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윈슬로 호머, 〈허드슨강, 벌목〉, 1891–1892, 제지지(製紙紙)에 연필 밑그림 후 수채화 채색(National Gallery of Art, Corcoran Collection).
2025.10.17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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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열린 풍경화 전시는 마치 영화의 도입 '전경(全景) 쇼트'를 연속으로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인물이 등장하더라도 비중은 미미하며, 시선은 철저히 그들로부터 벗어나 있다. 대신 화면의 초점은 장면의 구성, 즉 소나무 잎의 날카로운 바늘 끝과 저녁 하늘을 물들이는 불타는 붉은빛에 맞춰진다. 이곳의 세계는 정지해 있다. 이곳의 세계는 정지한 듯 고요하며, 무언가가 일어나기를 조용히 기대하고 있다.
워싱턴 소재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에 마련된 두 개의 작은 전시실에는 30점의 수채화가 걸려 있다. 이 작품들은 마치 꿈결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코코런 컬렉션Corcoran Collection에서 선별된 이번 전시작들은 19세기 초부터 20세기 후반에 이르는 시기의작품으로, 미국 풍경화의 역사를 '수채화'라는 매체를 통해 조명한다. 한때 수채화는 감상적이고 섬세하기만 한 장르로 여겨졌으며, 하퍼스 위클리Harper's Weekly는 이를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어울리는 작업"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1866년 미국수채화협회American Watercolor Society가 창립되고 윈슬로 호머Winslow Homer, 윌리엄 트로스트 리처즈William Trost Richards 등 화가들이 활약하면서, 수채화는 비로소 독자적인 예술적 위상을 확립하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다.

윌리엄 트로스트 리처즈,〈코나니컷의 남서쪽 곶〉, 1878/1879년, 섬유질 갈색 종이에 수채와 과슈 (National Gallery of Art).
이번 전시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작품은 윌리엄 트로스트 리처즈가 그린 로드아일랜드 내러갠섯 만Narragansett Bay의 풍경이다. "웅장한 유화의 느낌이 난다"고 큐레이터 에이미 존스턴Amy Johnston은 설명한다. 전시장 한쪽 벽을 단독으로 차지한 이 작품은 푸른빛과 녹색이 뒤섞인 파도가 거친 바위에 부딪혀 하얀 포말을 흩뿌리는 장면을 담고 있다. 그림 속 갈매기들은 그림자 드리운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고, 그 형상은 마치 공중에 흩어진 손톱 같다. 리처즈는 뛰어난 유화 작가이기도 했지만, 이 작품에서는 질감 있는갈색 종이 위에 짙은 청록빛을 거칠게 휘감으며 수채화 특유의 생동감을 극대화했다. 존스턴은 "리처즈는 동시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수채화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리려 했다"며, "그 속에 보기 드문 숭고함을 불어넣었다"고 평가했다.

세스 이스트먼, 〈포트 클린턴 북서 모서리에서 본 노스 강 전망—웨스트포인트〉, 1837년, 제지지(製紙紙)에 수채(National Gallery of Art, Corcoran Collection).
그러한 장엄함은 전시 전체를 관통한다. 이는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 출신 화가 세스 이스트먼Seth Eastman의 섬세한 작품들에서도 드러난다. 1837년경 그가 그린 허드슨강 풍경 스케치는 야외에서 즉흥적으로 완성된 것으로, 짙은 녹색이 옅은 세이지색으로 번지고, 은빛 회청색으로 이어지는 구릉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포착되어 있다. 유화와 달리 수채화는 제작비가 저렴하고 휴대가 간편해, 작가에게 즉각적인 표현의 자유를 허용했다. 이스트먼의 작품에는 바로 그 즉흥성과 생생한 관찰의 힘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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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러셀 버치, 〈에코의 스프링하우스에서 본 경치〉, 약 1808년경, 제지지(製紙紙)에 수채, 검정 잉크, 연필(National Gallery of Art, Corcoran Collection).
1808년경 윌리엄 러셀 버치William Russell Birch가 그린〈에코의 스프링하우스에서 본 경치View From the Springhouse at Echo〉는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울창한 숲을 그린 이 스케치에는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비치며, 가느다란 덩굴이 검정색 잉크로 정교하게 얽혀 있다. 작품 전체에는 부드러운 조화가 감돈다. 황금빛이 은은히 섞인 회갈색 바탕 위에 나무 기둥들은 섬세한 사선 음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그림은 자연을 '연구'하기보다는, 자연 그 자체를 '향유'하는 기쁨에 더 가깝다. 관람자의 시선은 나뭇가지 사이를 미끄러지듯 오가며 숲의 깊은 숨결을 따라간다.
윈슬로 호머Winslow Homer 역시 1891년에 같은 주제를 다루었다. 그의 작품에서는 울트라마린의 짙은 띠가 가느다란 갈색과 카드뮴 화이트의 통나무들로 갈라지고, 언덕은 올리브빛 녹색으로 씻어낸 듯 표현되어 있다. 화면 중앙의 두 인물은 쏟아지는 사파이어빛 물결 속에 거의 잠겨 보인다. 호머는 종이의 여백을 일부러 남겨 두었고, 결코 과하게 덧칠하지 않았다. 그 절제의 미학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놀라울 만큼 정교하다. 찰나의 장면이 영원히 기억 속에 새겨진 듯, 시간의 한순간이 변치 않는 인상으로 고정되어 있다.

윌리엄 러셀 버치, 〈에코의 스프링하우스에서 본 경치〉, 약 1808년경, 제지지(製紙紙)에 수채, 검정 잉크, 연필 (National Gallery of Art, Corcoran Collection).
20세기에 이르면, 그 노스탤지어는 한층 더 뚜렷해지다가 곧 대담한 모더니즘으로 이행한다.
도라 루이즈 머독Dora Louise Murdoch의 〈파믈리 가든Parmelee Garden〉은 윤기 나는 분홍색과 라일락빛으로 번져 있으며, 조경가 엘런 비들 시프먼Ellen Biddle Shipman이 설계한 워싱턴 북서부 저택의 애수 어린 정원을 중심에 담고 있다. 울창한 정원을 사랑했던 시프먼은 자신의 조경 작업을 "마치 화가처럼" "식물이라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 여겼다.

알마 토머스, 〈겨울의 그림자〉, 약 1960년경, 제지지(製紙紙)에 수채와 검정 잉크(National Gallery of Art, Corcoran Collection).
수채화의 예술성은 알마 토머스Alma Thomas의 1960년경 작품 〈겨울의 그림자Winter Shadows〉에서 폭발적으로 드러난다. 워싱턴 D. C. 15번가 그녀의 집 창밖에 서 있던 호랑가시나무를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울트라마린과 제이드빛이 라벤더와 연분홍색의 붓 터치로 뒤섞인 색채의 교향곡이다. 그림 전체에 리듬감이 흐른다. 색채가 오르내리며 박동하듯, 화면은 음악처럼 살아 움직인다. 토머스는 수채화의 섬세한 투명함 속에서 빛과 리듬, 그리고 감정의 진동을 하나의 추상적 질서로 승화시켰다.
많은 화가들은 마치 자신 내면 너머의 세계를 탐색하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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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즈는 내러갠섯 만Narragansett Bay의 해안을 따라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절벽이 바다로 튀어나온 형태와 파도의 흐름을 오랜 시간 관찰했다. "나는 물결의 밀고, 뛰고, 다시 물러나는 움직임을 구분해보려 애쓴다"고 그는 미술 수집가 친구 조지 휘트니George Whitney에게 쓴 편지에서 적었지만, "그 굉음과 거센 물살에 넋을 잃곤 한다"고 고백했다. 리처즈에게 자연은 두려움이자 경이였고, 그는 그 힘에 자신을 기꺼이 맡겼다. 그에게 그러한 몰입은 일종의 은총이었고, 그것이 바로 그의 예술을 이끌었다. 그는 제자 피델리아 브리지스Fidelia Bridges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중요한 것은 자네가 무엇을 성취하느냐가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무엇을 배우느냐일세. 그것이 자네에게 겸손과 인내, 그리고 꾸준함을 가르쳐준다면, 그 삶은 좋은 삶일세."
《코코런 컬렉션 소장 미국 수채화 풍경화전》,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2026년 2월 1일까지 개최.
앤젤리카 행킨스Angelica Hankins는 미국 워싱턴 D.C.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이자 편집자로 워싱턴포스트, 스미소니언매거진 등에 기고한다. 2023년에는 '블루 펜슬 앤 골드 스크린 어워드'에서 작가 포트폴리오 부문 1위를 차지했다. 행킨스는 존스홉킨스대 석사 과정을 우등으로 졸업했으며, 현재는 미국 국립인문기금이 발행하는 계간지 휴매니티스Humanities의 부편집장으로 재직 중이다.
역자 이희정은 영국 맨체스터대 미술사학 박사이며, 역서로 '중국 근현대미술: 1842년 이후부터 오늘날까지'(미진사, 2023)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