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광야에 선 트럼프

음모론이라는 거울 나라로 지지자들을 이끌었던 트럼프는 이제 자신도 그 안에 갇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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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8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위스콘신주 밀워키 피서브 포럼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RNC) 4일차에 연단에 오르고 있다. /사진=로이터/뉴스1

2025.09.05 16:20

New States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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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는 여러모로 독특한 정치인입니다. 그 중에서도 얼마든지 자신의 입장을 번복하면서도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은 그 누가 트럼프의 뒤를 잇더라도 결코 가지지 못할 독보적인 특징이며 아마도 트럼프 개인의 강력한 카리스마 덕분일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트럼프의 코어 지지층이던 MAGA 진영과 트럼프 사이에 본격적으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균열이 두드러진 계기는 바로 제프리 엡스타인의 성범죄 사건에 트럼프도 연루되어 있다는 의혹입니다. 미국에서 엡스타인 사건은 '딥스테이트' 음모론의 단골 소재로, 과거 트럼프 본인도 이를 가지고 민주당 연루설을 주장하는 등 음모론에 불을 자주 지폈다는 점에서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최근에는 기존의 입장을 바꾸어 중국 유학생에게 비자 발급을 확대하겠다고 한 트럼프의 발언이 MAGA 진영에서 강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제 트럼프 지지 세력은 트럼프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이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래도 트럼프가 물러나고 나면 미국이 좀 더 과거의 미국에 가깝게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영국의 대표적인 정치사상가이자 평론가인 존 그레이는 뉴스테이츠먼 7월 30일자 기고문에서 정반대의 전망을 제시합니다. 좌우를 막론한 보다 '권위주의적 민주정'이 대두하리라는 것입니다. 19세기 이전까지 민주정, 민주주의로 번역되는 democracy는 나쁜 정치체제의 대명사였습니다. 고대 아테네가 몰락한 것이 현재로는 '포퓰리즘'으로 번역될 만한 democracy때문이었다는 것이 서구 지식인들의 인식이었습니다. 물론 현재 민주정, 민주주의는 좋은 정치체제로 간주됩니다.(현재의 민주정은 정확히는 입헌민주정 또는 민주공화정입니다) 그래서 독재국가들조차도 국명에 '민주'라는 단어를 넣어둡니다. 존 그레이가 '권위주의적 민주정'이라고 할 때의 '민주'는 전근대적, 고대적 의미입니다.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헌법질서를 파괴하면서 다수 민중의 고통에 호소하면서 정권을 확보, 유지하는 권위주의 선동가들의 등장을 의미합니다.


'달러'로 대표되는 미국 주도의 금융 질서의 쇠락, 이익에 기반한 '거래'로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으리란 트럼프의 시도가 모두 무위로 돌아가면서 더욱 두드러지는 기존 국제질서의 붕괴, 이를 묘사하는 존 그레이의 이번 글은 그 어느때보다도 더 묵시록적입니다.


2024년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카멀라 해리스가 연설하는 것을 보면서 도널드 트럼프가 보좌진에게 SNS에 올릴 게시물을 구술하는 영상은 마치 마법사가 일하는 모습 같다. 대선 후보인 그는 십수명의 선거 캠프 팀원들과 함께 테이블에 앉아—치킨너겟이 담긴 것으로 보이는 접시를 앞에 두고 코카콜라 병을 홀짝이며—상황을 주도하고 있다. 그의 발언은 보좌진이 타이핑한 후, 수정 및 승인을 거쳐 X(트위터)와 트루스소셜에 게시된다.


미국인의 무의식을 읽어내는 심령술사처럼 그는 자신에게 다수표를 안겨준 미국인들의 두려움을 목소리로 표현한다. "국경, 인플레이션, 범죄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가 말한다. 그의 트윗은 느낌표와 대문자로 가득할지 모르나 그는 부드럽게 말한다. 방 안의 분위기는 차분하다. 터커 칼슨이 지원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압승의 기술Art of the Surge'의 일부로 2024년 10월에 방송된 이 영상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트럼프는 지난 11월 압승으로 일어난 정권 교체의 유일한 기획자였다.


그러나 그를 단순히 정치적 마술사, SNS의 마법사로 보는 것은 그의 역사적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리버럴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처럼 비정상적 존재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두 번째 대통령 취임식 이후 6개월이 지난 지금, 세상이 트럼프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없다. 다가올 일들의 전조인 트럼프는 자신도, 그리고 당황한 자유주의 질서의 잔당들도 통제할 방법을 전혀 모르는 힘들을 해방시켰다. 헤겔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1806년 예나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프로이센 군대를 격파하기 전날 그의 모습을 보고 그를 '말 위에 올라탄 세계사'로 인식했다고 묘사했다. 골프 카트를 탄 트럼프도 비슷한 중요성을 지니지만 수다스러운 독일 철학자 헤겔이 역사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믿었던 종류의 새로운 합리성을 구현하지는 않는다. 어떤 나폴레옹보다도 더 변덕스럽게 움직이며, 트럼프는 정치와 역사에서 새로운 논리를 풀어놓고 있다.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복원은 없을 것이다. 리버럴들이 또다시 소송전lawfare을 벌여도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에 의한 사법부의 무기화는 트럼프의 재집권을 막지 못했다. 소송전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게임이다. 첫 임기 동안 그는 대법원에 보수 성향 판사 3명을 임명하여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었다. 사법부를 정치적 장악의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진보의 법치주의는 자기 자신의 사형선고서에 서명했다.



트럼프는 행정부 권한을 저해할 수 있는 모든 제도를 무력화하고 있다. 그는 50여 년 전에 설립돼 높은 평가를 받아온 국방부 내부 싱크탱크인 국방기획분석실Office of Net Assessment을 폐쇄했고, 국가안전보장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를 축소했으며, 연방재난관리청(FEMA)의 위상을 격하시켰다. 그는 국가안보국(NSA)과 미국 사이버사령부 수장을 포함한 정보기관장들을 해고했다. 이러한 숙청은 그의 후임자가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입헌 공화국보다는 권위주의적 민주주의에 더 가까운 정치 체제를 물려받게 만들 것이다. 파시즘의 부활이라는 진부한 이야기는 잘못됐다. 미국 민주주의의 변이는 더 깊고 지속적이다. 전간기戰間期 유럽과 아시아의 파시스트 정권은 훗날 지도자를 제거함으로써 와해될 수 있었다. 그러나 트럼프를 제거한다 하더라도 미국 사회는 합의에 기반한 통치가 불가능할 정도로 양극화되어 있을 것이며, 자유주의 초강대국이 기능할 수 있었던 국제체제는 이미 내부에서부터 무너졌다.


미국 주도의 금융 시스템은 이미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미국 바깥의 세상이 보기에 미국은 디폴트(채무불이행)을 향해 거침없이 표류하고 있다. 일론 머스크가 트럼프 행정부에서 축출된 후 언급했듯이 그의 정부효율부(DOGE)는 거의 성과를 내지 못했고, 트럼프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연방 적자에 수조 달러를 더할 것이다. 조지 소로스와 함께 1992년 영국 파운드화를 투매했던 '검은 수요일'에 관여했던 스콧 베센트 현 미국 재무장관에 의해 위기를 잠시 모면했을 수 있다. 하지만 머스크가보여주었듯이 트럼프의 핵심 측근으로 오래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근 몇 주 동안 그는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인 제롬 파월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렸다. 연준 또한 그가 무력화하려는 또 다른 기관이다. 현대 역사상 최악의 해를 보낸 달러의 현재 약세는 구조적인 것으로, 미국 정치의 만성적인 기능부전의 부산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달러의 뒤를 이을 통화가 곧 나타나리라는 건 아니다. 브릭스(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국가들이 대안을 만들려는 시도는 거듭 실패했다. 중국의 위안화는 너무 엄격하게 통제되고 유동성이 부족하다. 유로가 달러를 대체할 수 있다는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의 제안은 실현 불가능하다. 유로를 능가하는 세계 2위의 준비자산은 금이다. 전 세계 생산량의 약 5분의1이 중앙은행들의 금고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달러 자산과 달리, 이 오랜 귀금속은 금융 제재로 압류될 수 없다. 암호화폐와 달리 해킹될 수도 없다. 연준이나 그와 밀접하게 연관된 서방 은행들이 보유한 금 보유고1를 본국으로 송환하라는 압력이 커지고 있다. 인도와 터키는 이미 런던과 뉴욕으로부터 금괴를 송환했으며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에서도 이를 따라야 한다는 영향력 있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케인스가 '야만시대의 유물'이라고 불렀던 금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다극 통화 체제가 부상하고 있다.


대내적으로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는 양날의 검이다. 관세는 적절히 설계되고 시행되면 일자리를 보호할 수 있지만 항상 소비자에게 비용을 전가한다. 트럼프의 관세는 고용에는 거의 혜택을 주지 않으면서 인플레이션을 악화시킬 위험이 있다. 생활수준이 하락함에 따라 유권자들은 좌파로 돌아설 수 있다. 이는 바이든식 진보주의로의 회귀가 아니라, 여러 면에서 아르헨티나 페론주의의 재현과 유사한 트럼프주의의 더 급진적인 버전으로 향할 것이다. 재분배, 임대료 동결, 복지 지출을 약속하는 조란 맘다니가 뉴욕 시장 예비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채택된 것에서 그 예진豫震을 감지할 수 있다.


머스크는 재정적 보수주의를 핵심 주제 중 하나로 하는 새로운 아메리카당 창당을 제안했다. 그러나 연방 부채를 지속 가능한 수준에 맞추는 데 필요한 사회보장, 메디케어, 실업보험, 푸드뱅크 등 연방 복지 혜택의 대폭적인 삭감을 미국 유권자들은 지지할까?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정부 감축' 의제가 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시기가 올 수도 있지만 이는 국가 파산이라는 끔찍한 위기를 겪은 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트럼프 이전의 미국은 되돌릴 수 없다. 미래는 이질적인 나라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다르게 이루어진다.




후안 페론이 노동조합과 빈민층의 환심을 샀던 것처럼 트럼프는 신자유주의 시대에게 버림받은 이들을 동원했다. 아르헨티나에서 그랬듯, 그들의 희망은 실망으로 끝날 운명일지도 모른다. 90년대에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방문했을 때 나는 한 전직 페론주의자 장관에게 세계 정치의 다음 단계는 무엇이 될지 물었다. 그는 주저 없이 "시장 세력의 쇠퇴"라고 답했다. 한 세대가 지난 지금, 노인의 예언은 실현되었다.



서구 자본주의는 자기파괴적인 시스템이 되었다. 중국과 러시아에도 거대한 부의 집중이 존재하지만 이는 정부의 목표에 종속되어 있다. 지나친 독립성을 보이는 억만장자 기업가들은 신속하게 징계를 받는다. 중국에서는 부패 혐의로 기소되어 처형되거나 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처럼 시진핑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복권되기 전까지 수년간 은둔과 불명예 속에서 지낼 수도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에서는 제멋대로 구는 과두 재벌들이 고층건물에서 떨어지거나 소화불량으로 죽는 경향이 있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는 머스크가 상하이에 테슬라 기가팩토리를 세운 것처럼, 자국의 과두 재벌들이 반드시 서방에 우호적이지 않은 국가에 사업체를 두도록 허용하는 동시에 이들 국가가 자국 핵심 인프라에 진입하도록 허용한다.


스티브 배넌이 이끄는 마가(MAGA)의 한 분파는 기업 권력의 장악을 깨고 노동자의 이익을 우선시하고자 한다. 정계 주류는 배넌을 중요하지 않은 주변적 인물로 치부한다. 그러나 조슈아 그린이 '악마의 거래Devil's Bargain: Steve Bannon, Donald Trump and the Storming of the Presidency'에서 보여주었듯이, 배넌은 침체되어 있던 2016년 트럼프 대선 캠프를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트럼프의 권력 장악 경로를 열어준 이념적 각본, 즉 반모더니즘적, 혈연민족주의적 서구 쇠퇴 서사를 제공한 것은 바로 배넌이었다.


트럼프의 부상은 세계화에 대한 정치적 역풍이었다. 생산 시설의 오프쇼어링(해외 이전)과 결합된 자유무역은 미국의 제조업 역량을 황폐화시켰다. 그러나 보호무역주의는 자유무역이 파괴한 산업 및 고용 패턴을 되살릴 수 없다. 산업 전략과 젊은이들을 법률이나 금융 대신 과학과 공학으로 이끄는 교육 시스템을 마련하지 못하면 미국은 경제 쇠퇴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실리콘밸리에서 나온 세계를 변화시킨 기술들은 새로운 산업을 건설하기보다는 금융공학에 사용될 것이다.


배넌은 자신의 팟캐스트 '워룸'을 통해 트럼프 행정부의 현재 방향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쳤다. 5월 말, 그는 법무부가 제프리 엡스타인에 대한 수사를 종결하기로 한 결정을 "2026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최대 26석, 심지어 2028년 대선까지 잃게 할 수 있는 재앙적인 실수"라고 묘사했다. 배넌이 옳았다. 트럼프 자신도 엡스타인 파일에 이름이 올랐다는 사실이 월스트리트저널에 의해 폭로된 후, 대통령은 자신의 핵심 지지층 내부로부터 정치 경력상 가장 큰 반발과 맞닥뜨렸다. 가짜뉴스와 끝없는 음모론이라는 거울 나라로 지지자들을 이끈 트럼프는 이제 자기 자신도 그 안에 갇혔음을 깨달았다.


배넌은 포퓰리스트가 승리하지 않는 한, 미국의 지배체제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세계화의 희생자들은 버려질 것이다. 부자들은 자신들의 폐쇄적인 거주지로 도망치고 탈산업화된 황무지는 확산될 것이다.




TS 엘리엇은 '제론션Gerontion'(1920)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들은 천 가지 작은 숙고로/자신들의 차가운 섬망의 이익을 연장하고,/감각이 식었을 때 막을 자극하며,/자극적인 소스로 다양성을 늘린다/거울의 광야 속에서."


엘리엇의 '거울의 광야' 이미지는 1955년부터 거의 20년간 중앙정보국(CIA) 방첩부장을 지낸 제임스 지저스 앵글턴이 미로와 같은 첩보 세계를 묘사하는 데 사용했다. 평생 시를 사랑했고 엘리엇을 알았던 앵글턴은 예일대 학생이던 1939년에 계간 시 문학지를 공동 창간하여 ee 커밍스, 에즈라 파운드, 월리스 스티븐스, WH 오든의 작품을 실었다. 오랜 술친구이자 암묵적으로 신뢰했던 것으로 보이는 영국인 이중간첩 킴 필비에게 배신당한 충격으로, 앵글턴은 CIA를 거의 파멸시킬 뻔한 내부 간첩 색출 작전을 시작했고, 결국 1974년 12월 CIA에서 강제로 사임해야 했다. 그는 1987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비밀과 편집광적 망상을 함께 가져갔다. 그러나 그가 엘리엇에게서 차용한 표현은 현대 미국과 서구 전반의 더 큰 균열에 대한 선견지명을 갖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트럼프를 '조종당하는 꼭두각시Manchurian candidate'로 본다. 리처드 콘돈이 1959년에 발표한 동명 소설에서는, 외세의 조종을 받는 요원이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추구하도록 미국 대통령직에 오르게 된다. 일각에서는 현직 대통령이 아마도 금융 또는 성적 비리와 관련된 협박 위협 등의 강압에 의해 행동하고 있을 수 있다고 추측한다.


그가 국가정보국장인 털시 개버드처럼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러시아의 논점을 되풀이하는 인물들을 임명하고, 허위정보 대응을 위한 국무부 센터들을 폐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란이 핵폭탄을 만들고 있지 않다는 개버드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일축하고 그녀를 회의에서 배제했으며, 이란과의 전쟁에 반대하는 터커 칼슨의 의견을 '괴짜 같다'고 조롱했다. 그는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파괴하겠다는 의사를 발표하면서,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신이 암살자의 총알로부터 자신을 살려주셨을지도 모른다고 시사했다. 만약 이것이 트럼프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는 계산이나 속임수만큼이나 직관적 통찰과 감정에 의해 움직인다.


세계 정치는 앵글턴이 믿었던 것처럼 비밀 전략과 의도적인 속임수의 미로가 아니라, 반영과 투영의 요지경이다. 트럼프가 다른 세계 지도자들을 볼 때, 그는 자신이 되고 싶어 하는 자신의 복제품, 즉 냉철한 협상가를 본다. 푸틴은 무자비한 현실정치realpolitik를 실천하는 한편, 전설적인 제국을 부활시키려는 신차르주의적 정치 신비주의자이기도 하다. 시진핑은 전략적 이점을 볼 수 없는 어떤 분쟁에도 휘말리지 않도록 신중하다. 그러나 그 또한 중국을 자신이 생각하는 정당한 위치인 '세상의 중심인 나라' 즉 중화제국으로 복원시킬 결심을 갖고 있다. 이란의 지도자들은 전략에 신중하지만 동시에 순교와 메시아적 구원자에 대한 천년왕국 신화에 사로잡혀 있다. 역사는 이윤과 생존 추구보다 더 공상적이고 피비린내 나는 충동에 의해 움직인다.




리버럴이 인류를 볼 때, 그들은 자신들의 불완전한 표본을 본다. 인류의 일부—경멸받는 '개탄스러운 자들2'—은 너무 시대에 뒤떨어져서 미래가 없을지도 모른다. 진보적인 사회는 그들이 사라지고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최선이다. 나머지 인류는 계몽된 부르주아 계급의 대열에 합류하기를 갈망한다. 그것이 바로 세계화라는 환상이었고 그에 따른 대규모 이민이었다. 대신, 이민자들은 조상의 신앙, 정체성, 적대감을 가져왔고, 기존의 인구(이전 세대의 이민자 포함)는 그 실험을 시작한 정치계급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심지어 진보적인 노멘클라투라(특권 계층)조차 자신들의 미래가 불투명할 수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진실이라는 개념은 독재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부정되어야 하는 사실의 영역으로 살아남는다. 푸틴은 복원된 '러시아 세계'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을지 모른다. 그것들을 진전시키면서 그는 볼셰비키의 '브라뇨враньё' 관행을 이어간다.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이 거짓말임을 알지만, 전쟁과 정치를 이해하는 방식을 규정하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시진핑에게 기만은 병법의 핵심이다. 현실을 많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탈진실시대의 서구다.


트럼프의 이란 공습은 이러한 환상과 현실의 상호작용을 보여준다. 이란의 핵 프로젝트는 끝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단지 몇 년 지연되었을 뿐이다. 미국은 수에즈 사태 이후 중동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세력이 붕괴하고 1979년 이란의 왕정이 몰락한 이래로 갇혀 있던 것과 동일한 곤경에 처해 있다. 자신의 휴전 협정이 깨지자 이스라엘과 이란을 향한 트럼프의 분노—"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X도 모른다"—는 의미심장한 순간이었다. 수많은 전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트럼프 역시 이 지역을 지배할 수도, 여기서 벌어지는 해결하기 어려운 분쟁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트럼프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변화하던 제국주의적 경쟁이었던 '그레이트 게임'의 21세기 버전에 갇혀 있다.


역사에는 이성이 있지만 헤겔적인 종류는 아니다. 리버럴 이데올로그들이 트럼프의 부상을 가능하게 했을 때, 돌이킬 수 없는 과정이 시작됐다. 쇠퇴한 진보 지배계급과 트럼프는 서로의 거울상이다. 트럼프의 경제 내셔널리즘은 규제 없는 세계 자유시장의 완벽한 역전이다. 흔들리지 않는 듯 보였던 정통 경제학 이론이 세계화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안녕을 우선시하기 위해 뒤집혔다. 이 혁명이 정치적 레토릭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크고 아름다운 법안'에서 이루어진 메디케이드 및 오피오이드 중독 치료 기금의 대폭 삭감은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부수적 피해가 조용히 묵살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것이 정치적으로 지속 가능할까?


미국의 '개탄스러운 자들'은 사라지기 전에 투표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악화되는 경제에 동요하는 것이 주된 이유겠지만 엡스타인 사건을 중심으로 결집할 수도 있다. 과거의 중산층은 자신들이 고질적인 불안 상태로 추락하는 걸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밀레니얼 세대 전문직들은 잉여 엘리트의 천적인 '쓸모없어짐'을 피하기 위해 고군분투할 것이다. 이들 인구집단의 두려움과 분노를 대변하는 인물—JD 밴스, 배넌, 맘다니—들이 탈자유주의 시대의 미국을 형성할 것이다. 트럼프의 가장 오래 남을 유산은 그가 의도하거나 상상했던 것보다 더 급진적인 포퓰리즘의 뒤범벅이 될 것이다.


세계 무대에서 트럼프의 '현실주의적' 지정학은 신비주의적 제국주의, 천년왕국주의적 열광, 통제 불가능한 증오와 복수심 같은 힘들을 풀어놓아 그의 잠재적 거래들을 탈선시키고 있다. 그의 거래적 계획들은 그가 가볍게 묵살해버린 진보적 유토피아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리버럴 합리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무심코 만들어낸 세계로부터 눈을 돌린다. 트럼프가 혼돈을 부리는 동안, 그의 주변에서는 파멸적인 논리가 펼쳐진다.



존 그레이는 영국의 정치철학자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널리 읽히는 사상가로 손꼽힌다. 2008년까지 런던정경대(LSE)에서 유럽 사상을 가르쳤고 현재는 전업 작가로 뉴스테이츠먼에 주로 기고하고 있다. 저서로 '가짜 여명: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환상False Dawn: The Delusion of Global Capitalism'(1998),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Straw Dogs'(2002), '고양이 철학Feline Philosophy'(2020) 등이 있다.


1913년 창간돼 케인스, 버트런드 러셀, 조지 오웰, 버지니아 울프 등이 기고했던 전통 있는 영국 진보 주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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