보다 지속적으로 더 나은 실적을 내는 한, 긴장은 언제든 재점화될 수 있다.
일류히나가 작성한 프레젠테이션에 따르면, 가스프롬의 개혁 목표는 "강한 자회사가 약한 모회사를 지배하는 구조"에서 "강한 모회사와 순응하는 자회사 체계"로의 전환이다.
가스프롬은 지금 명예 회복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유일한 대안은 기존의 유럽 수출용 가스전을 시베리아 횡단 가스관 '시베리아의 힘 2'를 통해 중국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푸틴이 2024년 5월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밀러는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중국이 가격과 공급량에서 지나치게 강경한 요구를 했기 때문이다.
대신, 밀러는 이란으로 날아가 새로운 수익원을 모색했다.
그 결과 가스프롬은 이란과 연간 20억 입방미터 규모의 파이프라인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이란은 세계 3위의 천연가스 생산국임에도 불구하고 노후한 인프라 탓에 공급 장애가 잦은 나라다.
2024년, 가스프롬은 중앙아시아 수출(특히 우즈베키스탄)을 확대했고, 기존 노선을 통한 공급량도 전체적으로 15% 늘렸다. 다만 이는 침공 이전과 비교하면 여전히 한참 부족한 수준이다.
가스프롬은 심지어 수익 확대를 위해 파격적인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예컨대 러시아의 장거리 열차를 가스로 전환하는 방안도 논의된 것으로 전해진다.
국가도 가스프롬을 떠받치기 위해 개입했다. 2023년, 정부는 2022년 말 신설했던 연간 6000억 루블(약 10조5000억 원) 규모의 가스프롬 특별세를 폐지했다. "투자 유지를 위한 지원"이라는 명분에서였다.
가스프롬은 사할린 에너지 프로젝트에 대한 지배력 강화에서도 이득을 봤다. 이 프로젝트는 오호츠크해의 석유·가스전을 개발하는 것으로, 영국-네덜란드 기업 셸이 탈퇴 의사를 밝히자 지분이 국유화되었고, 2024년 가스프롬이 대폭 할인된 가격에 이를 인수했다. 그 결과 회계상 1674억 루블(약 3조 원)의 이익이 발생했다.
이러한 조치들―일부는 국영 자금 간의 '돈 돌리기'에 불과하지만―은 가스프롬의 위기를 완전히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025년 3월 17일, 가스프롬은 2024 회계연도 러시아 회계기준 기준으로 1조 800억 루블(약 19조 원)의 손실을 발표했다. 이는 순수 가스 사업만 반영된 수치로, 회사 역사상 최악의 실적이다. 자회사 실적이 포함되는 국제 재무제표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가스프롬이 재정적 안정성을 완전히 회복하려면, 회사의 '서방 정책'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 종식을 주장하면서 현실화 가능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
구 동독 슈타지(Stasi, 동독 비밀경찰) 출신으로 푸틴의 절친한 친구인 마티아스 바르니히는, 미국 투자자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살아남은 노르드스트림2 가스관의 재가동을 주장해왔다.
일부 유럽연합(EU) 관계자들 역시 러시아산 파이프라인 가스 수입 재개에 대해 논의 중이다. 그러나 이 같은 움직임은 브뤼셀 내 일부 고위 당국자들과 동유럽 외교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가스프롬에 정통한 한 인사는 "향후 3년간 가스프롬 예산에는 노르드스트림 재개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며 "만약 재개된다면 보너스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가스프롬의 입지는 여전히 위태롭다. 2024년 1월, 가스프롬은 러시아 정부에 파이프라인 수출 독점권을 2050년까지 보장해줄 것을 요청했고, 액화천연가스(LNG) 시장에서의 '국내 기업 간 경쟁 배제'도 요구했다. 이 시장에서는 가스프롬이 노바텍에 밀리고 있다.
또한 가스프롬은 국내 가스요금 인상을 주장하고 있다. 현재의 가격통제가 인프라 투자에 필요한 자금을 충분히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일류히나의 개혁안에 따르면, 가스프롬의 향후 사업모델은 국내 시장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가스부터 전력, 금융 서비스까지 통합적으로 제공하는 모델이다. 그러나 최근 수년간, 가스프롬은 자금력이 있는 핵심 국내 고객들, 특히 대형 기업 고객을 로스네프트에 빼앗겼다. 로스네프트는 푸틴의 또 다른 오랜 동지인 이고르 세친이 이끌고 있다.
컬럼비아대의 미트로바는 국내시장 중심 모델로의 전환을 "거대한 판 흔들기"라고 표현하며, 그 과정에서 벌어질 충돌을 SF 공포영화 '에이리언 vs 프레데터'에 빗댔다.
하지만 미트로바는 가스프롬이 이 같은 변화에 진정으로 대비돼 있는지는 회의적이다. "노르드스트림2 재가동에 대한 희망이, 가스프롬이 과거 회귀를 꿈꾸게 만들어, 필요한 변화를 멈추게 만드는 제동장치가 될 수 있다"고 그녀는 경고했다.
러시아의 국영 가스회사 가스프롬은 단지 하나의 대기업이 아닙니다. 러시아 경제를 이끄는 회사이고, 동시에 푸틴 대통령의 권력 원천이기도 합니다. 푸틴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있고, 심지어 군사적으로도 지원합니다. 이 거대한 에너지 그룹은 TV방송국도 가지고 있고, 러시아 국민들의 열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스포츠 기업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파이프라인의 경비를 위해 무장한 경비부대도 고용해 데리고 있습니다.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가스프롬 경비대원들이 별도의 부대를 구성해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비대원들은 푸틴의 '사병'(私兵)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유럽으로 가스를 보내는 노르드스트림 같은 파이프라인이 막히면서 수익이 급감했습니다. 어쩌면 푸틴은 자신의 권력 원천인 가스프롬을 살려내기 위해서라도 트럼프가 제안하는 조기 정전을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트럼프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정전 협상에서 사용할 중요한 카드입니다. 또한, 가스프롬은 향후 미국과 북한의 협상이 시작되면 별도의 안건으로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푸틴측은 가스프롬의 파이프라인을 북한과 한국에 연결해 가스를 수출하고 싶을 것입니다. 파이낸셜타임스의 3월 26일자 기사는 가스프롬의 역사, 가스프롬이 러시아경제와 푸틴 정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현재 어떤 어려움에 처해있는지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향후 한반도 정세와도 무관하지 않을 가스프롬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