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상상력이야말로 음모론 창궐을 막는 지적 갑옷이다

음모론에 집착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해법도 인간에게 있다. 온라인에서 끊임없이 지어내는 비현실에 맞설 가장 강력한 도구는 소설이라고 베스트셀러 소설가 데이비드 발다치는 말한다

/그래픽=PADO(생성AI 사용)

보통 음모론에는 '팩트'로 맞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저널(WSJ)의 8월 13일자 에세이는 음모론에 대한 해독제는 팩트보다는 자유로운 상상력이라고 주장합니다. 음모론은 스토리텔링의 일종인데, 인간은 이상하게 '스토리'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떠있는 것을 처음 본 인간은 분명 '공포'를 느낄겁니다. 하지만 마냥 공포 속에서 인생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스토리'로 밤하늘을 채웁니다. 그렇게 채워놓고서야 편안히 하늘을 보고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서로 무관한 별들을 연결시켜 카시오페이아니 북두칠성이니 이름을 붙이고 신화, 설화를 지어 밤하늘을 채웁니다. 인간은 무엇보다 스토리를 만들고 스토리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입니다. 따라서 단편적인 팩트만으로는 스토리를 꼭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즉, 스토리를 떼어놓기 위해서는 다른 스토리가 필요합니다. 사회를 분열시키는 음모론이 무섭고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 '신화'가 무서운데, 이들에 대한 해독제는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낼 수 있는 상상력이며 이 상상력의 산물인 소설 등 문학입니다. 따라서 자유로운 문학이 활성화되어야 음모론의 장악력이 약화됩니다. 소설가인 필자 데이비드 발다치(David Baldacci)는 자신 같은 소설가들이 음모론에 맞설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과연 필자의 주장대로 '팩트'만으로는 음모론이나 '신화적' 이데올로기를 부술 수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절충론을 채택하면 어떨까요? 기자와 역사가는 열심히 '팩트'를 알리고, 소설가는 다양한 '스토리'를 제시하는 '투 트랙' 전략입니다. 몰랐던 팩트와 평소 생각해보지 못했던 상상으로 사람들의 생각 지평을 넓혀나가는 일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사회 곳곳에서 암약하는 무수한 음모론자들에게 지금보다 더 좋은 시절은 없었다. 정치인과 정부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허위정보를 밀어붙인다. 챗봇은 환각을 일으킨다. 선동가들은 급증한다. 화성에 살고 있다고 해도 될 만큼 유별난 자신들만의 온실 속에 사는 막대한 부유층 인사들은 수억 달러를 쏟아부으며, 서로 충돌하는 현실들 속에서 이미 휘청거리는 유권자들을 조종하려 든다.


여기에 일부 음모론이 최소한 어느 정도 그럴듯한 것으로 밝혀졌다는 사실—조금씩 흘러나오는 미확인비행물체(UFO) 관련 정보 공개를 떠올려보라—까지 얹어지면, 진실이 조작됐다는 관념이 칡넝쿨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성하기에 완벽한 토양이 마련된다.


이러한 날조가 도처에 널려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 사회에 덜 위험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한 구상을 바꿔놓을지도 모른다.


과학이 등장하기 전, 신화는 우리가 자연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의 하나였다. 천둥과 번개에는 토르가 있었고, 난파는 비명을 지르는 세이렌으로 설명했으며, 겨울의 황량함은 페르세포네의 납치 때문이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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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학과 기술의 진보에 힘입어 그런 단계에서 대체로 벗어났다.


하지만 인간 심리에 내재된 무언가는 여전히 우리를 비주류 이론의 토끼굴 속으로 거세게 밀어 넣는다. 신화 만들기는 여전히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제는 신뢰하지 않는 권력기관과 첨단 시스템에 관한 의심에 그 방식을 적용할 뿐이다.


나 역시 종종 내 마음속에서 비주류 이론을 탐색하는 소설가이기에 이를 잘 안다. 지난 여러 해 동안 내 소설이 논픽션처럼 읽힌다는 독자 편지를 많이 받았다. 꼭 그렇게 의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설득력 있는 스릴러를 구성하려면 작가가 현재 가능한 모든 일을 숙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미래에 벌어질 법한 어둡고 두려운 행위를 현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다.


내가 초기에 쓴 소설들의 줄거리 중 일부는 오늘날 보면 진부하거나 소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23년 전에 쓴 '완전한 진실The Whole Truth'에서는 이익을 챙기기 위해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려는 군수업체가 뛰어난 여론조작 전문가를 고용해, 세계적으로 끔찍한 파장을 몰고 올 범죄가 일어났다고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을 속인다.


'완전한 진실'이 출간된 이후 달라진 것은 허위정보 전달의 효율성과 그 완성도다. 베테랑 기자들이 팩트에 입각해 쓴 기사 한 건마다, 누구라도 허황되고 왜곡된 믿음에 기반한 수많은 챗봇 계정을 풀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이 거짓들은 사실처럼 보이도록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가장 냉소적인 사람들조차 속아 넘어갈 수 있다. 갈수록 정교해지는 딥페이크까지 더해지면서 현실을 왜곡하는 것은 물론 그 위에 자신만의 교두보를 구축하기도 그 어느 때보다 쉬워졌다.


마치 정보 생태계 전체가 과열된 상상력으로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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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에게는 이런 문제가 없다. 동물들은 감각을 통해 소리, 냄새, 바람의 변화와 같은 사실을 그대로 전달받기 때문에 지진이나 홍수 같은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할 수 있다. 어느 지하 벙커에서 권력에 굶주린 미치광이들이 인공 강우를 퍼붓거나 샌앤드리어스 단층에서 핵폭탄을 원격 기폭해 그런 참사가 일어났다는 식의 주장에 동물들이 넘어갈 리는 없다. 하지만 인간이 번영하고 혁신하며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간의 정신이 본능적 감각과 상식을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상상력이야말로 다른 생명체와 인간을 가장 뚜렷하게 구별 짓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잘못된 무기를 들고 정보의 붕괴와 사회적 분열에 맞서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팩트를 놓고 논쟁한다고 해서 터무니없는 생각이나 허위정보, 인공지능의 환각을 막을 수는 없다. 온라인에서 빚어지는 비현실에 맞서려면 더 많은 이야기와 상상력, 소설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독재자들이 소설을 불태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1953년에 출간된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의 고전 '화씨 451'의 주제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서 대부분의 가정에는 거실 벽면에 거대한 영상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어, 오락과 통제를 목적으로 끊임없이 지껄여대는 해설을 방송한다. 그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독서를 멀리하게 만들고 주의력 지속 시간을 단축시키는 것이다. 영상 속 배우들은 대중의 새로운 친구이자 우상이 되어, 친구나 가족과 관계를 맺을 필요조차 없게 만든다. 이 가상의 권위주의 사회를 이끄는 지도자들은 세심하게 통제된 정보를 쉼 없이 공급하고 사람들이 우러러보며 따를 인물을 내세우는 것이 대중을 통제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긴다. 그것으로도 대중을 권위주의적 서사에 묶어두기에 충분하지 않을 경우, 소설 속 '방화수fireman'들은 책을 불태워 사람들의 손에 사상이 닿지 못하게 차단한다.


소설이 훌륭한 교육을 대신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팩트는 언제나 온전히 다 알려질 수 없기에, 소설가들은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바로 그 사실 너머의 더 깊은 진실을 탐구한다.


내 2022년 소설 '6시 20분의 남자The 6:20 Man'에 대한 아이디어는 파나마 페이퍼와 판도라 페이퍼 사건에서 얻었다. 두 사건 모두 치밀하게 설계된 페이퍼컴퍼니와 각종 금융·법률적 사기 수법을 통해 어떻게 수조 달러에 달하는 돈이 세상의 눈과 세금을 피해 세계를 떠돌 수 있는지를 폭로한 문서 유출 사건이다.


국가원수, 억만장자, 왕족, 세계적 셀럽들 등 유력 인사들의 실체가 폭로되고 연루되었다. 정계에서 사임이 이어졌고, 많은 유명인사들이 큰 망신과 공개적인 수치를 겪었다.


하지만 당시 언론 보도가 적어도 내게 답해주지 못한 질문이 있었다. 수조 달러에 달하는 돈을 한데 모아 사용한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나는 음모론자의 사고방식을 최대한 발휘해 이런 구상을 떠올렸다. 소설 속 악당들은 전용기나 요트를 더 사는 대신 막대한 자금을 모아 세계 각국의 사람과 권력을 사들인다. 세계의 운동장을 자신들에게 더욱 유리하게 기울이려는 것이다.


나는 발상을 극단까지 밀어붙였다. 그러려면 복잡한 현대사회가 품은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해야 했다. 목표는 독자에게 새로운 음모론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현실만 가능하다고 말하는 모든 경직된 사고방식에 균열을 내는 것이었다.


음모론자는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이념적 세계관을 신봉한다. 소설가는 서사를 탐구하고 주제와 모티프, 감각의 의미를 짚어가며 약 80억 명이 살아가는 세계의 복잡성을 전달하려 한다.


훌륭한 소설은 언제나 독자를 다양한 인물의 처지에 서보게 만든다. 독자는 그들과 함께 고통받고 울며, 그들의 기쁨과 도전, 야망을 함께 경험한다. 어떤 이야기도 마지막 독자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진정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소설마다 자신만의 독특한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글은 독자 각자의 개성이라는 필터를 거친다.


그런 맥락에서 소설이 빚어내는 상상력은 설령 잔혹행위나 억압을 묘사하더라도 우리를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언제나 유의미할 것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선함과 어둠을 모두 그려냈기 때문이다. 인류가 진화하더라도 여러 면에서는 변함이 없다. 오늘날 사람들도 여전히 셰익스피어 시대의 선조들과 비슷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게 꼭 나쁜 일은 아니다. 이는 우리 내면의 인간성을 보여주는 표지이자 서로를 잇는 연결고리다.


AI가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챗봇은 결함 있는 인물과 주제, 서사의 굴곡, 실패와 승리, 그리고 모호한 결말을 담은 이야기를 결코 상상해낼 수 없다.


챗봇은 뒤섞인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해 패턴을 감지하고 문구를 끄집어낸다. 상상력이 발휘되는 순간은 오직 누군가가 챗봇의 메시지를 받아 행동으로 옮길 때뿐이다. 물론 AI는 인간을 흉내 내고 인간의 패턴을 토대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게 바로 핵심이다. 나는 대형언어모델(LLM) 학습에 나와 다른 수많은 작가의 작품을 무단 사용한 오픈AI와 마이크로소프트를 상대로 제기된 집단소송의 원고로 현재 참여하고 있다. (그렇다, AI 업계는 수많은 책을 읽는 것이 초지능에 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결론지었다. 누가 알았겠는가?)


최고의 소설은 노골적으로 거짓을 진실로, 서사를 교리로 팔려 하지 않는다. 물론 주제와 메시지가 노골적이거나 대중의 격렬한 반응을 촉발하는 소설도 많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 '허클베리 핀의 모험', '앵무새 죽이기'가 그런 사례다. 하지만 이 소설들 중 어느 것도 일련의 팩트들을 전달하기 위해 기획된 것은 아니다.


소설은 어떤 줄거리가 왜 옳을 수 있는지, 혹은 그 반대인지, 아니면 어떤 면에서는 둘 다인지 독자로 하여금 생각하고 상상하게 만든다. 그리고—이것이 가장 중요한 대목인데—독자로 하여금 또 다른 책에 손을 뻗게 하고 더 많은 생각거리를 찾게 만든다. 책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특성인 공감 능력을 우리에게 선사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외연을 넓혀가며 독서하도록 이끈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경직된 음모론자와 감정 없이 사람을 조종하는 무미건조한 AI에 맞설 갑옷을 갖추게 된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했을 때 인류 문명이 비약적으로 전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책은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지성인 인간의 정신을 움직이는 특급 연료다. 바로 지금 그 인간 지성에는 구할 수 있는 모든 인류 공유의 지적 자양분이 필요하다.



데이비드 발다치는 올해 11월 출간 예정인 '올 인All In'을 포함해 60편 이상의 소설을 집필한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