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

우크라이나 휴전을 위한 한국전쟁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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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7일부터 '2008년 유엔에서 수집한 사진 기록물'을 국가기록원 누리집에서 '한국과 유엔'이라는 주제로 공개한다. 이번에 공개되는 유엔 사진기록물에는 1947년 한국대표의 유엔총회 참석부터 2006년~2008년까지 반기문 사무총장의 활동 모습까지 포함되어 있어 있다. 사진은 1951년 휴전회담에 참석한 유엔군 대표들. (행정안전부 제공) 2018.11.7/뉴스1

2023.07.07 13:16

Foreign Affai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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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은 여러모로 한국전쟁을 닮았습니다. 현재 이 전쟁을 어떻게 멈추게 할 것인가가 논의되기 시작했는데, 7월/8월자 포린어페어스의 기사는 한국전쟁의 휴전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와 한국을 비교하는 이 기사는 양 전쟁의 비교를 통해 우크라이나의 현 상황을 더 명확히 이해하도록 하는 동시에 한국전쟁 당시 상황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볼 기회를 줍니다. 특히 한국 독자들에게 이제는 기억이 희미해진 당시 한국전쟁의 상황을 우크라이나를 통해 다시 한번 살펴볼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소중한 기사입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휴전협정 노력을 방해하면서 군사적 지원, 경제적 지원,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는 장면은 (미국으로서는 분통 터지는 이야기겠지만) 우리로서는 곰곰히 생각해 볼 점이 많습니다. 장문의 이 기사를 꼼꼼히 읽고 기억해 두면서 향후 우크라이나 전쟁이 어떻게 끝나게 될 지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어떤 전쟁이었고 어떻게 '휴전'이라는 이름의 평화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기회가 되기 바랍니다.



1952년 8월 중순,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는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 6400km 가량 떨어진 모스크바로 향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의 특사로 파견된 것이다. 당시 두 공산 국가는 동맹국이었지만 동등한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련은 초강대국이었고 중국은 소련에 경제지원과 군사장비를 의존하고 있었다. 2년 전 마오쩌둥과 스탈린은 북한 지도자 김일성의 남침을 허락하면서 일종의 합작사업을 시작했다. 미국이 즉각 남한 지원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침공 직후 김일성에게 전보를 보내 "조만간 개입주의자들1이 불명예스럽게 한반도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상황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1950년 가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북한으로 진격하자 중국이 참전했다. 1951년 중반이 되자 침공 전 북한과 남한을 구분하던 38도선을 따라 피비린내 나는 교착 상태가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해 7월부터 양측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협상의 목적은 휴전에 도달하고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논의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포로 교환에 관한 세부 사항으로 인해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1952년 여름 저우언라이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공산군의 상황은 암울해 보였다. 공습으로 북한의 산업 시설이 파괴되고 모든 도시가 큰 피해를 입었다. 식량도 부족했다. 그 해 2월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 "전쟁을 계속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약 5개월 후,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조속한 휴전"을 간청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마오쩌둥은 미국의 요구에 맞서 굳건히 버티기로 결심했고, 김일성만큼 전쟁상황에 대해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마오쩌둥도 자신의 나라가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냉전 기간 동안 저우언라이는 냉철한 외교관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그런 저우언라이도 나쁜 소식을 가지고 모스크바에 도착한 상태에서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의 임무는 스탈린이 휴전에 얼마나 마음이 열려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이 전쟁의 배후였기에 전쟁을 중단하자는 이야기를 들으면 불쾌해 하리라 간주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면담은 8월 20일에 이뤄졌다. 스탈린은 중국과 북한이 미국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높일 수 있는지 알고 싶어했다. 저우언라이는 "양측의 전력은 거의 대등하다"고 자신감을 표명했지만 중국의 "전면적인 공세는 어려울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즉, 미국을 압박할 수 있는 마땅한 군사적 옵션이 없다는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스탈린을 안심시키기 위해 "마오쩌둥은 전쟁이 계속되는 것이 미국의 새로운 세계대전 준비를 방해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유리하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스탈린은 "마오쩌둥의 말이 맞다"고 단언했고,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이 전쟁은 미국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 북한은 사상자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 미국인들은 이 전쟁이 자기들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전쟁을 끝내고 싶어한다 … 우리쪽은 조급할 필요가 없다. 인내가 필요하다." 저우언라이는 "스탈린 동지의 관찰이 정확하다"고 찬사의 말을 했다. 그런 다음 그는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현실을 전하려 했다. 그는 북한 주민들이 "다소 흔들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약간 불안정한 상태에 있습니다. 북한 지도부 일부에서는 심지어 공황 상태까지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에 스탈린은 "이미 이러한 감정을 알고 있다"고 대답하며 짜증을 내는 듯했다. 저우언라이는 물러섰다.


한 달 후 저우언라이는 다시 스탈린에게 휴전을 수락하고 포로 교환에 관한 논쟁적인 세부 사항을 미루는 것이 어떨지 문의했다. 스탈린은 이 제안을 "여러 가능한 시나리오 중 하나이지만 미국은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스탈린은 중국과 북한이 타협을 포기하고 계속 밀고 나가기를 원했던 것이 분명했다. 저우언라이는 스탈린의 조언에 동의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스탈린의 말에 대해 저우언라이는 "값진 지시 말씀"이라고 찬사의 말을 했다.


이후 10개월 동안 전투가 이어졌고, 양측은 저우언라이와 스탈린이 논의했던 것보다 중국과 소련에 약간 불리한 조건으로 휴전에 합의했다. 그 기간 동안 수만 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결국 전체 전쟁 기간 동안 36,574명의 미국인이 사망하고 103,284명이 부상을 입었다. 중국측은 약 100만 명이 사망했고, 한반도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400만 명(남북한 합친 수)이 사망했다.


휴전으로 유혈 사태는 종식되었고, 비무장 지대가 설정되고 규정 준수를 감독하고 위반 사항을 중재하는 메커니즘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공식적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주요 정치적 쟁점들이 해결되지 않았고, 휴전협정 체결 후에도 국지적 총격전, 공습, 포격, 간헐적인 전투가 발생했다. 하지만 전면전으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휴전이 유지되었고 70년이 지난 지금도 휴전 상태는 유지되고 있다.


오늘날 한반도는 여전히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어 있는 지역이다. 북한은 주민들을 잔인하게 억압하고 핵무기로 이웃 국가들을 정기적으로 위협하는 독재자가 통치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대학살은 이제 먼 옛날의 일이며, 휴전으로 인한 평화 덕분에 한국은 탄탄한 경제를 발전시키고 결국 안정적인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휴전은 성공적이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를 황폐화시키고 있는 전쟁은 한국전쟁과 지나칠 정도로 닮아 있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이 어떻게 끝날지 궁금한 사람이라면 한국 휴전의 지속성과 휴전 지연으로 인해 초래된 막대한 인적 비용을 면밀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 유사점은 분명하다. 70년 전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에서도 교착상태의 전선과 해결되기 어려운 양국의 입장 차이로 인해 일단 폭력 사태를 멈추고 까다로운 정치적 문제는 나중으로 미루는 휴전이 필요하다. 역사학자 스티븐 코트킨은 한국전쟁 휴전으로 "한국은 미국의 안전보장과 보호 아래 번영할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비슷한 형태의 휴전으로 우크라이나 또는 우크라이나의 80%만이라도 비슷한 방식으로 번영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전쟁 휴전을 이끌어낸 협상은 길었고 어려웠으며 치열한 전투와 동시에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전쟁의 비용과 고통이 너무 커져 어느 한 쪽이 타협하게 되면서 휴전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국전쟁의 경험을 보면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어떤 종류의 타협도 싫어하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완고함이 특히 방해가 될 수 있다. 게다가 미국의 국내 정치, 그리고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나름 타당하지만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휴전을 방해할 수 있다.


현재 워싱턴에서는 우크라이나에 협상을 압박할 적절한 시기가 언제인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대체로 "아직은 아니다"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한국전쟁은 군사적 교착 상태에서 양측이 계속 싸우는 데 드는 비용이 이익보다 크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는 데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까지는 의미 있는 이득도 얻지 못한 채 엄청난 인명 피해와 파괴가 발생할 수 있다.


미국, 나토와 함께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다른 국가들이 휴전을 위해 노력하기로 결정한다면 한국전쟁의 휴전협상은 세 가지 실질적인 교훈을 제공한다. 첫째, 협상 테이블에서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전장에서의 압박을 사용해 전투와 대화를 동시에 진행시킬 의향이 있어야 한다. 둘째, 중립적 중재자는 중요한 자산이므로 모든 협상에 유엔(UN)을 포함시켜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향후 안보 지원과 전후 재건 지원을 제시하면서 우크라이나의 양보를 조건으로 걸어야 한다.


우크라이나와 서방이 완전히 승리하고 상대방이 완전히 패배하는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가장 환영할 만한 결말이 될 것이다. 한국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와 마찬가지로 확전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를 바라기가 어렵다. 우크라이나와 미국, 그리고 러시아의 침략에 반대하는 우방들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휴전이 모든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여전히 승리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싸우면서 대화하고

북한은 남한을 1950년 6월 25일 남침했다. 이틀 후 유엔은 미국과 14개의 동맹국 및 우방국(합쳐서 유엔군사령부으로 불렸다)이 남한을 도와 참전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전쟁의 첫 5개월 동안 양측 모두 협상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미군이 중국과 가까운 곳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을 우려했다. 8월에 그는 중국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미 제국주의자들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더욱 오만해져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 우리는 조선을 돕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그곳에 의용군을 보내는 형태로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10월, 마오쩌둥은 약 30만 명의 병력을 압록강 너머로 보내 진격하는 미군에 맞서도록 하는 운명적인 결정을 내렸다.


중국의 공세는 맥아더의 군대를 물리쳤다. 갑자기 한반도 전체가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질 위험에 처했다. 맥아더는 핵무기 사용도 배제하지 않고 중국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 행동을 촉구했다. 하지만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맥아더가 이젠 핵보유국이 된 소련과 전면전을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트루먼의 안보팀은 대안을 마련했다. 트루먼과 영국 총리 애틀리는 1950년 12월에 발표한 공동 성명에서 휴전 협상을 촉구하고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전 세계에 약속했다. 한편 미국의 리지웨이 장군은 중국 폭격, 북한 영토 깊숙한 곳에서의 작전 개시, 북한 수도 평양 점령 등 확전을 야기할 수 있는 행동은 자제하면서 군사적 압력을 가해 공산당을 협상에 나오도록 압박했다. 미국은 전쟁의 남은 기간 동안 이 전략을 고수했다.


공산군 측은 미국과 유엔의 협상 제안을 거부했고, 1951년 첫 6개월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리지웨이의 군대는 남한 전역을 완전히 수복했다. 공산군은 최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쪽으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전쟁 중 가장 큰 전투였던 중국의 이른바 제5차 공세에서의 참패는 마오쩌둥과 스탈린에게 결정적인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미국 외교관 조지 케넌과 막후 논의를 거친 후 유엔 주재 소련 대표 야콥 말릭은 1951년 6월 23일 휴전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회담은 7월 10일에 시작되었다. 세 가지 주요 쟁점은 휴전선의 위치, 휴전협정 감독 방법, 전쟁포로 교환이었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한 협상은 천천히 진행되었다. 공산군은 38도선을 휴전선으로 삼기를 원했다. 반면 미국은 휴전선보다 약간 북쪽에 있는 최전선(즉 '접촉선')을 선호했는데, 험준한 지형이라 방어하기 좀 더 쉽기 때문이다. 4개월 동안의 전투와 대화 끝에 11월 27일, 양측은 '접촉선'이 휴전선이 될 것이라는 데 합의했다.


= 국사편찬위원회는 오는 27일 판문점에서 개최되는 남북정상회담을 맞아 한국전쟁 당시 판문점의 모습과 판문점에서 이뤄진 휴전협정 과정을 담은 사진들을 19일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하는 사진은 국편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으로,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촬영한 것이다. 사진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협정 조인식 모습. 왼쪽 책상에 앉은 이가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이고 오른쪽 책상에 앉은 이가 공산군 수석대표 남일 대장이다. 현재 조인식장 건물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1km 정도 떨어져 있어 북한 측에 편입된 상태이다. 직접 방문할 수는 없지만 판문점에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2018.4.19/뉴스1

= 국사편찬위원회는 오는 27일 판문점에서 개최되는 남북정상회담을 맞아 한국전쟁 당시 판문점의 모습과 판문점에서 이뤄진 휴전협정 과정을 담은 사진들을 19일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하는 사진은 국편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으로,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촬영한 것이다. 사진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협정 조인식 모습. 왼쪽 책상에 앉은 이가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이고 오른쪽 책상에 앉은 이가 공산군 수석대표 남일 대장이다. 현재 조인식장 건물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1km 정도 떨어져 있어 북한 측에 편입된 상태이다. 직접 방문할 수는 없지만 판문점에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2018.4.19/뉴스1


이듬해 봄에는 휴전을 감시하는 메커니즘에 대해서도 합의했다. 그러나 전쟁포로를 어떻게 교환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진전이 없었다. 트루먼은 자발적 송환을 요구했는데, 이는 약 17만 명의 공산군 포로들이 자유롭게 고국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나라에 거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은 이러한 선택권이 주어지면 약 10만 명의 북한과 중국 포로들이 귀환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오쩌둥과 스탈린에게 이러한 대량 이탈은 공산주의가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결코 자발적으로 떠나지 않을 유토피아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약화시킬 위험이 있는 것이었다. 1952년 10월, 수개월간의 교착 상태 끝에 리지웨이의 후임인 클라크 장군은 협상을 무기한 중단했다.


아이젠하워는 다음 달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아이젠하워는 취임과 동시에 국무장관 덜레스와 함께 한국전쟁을 더욱 파괴적인 전쟁으로 확대할 의향이 있다는 신호를 공개적으로나 사적으로 보냈고, 이를 통해 공산주의자들에게 더 이상의 전투는 손해와 고통을 증가시킬 뿐임을 일깨우려 노력했다.


협상이 중단되고 아이젠하워가 당선되자 캐나다와 영국을 비롯한 많은 유엔 회원국과 미국의 동맹국들은 전쟁이 확대될까 우려했다. 유엔에서의 논의 끝에 인도 외교관 크리슈나 메논은 휴전 후 포로 송환을 위해 중립국(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스웨덴, 스위스)으로 송환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는 결의안을 작성하게 되었다. 미국은 주요 동맹국들과의 관계가 깨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마지못해 이 제안에 응했다. 그리고 이 아이디어는 곧 타협의 기초가 되었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하자 소련과 중국 지도자들은 즉시 회담에 대해 유화적인 노선을 채택했다. 4월 26일 협상이 재개되었다. 5월 초, 소련과 중국은 인도가 제안한 유엔 결의안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중립국 송환위원회를 도입했다. 안타깝게도 사소한 세부 사항으로 인해 협상은 늘어졌고 전투는 격화되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공습을 강화했고, 5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군의 북한 진격, 만주의 중국 공군기지 폭격, 회담의 진전이 없을 경우 핵무기 사용 등의 옵션을 담은 지침을 승인했다.


1953년 5월 25일, 미국 대표단은 약간의 조정을 거쳐 송환위원회 설치를 수용하는 최종 입장을 발표했다. 공산군 측이 이 조건을 거부할 경우 군사 행동을 강화할 수 있는 권한이 클라크 장군에게 부여되었다. 덜레스와 클라크를 비롯한 미국 지도자들은 중국, 북한, 소련 관리들에게 대화채널을 통해 전쟁을 확대하고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미국의 강력한 의지를 전달했다.


소련은 6월 4일 최종 입장에 동의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남한의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 2주 후 이승만은 북한군 포로 약 2만 7천 명을 일방적으로 석방하며 모든 과정을 뒤집었다. 공산군은 2년 만에 최대 규모의 공격으로 보복했다. 이 과정에서 약 3만 명의 한국군이 사망했고, 미국의 당근과 채찍에 의해 이승만 정권은 결국 응하게 되었다. 마침내 7월 27일 휴전이 체결되었다.

교착

미국과 그 우방국들이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멈추기 위한 협상의 전망을 저울질할 때, 그들은 휴전 협상의 지연으로 남한이 치러야 했던 막대한 대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협상 시작 시점의 영토적 현상 유지에 동의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핵전쟁의 위협과 2년간의 격렬한 전투가 필요했고, 미국과 동맹국, 남한 측에는 15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중국과 북한 측에는 25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추가로 발생했다.


아마도 전쟁이 지연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공산군이 전쟁의 정확한 비용을 인식하고 미국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일 것이다. 1950년 11월 압록강 근처에서 발생한 사태2는 트루먼과 다른 서방 지도자들에게 협상을 추진하도록 설득한 반면, 마오쩌둥과 스탈린에게는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역사학자 션즈화(沈志華)와 샤야펑(夏亞峰, Yafeng Xia)이 쓴 것처럼, 마오쩌둥은 원래 "전쟁을 국지화"하고 단순히 중국을 방어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미8군의 패퇴를 계기로 마오쩌둥은 대담해져서 목표치를 높였고, 중국의 군사력을 통해 미국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대만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종식시키며 중국의 유엔 가입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마오쩌둥이 이러한 야망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전쟁 전의 현상유지에 기초한 휴전을 모색하기까지는 공산군 측에 약 15만 명의 사망자, 부상자 또는 포로가 발생하는 6개월간의 격렬한 소모전이 필요했다. 1951년 6월 중순이 되자 스탈린도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마오쩌둥과 스탈린은 휴전에 합의하기 전에 협상력을 올리기 위해 지속적인 군사행동을 사용하려고 했다. 중국의 막대한 병력 우위를 고려할 때 미국이 소모전으로 중국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마오쩌둥은 중국측 협상가 중 한 명에게 "단호한 입장을 취해야만 주도권을 잡고 적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협상전략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려면 몇 달 더 협상을 진행하는 동안 적에 대한 힘의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공산군은 그 시험에 실패했다. 첫째, 미국, 영국, 호주의 연이은 공격으로 마오쩌둥은 1951년 가을에 접촉선을 휴전선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했다. 그 후 마오와 스탈린이 포로 교환에 대한 양보를 거부하자 클라크는 1952년 공산군에 대한 공습을 강화하여 평양의 목표물과 북한 및 만주 전역에 전력을 공급하는 수력발전소를 타격했다.


역사학자 장수광(張曙光, Shu Guang Zhang)에 따르면 1952년 후반에 이르자 이 전쟁은 중국정부 세입의 약 50%를 쓰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이미 세금을 인상하고 중국이 막대한 부채를 지고 있던 소련에 또 다시 차관을 요청했다. 8월에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 회의에서 전쟁 지출을 절반으로 줄이지 않으면 중국 경제가 붕괴할 것이라고 관리들에게 알렸다. 국가 금고의 고갈은 중국의 사회주의 경제로의 완전한 전환을 지연시키고 있었고, 마오쩌둥과 당은 내부의 반대 목소리에 대해 초조했다.


김일성보다는 덜 걱정했지만 마오쩌둥은 휴전을 고려할 때 이러한 경제적, 정치적 우려를 저울질해야 했다. 그는 중국을 분열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중국 내전에서 승리한 지 불과 3년 만에 내부적으로 권력을 공고히 한 중국 공산당이 나약해 보이는 것도 원치 않았다. 마오쩌둥은 궁지에 몰리게 되자 1952년 8월 저우언라이를 모스크바로 보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오로지 소련의 군사력을 보존하고 중국과 북한을 이용해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약화시키며 성급한 양보를 피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의 관점에서는 북한과 중국의 사상자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하고 나서야 소련의 입장이 유연해졌다. 스탈린의 후계자 말렌코프와 흐루쇼프를 비롯한 소련 고위 지도자들은 미국과 계속 경쟁은 하되 긴장을 줄이고 직접적인 충돌 위험을 낮추는 '평화적 공존'을 추구했다. 이들에게 한국을 놓고 계속 싸우는 것은 비용이 너무 커 보였다.


하지만 스탈린에만 논의를 집중하다 보면 전쟁이 조기에 끝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를 놓치게 될 위험이 있다. 공산주의가 민주주의보다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이데올로기적 욕구와 강경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국내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미국은 계속해서 전쟁 포로가 본국으로 송환될지 여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고, 이 때문에 협상은 18개월 동안 표류했다. 트루먼에게 고국으로 송환될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포로의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이었다. 1952년 5월, 그는 강제송환은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도덕적, 인도주의적 원칙에 반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당시 미국의 정치문화는 맹렬한 반공주의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이 정책은 초당적으로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이 문제로 협상이 난항을 겪게 되었지만, 트루먼은 선거가 있는 해에 공산주의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비난을 받게 될 위험성 때문에 후퇴할 수 없었다. 나중에 아이젠하워도 이 문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면 우파 공화당원들이 물러터졌다고 비난할까 걱정하기도 했다. 트루먼이 애초에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면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이 죽기 전에 훨씬 일찍 휴전에 합의했을지도 모른다. 간단히 말해, 두 명의 미국 대통령은 특정한 영토적 목표나 전술적 이점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내정치적 반발을 피하기 위해 수천 명의 미군이 죽도록 내버려둔 것이다.


휴전을 지연시키는 데에는 한국인들도 한몫을 했다. 이승만의 선제적 포로 석방으로 전체 협정은 거의 무산될 뻔했다. 이승만의 이해관계는 미국의 이해관계와 달랐다. 그는 한국이 자신의 정부 아래 통일되기를 원했고 1951년 협상에 마지못해 양보했다. 이승만은 또한 미국과 상호안보조약을 맺어 공산주의자들이 장래에 자신의 군대를 격파하려는 시도를 억제하기를 바랐다. 미국은 이 지역에서 일본을 방어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난색을 표했다. 그래서 이승만은 휴전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휴전 협상 자체를 뒤흔들고자 했다. 중국의 보복과 이에 따른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 후에도 미국은 한국의 군사력 증강과 장기적인 경제원조, 그리고 이전에 거부했던 상호안보조약 체결을 약속함으로써 겨우 이승만의 협조를 얻어냈다. 그리고 이승만은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다. 미국은 휴전협정을 준수하겠다는 그의 말만 믿어야 했다.

평화로 가는 험한 길

한국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현재 한 독립국가는 침략행위를 당하고 있고, 다른 쪽의 통치자는 승리에만 몰두하고 있다. 한국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강대국들이 무대 중심에 있고 핵무기가 배후에 있으면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어느 쪽도 전장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것 같지 않으며, 어느 쪽도 포괄적인 평화 협정을 추구하는 데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유사점을 고려할 때, 한국전쟁 휴전을 지연시킨 동일한 함정 중 일부가 우크라이나에서 휴전을 위한 노력을 방해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사자들이 협상을 시작하도록 설득하는 데 장기간의 싸움이 필요할 수 있다. 푸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서방 지도자들은 전장 상황이 자기쪽으로 유리해지거나 상대방이 먼저 휴전을 제시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협상시점을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협상이 시작되더라도 이 문제는 지속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전장 상황이 개선되면 조금 더 유리한 휴전선이나 감시협정과 같은 더 좋은 거래조건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가능성이 높다.


푸틴이 1952년 스탈린이 취했던 것과 유사한 입장을 취한다면 또 다른 장애물이 등장할 것이다. 푸틴은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우크라이나를 해체하는 데 전념하고 있으며 2014년 이후 자신의 군대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를 잃는 것을 싫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높은 전쟁 비용은 그의 의지를 약화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게다가 경제적, 인적 비용은 차치하고 자신이 양보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국내정치적 비용이 푸틴의 결의를 더욱 굳힐 수 있다. 푸틴이 협상을 시작하더라도 타협을 거부하고 시간 끌기 전술을 사용하여 우크라이나와 미국, 나토로부터 양보를 얻어내려 할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처럼 미국 국내정치도 협상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어떤 접근 방식을 취하든 2024년 대선이 다가올수록, 특히 앞으로 몇 달 안에 협상이 시작되면 우크라이나 정책에 대한 다양한 정치적 공격에 직면하게 될 것다. 일부 '미국 우선주의' 공화당원들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이 낭비적이고 무모하다고 불평할 것이다. 다른 공화당원들은 일부 민주당원들과 함께 러시아와의 타협을 약한 모습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예를 들어, 휴전협정에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우크라이나'를 명시적으로 인정하는 조항이 없거나, 흑해를 통한 우크라이나 수출에 대해 항행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크름(크림) 반도 또는 돈바스 지역 일부를 러시아 점령하에 두는 경우 이러한 휴전이 국내비판을 불러일으킬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한편 우크라이나가 서방의 노선을 무조건 따를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 아이젠하워가 이승만을 상대하면서 배운 것처럼, 그리고 이후 미국 대통령들이 남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의 지도자들을 상대하면서 알게 된 것처럼, 자기보다 약한 파트너라고 해서 미국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젤렌스키는 미국이 자신에게 가하는 압력에 저항할 수도 있다. 젤렌스키의 이해관계는 미국과 나토의 이해관계와 중요한 면에서 다르기 때문에 그의 전략도 다를 수 있다. 그는 크름 반도와 돈바스를 포함해 러시아 점령하에 있는 우크라이나 영토에 대해 오랫동안 양보를 거부해왔다. 이러한 지역에 대한 양보는 향후 선거 전망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실제로 휴전이 체결되면 우크라이나는 영토를 잃고 흑해에 대한 접근이 제한되며 나토와의 안보관계가 모호해지는 등 훨씬 더 나쁜 전략적 위치에 놓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젤렌스키가 이승만보다 설득하기 어려운 상대일 수 있다. 게다가 미국과 동맹국들은 한국에 비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영향력이 적다. 우크라이나에는 미군이 주둔하지 않고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직접 싸우고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동맹 보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국에 동맹을 쉽게 제안할 수 있었지만, 현재 미국 대통령은 일부 나토 회원국들의 반대에 직면할 것이다.

시도해보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 낫다

우크라이나 휴전에 대한 모든 잠재적 장애물을 고려할 때, 2014년 러시아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벌어진 전투처럼 분쟁이 지지부진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더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전선에서 교착 상태가 정착되고 폭력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의 안정된 상태로 내려갈 수 있다. 문제는 분쟁이 이렇게 미해결 상태로 지지부진해지면 러시아가 결국 전면전으로 돌아올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이다. 푸틴은 자신의 입지가 개선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공세를 시작할 수 있다. 따라서 서명된 문서, 국제 중재, 합의된 휴전선, 휴전 감시 메커니즘 및 협정위반에 대한 제재 조치를 포함하는 휴전이 가장 덜 나쁜 선택지이다.


휴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미국과 그 우방국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외교관들은 군사력 사용과 협상을 긴밀히 통합해야 한다. 러시아의 선의를 바라지 말고 싸우는 동시에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휴전은 러시아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압박을 지속하는 데 달려 있다. 미국, 나토, 우크라이나는 협상을 시작하되 러시아가 입장을 바꿀 때까지 전장과 다른 전선(예컨대 경제제재)에 대한 압박을 유지해야 한다. 트루먼 대통령이 1950년 말과 1951년 초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비타협적인 태도에 직면했을 때 취한 조치이다. 러시아가 계속 협상을 거부한다면 미국과 나토는 우크라이나에 더 많은 장비(예컨대 에이태큼스 미사일, 탱크, 전투기, 방공 시스템)를 제공하고 특수 작전 부대를 우크라이나에 배치하여 비전투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면서 푸틴에게 시간 끌기의 대가가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 줄 수 있다. 협상이 시작되면 우크라이나의 제한적인 공격은 협상 테이블에서 요구하는 과정과 면밀히 연계될 수 있다. 동시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안보 및 경제 지원을 늘릴 수 있다. 2022년에 미국은 약 770억 달러, 다른 나토 국가들은 630억 달러를 기여했다. 휴전이 이루어질 때까지 최소한 매년 같은 금액을 우크라이나를 위해 기여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협상을 시작하고 수행함에 있어 미국과 나토는 유엔을 포함시켜야 한다. 오늘날 워싱턴의 일반적 관점은 유엔이 외교적 도구로서 쓸모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1953년 덜레스도 같은 생각을 했지만, 유엔의 중재는 결국 한국 휴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늘날 러시아는 미국, 나토, 우크라이나의 제안보다 유엔의 중립국이나 우방국이 제안하는 타협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인도와 같은 중요한 회원국이 제3자적 입장에 서 있다는 사실은 휴전 협정을 감시하고 조사하는데 있어서 유엔의 신뢰성을 높여준다.


젤렌스키를 타협으로 유인하기 위해 미국과 유럽 정부는 협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젤렌스키와 긴밀히 협의하고 우크라이나측 대표들이 모든 회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우크라이나의 양보 의지를 조건으로 내걸고 전후 안보 및 경제 지원을 약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어떤 협상에서든 안보 보장을 원할 것이 분명하다. 조만간 나토 회원국이 될 가능성은 낮지만 미국과 나토 외교관들은 우크라이나 군에 대한 장기적인 자문 및 훈련 약속과 같은 다른 종류의 보장 모색을 시작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대화의 가장 큰 장애물 즉 푸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푸틴의 고집은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푸틴이 전쟁의 고통과 비용에 무관심하다면 미국과 나토는 쓸만한 지렛대가 없다. 제재를 통해 러시아 엘리트를 표적으로 삼고 러시아 야당 운동을 지원하는 것은 겉보기에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미국과 동맹국들은 러시아에 대한 접근성이 너무 낮고 러시아의 정치적 역학 관계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해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다. 푸틴이 퇴진할 것이라는 희망은 더욱 터무니없어 보인다. 스탈린의 비타협적 태도는 오직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을 뿐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푸틴은 축출될 수도 없고 곧 죽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협상을 추진하는 것은 그가 언젠가는 군사적, 경제적 압력에 굴복할 것을 기대하는 일종의 도박이기도 하다.


따라서 회담이 성사되거나 휴전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러시아는 미국과 나토보다 더 오래 버티기로 결심할 수도 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분이 한국에 대한 지분보다 낮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어떤 미국 대통령도 미군을 우크라이나군과 함께 전투에 투입할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또한 미국이 북한에 가했던 댐 파괴, 발전소 파괴, 수도 폭격과 같은 수준의 파괴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협상이 성공했다고 해서 역사가 반복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협상을 추구하는 것이 도박이라면 위험은 낮고 잠재적 보상은 큰 도박이다. 실패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결과를 낳을 뿐이다. 그러나 성공하면 우크라이나를 보존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을 완화하고, 러시아의 추가 침략을 억제하고, 핵확전 우려를 잠재울 수 있다. 한국전쟁 휴전이 만들어낸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평화는 우크라이나와 그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승리가 될 것이다.



카터 멀케이시언은 미국 해군대학원 국방분석학과 교수이며 저서로 '한국전쟁'(The Korean War: 1950-53),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사'(The American War in Afghanistan: A History) 등이 있다. 2015~2019년 미 합참의장 전략 특별보좌관으로 일했다.



1922년 창간된 격월간 국제정치 전문지. 미국의 국제정치 싱크탱크인 외교협회(CFR)에서 발행하는데 국제정치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매거진으로 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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