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

'경제안보' 선구자 일본에게 배우는 중국 '디리스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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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지마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리시 수낵 영국 총리,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이 2023년 5월 19일 (현지시간) 히로시마에서 열린 G7 정상회의 중 미야지마 섬에 있는 이쓰쿠시마 신사를 방문하기 위해 보트를 타고 있다. ⓒ AFP=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23.05.26 12:20

The Wire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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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느냐는 앞으로도 한국을 줄곧 괴롭힐 문제입니다.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적 세계 질서를 따라야 할 필요성에는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만 중국의 경제적 압박이 들어오면 여론은 쉽게 흔들립니다. 대중 교역이 예전만 못하다지만 여전히 한국 산업의 중국 의존도는 높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서구에서도 이러한 딜레마를 차츰 이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중국과의 완전한 '결별'을 상정했던 '디커플링'(decoupling) 대신 대중국 리스크를 '관리'하겠다는 '디리스킹'(de-risking)이 국제사회의 새로운 화두가 됐다는 점이 이를 방증합니다. 물론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중국 시장에 많이 투자한 독일 자동차 업계를 비롯, 서구 재계에서도 볼멘 소리가 나옵니다. 한국도 벌써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 반도체 수출을 자제해달라는 미국의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일본은 한국보다 먼저 중국의 고속성장으로 인한 이득과 리스크를 겪고 그에 대한 대비를 해왔습니다. 동남아 지역을 여행해 본 분들이라면 곳곳에 일본 기업들이 진출해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이미 20년 전부터 중국 편중으로 인한 리스크를 관리해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자민당의 계속되는 독주로 일본 정치가 정체돼 있다고는 하지만 2019년부터 경제와 안보를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기구를 신설해 다가오는 '경제안보' 시대에 선제적으로 대비한 것은 한국 정치계가 배워야 할 부분입니다.


사실상 '섬나라'인 한국도 '경제안보'에 대해 철저한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일본이 오랫동안 닦아온 '경제안보' 전략을 꼼꼼히 검토하고 좋은 것들은 벤치마킹해야 합니다. PADO가 전문번역으로 소개하는 '더와이어차이나'의 이 5월 14일자 기사는 일본이 오랫동안 '경제안보' 전략을 어떻게 고민해왔는지를 생생하게 설명하고 정리했습니다. 한국의 정책입안자들이나 오피리언리더들이 꼼꼼히 읽어봐야 할 기사입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G7 정상회담에서 서구 지도자들을 만나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이 가장 먼저 거론될 것이다. G7 정상회담이 열리는 곳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첫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히로시마이며 G7 회원국(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이탈리아, 캐나다) 모두 러시아의 "무책임한 핵무기 거론"과 군사적 침략을 규탄한 바 있다.


하지만 특히 일본에게 G7은 또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국가안보와 경제의 상호작용을 의미하는 '경제안보'에 대해 논의할 기회라는 것이다.


약 50년 전 G7이 시작된 것도 경제안보를 위한 노력에서였다. 1973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으로 국제유가가 폭등하자 일본과 서구의 지도자들은 협력을 모색했다. 수입 원유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일본이 오일쇼크를 맞자 주요 언론에서는 "국가의 존립 자체"가 걸렸다는 경고까지 나왔다. 한때 급속도로 번영을 구가하던 일본 경제는 전력 공급 중단과 인플레이션으로 흔들렸고 일본 경제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에 따라 관련 정책 논의가 개시됐다.


오일쇼크를 계기로 일본은 다른 선진국과 함께 경제·금융 협력에 주안점을 둔 비공식 포럼 G7을 결성했다.



오늘날 G7의 경제안보 과제는 단 하나, 중국에 집중돼 있다. 정상회담 전에 발표된 G7 재무·외교장관들의 공동성명에 '중국'은 명시돼 있지 않으나 미국, 유럽, 동아시아의 동맹국은 모두 중국 정부의 경제적 압박을 물리치고 중요한 광물 자원, 배터리를 비롯한 여타 전략물자에 대한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G7 정상회담은 이러한 의제에 대해 협력할 수 있는 기회이며 일본로서는 서방 동맹들이 이 사안에 계속 집중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일본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러시아에 제재를 가하는 데 매우 적극적입니다." 일본-유럽 관계 전문가이자 과거 일본 외무성, 방위성에서 일한 바 있는 츠루오카 미치토 게이오대 교수의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린 G7의 의제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문제로만 도배되는 걸 바라지 않아요. 일본 정부는 아시아와 경제안보가 많은 관심을 받길 원합니다."


실제로 많은 전문가들이 일본을 경제안보의 선구자로 평가하며 일본 정부가 경제안보를 우선시하고 이를 제도화한 과정을 미국과 유럽 동맹들도 참고할 수 있으리라고 한다. 외국의 견제로 여러 차례 경제적 피해를 겪은 바 있는 열도 국가인 일본은 새로운 지역 단위 무역협정을 추진하고 자국 경제에 새로운 무역·투자 보호 조치를 취함으로써 경제안보의 개념을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했다.


"20년 전에는 서구 사람들이 일본 기업들의 위험회피적 행태를 보며 혼란스러웠을 수 있어요." 베를린의 머케이터중국연구소(MERICS)의 분석가 아다치 아야다. "하지만 대중국 경제적 상호의존성을 관리하는 데는 일본이 다른 나라보다 몇 발짝 더 앞서 있습니다. 지리적으로도 가까운 데다가 일찍부터 중국과 관계를 맺고 있었으니까요. 다른 나라들도 일본에서 배울 게 많습니다."


2022년 5월 일본 국회는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공급망을 강화하고 첨단기술 분야에서 대체불가능한 지위를 유지하며 핵심 인프라를 보호하고 민감한 특허기술의 공개를 방지하는 게 주목적이다.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은 일본 정치계가 새로운 지정학적 환경의 위협을 인식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그에 대응할 준비가 돼 있음을 보여줬다.


서구의 동맹국들도 마찬가지로 대응책을 마련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지난 3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은 백악관에서 회담을 가진 후 "경제적 의존의 무기화"를 비롯한 각종 위협들을 물리치기 위해 경제안보 강화로 미국-유럽연합 협력을 증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워싱턴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3년 3월 10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회담을 하고 있다.   ⓒ AFP=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워싱턴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3년 3월 10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회담을 하고 있다. ⓒ AFP=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우리의 목표는 자급자족 경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공급망이 보다 유연하고 안전해지는 것입니다." 바이든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 제이크 설리번이 최근 전략물자의 글로벌 제조 네트워크 재정립과 미국의 경제적 리더십 일신을 위한 정책 발표에서 한 말이다.


그러나 경제안보의 시대가 열린다는 것이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중국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G7 정상회담은 다국적기업들이 중국을 배제하는 쪽으로 공급망을 재편하도록 인센티브와 규제를 잘 조화시키려 할 것이다. 하지만 경제안보의 선구자인 일본조차도 일본 기업의 이익이 중국에 많이 걸려있기 때문에 이를 실행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과 독일의 대중국 교역량은 작년 각기 13%, 10%였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전체 교역량의 5분의 1이나 된다. 또한 일본 기업의 중국 주식 보유량은 외국에서 가장 많다.


서구의 많은 기업들이 중국에서 생산시설을 빼고 특정 부문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주문을 정부로부터 듣고 "상상할 수 없다"거나 "불가능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실제로 가장 잃을 게 많은 것은 일본이다.


"한쪽에는 경제적 상호의존성이 있고 다른쪽에는 경제안보가 있는데 일본은 둘 다를 원하죠." 서던캘리포니아대학 교수이자 '일본의 새로운 역내 현실: 아시아태평양의 지경학적 전략'의 저자인 카타다 사오리다. "이런 난제를 관리하려면 정책의 세계와 비즈니스의 세계 양쪽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경제안보의 재탄생

일본은 G7 중 유일한 비서구 국가로, 오랫동안 G7 내부에서 아시아를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 닛케이아시아가 분석한 기밀해제된 외교 문서에 따르면 1989년, 톈안먼 사태1 발생 한 달 후 파리 외곽에서 열린 G7 정상회담에서 우노 소스케 일본 총리는 중국에 제재를 가하는 데 강력히 반대했다. 서구 G7 회원국들은 제재 조치를 밀어붙였으나 일본 지도부는 막후에서 중국 정부를 완전히 고립시키지 않도록 노력했으며 나중에는 제재를 조속히 해제하도록 촉구했다.


"당시 일본은 중국을 다시 국제사회로 돌아올 수 있게 한 브로커였죠." 카타다 교수의 말이다. "일본은 G7에서 상황을 보다 진정시키고 규제를 풀고 중국과 다시 교류하게끔 만드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서구는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게 일본보다 훨씬 쉬웠죠."


이후 일본 정부는 중국을 G7 회담과 계획에 초대하고 포함시키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러시아의 개입에는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일본 외무장관이던 나카야마 다로는 G7에 러시아를 포함시키는 걸 두고 하수구에 돈을 버리는 것에 빗댄 바 있다.)


일본의 지도부는 동아시아의 안정을 원했지만 일본이 꾸준히 중국의 편을 든 데에는 경제적 이유도 있었다. 일본은 당시 중국의 급격한 성장을 기회로 삼으려 했던 터였다. 1990년대 중반, 일본의 전체 해외 투자에서 중국과 홍콩이 차지하는 비중은 미국 투자액의 세 배에 달했다.


2004년까지 중국은 일본의 최대 교역국이었으나 이미 이때부터 경제안보의 씨앗은 뿌려지고 있었다. 2003년 중국의 사스(SARS) 팬데믹을 겪은 후 일본의 몇몇 제조업 기업들은 '차이나+1 전략'이란 걸 추진했는데 중국 내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것의 이점을 활용하되 중국 시장 의존도를 상쇄하기 위해 동남아시아에 투자하는 것이 목표였다. 일본무역진흥기구2(JETRO)의 와타나베 오사무 회장은 심지어 차이나+1 전략을 권장하기까지했다. (서구 기업들은 20년이 지난 요즘에서야 이 전략을 따라 아시아의 성장 국가들과 교류하며 중국 의존도를 낮추려고 애쓰고 있다.)


일본 기업들이 중국에 대한 투자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동남아시아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던 와중에 미국 투자자들은 중국 투자를 계속했다. 2000년대 말, 미국의 대중국 투자액은 일본을 거의 따라잡았고 (잠시동안 추월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중국은 2010년 말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됐다.


중국의 부상과 함께 동중국해에서 발생한 안보상 문제로 일본의 다국적기업들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없었지만 재계는 동중국해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중국의 경제력이 신장하던 시기에 일본과의 정치·안보 관계가 악화되는 일이 벌어진 것은 사실이다.


2008년 말, 중국의 국가해양국 소속 선박 두 척이 동중국해에 위치한 일본의 센가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인근의 해역을 침범했다. 이후로도 비슷한 사건이 계속 발생했고 일본 남부 해안지역 후쿠오카의 규슈대학 교수 마스오 치사코는 이 사건을 두고 "일본의 관점에서 이는 일본 주권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으며 중국과의 관계에서 가장 큰 터닝포인트가 됐다"고 설명한다.


(베이징 로이터=뉴스1) 우동명 기자 =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이 2023년 4월 2일 (현지시간) 베이징을 방문해 다오위타이 국빈관에서 친강 중국 외교부장 겸 국무위원과 회담 중 악수를 하고 있다.  ⓒ 로이터=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베이징 로이터=뉴스1) 우동명 기자 =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이 2023년 4월 2일 (현지시간) 베이징을 방문해 다오위타이 국빈관에서 친강 중국 외교부장 겸 국무위원과 회담 중 악수를 하고 있다. ⓒ 로이터=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센가쿠 열도에 대한 중국 정부의 영유권 주장으로 긴장이 고조되면서 2010년에는 중국이 일본에 희토류 수출을 잠시동안 중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희토류는 일본 자동차 산업에 필수적인 자원이다.) 2년 후에는 같은 문제로 중국 소비자들이 일본 브랜드 제품에 대한 불매 운동을 벌이면서 중국 내 일본 자동차의 매출이 급감했다. 덩샤오핑이 일본 기업과 은행의 투자 및 재정 지원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이유로 중국 내 반일 집회에 대해 "무지몽매하다"고 말했던 1980년대와는 격세지감이었다.


중국과의 경제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자 일본은 당황했다.


"일본 사람은 지진이나 태풍, 해일 등에 대한 경험이 많습니다. 그래서 평소의 경제 생활에서도 늘 공급망 혼선에 대비가 잘 돼 있죠." 스즈키 카즈토 도쿄대 과학기술정책 교수다. "하지만 적대국가가 의도적으로 공급망에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마스오 교수는 일본이 곤경에 빠졌을 때 서구에서 별다른 공감을 보이지 않았던 것을 기억한다.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일본에 대한 방위 공약을 재확인했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중국과 협상을 희망하고 있었고 초기에는 영유권 문제에 깊이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입장을 보였다. 미국의 불분명한 입장에 일본 정부는 초조해했다.


"당시 일본은 매우 외로웠죠." 마스오 교수다. "자국의 안보 문제를 거의 홀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일본 불매 운동은 금새 사그라들었다. 양국의 경제관계도 결국은 회복돼 일본 기업들은 다시 중국의 최대 투자자로 등극했다. 2013년 일본무역진흥기구의 중국 책임자 마이에 요이치는 중국의 첨단산업 클러스터와 우수한 현지 조달 능력을 두고 "중국 같은 시장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격동의 2010년대는 일본에게 중국이라는 거대한 이웃과 외줄타기를 해야하는 현실을 일깨워줬다. 양국간 긴장이 고조됐던 시기에도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일본과 중국의 상업 관계와 안보 관계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일례로 역사적인 2018년 10월 베이징 방문 전에 아베는 재정적, 사회적, 환경적으로 건전하다면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에도 협력할 의사가 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일본은 중국과의 협력과 경쟁을 동시에 도모해야 했습니다." 중국 정치와 동아시아 국제관계 전문가인 타카하라 아키오 도쿄대 교수다. "일본 사람들의 중국에 대한 이미지는 나쁠지 몰라도 중국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고 있죠. 때문에 모든 총리들은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 합니다. 중국의 도발에는 굳건히 대응하면서 관계 개선을 도모하는 것이죠."


그러나 최근 들어 외줄타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미중 갈등이 심화되는 것과 더불어, 일본은 중국이 교역 상대국에게 경제적 강압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는 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봤다. 많은 이들에게 이는 중국 정부가 더는 외교관계에서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사례였다.


서구에서는 이를 두고 논쟁만 하고 있을 때, 일본의 여당 자민당은 행동을 취했다. 2019년 초 자민당은 경제, 외교, 안보를 통합한 전략을 개발하는 국가경제위원회 신설을 제안했다.


"주로 정치권에서 추진한 것이었죠." 도쿄대에서 경제안보를 가르치는 이가타 아키라다. "관료들, 특히 외무성과 방위성의 관료들은 이를 반대했어요. 하지만 아베 총리는 사안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를 전담하는 새로운 기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2019년 가을, 아베 총리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사무국인 국가안전보장국에 경제반을 신설했다.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미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와 마찬가지로 국방, 안보 문제에 대한 정부 내 최고 기구다. 이듬해 코로나19가 닥치자 국가안전보장국 경제반은 일본의 대응을 총괄했다.


경제반은 짧은 기간 내에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여느 부서보다 더 많은 인원을 갖게 됐다. 기시다 행정부는 나아가 내각에 '경제안전보장담당대신'직을 신설했고 이는 2022년 5월 경제안보추진법 통과의 밑바탕이 됐다.


"이는 일본에서 최초로 경제안보의 개념을 정중앙에 놓은 법안입니다." 이가타의 말이다. "일본의 국가안보에서 경제 부문의 빈틈을 메운다는 점에서 독창적이죠."

대체불가능한 지위를 지킨다

하지만 여전히 경제안보추진법에 대한 우려는 존재한다. 주로 일본의 재계에서다.


"우리 공급망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납품업체들이 얼마나 되는지 아세요?" 미쓰비시전기의 임원 이토 타카시 실장이다. "4만3000개입니다. 이건 1차 벤더만 추렸을 때의 이야깁니다. 2차 벤더까지 포함하면 천문학적인 숫자가 되죠."


일본의 재벌 기업 미쓰비시의 4대 계열사 중 하나인 미쓰비시전기는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가전, 반도체를 비롯한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데 비용 최소화와 효율 극대화를 위해 수십 년에 걸쳐 거의 40개국을 아우르는 공급망을 구축했다.


기업가치가 290억달러(약 39조원)에 달하는 미쓰비시전기는 무역전쟁이 난무하고 일본이 경제안보법을 제정하는 동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미쓰비시전기는 2020년 10월 기업 내 경제안보 부서를 신설한 최초의 일본 다국적기업이 됐다.


이토 타카시는 이렇게 신설된 경제안보총괄실의 실장으로 현재 일본을 비롯한 G7 국가와 중국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어떻게 미쓰비시전기의 글로벌 공급망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에 대해 궁리하고 있다.


"현실적인 접근이 절실합니다." 과거 일본의 반도체 제조기업 르네사스에서 일했던 이토 실장의 말이다. "공급망 주요 지점들을 점검해야 하겠지만 중국 납품업체로부터 구매하는 물량을 줄여서는 안됩니다."


장관들은 G7 회의에서 대수롭지 않게 중국으로부터의 공급망 '디리스킹'을 논할지 몰라도, 미쓰비시전기가 최근 의뢰한 분석에 따르면 자사의 협력업체 중 1만1000개가 중국 기업이었다.


다른 기업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이토 실장에 따르면 현재 제조업 재벌 히타치, 음료 기업 기린, 스포츠웨어 기업 아식스를 비롯한 일본 기업 40~50개사가 경제안보 부서를 운영하고 있다. 심지어 게이단렌3 같은 산업 협회 등을 통해 기업들이 주기적으로 만나 정보를 공유하고 공동 행동을 하기도 한다.


(도쿄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26일 (현지시간) 도쿄 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 본부에서 열린 고문 회의에 참석해 연설을 하고 있다.   ⓒ AFP=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도쿄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26일 (현지시간) 도쿄 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 본부에서 열린 고문 회의에 참석해 연설을 하고 있다. ⓒ AFP=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기사의 취재 과정에서 만난 업계 관계자 다수는 새로운 법의 시행으로 생기는 '의무'에 대해 이해한다고 말했다. 물론 그런 의무를 모두 반기는 건 아니다.


스즈키 도쿄대 교수의 말마따나 "경제안보라는 개념은 경제성장과 상충"된다. 그렇지만 그는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과 경제성장만이 유일한 국가 목표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 정부와 재계 사이에 타협이 있어왔다"고 한다.


현실에서 그러한 타협이 어떻게 유지되느냐가 향후 일본의 정책 기조로서 경제안보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다. 많은 업계 관계자들은 게이단렌을 통해 미쓰비시전기를 비롯한 기업들이 일본의 경제안보증진법을 최대한 기업에 유리하게 제정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었다고 한다. 정부의 개입과 감시를 확대하는 것보다 보조금을 더 우선시하도록 만든 것이 한 예다.


그리고 보조금 정책은 주효하는 듯 보인다. 미쓰비시전기는 지난 3월 일본 남부의 섬 규슈에 7억4500만달러를 투자해 새로운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겠다고 발표했다. 미쓰비시전기는 일본 국내 반도체 생산 증진을 위한 정부 보조금을 받게 되는데 일본 기업 뿐만 아니라 TSMC를 포함한 외국 기업들도 이 보조금을 받는다. 일부 사례에서는 정부가 비용의 절반까지 지원한다.


또한 미쓰비시전기는 옛날이었다면 중국에서 했을 신규 생산 활동을 아시아와 유럽 지역에서 하면서 지역 내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인도와 터키의 신규 에어컨 생산 시설에 투자하는 게 한 가지 사례다.


다른 일본 기업들은 보조금을 받고 공급망을 중국에서 다른 시장으로 옮기고 있다. 주로 동남아시아가 그 다음 행선지가 되곤 한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 카타다 교수의 연구진은 리쇼어링4 정책이 아직까지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기 어렵다는 걸 보여줬다. 지난 10년간 중국을 떠난 일본 기업들은 주로 중국의 생산비 상승과 성장률 저하 때문에 중국을 떠났다.


"기업은 결국 기업입니다." 카타다 교수의 말이다. "정부가 당근을 던질 수는 있겠지만 중국을 떠나 리쇼어링을 하는 게 실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일본 기업들도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한편으론 일본의 다국적기업들이 중국을 떠나더라도 그들의 공급망에 중국은 여전히 남아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동남아시아의 일본 기업들은 점진적으로 현지 납품 업체의 활용을 늘려왔지만 아다치와 시게노이 코키의 연구는 2021년 당시 여전히 원자재와 부품의 평균 13.5%를 중국에서 공급받고 있다는 걸 보여줬다.


공급망 다각화는 일거에 이루어지는 게 아닌 복잡한 과정으로, 처음에는 최종 조립 생산 기지를 옮기는 데 투자가 이뤄지고 그 다음 부품 조달의 변화로 이어진다. 중국의 납품 업체 의존도를 줄이는 공급망 다각화는 불가능한 게 아니지만 쉽지도 않고 빨리 이뤄지지도 않는다.


"다각화가 간단한 해결책인 것처럼 미화해선 안됩니다." 아다치의 말이다. "다각화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습니다. 투자에 대한 것, 수출, 생산, 공급에 대한 것까지 정말 다양하죠."


하지만 일본 다국적기업들은 글로벌 공급망에서 어느 정도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중요하다고 본다. "전체적으로 볼 때 새로운 법안은 설득력이 있어요." 미쓰비시전기의 이토 실장이다. "일본 기업이 규제를 받는 걸 좋아하지 않을 순 있지만 이미 국외 생산에 대한 미국 정부 규제의 영향을 받고 있거든요. 우리 자체의 규제가 있는 게 낫죠."


실제로 미쓰비시전기에게 가장 걱정스러운 지정학적 리스크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 계속되고 있는 기술 및 무역 갈등이다.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 미쓰비시전기 입장에서 미중 갈등은 최대 해외 시장 두 곳에서의 영업에 악재가 된다. 기업들은 미국의 즉흥적인 조치에 대응하느라 고전하고 있다.


일례로 2018년, 미쓰비시전기는 미중 무역전쟁으로 인해 미국 판매용 제품의 생산 시설을 중국에서 일본 나고야로 리쇼어링했다. 미국 정부의 관세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2019년 5월, 미국 정부가 화웨이에 강력한 제재를 가하자 미쓰비시전기는 화웨이와 공조하고 있던 반도체 사업을 중단해야 했다.


미국 정부가 노리는 중국 기업의 목록은 계속 늘어나는 듯하고 그로 인한 부담도 늘어난다. 외교적 압박도 마찬가지다. 지난 1월 미국 정부는 일본과 네덜란드가 중국 기업에게 최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 기술의 판매를 제한하게 만들었다.


한편 최근 중국 당국이 일본 기업 임원을 간첩 혐의로 체포한 사건은 일본 재계에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데 따르는 리스크에 대해 경종을 울렸다.


많은 다국적기업들이 국제 사업의 기본부터 재고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고 일부 전문가들은 새로운 경제안보법이 결국 일본 기업의 실적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일본은행(BoJ) 베이징 사무소장을 역임한 세구치 키요유키 캐논글로벌전략연구소 연구주간은 작금의 환경이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이 끝난 이후에 중국 시장과 교류를 재개하는 데 일본 경영인들에게 불필요한 망설임을 주고 있다고 한다.


"일본 기업들은 경제안보 문제에 대해 우려가 대단히 커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관망하느라 한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 재계 리더들은 일본과 서구 동맹국의 고위급 회담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유심히 관찰하고 있으며 많은 전문가들이 일본의 경제안보 제도화가 호응을 얻어 보다 좋은 결과와 안정으로 이어지길 희망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보다 최근에는 경제안보 부서 및 법령을 신설하면서) 일본은 동맹국에 비해 중국과 더 긴밀한 경제적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복잡한 공급망 속에서 전략적 자원, 노하우, 기술에 대한 보호 조치를 강화했다.


미국과 유럽연합이 이제서야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면서(서구의 주요 기업들은 여전히 규제 조치에 격렬히 반발하고 있다) G7 국가들은 힘을 모아 중국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도록 공급망을 조정하면서도 그동안 많은 과실을 안겨주었던 글로벌 무역과 투자의 전반적인 흐름을 과도하게 해치지 않게 경제안보를 확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경제안보 조치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죠." 아다치의 말이다. "세계화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일본이 G7 의장국을 맡으면서 세계화의 단점을 보완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겁니다."



루크 퍼테이는 덴마크국제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이자 옥스포드대학 에너지연구소의 선임 펠로우이며 저서로 '중국은 어떻게 패배하나: 중국의 글로벌 야망에 대한 반발'이 있다. 뉴욕타임스, 파이낸셜타임스, 가디언, 힌두, 포린어페어스, 포린폴리시 등에 기고한 바 있다.



뉴욕타임스 중국 특파원 출신인 데이빗 바르보자가 2020년 만든 중국 전문 온라인 주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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