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서평

경쟁하는 짐승: 필립 로스의 삶과 문학적 생존의 기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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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크 베일리가 쓴 필립 로스 전기의 표지. /사진제공=WW Norton & Company

2024.02.23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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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는 국내에도 많은 작품이 소개된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이지만 아직까지 그의 전기가 소개된 적은 없습니다. 필립 로스 본인이 자신의 전기 작가로 지정한 블레이크 베일리가 쓴 전기(아래 서평에서 다루는 책입니다)는 베일리 본인의 성추문 의혹으로 처음에 책을 냈던 출판사가 절판을 시켰다가 나중에 다른 출판사에서 재출간을 하기도 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작가라는 존재는 문단에서의 자기 영향력에 대해 고심하거나 자신에게 비판적인 평론가에게 이를 갈거나 하는 등, 우리가 작품을 통해 알게 되는 것 외에도 다채로운 면모를 갖습니다. 서평지 북포럼Bookforum에 실린 이 리뷰는 '성공'에 집착했던 문학 거장의 잘 알려지지 않은 면모를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미국에서, 리얼리즘 혹은 리얼리즘과 경쟁하는 양식보다 더 지배적인 문학 양식은 커리어주의careerism다. 이는 어떤 판단이나 비방도 아니다. 소설가, 단편소설 작가, 심지어 시인조차 책을 쓰는 일만큼이나 경력을 관리하는 데 그야말로 수십 년을 헌신해야 했다. 제도 안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프로필 사진을 찍을 때 취하는 포즈나, 질의응답도 중요하다. 직접 돌아다니면서 독자층을 키우고, SNS 계정의 팬들을 늘리며, 동료들 사이에서 문학계의 훌륭한 시민으로 보이는 일도 물론이다. 이제 모든 젊은 작가에게 이런 요소들 사이에서 얼마간 균형을 잡는 것은 삶의 일부다. 이는 편집자와 에이전트, 아울러 할리우드 거물과 벌이는 통상적인 거래를 상회하는 필요와 생존의 문제다. 과거에 작가가 자신을 신화화하던 방식은 이미 만료되었거나, 유해하게 여겨져 폐기되었다. 옛 문학의 명예의 전당에는 귀족적인 문인(하웰스Howells, 엘리엇Eliot), 노예폐지론자(스토우Stowe), 모험가들(멜빌, 런던, 헤밍웨이), 광인(포Poe), 샤먼(휘트먼), 귀족 출신 망명자(제임스), 보헤미안 망명자(스타인, 볼드윈, 비숍), 바람둥이 망명자(피츠제럴드), 카페사회의 시민(워튼Wharton), 낭만적인 시골 사람(캐더Cather, 토마스 울프), 소도시 연대기 작가(앤더슨), 시골 지주(포크너), 교외의 신사(치버, 업다이크), 방랑자(알그렌Algren), 괴짜(파운드), 주정뱅이(웨스트, 에이지Agee, 베리먼), 댄디(카포티, 톰 울프), 퇴폐주의자(반스Barnes), 현실감각이 결여된 외국인(나보코프), 미쳐버린 귀족(로웰Lowell), 알 수 없는 기벽의 은둔자(샐린저, 핀천, 드릴로), 헌신적인 급진주의자(스타인벡, 렉스로스Rexroth, 라이트, 해밋, 헬먼Hellman, 페일리Paley), 계몽적인 급진주의자(엘리슨Ellison, 메리 매카시), 유명인사가 된 급진주의자(메일러, 손택), 활동가 문인 여성(모리슨), 소외된 이민자의 자식(벨로우Bellow), 새로운 카우보이(코맥 매카시), 힙스터(케루악), 약쟁이(버로우즈), 히피(긴스버그) 등이 있었다. 결국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오직 전업 작가였던 커리어주의자만 남는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오직 전업 작가였던 단 한명의 커리어주의자가 서 있다. 지금까지 미국문학에서 제일 독창적이고 궁극적인 커리어주의자는 필립 로스였다.


2018년 로스가 여든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드와이트 가너는 뉴욕타임스에 한 문화의 시대가 끝났다는 글을 기고했다. 로스는 "권위를 갖고 있고, 다작을 하며, 또 백인이고, 남성인 소설가 세대의 마지막 최전방 생존자"였다. 1930년대에 태어난 중요한 미국 소설가 사인방(드릴로, 매카시, 모리슨, 핀천)이 아직 생존해 있다는 사실은 신경 쓰지 마라. 경력 초창기에 랄프 엘리슨과 함께 '소수자 글쓰기'에 관한 주제의 방송에 패널에 초대받았던 작가를 백인남성으로 분류하는 일도 잊어 버려라(유대인은 그때도 여전히 변방에 있었다.) 희극적 과장이 가미된 자서전, 자전적인 메타픽션, 근과거를 다룬 역사 소설 등 로스를 지탱해 온 방식이 무엇이건 간에, 이는 바로 지금 현재를 규정하는 방식이다. 로스는 종착점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시작점이다. 로스 이전에도 피츠제럴드나 노먼 메일러처럼 눈 떠보니 스타가 된 총아들이 있었다. 1960년 『굿바이, 콜럼버스』로 전미도서상을 수상한 스물여섯 살의 로스는 황금 시간대에 방영된 마이크 월리스의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텔레비전 시대의 신동 작가의 본보기를 세웠다. 프로그램 녹화 전날 아침에 로스는 뉴욕포스트의 젊은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기자는 로스의 소설을 "유대인 자기혐오의 전시"라고 힐난한 비평가에 대해 질문했다. 몇 주 후, 로스는 로마에 머무는 동안 송달 받은 우편물로 전에 진행한 인터뷰를 읽었다. 기사에서 로스는 저 비평가가 "나를 왜 미워하는지에 대한 책을 써야 한다. 그건 나 자신과 그에 대한 통찰을 줄 거다." 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필립 로스 전기의 작가 블레이크 베일리Blake Bailey는 당시에 그가 했던 말을 인용한다. "그때 그 자리에서 나는 공적인 커리어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당시에는 그 발언이 희망사항에 불과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돌이켜보면, 로스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솔직하지 못했다. 대중의 시선에서 물러나기는커녕, 로스는 장장 수십 년에 걸친 대중적 이미지 관리 캠페인에 착수했다. 그는 항상 비평가들을 싫어했지만 편집자에게 장문의 편지(1974년 뉴욕리뷰오브북스에 보낸 편지에서 뉴욕타임스 소속 비평가 크리스토퍼 레만-하우프트를 해고하고 그 자리를 매년 학부생 경연으로 채울 것을 제안했다)를 보내려고 비평가에 대한 독설을 아껴 두거나, 혹은 그와 그의 문학적 자아들이 마지막 말을 남기는 데서 비평가를 향한 책망을 문학적으로 각색했을 따름이다. 그는 신간 출간을 앞둔 유명 작가라면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던 게으른 지면(당시에는 '뉴욕타임스 북리뷰'였다)에 소속된 아첨꾼들이 살가운 투로 진행하는 인터뷰를 환영했다. "작가 이름을 언급할 때 그가 세계 최고의 작가라는 점을 앞에서 덧붙이지 않으면 그를 비판하는 것과 다름없다." 로스는 한 파티에서 버나드 맬러머드가 느낀 모욕을 거론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은 적어도 로스 자신에게는 사실이다. 만성적으로 나빴던 허리(1970년대 뻑뻑한 올리베티 타자기를 사용한 결과라는 진단을 받고는 더 부드러운 타건감의 IBM 셀렉트릭 타자기로 바꾼 적 있다.)만큼이나 허약한 자존감 뿐 아니라, 대중과의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문제가 로스를 괴롭혔다. 그는 자신이 쓴 소설 캐릭터와 너무 많이 혼동되었다. 로스는 단 한 번도 유대인이 아닌 적이 없었지만 그의 진정한 신념이란 세속적인 것으로, 성공과 섹스를 신봉했다. 그는 인종 배반자, 계급 배반자, 변태에 관한 글로 이름을 알렸다. 로스는 자신이 책임감 있고, 성공을 거둔, 훌륭한 유대인 소년이라는 점을 여전히 널리 알려야 했다. 그는 뉴저지 랍비들이 보낸 항의 투서와 중서부 간호사들의 청혼 메일 등, 굉장히 많은 서한을 받고 있었다. 로스는 이 모든 것을 즐겼지만, 자신이 잃을 것이 많다는 것을 곧바로 깨달았다.


에로틱한 욕망과 현대적 교양을 화해시키는 일은 로스 소설의 위대한 주제 중 하나다. 정신분석가는 공직에 몸담고 있는 전문가(뉴욕시 시장을 위한 '인간 기회' 위원회의 부감독관 알렉스 포트노이)가 털어놓는 더러운 비밀을 듣는 '고해 신부'의 역할을 맡는다. 전기 작가는 소설가가 믿고 싶은 대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다. 베일리는 대체로 로스를 좋게 그리려고 했고, 전기 작가의 일을 했다. 그러나 올리베티 타자기가 아무리 어깨 통증을 유발하더라도, 책상에 앉아 혼자 일하는 작가의 작업은 극화할 수는 없다. 소설가의 전기 작가에게 어떤 자료가 남아 있을까? 가정생활, 교육, 낭만적인 연인관계, 출판의 세부 사항, 직업적 라이벌, 시간에 따른 평판의 상승과 하강. 고차원적 가십1 혹은 그냥 평범한 가십. 성공적인 커리어는 수많은 가십을 만들어낸다. 로스는 가십과 소문을 싫어한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소설에는 윤색된 판본의 가십이 쌓여있다. 블레이크 베일리의 필립 로스 전기의 페이지 도처에는 가십이 무더기로 있다. 로스 전기의 교정본이 돌았을 때, 뉴욕의 문단에서는—적어도 마흔이 넘은 사람들 사이에서는—모두가 그 책에 등장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미 서부에 사는 한 친구는 내게 전화를 걸어 이름이 거론되진 않았지만 자신이 책에 등장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책에서 그를 찾을 수 있을까? 찾았다. 친구는 2005년에 소설을 출간할 예정이었는데 친구를 가르쳤던 교수는 로스의 지인으로, 그를 거장에게 소개해주고 싶어 했다. 아울러 로스는 내 친구가 게이인지 궁금해 했지만 친구는 게이가 아니었다. 친구는 웃었다. 이 저녁식사 에피소드는 1965년에 존 F. 케네디의 미망인 재키 케네디가 술 한잔을 나누기 위해 로스를 초대했던 에피소드보다 분량이 약간 적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먼저 읽은 것은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2009년 『네메시스』를 끝으로 절필하기까지, 로스의 지난 20년은 생산적인 시기였다. (『새바스의 극장』과 미국 삼부작을 포함해 1990년대 중반에서 독서를 시작한다면, 그때는 틀림없이 로스의 최고작이 나온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의 결혼 생활에서 온 혼란을 겪은 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미국의 근과거를 연구하고, 오래된 주제를 뒤집고, 과거의 인물을 재조명하고, 죽음에 대해 고민했다. 많은 책이 좋았고(『죽어가는 짐승』, 『미국을 노린 음모』, 『에브리맨』), 몇 권은 형편없었다(『유령 퇴장』, 『울분』, 『네메시스』). 그러나 이 전기의 마지막 부분은 지루한 행렬이다. 신간이 완성되고, 실존 인물과 허구의 캐릭터 사이의 유사점이 발견된다. 라이브러리오브아메리카2Library of America 에디션의 편집을 두고 편집자와 다툼이 벌어진다. 또 다른 수술, 아마도 혈관 성형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방문한다. 로스는 어떻게든 자신보다 수십 살 어린 새로운 애인을 만나서, 그의 관대함(물건 사주기, 빚 갚기)에 힘입어 5월부터 9월까지 로맨스를 추구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아이를 갖자는 로스의 제안 때문에 관계는 멈추기도 한다. 그 제안은 로스가 70세가 되기 전에는 생각해 본적이 없고, 실제로도 굳건히 거부해왔던 것이었다. 책이 나오자, 미치코 가쿠타니는 이렇게 말하고(『새바스의 극장』에 대해 '웃긴 대신 불쾌한'), 프랭크 커모드는 같은 소설에 대해 저렇게 말한다('눈부시도록 사악한'). 로스는 어떤 상은 받았지만 어떤 상은 받지 못했다. 2010년 『네메시스』까지 이 사이클은 반복된다. (내가 이 책에서 내가 뉴욕옵저버에 쓴 『네메시스』혹평을 찾지 못해서 실망했을까? 독자들이여, 나는 실망했다.) 2012년 프랑스 취재진에게 절필을 밝힌 로스의 은퇴 소식은 전 세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일각에서는 이를 또 다른 커리어로의 영리한 전환으로 해석했다. 그는 미국문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평생 공로상을 수상하고, 수많은 금시계를 받았다. 그는 "나르시시즘적인 광란의 쇼"를 포기했고 말하면서도 노벨문학상을 헛되이 기다리는 한편, 대서양을 횡단하는 비행이 필요 없는 다른 여러 이벤트에 빠져들기도 한다. 로스는 전기 작가를 대신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고, 친구와 재회하고, 절교하기도 한다. 로스는 과거 연인의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같은 존재가 된다. 그는 위키피디아에 공개서한을 써서 기록을 바로잡는다(번역자 주 : 로스는 그의 소설 『휴먼 스테인』의 주인공이 아나톨 브로야드라는 내용의 위키피디아 항목을 삭제하길 요청한다. 아나톨 브로야드는 저명한 문학평론가로 흑인과 백인의 혼혈이었으나, 흑인 혈통을 오랫동안 숨겼다고 한다. 『휴먼 스테인』의 주인공은 흑인임을 오랫동안 숨기고 백인행세를 한다.) 전담 요리사가 그만두자 울면서 의자에 누워 잠이 든다.


2014년 아담 베글리가 쓴 존 업다이크 전기는 두 번째 부인이 이야기하는 것을 원치 않은 탓에 업다이크의 지난 수십 년을 포괄적으로 다루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러나 그 덕분에 더 나은 책이 되었다. 업다이크의 작품은 1970년대 중반에 최정점을 찍었고, 그의 중년기 후반은 불륜행각을 벌이던 젊은 시절보다 더 평온한 시기였다. 나도 난생 처음 말년이라는 인생의 시기에 접어들면서, 로스 전기와 로스 자신도 업다이크의 경우와 비슷한 정보에 관한 일몰의 혜택을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스가 전기 작가에게 당부한 말은 "내 평판을 지켜주지 말아 달라. 나를 흥미롭게 만들어 주길." 하지만 로스의 말년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모든 암시적인 섹스조차 지루하다. 2018년에 출간된 소설 『비대칭』에서, 리사 할리데이가 가상의 인물인 에즈라 블레이저로 묘사한 로스의 모습은 그렇지는 않았다. 몸소 체험으로 얻은 자료를 가지고 작업한 그녀는 허구의 사치를 부렸다. 소설 속 남자는 부드럽고 재기 넘쳤고, 그에게서 볼 수 있는 상처는 몸통에 보이는 상처뿐이지, 비참한 이혼이 남긴 상처는 아니었다. 베일리는 사실에 입각한 장황한 서술에 집착한다. 불쌍한 노친네, 로스. 그는 부자였고, 유명했고, 외로웠고, 왠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흥분하고 있었다. 베일리에 따르면, 1950년대에 로스의 군대 내무반 동료였던 이가 비아그라의 핵심 성분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로스가 일흔여섯 살이 되자 비아그라는 더는 효능이 없었다.


배우 클레어 블룸과 이혼하기 전까지 로스의 인생과 경력에서 일어난 갈등은 너무나도 흥미로운 나머지 베일리가 글을 쓰지 않고선 배길 없게 만들 정도였다. 이에 비하면 지난 수십 년은 평온한 종막으로 읽힌다. 모든 당사자들을 자살의 가장자리로 몰아넣었던 로스의 두 번의 결혼 생활에서 온 고통은, 독자들이 그저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완전히 뒤엉켜 있는 힐난과 반론의 아수라장으로 나타난다. 독자는 이 저주받은 결합이 수십 년 전에 일어났다고 인식하면서, 어두운 섹스 코미디를 읽는 것처럼, 베일리의 이야기를 따라갈 뿐이다.(이런 식으로 책을 읽으면, 로스가 1975년 헝가리의 한 카페에서 꼬신 '낸시'라는 가명의 법률사무원처럼, 다소 불필요해 보이는 수많은 애인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낸시는 그녀가 나오는 글의 문단과 전환들이 무색무취한 것과는 달리, "당신의 글은 나를 미치게 해요!"라고 확신에 차서 말했다.) 1959년, 로스의 첫 번째 부인 마거릿 마틴슨은, 공원에서 임신한 여성의 소변을 사서, 자신이 낙태했다고 생각하도록 로스를 속였다. 그는 죄책감 때문에 그녀와 결혼했다. (가짜 낙태가 그 전에도 있었고, 그 후에는 두 번의 실제 낙태가 있었다.) 마틴슨은 로스가 십대인 딸과 잠자리를 한다면 그를 죽여 버리겠다고 끊임없이 위협했다(로스는 그런 일을 상상해본 적도 없는 듯하다.) 마틴슨은 이혼하기 전에 차 사고로 죽었는데, 그녀는 그를 다시 되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던 중이었다.(장례식이 끝난 후, 로스는 야도Yaddo 예술가 레지던시에 들어갔고 12일 만에 『포트노이의 불평』을 썼다.) 로스가 블룸과 더 이상 함께 잠자리에 들지 않은 시기부터 공식화한 재혼은, 로스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말았다. 이는 1996년 블룸의 회고록 『인형의 집을 떠났다』라는 결과를 낳았는데, 로스는 이 책이 그의 평판을 영원히 망칠까 봐 두려워했다. 이러한 관계들은 로스 소설 중 몇 편에서 문학적으로 각색되어 있다. 로스는 섹스와 성공의 음유시인만큼, 인간적인 불협화음의 음유시인이었다.




대공황 시대의 백인노동계급의 아들딸은 유년기에 겪었던 전쟁과 궁핍 이후에, 온 자유와 풍요가 얼마나 큰 축복이 될지 알지 못했을 터다. 로스가 보낸 뉴어크, 버크넬, 시카고 시절의 경험은 그의 책을 몇 권만이라도 읽은 독자라면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위퀘이크 출신의 훌륭한 유대인 소년들(그리고 많은 소녀들)은 모두 저명한 의사, 변호사, 치과의사, 교수, 정신과 의사, 공무직이 된 듯 보인다. 로스는 이 커리어주의자들의 대변인이자, 한데 묶었을 때 욕망이라고 불리는 자질, 그리고 개인적 야망과 수치심을 표현하는 복화술사였다. 로스가 유대인 전통에서 멀어진 것을 한탄한 어빙 하우는 그를 커리어주의자로 낙인찍었다. 트루먼 카포티는 투나잇 쇼에서 출연해 이 부분을 지적했다. 그리고 『성공하다』의 저자 노먼 포드호레츠는 자신이 무엇에 관해 쓰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옳은 말을 했다. 하지만 조소는 잘못됐다. 로스의 커리어주의는 미국의 전성기, 이른바 능력주의의 시대적 흐름 속에서 불가피했고, 그는 커리어주의의 이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로스의 작품에서 불거진 추문은 계층 상승 운동을 이상화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 파괴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인물들을 묘사하는 데 전념한 데서 비롯되었다. 로스의 소설에 관한 첫 번째 적대감의 물결, 즉 유대계 기득권에 대한 반유대주의적 혐의는 시간이 흐르고, 로스가 속한 해방된 세대의 세속적인 유대인들이 기득권층이 되면서, 희미해져 갔다. 여성혐오에 대한 비난은 로스의 출발점에서부터 항상 존재했으나 『포트노이의 불평』으로 최고조에 달했고,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말년의 로스는 제 소설 속 여성 캐릭터가 "입체"적인지 "평평한"지 논하는 지루한 토론을 피하기 위해 교실로 출강하는 일을 그만둔 것으로 보인다. 로스가 사망한 지 며칠 후, 뉴저지 유대인 출신의 X세대 소설가 데어라 혼은 뉴욕타임스의 추도문에서 로스 소설에서 여성만 제외하면, 모든 걸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고 썼다. 그녀는 "내가 아는 뉴저지의 유대인 여성들은 모든 분야에서 재능 있는 전문가였다. 그녀들은 로스가 성공하기 위해 꼭 필요했던 두 가지 직업, 그러나 그만큼의 존중을 받지 못했던 교사와 치료사라는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흔했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서 진정한 위대함을 성취한 로스는 이 여성들에게 영혼을 부여하는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재능 있는 전문가'가 되는 것과 '영혼'을 갖는 것 사이의 암묵적인 방정식은 오늘날의 문학적 태도를 잘 표현하고 있다. 영혼은 이력서보다는 사람들이 서로를 배신하는 방식, 사랑과 증오의 방식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더 높다. 작가의 이미지 관리는 이제 소설을 쓰는 행위 자체로 서서히 확산하고 있다. 더 많은 독자(와 비평가)가 작가와 그의 분신을 합치는 데 만족할수록, 더 많은 작가는 자신의 허구적 자아를 이상화하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 고백 문학은 자기미화의 오토픽션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미들브로우3 멜로드라마의 캐릭터는 감수성을 헤집지 않도록 세밀하게 조정된다. 어떤 곳에서는 악당과 피해자의 묘사가 납작해진 덕에 동시대 고딕서사의 독자들은 둘을 매우 손쉽게 구분할 수 있다. 이 같은 문제에 대한 사이비-정치적인 도덕화는 점점 더 많은 비평에 스며들고 있으며, 학대와 회복을 주제로 한 감상적인 치료서사에 문학상이 수여되고 있다. (작년 부커상 수상작 『셔기 베인』을 보라.) 로스는 감상적인 적이 거의 없었고, 등장인물들이 아무리 치료(당시에는 정신분석이라고 불렸던)를 받는다 하더라도, 어떠한 효과도 누리지 못했다.

로스는 유년기에 심어진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문화의 씨앗에 저항했다. 베일리는 때때로 비평가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냄에도 책의 주제로 바로 돌아와서(전기에서 『위대한 미국 소설』을 힐난한 윌리엄 개스를 "보복심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 속물"이라고 비난한 사람은 베일리인가, 로스인가?), 로스의 문학적 발전의 궤적을 추적하는 데 탁월하다. 로스가 (여느 훌륭한 커리어주의자처럼) 비평가들의 글을 집요하게 읽었고 종종 그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는 심지어 아나톨 브로야드한테까지 기탄없이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위대한 개츠비』의 낭만적 마법이, 소설 속의 분투하는 인물들에게 깃든 단편집 『굿바이, 콜럼버스』가 성공한 후, 헨리 제임스와 플로베르의 방법론에 헌신한 것은, 로스를 작가들의 작가로 만드는 데 위협이 됐다. 비평가들은 로스에게 코미디로 돌아오라고 말했다. 그는 『포트노이의 불평』으로 다시 유명해졌다. 『유방』과 『위대한 미국 소설』에서 취한 풍자적 과잉 이후 자서전으로 돌아간 그는 점차 메타픽션적 접근 방식을 연마해 『유령 작가』, 『카운터라이프』, 『샤일록 작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새바스의 극장』은 섹스라는 초기 주제와 죽음이라는 후기 주제를 융합한 걸작이다. 자서전과 역사를 결합한 미국 3부작으로 전성기를 누렸던 로스는, 마지막 작품 활동 시기에 만가적인 죽음에 집착하는 소설로 후퇴했다.


읽기 쉽게 잘 쓰여서 눈을 뗄 수 없는 이 토템 같은 전기에 이르는, 매우 정교히 관리된 로스의 커리어는 젊은 작가들이 문학적 스타덤에 오르기 위한 청사진으로 참고할 만하다. 교훈은 다음과 같다. 결혼하지 마라. 아이를 갖지 마라. 일찍부터 변호사를 선임하라. 표지 디자인을 철저히 통제하라. 비평가들의 말을 경청하되 공개적으로 그들을 멸시하라. 출판사에 관한 한 돈을 따르라. 당신에 적대적인 인터뷰어에겐 절대 일분도 시간을 내주지 마라. 당신을 실물 그대로 찍는 사진작가를 피하라. 자신이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걸 계속하고, 사람들이 추측할 수 있을 만큼의 변화만 주면서 책을 계속 출간하라. 친구를 팔아라. 가족을 팔아라. 연인을 팔아라. 자신을 팔아라. 모든 신진 작가가 당신을 따라한다고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하라. 모든 적이 죽을 때까지 멈추지 마라.



크리스천 로렌첸은 뉴욕 브루클린에 거주하는 작가로 US위클리, 뉴리더, 하퍼스, 런던리뷰오브북스 등에서 편집자로 일했으며 n+1, 파이낸셜타임스 등에 기고하고 있다.


번역자 강덕구는 작가로 『밀레니얼의 마음』과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을 썼다. 팟캐스트 '회랑'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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