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05 08:26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67세) 총리가 이끄는 새로운 일본 내각이 출범했다. 이시바 총리는 일본 자민당에서 주류를 형성해왔던 아베 신조, 아소 다로 등과는 그 결이 다른 정치가로 늘 총리 물망에 올랐으면서도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가 이번에 '우라킨'(裏金)이라는 정치자금 문제로 자민당이 궁지에 몰리는 상황에서 자민당의 새 리더로 구원등판하게 되었다.
이시바 총리는 '국방 오타쿠'라고 불릴 정도로 일본을 둘러싼 국방, 안보 문제에 가장 큰 관심을 쏟아온 정치가로서 중국의 위협 앞에서 일본이 안보를 스스로 꾸려나갈 수 있을 정도의 독자성을 갖기를 바라고 있다. 이러한 독자성 확보와 함께 한국과의 협력이 일본의 외교안보 전략에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시바 내각의 출범에 기대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의 솔직함을 중시하는 조금은 주관주의적인 태도가 복잡한 현실과 잦은 충돌을 보이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갖게 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웃국가의 새 지도자가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를 대략이나마 알아둠으로써 그가 앞으로 한국 및 동아시아와 관련해 어떤 방향으로 외교안보 정책을 이끌어갈지 약간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시바 시게루는 지역구를 조부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 일본의 많은 "세습" 정치가들과는 달리 개인적 인기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구축해 온 정치가다. 물론 아버지도 도쿄제국대 출신의 관료이자 정치가였고, 아버지의 절친인 다나카 전 총리의 도움으로 정계에 입문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의 경우, 사무차관 등 고위관료나 참의원, 돗토리현 지사, 자치부 장관은 역임했지만 중의원(衆議員)으로서 자신의 지역구를 유지해왔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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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바 총리는 도쿄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지사직을 맡고 있던 돗토리현에서 자라났고, 대학은 게이오대 법학부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후 미쓰이은행(현재의 미쓰이스미토모은행)에서 4년간 근무후 다나카 전 수상의 권유에 따라 정계에 입문해 1986년 돗토리현에서 중의원에 당선되었다. 당시 29세로 전국 최연소 국회의원이었다. 이시바 총리의 정치이력은 한마디로 비주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자민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하기도 했고, 일본 정계의 풍운아 오자와 이치로가 이끄는 신당(신생당)에 참여하기도 했다가 다시 자민당에 복당하기도 했다.
그는 개신교도답게(외가가 유명한 기독교 목회자 집안이다) 양심에 따른 정직함과 솔직함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다. 조직보다도 개인적 양심을 중시한다는 이미지도 있다. 그런 점에서 아베 신조 전 총리와는 대척점에 선다고도 볼 수 있다. 이시바 총리는 늘 우적(友敵)을 구분하면서 친구를 감싸고 조직의 단결을 중시하는 아베를 비판했다. 아베 식의 정치는 귀에 거슬리는 쓴 소리를 안 하게 되는 분위기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시바 총리는 귀에 거슬리는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솔직함을 중시하고 개인을 조직에 앞세우다보니 그는 늘 소수파에 속할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동지들은 그에 대해 자신들을 감싸지 않는다고 불만스러워했다. 그에 대해서 자민당 동료들은 "분위기(일본식 표현으로 '공기')를 읽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국민의 지지는 높았지만 늘 다수파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면서 번번이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패배해 총리가 될 수 없었던 이시바는 최근 몇 년간 '위기를 맞아야만 당이 나를 선택할 것'이라며 낙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 자민당이 '위기'에 빠지게 되면서 그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총리에 선출될 수 있었다.
이시바 총리는 일본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 것인가. 그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지금까지 그가 해왔던 언행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1. 역사 인식
그는 태평양전쟁과 관련해 "정부의 총력전연구소가 일미(日美) 전쟁의 시뮬레이션에서 일본은 반드시 진다라는 결론을 낸 후 정부의 중추에도 보고했는데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전쟁을 시작해 수백만 명의 국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책임은 엄중히 물어야 한다"고 언급하고, "국민에 진실을 알리지 않고, 나라를 패배로 이끈 행위가 도대체 왜 '죽으면 모두 영령'이라면서 불문에 붙이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당시 일본 지도자들에 대해 비판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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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학살에 대해서는 "적어도 포로의 처리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군기, 군율이 흐트러졌던 것도 사실이다. 민간인의 희생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종군위안부 문제에 관해서는 '협의의 강제성(군이나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이 있었다'는 발언은 한번도 하지 않는 등 아직까지 명확한 입장 표명은 없었다.
하지만 총리를 비롯한 정치인의 야스쿠니 참배, '도쿄재판은 잘못된 것이니 무효'라거나 '대학살은 없었다(난징사태)' '협의의 강제성은 없었다(종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정치인의 행동이나 발언이 과연 일본의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인가에 의문을 제기하고, 일본에 진정성 어린 마음으로 공감해주는 나라의 수를 늘려 국익을 지키는 것이 정치인의 의무라고 주장했다. 이시바 총리는 2002년 방위청 장관으로 처음 입각한 이후 야스쿠니 신사에 한번도 참배하지 않았다. 그는 야스쿠니 신사에서 'A급 전범을 분사(分祀)'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호국 영령을 모시는 것은 당연한 도리지만 A급 전범을 함부로 호국영령과 합쳐 제사지내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2. 한국 및 북한
이시바 총리는 한국인들이 '반일'을 하는 것에 대해 "조선은 독립국이었다. 그것을 병합하는 방식이 과연 옳은 방법이었냐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면서, "이웃나라(한국)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는 나라가 다른 여러 나라와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과 진정한 신뢰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쿄제국대 식민지학 교수로서 일본 식민지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박탈당했다가 일본 패전 이후 도쿄대학의 제2대 총장으로 임명되었던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는 일본의 조선 병합을 비판하면서 '당장 식민지에서 조선을 풀어줘라. 미개한 나라를 식민지로 삼는 것이지 조선처럼 문명을 갖고 있던 독립국을 식민지로 만들면 오랫동안 원망을 사게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시바 총리의 인식이 이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이시바 총리는 한국의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위안부 문제에 관해 "그럼에도 (일본은 한국측이) 납득할 때까지 계속 사과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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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국정부가 한일비밀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의 파기를 결정했던 일에 대해 "우리나라가 패전후 전쟁책임을 정면에서 바라보지 않았던 것이 문제의 근저에 있고, 여러 형태로 표면화되고 있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시바 총리는 '북한은 30년 전에도 곧 붕괴하다고 했고, 20년 전에도 곧 붕괴하다고 했지만 지금껏 건재하다. 북한은 소련, 루마니아 붕괴 사례를 제대로 연구했기 때문에 쉽게 붕괴하지 않을 것'이라며 북한붕괴론을 비판했고, 납치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북한과 일본 사이에 상호 '연락사무소'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연락사무소는 사실상의 대사관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이는데, 내각 구성 직후 이시바 총리가 평양에 연락사무소 설치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보면 북한과의 관계정상화 노력에 속도를 낼 의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외교
이시바 총리는 '아시아판 NATO'의 창설을 주창해왔다. 그의 구상에는 미일관계를 대등한 관계로 올리고 일본이 동아시아의 영국 역할을 맡아 미국과 일본이 함께 동아시아판 NATO를 이끈다는 외교전략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유럽의 NATO에서처럼 미국의 핵무기를 들여와 '핵무기 발사'를 공동으로 관리하는 '핵공유'도 제안하고 있다. 이시바 총리는 자민당 총리에 당선되자마자 '개인적 의견'임을 전제로 미국의 싱크탱크 허드슨연구소에 자신의 외교안보 정책의 대강을 정리한 글을 기고했는데, 여기서도 아시아판 NATO, 핵공유, 미일안보조약을 한미조약처럼 '상호방위' 조약으로 만들자면서 일본자위대의 미국령 괌 주둔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이 '논란의 여지가 크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일본의 일부 언론에서는 이 기고에 대해 신임 총리로서 "가벼운" 처신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4. 기타
이시바 총리는 일본 해상자위대로 독도를 탈환하자는 어느 국수주의적 전직 자위대 간부의 발언에 대해 그것이 군사적으로 얼마나 문제가 많은 생각인지를 공개적으로 조목조목 따져가며 비판했던 적이 있는데, 그가 '국방 오타쿠'로서 군사문제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음을 과시했던 일화다.
그는 동성결혼, 동성 파트너십 제도 도입에 관해 "활력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성을 서로 널리 인정할 필요가 있다"며 제도의 도입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고, 선택적 부부별성 법안에 관해 2010년에는 "이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요구에 응하면서, 법안에는 반대의 자세를 표하고 싶다"면서 제도 도입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2018년에는 입장을 바꿔 제도 도입에 찬성 의사를 밝혔다.
2019년 새로운 연호로 '레이와'(令和)가 결정된 것에 대해 '令'자에 대한 "위화감이 있다"며 "令 자의 의미에 대해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명령을 뜻할 수도 있는 '令'에 대해 자신도 납득이 잘 안된다는 뜻이다.
물론 그간의 발언과 행동만으로 일국의 지도자가 향후 어떤 정책을 추진할지를 예측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시바 총리 역시 자민당의 다른 세력들과 타협해야 할 것이며, 국민의 여론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고, 또 미국 등 주요 관련국들의 입장도 살펴야 할 것이다.
이시바 총리는 오랫동안 당내 소수파로서 자신의 정책을 관철시켜 온 경험이 적다. 그만큼 구상하는 시간이 길었을 것이고 그만큼 자신의 뜻을 실현시키고 싶은 조바심도 커져왔을 것이다. 거기에 기질적인 솔직함 같은 것이 대중적인 인기에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1억 3천만 명의 일본이라는 큰 나라를 이끄는데는 신중하지 못한 자세로 비판받을 여지도 있다. 이번에 허드슨연구소에 기고한 글에서 비록 '개인적 견해'를 전제로 하긴 했지만 미국령 괌에 자위대를 주둔시킨다는 방안은 일본 총리로서는 무책임할 정도로 과도한 제안으로 비쳐질 위험이 크다. 그런 과감한 제안을 내놓기 위해서는 수많은 단계의 설득을 거쳐야 하는데 이 모든 것들이 생략된 채 나온 것은 위험해 보인다.
이시바 총리가 한국, 북한에 대해 매우 진취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간의 말과 행동에서 확인되지만, 혹시나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무리하게 개인적 구상을 추진하다가 일본과 한국, 그리고 일본과 북한 관계의 개선에 차질이 빚어지지나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이시바 총리가 오랫동안 품어왔던 구상을 등불로 삼으면서도 주변국들의 분위기도 읽어가며 차근차근 나아가기 바라며, 특히 서방 자유민주주의의 동료이며 동아시아 위기 관리에 있어서 중요한 협력파트너가 되어야 하는 한국 정부와 긴밀한 대화를 이어나가기를 기대한다.
김동규는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후 외무고시(29회)를 거쳐 외교부에서 근무했다. 케임브리지대 석사, 박사과정에서 수학했고, 현재 국제시사문예지 PADO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