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7 13:24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이 한창이던 1967년, 에리트레아 청년 한 무리가 난징 외곽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했다. 에리트레아 청년들은 5년 전 에티오피아에 합병된 조국을 되찾기 위해 게릴라 전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사진을 보면 어떤 학생이 결국 리더로 부상할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Issaias Afwerki는 마오쩌둥 어록을 소중히 쥐고 있는 동료들과 중국인 교수들 뒷편에서 우뚝 서 있다. 팔짱을 끼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이 사진을 찍은 후 중국은 초강대국이 되었다. 난징은 이제 쇼핑몰로 가득 차 있으며, 사진의 배경에서 볼 수 있는 소박한 주택을 대담한 고층 빌딩이 대신하고 있다.
반면 에리트레아는 시간이 멈춘 듯 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손꼽힐 뿐만 아니라 매년 절망에 빠진 젊은이들이 탈출을 시도하는 거대한 감옥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에리트레아를 '아프리카의 북한'이라며 무시한다.
독자는 사진 속의 키 큰 학생이?에리트레아가 독립한 후 지금까지 내내 유일한 대통령이다?이후 역사의 구석으로 밀려났으리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교활함과 무자비함, 그리고 에리트레아의 거대한 이웃 국가인 에티오피아와 수단을 뒤흔든 끔찍한 내전 덕분에 이사이아스는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서 예상치 못한 권력 브로커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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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저명한 지도자들이 그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5월에는 베이징에서 의장대를 사열하며 국빈 대접을 받았다. 7월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면담을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2월에는 윌리엄 루토 대통령의 환대를 받으며 케냐를 찾아, 15년 전 탈퇴했던 지역 무역기구에 다시 가입했다.
서구에서는?그리고 인권을 중시하는 모든 이들에게도?그는 여전히 천덕꾸러기이자 문제의 근원이다. 올 여름 에리트레아 독립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축제에서 독일, 스위스, 스웨덴, 노르웨이, 이스라엘, 캐나다, 미국의 경찰이 이사이아스 정부 지지자와 반대자 간의 충돌로 인한 폭력 사태에 당황했다. 폭력 사태로 경찰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제 더는 이사이아스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77세의 이사이아스는 옛 동료와 언론인을 투옥하고, 군사적 도전자를 무력화시키고, 정당 설립을 막고, 의회를 무력화시키고, 총선을 치르지 않는 등 전형적인 '독재자'의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그는 전형적인 독재자와는 다르다. '민중의 사람'이라는 이미지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그는 과시를 피한다. 시진핑, 푸틴과의 정상회담에서는 정장을 입지만 국내에서는 반소매 재킷과 샌들을 신는 모습을 더 자주 볼 수 있다. 그의 아내도 수수한 차림을 즐긴다. 아비 아흐메드Abiy Ahmed 에티오피아 총리를 자택에서 영접할 때 그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권력을 철통 같이 장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국에 자신의 초상화를 걸지 않는다. 부하들도 개인숭배를 키우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이사이아스는 명품 브랜드, 개인적 부, 과시하듯 꾸민 사무실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사이아스 대통령을 여러 차례 인터뷰한 에리트레아 전문가 댄 코넬은 말한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권력 뿐이죠."
이사이아스는 1946년 아스마라 외곽에서 태어났다. 과거 내륙 왕국이었던 아비시니아Abyssinia와 홍해 사이에 놓인 험준한 고원지대의 마을 아스마라는 1890년 해안지대를 점령한 이탈리아가 자국의 첫 아프리카 식민지 행정부를 시원한 고원지대로 옮기기로 결정한 후 에리트레아의 수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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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수십 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가장 재능 있는 건축가들이 모더니즘 양식의 궁전과 아르데코 양식의 영화관을 설계하고 야자수가 늘어선 길, 광장, 분수대를 배치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1935년 베니토 무솔리니는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의 옛 이름)를 침공하기 위한 발판으로 이곳을 사용했다.
이사이아스가 태어났을 즈음 이탈리아와 독일은 2차세계대전에서 패했고 에리트레아는 영국군의 지배하에 있었다. 영국은 에리트레아를 계륵으로 여겼고 유엔에 넘겨줄 생각이었다. 문화적으로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로 흡수되길 원하는 정교회 기독교인들과 독립을 요구하는 무슬림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1952년 유엔은 에리트레아를 에티오피아와 연방으로 묶어 모두를 만족시키려 했다. 에리트레아 주민들은 에리트레아에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부여한 유엔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국기에 하늘색을 채택했다.
이사이아스의 혁명가 경력은 부분적으로는 부모 세대에 대한 반항으로 볼 수 있다. 에티오피아 국영 담배 회사에서 일했던 그의 아버지는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의 완전한 합병을 추진하는 정당 소속이었다. 그의 삼촌인 솔로몬 아브레하는 충실한 민족주의자로 에티오피아 북부 월로Wollo주의 주지사였으며, 이후 1980년대 에티오피아 군사 정권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 처형된 60명의 관리 중 하나였다.
이사이아스의 어머니는 티그라이 혈통이었는데 그는 이를 당혹스레 여겼다. 에리트레아 바로 남쪽에 있는 에티오피아의 가난한 지역 티그라이에서 온 이민자들은 아스마라에서 가장 천한 직종인 청소부, 가정부, 매춘에 종사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사이아스의 가족은 탄탄한 중산층이었지만, 그와 가까웠던 할머니는 '미스mies'(미드mead 같은 허니 와인류)를 증류해 판매하며 돈을 벌었다. 보수적인 고지대 사회에서 존경받는 직업과는 거리가 먼 직업이었다. 어린 시절 지인들은 이사이아스와 친구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가 몰래 뒷문 옆 집으로 들어가곤 했음을 기억한다.
그의 유년기 세계 밖에서는 더 큰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었다. 당시 에티오피아는 유엔의 연방 협정 조건에 따라 에리트레아의 자치권을 존중해야 했던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가 통치하고 있었다. 대신 그는 에리트레아를 서서히 속국으로 만들었다. 정당을 금지하고 학교에서 대부분의 에리트레아 사람들이 사용하는 티그리냐어 대신 에티오피아 제국의 언어인 암하라어를 사용하도록 강요했다.
이사이아스가 16세였던 1962년,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레아를 공식적으로 합병하여 하일레 셀라시에가 오랫동안 갈망했던 바다에 접근할 수 있는 땅을 확보했다. 에리트레아 사람들은 배신감을 느꼈다. 자신들이 절망적으로 가난한 아프리카 국가에서 2등 시민으로 전락하는 것을 세계는 방관하고 있었다.
이사이아스는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공학을 전공하기 위해 대학에 진학했다. 이곳에서 그는 에티오피아의 암하라 지배층 사이에서 특히 두드러진 에리트레아 사람들에 대한 멸시를 마주했다. 그 경험은 그의 일생동안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의구심을 남겼다. 또한 정치 활동에 대한 그의 욕구를 자극했다. 에티오피아의 봉건적 상황에 분노한 좌파 학생들이 변화를 요구하는 등 캠퍼스는 격동적인 분위기였다.
이사이아스는 혁명의 열병에 사로잡혔다. 1년 후 그는 학업을 포기하고 수단으로 건너가 에티오피아 군대와 경찰을 대상으로 기습공격을 벌이는 독립 운동 단체인 에리트레아해방전선Eritrean Liberation Front (ELF)에 합류했다. 많은 에리트레아 젊은이들이 이 길을 택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ELF에 합류했을 때 저지대 출신 무슬림와 고지대 출신 기독교인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조직이 분열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좌절감을 느낀 이사이아스와 두 명의 동지는 비밀 분파 그룹을 결성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에리트레아를 상징하는 알파벳 E를 함께 문신으로 새겼다. 몇 년 후, 이사이아스는 그 중 하나를 처형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감옥에서 죽었거나 썩어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967년 소수의 ELF 전사들이 선발되어 중국으로 건너가 마오쩌둥의 혁명가들로부터 군사 및 정치 훈련을 받았다. 이사이아스도 그중 하나였다.
동료 게릴라였던 메스핀 하고스Mesfin Hagos의 회고에 따르면 난징군사대학에서는 이론적인 것?"인민을 동원하는 방법, 투쟁을 이끌 전위 조직을 구성하는 방법, 인민군을 만드는 방법"?부터 고도로 실용적인 강의까지 다양한 강의가 진행됐다. 교육생들은 무엇보다도 "현지 재료만을 사용하여 폭발물을 제조하는 방법, 지뢰를 매설하는 방법, 다리를 폭파하는 방법" 등을 배웠다.
혁명 관광을 위한 시간도 있었다. 에리트레아 교육생들은 주최측의 세심한 감시를 받으며 마오쩌둥의 생가와 그가 양쯔강을 헤엄쳐 건너간 역사적인 장소, 만리장성을 보러 갔다. "중국에 다녀온 모든 사람들이 중국에 대해 큰 감명을 받았죠." 메스핀은 말한다. "당시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였기 때문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다. 중국인 강사가 우리를 대하는 방식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중국 강사들이 갖는 기대감도 컸죠."
이 경험을 통해 이사이아스는 평생 중국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됐다. 또한 중국의 술 마오타이를 좋아하게 되었으며, 정적을 제거하는 데 유용한 기법을 습득했다. 그는 마오쩌둥의 저작과 마오쩌둥에 관한 책을 탐독했다고 전해진다.
"지하 벙커에서 찍은 그의 사진이 있는데... 그의 뒤에는 모스크바의 프로그레스 출판사에서 출판한 중국어 책과 서적들로 가득 찬 책장이 보입니다." 댄 코넬은 말한다. "하지만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마오쩌둥의 군사 저술이었죠."
아프리카로 돌아온 이사이어스는 ELF가 내분에 휩싸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나중에 ELF가 파벌, 씨족, 종교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간부들이 "결코 에리트레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이사이아스는 같은 생각을 가진 동지들과 함께 ELF를 빠져 나갔고, 나중에 다른 이탈 그룹과 합병하여 '에리트레아 인민해방전선EPLF'이 탄생한다. EPLF는 마르크스주의 혁명 운동 조직으로 결국 그의 형제 중 6명이 참여하게 된다. ELF와 EPLF 사이에 격렬한 내전이 벌어졌고, 결국 ELF는 수단으로 밀려난다. EPLF는 에티오피아에 맞서는 저항운동의 대표격으로 부상했다.
EPLF 초대 총서기는 중국에서 훈련받은 또 다른 전사 로모단 모하메드 누르Romodan Mohammed Nur였지만 실질적인 지도자로 널리 인정받은 건 이사이아스였다. "그는 똑똑하고 근면하며 모든 일에 결단력이 있었고 우리에게는 그런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메스핀은 회상한다.
EPLF의 이른바 '투쟁'은 이후 20년 동안 계속된다. 1978년이 되자 다양한 해방전선이 에리트레아 영토의 95%를 장악했다. 그러나 하일레 셀라시에를 끌어내리고 스스로 에티오피아의 독재자가 된 육군 장교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Mengistu Haile Mariam은 미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대신 소련에 의지했다.
모스크바는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 중화기를 쏟아부었고 EPLF는 마오쩌둥도 인정했을 '전략적 철수'를 단행해 로라 산맥의 외딴 기지로 철수한 후 전열을 가다듬었다.
유포르비아 선인장과 야생 올리브 묘목들 사이에 숨어 활동하던 EPLF는 전성기에는 수만 명이 참여하는 '예비 국가'와 다름없었다. EPLF의 산간 은신처를 찾은 사람들은 에티오피아 전투기의 끊임없는 폭격을 피하기 위해 척박한 바위 밑에 파놓은 참호, 제약 실험실, 학교, 객실, 심지어 병원까지 갖춘 정교한 지하 네트워크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전투원들은 위험한 낮 시간에는 잠을 자고 밤에 임무를 수행했다.
명목상 EPLF는 에티오피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헌신하는 같은 생각을 가진 동지들의 집단이었다. 그러나 이사이아스는 실제로는 교과서적인 마오주의 전술을 사용하여 반대파를 분열시키고, 모든 주요 결정을 내리는 비밀 전위 조직을 만들었으며, 반대파를 탄압하는 방법으로 '자아비판'을 장려했다.
EPLF의 여성 전사로 활동을 시작했던 전 에리트레아 대사 헤브렛 베르헤Hebret Berhe는 EPLF가 "경찰 국가"처럼 운영되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아스마라에서 비밀 활동가로 일하다가 현장 전투원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충격을 받았다. "독립적인 사고의 흔적이 보이면 자아비판 시간에 불려나와 교육생들 앞에서 인신공격을 당하게 되고, 그 이후에는 아무도 당신과 같이 있으려 하지 않게 되죠."
헤브렛에 따르면, 이사이어스는 특히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고학력자들을 '쁘띠 부르주아'로 분류하며 의심했다.
일부 EPLF 단원들은 반발했다. 1970년대에 그는 이들을 공격했다. 충성심이 의심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처벌하는 두 차례의 숙청을 단행했다. 어깨에 'E'를 문신한 최초의 삼총사 중 하나인 무시에 테스파미카엘Mussie Tesfamikael은 이후 비밀리에 처형됐다.
1980년대에 이사이어스는 '세 가지 특권' 캠페인을 시작했는데, 이 캠페인은 중간 간부들이 상사의 음주, 여성편력, 지위를 이용한 착취에 대해 수치심을 주도록 독려하는 것이었다. "재판은 없었고 공개적인 망신만 당했지만, 그때가 최악이었습니다." 메스핀 하고스는 회상한다. "자기 부하들 앞에서 굴욕을 당했는데 어떻게 그들을 지휘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공격당한 사람들 중 일부는 그의 절친한 친구들이었습니다." 이사이아스 자신도 취하면 주먹을 종종 휘두르는 술꾼으로 정평이 나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난에는 아이러니가 있었다.
그가 야기한 공포에도 불구하고 이사이어스는 존경받기도 했다. 동지들은 그가 결코 가만히 앉아있지 않고 뭔가 실용적인 일?요리, 대피소 건설, 참호 벽 수리 등?이나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중도에 그만뒀던 교육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는지, 그는 여행에서 돌아오면 전사들에게 읽으라고 권하는 책 더미를 들고 돌아와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사회주의 이론, 시오니즘의 뿌리 또는 국제 문제에 대해 토론하곤 했다.
EPLF의 인도주의 단체인 에리트레아구호협회Eritrean Relief Association를 운영하던 파울로스 테스파기오르기스Paulos Tesfagiorgis는 이사이어스가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필요한 언어를 습득하는 데에도 마찬가지의 끈기를 보였다고 한다. "아주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이었죠. 처음 만났을 때는 영어가 서툴렀지만 제가 기자들을 소개하기 시작하자 곧 복잡한 단어를 사용하며 비정부기구 및 정부 관계자들과 인도주의 문제를 논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테스파기오르기스에 따르면 이사이어스는 비슷한 속도로 아랍어를 마스터했다. "그는 아랍 세계에서 무슨 말이 오가는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죠. 정말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놀라웠습니다. 항상 공부, 공부, 공부하더군요. 자신이 배운 걸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그의 학습 능력은 놀랍습니다."
결국 에티오피아 정권을 치명적으로 약화시킨 것은 모스크바에서의 공산주의 붕괴였다.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1980년대 후반 아프리카의 의존국들에 대한 군사 지원을 축소했다. 에리트레아인은 마을을 차례로 점령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991년 5월, EPLF는 에티오피아 군대를 격퇴하고 아스마라를 해방시켰다. 젊은 전사들을 실은 트럭 행렬이 야자수가 늘어선 중심가를 따라 굴러 내려오자 울부짖으며 환호하는 군중이 운집했다. 실로 놀라운 순간이었다. 우군도 거의 없었고 오로지 근성에만 의지한 EPLF가 아프리카 최고의 장비를 갖춘 군대로 손꼽히는 에티오피아군을 물리치고 에리트레아의 독립을 쟁취한 것이다.
많은 EPLF 베테랑들은 당시를 돌이켜보면서 이사이아스가 '세 가지 특권 캠페인'을 시작해 EPLF의 충성분자들을 소외시켰을 때부터 이 순간을 준비해 왔다고 여겼다. 독립 후 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한 나머지 지휘관들은 포위당한 듯한 불안감을 느꼈다.
에티오피아 정부와 싸우고 있던 것은 에리트레아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1970년대 중반 티그라이 지역의 학생과 농민들은 티그라이 인민해방전선TPLF이라는 반군 단체를 설립했다. 의대 중퇴생 출신의 TPLF 리더 멜레스 제나위Meles Zenawi는 EPLF에 도움을 요청했다. EPLF는 티그라이인 소수를 데려가 군사 훈련을 시켰고 몇몇 간부를 파견하여 TPLF에게 기본적인 게릴라전 전술을 가르쳤다.
동맹은 성과를 냈다. 아스마라가 함락된 지 나흘 후, TPLF가 이끄는 반군 연합이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하면서 멩기스투의 마르크스주의 정권은 종말을 맞았다. 아디스에 진입한 기갑부대에는 EPLF 전사들이 몰고 있는 소련제 전차도 있었다. 그들은 에티오피아 군사 장비 탈취를 일종의 예술로 승화시켰다.
멩기스투의 패배로 이사이아스는 자신이 무적이라고 느꼈다. 그는 자신에게 에리트레아뿐만 아니라 에티오피아도 해방시킬 책임이 있다고 여겼다. "해방 초기에 그는 TPLF 지도자들이 마치 자신의 지휘 아래 있는 것처럼 말하곤 했습니다. "그들을 지도하고 이끌려고 했고 그들을 대신해 이야기하기도 했죠." 에리트레아의 새 행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된 메스핀 하고스는 회상한다.
이사이아스는 국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EPLF는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한 인민전선People's Front for Democracy and Justice (PFDJ)이 됐으며 곧 에리트레아 유일의 합법 정당이 됐다. 경제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PFDJ가 소유한 홍해무역공사Red Sea Trading Corporation가 점차 국가경제를 지배했다.
권력에 대한 이사이아스 대통령의 태도는 반란군 시절과 다를 게 없었다. 에리트레아 언론인 아마누엘 에야수Amanuel Eyasu는 아스마라 공항에서 이를 여러 번 목격했다. 해외 순방이 끝나면 이사이아스를 만나기 위해 장관들이 공항에 모이지만 그는 장관들을 그냥 지나쳐버린다. 해외 순방이 어떻게 됐는지를 알기 위해 장관들은 기자들에게 물어봐야 했다. "그에게 정보는 곧 힘입니다." 아마누엘은 말한다. "그래서 그는 알려주는 게 거의 없지요."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의 짧은 기간 동안 세계는 이사이아스가 스스로를 진보적 지도자로 포장한 것을 믿었다. 그는 병원을 짓고 에리트레아의 황폐한 언덕에 나무 수백만 그루를 심었으며, 영구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주민들에게 식량 원조가 효과적으로 분배되도록 감독했다. 빌 클린턴은 그를 과대포장되었지만 오래 가지 못했던 '아프리카 르네상스' 지도자 중 하나로 추켜세웠다.
하지만 양쪽 지도자의 공통된 언어와 목표에도 불구하고 EPLF와 TPLF의 관계는 항상 삐걱거렸다. 1985년 에티오피아 기근 당시 이사이어스의 전사들은 굶주린 티그라이인들이 식량 원조를 가져오는 데 사용하는 핵심 도로를 폐쇄했는데, 이는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결코 잊지 않거나 용서하지 않은 술책이었다.
1998년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는 전쟁을 치렀다. 바드메Badme라는 작은 국경 마을에서 벌어진 다툼이 발단이었다. 근본적인 원인은 경제 경쟁이 심화되고 양측의 리더들이 모두 성마르기 때문이었다. 초기 교전은 빠르게 확전됐고 이사이아스의 무뚝뚝한 성격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에리트레아의 오폭으로 사망한 에티오피아 학생 12명에 대해 그는 "전쟁은 그런 것일세"라고 말했다).
승리를 확신한 이사이아스는 이후 군사 작전에 대해 장군들과 상의하지 않았다. 전선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자신의 사무실에서 지시를 내렸다. 수만 명이 사망했다. 2000년 전투가 끝났을 때 에리트레아 영토의 상당 부분이 에티오피아에 넘어갔다. 이사이아스가 탓할 사람은 자기 자신 밖에 없었다.
국경 설정을 위한 국제위원회는 나중에 에리트레아의 많은 영유권 주장을 인정했지만 TPLF가 주도하고 있던 에티오피아 연합정부는 이를 무시했다. 소국 에리트레아가 아닌 거대한 에티오피아를 지역 핵심 국가로 본 국제사회는 보증인 역할을 하기로 했지만 국경 문제에 대해 에티오피아를 설득하지 못했다.
형님-동생 관계였던 EPLF와 TPLF의 관계가 불편하게 뒤집혔다. 서구는 이사이아스를 거슬리는 인물로 일축하고 아디스로 몰려가 영리하고 매력적인 멜레스와 함께 원조와 사업 기회에 대해 논의할 준비가 돼 있는 듯 보였고, 이는 오늘날 이사이아스가 티그라이에 대해 갖고 있는 깊은 앙심의 근원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사이아스는 굴욕감을 느꼈습니다." 파울로스 테스파기오르기스는 말한다. "TPLF가 자신을 조롱하고 있었고 그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죠. 국제사회가 자신을 완전히 배신했다고 느꼈고, 이러한 감정은 물론 에리트레아의 오랜 배신의 역사와 맞물려 있습니다."
전쟁의 참담한 결과로 인해 오랫동안 내부에 억눌려 있던 비판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주요 장관들은 '15인 그룹'을 결성하여 이사이아스가 제대로 된 다당제 헌법을 시행하고 선거를 실시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가찌아 커피 머신의 쉭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아스마라의 카페에서 이사이아스의 과거 동지들은 공개적으로 그를 '독재자'라고 표현했고, 독립 언론이 이를 인용하는 걸 거리끼지 않았다. 잠시 동안은 변화가 임박한 듯 보였다.
이사이아스는 때를 기다렸다. 2001년 9월, 테러리스트들이 뉴욕의 쌍둥이 빌딩에 비행기를 날렸을 때 전 세계의 언론인과 외교관들은 다른 데에 신경을 쓸 엄두를 못 냈다. 그때 이사이아스가 움직였다. 그의 보안병력은 일련의 새벽 급습을 통해 당시 아스마라에 있던 15인 그룹의 모든 멤버를 체포했다(입장을 철회한 한 명은 제외). 미국에서 건강 검진을 받고 돌아오는 중이었던 국방부 장관 메스핀 하고스는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환승하던 중 자신의 여권이 말소되어 무국적자가 되었음을 알게 됐다. 아스마라행 비행기에 탑승할 수 없었던 그는 독일로 망명했다.
체포된 사람들 중 그 후로 목격된 이는 없다. 절반 이상이 감옥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함께 싸웠던 동지들에 대한 이사이아스의 무자비한 탄압은 통치의 새로운 국면을 예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독립 언론들을 폐쇄했다. 불평분자들이 모이는 곳으로 여겨지는 많은 교회가 지하로 쫓겨났고 NGO는 떠나도록 권유받았다. 마오쩌둥의 반지식인 캠페인을 따라 아스마라의 대학은 문을 닫고 군이 운영하는 기술 대학으로 대체됐다.
국경 전쟁의 가장 심각한 결과는 무기한 병역의 도입이었다. 에리트레아 사람들은 남녀 모두 학업과 가족 농장을 포기하고 황량한 사막 훈련소인 사와Sawa에서 훈련을 받아야 했다. 군인이 되는 법을 배운 이들은 무더위 속에서 우물을 파고, 보잘 것 없는 국가 수당을 받으며 도로를 건설하는 위장무늬 군복을 입은 노동자로 사용됐다.
일각에서 노예제도에 비유하기도 하는 이 제도는 여전히 시행 중이다. 강제노동은 시간 제한 없이 수년간 지속될 수 있다. 저항하면 체포된다.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떠났다.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는 이민자 수를 전체 인구의 10분의 1로 보고 있지만 아무도 확인할 수 없다.
국경 전쟁에서 패배한 이사이아스는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대리전을 펼쳤다. 2006년 에티오피아가 지하디스트 단체인 알샤바브와 싸우기 위해 소말리아에 군대를 파견한 후, 이사이아스는 알샤바브의 편에 서서 분쟁에 뛰어들었다. 이로 인해 에리트레아는 거의 10년에 걸쳐 PFDJ(집권당), 홍해무역공사, 군대에 대한 자산동결 및 여행금지 처분 등의 유엔 안보리 제재를 받는다.
비난 여론이 거셌지만 이사이아스는 외국의 원조를 가져올 수도 있는 외교 활동을 거부했으며 지역 협력기구도 탈퇴했다. 비판론자들은 그가 협력기구를 맘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중국인이 아닌 이상 방문 중인 고위 인사나 외국 대사를 만나는 일이 드물다. (미국의 외교전문에 따르면 아스마라 주재 중국 대사관은 이사이아스에게 한 달에 한 번 음식을 보냈다고 한다.)
대통령 집무실의 문이 굳게 닫힌 상태에서 서구 외교관들은 복잡하면서도 지극히 사적인 에리트레아의 국가원수를 분석하는 데 어설픈 고정관념에 의존했다. 위키리크스에 공개된 2008년의 외교전문에서 미국 대사는 이사이아스를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그러나 그가 무의미한 인물이 되리라는 예측은 시기상조였음이 밝혀졌다.
2012년 멜레스가 혈액암으로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사망하면서 이사이아스도 침체기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뛰어난 지도자를 잃고 점점 인기를 잃은 TPLF는 에티오피아의 집권 연합에 대한 지배력을 잃기 시작했다. 게다가 오로모와 암하라 민족 사이의 갈등이 커지면서 집권 연합은 흔들리고 있었다.
오로모와 암하라 혈통을 모두 갖고 있던 전직 정보장교 아비 아흐메드Abiy Ahmed는 자신이 총리로 임명되자 에리트레아와의 관계 회복을 추진하는 한편, 군대와 보안 기관의 고위직에서 TPLF 출신들을 숙청했다. 수모를 당하고 사법처분에 직면한 TPLF 출신들은 고향 티그라이로 도망쳤다.
2018년 7월 아디스아바바 공항에는 한 비행기의 착륙을 보기 위해 많은 인파가 뜨거운 햇살 아래 모여들었다. 이 비행기의 착륙은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간의 20년 대치 상황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사이아스가 에티오피아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맨들이 활주로를 가로질러 달려들었다. 이사이아스 대통령이 레드 카펫 위를 걷자 브라스 밴드가 연주를 시작했고 일부 사람들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에리트레아 시청자들이 TV에서 눈을 떼지 못한 것은 이사이아스가 22년 만에 처음으로 에티오피아를 방문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을 사로잡은 것은 그의 미소였다. 키가 190센티인 이사이아스가 30살 이상 어리고 키가 18센티나 작은 아비 아흐메드를 끌어안기 위해 허리를 굽힐 때, 이사이어스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그날 군중이 환호성을 지르며 그를 맞이했을 때, 평소 인상적인 콧수염 아래 근엄한 결의에 찬 표정을 짓던 그의 얼굴이 미소로 녹아내렸다. 아비가 먼지 커버로 둘러싸인 아디스아바바의 에리트레아 대사관 열쇠를 건네자, 종종 '아프리카의 김정은'으로 불리는 이사이아스는 환하게 미소지었다.
"우리 중 누구도 그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어요." 전직 대사였던 헤브렛 베르헤는 말한다. "그의 얼굴이 완전히 바뀌었죠. 모두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의아해했습니다."
이후 벌어진 일들은 그날의 방문과 그 미소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겉보기에는 화해가 기조였으며, 이사이아스의 방문은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 간의 평화 협상으로 이어졌다(아비 총리는 이것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전문가들은 이사이아스와 아비가 실제로는 TPLF를 제물로 삼아 전쟁 협정을 체결한 건 아닌지 의문을 갖는다. 같은 달에 행한 연설에서 이사이아스는 혐오스러운 워얀Woyane?에리트레아에서는 TPLF를 이렇게 부른다?에게는 "게임 끝"임을 분명히 했다.
TPLF가 아비 총리가 연기한 총선을 강행한 후, 2020년 11월 에티오피아 연방군과 티그라이 전사들은 전쟁에 돌입했다. 이사이아스는 새 친구가 옛 적을 물리칠 수 있도록 에리트레아 군대를 보냈다.
처음 5개월 동안 아비는 전쟁에서 에리트레아의 역할을 은폐했지만 결국은 부정할 수 없게 됐다. 이제는 이사이아스가 자신의 군을 국경 너머 티그라이로 보냈을 뿐만 아니라 소말리아인들로 구성된 분견대를 훈련시켜 함께 보냈고 수입된 드론이 에리트레아의 아삽 항구에 배치되는 걸 허용했음이 밝혀졌다.
이 전쟁으로 16만에서 38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양측 모두 잔혹행위를 저질렀고, 일부는 스마트폰에 끔찍하게 촬영되어 SNS에 게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에리트레아 군인들이 저지른 잔혹행위는 특히 충격적이다. 이사이아스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에리트레아 군인들은 티그리냐어를 사용한다. 일부는 티그라이에 먼 친척이 있다. 그러나 에리트레아 군대는 티그라이 지역 전체를 무너뜨릴 의도가 엿보이는 초토화 작전을 실시하면서 교회에 숨어있는 티그라이 민간인을 살해하고, 여성을 성 노예로 사용하고, 농작물에 불을 지르고, 가축을 도살하고, 경제를 약탈한 혐의를 받는다.
휴먼라이츠워치가 기록한 한 끔찍한 증언에 따르면 에리트레아 군인들이?독특한 플라스틱 샌들로 눈에 띈다?티그라이의 한 마을에서 집집마다 돌아 다니며 민간인을 살해했다. 한 집에서는 아이 둘을 총으로 쏴 죽이고 어머니는 살려둔 채 문을 잠가 어머니가 하루하고도 반나절 동안 아이들의 시신과 함께 갇혀 있어야 했다.
"이 불행한 젊은이들은 사와(군 훈련소)에서 수년간 모든 문제가 워얀(TPLF)의 잘못이라는 지휘관들의 말을 들으며 세뇌를 당했습니다." 헤브렛은 말한다. "지휘관으로부터 복수를 하라는 지시를 받자, 그렇게 한 거죠."
마침내 2022년 11월 평화 협정이 중재되었고, 이에 따라 TPLF는 무기를 내려 놓고 에티오피아는 다시 티그라이에 인도주의적 지원이 들어오도록 허용했다. 하지만 이 협정에는 한 가지 중요한 사항이 빠져있다. 에리트레아 군대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이다. 이는 향후 에리트레아 군의 배치에 대한 중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사이아스는 항상 협상과 외교를 약점의 징표로 여겼습니다." 에리트레아 전문가 코넬은 말한다. "그에게는 기브 앤 테이크가 없어요. 뭔가를 준다는 건 나약하다는 뜻입니다."
아비와 외부 세계의 압력을 받아 이사이아스는 마지 못해 티그라이에서 일부 병력을 철수했다(그러나 전문가들에 따르면 철수 규모가 에티오피아 정부가 주장하는 것보다 적다). "아비는 서구와의 관계에 관심이 있는 반면, 이사이아스는 그렇지 않죠." 코넬은 말한다. "아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진했어요. 하지만 이제 자신이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아스마라는 매우 낯선 장소다. 이곳을 찾는 소수의 방문객들은 종종 옛날 엽서에 인쇄된 과거의 사진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거리에선 세심하게 보존된 피아트 500이 당나귀가 끄는 수레 옆을 천천히 지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방문객들은 아스마라의 유명한 함석 테이블 바에서 카푸치노를 마시고 이탈리아 식민지 시대의 유산인 전통적인 저녁 산책(파세지아타)을 하고 피자집을 들를 수도 있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아르데코 양식 영화관은 여전히 운영 중이다. 몇 안 되는 인터넷 카페는 연결 속도가 너무 느려서 이용자가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아스마라가 옛 모습을 많이 보존하고 있는 한 가지 이유는 여기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홍해무역공사는 민간 경쟁자들을 압살하고 있으며, 이제는 에리트레아 사람들이 배급 카드를 사용하여 생필품을 구입하는 작은 상점까지 운영한다. 이사이아스도 인정하듯 에리트레아의 경제는 "입에 풀칠할 정도" 수준이다. 정부는 외환을 확보하는 데 금과 칼륨 광산 그리고 해외에 거주하는 에리트레아인에게 부과되는 소득세에 의존한다. 소득세를 내지 않으면 여권 발급이 거부되거나 고국의 가족을 방문할 수 없다.
80대에 접어든 이사이아스는 경쟁자보다 더 오래 살았다. 하일레 셀라시에와 멜레스 제나위는 모두 사망했다. 멩기스투는 망명 중이다. 하지만 이사이아스는 여전히 아스마라를 방문하는 귀빈들을 직접 안내하며 함께 거리를 걷는 데 자부심을 느끼지만 자기자신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다. 2009년에는 한 육군 중위가 그를 총으로 쏴 죽이려 했고, 2013년에는 한 무리의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킬 뻔하기도 했다. 유출된 외교전문에 따르면 그는 외식을 할 때 부하들과 접시를 바꿔가며 먹는다고 한다. 그의 취향은 집권 기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는 휴식을 취할 때면 여전히 자신의 할머니가 운영하던 길거리의 스와suwa 맥주집 같은 종류의 허름한 곳을 선호한다. 경호원들이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동안 그는 노동자들, 농민, 청소부들과 함께 술을 마신다.
이사이아스가 지정학적 야망을 늦추거나 억제할 조짐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는 규모에 대한 감각이 없어요." 오랫동안 야권에서 활동한 다윗 메스핀Dawit Mesfin은 말한다. "에티오피아는 지리적으로 에리트레아보다 10배나 더 크고, 더 부유하고, 더 강력하며, 미국의 지원을 받는 광활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이사이아스는 늘 자신이 에티오피아를 장악할 수 있다고 여겼죠."
아비 총리는 현재 패배한 TPLF와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지만 지난8월 에티오피아 군대와 역사적으로 티그라이 서부 지역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암하라 민족주의 세력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사이아스는 의리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고 전문가들은 에리트레아 군대가 아비 총리의 과거 동맹이었던 암하라 민병대와 협력하고 있다고 의심한다. 아비와 이사이아스의 브로맨스는 빠르게 식고 있다.
이사이아스는 또한 푸틴과 보다 긴밀한 관계를 맺을 기회를 노린다. 에리트레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유엔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진 유일한 아프리카 국가였다. 러시아는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을 에르트레아로 보내 이사이아스에게 보상했다. 둘은 에리트레아 항구와 공항을 전략적 환승 지점으로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에리트레아에 이웃한 또 다른 큰 나라 수단에서 벌어지는 내전은 외부인, 특히 확전의 위험에 무관심한 외부인들에게 많은 개입의 기회를 제공한다.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러시아 바그너그룹의 용병으로, 이들은 수단을 장악하기 위해 싸우는 군벌 중 한 명과 깊은 상업적 관계를 맺고 있다. 바로 다르푸르에서 대량 학살을 자행한 민병대의 두목 무하마드 함단 다갈로Muhammad Hamdan Dagalo('헤메티Hemedti'란 별명으로 잘 알려졌다)다. 하지만 수단에서 이사이아스의 역할은 바그너그룹보다 훨씬 더 중요해질 수 있다. 과거에 그는 헤메티와 가까운 사이였다. 하지만 9월에 그는 헤메티의 숙적 압델 파타 알 부르한Abdel Fattah al-Burhan 장군과 비공개 회담을 가졌다.
이사이아스가 외국에서 새로운 모험을 벌이려는 이유 중 하나는 티그라이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25만 병력을 그냥 놀릴 수 없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정권은 종종 외국 영토에서 악행을 저지른 군대를 국내에 재통합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다. 이 젊은이들이 에리트레아에 돌아가서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아주 큰 규모의 군대가 아주 작은 나라에서 억지로 시간을 때우고 있는 거죠." '아프리카의 뿔' 지역 전문가 새러 본은 말한다. "시한폭탄이라 할 수 있죠."
미켈라 롱은 20년 이상 아프리카를 취재해 온 영국의 언론인으로 로이터, BBC, 파이낸셜타임스 등에서 일했다. 저서로 'In the Footsteps of Mr. Kurtz: Living on the Brink of Disaster in the Congo'(2001), 'I Didn't Do It for You: How the World Betrayed a Small African Nation'(2005), 'Do Not Disturb: The Story of a Political Murder and an African Regime Gone Bad'(2021) 등이 있다.
동아프리카 반도 '아프리카의 뿔' 지역의 소국 에리트레아는 언론자유를 비롯한 각종 자유도 지수에서 늘 북한과 최하위를 다툰다는 것(그래서인지 에리트레아는 종종 '아프리카의 북한'으로 불립니다) 외에는 별달리 세계의 이목을 끄는 일이 드문 편입니다. 하지만 내막을 살펴보면 이 지역을 뒤흔들고 있는 지정학적 위기에 거의 언제나 한 몫을 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합니다. 작년 한 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간 전쟁인 에티오피아의 티그라이 전쟁이 대표적입니다. 티그라이 전쟁은 작년 말 종식됐지만 위기는 언제든 다시 발생할 수 있습니다. 잔혹한 실전 경험을 쌓은 에리트레아의 25만 대군을 계속 대외적으로 '활용'하지 않으면 오히려 에리트레아 국내의 위기로 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동아프리카의 정세에 에리트레아의 움직임은 매우 중요할 것이라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