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

세계를 옭아맨 미국의 보이지 않는 경제·정보 네트워크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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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6 13:52

New States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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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들어 국제정세 전반에 대한 논의는 과연 미국 일극체제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를 중심에 두고 이뤄졌습니다. 중국이 빠르게 부상하면서 미중 양강 구도를 가리키는 'G2'란 표현이 한동안 유행했었고 이언 브레머Ian Bremmer 같은 학자는 심지어 특정 국가가 국제정세를 주도하는 시대가 끝났다는 'G-제로' 개념을 주창하기도 했죠.


사우디가 MBS의 강력한 리더십과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미국과도 기꺼이 대립각을 형성하고,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을 필두로 동남아시아가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마침내 중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인구국이 된 인도도 국제정세에서 존재감을 강화하고 있는 요즈음, 미국 주도의 일극체제는 이미 끝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많은 화제를 모은 신간 '지하 제국: 미국은 어떻게 세계경제를 무기화했나'는 미국의 헤게모니가 눈에 보이는 군사력 측면 뿐만 아니라 경제와 정보 네트워크를 활용한 '보이지 않는 힘'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간과하기 쉽지만 이런 보이지 않는 힘의 위력은 군사력 못지 않습니다. 미국의 제재가 이란이나 베네수엘라 경제를 초토화시켰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심지어 사우디 조차도 미국이 원유 생산량을 늘리자 최근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사학자이자 현대 국제정세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와 기록을 한 퀸 슬로보디안은 2023년 11월 4일 영국 주간지 뉴스테이츠먼에 기고한 에세이에서 '지하 제국'의 논의를 정리하는 한편, 이 논의가 갖고 있는 한계에 대해서도 적절히 논평합니다. "무기, 금융, 정보, 자본집약적 제조업을 기반으로 스스로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수단"이 없는 팔레스타인의 미래에 대한 슬로보디안의 냉정한 평가는 한국이 냉혹한 국제질서를 돌파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시사적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벌어진 분쟁이 미국과 중동 파트너 간 관계를 혼란에 빠뜨린다. 유가 상승은 산유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국제정세가 미국, 유럽, 러시아의 중심 세력에서 벗어나 재편될 수 있다는 전망을 제공한다. 서구는 갑자기 더 이상 국제정세를 통제할 수 없게 된 상황을 어떻게든 관리하려 애쓰면서 후퇴하고 있다. 이는 2023년의 이야기가 아니다. 50년 전인 1973년, 아랍 산유국들이 미국을 비롯한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국가들에 대한 원유 수출을 금지한 '욤키푸르 전쟁'이 발발한 해의 이야기다. 욤키푸르 전쟁 50주년을 맞아 또다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벌어졌음은 우연이 아니며 하마스의 10월 7일 공격은 이를 염두에 두고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50년 전과 지금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이후 국제정세는 어떻게 바뀌었던가? 저개발국의 영향력은 그때보다 더 커졌을까, 아니면 줄어들었을까?


헨리 패럴과 에이브러햄 뉴먼의 신간 '지하 제국: 미국은 어떻게 세계경제를 무기화 했나Underground Empire: How America Weaponised the World Economy'는 이 질문에 답하는 데 도움이 된다. 1973년 당시 석유를 무기로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석유 생산 시스템에 초크포인트1choke point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여전히 비중 있는 산유국이었지만 특히 서유럽은 중동의 석유에 의존적이었다. 중동 산유국들은 서구 경제를 파괴시킬 수 있는 밸브를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이다. '지하 제국'이 보여주는 것은 미국이 이런 위험에 직간접적으로(간접적인 경우가 더 많았지만) 노출되면서 교훈을 얻었다는 것이다. 패럴과 뉴먼은 지난 50년 동안 미국의 소위 '네트워크 제국주의'가 부상한 과정을 설명한다. 저자들은 시장이 국가로부터 점점 더 분리될 것으로 예상됐던 시대에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이 벌어졌음을 보여준다. 미국은 특히 후발주자인 중국을 상대로 금융, 정보, 지적재산권, 생산 공급망 등 겉으로 보기에 무질서해 보이는 전 세계 인프라를 올가미로 만들어 미국의 힘에 대한 도전을 통제하고 잠재적으로 질식시킬 수 있는 방법을 교묘하게 고안해내고 있었다.


1973년은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금수 조치와 욤키푸르 전쟁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지만, 네덜란드 은행가 얀 크라Jan Kraa가 네덜란드에서 스위프트SWIFT(국제은행간 금융통신협회) 금융 거래 시스템을 설립한 해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보안을 위해 은행 직원들이 "공유 암호책을 사용하여 로그 계산을 수행"해야 했던 기존 시스템을 대체해 은행들이 "국경을 넘어 서로 대화"할 수 있게 됐다. 1975년까지 270개의 은행이 스위프트에 가입했다. 오늘날 1만1000개가 넘는 금융기관들이 하루 평균 4200만 개의 메시지를 스위프트를 통해 전송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스위프트는 대부분의 국제 은행거래를 처리하는 정보 센터였다. 또한 미국 정부가 지정학적 적대국들을 상대로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석유를 무기처럼 활용해온 OPEC 창립 회원국 이란을 상대로 사용한 것이 최초의 사례다. 2010년대 이란과 거래를 한 금융기관들을 스위프트에서 차단함으로써 이란은 글로벌 금융 시스템에서 사실상 격리되었다.


두 번째로 사용한 도구는 다른 나라가 미국의 허가 없이 국가안보위험으로 간주되는 기업에 미국산 기술이나 제품을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는 이른바 '엔티티 리스트Entity List'였다. 미국은 대부분의 제조를 외주화했지만, 소규모 핵심 부품을 계속 생산하거나 핵심 부품에 대한 특허를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과의 무역 전쟁을 선언한 이후, 중국은 지적재산권법의 전세계적 집행을 통해 제3자의 행동 자유를 제한하는 수출통제의 주요 타깃이 됐다.



반세기 전, G77이라고 불리는 유엔의 개발도상국 연합은 석유 공급을 중단하는 것이 부유한 국가들을 신국제경제질서New International Economic Order (NIEO)라고 불리는 대대적인 국제관계 변화로 이끌 수 있는 압박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가난한 나라들 스스로도 유가 상승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향후 다른 주요 원자재에 대한 수출제한 위협을 이용해 '글로벌 노스'(선진국들)가 개발원조를 확대하고, 원자재 가격 안정화 협정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제공하도록 강요하겠다는 게 신국제경제질서 발상의 요체였다. 신국제경제질서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은 새로운 국제정보질서에 대한 요구였다. 국제정세에 대한 보도 역량이 선진국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생 국가들은 일상적인 뉴스를 구 식민지 세력 소재의 통신사에 의존해야 하는 일이 잦았다. 신국제정보질서New International Information Order는 저널리즘과 통신 인프라의 분권화를 제안했다.


1970년대에는 이러한 요구가 거의 힘을 얻지 못했지만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는 이른바 시민 저널리스트가 등장하고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같은 개방형 플랫폼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서 뉴스 제작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하 제국'은 그러한 낙관론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보여준다. 겉보기에 개방된 것처럼 보이는 인터넷 네트워크는 늘 광섬유 케이블을 통해 연결된다. 그리고 광섬유 케이블에는 송유관처럼 쉽게 식별하고 관찰할 수 있는 초크포인트가 존재한다. 광섬유 기술은 기존의 전선망처럼 전파가 새지 않기 때문에 감청이 어렵다고 여겨진 적도 잠시 있었지만, 인터넷을 운영하는 민간 회사의 협조만 있다면 실제로는 훨씬 더 쉽고 완벽한 감청이 가능하다는 게 곧 드러났다.


책의 한 구절은 일상 속 숨겨진 인프라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광섬유 케이블은 (샌프란시스코) 폴섬스트리트에서 끝나는데 여기서 NSA(미국 국가안보국)는 프리즘을 사용해 광섬유 케이블을 흐르는 광선을 두 개의 똑같은 신호로 분리한다. 한 신호는 사람들의 이메일, 웹 요청, 데이터를 본래의 목적지로 전달했고, 다른 신호는 641A호실로 우회된다. 미국 정보기관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스라엘 회사가 구축한 나루스Narus STA 6400가 이곳에서 그 데이터를 분석한다." 개인간의 소통이 미국 정보기관의 재산이 된 것이다. 기업들은 이러한 백도어를 열어준 대가로 막대한 보상을 받았으며, 협조하지 않은 기업들은 막대한 벌금의 위협을 받았다고 한다.


헨리 페럴, 에이브러햄 뉴먼 공저 '지하 제국' 표지. /사진제공=Macmillan Publishers

헨리 페럴, 에이브러햄 뉴먼 공저 '지하 제국' 표지. /사진제공=Macmillan Publishers



패럴과 뉴먼이 전하는 이야기 속 세계화는 언제나 미국의 일극적 권력을 조용히 강화하는 것이었다. 저자들이 그리는 2020년대 세계 경제의 풍경에 따르면 1970년대의 노선을 따라 국제정세를 재편하려는 모든 노력은 미국이 건설한 지하 제국의 그물망을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미국 정책가들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저자들은 이 책을 내기 전에도 '무기화된 상호의존weaponized interdependence'이란 신조어를 쓰면서 이 책과 비슷한 주장을 펼친 적이 있는데 미국 정부 일각에서 이 표현을 따라 쓰는 것을 보고 놀랐다 한다.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의 한 관계자는 중국과의 무역전쟁에서 '초크포인트'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무기화된 상호의존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했다. 작년 말 마르그레테 베스타게르Margrethe Vestager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부위원장도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값싼 러시아 에너지와 값싼 중국 노동력에 기반한 생산 모델의 극명한 한계"를 깨달은 후 유럽연합이 "무기화된 상호의존의 시대에 대한 무거운 각성을 했다"고 다소 운명론적으로 말한 바 있다. 이런 형태의 제국은 영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들이 제시하는 사례들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크라이나 전쟁 후 러시아에 대한 제재가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를 보자. 이는 미국이 글로벌 금융 시스템에서 러시아를 배제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즉각적인 치명타가 아닐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달러가 아닌 다른 통화로 표시된 무역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작지만, 다른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초기 단계의 노력과 중간 단계의 그럴싸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러한 시도가 가망이 있으려면 두 가지가 모두 충족돼야 한다고 단언한다. 여전히 탄소에 기반한 현대 디지털 경제에 필요한 채굴 자원에 대한 접근성을 가진 대규모 내수 시장, 그리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적대 행위를 걸어올 가능성이 있는 상대에 대한 방어 수단이다.


저자들은 공상과학소설(SF)의 팬으로, 책 곳곳에서 SF에 대한 흥미로운 언급이 가득하다. 그 중 하나는 닐 스티븐슨Neal Stephenson의 1992년작 '스노우 크래시Snow Crash'인데 국가주권이 상업화된 가까운 미래를 그린다. 소설에서 그리는 미래는 1990년대의 테크노 유토피아(마크 저커버그에게 '메타버스'라는 상처 뿐인 영광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아보이는 개념을 제시했던)와 희미하게 닮았지만 훨씬 더 암울한 분위기를 풍긴다. 스티븐슨은 루이 14세의 대포에 '울티마 라티오 레굼ultima ratio regum', 즉 '왕의 마지막 논증'라는 슬로건이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국가의 통제가 없는 역외offshore 세계를 꿈꿨던 씨티은행의 수장 월터 리스턴Walter Wriston부터 가상화폐 이더리움Ethereum의 수장 비탈릭 부테린Vitalik Buterin의 탈중앙적 자주 조직에 대한 환상에 이르기까지, '지하 제국'에는 탈중앙화를 꿈꿨던 인물들이 여럿 등장하지만 그 누구도 폭력의 독점을 반석으로 삼은 국가권력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 주도의 일극 체제를 뒤흔들 가능성이 있는 것은 러시아, 중국 같은 거대한 '문명국가2civilization-state') 뿐이다.


'지하 제국'을 읽어 보면 50년 전과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국민은 여전히 무기, 금융, 정보, 자본집약적 제조업을 기반으로 스스로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수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중동 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의 동맹으로 여겨지는 국가들이 세계 경제를 뒤흔들 진정한 신국제경제질서를 추구해서 얻을 이익은 별로 없다. 현재의 체제도 그들에게 충분히 유리한데 무엇하러 그런 시도를 하겠는가? 1차 석유파동은 국제 유가가 네 배로 오르면서 끝났다. 걸프 산유국들의 수입도 네 배로 늘었고, 이는 런던 부동산 시장과 사모펀드, 그리고 이제는 사막의 도시화와 (잠재적으로) 친환경 혁신 기술이라는 미래주의적 프로젝트에 유입된 유동성의 바다를 만들었다. 현재 가자지구의 분쟁이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의 데탕트를 흔들어 놓을 수는 있겠지만 중기적으로 팔레스타인인의 곤경은 중동의 국제정치 게임에서 한낱 각주에 지나지 않는다는 암울한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수사학적으로 말하자면, 국제질서 재구성의 꿈은 살아 있다. 신국제경제질서에 대한 새로운 선언이 2022년 유엔 총회를 통과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브릭스(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 국가들의 모임은 이른바 '남남 협력'의 지평을 넓힐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지하 제국'을 읽어 보면 잠재적인 국제질서 재편이 얼마나 더디게 진행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대양을 가로지르는 광섬유 케이블은 하룻밤 새 두 배로 늘어날 수 없다. 수십 년에 걸쳐 수백억을 투자해야 하는 반도체 파운드리도 마찬가지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세계 경제 피라미드에서 가장 아래에 위치한 이들이 (늘 그랬듯이) 가장 큰 고통을 겪는 강대국 간 분쟁의 이미지가 남는다. 출구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지하 제국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 법한 경로를 제시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경고한다.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긴 쉽지만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다." 1970년대에 G77은 정치적 독립을 보완하기 위한 경제적 탈식민지화를 요구했다. 지하 제국의 존재는 이 목표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요원해졌음을 시사한다.



퀸 슬로보디안은 보스턴대학교의 사학과 교수다. 최근 저작으로 민주주의 없는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극단적 자본주의를 다룬 'Crack-Up Capitalism'(2023)이 있다.


1913년 창간돼 케인스, 버트런드 러셀, 조지 오웰, 버지니아 울프 등이 기고했던 전통 있는 영국 진보 주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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