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이슈 테크 서평

빅테크는 성장기의 뇌를 어떻게 망가뜨리나

조너선 하이트의 신간 '불안한 세대'는 스마트폰이 어떻게 10대들의 정신을 훼손했는지 보여주면서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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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5 14:10

New States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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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업계의 상품이 청소년에게 미치는 악영향에 대한 논의는 여태까지는 SNS로 인한 우울증 등 정신건강적인 측면을 다루는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국내에도 많은 저작이 소개된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이번 신간에서 훨씬 본질적인 문제를 파고 듭니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는 인격은 물론이고 전반적인 인지 능력의 형성에 매우 중요한 시기인데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는 게 '본질'이 된 IT업계 상품에 아이들이 무방비로 노출되면서 '집중력'을 상실한 세대가 나오고 있다는 겁니다. 한국의 교육현장에서도 집중하는 법을 잃어버린 아이들에 대한 증언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더욱 역설적인 것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의 주의력을 빼앗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빅테크 기업 임직원들은 정작 자신들의 자녀는 (본문에서도 언급되는 발도르프학교 같은) IT기기 사용이 엄격히 통제되는 환경에서 교육을 시키고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추세는 이미 십여 년 전부터 관측되던 것입니다. 사회가 제대로 대처하지 않으면 미래는 부모의 재력이 뒷받침된 적절한 교육 환경을 통해 집중력을 온전히 유지한 '인지 엘리트cognitive elite'와 스스로 생각하고 집중할 능력을 잃어 인지 엘리트들에게 정치적·경제적으로 예속되는 '인지 프롤레타리아'로 양분될지도 모릅니다.


하이트의 이번 저작 또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애틀랜틱은 8000단어 이상을 할애해 하이트의 책 내용을 소개하는 기사를 냈습니다. PADO는 하이트의 신간을 다룬 뉴스테이츠맨의 서평을 소개합니다.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프로 스포츠 선수 출신인 필자 에드 스미스는 하이트의 핵심 주장과 자신의 관점을 간명하게 요약해 전달하고 있습니다.



나는 최근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의 극단적인 사례를 목격했다. 런던으로 향하는 붐비는 기차에서 한 10대 후반의 청소년이 공황에 가까운 극심한 불안을 겪고 있었다. 점점 더 심해지는 동요에 시달리던 그는 (통제된 호흡 같은) 학습된 대처법을 반복하더니 결국 항상 주머니에서 물건을 미친 듯이 찾아 헤매는 것으로 끝났다. 그 물건은 바로 아이폰이었다. 이 시점에서 아이폰은 평소처럼 삑삑거리고 번쩍이며 윙윙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터치스크린을 급하게(그러나 산만하게) 훑어보고 스크롤하며 쓸어내리는 과정이 잠시간 심리적 해방감을 선사했다. 그러나 이는 곧바로 새로운 불안과 함께 새로운 불편함의 순환으로 이어졌다.


표면적으로 그의 아이폰은 과도한 불안을 해소하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런 과도한 불안의 순환을 자극하고 있었다. 스마트폰은 치료제인 척하지만 질병에 더 가까웠다. 내가 소설가였다면 도입부로 이보다 더 적절한 장면을 찾지 못했으리라. 오늘날 우리가 사는 방식, 기술이 사람들에게 한 일, 우리의 당혹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데 이만한 장면이 없을 것이다.


뉴욕대학교의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사회과학자의 도구를 사용해 이 주제를 다룬다. 스마트폰 중독이 어떻게 전례 없는 정신질환 폭발을 일으켰는지, 특히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되던 시기(2000년대 후반과 2010년대 초반) 10대에 접어들었던 세대에게 그 영향이 컸음을 보여준다. 하이트는 이 세대가 사실상 빅테크 기업의 잔인한 실험에 기니피그처럼 제공되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우리는 스마트폰, 특히 SNS가 10대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불안한 세대'는 고통스러운 분석과 실용적인 조언을 더해 스마트폰이 남기는 지속적인 피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이트는 최근 수십 년을 사람의 건강한 성장을 뒷받침하는 습관에 대한 융단폭격이 있었던 시기였다고 묘사한다. 첫째, 우리는 실제 세계의 위험을 과대평가해 부모들이 아이들의 놀이와 독립적 행동을 지나치게 조심스럽게 제한하게 만든다. 부모들은 길거리의 현실에 대해 너무 겁에 질린 반면, 10대들이 가상세계에서 노출되는 진짜 위험에 대해서는 너무 안이했다.



하이트는 '놀이 중심의 어린 시절'(감소 추세)과 '휴대폰 중심의 어린 시절'(증가 추세)을 대조한다. "어린 시절에는 놀이가 곧 일이다." 하이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모든 유년기 포유동물은 같은 임무를 갖고 있다. 활발하게 자주 놀면서 뇌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놀이는 (큰 위험 없이) 실수를 저지르고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법을 배우는 장이다. 무정형의 환경에서 실수를 저질러 보지 않으면 우리는 안티프래질리티1antifragility를 기르지 못한다. 하이트는 이를 1980년대에 만들어진 폐쇄형 인공생태계에 비유한다. 인공생태계의 설계자들은 많은 나무들이 빨리 자라다가 성숙하기 전에 쓰러지는 것을 발견했다. 무엇이 빠졌을까? 바람이었다. 바람이 주는 스트레스 아래서 나무 뿌리는 더 강하게 자라고 나무 세포는 딱딱함을 보다 발달시키고, 그러면서 '이상재異常材(stress wood)'라고 부르는 변형된 상태가 된다. "이상재는 어린이에 대한 완벽한 은유"라고 하이트는 결론 내린다.


그러나 체계 없는 무정형의 놀이는 구석구석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상상하는 '헬리콥터 육아'에 의해 훼손되었다. "우리는 실제 세계가 위험으로 가득 차 있어서 어린이들이 어른의 감독 없이는 탐험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1990년대 이후 범죄, 폭력, 음주운전 등 대부분의 다른 요인으로 인한 어린이 위험이 급격히 감소했음에도 말이다. 동시에 온라인에 아이들의 연령에 맞는 가드레일을 설계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너무 귀찮은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이 위험으로 넘쳐나는 가상세계의 무법지대를 자유롭게 배회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온라인에 넘쳐나는 위협은 단지 익명의 잠재적 범죄자 뿐만이 아니었다. 재앙의 일상화이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여러분의 시간과 주의력을 우리에게 최대한 많이 소비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페이스북의 전 사장 숀 파커Sean Parker는 2017년 이렇게 물었다. SNS 기업들은 10대들의 부주의함을 조종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려는 타고난 욕구(특히 10대 소녀들의 정신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를 이용하는 법을 배웠다.


조너선 하이트의 '불안한 세대' 표지. /사진제공=Penguin Random House

조너선 하이트의 '불안한 세대' 표지. /사진제공=Penguin Random House


하이트는 커트 보네거트의 1961년 단편 소설 '해리슨 버거런'을 인용하는데 이 소설은 어떤 분야에서든 뛰어난 것(따라서 반평등주의적인 것)이 불법이 된 미국의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특출나게 똑똑한 사람에게 '핸디캡'을 주는 데 선호되는 무기는 지속적인 집중력을 방해하기 위해 약 20초마다 윙윙거리는 이어폰을 착용하게 하는 것이다. 주의력을 흐트러뜨리는 것이 지능을 평준화시키는 도구다.


10대들 사이의 SNS와 휴대폰 중독은 이 모든 것은 물론이고 그 이상을 달성한다. 하이트는 어떤 습관의 경우, 10대 때 익히지 않으면 성인기에는 영영 잃게 됨을 보여준다. 하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10대의 뇌는 자기투사적 나르시시즘과 끊임없는 피상적 콘텐츠라는 SNS의 협공에 내맡겨졌을 때 실제세계에서의 회복력과 대처 전략을 개발하지 못하게 된다.


한번 닫힌 문은 다시 열 수 없다.우리 모두 경험과 관찰을 통해 알고 있듯이, 인간의 수용성(나아가 성장)은 선형적이지 않다. "그것은 시멘트가 굳어가는 것과 같다." 하이트는 주장한다. "너무 젖은 상태의 시멘트에 이름을 쓰려고 하면 금방 사라진다. 반면에 시멘트가 마를 때까지 기다리면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한다. 하지만 젖은 상태와 마른 상태의 전환기를 포착할 수 있다면 당신이 쓴 이름은 영원히 남게 된다."


내가 18살에 프로 크리켓 선수가 됐을 때, 한 훌륭한 코치가 최고의 선수와 평범한 선수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별화 요소인 '집중력'에 대해 설명해 준 일이 있다."집중력이란 불필요한 생각이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집중하는 것, 정말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득점과 경기 승리 같은 것 뿐만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성공'과도 연관이 있음을 깨달았다. 지속적인 주의집중 상태는 기분, 나아가 행복과도 높은 상관관계가 있었다. 많은 전직 스포츠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주고 받던 농담과 흥분도 그립지만 집중력이 더 그립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10대에 집중력을 배우지 않으면 아마도 평생 배우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하이트의 책 핵심에 있는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SNS는 사람의 성격과 성취를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회복력과 주의력의 조합에 교활한 '방해물' 역할을 한다. 1890년 윌리엄 제임스는 주의력을 "어떤 것을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 다른 것들로부터 물러나 침잠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역으로 초점과 주의력의 부재는 우리를 "혼란스럽고 현기증 나며 정신산만하게" 만든다. 윌리엄 제임스가 130년 후에 글을 썼다면 여기에 "다음 페이스북 글을 보기 위해 멍하니 스크롤하는 일에 잘 준비된"이라고 덧붙였을지도 모른다.


정부가 젊은 재능을 짓누르는 과중한 세금을 고안하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하더라도 실리콘밸리가 이미 달성한 것보다 더 나은 방안은 찾지 못했으리라. 그래서 테크 기업 경영진들은 자기 아이들은 그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열심히 강매하는 디지털 마약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한다. "휴대폰이 없는, 심지어 스크린도 없는 교육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는 많은 테크 기업 경영진들이 자신의 자녀를 어느 학교로 보내는지로 알 수 있다." 하이트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예를 들어 모든 디지털 기기(휴대폰, 노트북, 태블릿)가 금지된 페닌슐라발도르프학교2Waldorf School of the Peninsula 같은 곳 말이다."(물론 이들은 덜 특권층의 학교가 정반대의 선택을 해 '영원히 마음이 콩밭에 있는' 10대 세대를 만들면서 이익을 얻도록 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나는 7년 전 이 지면에서 비슷한 지적을 했다. "이 이분법은 다음 세대를 규정할 것이다. 훈련된 사람들이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중독을 만들어내고, 그 의존성에서 이익을 얻는 것 말이다." 하이트의 책은 당시 나의 지적이 내가 바란 것보다 더 옳았음을 시사한다. 같은 글에서 나는 펑트Punkt의 창업자 페터 네비Petter Neby를 언급했는데, 펑트는 현대식 '덤dumb'폰(전화 걸고 문자보내는 용도로만 사용 가능한)을 제조하는 테크 기업이다. 네비는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일정 수준의 지루함이 창의성으로 향하는 교량이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피상적인 사소함에 흥미를 느끼기만 하면(SNS에서 하듯이) 우리는 결코 완전한 상상의 세계로 건너가지 못한다. 창의성에는 자극 뿐만 아니라 여백도 필요하다. 세상은 사실 당신의 포켓 속에 없다. 하지만 포켓에 들어 있는 게 당신이 세상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못하게 막을 수 있다.


하이트가 자신이 묘사하는 이 '팬데믹'을 해결하기 위한 처방으로 무엇을 제시할지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고등학교 전까지는 스마트폰 없음, 16세 전까진 SNS 없음, 휴대폰 없는 학교, 어른의 감독 없는 놀이 시간과 어린 시절의 독립성 대폭 확대." 또래 압력 때문에 불가능할까? 분명 힘들 것이다. 하지만 부모들은 힘을 모아 자신들의 집단행동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정부 정책은 어떨까, 이젠 너무 늦었나? 하이트는 결코 늦지 않다고 말한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후 그들은 적어도 두 자매선을 개조했다.


스마트폰과 SNS로 인해 (책의 부제가 말하듯) 뇌의 구조가 정말로 바뀌는 걸까? 아니면 하이트가 여기서 과학과 은유를 흐리고 있는 것일까? 책을 읽은 독자의 판단은 학술 연구에 대한 평가 보다는 하이트가 어느 정도 옳은지에 대한 독자의 직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나는 하이트가 옳다고 생각한다.) 그의 마지막 비유는 아이들의 삶 속에 디지털 기술이 확산되는 것을 두고 우리들의 집으로 스며드는 연기 같다고 묘사한다. 우리는 분명 위험을 감지한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그에 대해 뭔가를 크게 할 만큼 강하게 느끼지 못한다. 하이트는 바로 그걸 바꾸고자 하는 것이다.


결론이라기보다는 방백에 가깝지만 하이트의 책은 나에게 다른 것을 생각하게 했다. 우리의 디지털 생활 방식은 내면뿐만 아니라 외면에서도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다. 세계 최고의 인재들은 사람들이 네모난 화면을 들여다보며 인생을 낭비하게 만드는 기술을 완벽하게 하는 게 목적인 회사들에게 매수되었다. 그들은 삶을 가져가 투박한 데이터 사료로 만든다. 참으로 대단한 유산이다. 실리콘밸리가 무능한 도시계획가들이 시작한 일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먼저 도시들을 거대한 순환도로로 바꾸고, 그 주민들에게 침실에서 인스타그램을 먹이는 것이다.


작년에 나는 7살 딸과 함께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에서 저녁을 보냈다. 우리는 저녁식사를 위해 광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우린 진짜의 장소에서 진짜 즐거움을 느끼는 진짜 사람들로 이루어진 무리 속의 두 사람이었고, 특별히 뭔가를 찾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형언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얻고 있었다. 500년 전에 세워진 공공공간이 피자 두 판 값 밖에 안 되는 돈을 낸 두 외국인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었다. 당시에는 더할 나위없이 좋아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 시간들이 이제는 달콤쌉싸름하게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르네상스적 야심의 장엄함과 덧없는 인간을 위한 지속적인 인간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끊임없는 욕구를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오늘날 사실상의 사회 설계자들의 냉소적인 비전을 느꼈다. 클릭을 유도하는 미끼로 가득한 황무지와 그로 인한 도파민 쾌락, 몸을 잃은 삶, 포장돼 최고 입찰자에게 재판매될 무분별한 데이터의 궤적 외에는 남겨질 것이 없는 삶, 공허해진 공공 광장, 실제세계에 남은 것을 평평하게 격하시키는 양식화된 가상세계를 느꼈다.


우리 모두 곧 죽을 것이라고 말하는 게 진부함을 안다. 하지만 뭔가를 남기는 게 좋지 않을까? 아마도 그 허전하고 죄책감 드는 느낌이 집단불안의 또 다른 동인일 것이다.



에드 스미스는 스포츠인문학연구소Institute of Sports Humanities 소장이다. 프로 크리켓 선수로 잉글랜드 크리켓 대표 선발위원을 역임했다. 뉴스테이츠맨, BBC, 선데이타임스에 기고한 바 있다.


1913년 창간돼 케인스, 버트런드 러셀, 조지 오웰, 버지니아 울프 등이 기고했던 전통 있는 영국 진보 주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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