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22 17:04
우크라이나 남부의 도시 헤르손을 영원히 점령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러시아 군대는 점령한 지 8개월이 된 작년 11월, 헤르손을 포기하고 드네프르강을 넘어 남쪽과 동쪽으로 철수해버렸다. 러시아군이 헤르손의 박물관에서 약탈한 대량의 문화재도 함께였다.
헤르손의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미술품이 인근의 크름반도로 반출됐다. 러시아가 2014년 우크라이나로부터 무력으로 병합한 곳이다. 크름 지역의 한 미술관 관장은 약탈 미술품이 자신의 미술관에 "보관"돼 있다고 자유유럽방송(RFE)에 말했다. 하지만 헤르손의 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스키타이, 사르마트, 고트, 그리스(모두 러시아 제국 등장 수백 년 전 흑해와 아조프해 부근에 살던 민족이다)의 고대 공예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헤르손 과학도서관의 귀중한 장서 수백 권도 행방이 묘연하다.
우크라이나의 소장품 관리자와 큐레이터들은 사라진 소장품의 행방과 그 손실 규모를 파악 중이다. 이들은 러시아의 미술품 약탈을 나치 독일의 만행에 비견했다. 나치 독일도 1941~1944년, 3년 가량 우크라이나를 점령하면서 헤르손의 박물관을 약탈했었다. 이들은 오히려 이번 러시아의 약탈을 더 악랄하게 여겼는데 특히 배신감 때문이었다. 러시아인에 대한 배신감도 물론이지만 더욱 큰 배신감은 밀고자, 부역자가 된 동료들 때문이었다. "러시아인은 자신들이 우리의 형제라고 말했어요." 내가 수도 키이우에서 인터뷰했던 알리나 도첸코(Alina Dotsenko)의 이야기다. 그는 오랫동안 헤르손 미술관 관장으로 일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 것은 "같은 동료들이 우리 미술관 약탈을 도왔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반대로 적의 약탈 계획을 막고 소장품과 문헌을 지키려 애쓴 이들의 용감한 저항도 있긴 했다.
그러나 헤르손이 해방된 직후 11월 11일, 도첸코가 약탈당한 수장고에 들어갔을 때 그는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1만4000점이 넘는 소장품 중 적어도 1만 점이 사라졌더군요."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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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3월 초 러시아 침략군이 헤르손을 점령한 직후에는 도첸코 관장과 임무에 충실한 직원 한나 스크리프카(Hanna Skrypka)가 꾀를 내 소장품을 지킬 수 있었다. 점령군에게 미술관 리노베이션 공사로 소장품이 모두 외부로 반출된 상태라고 둘러댔다. 미술관은 건설용 가설물에 둘러싸인 상태였지만 사실 미술품은 미술관 지하실에 보관중이었다. 소장품 중 오래된 성화(聖畵)에 사용된 값비싼 금, 은 액자는 아예 금고 안에 넣어 보관하고 있었고, 스크리프카가 그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핑계가 3개월 간 먹혀들자 도첸코, 스키르프카와 같은 생각을 가진 동료들은 러시아가 자신들의 꾀를 영원히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배신자가 나타났다. 전직 미술관 직원 둘이 러시아 연방보안국1에 미술품이 지금도 건물 안에 있다고 밀고했다고 도첸코는 설명했다.
작년 5월 5일, 러시아 검찰은 도첸코를 소환했다. "새로운 권력이자 영원히 헤르손을 통치할 러시아에 대한 존중을 가르쳐주겠다더군요." 도첸코는 말했다. "구속되기를 기다리느니 도망쳐야겠다싶어 우리 박물관의 전체 소장품을 담은 디지털 아카이브를 몸에 숨겨 오데사로 향했습니다."
그가 도망친 후, 러시아는 나탈리아 데샤토바(Natalia Desyatova)를 새 관장으로 임명했는데 원래 동네 카페에서 가수로 일하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도첸코와 스크리프카에 따르면 남아있던 박물관 직원들은 끝까지 우크라이나편에 서서 도망친 소장품 담당 부장 및 직원들과는 절대 연락하지 않겠다고는 서면 서약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나이 지긋한 여성으로 미술관 도서고 책임자였던 갈리나 악슈티나(Galina Aksyutina)는 위험을 무릅쓰고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사랑 받는 작가로 손꼽히는 타라스 셰브첸코(Taras Shevchenko)의 매우 귀중한 시 선집 <코브자르(Kobzar)>의 1840년 초판을 빼돌렸다. 러시아 경비병들은 노파가 그렇게 용감한 행동을 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는지 그를 수색하지 않았다.
과학도서관에서도 마찬가지로 극적인 일이 있었다. "러시아의 점령 초기 며칠간 우리는 가장 귀중한 책들을 건물 지하에 감추려 했습니다." 나데즈다 코로툰(Nadezhda Korotun) 도서관장이 말했다. "하지만 무장한 FSB 요원들이 매주 몇 차례 우리 도서관에 와서는 헤르손과 주변 지역의 상세 지도를 요구하면서 잠궈둔 문을 부쉈어요." 코로툰은 도서관 직원들에게 구하기 어려운 고서적들을 가능한 한 많이 각자의 집으로 가져간 후 러시아 점령지 밖으로 반출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러시아군이 헤르손에서 오데사로 가는 도로의 검문소 여러 군데에서 지나가는 모든 자동차를 세워서 검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0월 말 우크라이나군이 헤르손을 되찾기 위해 움직이자, 러시아의 조직적인 약탈이 시작됐다고 스크리프카는 말했다. 러시아가 임명한 신임 데샤토바 관장은 스크리프카에게 11월 1일 출근하라고 했다. 미술관에 들어선 순간, 그는 후회했다. 박물관은 러시아인으로 가득했다. 군복 차림의 무장한 체첸인 두 명은 자신들이 FSB 요원이라고 했다. "정말 많은 사람을 죽였을 것 같은 모습이었어요." 스크리프카는 말했다. "그들이 노려보자 살갗이 얼어붙는 느낌이었습니다."
이후 48시간 동안 스크리프카는 사실상 감금된 상태였다. 데샤토바는 스크리프카에게 약탈하는 미술품의 목록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자신을 러시아 문화부 관계자라 소개한 모스크바에서 온 인물에게 줄 것이었다. "심지어 미술관의 부역자들도 그에게 8000점 정도에서 멈춰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더 많은 미술품을 원했어요." 스크리프카의 말이다. "충분히 가져가지 않으면 윗선에서 화를 낼 거라고 하더군요." 약탈꾼들은 금과 은으로 장식된 성화 액자가 든 금고를 열도록 스크리프카를 강요한 후 금고를 털었다. 그는 약탈을 막지 못했으니 적어도 목격자가 돼야겠다고 다짐했다. "제 눈과 귀로 모든 걸 기억하겠다고 결심했죠."
원래는 미술박물관이라 불렸던 이 미술관은 1912년에 개관했는데, 바실리 페로프, 미콜라 피모넨코, 바실리 폴레노프, 이반 아이바조프스키, 이반 쉬슈킨, 일리야 레핀 같은 당대의 유명한 우크라이나, 러시아 미술가의 작품을 주로 전시했다. 나치 독일 점령기에 헤르손의 고고학적 유물들과 미술소장품들이 약탈됐는데 그 소재 파악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되찾은 것은 그중에서도 일부에 불과했다고 도첸코는 말했다.
1960년대 후반, 미술관에 행운(도덕적으로는 애매한 것이었지만)이 찾아왔다. 레닌그라드에 살고 있던 마리아 코르닐로브스카야(Maria Kornilovskaya)라는 열정적인 미술품 소장가가 자신의 고향인 헤르손에 수백 점의 작품을 기증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코르닐로브스카야가 자신의 소장품을 수집한 방식은 미심쩍은 것으로 일종의 약탈과 같았는데 어쨌든 그 덕분에 2차세계대전 중 파괴되었을지도 모를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들의 작품 수십 점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코르닐로바스카야는 1941~44년 레닌그라드 포위전 동안 죽은 사람들(대부분 굶어 죽었다)의 집에서 명화들을 비밀리에 수집해 자신의 아파트에 숨겨두었다. 훗날 미술품 수집가들이 좋은 가격을 제시했지만 그는 자신의 보물을 파느니 굶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덕분에 헤르손은 코르닐로바스카야에게 500점이 넘는 미술품을 기증 받을 수 있었다.
1978년, 헤르손의 미술품은 새 보금자리를 찾았다. 한쪽 귀퉁이에 높은 첨탑이 있는 우아한 19세기 건물이었다. 그 후 수십년 동안 이 미술박물관은 십 수개 국가에서 수집한 수천점의 그림과 함께 조각, 그래픽, 장식 작품들을 소장목록에 추가했다.
82세의 미술사학자 드미트로 고르바쵸프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미술품 약탈을 지시한 게 놀랍지 않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러시아 정부는 1938년 키이우 성 미카엘 수도원의 역사적인 모자이크 작품 일부를 모스크바 트레탸코프 미술관에 설치했던 적이 있었다. "25년 후에 러시아 정부가 가져간 모자이크를 키이우에 돌려달라고 요청했었는데 제 생전 가장 불쾌한 답장을 받았죠. 그 모자이크가 자기네 소유라는 겁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예술품을 자신들 것처럼 여기죠. 미안하지만 소련이 사라진 이후엔 우리 땅 위에 있는 건 모두 우리 것이고, 그러므로 러시아가 저지른 일은 도둑질입니다." 고르바쵸프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미술품 경매에서 이 (훔쳐간) 미술품이 자신들의 소유물임을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할 겁니다."
러시아는 미술관을 털기 며칠 전에 길 건너에 있던 민속박물관의 전시물을 털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기 전 이 민속박물관에는 18만 점이 넘는 소장품이 있었고 이 지역에서 발견된 기원전에 주조된 화폐가 8000점 이상 있었다. "11월 17일에 우크라이나 보안국 요원과 함께 민속박물관에 들어가보니 진열대가 깨져있고 전시관이 엉망이 돼 있더군요." 박물관의 올가 곤차로바 관장의 말이다. "약탈자들은 문화가 뭔지도 모르는 야만인이었습니다."
역사학자이자 과학자인 곤차로바는 40년간 이 박물관에서 연구를 했다. 그는 2차세계대전 시기를 주로 연구했는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에는 소련 병사들이 집으로 부친 편지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작년 3월 거리에서 한 행인이 자신에게 경고의 소리를 쳤던 걸 떠올렸다. "러시아 전차가 오고 있어요!" 곤차로바는 당시 공교롭게도 소련 전차가 헤르손을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시킨 1944년의 편지들을 읽고 있던 중이었다. "정말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러시아 전차가 온다는 게 가장 기쁜 뉴스였는데 말이죠."
고대 스키타이의 황금 공예품을 포함한 소장품들이 약탈된 걸 가슴 아파하며, 곤차로바 관장은 오랜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주인을 바꿔온 헤르손의 역사를 곰곰히 생각했다. 도난당한 소장품의 값어치는 가늠하기 어렵다 한다. "어떤 건 가격을 매길 수도 없을 정도로 귀하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그가 연구해온 역사는 그에게 다시 희망을 준다. 역사는 우크라이나 땅 위를 거쳐간 수많은 군대가 파괴를 남기고 가면 언제나 과거를 기록하고 문화적 유산을 되살려내려는 노력이 뒤따른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헤르손 미술관에 따르면 전쟁 전 근무하던 13명의 직원들 중 7명이 러시아 점령자들의 약탈을 도왔다고 한다. "이 일곱 명의 직원 중 여섯은 헤르손을 떠나 크름으로 갔고 나머지 하나는 아직도 헤르손에 있는 걸로 확인됐습니다." 도첸코 관장의 말이다. 러시아가 임명한 관장인 데샤토바는 퇴각하는 러시아군과 함께 헤르손을 떠났고, 현재 우크라이나 경찰이 수사중인 피의자 명단에 올라있다.
헤르손 문화유산의 유지와 배신에 대한 이야기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침략군으로부터 수복한 지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우화라 할 수 있다. 이미 작년 8월 중반에 우크라이나 경찰은 약 1200건의 부역 행위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이라고 발표했다. 한편 수십 년 전에도 헤르손의 큐레이터들이 했던 미술관 소장품 되찾기 작업이 새로이 시작됐다.
"전 세계에서 지지와 성원을 받고 있습니다. 저희는 희망을 갖고 있어요." 곤차로바 관장의 말이다. "우리 소장품은 다시 늘어날 겁니다. 모든 부역자와 약탈자가 떠나고 나니 여기가 더 깨끗해진 것도 같고요."
2월 20일은 2차 세계대전 이래 유럽에서 벌어진 최대 규모의 전쟁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1주년입니다. PADO는 정치, 외교, 군사, 경제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 전쟁의 이면을 들춰보는 기사를 소개합니다. 이번에는 러시아가 점령지에서 약탈한 우크라이나 미술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포탄이 떨어지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와중에 미술품이 뭐 그리 중요하냐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화재 또한 국민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요소이지요. 자국의 미술품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우크라이나 국민이 있는가 하면 점령군에게 숨겨진 미술품의 위치를 귀띔해주는 '부역자'도 있습니다. 8개월 정도 러시아의 점령을 받았다가 수복된 헤르손 지역에서는 이런 부역자들을 색출하는 작업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민한 독자라면 한국 현대사의 그늘에도 비슷한 사례가 많았음을 떠올릴 겁니다. 전쟁은 군대가 격돌하는 전선 뿐만 아니라 평범한 국민의 삶 속에서도 벌어진다는 진리를 엿볼 수 있는 애틀랜틱(Atlantic)의 1월 21일자 기사를 전문(全文) 번역으로 소개합니다.